본명은 민자영. 조선고종의 정비이자 조선의 마지막 군주 순종의 어머니. 숙종의 모친이었던 '명성왕후' 김씨와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하자.
국모로서 재위하던 기간 중 실정이 많은 까닭에 까가 제법 많으며, 특히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에서는 민자영이란 본명으로 불리며 까인다. 일반적으로 '명성황후'(옹호측, 공식명칭)와 '민비'(비판측)로 나뉘어 불리나, 엔하위키에서는 양자의 입장을 모두 취합하여 항목명에 모두 기술한다.
독일의 사진작가가 찍은 것으로 크게 관심을 받고 있는 사진. 궁녀 논란을 빚는 위 사진에 비해 Die Ermodete Königin(시해당한 왕비)라는 주석이 붙어 있어 가능성이 높은 사진으로 주목받고 있다. 명성황후를 실제로 본 이들의 목격담과 싱크로도 훨씬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진이 교과서에 오르긴 힘들겠지
명문가인 여흥 민씨의 자손으로 여주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자영[2]이었다고 하며, 아버지 민치록은 그녀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왕비를 물색하던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하던 찰나, 자신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에 따라 아내의 먼 친척인 그녀를 간택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일가친척이 별로 없어 외척이 득세하지 못할 것이며, 득세한다해도 소수파벌에 불과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상 왕비 간택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신정왕후 조대비(효명세자의 부인)의 삼간택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무척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고아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민치록은 살아 있을 당시 벼슬을 지냈고, 일단 여흥 민씨는 명문가[3]다. 이 때문에 실제 그녀를 고종의 아내로 삼은 흥선대원군의 의도는 약간 달랐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와 가까운 친척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어머니가 여흥 민씨 집안 사람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도 먼 친척 관계가 된다. 그래서 대원군 자신이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안을 외척으로 맞아들어, 외척의 발호를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의 사이는 시간이 갈수록 틀어져, 결국 견원지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관계가 소원하여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을 무렵, 고종의 총애를 받은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원자로 책봉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야사에 따르면, 완화군을 원자로 삼자는 여론이 형성 될 무렵 민씨가 득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묘안증후군으로 추정되는 기형아였고, 태어난 아이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은 흥선 대원군은 아기의 건강 회복을 위해 산삼을 달여 먹도록 지시했다. 달인 산삼을 먹은 아기는 얼마 후에 돌연 급사 하였으며 명성황후는 이를 흥선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아기를 죽인 것이라 주장, 흥선 대원군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었다고 한다. 아기가 죽은 후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대노선에 나선 명성황후는 흥선 대원군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정치세력화 하였고 고종을 부추겨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공동정치체제를 부정하는 친정선언에도 어느정도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명성황후의 개입이 어디까지었냐는 것엔 논란이 많다. 주로 알려진 야사에선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하다시피 부렸다고 말하며 명성황후의 막후통치설을 주장한다.
문제는 위의 이야기가 야사에만 있고, 그 기록에서도 명백한 계기나 근거라 할 만한 설명이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왕권강화을 하려던 대원군의 입장에서 후대 왕의 권위에 문제를 줄 수 있는 서자를 성급하게 왕세자로 책봉해야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고종의 첫 아이기 때문에 유난히 완화군을 귀여워했다고 해도, 명성황후가 낳은 아이 역시 그의 손자인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고종의 첫 적자로서 왕세자가 될 아기를 죽일 이유는 더더욱 없는 일이고. 이걸 생각해보자면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을 거라 의심하는 건 지나치다. 일본인들에 의해 기록된 자료에는 위의 이야기와 달리, 내정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낀 고종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고 이 과정에서 민씨의 파벌을 키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나와 있다. 실제로 대원군 실각 이후의 실제 대립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이 아니라 고종과 대원군을 중심으로 문제가 커졌기에 야사에서의 이야기보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 와중에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에 관한 소문 등이 널리 퍼진 것은 확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을미사변 시기 대원군이 동원되기도 하지만, 대원군이 주도했기는커녕 보조한 흔적도 없다. 차라리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인척관계 외 다른 연결고리가 있었으나 그 고리가 끊어지게 되면서 소원해졌다거나, 고종과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지고 고종의 처가인 민씨 일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고종의 아내인 명성황후 역시 대원군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해석이 신빙성이 높다.
또한, 이 둘의 대립이 심했다는 이야기는 원래 일본의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야사로 발전했다는 추측도 있다. 이렇게 추측하는 학자들은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일본이 명성황후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과장해서 퍼뜨린 이야기라고 본다.
고종의 친정선언으로 인해 흥선대원군과 그 파벌이 정권의 중추에서 밀려난 뒤, 공백에 가까운 중추세력을 명성황후가 불러들인 민씨 일파가 잡게 되고 명성황후의 권력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본래 소수 파벌이었던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친척들을 동원하여 매관매직에 참여, 파벌의 덩치를 순식간에 불리었고 이 행위를 명성황후가 눈감아 주어 단기간에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4].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민씨일파가 흥선 대원군의 잔존세력들을 거의 다 제거 해 사실상 권력교체가 완료될 즈음 일본이 강화도에 쳐들어온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선은 급격한 근대화를 시작한다.
이 근대화를 핑계로 자신들의 세력을 굳건히 한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기 시작했고 결국 1882년, 신식군대별기군에 대한 과도한 우대에 격앙한 구식군대들의 반발과 일반 백성들의 분노가 모여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를 선두로 민씨 일파는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며 이 피신사건이 대대적으로 알려져, 사실상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다.
그런데...강화도조약에 대해선 이런 말도 있다. 조선 궁중 외교비록인 '선유실록'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강화도조약에 반발했으나 좌파당성 1군수 김현참 종1품을 비롯한 유생들이 명성황후에 강하게 반발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려 통과되었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노골적인 러시아의 개입을 허락하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으로 잠입시켰으며 잠입에 성공한 낭인들은 옥호루에서 명성황후의 살해에 성공하고, 그 시체를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이는 을미사변이란 이름으로 기록된다.
흔히들 일본 공사 미우라와 일본 낭인들이 주축이 되어 암살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당시 조선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훈련대와 시위대가 각각 경복궁 공/방의 주역이었다고 보는게 맞다.
민비 친위세력의 대표격인 훈련대장(연대장급) 홍계훈이 지 부하들조차 통제 못하고 시위대 1개 중대 병력을 끌어모아 경복궁 수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당시 민심이 민비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나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보면 그나마 한성에 있던 신식군대 중 절반을 넘는 규모를 일본 교관한테 훈련받았으니까 니들도 일본놈이라는 논리로 한순간 실직자로 만들어버렸으니, 임오항쟁을 겪고도 정신 못차렸던 거다.
하지만 일본은 이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발생 당시 세간의 관심도 그리 받지 못했다. 또한 2009년 전까진 일본의 모든 언론기관이 을미사변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았다.
1894년 흥선대원군과 영선군은 함께 뻔질나게 일본 대사관에 출입하며 명성황후를 폐출하는데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 1895년에도 흥선대원군과 시조카 영선군은 함께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 제거에 협력할 것을 요청한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일본은 그대로 낭인들을 보낸다.
한국땅을 처음 밟는 일본 낭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자마자, 이주회,우범선,이두황 등 3대대장과 전 군부차관 이진호 등이 협력하고 개화파 거물 유길준까지 가세하면서 일본낭인들은 반나절도 안돼 한성에 들어왔고, 조선인 병사들은 궁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얘는 누구 쟤는 누구' 식으로 지목했다.
결국 명성황후는 궁녀로 분장했음에도 조선인 병사들이 '이 여자가 왕비입니다' 한마디에 손도 못쓰고 그대로 칼맞고 최후.
대개,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에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전국적인 의병봉기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KBS의 사극, 찬란한 여명에서 방영한 내용을 맹신하는 것이다.
을미사변으로 일어난 을미의병의 주요 구성원은 유생들이었으며, 직접적인 실력행사보단 일본세력의 국외 추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주를 이루었고 한달이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사실 의병은 단발령 시행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번진 것이다. 즉, 명성황후는 당시로선 효를 상징하는 머리카락보다 중요도가 떨어졌다.
민족문제 연구소의 윤덕한이 쓴 《이완용 평전》에 의하면, 사실 대원군이 여기에 많이 개입되어 있다. 그는 출발 전에 고유문을 붙였는데, 간단하게 쓰자면 다음과 같다. "민비와 그 무리들이 (원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민씨일족을 가리키는 것이 많음) 나라를 망치니 두고 볼 수 없구나. 피를 봐서라도 나라를 지킬테니, 너희들은 나서지 말고 할일이나 계속하라. 방해하면 보복하겠다." 대충 이런 뜻이었다. 그 날 대원군은 실패에 대비해, 손자인 이준용에게 일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9]
2009년 TV 아사히에서 일본에서는 최초로 을미사변에 대한 보도를 했고 이 보도에 자극을 받은 일본내의 모든 혐한들은 "모든 것은 조선인의 조작이다."라든가 "모든게 조선을 위해서였다."라는 개드립을 인터넷상에서 뿌렸는데, 되려 혐한의 입지들을 축소시키는 일이 되고 말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역사학계에서는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다만 드라마나 연극 등을 통해 상당히 미화되어 뉴스포털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리플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연극이나 드라마 등의 미화를 믿는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유지를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렸다란 호의적인 평을 하지만 실제론 자신들의 권익만을 쫓아 움직인 것이고, 좀 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이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뿐이다.
특히 개혁세력들의 주장을 묵살하며 제국을 운운[10]하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을 내세운 고종을 부추겼다.
명성황후의 파벌인 민씨 일파 역시, 명성황후의 이름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며 수많은 부정을 저질렀고 명성황후는 이를 되려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민씨 일파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너무나 극심해 임오군란 당시 왕후의 생가는 불타버리고,[11]민영준은 백성들이 하도 씹어대는 통에 이름까지 민영휘로 바꿨다. 그가 평안감사로 일하면서 평안도 백성들을 엄청 뜯어먹은 탓에 후일 그가 휘문학교를 세웠을 때 평안도 출신들은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과 명성황후가 해외세력을 끌어들여서 한 일은 국가의 각종 이권을 열강에 헐값에 팔아버리는 것이었는데 그 둘의 사치 때문에 대원군이 10년간 모아놓은 국고는 얼마 안가 바닥났을 정도.
미국에 단돈 2,700원에 판 운산금광의 채산성이 4,000만원 정도였다. 국채보상운동이 갚고자 했던 국가의 빚이 4,000만원 정도였으니 저 금광만 잘 관리했다면 국채보상운동은 애초에 없어도 됐을 것이며 미국인 알렌만 좋은 일 시킨셈이 되었다. 또한 명성황후가 국고에서 빼어 보석 등의 사치를 즐기는데 썼던 비용이 당시 국가예산의 1/6. 그야말로 막장 부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왕조를 말아먹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2]와 비교해보면 참 답이 없다.
명성황후는 사치로 나라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청의 서태후와 비견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서태후가 차라리 낫다.
서태후는 사치에 들이는 돈을 정하여, 정해진 범위안에서 사치를 부려서 다른 예산들은 건드리지도 않았지만 명성황후는 그딴거 없다. 그냥 돈이 보이면 썼다.
물론 조선과 청의 재정의 차이가 30배 정도 났으니 사치의 스케일은 비슷하다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서태후는 다른 예산은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화원 건축도 국력 과시의 목적이었다. 더구나 명색이 인구가 1/10도 안 되는 조선이 청과 수치상으로 같은 예산을 쓴다고 하면 그건 분명히 조선 쪽이 문제가 있는 거다.[13]
사치에 대해선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정치에 인척을 끌어들이고, 원자(순종)가 태어나자 허구한 날 잔치를 벌여 내탕금을 탕진하고 호조의 예산(즉 국고)까지 까먹는 막장짓을 저질렀다고 한다.민비 접견실의 크고 아름다운 표범가죽 양탄자...가 요기잉네?
또한 매천야록은 명성황후 시해 이후의 민중들의 반응도 서술하고 있는데, '왜외국인들이 남의나라 궁궐에 무단침입해 국모를 죽였으니 분노해야할지, 학정과 부패의 대명사인 민씨 일파의 수장이 죽었으니 기뻐해야할지 헷갈려' 웃을까 울을까 망설였다네 했다고.
1990년 중반, 찬란한 여명에서 열강들의 이권다툼에 정면으로 도전한 여걸로 묘사되며 빠가 확 늘어난 뒤에 1990년대 말, 뮤지컬 명성황후와 드라마 명성황후의 대박으로 인해 "조선의 앞날을 걱정한 국모"라든가 "열강의 이권다툼에 맞서 싸운 여걸"이란 식으로 마치 잔 다르크처럼 묘사된게 이미지로 굳어저셔 빠들이 대책없이 미화하고 있다. 사실 영화, 드라마 계의 민비/명성황후 미화는 60년대부터 내려온 나름의 전통이다.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23191 (1965년도 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사실 미디어를 통한 미화가 많은건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게 팔아먹기 좋으니까행실이 어쨌든, 어쨌거나 일국의 왕후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 습격자들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자체로 비극주권은 하늘나라로 이기 때문이란 점도 있다. 그래도 한 짓이 있는데 미화는 말자.
다만 여기서 그나마 긍정적인 점을 찾을 수 있다면 자신이 시해당함으로써 일제의 조선 침략 야욕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죽을 타이밍을 잘 고른 사람.[14]인생은 타이밍
을미사변을 거쳐, 사실상 러시아 세력의 정착을 막아낸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간섭 하였고 그 본보기로 명성황후를 서인의 등급으로 강등시켰다.
하지만 아관파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1897년 10월에 다시 황후로 복위되었으며 1897년 11월 국장절차를 밟아 청량리 밖 홍릉에 매장되고 "명성"이라는 시호가 추존되었다.
2008년 교과서 포럼이 제작한 근현대사 대안교과서에서는 명성황후를 "민왕후"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민왕후"는 그녀에 대한 폄칭으로 여겨지는 "민비"를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냐며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민씨의 지위는 엄연히 왕후였으며, 명성황후란 것은 사후에 추증된 것으로서, 그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경국대전》에 의거할 시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의 관직은 비(妃)이므로 민비란 표현도 완전히 폄칭은 아니다. 단 서거 시기가 (경국대전이 폐지된)갑오개혁 이후이기 때문에 애매할 뿐이다. 만약 민 왕후/민비가 부적절한 표현이라면, 이하응을 "대원위"가 아닌 "대원군"으로 부르는 것이나, 고종 이전의 5대 왕들을 황제가 아닌 왕으로서 부르는 것에도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일본어 잔재론 참고.
매천야록을 보면 명성황후 민씨를 중전, 궁중민씨 , 명성후明成后 등으로 호칭하고 있다.[15]
사실 과거에는 민비/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조차도 민비라는 칭호를 비칭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위의 영화 <청일 전쟁과 여걸 민비>라는 제목도 민비라는 칭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수 있는 증거라 할수 있다. 따라서 민비가 비칭이란 인식은 1990년대 들어 민비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명성황후가 뽀대나는데 민비라고 부르면 까는것처럼 보이니까 명성황후라는 칭호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후손들로 가깝든, 멀든 모두 민비의 친족들을 말한다. 물론 모든 민씨 척족들이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민영환을 들 수 있다.[16]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708명 중에 38명, 즉 17명 중 1명 정도가 민씨 척족과 연관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권력자였던 민씨 일가는 러시아에게 들이댔다가 나중에 거의 대부분이 나라를 망치고 매국을 하고 결국 친일까지 했다.
민건식(1879~?) - 대한제국 탁지부 대신 출신의 민영기[17]의 아들이다. 1910년 이 후 남작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 아버지 민영기도 중추원 고문이 되어 부자가 쌍으로 친일을 했다. 또 친일 유림 단체 조선유교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또 閔原健植라는 명의로 창씨개명했다.
민대식(1882~?) - 민영휘의 장남으로 아버지 민영휘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은행업에 뛰어든 후 조선 실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5년 발간한 책자를 보면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으며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신탁회사 등에서 감사역과 경기도 도평의회 평의회원을 거쳤다. 또 사회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돋을 펼쳤고 아버지 민영휘의 재산을 많이 받았으면서 정작 아버지의 장례를 초라하게 치러 손가락질을 받았다. 광복 후에도 살아있어 반민특위에 조사받았으나, 이 활동이 방해를 받으면서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민병석(1858~1940) - 민영위의 손자이자 민경식의 아들이다. 이완용의 사돈이자 절친한 친구로 경술국적의 한 사람이다. 친러파였던 이완용과 함께 활동하다가 친일파로 갈아탔고 민비가 죽은 후에도 요직을 맡았다. 그렇게 친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조문을 갔으며 결국 나라를 팔아먹었다. 그 공로로 자작이 되었고 막판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자리에 까지 올랐고 아내 심경섭과 함께 친일 단체 애국금체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다가 1940년 죽는다. 그의 아들은 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07년 사망한 민복기다. 그의 후손들은 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하자 다른 친일파 후손들처럼 당당하게 국가에 소송을 낸 상태다.
민상호(1870~1933) - 민치억의 친자이자 민치덕의 양자로 원래 궁내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이 되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남작 자리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그의 후손은 일제에게서 받은 토지를 2007년 국가에 반환하라는 조치를 받았지만 오히려 소송을 제기했다.
민영규(1846~1922) - 민경호의 아들로 태어나 판서와 궁내부 대신을 지냈다.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그의 작위는 1924년에 그의 손자 민병삼이 습작했다. 1960년 보도에 따르면 민병삼과 그 일가는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 종로에서 부유하게 살았고 손자 중 하나는 군 복무 중 사망했다고 한다.
민영기(1858~1927) - 민준호의 아들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황국협회를 결성하여 독립협회의 해산에 기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때는 탁지부 대신으로 한규설[18]과 함께 대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약 체결에 반대했지만 1908년에 변절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부총재와 이왕직 장관에 임명되고 남작이 되었다. 또 1916년 세워진 대정실업친목회가 1921년 친일 단체로 변모될 때 회장을 맡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또 1923년에는 다시 이왕직 장관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민건식이다.
민영린(1873~1932) - 민술호의 친자이지만 민태호에게 입양되었다. 그래서 순종의 첫번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와 남매지간이다. 1910년 10월 16일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아편을 빨다가 걸려서 박탈당했다.
민영소(1852~1917) - 민철호의 아들이지만 민규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민씨 일족이라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나 임오군란때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탔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로 하여금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때까지 요직을 거쳤지만 일제로부터 자작을 받고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욱(?~? - 민상호의 아들로 아버지의 작위를 습작했다.
민영휘(1852~1935) - 민비의 친척 조카로 민두호의 아들이다. 1877년 병과 급제 이후로 계속 승진과 요직을 거쳤다. 민씨 일족의 대표 거두라서 임오군란 때 집이 완전히 불타기도 했다. 민씨 일족의 중심인물이자 수구파의 거두로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 군대를 불러들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내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사대당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때도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진압하고 갑오경장때 민씨 일족과 실각하여 유배되었지만 평양으로 도망가 청나라로 돌아갔다. 1895년에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고 1910년에는 자작 작위와 은사금,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됐는데 탐관오리로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잘 불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 갑부 중의 한 명이 되었는데 권력형 부정축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2007년 그의 재산을 환수하기로 했지만 그의 후손들은 반발했다.
민형식(1875~1947) - 민영휘의 양자로 한 때는 을사오적 암살 거사에 거액의 자금을 대기도 했지만 변절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아버지 민영휘에 1936년 사망하자 자작을 물려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어려운 사람 돕기를 좋아하고 의리를 숭상했으며 신민회 회원으로 밈족운동에 기부금을 내는 양면적인 모습도 있었다.
민형식(1859~1931) - 민영휘의 아들 민형식과 동명이인이다. 민비의 친족으로 임오군란때 민비를 호종한 공으로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내고 병조의 요직과 삼도수군통제사 등 국방 분야의 요직을 모두 거친 거족이었다. 하지만 일제에게 협조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민형식에게는 아들 6명이 있었지만 모두 아편 중독자가 아니면 전과범이라 습작하지 못했다.
민종묵(1835~1916) - 대제학 민승세의 아들이지만 민명세의 양자가 되었다. 1874년부터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이조참판, 대사헌 등으로 중용되고 갑신정변 이후에는 형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때는 조약 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처벌한 것을 상주했지만 정작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고 2만 5천원의 은사 공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한일 병합 1주년 축하문을 싣기도 하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민철훈(1856~?) - 민종묵의 장남으로 궁내부에서 일했고 아버지 민종묵이 죽자 1916년 남작 작위를 세습했다. 1920년에는 친일파 윤덕영 등이 세운 해동운행 설립위원장을 맡았다.
보다시피 인간성과 업적 면면이 하나같이 훌륭한 견공자제분들이다(…). 그나마 여기서는 극소수의 인물들만 언급되어 있으며 실제로는 훨씬 많다.
[1] 위 사진은 명성황후 사진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들이나, 우리 국모가 이런 오크일리 없어 궁녀를 왕비로 오인했다거나 변조 등의 진위 논란에 휩싸여 있다. 상당한 사진 자료를 남긴 고종과 비교하면 의아스러운 부분. [2] 여기에 좀 논란이 있다. "자영"은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으로 학술자료의 기본이 되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흥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변경된 것으로 본다고 '자영'을 미는 중. 그 외에 아명은 당시 항렬을 따라서 정호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는 많지만, 정식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민씨 쪽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 [3] 다만 세력은 크지 않은데, 조선 초기 외척의 득세를 방지하고 왕권강화를 위해 태종이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집안을 크게 밟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가문은 조선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은 적이 많고, 원경왕후를 포함해 이 집안에서 나온 조선 왕비는 두 명이나 된다. [4] 그런데 이 과정은 곧 고종의 친위세력 성립 과정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시기 민씨 일가의 나이나 연차 등의 문제도 있어서 당상관 정도의 품계가 거의 없었다. [5] 이는 민씨의 피난길에 궁녀들이 떼로 죽은 일이 있어, 이 때 죽은 줄만 알았다는 설이 신뢰를 받고 있다. 물론 살아있어도 돌아오지 말라고 국장을 선포했다는 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6] 청의 원군을 요청한 것은 윤태준과 접촉을 마친 고종이란 설이 있다. 07년에 발견된 문헌에선 당시 명성황후는 도피하는데 바빠서 청나라와 접촉할 여유와 능력이 안되었다고 한다. [7]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이 일본대사관에 뻔찔나게 드나들면서 왕비 암살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폭로했다. [8] 유길준은 40년지기 친구 윤치호가 일기에서 유길준이 낭인들에게 협조했다고 기록했다. 친구 덕에 강남 아니 지옥간 셈.. [9] 참고로 이준용은 민비 때문에 죽을 뻔한 적이 있다. [10] 러시아의 차르 체제나 독일의 카이저 체제와 같은 전제황권을 추구했다고 한다. 민씨 일가가 친러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종 자체가 왕권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11] 그래서 여주군에서는 명성황후 생가를 복원해서 관광지로 쓰고 있지 수리는 안했다. 나라 말아먹은 여자로 왜 돈을 법니까 [12] 프랑스 국가예산 중 3%가 왕실 예산. 그 할당된 왕실 예산에서 1/10 내외를 썼다. [13] 사실 해군 예산을 남아 돌게 하도록 지시한 것도 서태후였다. 청일전쟁에서 황해 해전의 패배원인은 지휘관들의 갈등과 낡은 충각돌격 진형을 고수한 전술상의 착오 문제가 크다. 그리고 황해 해전 후반부에 청국 전함 정원이 발포한 12인치 포탄이 일본 해군 기함 마츠시마에 명중하고 고작 1발을 맞은 일본 기함이 기능 정지를 하는 바람에 일본 함대의 기동 그 자체가 정지되어 버린 일이 있는데, 만약 해전 초반부부터 청국측의 12인치 포탄이 일본 기함에 운좋게 맞았다면, 해전의 결과는 뒤집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덤으로 일본해군이 올린 그 많은 명중탄들은 정작 포탄의 위력이 너무 약한 47mm탄이 절반 넘게 차지하고 있어서 장갑방어가 잘 되어 있던 청국해군의 군함들에게는 상처도 못냈다. 황해 해전에서 일본측이 침몰시킨 청국 군함들은 모두가 장갑판이 없는 함들이었다. [14] 이건 민영환도 만만치 않은데, 을사조약때 자결하여 충절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인물이지만, 그 이전의 행적은 명성황후의 조카로서 젊은 나이부터 권력의 단맛을 만끽한 전형적인 민씨 일파이다; 전봉준은 그를 민영준, 고영근과 함께 3대 탐관오리로 지목했을 정도. 어쩌면 고모인 명성황후의 죽음을 보고 죽는 타이밍의 중요성을 깨달았을지도(…). 덕분에 살아서는 온갖 호강을 누리고, 죽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의녀(?)로 포장되고 있다. 무서운 아이! [15] 2011년 4월 16일 YTN 뉴스에서 고종과의 혼례를 재현한다고 뉴스가 나왔는데 여기서 '고종과 명성후'라고 아나운서가 말하는데 요즘은 명성후로 미는 모양? [16] 사실 이 사람도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다른 민씨 일족에 비하면 양반이다. [17] 아래 항목에 있는 민영기 [18] 그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남작 자리도 거절했다. 1930년 죽을 때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