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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간증
경기도 이천의 한 작고 조용한 마을.
나의 고향은 서울에서 멀진 않았지만 아주 벽촌이었다.
6.26때는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잘 지내고 갈 만큼 오지였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그저 고요와 평온속의 단조로운 일상 이었다.
사람들은 삶의 무게를 놓고 고민하는 거 같지 않았고,
별보고 아침을 맞고, 달보고 저녁을 맞아도 그저 그날그날을 무사 평온하게 사는 것만이 최선의 길인 양 살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무리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정말 내 생애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일과 부딪쳤다.
나의 할아버지는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분이셨는데
내성적이고 말이 적으셨던 어머닌 세상을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셨던 거 같다.
그날은 어머니의 이런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날이었으리라.
그날도 나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마당에서 술래잡기랑 고무줄놀이를 하고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내 나이 일곱이나 여덟 정도가 아니었을까.
1963년쯤의 일이었다.
우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속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어머닌 물동이를 이고 늘 물을 길러 다니셨고,
이런 엄마가 측은했던 아버진 아침마다 물지게로 물을 길어와 항아리에 붓곤 하셨다.
그렇게 길어 온 물로 우리 오남매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덟 가족은 밥도 해먹고 세수도 하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엔 지금처럼 물을 사먹는 일 같은 건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이었다.
어머닌 그날도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가려는 중이셨다.
홀시아버지의 고된 시집살이에 적응을 못하던 엄마는 언제나 우울했고 웃음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겐 그런 엄마가 더 익숙했었다.
어쩌다 엄마가 밝은 얼굴을 하면 우리 집에는 해바라기 꽃이 핀 것처럼 너도 나도 덩달아 집에 웃음을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 엄마한테서 다정한 말을 기대하기는 많이 어려웠다.
그런데 그날은 엄마가 놀고 있는 내게 와서 다정하게
“언니 오빠 말도 잘 듣고 동생들과 싸우지도 말고 잘 놀고 있어. 알았지? 엄마 물 떠갖고 금방 올게.”
하시는 거였다. 나는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어머니가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머닌 언제나 말없이 그냥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뜨러 가셨고,
우리들에게 그런 어머니의 일상은 익숙했으므로 궁금해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새삼스런 다정함은 어린 나로 하여금 엄마를 쫓아가고 싶을 만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따라 가겠다고 떼를 썼다. 어머닌
“추운데 뭐 하러 오니? 금방 올 건데.”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단호한 어조로 자르곤 뒤로 돌아보지 않고 보리밭 사이로 사라지셨다.
방금 전 부드러운 말과는 달리 엄마의 어조가 얼마나 단호하게 들리던지 그대로 서서 더 이상 어머닐 따라 나서지 못했다.
이른 봄이라 날씨는 아직 추웠고,
겨울을 견딘 보리이삭들만 파릇파릇 보리밭 이랑에서 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한참을 지났지만 어머닌 오지 않으셨다.
나는 놀면서도 자꾸 엄마가 올 그곳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불안과 걱정이 몰려왔지만 절대 따라오지 말라던 어머니 말을 어기면 안 될 것만 같아 그 옹달샘까진 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산에서 땔나무를 한 짐 지고 들어오셨다.
나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면서 엄마가 물 뜨러 갔는데 안 온다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버진 더 묻지도 않으시고 정신없이 보리밭 이랑을 달리셨다.
어린 나도 아버지를 따라 뛰었고,
내 뒤를 할아버지도 따라 오셨다.
옹달샘에는 어머니가 이고 간 물동이와 똬리와 바가지만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땔감을 마련하던 오리나무숲으로 다시 뛰어가셨다.
나도 엉엉 울면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따라 갔다.
엄마를 찾아 나선 것이다.
마침 산은 아직 나뭇잎이 돋기 전이어서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제법 멀리까지 보였다.
그렇다 해도, 아버지는 무슨 선견지명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 넓고 험한 산 어디쯤까지 갔는데 정말 그곳에서 축 늘어져 있는 어머닐 찾은 것이었다.
어머닌, 큰 오리나무가지에 목을 매단 채 정신을 잃고 계셨다.
얼마나 무섭고 슬펐는지. 이 불행했던 아픈 기억은 오래도록 나에게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아버지가 새끼줄을 끊고 엄마를 꼭 끌어 안으셨다.
나는 무서움과 슬픔으로 엉엉 울면서
“엄마 괜찮아 아버지?”
하고 물었다.
“그래 엄만 괜찮다. 어서 내려가자”
하시면서 어머닐 등에 업는 아버지의 얼굴도 눈물로 젖어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아버지의 눈물을 그날 처음 보았다.
아니 어른도 운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고, 죽음이 얼마나 슬픈 건지 또 얼마나 가까이 있는 지도 알게 되었다.
천만 다행으로 어머닌 이렇게 죽음의 위기를 넘겼지만 그날 이후 나는 인생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마주하는 버릇이 생겼다.
허무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때 그 심정을 허무라는 단어로 정리하기까지는 좀 더 큰 후였겠지만, 나는 철학적인 물음 앞에 나를 놓기 시작했을 거였다.
죽음 뒤엔 무엇이 있을까?
죽음으로 인생은 정말 끝일까?
죽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영원히 살 것처럼 죽도록 일을 하는 것일까.
잠간동안 행복하기 위해 나는 태어난 걸까? 그렇다면 삶은 무모하고 무가치하다. 그 결과는 죽음이지 않은가.
착하게 살라고 한다. 왜 착하게 살아야하나? 착하게 산 결과로 내가 획득하는 건 무엇일까.
착한 사람은 오래 살 수 있나? 오래라면 얼마나 더............
성공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해주나? 성공의 끝은 행복인가? 그럼 행복의 끝은 무엇인가?
그 끝도 역시 죽음이다. 죽기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지같은 인생이다.
죽음 앞에서 수고한다는 모든 것이 내겐 바보처럼 여겨지고 불필요하게 보여 졌다.
하지만 나는 공부를 했고, 남들처럼 짧은 행복을 찾아 노력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엉망으로 만들면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할 테니까.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당시 나는 많은 질문의 답을 얻지 못한 채 그것이 내가 노력하고 살아야 할 이유의 전부였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었던가.
그런 사건 이후 어머닌 다신 그런 행동으로 우릴 놀래 키는 일이 없었고,
할아버지도 어머니한테 자유와 권한을 많이 주신 거 같았다.
어머닌 죽음으로 사수하여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만큼의 자유와 권리를 찾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엄마의 곁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 다녔다.
자유가 주어진 대신 어머닌 몸이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폐병이 지나갔고, 늑막염과 위염, 기관지 천식이라는 고질병이 어머닐 괴롭히기 시작했다.
학교에 간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신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나의 학창 시절을 늘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랑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길 좋아 했고 장난꾸러기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명랑하고 유머가 풍부한 아이로 친구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내 속의 나는 혼자만의 블록을 쌓고 그 속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모두들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교실 앞에 걸려있는 교훈이나 급훈은 사람답게 근면하고 성실하란다.
죽 음을 이기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데 어디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교회를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학교 옆에 있는 교횔 나가고 있는 학생 하나가 추운 겨울 아침 운동장 조회 때 "주여 발시려워요"하는 말을 하는 걸 듣고 그만두기로 하였다.
그런 시시한 하나님이라면 나와 상관없는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등잔불 밑에서 책을 보다 잠이 들어 집에 화재를 내기도 하였다.
화재로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해 온 농짝을 다 태우기도 했다.
1972년 내가 열일곱 되던 해.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이런 나의 고민은 더 이상 나를 그냥 놔두질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정체성 찾기를 유보한 채 공부를 계속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답을 얻지 못하고 묻어둔 심각한 질문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나는 친구들과 공부를 멀리 한 채 내 속의 나와 긴 싸움에 빠져 들었다.
그때 나의 친구들과 부모님은 나를 염세주의자니 사춘기를 과격하게 격는다느니 하면서 비방 섞인 염려를 했다.
나는 절로 들어가든지 수녀원으로 갈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일주일을 학교에 가지 않고 부모님께 시위를 했다.
학생이 공부를 포기하고 종교를 따라 방향을 달리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동안
어머니와 아버지는 병이 날 정도로 심각하셨다.
나는 정말이지 이대로 공부를 계속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해야 할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했던 공부는 깊어가는 궁극의 물음 앞에서 그 힘을 잃었다.
일주일 되던 날,
이런 나를 지켜만 보시던 아버지께서 지게를 지고 들로 가시려다 말고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아버진 당신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셨다.
나에게 공불 강요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바라시는 게 뭔지 읽었고, 혼자 많이 울었다.
아버진 내가 대학도 가고 여자지만 똑똑한 사람으로 커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다.
그 소망으로 밤낮없이 일을 하셔도 힘든 줄 모르고 살아간다고 하셨다.
아버진 아버지의 인생보다 우리들의 인생을 더 소중히 생각하셨다.
오전 시간을 나와 시간을 보내시고 아버진 점심을 드신 후에 들로 나가셨다.
나는 부모님을 너무 아프게 해드렸다는 자책과
일주일의 방황에도 불구하고 아무 답을 얻지 못했다는 상실감에 한참을 울고 말았다.
그 깊은 사랑에 무릎을 꿇은 나는 다음날 아침 결국 다시 책가방을 챙겨들고 학교로 갔다.
비록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겉으론 성실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마냥 흔들려가는 시간 속에 하나의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오남매 중의 가운데였는데 엄마가 늘 아픈 바람에 맏이인 언니를 엄마 이상으로 의지하면서 자랐다.
나보다 네 살 위였던 언니는 동생들이 차지한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나의 의지가 되어주었다.
언닌 늘 내편이 되어주었다.
동생들과 싸운다고 야단맞고,
언니 오빠한테도 지지 않고 말대꾸한다고 자주 책망을 듣던 나의 억울함을 가장 잘 이해해준 사람도 언니였다.
오빠나 언니, 남동생 모두 성실한 모범생이어서 나는 그들이 부모님께 싫은 소리 듣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은 우리들과 나이차가 꽤 많이 나는 까닭에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자연 반쯤 착한 내가 문제아였을 것이다.
정말이지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착해지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고 하는 이해인 시인의 심정이 바로 내 심정이었다.
그 시절 나는 언니보다 더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을 알지 못했다.
내게 언니의 말은 무엇이든 진리 이상으로 정확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내 마음 속 아주 깊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사람이 바로 언니였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언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언니를 좋아했던 나는 언니한테 긴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추스렸다.
언닌 줄줄이 공부를 해야 하는 동생들을 생각해 직장을 다니기로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학교 다니는 동안 종종 언니한테서 용돈을 받아썼고
언니는 월급을 타면 언제나 어머니 약을 사들고 내려오곤 했다.
가난했지만 이렇게 성실한 언니 덕분에 어머닌 늘 약을 떨어지지 않게 드실 수 있었고,
그렇게 아프셨던 어머니의 병도 조금씩 호전되어갔다.
나는 나의 고민을 언니한테 편지로 써 보냈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글로 마음을 다 표현하지는 못하였겠지만 내 편지를 받은 언니는 몇 권의 책을 사서 내게 보내주었다.
그 중에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철학책이 들어 있었다.
나는 특이한 제목에 이끌려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은 최초의 철학서였다.
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갔다.
작가가 보는 시인이나 철학자,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가 통쾌하게 내 마음을 치고 지나갔다.
종교심에 의해 불행해진 종교성의 시인에 대한 지적과 소크라테스적 무지에 대한 지적은 많이 놀라웠다.
그는 영원을 형이상학적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의 영원성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허사요 공연한 소동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나의 내부엔 비판적 사고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었기 때문에 이 책이 주는 신선함은 여느 소설책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서 신을 찾지 못하고 방향을 바꾸어 버리는 인생들을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다.
인생을 허송한 사람이란
기쁨이나 슬픔에 속아서 들뜬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고 영원히 신 앞의 자기로서의 자신을 발견치 못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막연한 신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내 문제해결의 핵심을 찾는 방법에서부터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물음표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신을 척도로 하는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내 고민의 중심을 건드렸다. 여기 그 글을 조금 적어본다.
-.....우리가 이제까지 문제 삼아 왔던 자기의식의 단계는 인간적인 자기, 또는 인간을 척도로 하는 자기라고 하는 규정의 범위 내에 있다. 그러나 자기는 그것이 신을 향한 자기로서 새로운 성질과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 자기는 단순히 인간적인 자기가 아니라, 신을 향한 자기라 부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현재 신 앞에 있다는 걸 의식하기에 이른다면, 신을 척도로 하는 인간적인 자기가 된다면, 자기는 그 얼마나 무한한 실재성을 획득할 것인가. 노예를 향한 자기인 것 같은 주인은 원래 자기가 아닌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척도가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단순히 양친을 척도로 한데 불과한 어린애는 어른이 되어 국가를 척도로 하는 것에 의해 자기가 된다. 그러나 신을 척도로 하기에 이른다면 그 무슨 무한의 악센트가 자기 위에 놓여 질 것이랴! 그리고 이것이 또 척도가 무엇이냐의 정의이기도 하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민성사>.
다시 의문이 시작되었다.
만약 영원성을 가진 신이 실존하고 있다면 신을 척도로 하는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말 신은 있는 것일까. 영혼은 있는 것일까.
천국과 지옥은 있는 것일까. 만약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만약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 영혼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은 영혼으로 있는 걸까.
만약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존재하는 영혼이라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 중에 어느 종교가 내 영혼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일까.
나는 끝도 없는 물음에 싸여갔다.
이젠 죽더라도 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니한테 다시 편지를 썼다. 언니는 영혼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냐고.
언니는 요즘 성경을 많이 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얘길 내게 해주었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뿐이었다.
그런 상태로 시간은 여전히 흘러만 갔다.
나는 외관상으론 아무 무리 없이 학교를 다녔고,
2학년이 되던 해(1973?) 언니는 결혼을 앞두고 다시 시골로 내려왔다.
때 맞춰 집으로 와준 언니가 나는 너무 좋았다.
예전처럼 나는 언니와 한 방을 쓰면서 많은 얘길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언니는 내가 갖고 있는 의문들의 답을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틈이 날 적마다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성경을 재미있게 읽는 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는 안 되었지만 나는 언니를 좋아했으므로 언니를 기쁘게 해 줄 양으로 아침마다 선교 방송인 극동방송을 청취했고,
언니가 듣는 권신찬목사님의 설교도 라디오를 통해 나도 함께 들었다.
권목사님 설교를 언닌 꽤 열심히 들었는데 나는 영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아 그저 듣는 시늉만 했다.
당시 천로역정을 드라마화 해서 아침마다 보내주었는데 나는 그걸 재미있게 듣고 학교엘 가곤 했다.
언니는 틈틈이 내게 이스라엘역사에 관한 얘길 해주었고 이스라엘 역사서를 구해주기도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언닌 이미 구원을 받았고,
언니를 도와 내게 복음을 전해주려고 하는 형제 한 분이 책을 보내주었다.
그 형제는 구원에 관한 전도의 편지를 써서 학교로 보내주기도 했는데
한 번은 학교 옆에 있는 교회에서 성가대를 맡고 있는 음악선생님인 학생주임선생님께서 내 편지를 몰래 뜯어보고
그 편지 속에 ‘구원’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아무래도 내가 사이비종교에 빠진 거 같다면서 일주일동안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당시는 구원이라는 말이 흔하지 않을 때였으므로 그 선생님도 구원을 모르고 교횔다니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그 구원이라는 단어 때문에 반성문을 매일 썼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나는 김포에 있는 삼우트레이딩을 찾아 가다가 길에서 그 선생님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곤 삼우트레이딩 옆 동네인 그 선생님 집엘 초대받아 갔었고 그 선생님으로부터 정식으로 그 일에 대한 사과도 받았다.
선생님은 여전히 작은 교회에서 성가대를 맡고 계셨다.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은 구원받으셨냐고. 선생님은 아직 못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다니고 있는 삼각지교회도 김포여상 학생을 따라 몇 번 왔었는데 구원은 못 받은 거 같다고 솔직히 말씀하셨다.
안타까운 것은 그 후 1년 쯤 지나서였을까.
그 선생님은 정말 불행하게도 설암으로 돌아가셨다. 다시 얘길 계속하자.
언니와 함께 나를 도와주던 그 형제님은 내가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얘기뿐인 종교서적쯤으로 알고 있던 터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작은 나라가 구약성경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역사책으로서의 성경을 대하는 내 관점은 발을 땅에 두는 신의 존재를 실감나게 했다.
나는 깊이 구약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고 성경이 사실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눈이 떠가게 되었다.
아라랏산 빙하에서 발견된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새로웠고,
성경 지명이 현재 이스라엘과 중동지역의 주변국가들 사이에 실제로 있는 나라들이라는 점 등등
나는 점점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인간들과의 연관성을 알아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차츰 나는 세계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어떤 존재로 살아왔는지 나 나름대로 역사서를 찾아보기도 하였다.
옛날 지도에서는 이름이 없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1948년 다시 국가로 독립하는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은 정말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 날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마당에서 야채를 다듬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나도 울고 언니도 울었다.
기념식장에서 나라의 국모이셨던 육영수여사가 총을 맞고 쓰러진 것이다. 언니가 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육여사는 어디로 갔을까?” 언니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성경 욥기엔 이런 말이 있어.
네가 의로운 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따름이니라.(욥 35:7~8) 이렇게 말이야.”
그 말을 하곤 언닌 목이 메인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언니와의 이 짧은 대화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럼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 건데? ”
하고 물었다.
“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걸 믿니?”
“이스라엘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환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아직 그 존재를 확실히 안다고는 말 못하겠어. 언닌 확실히 하나님을 알어?”
“그래.”
언닌 하나님을 안다는 확실한 대답을 해왔다.
“난 죽을 뻔 했어. 하나님을 알기까지 난 너무 힘들었어.
난 죄가 너무 많은 데 천국엔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야 갈 수 있다고 성경에 되어있었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이지. 그 죄 속에 눌려 죽는 줄 알았어.”
내 눈에 언니는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할 만큼 잘못 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죄가 많아 죄 때문에 죽을 뻔 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언니가 죄가 많다면 나는 엄말 속상하게 해드린 수많은 죄가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나를 변명이라도 하듯
“그렇지만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하고 말했다.
나의 질문이 깊어지자 언니는 할 일이 있다면서 부엌으로 갔고, 나는 밤이 되어서야 다시 언니와 대화를 시작했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워 진지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언니는 구약시대때 유대인들의 제사의식에 대해 상세하게 얘길 해주었다.
염소, 양, 비둘기 같은 동물들을 잡아서 1년에 한 번씩 드리는 제사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길 해주고
그 짐승들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끝이 났다는 얘길 해주었다.
얘길 하다가 우린 성경을 보기위해 불을 밝혔다.
그리고 언니는 성경구절을 찾아가면서 얘길 계속했다.
-호리라도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태5:26, 누12:59)
성경을 읽다말고 내게 물었다.
너는 죄가 얼마큼 있니?
나는 이런 질문 앞에서 너무 창피했다.
왜냐하면 내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하고 사는 사람인지는 언니가 낱낱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오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야단맞고 큰 애가 나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언니가 이런 질문을 하니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도록 창피하면서 한편 화도 났다.
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면 나는 나의 죄를 낱낱이 기억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 앞이라 나는 성경을 덮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언니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다시 얘기하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조차도 죄로 규정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이렇게 죄의 본체를 알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씀을 찾아 읽었다.
죄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고(갈3:23),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무두 범한 자가 되는데(야고보 2:10)
하나님은 이 죄를 다 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고 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 성경을 같이 읽는 순간
내 안에서 순식간에 그 많은 의문이 사라지고
희미하게 보이던 성경 말씀이 선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나를 향해 던졌던 수많은 질문들...
영혼은 확실히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죽음은 끝인가 또 다른 삶의 시작인가?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왜 의인인가? 의인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행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
아, 이 많은 질문들 뒤에 하나님이 답으로 계셨다.
단 한 분.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신 그 하나님을 앎으로서
이 많은 질문들이 다 그 답을 찾게 되는 신기한 일이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태27:51)
나는 말을 잃었다.
내가 잠잠하자 언니는 혼자 성경을 보다 잠이 들었다.
하나님이 독생자에게 내 모든 죄를 얹어놓고 그를 제물로 삼으심으로서 나의 죄가 끝났구나.
이 기막힌 사실 하나를 기록하기 위해 그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가야 했고 힘들었어야 했고,
이 기막힌 사실을 찾아 채우기 위해 내 마음 속엔 커다란 허무의 빈 공간이 있었던 거구나.
신을 척도로 하는 내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던 철학자의 말도 이해가 되었고
이젠 앞으로 살아가는 일 외에 그 많았던 물음표가 사라져 버렸다.
1974년 . 나는 영원히 살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왜?냐고 묻는 그 다음엔 언제나 하나님이 그 답으로 충분했다.
너무 기쁘고 살아있다는 행복이 밀려오는 순간,
그러나 너무 위험하고 아찔한 절벽에 서 있었던 기억이 밀려오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새로운 아픔이 시작되었다.
만약 그때,
아버지와 내가 어머니를 조금만 더 늦게 찾아냈다면 지금 어머닌 어디로 가 있을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 정말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있는 동안이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을 기회를 갖는 거라는 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배에 올랐다.
나중에 권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키에르케고르도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원받고 몇 년 후, 언니와 나는 작은 모의를 꾸몄다.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의 생신날 동네잔치를 베풀기로 한 거였다.
경비는 모두 언니 몫이었고, 그에 따라오는 명예는 모두 내 것으로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고집쟁이 말성쟁이라는 불명예를 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오십 번 째 생신을 동네잔치로 했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온갖 칭찬이 쏱아졌고,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드디어 고집스런 딸의 불명예를 씻을 수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언니와 나는 어머닐 서울여상 수양회에 모시고 왔고 드디어 어머니가 구원을 받으셨다.
엄마가 구원받던 날, 나는 서울여상에서 엄마랑 끓어 안고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이젠 엄마가 죽어도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내 말에 어머니는
“아직 아니다. 아버지와 오빠, 오길이가 있잖니? 우리 가족 모두 이 사실을 알기 전엔 내가 죽을 수 없지. 세상에 이런 행복이 있다는 걸 누가 알았겠니?”
하고 우셨다. 그때가 1978년 여름이었다.
그해 겨울.
어머니는 아버지와 여동생, 며느리를 집회에 보냈고,
그 다음 해에 군에 있던 남동생 부부가 이 사실을 받아들였으며,
오빠를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구원받은 한 가족이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어머니가 하셨다.
아니, 어머니의 변화된 모습은 가족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셨던 엄마는 작년 봄 75세로 그 년 수를 다 채우시고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엄만 너무너무 행복한 얼굴로
"내가 너무 행복하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 가셨다.
구원받으셨을 때보다 더 행복한 얼굴을 하시고.
나는 이렇게 행복한 엄마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나 뿐 아니라 엄마를 위해 송별송(찬송)을 부르던 우리 가족 모두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보면서 눈물을 거두었다.
우린 어머니를 어느 행복한 집으로 시집보내는 듯한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두 마음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 생생한 이별의 순간과 엄마의 간증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형제 자매들과 나누고 싶어진다.
주님께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드리면서...................
첫댓글 한 편의 영화 같으네요 어머니가 ㅎㅎ해결되신 이야기도 듣고 싶습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참 복된 가정입니다. 모든 가족이 한마음 한뜻이 된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같은 사연. 재미있게 웃기도 눈물도 찔끔 잘봤어요 긴사연 쓰시느라 수고 많았네요. 어떻게 가족이 다 해결하실수 있는지 ! 아이고, 부~러~워~라~ 엄마의 간증도 기대해요.
정말로 감동에 감동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정 모두 구원을 하신 그 크신 사랑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자매님의 구원받은 년도가 나와 같군요. 참 복된 가정입니다. 언니와 어머니의 구원간증 가족모든분들의 구원간증 기대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랑 년도가 같으시다니요.
사선을 넘나드는 감동, 언니의 차분한 대처, 눈시울이 따듯 해 집니다.
찬송가 222장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찬송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간증 귀한 간증 입니다... 감동의 물결... 499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을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들리니 주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찬송이 절로 납니다. 귀한 간증 감사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눈물이 헤퍼졌는지.... 계속 눈물,콧물이 나오네 이거~~~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나고 동생들 생각도 나고~~ 어렸을 때 별명이 울보였는데, 돌아가신 내 어머님 간증도 추정해서 써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울려서 죄송 죄송!!!!!!!!!!!!!!!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생긴 그 날의 경이로움과 감사가 이 글을 읽고는 다시한번 더 생생하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고생하신 어머님과 가족들에게 임한 축복은 세상 어떤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이 뜨거워 졌습니다.
드라마 만들고 싶어 아님 연극을 만들까 ? 그리스도 를 전하기위해서
구원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간증을 썼던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다시 헤아려 보니 새롭게 감사와 기쁨이 더해집니다. 간증을 글로 써 보는 일이 정말 좋았고요, .....돌아가신 어머님 간증도 정리해보도록 해볼게요.
감동입니다....부럽구요, 온가족이 구원 받으셨다하니. 오직 홀로 구원 받은 저는 이 글 읽고나니 어깨의 짐이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주님... 주님께 맡깁니다...
힘내세요 미소천사님. 살아있다는 것은 기회를 주시고 있는 거잖아요. 아자!!!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보셨군요. ^^
고맙습니다
참드라마 같은 삶을 거처왔군요 하지만 후에는 모든 복을 다 받은 것을 주님게 감사드림니다
영통마님 ?! 누군지 알 거 같기도 하고요....ㅎㅎ 감사합니다. 님께서 받으신 복도 함께 감사드려요.
다 읽고나니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네요.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 하신것은 내게 평안 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열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
제가 구원받던 날, 아마 어머니가 안 계셨더라면 정말이지 기절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허무하게 창조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쓰기도 힘 드셨겟지만 긴 글이라 읽기도 만만치 않앗지만 참 차분하게 정리를 잘 하셨네요 그렇게 이루게 하신분도 위에 계신 분 이겠죠....
네....좀 짧게 정릴 하려고 했지만 왜 이케 할 말이 많은 지....이것도 쭐이고 쭐인 것인데요..ㅎㅎ 수고 하셨어요, 긴 글 읽어주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가끔 어둠에 갇혀 헤맬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등불좀 밝혀 주세요.
사무실에서 몰래 몰래 눈물을 흠치느라 애 먹었습니다. 구원은 받았다고 하셨으나 임종을 보지 못한 어머니 생각도 많이 나구, 남은 형제들 생각에 마음을 다져보았답니다..
제가 무지무지 죄인입니다. 귀하신 형제 자매님들을 자꾸 울려서요...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는 아버지와 지혜로운 언니를 두셔서 많이많이 부럽습니다 . 저도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 깊게 보았습니다. 모든 가족이 구원받으셨으니 감사가 배로 넘치겠어요. 마음이 찡하네요. 저도 님과 같은 해인데요. 저는 맏이라 챙겨 줄 언니나 오빠가 없어요. 그래서 더욱 부러운데요.
언니하나 오빠하나, 남동생 하나, 여동생하나. 이렇게 갖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 같아서 동네에서 다 찾다보니 바로 우리집에 있더래요. 어렸을 때, 제 큰어니 말이었어요. 그 가운데가 저였는데....저는 자라면서 가운데라 혼만 났어요. ㅋㅋ
영원히 살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글과 어머니의 구원이 해껼 되셨을 때 어머닐 안고 우셨음도 저랑 같애요. 지혜로운 언니를 통해 가족 모두가 거듭나게 되었으니 정말 영광이네요. 두 번째 읽어도 또 감동인걸요. 모든 사람이 죽기 위해 태어났나? 이 물음은 저랑 같애요
그래요 꿈사랑님! 누구나 이런 생각은 하겠지만 그 농도가 문제였을 거예요. 꿈사랑님도 구원받으시기 전 많은 고뇌를 하셨군요. 2009년 새해에도 변함없이 건강하시고요.
와...!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재미있읍니다. 할렐루야- 효녀노릇 제대로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봉황봉님. 인사나눠주신 글 이제 봤네요. 한여름 불볕 더위에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