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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굴러가지마는, 이런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지마는 누가 어떻게 하는 주재자(主宰者)가 없다 이 말이여. 다른 종교하고 달라요. 다른 종교는 주재자를 꼭 이야기하는데, 주재자가 없어. 자기가 마음 쓰기 따라서, 오늘 당장에 마음 쓰는 대로 내 모습이 달라져. 내 모습이 달라져. 그래 좋은 공부 해가지고, 기분이 좋아가지고 ‘아~ 내가 이제 집에 가서 이렇게 너그럽게 가족들에게 잘 해야지.’하는 마음을 잔뜩 품고 이제 집에 딱 들어간다. 그럼 “오늘 어떻게 당신 인상이 다르네? 근사해 보이는데.” 당장에 그런 반응이 나온다니까. 그러면 반찬이 달라도 다를 것 아뇨? 금방 과보가 돌아오는 거요.
이런 것을 제불지소설(諸佛之所說)이라. 모든 부처님, 모든 깨닫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한다. 그 말이야. 제불지소설이라.
그 이런 거 알고, 그게 이제 우리가 이렇게 한두 번 듣는다고 금방 뭐 무릎을 탁 치거나 ‘아 그렇구나.’하고 이렇게 된 경우는 간혹 있지마는 또 드물어. 그 반복해야 돼. 반복해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아하 아하 아하’하고 무릎이 아프도록 계속 치는 거야.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하고, 그러면 저절로 내 자신이 정화가 돼. 다른 법 없습니다.
그게 저절로 정화가 됩니다. 그게 참선이고 그게 기도에요. 그보다 더 좋은 참선 없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기도 없어요. 내 자신이 진리, 참다운 이치를 깨달아서 내 자신에게 설득시키는 거.
내가 그래서 공부는 뭐라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고, 내 자신에게 말하자면 최상의 어떤 그 공경을 표하는 일이고 그런 거라고 했잖아요. 그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달라진다니까.
(2) 譬喩
譬如淨明鏡이 隨其所對質하야
現像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亦如田種子가 各各不相知호대
自然能出生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又如巧幻師가 在彼四衢道하야
示現衆色相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如機關木人이 能出種種聲호대
彼無我非我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亦如衆鳥類가 從殼而得出호대
音聲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譬如胎藏中에 諸根悉成就나
體相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又如在地獄에 種種諸苦事여
彼悉無所從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譬如轉輪王이 成就勝七寶나
來處不可得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又如諸世界가 大火所燒然이나
此火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譬喩
그 다음에 비유(譬喩)라 그랬어요. 비유들을 쭉 듭니다. 고런 이치를 가지고, 비유가 여러 개가 나와요.
② 譬如淨明鏡이 隨其所對質하야
비유컨댄 정명경(淨明鏡)이, 아주 밝은 거울이 그 대질(對質)한 바를 따라서. 거울이, 밝은 거울이 있어. 그런데 앞에 어떤 물건이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現像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그렇죠. 검둥이가 앞에 서면은 검둥이가 나타나고, 흰둥이가 서면은 흰둥이가 나타나고, 고양이가 지나가면 고양이가 나타나고, 개가 지나가면 개가 나타나듯이, 업(業)의 성품도 또한 그와 같다.
이게 내가 업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지옥도 되고, 아귀도 되고, 축생도 되고, 인도도 되고, 천도(天道) 신선처럼 천도도 되고, 아수라도 되고 죽어서 태어나는게 아니에요.
바로 되게 화가 나가지고 그냥 남을 막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날 때 혹 좀 딴 생각이 나거든 거울 앞에 얼굴 한 번 봐봐요. 그 얼굴이 어떤가? 자기 얼굴이 어떤가? 그리고 또 어떤 이치를 깨달아가지고 ‘야~ 나 인생 가뿐하다. 너무 좋다.’ 진리가 그 자기 정신 속에 들어와서 정화가 됐다고 할 때 얼굴 거울 한 번 딱 서봐요. 아주 신선처럼 보이지. 신선처럼 보여.
업성역여시(業性亦如是)니라. 정해져 있는 게 아녀. 내가 업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그렇다 이 말이여. 거울 앞에 누가 서느냐? 무엇을 갖다 대느냐에 따라서, 거울은 그냥 비춰줄 뿐이라. 거울은 무심해. 아~ 업 정해져 있는 거 아닙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뭐 주인이 따로 있나? 앉은 사람이 주인이다 하듯이 그야말로 우리 내 자신은 내가 하기대로 가는 거다. 내 자신은 내가 하기대로 가는 거여. 절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③ 亦如田種子가 各各不相知호대
또한 또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 밭에다가 어떤 종자(種子)를 뿌렸다. 그런데 그 종자들은 각각(各各) 불상지(不相知)여. 서로 알지를 못 해.
自然能出生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그러면서 자연(自然)히 서로 다 출생(出生)하죠. 싹을 틔우죠. 그와 같이 내가 뿌린대로 거두리라. 업성역여시(業性亦如是)니라. 밭에 뿌린 종자가 나듯이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참~ 너무나도 아주 뭐 누가 여기에 변명, 그런데 이제 이해관계로 돌아가면은 깜빡해버린다. 요기까지는 다 알아. “아 그 너무 당연한 걸 가지고 스님 뭐 그렇게 중언부언합니까? 쓸데없이 시간 보냅니까?” 조금만 이해관계로 벗어나면 요거 매(昧)해버린다니까. 인과관계 싹 매해버려.
그러니까 백장산에 백장스님도 하~ 백장스님도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하니까 야 이거 모르겠거든, ‘수행을 많이 했다. 그러면 인과를 안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 부처님도 인과를 받았다는데’ 이게 헷갈리는 거야.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이게 맞는가? 그래서 무턱대고 대답한게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잖아. 그런데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 이게 도대체 자신이 없거든,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죽어서 이제 하도 그 의심을 많이 하고 대답도 잘못 했고 그래서 뒷 산에 여우로 태어났잖아.
그리고 그 오랜 세월 뒤에 또 이제 백장산에 주인이 또 큰스님이 나타났잖아요. 그 여우가 뭐 백 년 지나면 사람으로 화(化)하잖아요. 사람으로 떡 화해가지고 늘 법당에 와서 법문할 때 법문 듣는 거야. 법문 듣다가 ‘야~ 저 스님은 참 법문 잘 하신다. 언젠가 내가 한 번, 과거에 내가 궁금했던 거 물어야지.’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어느날 대중들은 다 법문 듣고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데, 노장 하나가 떡 이제 남아 있거든.
그러니까 그 백장스님은 벌써 알았어. “그 당신 누군데, 왜 돌아가지도 않고 그래 있냐?”하니까 “내가 스님한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말해봐라.” 그러니까 “나도 옛날에 이 절의 주인으로서, 방장으로서 많은 대중들에게 법을 가르쳤는데, 어떤 수행자가 그걸 물었다 말이야. 수행 잘 하는 사람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그걸 물었다. 그래서 내가 엉겹결에 그냥 수행 잘 하는 사람이 뭐 인과 떨어지겠나? 아 이렇게 인과에 안 떨어진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그거 도대체 지금도 궁금합니다. 스님 그 어떻게 됩니까?” “그럼 그 때 그 학인이 물었듯이 똑같이 물어라.” 그렇게 한 거요.
그러면 묻기를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공덕을 많이 닦은 사람이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그렇게 하니까 “불매인과(不昧因果)니라.” 인과에 어둡지 않느니라. 인과에 환하게 밝다. 공덕 닦은 것은 공덕 닦은 대로 가고, 죄를 지은 것은 죄를 지은대로 다 간다 말이야. 부처님도 그 바느질 하다가 이 한 마리 죽는 것을 가지고 등창이 나가지고 그렇게 고생고생했지 않느냐. 그런 사실을 부처님은 환히 알 뿐이지. 과보를 안 받는 건 아니다.
불매인과(不昧因果) 어두울 매(昧)자. 삼매(三昧)할 때, 매 자. 내가 여러 번 말씀드려서 잘 아실 거에요. 불매인과다. 그랬습니다. 세상은 전부 그렇게 돌아가요. 그러니까 우리가 불법 만나서, 불법 만난 이후로는 불법 만났다는 것은 바로 인과의 법칙을 만났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한 순간, 한 순간, 하루 하루 삶이 훨씬 개선된 삶으로 살 수가 있다. 이렇게 이제 믿고 그렇게 봐지는 거에요.
④又如巧幻師가 在彼四衢道하야
그 다음에 이제 세 번째 비유는 우여교환사(又如巧幻師)가, 이거는 요즘 마술, 마술하는 사람이 저 네 거리에서, 요즘은 뭐 무대가 있지마는, 옛날에는 네 거리에서
示現衆色相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여러 가지 마술을 이제 보이는 거야. 그런데 그 실체가 없잖아요. 눈속임이지. 업성역여시(業性亦如是)니라. 업의 성품도 또한 그와 같다. 실체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하는대로 짓는대로 간다. 짓는대로 간다. 고정불변하는 성품은 없다. 꼭 니는 이쁘게 태어나야 한다라는 거 없어. 아무리 이쁘게 태어나도 마음 잘못 쓰면은 모양은 뭐 마네킹처럼 이쁠지 모르지마는 영 뭐 풍기는 맛이 다르다. 당장에 그래 되는 거요.
⑤ 如機關木人이 能出種種聲호대
그 다음에 기관목인(機關木人) 네 번째 비유. 기관목인이, 이건 이제 로봇입니다. 옛날에도 『삼국지』에도 그런 거 나오죠? 나무로 만든 사람이, 거기서 이제 소리가 나. 요즘같으면 뭐 기계가 워낙 발달해서 녹음기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온갖게 다 있잖아요. 능히 여러 가지 소리를 내대.
彼無我非我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그것은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나 아닌 것도 없다. 나무로 만든 로봇은 주체성이 없어. 그래서 업성(業性)도 또한 그와 같다. 우리가 전부 업으로 이런 모습을 짓고 살아갑니다. 업으로 짓고 살아가요.
예를 들어서 이 좋은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지만,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으면 한 시간 내내 앉아있어도 뭔 소리 했는지 한 마디도 기억이 안 나. 전부 저 아뢰야식, 제팔아뢰야식, 장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게 떠오르지가 않는 거요.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정해져 있는 것은 없어. 그러니까 하기에 달린 거여. 머리 둔하게 태어난 사람도요 열~심히 파면은 훨씬 더 잘 할 수가 있어요.
옛날에 그래 선비가 맞백독이라고 하는, 머리 둔한 아이를 만나면 아주 무릎을 치고 좋아했다는 거요. 맞백독이라는 말은 하늘 천(天)하면, 하늘 천 이걸 백 번을 읽어줘야 알아. 하늘 천, 하늘 천. 따 지, 따 지. 그게 맞백독이라. 그런 둔재를 만나면 선비가 너무 기뻐한다는 거여. “저거 크게 터질 놈이다. 크게 터질 놈이다.” 그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 자기가 뭐 머리가 좋으니 나쁘니 절대 거기에 탓하지 마시고, 그 머리 오히려 적당하게 좋은 것을 원망해야지. 맞백독할 정도로 둔하면 더 좋을텐데
그렇습니다. 업성(業性)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 열심히 하면은 툭 터져가지고 장원급제한 사례들이 많아요.
⑥ 亦如衆鳥類가 從殼而得出호대
여러 가지 조류들, 조류들이 전부 그 알에서 나잖아요. 알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다 이 말이여.
音聲各不同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근데 음성(音聲) 각각 부동(不同)이여. 닭은 닭 소리하고 무슨 뭐 종달새는 종달새 소리하고, 비둘기는 비둘기 소리하고 음성각부동(音聲各不同)이여. 업성(業性)도 또한 그와 같다.
뭐 제일 닮은 꼴이 쌍둥이 아닙니까? 쌍둥이지만 다~ 팔자가 다른 거요. 전부 팔자가 다릅니다. 그 왜 그러냐? 뭣 때문이다?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업이요 금생에 지은 업만 같으면은 대강 유추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자는 뭐 어떤 음식 먹었고, 또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고, 그래서 거의 알 수 있어요. 사실은. 평생 살아온 거 기껏해야 뭐 10년, 20년 살아 온 과정이 뻔하니까.
그런데 과거생에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래 금생업 뿐만아니라 과거에 지은 업이 자기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와. 과거에 지은 업이 툭툭 튀어나오는데, 그건 아무도 감당 못하는 거요. “그래 니는 도대체 누구 닮아서 그러냐?” 이런거 아니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머니도 안닮고 아버지도 안닮은 거야. 누구 닮아서 그러느냐? 그 아이의 과거 업이 있는 거야. 그 아이의 과거 업이 있어.
과거도 한 생 뿐인가? 여러생이 있잖아요. 전생, 전생, 저전생 그~ 수많은 생을 살아오면서 그게 소화된 업도 있고 미처 소화가 안된 업도 있고, 그래서 금생의 이 순간에서 그게 생각지도 않던 업이 툭 튀어나오는 거야. 전혀 생각지도 않던, 뭐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긍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이나 똑같아요. 그거. 뭐 한 가지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던 사람이 아이 식당 종업원하고 중국집 배달하다가 그~ 유명한 성악가 됐잖아요. 그런 예들 많잖아요. 그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고아로, 고아로 자라서 부모도 몰라. 학교교육은 한 시간도 받은 적이 없어. 껌팔이 소년으로, 성냥팔이 소년으로 그렇게 굴러다니다가 또 이제 중국집에 배달하는 소년으로 살다가 오며가며 들은 노래, 그냥 혼자 불러보는 거여.
가 이름 뭐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잖아요. 하~ 그봐요. 도대체 그 아이한테 무슨 금생에 받은 교육이 있었어? 그 과거생에,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이런 이치가 참 무릎이 아프도록 쳐야 돼. 여러 수천 번을 쳐도 된다. “그렇지. 그렇지.”하고, 집에 가서 하세요. 고개 그냥 계속 고개 아프도록 끄덕거려. 그렇게 해야 우리 그 장식(藏識), 잠재의식 속에 박힌다니까. 심어져서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업성역여시(業性亦如是)니라
⑦ 譬如胎藏中에 諸根悉成就나
그 다음에 여기는 이제 모태속에서, 우리 모태속에서 모든 안이비설신의, 손발 할 것 없이 다~ 이뤄져가지고서 태어나지요.
體相無來處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근데 그 손발이 어디서 생겼어? 처음에 핏방울 하난데, 도대체 그 손발이 어디서 생겼고? 머리카락은 어디서 생겼고? 손톱발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겼어? 신기한 거요.
그런게 우리 몸에 몇 마리가 있다? 백조가 있다. 백조의 하나하나 속에 또 백조가 있는 거여. 그것을 추적해 들어가면은 그 백조 속에 백조 가 있고 그 가운데 하나 또 꺼내가지고 보면 그 속에 또 백조가 있어.
우리 과학기술이 그런 것 까지도 아직도 뽑아낼 기술이 아직도 안돼서 그렇지. 깨달은 사람,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이야기 해놓은 거요. 우리 몸 속에 백조 세포가 있고 그 세포 하나 속에 또 백조 가 있고 그 백조의 하나하나 속에 또 백조씩 있고
각각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자나깨나 외우는 거 아닙니까? 한 먼지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낱낱 먼지 속에도 전부 똑같이 그렇게 들어있다.
우리는 뭐 너무 잘 아는 내용이여. 그런 이치를.
모든게 다 성취(成就)돼 있지만 업성(業性)도 역여시(亦如是)니라. 체상(體相)이 무래처(無來處)라. 어디서 오는 곳이 없어. 그~ 눈에 보이지도 않고 하는 그 세포 속에 또 세포 있고, 세포 속에 또 세포, 그 세포 속에 그러한 것이 없는데, 업을 통해서 내가 어떤 업을 짓냐에 따라서 그런 것이 다 나타나는 거요. 여러분들 지금 모습 그대로 여러분들 업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 지금 이 태장중(胎藏中)이라고 하는 게 우리 인체가 세상에 태어난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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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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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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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공부란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을 대접하고, 자기 자신에게 최상의 공경을 표하는 일이다>
不落因果가 아닌 不昧因果.. 인과에 떨어져서 헤매지 말라.
亦如田種子가 各各不相知호대 自然能出生인달하야 業性亦如是니라.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뿌린 대로 거둔다.
業性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열심히 공부하면 잉연이 익어 툭 터져 성과를 얻는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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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하대오
말한마디에도 깨달음이 있다
*공부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고,
나 자신에게 최상의 공경을 표하는 일이다.
*不昧因果 ; 인과에 어둡지 않다. 인과에 환하게 밝다.
공덕 닦은 것은 공덕 닦은 대로 가고,
죄를 지은 것은 죄를 지은 대로 다 간다.
고맙습니다.._()()()_
내가 그래서 공부는 뭐라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을 대접하는 일이고, 내 자신에게 말하자면 최상의 어떤 그 공경을 표하는 일이고 그런 거라고 했잖아요. 그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달라진다니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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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고맙습니다
화풍정님 고맙습니다
애써주시는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글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곧 설이네요
명절 즐겁게 보내십시요
행복하게 보내십시요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