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하되 기쁨에 빠지지 않고
당처에 구애받지 않아야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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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밑에서 수행하여 인가를 받은 사람이 어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가?”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어록이나 책속에서 성인들의 눈물을 더러 만난다. 묘한 점이 있어 몇 수행자들을 소개한다. 먼저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사리불 존자 이야기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각자 전법傳法의 길을 떠나라고 하였다. 사리불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리불은 길을 떠나기 전에 부처님께 울면서 고하였다.
“스승님께서는 저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스승님 발에 예를 올렸는데 이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지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내가 있는 방향으로 절을 하고, 대지를 만져라. 그 땅은 나의 발과 같은 것이다. 눈물을 거두어라.”
제자가 스승을 향해 흘린 눈물은 훗날 스승도 제자에게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 부처님 말년 무렵, 사리불이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다. 얼마 뒤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대중 가운데 사리불과 목련 비구가 없으니, 왠지 텅 빈 것 같구나.”
사리불만큼이나 북방불교 선종에서 독보적인 분이 있다. 임제(?~866) 선사인데, 임제는 스승 황벽이 열반에 들려고 하자,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승려가 그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하였다.
“어찌 깨달은 자가 눈물을 흘리십니까?”
“스승의 임종에 눈물이 나는데 어찌 하겠느냐?”
마지막으로 마조(709~788)의 조카 장설張雪 보살을 소개할까 한다. 장설은 마조의 조카로서 인가를 받은 재가 보살이다. 보살은 어릴적 몸이 약해 아버지의 권유로 마조와 인연이 되어 한 소식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어느 날 손녀딸이 갑자기 죽었다. 장설이 손녀의 죽음에 서럽게 울자, 친구들이 말했다.
“견성하였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서럽게 웁니까?”
“내 손녀를 천도해 주려는 것이오. 범부중생은 슬프되 슬픔을 모르고 슬퍼하고, 살되 참 삶을 모르고 살지만 깨친 도인은 참삶을 알고, 참 슬픔을 알기 때문에 이 할미의 눈물은 수만 권 경전을 지송하는 것보다 더 수승한 공덕이 됩니다. 손녀딸이 왔던 곳으로 다시 가는데 무엇이 그리 슬퍼할 것이요. 우리 눈에는 오고 가는 것 같지만 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큰 길에 들어선 손녀를 인도하느라고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수년전만 해도 승려로서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먼저 두고 있던 터라
수행자의 눈물이 공감되지 않았다. 이제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견성했다고 해서 차가운 돌처럼 감성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희노애락도 마음의 참된 본성 그대로인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마음에 느끼는 희노애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실상의 원리라고 본다.
추운 것은 추운대로 받아들이고 더운 것은 더운대로 받아들여야 하듯,
슬픈 것은 슬픈대로 기쁜 것은 기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고 무엇이 문제인가.
그렇지만 슬퍼하되 슬픔에 빠지지 않고, 기뻐하되 그 기쁨에 빠지지 않는 것,
곧 그 일어난 당처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진실된 자유라고 본다.
아마도 성인의 눈물도 그러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상적인 존재를 그대로 느끼고 인식하되
집착 없는 무주상無住相이요, 실상무상實相無相이 아닐까?!
첫댓글 견성은했더라도
슬픔은 슬픔아고
기쁨은 기쁨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