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진은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으로 악명이 높다. 1월 평균 기온은 -16.1℃로, 백두산 백무고원에 있는 양강도 삼지연군의 평균기온 -22℃에는 밀리지만, 1933년 1월 기록인 -43.6℃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자강도 최북단 고원지대인데다 압록강 상류 산악지대가 중첩되며 해마다 겨울이면 -40℃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를 기록한다. 제주의 연평균 기온이 15.3℃라면, 중강진은 5.5℃에 그칠 정도다.
그래서인지 타지방보다 중강진에는 복음이 늦게 전해졌다. 1926년 신의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 레지나씨가 1927년 중강진으로 이주, 두 병자에게 대세를 주면서 복음이 퍼져 나갔다.
이후 백 레지나, 김상옥(토마스)씨 등이 전교에 힘쓰며 하나둘 세례를 받고 공동체가 형성됐으며, 1930년 10월 본당이 설립됐다.
중강진본당이 활성화된 것은 1930년대 중반으로, 1935년 11월 5대 주임 패트릭 클리어리 신부가 성당을 완공한 것이 계기가 됐다. 1933년에는 강계본당을 분가하기도 했다.
1937년 중강진본당 교세는 신자 300명, 관할 공소 6개소에 달했다. 교리강습소도 세워지고 전교사도 2명이 파견돼 활동하면서 본당 기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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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년 11월 무렵의 눈덮인 중강진성당. |
벌목과 제재 산업이 발달한 도시답게 중강진성당은 통나무로 지어졌다. ㄱ자 형태 성당에 잇대어 사제관을 덧붙였다. 해마다 지붕의 너와를 갈았다.
1941년 말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추방되면서 중강진은 의주ㆍ강계본당 관할이 됐다가 1949년 7월 강계본당 주임 석원섭 신부가 피랍되면서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함경남도 영흥군에서만 1932년 5월에 120명, 1933년 12월에 8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전 영흥 지역 신자 수가 60여 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얼마나 폭발적으로 신자가 늘어났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1864년 11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영흥을 찾아 어른 130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이후 1866년 말 병인박해 당시 영흥에서만 72명이 함흥으로 압송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는 증언이 전해온다.
「분도통사」에는 박해 때 영흥에서 요덕 쪽으로 피했던 신자 1000여 명이 붙잡혀 처형을 당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박해로부터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외교인으로 살던 후손들의 마음속엔 조상들의 신앙에 대한 향수가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 향수가 폭발적인 신자 증가를 불러온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1월 갈리스토 히머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영흥본당이 설정되자 순교자의 후손들이 대거 입교해 공동체를 형성했고 1932년 11월 성당을 신축, 봉헌했다.
당시 그렇게 빠르게 지어진 성당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성당 신축 과정에서 찾아온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의 일자리 구걸 때문이기도 했다.
때마침 일본 엔화 폭락으로 길이 25m에 폭 9m 규모 성당 공사비가 6000마르크로 준 것도 성당을 빨리 짓는 데 도움이 됐다.
성당 신축 뒤 학교를 새로 짓고 교육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고 계몽도 병행하면서 선교가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그리고리오 슈테거 신부가 1950년 10월 공산주의자들에게 중범죄자로 몰려 처형되면서 영흥본당 또한 폐쇄됐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