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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신흥무관학교 略史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337 16.04.29 08: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흥무관학교 101주년에 되새기는

우당 이회영, 애국의 길을 묻다

동영상 보기 ☞ 신흥무관학교, 선조의 얼 ☜

신흥무관학교 略史

1907년 국내의 애국지사들이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신민회는 1910년 12월, 신민회 전국간부회의를 열며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구체적으로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했다. 즉 만주 서간도에 신(新)영토 로서 토지를 구입하고, 여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각 도 대표들은 지역으로 돌아가 서간도에 갈 이주민과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우당 이회영 가문이 1910년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망명을 결행했다. 백사 이항복의 후예인 우당 이회영 6형제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명예, 부귀영화도 버리고 모든 가산을 처분했다. 지금의 명동 YWCA 건물과 주차장 그리고 명동성당 일부가 이회영 일가가 살던 곳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 등을 포함해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 지금의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650억원 (소 값으로 환산) 내지 2,000억원(땅값으로 환산)의 거금이었다. 또 이듬해인 1911년 2월, 이회영 가문에 뒤이어 경상도 안동 일대의 혁신유림과 지사들인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과 그 가족들이 집단으로 망명했다. 망명에 앞서 모든 노비를 해방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한 석주 이상룡의 예에서 나타나듯 영남의 명문가들이 앞장서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1911년 서간도에 이주한 이회영, 이상룡 일가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이 첫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경학사의 조직과 신흥강습소의 설립이었다. 이들은 1911년 5월(음력 4월) 삼원포 대고산에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 조직을 결의했다.
경학사는 서간도 이주민을 위해 농업 등 실업과 교육을 장려하고 장차 군사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결사(結社)조직이었다. 한편 경학사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만주지역에서 최초로 벼농사를 보급하기도했다.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 마을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감격적인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이 있었다.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비록 평범한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와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정체였다.
망명지사들이 서간도에 온 목적은 항일독립운동과 그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그것과 직결되는 사업이 바로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따라서 신흥강습소는 중등과정의 교육뿐만 아니라 군사과를 두어 처음부터 독립운동 전사들을 길러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출발했다.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통화현 쏘배차(백두산의 서편)에 군사기지인 백서농장을 만들었다. 1914년 가을부터 밀림 지역을 벌목하기 시작, 이듬 해 수천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군영을 완성했다. 백서농장은 중국 측을 의식하여 농장 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사실상의 군사기지나 다름없었다. 백서농장에서는 정예 병사를 기르기 위한 훈련에 주력하고, 농사일을 겸하는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채택했다. 만 4년 간, 백서농장에서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혹독한 군사훈련과 극한상황에서의 경험은 이후 항일독립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에는 3·1 독립시위운동의 영향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오는 청년들로 넘쳐나자 합니하 지역의 무관학교 시설만으로는 학생들을 수용하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고 교통이 편리한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부근의 하동(河東) 대두자로 신흥무관학교 본부를 옮기고, 기존에 있던 합니하(哈泥河)의 학교를 분교로 삼았다. 이어 통화현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개의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마침내 1919년 5월 3일, 임시로 빌린 양조장 건물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의 본교 개교식을 가지며 교세를 확장했다.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홍범도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전쟁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온 몸으로 전투를 치르며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혹한의 추위에도 윗옷을 벗고 달리기를 하는 훈련생들


중국이나 일본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다. 또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1920년 이후 상해임정이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현재 교하현)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대황지(현재 남강자)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영안현 신안촌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 나갔다.


이시영(초대 부통령)은 해방이 되자 국내로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재건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미군정 아래서 미흡한 일제 청산과 민족정통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고 1947년 2월, 신흥무관학교의 교명(校名)을 그대로 이어받아 민족교육의 상징인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이후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 신흥대학(新興大學)으로 인가받고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신흥대학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경영난에 처하게 되었으며, 1951년 5월 18일 조영식이 인수한 뒤,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교명이 바뀌어 지금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www.sh100th.org/sub4.html?html=sub4_4.html


왜 지금 신흥무관학교를 기억해야 하나


1.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역사적 의미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그날부터 한시도 국권 회복을 게을리 하지 않고 광복에 매진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증인이다. 그것도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국권을 되찾겠다는 강인한 자주독립정신의 영원한 기념비이다.

지난해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2009년부터 작년 연말까지 학계나 공공단체뿐만 아니라, 민주민족운동을 펴온 여러 단체가 일본의 양심세력과 함께, 그리고 한일 양국의 지식인 문화인이, 또 여러 미디어 매체가 각각 활발히 학술활동을 전개하고, 각종 선언을 통해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열 것을 다짐했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것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의 본격적인 기점이 되어 동아시아주민에게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주었다. 그와 함께 일제가 을사조약, 병합조약을 불법, 부당하게 강제했음을 오늘의 시점에서 분명히 밝히는 것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협력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한국 지배는 백인제국주의국가의 인도나 동남아시아 지배와 달리 억압의 강도가 대단히 심했고, 비인도적 만행이 많았기 때문에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과거사문제를 명확히 하고 한일 양국의 밝은 미래를 여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에 경술국치 100주년 행사가 한일 양국간에 활발히 있게 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다음해인 1911년 6월에 설립된 것도 경술국치 100년 행사와 취지를 같이 한다. 이웃 나라 주민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면서 상호간에 협력할 때 진정한 평화가 자리잡을 수 있다는 신념 아래,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굴종케 하여 노예화하는 것을 일제가 국토를 강점한 그 순간부터 우리 독립지사들이 거부한 것이다.

이회영과 이동녕은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1910년 8월 하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떠났다. 돌아오자마자 이회영은 바로 6형제회의를 열어 엄청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하루라도 왜놈밑에 살 수 없다 하여 12월 30일 누대에 걸친 명문거족 6형제 일가 6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생면부지의 이민족이 살고 있고, 갖가지 풍토병이 기다리는, 그리고 “왜놈 못지않게 매섭다”는 혹독한 추위가 엄습하는 서간도로 갔다.

안동의 혁신유림 이상룡 형제 대소가, 김대락 대소가, 김동삼 형제 일가, 황호 일가도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압록강을 건넜다. 의병장으로 처형당한 선산의 허위 대소가 도 떠났고, 이동녕 이장녕 형제, 윤기섭 여준 김창환 이관직 등 서울의 지사, 무관들도 합류했다.

이들은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의 터를 닦기 위해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이끌 간부, 중견인물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평안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에서 기개 있는 뛰어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백년전의 일이었다.

2. 수많은 독림운동 인재를 키워낼 수 있었던 요인


독립운동 기지, 독립군 양성소는 여러 곳에 있었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흥개호 부근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웠으며, 이동휘와 그의 동지들은 만주 왕청현 라자구에 비밀 군사학교를 세웠다.

박용만 등 미주 동포들도 군사학교를 세워 미래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만이 1911년에 설립된 이후 10년 동안 쉬임없이 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 특히 3·1운동 직후에는 한반도 각지와 중국 각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유하현 고산자에 본교를 새로 크게 지어야 했고, 통화현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워, 합니하 무관학교와 함께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관 교육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가 중도에 문을 닫지 않고 뛰어난 인재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했을 때 특히 서간도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이렇게 각지에서 지사, 무관들이 서간도에 집결한 것은 신흥무관학교가 한말의 유력한 민족운동단체인 신민회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점도 한몫 하였다.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김형식 등 안동에서 온 망명자, 이동녕 윤기섭 여준 이장녕 이세영 김창환 등과 3·1운동 직후에 가담한 이청천 등은 모두다 독립운동계를 이끈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서간도에 출중한 지사, 무관들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단결이 잘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장점을 살려서 무관학교에서 일하거나 주민자치단체를 이끌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 파벌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신흥무관학교와 서간도 지역의 주민자치단체는 규모가 컸는데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단결이 잘 되어 있었다. 서간도에는 산이 많고 땅이 무척 척박한데다가 평안도 등지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거의 다 가난한 소작농이어서 계급 분화가 약했고, 주민들의 동질성이 강했던 것도 주민자치단체의 활동이나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하는 데 유리한 기반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물질적 토대가 강고했다는 점도 있다.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은 당대 최고의 거부 중 한 명으로, 이들 6형제가 처분한 재산은 40만원이나 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10만원 이상의 재산가가 많지 않았고, 지금보다 월등 가치가 컸던 쌀 한 섬의 가격이 3원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재산인가를 알 수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유하현 추가가에서 1912년에 통하현 합니하에 각종 시설을 갖춘 번듯한 새 교사로 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석영의 재력이 뒷받침되었다.

그렇지만 1910년대 중후반에는 안동 등 여러 지역에서 가져온 자금이나 가난한 서간도 주민들이 성심성의로 마련한 자금으로 학교를 운영했던 것도, 한때 재정난이 심각했던 것도 기억해두어야겠다. 신흥무관학교가 왕성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경학사-부민단-한족회가 강력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김학규는 경학사를 만주 한국인 혁명결사의 개시로서 한국혁명운동의 효시라고 평가했는데, 경학사(耕學社)는 이름 그대로 경제적인 실력을 쌓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며 근대교육을 시키고 무력을 양성하기 위해 서간도에 온 망명자들이 1911년에 유하현 추가가 대고산 노천회의에서 조직했다. 경학사를 설립한 직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경학사의 지원을 받으며 운영되었다.

1915년말 1916년 초에는 서간도 주민자치조직으로, 만주 부여 옛 땅에 부여 유민이 부흥할 결사를 세운다는 의미와 이주민들을 부양시킨다는 뜻을 가진 부민단이 조직되었다. 부민단은 10호에 십가장을, 백호쯤 되는 마을에는 백가장을, 큰 마을에는 천가장을 두었다. 일제의 한 자료에는 부민단에 1,229호, 6013인이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부민단의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고국에서 오는 동포를 맞이하여 살게끔 해주는 일이었다. 그와 함께 중국인과의 계쟁(係爭)사건을 관장하는 등 행정처리뿐만 아니라 사법처리까지 맡은 명실상부한 주민자치기관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왕성해짐에 따라 부민단을 확대 개편한 것이 한족회다. 한족회는 매호에 의무금을 내게 하고 민·형사 소송까지 맡아 완연히 독립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족회는 고산자에 새로 신흥무관학교 교사를 지어 본교로 했고, 쾌대무자에도 분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사 46기로 현역 장교인 이청천과 역시 일본육사를 나온 장교인 김경천 신팔균 등이 최신병서를 가지고 합세해 기세를 올렸다. 한족회와 같은 시기에 조직된 군정부는 독립군 조직이었다. 군정부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것을 옹호하였고, 명칭도 서로군정서로 바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교장 교감 교관 교사가 학생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무관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서간도 각지에 학교를 세우는 등 서간도에는 많은 학교가 있었다. 한 기록에는 20호 또는 몇 십호만 거주해도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이나 다름없이 이주민들 자녀를 가르쳤다고 쓰여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지속적으로 명성을 갖고 영향력을 갖게 된 데에는 주로 이 학교 졸업자로 조직된 신흥학우단 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 신흥학우단은 무관 양성 등 독립운동 인재 양성의 참뜻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신흥무관학교 및 분교와 지교, 부민단이나 한족회에 적이나 적의 앞잡이가 침투하는 것을 막는 자위조직으로도 기능했다.

신흥학우단이 신흥무관학교와 분교, 지교, 부민단-한족회에서 견인차이자 중추신경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 데는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편 미디어로서 신흥학우보의 역할이 있었다.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간된 신흥학우보는 서간도 주민들의 교육잡지로서 주민들과 신흥무관학교, 부민단-한족회 등의 자치단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 했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싸울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제2군영으로 백두산 서쪽 쏘베차에 세운 백서농장도 신흥무관학교의 성가를 높이 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동삼을 장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주로 참여한 백서농장 은 4년 동안 세상을 등지고 인적미답의 메마른 고원에서 필설로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지극히 힘들고 고된 훈련을 했다. 이들 중 채찬(白狂雲) 등 상당수가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들어갔고 통의부 참의부 정의부에서 활약했다.


3.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에서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 독립운동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개되었는가를 간단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독립운동 하면 만주나 상해가 떠오를 정도로 독립운동은 주로 해외에서 전개되었다. 인도나 베트남 등 다른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주로 국내에서 있었던 것을 볼 때 우리의 독립운동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국은 인도에서 간디나 네루의 민족(독립)운동을 용인했지만, 일제는 한국의 독립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철저히 탄압하기만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가 없었다. 그 점은 1920년대 문화통치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3·1운동이건 6·10만세운동이건 광주학생운동이건 모두 다 불법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은 일제 강점기 내내 국내에서는 지하투쟁의 형태로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은 3,4개의 여러 국가에서 선혈을 뿌리고 있다고 토로했지만, 독립운동은 만주, 산해관 안쪽의 중국,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본, 미주 등지에서 각각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만큼 간난신고가 컸고, 그 지역 주민들로부터 어떠한 위해를 받을지 알 수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는 점에서도 인도 등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과 크게 다르다.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한국인은 독립군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참으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세계에서 1930년대까지 독립군이 있었던 지역은 아주 드물다. 지금까지 한국인이 얼마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가를 일별 했지만, 독립운동을 펼치던 시기 중에서도 가장 암담했던 시기가 3·1운동 이전의 암흑기로 불리는 1910년대였다. 일제가 무단통치를 자행했던 국내와 거의 절연되어 있었고 어떤 외부적 지원도 받기가 어려웠던 시기였다. 이 때문에 3·1운동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독립운동과 달리 1910년대에는 주목할 만한 독립운동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점에서도 1910년대에 한시도 쉬지 않고 무관 양성에 진력했던 신흥무관 학교는 우리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에 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생도들의 독립군 활동은 청산리전쟁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920년대에 전세계 독립전쟁사에서 청산리전쟁과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찾아보기 힘든데, 일반적으로 청산리전쟁은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신흥무관학교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1919년 대한군정서가 만들어질 때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은 참모장으로 초빙되었다. 또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이범석과 생도인 박영희 김훈 백종렬 강화린 오상세 이운강은 각각 사관연성소 연성대장,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종군장교, 제2학도대 제3구대장, 제1중대장서리, 제4중대장, 소대장서리 등을 맡아 일본군과 싸웠고, 생도인 최해 신형섭 등 적지 않은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청산리전쟁 에서 일역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이청천이 이끈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군인으로 구성된 교성대는 청산리전쟁의 또 한 다른 주역인 홍범도부대의 지원을 받아 이 전쟁에 참여했다.

독립군에서 신흥무관학교 생도와 관련자들의 활동은 이루 다 매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는 말할 나위도 없고, 통군부 통의부 정의부 및 참의부에도 다수 가 참여했고,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고려혁명군 등 여러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1940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군으로 광복군이 조직되었을 때 이청천이 총사령관, 이범석이 참모장과 제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생도였던 김학규가 제3지대장을 맡은 것은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생도였고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국방장관)이었던 김원봉은 조선의용대원으로 구성된 광복군 제1지대를 통할 지휘 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 활동, 혁명사업, 교육사업에 헌신하여 남북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그들의 족적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흥무관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자취는 1919년 2월경에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 가운데 김동삼 여준 이동녕 이상룡 이세영 이시영 이탁 허혁 등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이 8명이나 된다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상룡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뀔 때 초대 국무령으로 모셔 졌다. 이회영은 헤이그밀사사건에도 관여했지만, 3·1운동 직전 고종 망명을 기획했고, 아나키스트운동의 원로로 폭탄투척에 의한 철저항일과 상부상조에 의한 인류사회 건설에 매진했다. 이동녕은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조직되었을 때 초대 의장이었고, 그 뒤 임시정부 국무총리와 국무령, 주석, 국무위원을 역임하면서 사거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시영 또한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재무총장과 국무위원을 역임한 임시정부의 증인이다. 김동삼은 1923년에 독립운동의 대방침을 정하고 독립운동 기구를 개편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 의장이었으며(부의장 안창호, 윤해), 통의부 중앙 집행위원장, 정의부 참모장, 만주지역 민족유일당촉진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윤기섭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 위원이었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 1920년대에 많은 활동을 하였으며, 1930, 40년대에는 민족혁명당을 이끌었고,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1919년11월 길림성 에서 의열단이 조직되었을 때 창립자 13명 가운데 김원봉 이종암 등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님 웨일즈의『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으로 유명해진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로 혁명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은 해방 후에도 활동이 많았다. 이중 정부에 참여한 인물들만 꼽아보자.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으로, 독립운동가답게 이승만대통령의 독주를 비판하였고, 국민방위군사건이 일어나자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 윤기섭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부의장 을 지냈고(의장 김규식), 2대 국회의원이었다. 이청천은 초대 무임소장관과 제헌 국회의원, 2대 국회의원이었다.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었고, 자유당 창당 시 부당수였다. 신흥무관학교 초기 졸업생인 변영태는 1950년대에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사람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며 웃고 있는 일본군들

4. 독립운동가들이 세우려고 한 나라

왜 독립운동가들은 그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자제들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만리 이역에서 만고풍상을 겪었을까. 자신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부인이나 자식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을 하여야해서 독립운동가 가문은 혹독한 희생만이 대를 물려 계속되었다. 서간도에 이주해온 망명자 가족은 뼈를 에이는 추위에다가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 풍토병과 마적 떼에 고생하면서 생전 해본 적이 없는 밭일이나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을 했고 남편을 대신해서 집안을 꾸려가야 했다. 독립운동 하러나간 남편이나 아버지의 얼굴을 수년 동안 보지 못하는 것이 예사였고, 감옥에서 고초를 겪는 일도, 일제의 악랄한 고문으로 폐인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였으며,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오는 독립투사들도 적지 않았다.

신흥학우단이 ‘선열의 시범’으로 조국과 겨레에 대해 맹세한 “1,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2,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3,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 (世事)를 잊었노라”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결같이 견지한 신조였다. 왜 모진 고초를 다 겪으며 조국을 찾고 겨레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쳤을까. 동포가 일본인의 종살이를 하고 망국노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잘못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국가를 갖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빼앗긴 국가를 다시 찾아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는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불렀다. 독립운동가가 가지려는 나라와 친일파의 국가는 판연히 달랐다.

이 점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로 하여금 정반대의 삶을 살게 하는 분기점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수탈이 없는 세상을『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했다.

“모든 한국인들이 두 가지만을 열망하고 있었다. - 독립과 민주주의. 실제로는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 자유. 일제의 압제로부터의 자유, 정상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유”

나라가 망하자 이상룡 집안과 함께 만삭이 된 손녀 손부를 포함해 종질 당질 증손자 모두를 데리고 안동을 떠난 65세 노인 김대락은 서간도에서 “금석은 깨질지 몰라도 자유를 향한 열정은 깎아낼 수 없고 큰 쇳덩이가 앞에 있어도 진보하는 단체를 막을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다. 노인이나 젊은이나 독립을 꿈꾸었던 망명자들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진보의 새 나라를 세우고 강한 민족에 의한 약소국 침탈과 약소민족에 대한 만행을 타파해 모든 인간과 모든 민족과 모든 국가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만난 신고도 마다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맞아 왜 망명자들이 서간도에 갔고, 독립운동가들이 어떠한 나라를 세우려고 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해방 후의 현대사를 이해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와 함께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기념하면서 근현대사의 큰 줄기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맨 앞머리 글자인 ‘신’은 신민회를 상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민회는 을사늑약이후 한말 지사들이 집결한 비밀단체로서 이회영 등의 상동계 동지들도 많은 활동을 했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바로 그 시점에 이회영 이동녕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로 간 것도 신민회와 연관이 있다. 이들은 국내로 돌아오자 이회영은 6형제 회의를 열었고, 양기탁 집에서는 양기탁 이동녕 김구 주진수 등이 신민회 간부 비밀회의를 열어 왜의 총독부에 맞서 도독부를 두고 청년들을 서간도로 보내 인재를 양성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8도 동지들이 각기 자기 도로 가 독립운동기지 건설 자금을 모집해오기로 했다. 신민회 비밀회의의 결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으나, 신흥무관 학교로 그 정신은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의 결의를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지만, 대한 제국 무관학교와 의병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도 민족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894년 청일전쟁 전단계로 일본군이 방약무인하게 경복궁에 쳐들어오고 다음해에는 일본이 야수와 다름없이 민왕후를 시해하는 참혹한 만행을 저질러 아관파천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나라를 새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광무제(고종)는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여러 가지 개혁을 했다.

광무제는 특히 국방력의 중요성을 체험으로 뼈저리게 인식해 군제 개혁에 국력을 기울였던 바, 시위대 친위대를 연대 병력으로, 지방 주둔 진위대를 진위대대로 개편함과 동시에 1898년에는 제대로 무관학교를 통한 장교교육을 시키고자 했다. 이때부터 일본이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이전인 1904년까지의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와 맥을 같이 한다 고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인 이세영은 대한제국장교였고, 교관이었던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양성환은 무관학교 졸업생이었다. 3·1운동 이후 가담한 신팔균은 1903년에 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속성과와 본과를 둔 것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이어받은 것이지만, 대한제국무관학교 교과목인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馬學) 외국어학 등 당시 여건상 도저히 하기 어려운 것을 제외하고는 신흥무관학교 무관 교육과정으로 한 것도 명백히 신흥무관학교가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주지하는 대로, 의병의 항일전쟁은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될 때 대거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전력이 크게 확충되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07년 8월 이후부터 1910년까지 의병장 430명중 군인 출신 의병장이 홍범도 연기우 민긍호 김규식 등 87명에 이른다. 이중 장교 출신이 18명인데, 영관급 장교 3명을 제외한 위관급 장교 15명이 무관학교 출신 장교로 생각할 수 있고, 하사관 또는 병졸 출신의 의병장들은 군대에서 위관급 장교의 통솔 하에 있었으므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이 의병들의 항일전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재찬,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지금까지 신흥무관학교가 대한제국말기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신민회와 대한제국 무관학교 및 항일전쟁을 벌였던 의병을 이어받았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3절에서 3·1운동 이후의 독립군 활동이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관련자들과 연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의 주요 간부들은 신흥무관학교 관련자였음은 거듭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맞아 해방 후 국군과의 관계도 살펴볼 것이 있다. 어느 지역 이나 제국주의국가 지배 하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독립군 (민족해방 군)을 이어받은 것을 대단히 강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립전쟁을 벌였던 인도네시아, 버마, 베트남, 중동지방, 북아프리카 지역 등 세계 어디에서나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독립군 활동에서 찾는다. 인도나 필리핀,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나라, 심지어 카리브 연안의 섬나라들까지 독립운동 영웅에 대해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바치고 그들을 기리고 있다. 황차 한국처럼 일제가 국권을 침탈해서 패망할 때까지 한 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줄기차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독립군이 왕성히 활동한 나라에서는 이 점을 각별히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맞아 육군사관학교의 경우도 역사의 줄기를 대한제국 무관 학교-신흥무관학교-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깊이 있는 검토가 있었으면 좋겠다. 역사의 맥락과 관련해 친일행위자 또는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 더 생각해볼 점이 있다. 인도나 인도차이나, 필리핀에서 친영파, 친불파, 친미파는 친일파와 달리 항상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고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친일파 문제가 심각한 것은 영국의 인도나 동남아 지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기본권에서나 억압과 수탈에서, 또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에서 일제 지배와 큰 차이가 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더욱이 일제는 중국침략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인도에 반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독일의 나치와 함께 인류사회에서 제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범죄행위였다. 이 때문에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있었고, 도쿄전범 재판과 중국 등지에서의 전범재판이 있게 된 것이다.

일제 말에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찬양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황국신민화운동을 벌이고 일본 왕을 위해 징용 징병에 나가라고 독려한 친일파는 프랑스의 나치협력자와 똑같은 존재인 것이다. 한 가지 더 검토할 것이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자국의 식민지에서 대단히 규모가 큰 현지 주민 군인부대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영국 프랑스와 함께 독일과 싸웠던 것은, 이들과 친일 군인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제는 ‘황국의 간성’으로 조선인 장교는 키우기도 했지만, 중일전쟁에 이르기 까지 한국인의 독립정신이 두려워 한국인을 사병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중국과의 전선이 교착되면서 황국정신을 기준으로 내세워 지원병제를 실시했고, 일제 말 전선이 끝없이 확대되고 도처에서 일본군이 패배할 시점에서야 징병제를 실시했던 이유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신흥무관학교 1백년을 맞아 역사의 큰 줄기를 바로 세우는 것은 독립운동 정신으로 민족의 단결과 통일, 평화를 이루어내는 일이기도 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흥무관 학교가 오래도록 역사에 기록될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서간도 망명자와 이주민 사회가 단결이 잘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도 3·1운동 이후 즉각적인 무장투쟁론이 제기되는 등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나 어떻게 하면 항일투쟁을 더 잘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을 뿐이다.

3·1운동 이후 노선의 분화가 있었으나 민족적 대단결만이 일제를 구축하고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평화의 인류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 했다. 1920년대에 국내에서건 중국관내에서건 만주에서건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던바, 이공개 통신 에서는 “사상이 상이하다는 이유로 절대적으로 동일정치조직 결성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원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독립운동세력의 대단결을 역설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김원봉 등 좌파세력이 들어온 것은 항일민족해방의 역량을 크게 강화했다.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 사이에 좌와 우가 따로 있지 않았다. 모두다 동지였고, 광복의 그 날을 기다리면서 민족의 해방과 새 조국의 건설에 한 마음 한 뜻이었다. 해방, 광복을 맞았을 때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1천년 이상 단일민족국가를 발전 시켜온 한국인은 어느 누구도 분단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미소 양국 의 대립으로 분단이 코앞에 닥치자 1948년 설날 백범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글을 발표해,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사갱(死坑)에 넣는 극악극흉의 위험일 것”이라고 경고하고,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역만리에서 만고풍상을 겪으며, 일가가 풍비박산되는 것도 무릅쓰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매진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이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평생의 독립운동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 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으로 민족이 피폐하고 고통을 받고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보면서 38선(휴전선)을 베고 쓰러져 죽을지언정 어떻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고 통탄하며 서거한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았다.

독립운동 하던 분들의 한결같은 염원은 화해와 협력, 통일이다. 그러한 화해와 협력, 통일을 바탕으로 평화가 이루어질 때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가 일가 (一家)가 되어 평화스럽게 살 수 있다는 점을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년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다짐할 필요가 있다.


해방이 되어 석주 이상룡의 손자손부 가족이 압록강 건너 서울역에 떨어졌을 때 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외모도 초라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음이 더 춥고 떨렸다. 그렇게 이역만리 남의 땅에서 고국을 위해 애쓰고 투신했건만 귀환동포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손길은 없었다” 일제가 강점하자 안동 종가집 그 좋은 재산을 다 바치고 신흥무관학교를 위해, 그 뒤에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해방 된 그날까지 몸을 바쳤던 이상룡 손자 가족이 수십년 만에 고국을 밟았을 때 왜 긍지와 환희 속에 귀국하지 못하고 마음이 춥고 떨렸을까. 여기에 우리 현대사의 통한의 아픔이 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친일파들이 떵떵거리고 잘 살고 지도자 유지로 행세하면서 자식을 유학 보내는데, 독립지사 가족은 일가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자식도 가르치지 못하는 현실을 만났을 때, 허망함과 분노, 비애와 억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수많은 살상을 저질러 놓고도 아직 반성할 줄 모르는 비겁한 국가, 일본.

3·1절, 광복절에 독립운동가 가족은 초라하게 앉아 있는데, 친일 행위와 관련 있는 고관들 이 단상을 점거하는 풍경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새 천년을 맞으면서 신자유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어 영어와 컴퓨터가 가중 중요한 교육 내용이 되고 우리 역사와 문화는 외면당하기 일쑤다. PC방에 매달려 사는 청소년들은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말이 자신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고 있고, 그저 까마득하게만 느껴진다.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를 예찬해 일제의 지배를 미화하고 해방 후 친일파들의 분단 활동, 독재정권에 대한 아부, 곧 비민주주의 행위, 인권 유린 행위를 합리화시키려는 신판 친일파들도 대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시대에 민족과 국가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빠져 있는 일부 지식인들은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버려야 한다고 말하며 다닌다. 이들은 우리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세계문화를 풍부하게 하는 길이고, 이웃과 동포를 아끼고 사랑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휴머니즘이고 인류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라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다.

청소년은 미래를 걸머쥘 주인공이다. 청소년들이 독립지사들이 왜 그렇게 큰 재산을 바치고 희생을 치르며 독립운동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청소년들이 독립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는 독립운동의 역사, 독립 운동가가 추구했던 사회에 대해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중요한 한 원인이다. 오늘 청소년들이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가 선열의 독립운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장준하기념사업회 등 독립운동 관련 단체에서 청소년들이 중국이나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돌아보게 하고, 독립운동 관련 글짓기나 여러 행사를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독립기념관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모델로 하여 독립군 체험 실습을 하도록 하는 것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가슴에 벅찬 느낌을 갖게 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옳고 그름을 따져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인생을 올곧게 사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청운의 큰 뜻을 품은 젊은이들이 넓은 세상을 알고 큰 뜻을 품게 해야 한다. 왜 누대에 걸친 명문세족 이회영 6형제 일가가 모든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넜는지 그 깊은 뜻을 알아야 하고, 안동에서, 선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지사와 젊은이들이 만주로 향할 때 가졌던 큰 뜻을 오늘에 새겨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보람 있게, 떳떳하게 사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 활동은 많은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그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1.1.27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창립대회 기조 발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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