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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止堂(지당)은 諱 自源 判決事公派 17세조 諱 夏彦(하언)의 號, 어려서 玉壺子(옥호자)로, 벼슬 중에는 美仲(미중)을 호로 사용하였다. 총리 하신 雲燦(운찬)님의 직계 7대조, 정숙공 휘 淵(연)의 9세손. 생애(1702 숙종 28 ~ 1769 영조45), 조선 문신 서예가. 창경궁 현존 弘化門 편액을 쓰기도 하였다. 외손 임천상이 썼다.
止堂集 ; 外王考 大司諫 止堂 鄭公行狀.
♣ 外孫 임천상(任天常) 謹撰.
公諱夏彦 字美仲 號止堂, 鄭氏本 迎日縣人 新羅 諫議大夫 宗殷之後也. 國初 知議政府事 恭簡公 洪, 兵曹判書 貞肅公 淵, 貞肅公 生判決事 自源, 判決事 生僉正 涵, 僉正 生進士 鸞年, 進士 生縣監 珙, 縣監 生察訪 忠邦 是爲 公高祖, 曾祖 諱洛 生員 贈執義, 祖 諱碩基 贈左承旨, 高 諱堥 牧使 贈吏曹參判 三世贈官以公 推恩也. 參判 凡三娶 咸陽之朴, 漆原之尹, 豐川之盧, 盧氏 松齋先生 叔仝之後 士人 瀕(?穎)女. 三夫人 各 有一男 以公盧氏出也. 1702 以肅宗 二十八年 壬午 十一月 十八日生 生四世 參判公卒 遺言 家藏書籍 悉傳于四歲兒. 人以 參判公 知子, 比諸 蘇明允之 知子瞻. 後二年 盧夫人卒, 兩兄亦先後俱亡, 公育于 白馬江庶兄家, 自幼好讀書, 不煩師督, 文藝夙就, 十參歲 作科體詩, 人皆傳誦, 然窮鄕孤露, 壯而未娶, 會墨沼 判書公 覲父 舍人公 金璧亭白馬上游(流?), 聞公名 仍命棹委訪, 一見許以女, 公擧鄕試解額而娶于京時, 公年十九而 趙夫人纔 十四矣. 明年 公中進士, 乃曰 此不足而成 吾名, 將歸而 讀書, 趙豊原曰 以君之才 取科第 如拾芥爾, 何必還鄕 然後讀書, 趙東谿 特勤之曰, 歸而讀書 勝於處甥館 求速成也. 東谿 名龜命, 豐原 名顯命, 俱墨沼 從昆季. 墨沼 知公志 不可回, 治任送女曰, 吾而成 吾婿(壻)志也. 於是 公 還白馬 卜築 玉壺洞中, 自號玉壺子, 專精讀書 若將 終身而, 趙夫人 主中饋 勤劬艱難, 墨沼 屢送馬激之 公終不動. 八年然後 反京第, 東谿讀 公所爲文 歎曰, 置之 東坡集中 未易辨矣. 於是, 士大夫 相識者 咸以 爲墨沼公 鑑識之明, 玉壺子 立志之遠, 趙夫人 弱齡 遠父母, 惟 夫子 是順之德, 皆卓 然出於人. 1735 英宗 十一年 乙卯(誤記;己卯) 公 登 增廣文科 表策仇 占(點)高第. 豐原來賀 且曰, 遲君十年 及第者 錫汝也, 公 笑應曰 誤我者 大鑑乎. 錫汝 東谿字, 大監 宰相指稱也. 上任 殿試文臣講, 公講 春秋經義 稱旨錫馬(賜馬) 攝史官, 七月 出爲 麒麟察訪. 御史 洪昌漢 以 公 持身淸約 終日 讀書而 郵卒稱, 惠聞 秩滿 陞典籍, 歷 禮曹 兵曹佐郞, 1740 英祖 十六년 庚申 拜 正言, 先是 黨論 爲搢紳間 殿崇, 自戊申後 數三 宰輔 中立 有兩是兩非之論 欲而宣揚 蕩平之化, 後進稍有 才望者 輒誘納之, 以長其勢而 乘時 射利者 亦爭趨之時, 趙豊原 兄弟 相繼秉軸, 鄭相羽良 與共同宗 屢以微旨 諷公 以觀俯仰, 公笑曰 四君子 處世寧受 四面風露, 安可借人 矮簷下寄活. 鄭相心 不悅 後, 當淸選 輒力沮止, 公 猶晏然 不以介意 亦未嘗出 一言而 推助也. (1741 英祖 17年) 辛酉 以慶尙都事 試士嶺右 前此 掌試者出入, 陳兵自衛 設棗圍排軍卒 猶兢兢如 臨勍敵, 公曰 是待多士 何薄也, 馳檄悉除之 乃 匹馬徐行, 諸生 狹路 聳觀 無敢喧動. 榜出一路 服其公明 榜中士後 登第者過半. 嶺人 至今稱 鄭試官 榜得人云 是行也. 仍兼 督運御史, 漕嶺穀 六萬五千石 賙北關饑民, 調粟發舟 指畫躬董, 九月而 竣事, 南民無怨, 北人賴活. (1742 英祖 18年) 壬戌除 高山察訪, 病不赴. (1744 英祖 20年) 甲子 復 以都事試士 湖西, 其 待湖士 如領試之爲而 湖士之悅服 亦如嶺右之人. 是秋有命 修續大典 公爲 纂輯郞, 首相 金在魯 以任事子 多而 衆議 不一, 請人各 起草而 裁擇之. 後 數日, 公 草成 首相取進曰 規式合用, 上曰儘好 且善書 纂輯續典 一鄭某足矣. 此後 他郞有缺 勿補, 仍命書 御製 (當作)篇題, 間拜 文學司書, 命除入直 專意纂輯, 每五日 登筵稟裁, 上 屢加褒 可益知 公才識 可用也. (1745 英祖21年)乙丑 四學生 洪啓億等 上疏忤旨, 禮曹參判 元景夏 奏竄啓億, 諸生詆 景夏署罰四學, 上怒謂 諸生無臣節 命鞫其父時, 公 以問事郞 特拜掌令以爲儒生 固有罪而 子罪施及其父, 非聖世事, 請寢鞫命, 上 愈怒 曰 此人乃此言, 名遠竄 未行還本職, 自引勉久之 配奉常寺正. 出補 蔚珍縣監. 首相 以續典 未完白留止 續典印進 賜熟馬已而 淸道郡守. (1747 英祖 23년) 丁卯 陞楚山府使 未赴移授 義州府尹, 州西邊鎖鑰 燕貨之所綰轂, 每事 還府尹 閱 象胥 包貨有不法, 屬官見可欲多 以燕直取之. 公 但伸譏禁 未嘗取一物, 出俸餘 別置一庫 以紓民雜役 名曰, 察眉庫 庫儲錢穀 殆以萬計 及瓜歸 惟載書籍已而, 邊人爲之謠曰 府尹淸明 前有一韓, 後有一鄭, 韓指韓祉也.
1749 (英祖25年) 己巳 入爲承旨 歷刑曹,兵曹參議, (1750 庚午)明年出 三陟府使 三陟擅山海形勝. 公爲治 亦淸簡. 日以嘯咏 自適 嘗逼于 竹西樓下, 有訟者 從叔姪 爭僕, 公卽 擧酒語曰 吾爲汝官長 俗淳鏡淸 人稱仙吏, 汝乃今以叔姪爭訟, 得無欲此勝乎, 與汝此觴 一洗爭心 訟者 相顧愧服 受飮而出, 平分其僕 其不煩刑而 化人多類此, 秩滿歸旋除 洪州牧使 以三陟時, 檢獄不親 避御史啓論 適原州到 卽宥. 1754 (英祖 30年) 甲戌除 驪州牧使, 明年上以 上流多勢族 逋糴 遣御史閱簿, 御史還言 牧使 執法不撓 獨於宰臣 喪貸二石米, 上曰此人 與述續典 故能守法, 然此二石 可當他千石 命罷職. 初主調整者 別爲一朋時 人謂之湯黨, 旣而漸與 守舊論者 角立如氷炭而 甚則 機穽密布矣. 公 無意進取介于 自守十數年 來不在散地, 則 棲遑下邑 及 自驢歸 遂取東郊 (1차)明德洞 結芽穿池, 因自號止堂 間或除職 乍出旋還. 1757 (英祖 33年) 丁丑 以承旨召入會 鏡城府使缺 鏡荒遠荐饑 道臣請擇人 纔出代矣. 上曰 予當自擇 此承旨可, 公於是受命治鏡 民忘災饑, 乃選 府下秀才, 躬自謹道, 一年登進士者二人, 鏡之有進士 是此. 戊寅 以本府降爲 判官遞, 1759 (英祖 35년) 己卯 拜大司諫 旋除 原州牧使, 1761 (英祖 37年) 辛巳 又以本牧 降判官遞, 連除 承旨 刑曹 戶曹參議, 連解職 輒歸 (2차)明德別業. 1762 英祖 38年) 明年 秋 臺臣 柳善養 乘時訐之, 以爲鄭某 前爲承旨 不白 趙宗溥疎 欺蔽天聽, 公坐 是削黜, 始宗溥 上書小朝 託以言事實 欲譸張詆訕 使聞于大朝云. 1764 (英祖 39年) 甲申 始敍 判決事, 尋出爲 綾州牧使. 1765 (英祖 41年) 乙酉 棄歸, 公 常以 先大夫卒時, 幼不極持服 爲終身慟, 每出宰 必權奉祠版 挾宗孫 以行 及 是爲 先大夫 卒周甲也. 歸公州廬于 墓下終三年, 日拜墓 寒暑不廢, 所處 茅廬 迫陋, 藜糲僅繼 雖 少壯殆 不能堪, 公 以衰耋 處地裕如也. 1767 (英祖 43年) 丁亥 以工曹參議 還朝, 移承旨, 歲中 應製者三 ,上稱之曰 其文老而 益精 輒 居魁也. 1768 (英祖 44年) 戊子 再授驪州, 1769 (英祖 45年) 己丑 解官, 未歸疾作 以五月 初七日卒 享年六十八歲. 吊(弔)祭 致賻如儀 以遺命 從先祖, 葬公州 國士洞 壬坐原, 有遺集若干卷 藏于家.
貞夫人 豐壤趙氏 柔惠有婦德, 父 判書 諱 錫命, 祖 舍人 大壽, 先公 十參年卒, 別葬公州之 陶谷, 有 四男五女 男長樹 進士, 次杆 僉中樞, 次柱 縣監, 次楞. 樹 楞 早卒. 女適 朴師邵, 李之華, 任希翼, 朴培源, 沈匡之, 師卲 匡之 進士, 側出四女 南漢老 沈得秀 金厚鎭 趙咸進, 後鎭僉樞. 樹一女 無嗣 杆子 祖榮爲之子, 前正言 女 李敬簡 縣監. 杆 二男三女 男祖榮 祐榮, 祐榮生員, 女 閔景淹 進士, 洪樂定 任百禹. 柱 三男三女 男祉榮, 女 李英來 申順進士 沈鎬 洪冑淵生員. 祖榮 二男 埴 次幼. 任希翼 子 天常 校理.沈匡之 繼子 能繼. 沈得秀 子某, 女 不盡錄. 公 爲人 聰明 剛果 聲音 爽亮, 風流文彩 傾一時, 雖 樽俎間 談笑, 足以動人然 脫略不群, 凡俚瑣之物 不掛於眼, 勢利之談 不留於耳, 人或 以輕世 肆志目之而 公 夷然自若也. 公 卽早失怙恃 推孝心以友于, 家宗孫窮孤 竭力濟之. 素所 養育公者 庶兄 老而貧甚, 凡衣食之需 必視 其身無別焉. 一夷寡 且老 公 激揚 以致歡 視其出如 己出. 三十年 同室 婢僕 無間言. 公卒, 妹子金山厚 服之猶諸父, 曰 吾舅 於吾母 如司馬公之養 其兄也. 世故 有稱道, 公 文華者至於 內行之備, 顧未易盡知 且 公 外若簡疏而 內實綜明.
其爲靑道 及 三陟也. 査隣邑獄 淫殺事而 理出之曰 一罪人失出 輕而傷倫綱 累敎化爲重.慶尙監司 權爀, 謄牒置案 誦於人 曰 經濟手也. 江原監司 尹得和 以書相賀曰 此査案 可謂神鬼 失其明其爲辛 不但在 伸枉人也. 前後 歷州縣七八, 簾閣手卷 若無所爲而, 吏不敢欺 民頌其淸. 少時旣廢 擧績學 至晩年猶 秉燭讀書 徹朝不侵 由其多積而 發之故操(措)筆 臨紙若不 經意而 論事析理 勃勃有生 氣詩不務工 惟當場揮濾而 亦 神韻奇氣 自不可掩也. 始公出身 一時 名士大夫 多慕用公, 公獨亢然,不與之俯仰. 趙豊恩 載浩與公 少相善也. 秉國政 每 字公而歎曰 某也 何事不可當 何官不可 故獨恨伊 不欲也. 嘗遇諸 弼雲看花會 要公詩賦 公有 世故邇來 見面稀之句, 豊恩作色而起. 後 豊恩謫居, 公送子 僉樞慰別, 豊恩乃 歎曰, 明哲君子 若翁之謂, 江湖鳧雁 吾欲從之而 末由也. 盖公處世 無適無莫 不激不隨, 故方 諸公之各 立樹黨, 以一人而 或怒或悅 悅也, 悅己 不附於彼, 怒其 不附於己, 終見其 無所附離, 則 悅與怒 皆不深切, 以故無 引綆推轂而 亦無 擠陷機穽者. 夫 以文學才智, 雖 不能華國 經世而 得以棲遲郡縣 觀樂令終, 則 趙豊恩 明哲之歎 養有見英. 梧川 李相國 宗城, 嘗於 李仁平 普赫 曰, 鄭某 以經世之才 華國之文 不克 需用於 當世, 然 吾不爲 鄭某嗟而, 反爲 鄭某榮之. 烏(嗚)呼, 李相國 可謂 知公矣.
外孫 任天常 以僉樞令, 謹撰 公官歷 事行如右, 以備秉筆者 採擇焉.
음역;
지당집 ; 외왕고 대사간 지당 정공행장. 외손 임천상 찬.
공휘하언 자미중 호지당, 정씨본 영일현인 신라 간의대부 종은지후야. 국초 지의정부사 공간공 홍, 병조판서 정숙공 연, 정숙공 생판결사 자원, 판결사 생첨정 함, 첨정 생진사 란年, 진사 생현감 공, 현감 생찰방 충방 시위 공고조, 증조 휘락 생원 증집의, 조 휘석기 증좌승지, 고 휘무 목사 증리조참판 삼세증관이공 추은야. 참판 범삼취 함양지박, 칠원지윤, 풍천지노, 로씨 송재선생 숙동지후 사인 빈(瀕)(?穎;영)녀. 삼부인 각 유일남 이공로씨출야. 1702 이숙종 28년 임오 11월 18생, 1705 년 생4세 참판공졸 유언 가장서적 실전우4세아.
인이 참판공 지자, 비제 소명윤지 지자첨. 1705년, 후2년 로부인졸, 양형역선후구망, 공육우 백마강서형가, 자유호독서, 불번사독, 문예숙취, 십삼세 작과체시, 인개전송, 연궁향고로, 장이미취, 회묵소 판서공 근부 사인공 금벽정 백마상유(流?), 문공명 잉명도위방, 일견허이녀, 공거향시 해액이 취우경시, 공년십구이 조부인재 십사의. 명년 공중진사, 내왈 차부족이성 오명, 장귀이 독서, 조풍원왈 이군지재 취과제 여습개이, 하필환향 연후독서, 조동계 특근지왈, 귀이독서 승어처생관 구속성야. 동계 명구명, 풍원 명현명, 구묵소 종곤계. 묵소 지공지 불가회, 치임송녀왈, 오이성 오서(壻)지야. 어시 공 환백마 복축 옥호동중, 자호옥호자, 전정독서 야장 종신이, 조부인 주중궤 근구간난, 묵소 루송마격지 공종부동. 팔년연후 반경제, 동계독 공소위문 탄왈, 치지 동파집중 미이변의. 어시, 사대부 상식자 함이 위묵소공 감식지명, 옥호자 입지지원, 조부인 약령 원부모, 유 부자 시순지덕, 개탁 연출어인. 1735 영종 11년 을묘(오기;己卯) 공 등 증광문과 표책구 점(點)고제. 풍원래하 차왈, 지군십년 급제자 석여야, 공 소응왈 오아자 대감호. 석여 동계자, 대감 재상지칭야. 상임 전시문신강, 공강 춘추경의 칭지석마(賜馬) 섭사관, 7월 출위 기린찰방. 어사 홍창한 이공 지신청약 종일 독서이 우졸칭, 혜문 질만 승전적, 력 예조 병조좌랑, 1740 영조 16년 경 신배 정언, 선시 당론 위진신간 전숭, 자무신후 수삼 재보 중립 유량시량비지론 욕이선양 탕평지화, 후진초유 재망자 첩유납지, 이장기세이 승시 사리자 역쟁추지시, 조풍원 형제 상계병축, 정상우량 여공동종 루이미지 풍공 이관부앙, 공소왈 사군자 처세녕수 사면풍로, 안가차인 왜첨하기활. 정상심 불열 후, 당청선 첩력저지, 공 유안연 불이개의 역미상출 일언이 추조야. (1741 영조 17년) 신유 이경상도사 시사령우 전차 장시자출입, 진병자위 설조위배군졸 유긍긍여 림경적, 공왈 시대다사 하박야, 치격실제지 내 필마서행, 제생 협로 용관 무감훤동. 방출일노 복기공명 방중사후 등제자과반. 령인 지금칭 정시관 방득인운 시행야. 잉겸 독운어史, 조령곡 6만5천석 주북관기민, 조속발주 지화궁동, 9월이 준사, 남민무원, 북인뢰활. (1742 영조 18년) 임술제 고산찰방, 병불부. (1744 영조 20년) 갑자 復 이도사시사 호서, 기 대호사 여령시지위이 호사지열복 역여령우지인. 시추유명 수속대전 공위 찬집랑, 수상 김재로 이임사자 다이 중의 불일, 청인각 기초이 재택지. 후 수일, 공 초성 수상취진왈 규식합용, 상왈진호 차선서 찬집속전 일정모족의. 차후 타랑유결 물보, 잉명서 어제 (當作)편제, 간배 문학사서, 명제입직 전의찬집, 매5일 등연품재, 상 루가포 가익지 공재식 가용야. (1745 영조 21년) 을축 사학생 홍계억등 상소오지, 례조참판 원경하 주찬계억, 제생저 경하서벌사학, 상노위 제생무신절 명국기부시, 공 이문사랑 특배장령이위유생 고유죄이 자죄시급기부, 비성세사, 청침국명, 상 유노 왈 차인내차언, 명원찬 미행환본직, 자인면구지 배봉상사정. 출보 울진현감. 수상 이속전 미완백류지 속전인진 사숙마이이 청도군수. (1747 영조 23년) 정묘 승초산부사 미부이수 의주부윤, 주서변쇄약 연화지소관곡, 매사 환부윤 열 상서 포화유불법, 속관견가욕다 이연직취지. 공 단신기금 미상취일물, 출봉여 별치일고 이서민잡역 명왈, 찰미고 고저전곡 태이만계 급과귀 유재서적이이, 변인위지요왈 부윤청명 전유일한, 후유일정, 한지한지야.
1749 (영조25년) 기사 입위승지 역형조,병조참의, (1750 경오)명년출 삼척부사 삼척천산해형승. 공위치 역청간. 일이소영 자적 상핍우 죽서루하, 유송자 종숙질 쟁복, 공즉 거주어왈 오위여관장 속순경청 인칭선리, 여내금이숙질쟁송, 득무욕차승호, 여여차상 일세쟁심 송자 상고괴복 수음이출, 평분기복 기불번형이 화인다류차, 질만귀선제 홍주목사 이삼척시, 검옥불친 피어사계론 적원주도 즉유. 1754 (영조 30년) 갑술제 여주목사, 명년상이 상류다세족 포적 견어사열부, 어사환언 목사 집법불요 독어재신 상대이석미, 상왈차인 여술속전 고능수법, 연차이석 가당타천석 명파직. 초주조정자 별위일붕시 인위지탕당, 기이점여 수구론자 각립여빙탄이 심칙 기정밀포의. 공 무의진취개우 자수십수년 래불재산지, 칙 서황하읍 급 자려귀 수취동교 명덕동 결아천지, 인자호지당 간혹제직 사출선환. 1757 (영조 33년) 정축 이승지소입회 경성부사결 경황원천기 도신청택인 재출대의. 상왈 여당자택 차승지가, 공어시수명치경 민망재기, 내선 부하수재, 궁자근도, 일년등진사자이인, 경지유진사 시차. 무인 이본부강위 판관체, 1759 (영조 35년) 기묘 배대사간 선제 원주목사, 1761 (영조 37년) 신사 우이본목 강판관체, 연제 승지 형조 호조참의, 연해직 첩귀 명덕별업. 1762 영조 38년) 명년 추 대신 유선양 승시알지, 이위정모 전위승지 불백 조종부소 기폐천청, 공좌 시삭출, 시종부 상서소조 탁이언사실 욕주장저산 사문우대조운. 1764 (영조 39년) 갑申 시서 판결사, 심출위 능주목사. 1765 (영조 41년) 을유 기귀, 공 상이 선대부졸시, 유불극지복 위종신통, 매출재 필권봉사판 협종손 이행 급 시위 선대부 졸주갑야. 귀공주여우 묘하종삼년, 일배묘 한서불폐, 소처 모려 박루, 려려근계 수 소장태 불능감, 공 이쇠질 처지유여야. 1767 (영조 43년) 정해 이공조참의 환조, 이승지, 세중 응제자삼 ,상칭지왈 기문노이 익정 첩 거괴야. 1768 (영조 44년) 무자 재수려주, 1769 (영조 45년) 기축 해관, 미귀질작 이5월 초7일졸 향년륙십팔세. 적(弔)제 치부여의 이유명 종선조, 장공주 국사동 임좌원, 유유집약간권 장우가.
정부인 풍양조씨 유혜유부덕, 부 판서 휘 석명, 조 사인 대수, 선공 십삼년졸, 별장공주지 도곡, 유 사남오녀 남장수 진사, 차간 첨중추, 차주 현감, 차릉. 수 릉 조졸. 녀적 박사소, 리지화, 임희익, 박배원, 침광지, 사소 광지 진사, 측출사녀 남한노 침득수 김후진 조함진, 후진첨추. 수일녀 무사 간자 조영위지자, 전정언 녀 이경간 현감. 간 이남삼녀 남조영 우영, 우영생원, 여 민경엄 진사, 홍악정 임백우. 주 삼남삼녀 남지영, 녀 이영래 신순진사 침호 홍주연생원. 조영 이남 식 차유. 임희익 자 천상 교리.침광지 계자 능계. 침득수 자모, 여 부진록. 공 위인 총명 강과 성음 상량, 풍류문채 경일시, 수 준조간 담소, 족이동인연 탈략불군, 범리쇄지물 불괘어안, 세리지담 불류어이, 인혹 이경세 사지목지이 공 이연자야야. 공 즉조실호시 추효심이우우, 가종손궁고 갈력제지. 소소 양육공자 서형 노이빈심, 범의식지수 필시 기신무별언. 일이과 차노 공 격양 이치환 시기출여 기출. 삼십년 동실 비복 무간언. 공졸, 매자김산후 복지유제부, 왈 오구 어오모 여사마공지양 기형야. 세고 유칭도, 공 문화자지어 내행지비, 고미이진지 차 공 외야간소이 내실종명.
기위청도 급 삼척야. 사린읍옥 음살사이 리출지왈 일죄인실출 경이상륜강 루교화위중. 경상감사 권혁, 등첩치안 송어인 왈 경제수야. 강원감사 윤득화 이서상하왈 차사안 가위신귀 실기명기위신 부단재 신왕인야. 전후 역주현칠팔, 염각수권 야무소위이, 이불감기 민송기청. 소시기폐 거적학 지만년유 병촉독서 철조불침 유기다적이 발지고조(措)필 림지야불 경의이 논사석리 발발유생 기시불무공 유당장휘여이 역 신운기기 자불가엄야. 시공출신 일시 명사대부 다모용공, 공독항연,불여지부앙. 조풍은 재호여공 소상선야. 병국정 매 자공이탄왈 모야 하사불가당 하관불가 고독한이 불욕야. 상우제 필운간화회 요공시부 공유 세고이래 견면희지구, 풍은작색이기. 후 풍은적거, 공송자 첨추위별, 풍은내 탄왈, 명철군자 야옹지위, 강호부안 오욕종지이 말유야. 개공처세 무적무막 불격불수, 고방 제공지각 립수당, 이일인이 혹노혹열 열야, 열기 불부어피, 노기 불부어기, 종견기 무소부리, 칙 열여노 개불심절, 이고무 인경추곡이 역무 제함기정자. 부 이문학재지, 수 불능화국 경세이 득이서지군현 관락령종, 칙 조풍은 명철지탄 양유견영. 오천 리상국 종성, 상어 이인평 보혁 왈, 정모 이경세지재 화국지문 不克 수용어 당세, 연 오불위 정모차이, 반위 정모영지. 오(嗚)호, 리상국 가위 지공의.
외손 임천상 이첨추령, 근찬 공관력 사행여우, 이비병필자 채택언.
~ 끝 ~
大司諫 止堂 鄭公行狀
해설 ;
공이름 하언, 자 미중, 호는 지당이다. 정씨는 영일 인으로 여기를 본관으로 한다. 신라의 간의대부 종은의 자손이다. 조선의 국초시 지의정부사 공간공 홍, 병조판서 정숙공 연은 조조정대신의 벼슬에 오르다. 정숙공은 판결사 자원을, 판결사공은 첨정 함을, 첨정공은 진사 난년을, 진사공은 현감 공을, 현감공은 찰방 충방을 낳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생원 락으로 추증으로 집의, 조는 처사 석기로 추증으로 좌승지, 고는 무로 목사를 추증으로 이조참판이다. 공은 3세에 걸쳐 추은 하다. 참판공은 3번 결혼하니, 함양 박씨, 칠원 윤씨, 풍천 노씨이며, 노씨는 송재 선생 숙동의 후손, 사인 빈(瀕)/영(穎)의 딸이다. 부인들은 각자 1남을 두었는데, 공은 노씨 소생이며, 1702 숙종 28년 임오 출생. 태어난지 만 3년 해수로 4년 째 사망, 유언으로 집에 있는 서적은 모두 이 4살 아이에게 전하다. 참판공이 아들을 아끼는 것은, 소명윤이 아들 자첨을 아끼는 것에 비유하다. 2년 후 노씨 부인이 죽고, 2형은 선후로 먼저 죽어, 백마강가 서형과 같이 살다.
공은 어려서 책보기를 좋아하고, 스승의 가르침에 번거롭게 아니 하였다. 글을 일찍 깨우쳐, 과체시를 지어 사람들에 의하여 말들이 전하여 칭송되다. 그런데,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먼 시골에서 홀로 자라 나이 들어서 아직 미혼이다. 이런 시기, 묵소 조판서 공이 아버지 사인공을 만나러 금벽정에 가 있을 때, 정자는 백마강 상류에 있으므로, 공의 소문을 듣고 노를 저어 찾아가 만나보고 허혼하여, 공이 향시에 합격하기에 이르러, 서울로 올라와 결혼하다. 공이 19세, 조부인은 14세 때 이다. 다음 해 공이 진사에 합격하고 이어 성공을 위해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하여 (백마강 고향)에 가서 공부를 하려 하다. 이에 대하여 조풍원은 공에게 군의 재간으로 과거에 합격 할 수 있는 실력이 겨자를 줍는 것이나 다름없이 쉽게 가능 한 실력자라 하면서, 시골에 가서 공부하려고 하느냐 하다. 특히 조동계는 시골에 가 공부 하는 것이 처갓집에 가서 열심히 하는 것이 빠르다 하다. 동계는 구명, 풍원은 현명이고, 같이 묵소의 사촌형제이다. 묵소공은 공이 시골에 가 공부 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행장을 차려 딸과 함께 보내며, 내 사위의 뜻을 이루게 한다 하다. 공은 이미 백마강가에 와서 옥호동에 터를 골라 잡고, 집을 지어 자기가 호를 스스로 옥호자라 하고, 오로지 글 공부에 힘쓰니, 조부인은 식사 등 뒤 바라지에 노고가 많게 되다. 그동안 묵소공이 여러 차례 말을 보내 오라 하여도 응하지 아니 하더니 8년이 지나 서울에 오다. 이 때 공이 공부하여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동파집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칭찬하다. 사대부 들 중 이를 아는 이가 말하기를, 묵소공이 잘 알아서 보살펴주고, 옥호자는 커다란 꿈을 안고 노력하고, 조부인은 나이도 어린데 부모를 멀리 나와 있으면서 남편에 오직 순종하는 덕행이 뛰어나 그리 되다. 1735 영조 11년 을묘, 공이 증광 문과에 급제하니, 표와 책의 높은 점수를 본 풍원공이 와 축하하고 말하기를 십년간 급제를 기다린 이는 석녀라 하다. 이에 공이 웃어 대답하기를 나를 그르친 이가 바로 대감이냐 하다. 석여는 동계의 자, 대감은 재상을 뜻 한다. 상감이 전시 문신 강의에 친임 할 때, 공이 춘추에 관한 강서를 하였는데, 뜻 풀이가 임금의 마음에 들게 하여, 공은 말을 하사받고 사관이 되다. 7월에 기린찰방에 부임 한 후, 어사 홍창한이, 공이 몸가짐을 바로하고 청렴검소, 종일 글을 읽는다는 우졸의 칭송을 듣고 전하다. 임기가 자주 차니, 전적으로 승진하여, 예조, 병조좌랑을 역임하다. 1740 영조 16년 경신, 정언이되다. 정언이 되기 전 조정 당론은 고관 진신들이 화를 자초하다. 1727 (영조 4년)무신 이인좌의 난 이후, 서너 재상이 서로간 두 논쟁이 맞다 아니 맞다하는 논쟁을 중립, 탕평을 펴 교화선양 하여 나갈 때, 후진 들 중 재망이 있는 자를 갑자기 권유하여 모이게 되니, 이익을 챙기려는 자는 서로 다투어 마음이 끌려 들어오다. 시기를 타 조풍원 형제가 서로 이어서 정권을 잡게 되다. 이 시기, 정 정승 우량은 공과 같은 종씨라며, 묘하게 무슨 뜻으로, 여러번 공을 풍자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고만 있냐 하니, 공이 웃으면서 사군자가 처세하는 것은, 오히려 사면의 비바람을 맞지, 사람이 어찌 남의 처마아래 의지 하겠느냐 하다. 이에 정 정승은 즐거워 하지 아니하다. 이후 홍문관 관원 선발에 갑자기 제지를 당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마음을 편히 하여 신경을 아니쓰고, 또 한 도와달라 한번도 아니 하다.
1741 영조17년 신유 경상도사가 되어 시험중, 영남지방 선비의 시험장에서 시험을 관장하는 자가 출입시 가시를 치고 호위하는 군졸 모습이 강적을 상대 하듯 하고 있는 바, 공이 여러 선비들에게 이런 박대를 하는가 하면서, 이에 대한 바로 잡는 격문을 공고하여 모두 없도록하니, 이를 필마를 타고가는 제생들이 길을 끼고 우러러 보며 감히 함부로 하지 아니하다. 방이 있는 것을 보고 모두 공명하게 복종하고, 방중에는 좋은 사람이 나와 칭송하다. 이와 같이 할 무렵, 독운어사를 겸하여, 영남의 곡식 6만 5천석을 배편으로 보내어, 관북의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다. 곡식을 모아 배를 징발하고 계획을 잘 마무리 할 때, 직접 참여하여 9일 동안 구제하니, 남쪽 사람 들에게는 원망 함이 없도록 하고, 한편 북쪽의 사람들은 가난의 구제를 받아 살아나다. 1742 영조 18년 임술, 고산찰방을 임명받고 병이나서 부임하지 아니하게 되다. 1744 영조 20년 갑자, 또 호서의 도사로 나가, 선비의 시험을 치를 때, 영남과 같이 대우하니, 이곳 호서의 선비도 영남같이 기꺼이 잘 복종하다.
이해 가을에 속대전 편찬 감수하는데 공이 찬집랑으로 나가다. 수상 김재로가 일을 맡아 행하는 자가 많아 각자가 만든 안을 검토와 재결을 거쳐 채택하라 하다. 며칠 후 공이 초안을 만들어 수상에게 주니, 이를 받아 수상이 임금에게 올릴 때 규식이 맞는다 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참으로 글을 잘 썼다 하며, 속전을 찬집 할 때 정모 하나로도 족하다 하다. 이 후로 찬집인원의 결원이 있으면 보충아니 하게하고 어제의 편제에 위 공의초안을 사용하도록 하다. 얼마 후, 문학사서를 임명하다. 바로 찬집에 들어가 전념하여 매 5일, 경연에 나와 재결을 받도록 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포상하고 공의 재주와 식견이 훌륭하다 하다.
1745 영조 21년 을축, 홍계억과 4 유생이 임금의 뜻에 거역하니, 예조참판 원경하가 임금에 아뢰어 계억을 귀양을 보내다. 여러 유생이 원경하의 이런 귀양가 처벌받게 한 처사에 대하여 질타하니, 임금이 이를 알고 매우 노하여 이 유생들의 신하된 도리가 없다 하고, 아비까지 처벌 국문하게 이르다. 공이 이 때 국문시에 기록과 낭독을 하는 직책으로 특임장령에 있었다. 공이 그르다 생각하여, 아들의 죄로 아버지를 처벌하는 것은 좋은 정치를 하는 이 태평시기에 맞지 아니하다 하다. 친국을 멈추고 침소에 들어가 자라 청하다. 임금이 진노하여 이 자가 도리어 이런 말을 하다니 하고, 멀리 귀양 보내라 하다. 공이 떠나기 전에 원상복직 하게 되었으나 스스로 책임지고 물러나다.
시간이 흘러 오랜 뒤에 봉상시정을 거치고, 울진현감으로 나가려 할 때, 수상이 속전의 완성이 아직 아니됨을 상감에 알려 편찬 하도록 하니 머물게 되다. 속전의 인쇄본을 보신 임금이 칭송하고, 길든 말을 하사하다. 얼마 아니가서, 청도군수로 나가다.
1747 영조 23년 정묘, 초산부사로 승진하여 나가는 도중 의주부윤으로 바뀌어 나가다. 의주는 나라의 서편에 위치하여 중국과 화물이 오가는 교역이 많은 요새지다. 항시 매번 부윤의 입회 한자리에서 검역 통관이 이루어진다. 포장 화물의 불법을 검사 하면서 관리가 물품에 욕심을 내는 것을 보고 꾸짖고, 중국인 속관의 뇌물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다. 녹봉을 지급하고 남은 곡식은 별도의 창고에 두고, 백성의 노역을 덜게 하였으니, 일컬어 찰미고라 하다. 저축한 곡식과 동전이 창고에 넉넉 하였다. 임기 만료가 되어 귀환시 자세히 장부에 기록을 남기다. 이 의주에 백성들은 의주 부윤 중에 청렴하여 이름이 있는 분은 전임자로 한이, 후임자로는 정이 있다 칭송하다. 한은 한지이다.
1749 영조 25년 기사, 조정에 승지로 들어와, 형조 병조참의를 거쳐 삼척부사로 나가다. 삼척은 제 멋대로 뻗은 산줄기며 바다가 모두 수려하다. 공은 이곳을 다스릴 때, 경치 걸맞게 청렴 검소하게 하다. 시가를 읊고 유유자적하며 쉬는 날도 있었다. 어느 날 죽서루에 유희 중인 때, 종숙질간에 들어와 노비문제로 다투는 송사가 있었는데, 공이 술잔을 들며 말하기를 내가 여기를 다스리는 사람인데, 이 동네가 맑고 신선이 깃드는 아름다운 곳이며 사람들도 순박 후덕 하거늘, 어찌하여 신선같은 이 곳에 살면서 숙질간에 소송으로 싸우냐 그릇 된 마음 가짐을 씻고 이 술잔을 마시라 하니, 소를 제기한 이들은 술을 받아 마시고 나가 공평하게 노비를 처리 하다. 공은 형벌로 번거롭게 아니하고, 백성의 교화를 이와같이 하다. 임기 끝나 홍주목사로 나가는 길에, 검옥에 관하여 삼척 근무시 친임을 아니 하였다는 어사의 계론으로 원주에 귀양가다. 도착하자 용서가 되다.
1754 영조 30년 갑술, 여주목사로 부임하다. 부임 다음해 임금이 사대부 상류 권세가 집안들이 많이 살아 비축한 쌀을 빼가니, 어사를 보내 이를 조사하게 하다. 어사가 조사 한바, 목사가 법 집행을 벗어 나가면서, 재신의 상사에 쌀 2가마니를 대여하게 한 것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데, 임금은 이자가 속전을 찬집하여 능히 법을 잘 알터이므로, 이 2가마니는 일반인의 천석과 같다 하고 명하여 파직하다.
최초에 정권을 잡고 부리는 자가 붕당을 만들면, 사람들은 붕당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마치 솥에 탕을 끓이듯 치열 하게 된다 하다. 자기와 다른 수구론을 펴는 붕당은 서로 버티고 용납아니 하게되니, 어름과 숯같이 화합이 안되고, 여기저기 기밀히 함정을 파놓다. 공은 여기에 말려 간 듯, 애써 일을 할 곳을 잃었다. 평생 나 홀로 지켜 나가기를 십수년이 되다. 그동안 조용한 곳에 가보지 아니하여, 거처 할 곳을 정하지 못 하다. 여주의 관아와 읍내를 떠나 갈 곳을 찾아 나서, 서울 동쪽 교외 (1차)명덕동에 초가를 짓고, 못을 파 거처를 정하니, 이름을 지당이라 하게되다. 어찌다 직책이 주어지면 그냥 나갔다 돌아오기도 하다.
1757 영조 33년 정축, 승지로 나갈 때, 마침 경성부사가 비어 있었다. 감사가 경성은 멀고 백성이 가난을 이기지 못 한 곳이라, 근무자를 잘 선택하여 보내라는 청을 넣어, 공이 대신 나가게 되다. 감사가 청을 넣어서가 아니라,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자가 마땅하여 이승지를 가하다고 선택하였다 하다. 경성에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니 재앙과 기아를 덜게 하다. 경성부내의 수재를 뽑아 직접지도 배움을 권장한지 1년만에 진사가 2인이나 되니, 이는 경성지역에 진사가 배출 된 것은 이시기 비롯 되어지다. 다음해 무인년에 판관이 다스리는 고을로 강등되어 나오게 되다. 1759 영조 35년 기묘, 대사간에 오르고, 바로 원주목사로 나가다. 1761 영조 37년 신사, 판관이 다스리는 고을로 강등되어 나오다. 이어서 승지, 형조, 호조참의가 되다. 그러나 해직하여 (2차)명덕으로 와 별업에 종사하다. 다음해 이를 틈타 대신 유선양이 속임수, 정모는 전에 승지로 있을 때 조종부 상소와 관련, 천청을 속여 가린 점을 아뢰지 아니하였다는 것으로 공이 연좌되고 삭출되다. 그러나 종부가 소조에 글을 올려 언사에 의한 부탁으로, 터무니 없는 거짓으로 헐 뜯고자 한 점을 대조에 고변한 것으로 비로소 밝혀내 알려지다. 1764 영조 40년 갑신, 판결사로 서임되고, 얼마 아니되어 능주목사로 나갔으나, 다음해 그만두고 나왔다. 공은 언제나 아버지의 3년상에 어려서 복을 마치지 아니 하게된 슬픔이 종신으로 남아 있어, 벼슬자리에 나갈 때 정도아닌 사판을 받들곤 하다. 이제 부친 가신지 갑자가 된 60년이 되어, 공주 국사동 묘아래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 하며 3년을 지내다. 매일 산소에 나가 추운 때, 더울 때 가리지 아니하고 예를 다 하다. 모려의 시묘 살이는 누추하고 끼니는 명아주나 메조미 쌀로 혈기왕성 한 젊은이도 견딜 수 없을 진데, 공은 신념의 여유를 지니고 봉사를 마치다.
1767 영조 43년 정해, 공조참의로 조정에 나가서 승지로 전직하다. 이해 어느 날, 임금의 부름으로 나가 제술을 3번 한 바, 임금이 칭찬하기를 글 씀이 늙어가면서 더욱 정교하다 하였고, 매번 으뜸을 차지 하다. 1768 영조 44년 무자, 2번째 여주목사로 나갔으나, 다음해 영조 45년 기축, 병으로 나가지 못해 해관되고, 돌아오지 못 하여, 5월 초7일 생애를 마치니, 68세이다. 장례식은 법식대로 하고, 유언으로 선조를 따라 공주 국사동 임좌 언덕에 모시다. 유집 몇권이 있어 집에 간직하다.
정부인 풍양조씨는 유순하고 부덕이 있으며, 아버지는 이름이 석명, 할아버지는 사인 이름이 대수이다. 공보다 13년 앞서 사망, 공주 도곡에 묻혀있다. 적출은 4남 5녀. 장남은 수, 진사. 다음 간, 첨중추. 다음 주, 현감. 다음 간, 다음 릉, 어려서 죽었다. 장녀는 박사소, 다음 이지화, 임희익, 박배원, 심광서 순서로 출가하니, 5사위이다. 사소와 광지는 진사이다. 측출은 서녀 4명, 남한노, 심득수, 김후진, 조함 순서로 출가하니, 4사위이다. 진후는 첨추이다. 수는 1녀로 아들이 없어 무사이니 간의 큰아들 조영을 입양 하였으며, 조영은 전정언이다. 딸은 이경간에 출가하고 그의 벼슬은 현감이다. 간은 2남 3녀로, 아들은 조영과 유영, 유영은 생원이다. 3녀의 사위는 민경엄으로 진사, 다음으로 홍락정, 임백우이다.
주는 3남 3녀로, 아들은 지영, 사위는 이영래, 신순은 진사, 심호이다. 조영은 2남으로 식과 아직 어린 아들이 있다. 임희익의 아들 천상은 교리, 심광지의 계자는 능계, 심득수의 아들은 아무개 등 사위의 딸들은 다 기록하지 못 한다.
공은 총명 과감하며, 언사가 시원 명랑하다. 풍채가 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한 때끌어 들였다. 술 자리라도 웃음으로 사람의 심정을 흔들다. 그러나 남의 계략에 넘어가지 아니하니 여러사람 보다 범상하지 아니한 바, 속된 많은 유혹에도 옥과 재물에 안중을 두지 아니 하다. 권세와 탐익스런 말은 귀 담아 듣지도 아니 하다. 누군가는 공이 세상을 경시하고 의지가 방자하다 지목 하기도 하나 태연자약 하다. 공은 어려서 부모를 잃어 효심이 없는 것 같으나 이를 믿어 따르니, 가족을 사랑하고 주위 형제와 우애하며, 종손이 곤궁하여 외로운 처지를 당하면 힘을 다하여 도와 주다. 어려서 양육한 서형이 노약 곤궁하게 되니 의식의 수용을 마련하여 돌보기를 자신을 위하여 하듯 하다. 또 한 누님이 과부로 늙어 의지 할 곳을 마련 부양하며 소생의 자식을 자기소생과 같이 대하다. 30년이나 같이 지내온 비복도 탄복하여 나쁜 말을 하지 아니 하다. 누님의 아들 김산후가 복을 입고 있을 때, 자기 아버지 형제에게 말을 하기를 외숙이 어머니에게 한 우애는 사마공이 형을 부양하듯 비유 한 바, 모두가 진실한 칭찬을 아끼지 아니 하다.
공은 외모는 대범하고 소탈하여 보여도, 속내는 자세하고 사리에 맞다. 청도와 삼척에 재직시 읍내 음살 사건의 옥사를 사찰하여 도리를 밝혀 냈으니, 일죄의 죽을죄인을 가벼운 처벌을 경시하여 인륜과 기강을 반하여 무너지게 하는 점과 교화를 계속 여러번 힘쓰지 아니 한 것을 중시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상감사 권혁이 위 이 사안을 필사 표본으로 하여 집무실 책상위에 소송 사건의 거울로 삼고 칭송하니, 백성의 구제를 하는데는 나라 다스리는 선수가 공이라 하다. 강원감사 윤득화가 서신으로 칭송하며 말하기를, 이 사안을 신비하며 사리를 명료하게 처리 한 점이, 억울한 신원인을 위하여 다행한 것만 있다 할 것이 아니다 하다.
주현 고을 7,8 곳을 재직시 외부와 차단하고 안에서 두루마리 문서나 뒤적이고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관아의 관리는 감히 거역하지 아니하고, 고을 사람은 공의 청렴 함을 칭송하다. 젊어서 열심히 학문을 닦고, 만년에 이르러서도 더욱 불을 밝히고 글을 읽어 날이 새는 지도 모르고 공부하는 때가 많다. 이렇게 공부하니 지식이 쌓여, 공을 드리지 아니하고 붓과 종이를 대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이치를 확실하게 하다. 시를 지어 써나갈 때는 단번에 붓을 휘둘러 신묘 한 운치를 표현하여 그 기묘 함을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하다. 마침내 공이 조정에 나가 일하자, 이름있는 사대부도 다 같이 반겨주다. 공을 채용 한 부서마다 공은 함께 일을 할 때 몸가짐을 자연스럽게 하여 누구에게도 저항하거나 자세를 굽히지 아니 하다. 조풍은 재호는 젊어서부터 공과 좋은 친구같은 사이다. 정권을 잡고 일 하며 공을 탄식하기를 아무개는 무슨일이든 감당 하지 못 하겠나, 또 어느 직책이든 하지 못 하겠는가,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것을 지적 하다. 지난 어느 날 일찍이, 필운간화회서 만났을 때, 공에게 시부를 요청하여 내용인 즉, 세상의 사고가 있은 이후 얼굴보기가 드믈도다 하는 시구로 풍은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여 풍은이 얼굴을 붉히고 나가다. 그러나 그 후 풍은이 귀향가 있을 때, 공이 아들 첨추를 보내 위로 하다. 이를 감탄하여 풍은이 말하기를, 명철한 군자는 옹 같은 사람을 일컫는다 하고는, 강물에 떠 고기를 잡는 오리와 기러기는 흐르는 물(정치 세도)을 따라 헤험쳐 다니지만 공은 그리 할 방도가 없었으니 안타 깝다 하다. 공은 대개 평생 처세를 하는 것에 대하여, 가능한 일, 불가능 한일에 어느 한편에 서지도 아니하고, 이를 자극적 행동과 무조건 복종하는 일 모두 내치다. 그리하여 여러 사대부 관리의 각자 붕당을 만들거나 하면, 독자적으로 바로하여 나가니, 노하는 일, 기뻐하는 일모두 다 추종아니 하므로, 멀리 하거나 가까이 하려는 기쁨과 슬쁨이 벼슬하는 동안 그다지 깊지 아니 하다. 두레박으로 물을 푸듯이 붕당의 파란속에 끌려가지 아니 하였고, 수레바퀴를 밀 듯이 정쟁에 말려들지도 아니하여, 함정을 만들어 그속에 밀치는 이가 없다. 공은 학문과 재주와 지혜의 높은 수준으로는, 나라를 빛내고, 치국 평천하에 이르지 못 하였으나, 각 고을의 수령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동안 너그럽게 하므로 안락을 취하여 평생을 마치다. 조풍은이 공의 명철한 것을 지적하여 감탄 함은 진실하게 이를 바라본 것이다. 오천 이 상국 종성이, 이 인평 보혁과 나눈 말에, 정모는 세상을 다스리는 재능과 나라를 빛내는 문학의 소유자로서 적소에 쓰이지 아니하였다 하면서, 그러나 나는 정모는 슬프게 살아온 것도 없고, 영화롭게 산 편이라 말 하고 싶구나, 아하, 그러면 이상국은 공을 알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손 임천상이 첨추의 명으로 삼가 공의 관력과 목민 치세의 사건 등 일생의 행적을 차례로 나누어 우의 글과 같이 지어 본다. 그리고 이 붓을 잡은 나의 표현이 후손에 채택이 잘 되기를 준비하여 둔다.
~ 끝 ~
첫댓글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