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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최재우 동학창시
1861-김정호 대동여지도
1862-농민봉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창시
1863-고종즉위, 홍선대원군 정권장악
1865-경복궁 중건
당시 톈진[天津]에 체류 중인 미국인 프레스턴 소유의 상선 셔먼호는 영국의 메도스 상사(商社)와 결탁하여 비단·유리그릇·천리경
1866-재너럴 셔먼호 사건
대원군은 병인년(1866) 정초부터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을 비롯하여 남종삼(南鍾三) ·정의배(丁義培) 등 한국인 천주교도 8,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1866-병인양요
1871-신미양요
강화도사건이라고도 한다. 조선측의 대일문호개방(對日門戶開放)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에, 일본은 열강세력에 앞서 조선에의 진출을 시도한 계획이 지연됨에 따라,
1875-운요호사건
한 ·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1876-강화도조약 (병자수호조약) 채결
1876년에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그 뒤 1880년에는 김굉집(金宏集:金弘集) 등 수신사 일행이 다시 일본
1881-신사유람단 파견
1881년(고종 18) 신식 무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69명을 선발하여,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가 되어 그들을 인솔하고 청나라에 가서 톈진 기기창[天津機器廠]에서 무기제조 기술을 습득케 하였다.
이들은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소식을 듣고, 반년 남짓의 기술 습득을 마친 뒤 귀국하여 서울 삼청동에 한국 최초의 신식 무기제조창인 기기창을 설립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1881-영선사 파견
1882-임오군란
임오군란으로 공사관이
1882-제물포조약 체결
1882-조중상 민수륙 무역장정 조인
1883-한성순보 발간
1883-태극기를 국기로 선정
1884-우정국 설치
1884-갑신 정변
1884년 김홍집(金弘集)과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 조해민(遭害民)에 대한 진휼금(賑恤金)·공사관 재건비(再建費)의 보상 등 몇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1884-한성조약 체결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으로 1885년(고종 22년) 2월 29일 미국 선교의사인 H.N.앨런(한국명:安蓮)이 서울 재동(齋洞)에 왕립 광혜원(王立廣惠院
1885-광혜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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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하에서 영국은 러시아의 선점(先占)을 예방하고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선박 1척이 러시아가 점령 대상지로 삼았다는 영흥만 일대를 탐사한 후, 4월 15일 군함 6척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달 하순경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정부는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청(淸)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代理公使)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 미국 ·독일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는데,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고비를 넘기고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이 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드디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1885-거문도 사건
1886-스트랜턴, 이화학당 설립
1886-육영공원 설립
1887-언더우드, 새문안교회 설립
1889-조병식, 반곡령 선포
1876년 강화도(江華島)조약으로 일본에 개국한 이래 일본상인들은 우리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콩 등을 매점해서 이를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통제를 받지 않고 곡물이 계속 반출되자 곡물의 절대비축량이 부족하여 식량난을 가중시켰고, 88년(고종 25)에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되자 전국 여러 곳에서 연달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에 곡물수출항인 원산(元山)을 관장하던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은 89년 9월 한일통상장정(韓日通商章程) 제37관(款)을 근거로 원산항을 통하여 해외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1894-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1894-홍범14조 제정
일본의 후원으로 보수세력을 극복하고 개화를 추진해오던 개화당은 드디어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탄생시키고 내정을 정비,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1895년(고종 32) l월 7일, 고종은 세자와 대원군 ·종친 및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아가 먼저 독립의 서고문(誓告文)을 고하고 이를 선포하였다. 다음날에는 이를 전국민에게 반포하였다. 서고문 ·홍범 14조는 근세 최초의 순한글체와 순한문체 및 국한문 혼용체의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하였는데, 순한글체에서는 홍범 14조를 ‘열 네 가지 큰 법’이라 표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1895-을미사변
1895-단발령 선포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드디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1895-을미 의병
1896-서재필, 독립신문 창간
1896-독립 협회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멎壽)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7년 2월에는 러시아 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민권 사상의 보급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모든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하였다. 따라서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이상재·남궁 억·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서재필은 본회원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지도·후원하였다.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고,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용하는 것도 외국 자본주의 밑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처사라고 규탄하며 고종에게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림에 따라 러시아 군사고문관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한로은행(韓露銀行)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활동이 왕성해지고 많은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 수뇌급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함으로써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시켜 보부상(褓負商) 수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되었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9년 초 해산하였고, 그 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1896-아관 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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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沔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1897-경인선 철도 기공
1897-대한제국 설립
1898-만민공동회 개최
개혁안 6개조를 결의하였다.
즉, ① 일본인에게 의부(依附)하지 말며, ② 외국과의 이권계약을 대신(大臣)이 단독으로 하지 말며, ③ 재정을 공정히 하고 예산을 공표하며, ④ 중대 범인의 공판과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며, ⑤ 칙임관(勅任官)의 임명은 중의에 좇으며, ⑥ 기타 별항의 규칙을 실천할 것 등이다.
이 개혁안은 국왕에게 제출되어 왕도 처음에는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실시를 확약하였으나 보수적 관료들의 반대로 이에 관계한 대신들만 파면되고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독립협회는 해산된 후 얼마 동안은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다.
1898-매일신문 창간
1900-경인선 철도 개통
1901-제주민란 발생
1903-대한 YMCA 창립
1904-러일전쟁 발발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旅順軍港]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英日同盟)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으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1904-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戰雲)이 급박하자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중립’을 선언하였으나, 한반도에 그들의 군대를 들여놓은 일본은 한국의 대일(對日) 협력을 강요 ·협박하여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李址鎔)과 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林權助] 명의로 6개 조항의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개선’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② 일본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전을 도모할 것 ③ 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할 것 ④ 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신속히 대처하며, 한국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⑤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정서는 조야에 큰 충격을 주어 여기에 서명한 이지용과 참서관(參書官) 구완희(具完喜)의 집이 폭탄세례를 받는 등 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1905-을사조약 강제체결
을사보호조약·제2차한일협약·을사오조약(
1905-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 야방대성곡 발표
1905-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1906-통감부설치, 이토히로부미 부임
1907-국채보상운동 시작
1907-헤이거 밀사 사건
1907-한일신협약 체결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한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형해화(形骸化)한 대한제국의 국가체제에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7개항의 조약안을 제시, 아무런 장애도 없이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명의로 체결 ·조인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①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1908-전명운, 장인환, 스티븐스 저격
1908-동양척칙 주식회사 설립
1909-나철, 대종교 창시
1909-안중근, 이토히로부미 암살
1910-한일합병 조약 조인공포
1911-신민회, 105인 사건
. 안창호(安昌浩)의 발기로 창립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대부분 1896년도에 결성되어 2년 동안 활동하다 와해된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청년회원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회장 윤치호(尹致昊), 부회장 안창호, 유학자 출신의 장지연(張志淵)·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 청년장교 출신의 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평양지방의 자산가인 이종호(李鍾浩)·이승훈(李昇薰), 그리고 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 등이었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政體)를 공화정체로 한다고 하여, 이전의 주장인 입헌군주제를 탈피했다는 점에 큰 특징이 있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고, 실력의 양성을 위해 국민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신민(新民), 신민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自新), 자신을 위한 신사상, 신윤리, 신학술, 신모범, 신개혁을 주창했다.
비밀결사인 만큼 엄격한 심사를 거쳐 회원을 받아들였으며, 조직은 총본부 산하에 감독부(1도에 1개소), 총감소(總監所:5군 이상을 합함), 군감소(郡監所:1군에 1개소), 반(班)의 종적인 형태로 구성했으며, 당사자 2명 이상은 서로 알지 못하게 했다.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서북지방의 그리스도교인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고 신흥시민층과 신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폭넓은 활동을 전개했다.
1913-안창호, 홍사단 조직
1915-대한광복회 결성
1910년대 초 신해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즈음하여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광복단이, 1915년 초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다. 광복단은 의병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 조선국권회복단은 계몽주의적 인물들이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참가하였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가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국권 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① 부호의 의연(義捐) 및 일본인이 불법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중국·러시아 등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④ 무력이 준비되는 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을 달성한다는 강령을 내세웠다.
의병장 허위(許蔿)의 문하인 박상진(朴尙鎭)을 주축으로 경상도 지역에서 조직되었으며, 1916년부터 충청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 등으로 확대되었다. 대구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영주의 대동상회(大同商會)를 비롯하여 광주·삼척·예산·인천·용천·서울·해주 및 만주의 안동 ·장춘에 설립된 곡물상·잡화상을 연락거점으로 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친일부호의 처단, 독립군 양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초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주요 인물이 검거, 사형당해 조직이 파괴되었다.
1916-박중빈, 원불교 창설
1918-토조사사업 완료
한국 전역에서 시행된 일제 식민통치의 기초작업으로 조선토지조사사업이라고도 불렀다. 일본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처음 계획한 것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을 때부터로,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국권피탈과 함께 한국토지조사국의 사무를 조선총독부로 이관, 총독부 안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전담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개월간의 준비조사를 거쳐, 1911년 11월 지적장부 조제에 착수하여 1912년 3월 조선부동산등기령과 조선민사령, 동 8월 토지조사령, 1914년 3월 지세령, 동 4월 토지대장규칙, 1918년 5월 조선임야조사령 등을 공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었다.
토지조사사업에 앞서 일본은 토지조사에 따르는 분쟁의 해결과 원활한 조사사업의 진행을 위해서 토지관습조사(土地慣習調査)를 선행하였다. 이때 조사된 내용은 ① 행정구역의 명칭, ②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 ③ 과세지와 비과세지, ④ 경지의 경계, ⑤ 산림의 경계, ⑥ 토지표시 부호, ⑦ 토지의 지위 ·등급 ·면적과 결수(結數)의 사정 관행, ⑧ 결의 등급별 구분, ⑨ 토지소유권, ⑩ 질권 및 저당권, ⑪ 소작인과 지주와의 관계, ⑫ 토지에 관한 장부서류, ⑬ 인물조사 등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은 1909년 6월 역둔토실지조사(驛屯土實地調査)와 11월 경기도 부천(富川)에서 시험적인 세부측량을 함으로써 제1차 사업계획을 세우는 등 제4차까지의 사업계획을 거쳐 18년 11월 이완용(李完用)의 토지조사 종료식 축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1918-대한독립 선언서 발표
1919-2.8 독립선언
1919-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920-제암리학살 사건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생생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보내어 여론화하였다. 198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1920-김좌진, 청산리 전투
1923-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3-조선물산 장려회 창립
1920년 평양에서 조만식(曺晩植)·김동원(金東元)·오윤선(吳胤善)·김보애(金寶愛) 등 70명이 발기하여 민족자본을 육성하고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범민족적 경제 살리기 운동이었으며 남녀노소, 빈부계층을 가리지 않았다.
국산품 장려, 소비절약, 금연·금주 등의 운동을 벌여 전국적인 호응을 얻자 1923년 1월 9일 유진태(兪鎭泰)·이종린(李鐘麟)·백관수(白寬洙) 등 20여 단체의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한 후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에서 창립총회를 개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였다.
집행기관으로 이사회를 두고 그 아래 경리부·조사부·선전부를 설치하였으며, 회의실무를 계획·집행하는 상무이사를 두는 한편, 이사장에는 유성준(兪成濬)이 선출되었다. 본부를 서울 견지동(堅盡)에 두고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하였으며 강연회 개최, 가두시위, 기관지 발행 등을 통하여 대중에게 외래품 배척과 경제적 자립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일대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운동 주동자들은 말총모자, 무명 두루마기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면서 음식이나 일용품은 토산품을 애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선인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음에도 1년이 채 안 되어 시들해졌다. 토산품 가격의 폭등으로 서민들이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무산계급과 관계없는 유산계급을 옹호하는 운동이라고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그후 활동방향을 전환하여 소비조합 조직, 조선물산진열관 설립, 조선물산품평회 등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침체되었다. 그럼에도 기관지 발행사업은 활발하여 《산업계》 《자활》 《조선물산장려회보》 《장산(裝産)》 《실생활》 등을 발간하였다.
조만식·명제세(明濟世)·김성준(金星濬) 등이 10여 년을 이끌어오다가 1934년부터 재정난을 겪기 시작하면서 일제의 탄압과 좌파의 책동으로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산되었다.
1923-관동대지진 발생 동포 대학살
1926-6.10 만세운동 시작
1927-신간회 창립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安在鴻)·이상재(李商在)·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신석우(申錫雨)·유억겸(兪億兼)·권동진(權東鎭) 등 34명이 발기했다.
1928-한글날 제정
1929-국민부 조직
1929년 4월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의 대표가 모여 조직하였다. 당시 만주지방에서는 이 세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독립운동 세력들이 운동단체의 통일을 위해 1928년 5월 신안둔[新安敦]에서 3부통일협의회를 개최하고 민족유일당운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만주에 있는
1929-광주학생 운동
1923-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34-조선 농지령 공포
1935-민족혁명당 결성
1936-손기정 베를린에서 마라톤 우승
1940-창씨개명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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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1942-조선어학회 사건
1943-카이로 회담
1944-얄타회담, 한반도 문제 언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