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18 - 조선통신사 행열도를 보면서 통신사의 의미를 생각하다!
어제 2024년 1월 26일 이즈하라(嚴原 엄원) 에 도착해 지온(祈園) 호텔에 체크인후 가네이시성
(金石城)을 구경하고는 슈젠지(修善寺 수선사) 절을 찾아 최익현 선생기념비를 보고
롯가쿠도 라는 이자카야에 들어가니...... 메뉴판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되어 있고
한국식 요리도 많으며 두번째 찾은 집은 순전히 일본식으로 우나기돈(ウナギ丼) 을 먹었습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지온(祈園) 호텔에 돌아와 하룻밤을 자는데 1층은 카페이고 3층은 레스토랑
으로 주로 한국인 단체를 받으며 5층은 민슈쿠 인데.... 아직 옛날 경기를 회복하
지 못한 듯...... 2층과 4층은 비어있고 1층 카페도 밤에 잠시 문을 열었다가
곧 닫는 것 같은데, 2024년 1월 27일 3층 레스토랑에서 전통 일본 가정식으로 아침을 먹습니다.
출발 시간이 어중간하니 부두를 보기로 하고 운하(강)를 따라 5분을 걸어서 항구로 가는데.... 이즈하라 대교
못미쳐 운하 철책에는 유리판에 통신사 행열도 그림이 수십장이 새겨져 있어 구경할만 한데,
매년 8월 첫번째 토, 일요일에는 이즈하라 아리랑 축제에서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란 조선 후기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말하니..... '통신'
은 '국왕의 뜻을 전함' 이라는 의미로, 1607년 이후 조선이 에도 막부에
파견한 사절단만 가리키나... 조선 전기에 일본에 파견된 사절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통신사는 일본에 있는 내내 융숭한 접대를 받았는데, 실제로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읽어 보면 'ㅁㅁ에서
묵었다. ...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다/ 사치스러운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 라는 식의 기록을 무척
많이 접할수 있는데,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때문에 이전의 센코쿠 시대 보다
외국과의 교류가 줄은지라..... 거창하게 들어오는 외국 사신이다 보니 볼만한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지역 전체가 들썩이고 유행이 바뀐
다고 할 정도로 파장이 대단했는데, 통신사의 서예 작품을 얻으려고 성황이었고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글자 하나만 써 달라고 요구했으니 통신사들의 사행록에는
일본의 요청을 다 들어주기가 힘들었다거나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는 식의 기록이 곳곳에 있습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 주는 것을 전담하는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거나 일이 너무 힘들다고 울기도
했다고도 쓰여 있으며, 그나마도 통신사에게 글이나 그림을 요구하는 일을 도중에서 독점하며 이득을
챙기려는 대마도주가 통제한 것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으로, 통신사가 준 사소한
선물이 일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고 통신사 일행과 접견으로 중국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위엄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통신사가 거쳐 가는 번으로 하여금 최고 수준의 의례
로 대접하게 하였으니, 통신사 일행을 한번 맞이하는데 1,400여척의 배와 1만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고도 하며.... 쇼군이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한 비용이 100만냥이나 되었습니다.
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1년 수입은 76만냥에 불과했으니.... 그러다 보니 통신사의 경로에 있는
번에서는 접대를 하느라 거액의 비용을 쓸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각 번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고...... 마침내 이 문제가 현실화한 것이 1711년(숙종 37년) 의 8대 통신사 때 입니다.
당시 일본 유력한 대신이자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는 일본이 통신사에게 너무 저자세를 취하는데다가 낭비가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통신사를 맞이하는
각종 의례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는데, 문제는 조선에는 통보하지 않고 마음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입니다.
조선 통신사는 갑작스럽게 의례를 변경할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박했으나 결국 적잖게 타협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는데 이 때문에 조선에 돌아와 '왕명을 욕되게 했다' 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때의 의례 개변은 일본 내에서도 지나치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마침
이듬해인 1712년에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사망하면서 아라이 하쿠세키도
실각하자.... 통신사를 맞이하는 의례는 대부분 이전의 것으로 복구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과 막부 사이에 교환하던 국서에서 쇼군의 칭호 문제인데 1636년 이후로 조선은
막부의 쇼군을 '일본국 대군(大君)' 으로 칭하였으나 이때는 하쿠세키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일본 국왕" 으로 칭호를 바꾸었는데, 이 칭호 역시 이후로는 다시 일본국 대군으로 바뀌게 됩니다.
한편 1714년에 파견된 류큐 하경사에게도 일본 측은 귀국(貴國), 일본국 대군, 태청(台聽) 등 단어가
건방지다고 새로 써서 오라고 따졌는데, 조선 측에 국서를 고칠 것을 요구할 때는 통신사들이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문제제기를 했으나 류큐 사절단은 만만하게 봤는지 이들이
에도에 오자 일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며, 사행이 거듭되면서 비용은 점차 줄어들었고
마지막인 12대 통신사의 사행 때는..... 아예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간략화 됩니다.
통신사는 귀국 후 사행에 대한 기록이자 견문록인 사행록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면면을
볼 수 있는 제3자의 자료로서 일본에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도 명이나
청을 주제로 통신사와 일본 측 인사가 주고 받은 대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통신사 사행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초대 통신사 방문때 부사였던 경섬(慶暹) 이 쓴 해사록(海槎錄)
으로, 다만 통신사 이전에도 일본을 다녀온 사절단들은 꽤 많았으므로 이들의 사행록도 남아있는데
현존하는 것중 가장 오래된 사행록은 정몽주의 정포은봉사시작 (鄭圃隱奉使時作) 이니...... 정몽주는
1377년 9월부터 1378년 7월까지 사행기록을 남겼는데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협조를 얻으려 다녀왔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1420년에 일본을 다녀온 송희경(宋希璟) 의 일본행록(日本行錄) 이 가장 이르고 1443년에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쓴 사행록 신고령봉사시작 (申高靈奉使時作) 과 그보다 뒤인 1471년에 성종
의 명으로 쓴 견문록 형태의 해동제국기도 있으며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직접 만났던 김성일도 해사록 (海槎錄) 이라는 사행록을 남겼으니... 후에
10대 통신사의 정사였던 홍계희가 이전에 발간된 사행록들을 수집해서 "해행총재" 라는 책을 냈습니다.
전해지는 사행록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내용이나 성격이 갈리는데 왜란 전에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아직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므로 여정 중에 받은 개인적인 감상이나
경험 등을 시의 형태로 남긴 것이 대부분인 반면, 왜란 이후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주로 보고나 정보 수집이 중요했기 때문에 견문록의 양식으로 사행록을 남겼습니다.
일행은 정사, 부사, 종사관 등의 삼사 (三使) 와 당상역관 미만의 하인 등은 정해진 수가
없어서 각 사행마다 총인원은 제각각이었으니.... 역대 최소 인원은 1624년
사행 당시의 300명이고, 최대 인원은 1711년의 500명이었으며, 보통 4백명 대 입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일본은 통신사 접대에 상상을 초월하는 예산을 투입했으니 이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기까지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일본 쌀
수확량의 12% 가 소요되었을 정도이고, 현지 일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 통신사 사절단들을 배려해서
3끼 음식이 모두 일식이 아닌 퓨젼 일식으로 만들어져 체류기간 동안 사절단 모두에게 제공 되었습니다.
다만 최후의 사행인 1811년에는 규모가 줄어들어 336명이 파견되었는데, 정조 11년(1787) 도쿠가와 이에나리
가 취임했으나 당시 막부의 재정이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실권자인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통신사를 맞이하기를 희망했고(1794), 마찬가지로 살림이 어려웠으나 전례(前禮) 를
중시하던 조선은 17년간 거부하다가..... 순조 11년(1811) 에 와서야 승인했으니 대마도까지만 갔다 왔습니다.
얼핏 보면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년 이상 오래토록 지속해 온 이유는 양국이 전부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니, 조선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나라와 교린을 맺는 것이 국제 관계의
도리라는 점도 있었고, 서로 교린 관계를 나누면서 혹시 모를 일본의 군사적 위협을 덜자는 점도 있었습니다.
비록 쇼군이 새로 즉위할 때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 외교 문제가 발생할 때 곧바로 보낸 것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통신사는 쇼군이나 일본의 대신들과 직접 협상하여 외교 안건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의 지형과 풍속 등을 살펴 왜구가 조선을 약탈하거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일본이 조선
을 침공했을 때 같은 비상사태를 대비한다는 목적도 있었고, 1회성 사건이기는 했지만
수행 무관들을 통해 일본에 들어오는 서양의 신무기를 몰래 구하는 작전이 펼쳐지기도
했고, 쓰시마의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것도 1763년 당시 통신정사 였던 조엄의 덕이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도 도쿠가와 막부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권력임을 선전하는 정치적인 성과를 얻고
공공연하게 막부의 권력이 중국에도 알려질 수 있게 되니 중국과의 교섭에도 유리하게
작용시킬수 있었고 또한 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선전하여
일본이 마치 조선을 속국으로로 거느리고 있는양....... 왜곡하며 국가적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게는 조선은 일본에 조공을 바치는 종속국이라고 속여 일본이 네덜란드와 무역
교역을 독차지하는 효과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 막부의 수도인 에도에 파견하는 유일한
공식 사절단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며 서적 같은 조선의 문화도 들여올 수 있었으니 당시
주자학(조선처럼 외골수는 아님) 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일본은 이 점에 있어서도 이득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 통신사의 수행원으로 따라간 자들이 남긴 기행 기록 가운데 외국인이기에 쓸수
있었던 민감한 내용들이 담겨있다는 것이니, 이들은 일본의 정치 구조를 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먼 미래 정세까지 예측했으니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덴노의 조정이
있는 교토의 지식인들은 조정과 관백(쇼군)의 막부를 각각 왕자(王者)와 패자(覇者)라 인식했습니다.
대놓고 막부와 도쿠가와가의 쇼군들을 왕망이나 조조로 비유하기도 했고, 몇몇 일본
지식인들이 덴노(천황, 일왕) 와 구게(대신) 앞에서 존왕론을 강의하거나
토막(討幕, 막부 전복) 을 꾀했다는 이유로 막부에 적발되어 처형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에는 정통성을 갖춘 군주인 덴노가 무사들을 뒤에 거느린 힘 있는 권신(權臣)에 불과한
쇼군의 힘 앞에 눌려 실권을 빼앗긴 것에 비분강개하던 당대 교토 지식인들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막부의 보복이 두려워 이런 솔직한 기록들을 남길 수 없었지만, 제3자인 조선 통신사
일행들은 외국에서 온 사신단이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자국의
군주가 하는 욕 한마디도 꼼꼼하게 기록하는 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가능한 행위라 여겨집니다.
성대중이나 남옥, 조명채, 원중거 등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눠본 조선 통신사 수행원들은 주고받은 이야기
를 기행문에 적고 한결같이 "지금의 막부가 언젠가 힘이 쇠약해지고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무리
들이 움직일 때가 오면 분명 덴노를 둘러싸고 국권을 쟁탈하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고 판단했습니다.
그 예상은 약 백여년 뒤에 존황양이, 대정봉환, 1868년 무진전쟁이라는 형태로 적중했으며 아울러 원중거는
이런 상황이 되면 조선에도 피해가 올수 있을 거라며 미리 대비를 해 둬야 한다고 말했지만, 메이지 유신
으로 일본의 권력이 통일될 때 조선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고..... 결국 1910년 경술국치로 끝을 맞이합니다.
일본은 통신사를 속국의 사절로 각인시키려 했기 때문에 의례를 둘러싸고 여러 기싸움이 존재했으니
대표적으로 배례가 있는데, 조선 사신들은 국왕의 국서에 배례한다고 인식했지만, 일본측은
쇼군이 국왕의 국서 뒤에 자리함으로서 통신사가 쇼군인 자신에게 배례를 하는 것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교토의 호코지 절에서 통신사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문제는 이곳이 히데요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법당이었으니..... 조선 통신사는 이전까지 이 사실을 모르다가 1719년
최초로 문제제기를 하자 일본측은 일본연대기 라는 가짜 책으로 히데요시와 상관
없다고 왜곡하여 종사관 이명언을 제외하곤 참여했으며 그후 통신사들은 들리지 않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웃나라는 철천지 원수지간이니 북방민족과 중국,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과 버마,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 페르시아와 로마, 오스만 터키와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영국,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폴란드, 폴란드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아랍, 인도와 파키스탄 등이 그러합니다.
이웃나라 끼리 서로 국력이 비슷하면 평화가 유지되지만.... 한나라의 국력이 성장해 차이가 나면 이웃
나라에 조공을 해라, 금은과 토산물에 배와 말 그리고 여자를 바쳐라며 못살게 구는데, 응하지
않으면 침략 전쟁이 벌어집니다. 해서 100년 평화가 드문데 조선과 일본은 1603년 에도 막부성립후
1875년 운양호 침입 까지 통신사로 무려 270년간 선린우호했으니 세계사에서 특이한 사례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