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폭포석입니다. 마치 깊은 산속을 걷다 우연히 마주한 절경 앞에 선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단봉을 감싼 양 옆의 흰 석영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얼어붙은 빙벽처럼 보입니다. 또는 세월을 품은 만년설이 바위에 내려앉아,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대비 속에서 바위의 주름진 질감이 강렬하게 살아납니다. 위아래로 흐르는 듯한 결을 따라 시선을 내리다 보면, 중간쯤에서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혹은 한 줄기 샘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이 바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바람이 지나가며 바위를 어루만지고, 물이 스며들어 흔적을 남기고 간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바위가 품은 침묵 속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 계절을 넘어 이어지는 자연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저 폭포 혹은 바위 샘물이 특별해보이는 것은 주름진 바위산이 병풍처럼 떡 버텨준 덕분이지요.
이상타, 우리 아파트 화단의 동백꽃이 벌써 지고 있습니다.
동백꽃이 붉게 피었다가 미련 없이 스러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뒤에 한결같이 푸른 잎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계절 내내 변하지 않는 배경이 있어야, 그 위에서 한순간의 빛을 발하는 존재가 가능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내 삶에도 언제나 나를 떠받치던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흔히 스스로의 존재를 중심으로 사고합니다.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하지요.
그러나 삶을 돌아보면, 빛나는 순간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조용한 뒷받침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나를 지탱해 준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배경이란 드러나지 않습니다.
찬란한 빛을 내는 꽃이 아니라, 그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뿌리를 내리는 대지와도 같습니다.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선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거친 물결이지만,
그 물결을 받아내며 묵묵히 형태를 지켜내는 바위가 없다면 해안선은 존재할 수 없겠지요.
그림이 선명할 수 있는 것도 캔버스가 있기 때문이며,
음악이 울릴 수 있는 것도 고요한 침묵이 받쳐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빛나게 만드는 배경을 통해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꽃이 화려한 만큼, 잎은 그저 흔한 녹색으로 남아야 합니다.
음악이 울릴 때 침묵은 철저히 자리를 비워야 하고,
빛이 환하게 비출 때 그림자는 저 홀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이런 배경의 희생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들의 삶이었음을,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배경이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한때는 빛나는 꽃이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배경의 깊이를 생각합니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도 남아, 변함없이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잎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순간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보다는,
그 불꽃이 타오를 수 있도록 조용히 바람을 막아주는 손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백꽃은 지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꽃잎을 하나하나 흩뜨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형태를 유지한 채 툭, 하고 떨어지지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도 품격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사라지는 꽃잎을 끝까지 받쳐주는 잎이 있고,
그 잎을 흔들며 계절을 돌려주는 바람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하늘이 있었기에.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의 삶을 조용히 떠받치면서,
그들이 빛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면서.
그리고 언젠가 내 자리를 떠날 때,
마치 동백꽃이 지듯,
흔들림 없이 단단한 모습으로 떠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