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3일 17시 42분.난 여느 때와 같이 습관적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나의 손가락이 하나씩 하나씩 자판에 닿을 때마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인도의 수도승들이 맨발로 땅 위를 걸으며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처럼...
나의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을 훌쩍 뛰어 넘어 7월 27일 나른했던 오후로 향해 간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그 시간 속으로...
하나,,, 며칠만의 휴식 그러나...
휴~ 며칠 만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여유가 생길 때면 나는 항상 자연과 함께하기도 하고 음악의 폭포수에서 싸워도 하며 때론 정든 친구와 오랜 술잔을 기울이며 하릴없이 인생을 논해 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영화가 아니었더냐?
헐~ 난 기분 좋은 맘으로 내 팅구 영화와의 조우를 준비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나? 학교 DVD시설에 배치된 DVD목록을 재빠르게 읽어가며 볼만한 작품을 찾아 보았다. 그리고 난 결국 "돌이킬 수 없는"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돌이킬 수 없는>. 예전에 영화 잡지에서 얼핏 본 것 같다. 그리곤 언젠가 꼭 봐야겠다고 생각해 두었던 영화라는 사실만이 내 기억세포 속에 강렬히 남아 있었다.
"그래... 조아~~ 가는거야!!" 뻘거죽죽하고 이상야릇한 디자인의 DVD 쟈켓을 보고 조금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나의 선택에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 지 딱 10분만에 땅을 치고 후회해 봐야 소용 없었다. 왜냐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깐... O.O;
둘,,, 이거 공포영화였나? 헉~
영화는 정적 속에서 영화가 끝나고서나 나올 법한 희한하게 생긴 크레딧 문자들이 떼지어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근데 왜 크레딧이 요상하게 기울어지는 것이여? 기분이 찜찜하고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80년대도 아닌 70년대 미국 공포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요란한 음악과 함께 대문짝만한 타이틀이 맨 위에 떠올랐다. <Irreversible> 말 그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배우를 포함한 주요 크레딧이 대문짝만하게 화면을 메꾸며 번쩍인다. 가슴을 쿵 쿵 울리는 사운드와 함께.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이틀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그리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지는 타이틀.(<OLD BOY>의 타이틀 씬과 비교해 봐도 좋을 것!! 분명히 한국영화인데 왜 하필이면 영어 타이틀을 내세워야 했는지 그 의문을 해소시키는 문제의 장면!! 이거뚜 갠적 견해임 --;) 그리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혼란스러운 카메라 워크는 시작된다.
셋,,, 영화는 왜 역순으로 진행되는가?
나는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영화 중반까지는 정말 마음 졸이며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너무나도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떤 장면이 나올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영화는 역순으로 훑어가는 진행방식을 보였고 영화는 끝으로 치닫을수록 온화해지고 밝아졌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역순의 방식을 택해야만 했을까? 단순히 메멘토의 플롯을 표절한 것에 불과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영화는 가스파 노에(Gaspar Noe)감독이 일관성 있게 추구해 온 문제의식을 역순진행을 이용해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지극히 혼란스럽고 추악하기만한 복수와 폭력의 정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인 피에르와 본능적이고 자유분방한 마르쿠스, 그리고 자신의 성적 선호도에 따라 마르쿠스를 선택한 알렉스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건조하게 표현한다. 또 영화는 좀 더 과거로 나아가 마르쿠스와 알렉스가 속삭이는 달콤한 사랑을 정적이고 온화한 색깔로 따뜻하게 보여준다. 결국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옥과도 같은 세상의 밑바닥에서부터 천국과도 같은 사랑의 밀실에까지 이르며 시간의 불가역성과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처참한 비극을 부를 수도 있는지, 나와 외부세계와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또 오직 나만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 세상에 실재하는 어두운 면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영화가 끝으로 향해 갈수록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해준다.
감독에 관해서는 아직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더러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상당히 파격적인 방식으로 표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놀라운 것은 단편 데뷔작 <까르네> 이후 그의 모든 영화가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실례로 <까르네>와 장편 데뷔작인 <아이 스탠드 얼론(Seul contre tous)>은 7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그 내용과 파격적인 연출방식이 그대로 이어지며 이 영화<돌이킬 수 없는>에서도 이전 영화들의 주인공이었던 필립 나옹이 영화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첫머리를 대수롭지 않게 지나간 경향이 있는데 이 영화의 경우 오프닝 시퀀스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의 고립과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 그리고 폭력과 복수의 나날을 보내왔을(물론 영화상이쥐~) 그가 사무치는 듯한 말투로 지난 날 자신의 딸을 강간했었음을 토로할 때, 지난 모든 아름다운 시간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에 덧없는 넋두리를 할 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그것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과거였든 아니면 지독하리만큼 어두운 과거였든 간에),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지 절실히 느껴야 했던 것이다.
넷,,, 가스파 노에 감독 너 왜 이렇게 부정적인거니?
가스파 노에의 영화세계를 살펴보다 보면(얼마 되지도 않지만... 쿄쿄) 정말이지 세상에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절망어린 몸부림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분명히 이 세상 어느 구석엔 숨막히게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해야 할 만큼 지옥과도 같은 상황들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어쩌면 무의식중에 애써 외면하면서...) 밝고 건전한 일들만이 내 인생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 우리 도처에 놓인 것들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한 역겹고 비정상적인, 그래서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들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곁에서 일어나고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통과 혼돈의 한 가운데에 빠지게 된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감독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빠져있는 자들의 고통을 당신도 한 번 느껴 보라고 피 뭍은 손으로 건네주고 있는 것이다.
감독에 관해(특히 그의 성장기나 사생활에 관해)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의 정신세계 속에는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 두려움과 열등감이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만약 아니라면 감독은 싸이코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진정한 천재 예술가이거나 진짜 싸이코이거나 아님 관객들이나 언론을 의식한 쇼맨십이 강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마치 누구처럼... 누구게? --^)
특히 그의 영화는 프랑스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데 <아이 스탠드 얼론>이라는 영화는 커다란 자막으로 '이 나라의 창자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는 실직한 도살업자의 비극'이라는 부제를 제시할 정도다. 입에 담기조차 싫은 세상의 밑바닥이라고 생각되는 애스홀 클럽을 배경으로 다양하고 낯설기만한 인간 군상들이 그들만의 삶의 자세(일반인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감독은 더러운 세상의 단면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표현대로 그의 영화는 "한번은 봐야 할, 그러나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즉 그는 이 세상에 더 이상 만들어져서는 안 될 고런 영화를 만든 셈이다... ㅋㅋㅋ
다섯,,,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과연 다들 멀쩡한 사람들일까?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머니머니해도 뻘거죽죽한 지하도에서 일어나는 9분여에 걸친 강간 시퀀스였다. 소화기를 재치있게(?) 이용한 지독한 살인 장면 이후에 가뜩이나 멀미날 것 같은 관객들을 심적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불안하고 어지럽기만 하던 시선이 시뻘건 지하도에 다다라 멈추었을 때 관객들은 대부분 정말 아무 생각없이 무시무시한 색감의 지하도 속으로 하염없이 향해 가고 있는(혹시 그녀도 텅~~? --;) 모니카 벨루치를 꽉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그만큼 이 영화는 독특한 색감과 화면 구도를 통해 관객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이끌고 있다) 지옥과도 같은 장면이 끝나고 배우들의 상태가 괜찮은지 의심이 갔음은 영화의 리얼리티가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었으랴... 게다가 카메라는 관객과 알렉스(모니카 벨루치)의 눈높이를 고려한 위치였고 화면 뒤편에 목격자가 나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장면이 삽입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결국엔 사건의 무기력한 방관자임을 느끼도록(그래서 더 괴롭도록) 하고 있다.
이 시퀀스의 촬영이 끝나고 4일간이라 입원을 해야 했다는 모니카 벨루치나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을 리얼하게 재현한 세계 챔피언 복서 출신 조 프레스티아나 아내(당근 모니카 벨루치지...)에게 정말 커다란 모험을 허락하고 애인을 잃은 슬픔을 광기와 분노로 잘 표출한 뱅상 카셀이나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조연들은 어떠한가? 애스홀 클럽 안에서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던 모든 사람들은 다 엑스트라였고 창녀로 분한 여러 여성들도 모두 일반 엑스트라들이었다. 우선 그들의 열연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맘 약한(증말??) 나는 그들에게 촬영 후 후유증은 없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 정도로 영화는 처참했으니깐...
다섯,,, 영화속 180도의 의미는?
영화가 시작할 때 나오던 엔딩 크레딧이나 타이틀 씬은 '180도 회전'의 의미를 교묘히 숨기고 있다. 게다가 애스홀 클럽 안에서 마르쿠스의 팔은 180도로 아주 잔인하게 꺾여 버린다. 왜 이 영화는 180도에 집착하는가? 감독이 수학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아님 360도는 너무 숫자가 커서? 땡~~ 정답은 인간 삶 속에 숨겨진 180도 전환의 의미를 내포하기 싶어서 였던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는 마르쿠스에게 그 수다스런 불어로 자신이 긴 터널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터널이 둘로 갈라졌다고 얘기한다. 그 터널은 그녀에게 앞으로 실제 일어날 삶의 길을 의미하여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인생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갈래는 짐승한테 처참히 당하고, 마르쿠스를 미치게 만들고, 순수 옛 애인 피에르를 살인자로 만드는 끔찍한 길이며 다른 하나는 알렉스가 푸른 초원에 누워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삶의 평화로움을 느끼는 아름다운 길인 것이다.(물론 후자는 감독의 주관에 의해 가능할 수 있었던 미래가 되고 말았다.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어렵지? -0-;) 결국 알렉스를 비롯한 세 연인의 인생은 상대적인 입장에서 180도 전환되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간에...
또한 복수의 결과는 어떠한가?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미쳐 날 뛰던 마르쿠스가 아니라 숫기 없는 아저씨 피에르였다. 그것도 엉뚱한 놈을 아주 무참히 죽인다. 인간의 인생에 있어서 180도의 의미는 참으로 중대한 것이다. 감독의 통찰력이 거기까지 미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삶처럼 단지 우연이었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누구처럼 바보는 아닌 것 같다... 머래는겨?
참고로 이 영화에서 역회전 또한 커다란 의미를 갖는데 이미 언급했듯이 타이틀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든지 영화 마지막에 푸른 잔디밭 위에서 스프링쿨러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든지(카메라가 역회전 했었나?... 헷갈린다... 내가 바보넹... --;) 하는 것은 다 (기억으로서만 가능한)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의 의미를 영상기호로써 표현한 것이다. - 또한 이 장면에서는 화면을 가득 메운 커다란 레코드에서 베토벤 교향곡 7번이 흘러 나오는 듯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 결국 영화 맨 끄트머리에 나오는 대문짝만한 문자처럼 역으로 흘러가든 순으로 흘러가든 시간은 모든 걸 파괴한다는 세상에 대한 절라 부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여섯,,, 디지털 시대의 고다르?
가스파 노에의 영화는 잔인한 묘사와 충격적인 내용 외에도 독특한 촬영기법과 효과적인 사운드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혹자는 그의 영화가 고다르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정작 감독 본인은 직접적으로 그렇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호러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나 B급 영화의 대표감독격인 새뮤얼 퓰러 그리고 말이 필요없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한다.
현대영화에 미친 고다르의 영향력은 가히 지대하다고 평가되는바 꼭 그가 고다르의 영향을 받았다, 안 받았다 하고 규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그의 실험적인 영상언어는 고다르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멀미가 날 정도로 뱅뱅 돌리는 독특한 카메라 워크와 이질적인 요소들의 강렬한 충돌이 빚어내는 이미지의 파편화(몽타주 기법),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을 재현해 낸 듯한 현실감 넘치는 장면들, 단지 12개 정도의 쁠랑 세깡스(plan-sequence : one scene - one shot) - 쉽게 말해서 단지 한 번의 촬영으로 다양한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속체라고 보면 된다 - 만으로 영화를 구성하여 새로운 영상혁명이라는 찬사를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또한 사운드는 어떠한가? 영화 초·중반까지 사용하였다는 27Hz의 저주파와 중저음의 음악들이 의도적으로 삽입되어 관객의 불안한 심리를 더욱 자극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숨소리 하나 하나까지 담아 사실감을 극대화시켜주고 있다. 또한 영화 끝 부분에 울려 퍼지는 베토벤 7번 교향곡은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비극적인 심상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곱,,, 마지막 발광... 그리고 긴 한숨...
영화 마지막 부분, 카메라는 젓 먹던 힘까지 다해 눈부신 마지막 발광(?)을 개시하고 그 뒤로는 태초의 빅뱅과도 같은 카오스가 펼쳐진다.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발광의 향연이 끝나면 느닷없이 떠오르는 자막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과연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일까? 만약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과연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 씁쓸했던 이유는 꼭 그렇게 부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했냐는 의문 때문이었다. 또한 상상하기조차 싫은 상황, 정말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막막한 상황은 우리들 삶 도처에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잔인한 폭력과 저질문화를 통해 주제를 피력해야만 했는지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게이에 대한 편견과 인종 차별적인 시선은 또 어떻고... 쯔쯔)
감독이 이미 언급한 대로 결국 이 세상에 그 누군가가 한 번은 꼭 만들어야 할, 하지만 이 세상에 다시는 만들어지지 말아야 할 그런 영화를 가스파 노에가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감독은 혼자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려 하는가?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냥 악취미? 그의 다음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는 날 그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릴 지도 모르겠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