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교사 운동은 최근 사학법 개정에 대한 찬성의 입장을 고뇌 가운데 발표했다. 이유는 부패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그리고 개방형 이사회를 통해서 비기독교인의 진입이 기독사학의 내일을 어렵게 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투명하고 내실있는 운영이 정체성 확립을 방해받지 않게 되리라는 판단했다.
교원평가에 대한 입장 발표가 신선한 중재안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사학법 개정안이 좌우의 충돌로 비쳐지는 작금에 용기있는 발표라고 보인다. 그럼에도 나누고 싶은 사실이 있다. 개방형 이사제에 대한 이해이다.
# 기독사학의 규모와 사학법 개정 내용
먼저 내용 전개를 위해서 기독 사학의 규모와 사학법 개정 내용을 정리한다.
언론에 의하면 373개의 기독사학이 있고, 전체 학교의 25%이다.
그리고 사학법 개정의 주된 내용은 첫째 개방형 이사제(감사 포함)의 도입으로 이사의 1/4을 학교운영위나 대학 평의회의 추천에 의거한다. 둘째 초중등 학교에서 학생회와 학부모회 교사회를 법제화하고, 셋째는 학교 운영위원회를 자문기구에서 심의의결기구로 만든다. 또한 친인척 이사수를 현재 1/3을 1/4로 축소하고 교장의 연임을 제한하고 부패로 쫓겨난 이사의 복귀 제한 등이다. 또한 임시 이사의 파송을 2년에서 임기 제한을 없앤다.
여기서 기독사학의 논쟁의 핵심은 개방형 이사제에 있다. 사학의 건학 이념을 훼손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이다. 7명의 이사라면 2명의 추천 이사, 9명이나 11명이면 3명의 추천 이사가 선임되어야 한다.
# 각계의 대응
기독교와 기독 사학의 대체적인 반응은 반대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나 재의논 요청, 또는 위헌 소송까지 제시되었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11개 종교 단체 연합으로 그리고 좋은 교사 운동 등의 성명이다. 물론 정치권의 찬반 논의도 있다.
# 시스템은 질이 아닌 양이다.
법의 개정은 항상 시스템을 조정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시스템이 인격일수는 없다. 좋은 시스템이 되어야 할 필요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독재보다는 민주 사회가 그리고 공산 사회보다는 자유 사회가 좋다. 법이 이러한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서 현실적인 결함을 보충하고 개선할 필요가 있다. 위의 개선된 거의 모든 측면들이 이러한 시스템의 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투명하며 교육 주체의 다수가 참여하면서 서로 책임을 나누어 지자는 것이다. 친인척의 고용기회 박탈이라는 부작용이 헌법 소원의 대상이 되어 논의를 할 것이다. 그래도 사학의 부패라는 측면을 이해한다면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운영의 주체인 이사회에 투명성 때문에 이질적인 사람의 도입이 가능한 시스템으로의 변화가 사학의 본질을 위한 것일까?
# 기독 사학의 정체성에 대해서
기독 사학은 기독인에 의해서 세워진 학원이다. 기독교적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의 교육의 목표를 수용하면서도 기독인의 목표를 위해서이다. 밋션스쿨과 기독교 학교라는 양자의 정체성의 혼돈이 있지만 일반적인 기독사학은 기독교적 가치를 위해서 존재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국가나 사회는 적극적인 선의 창출자라고 생각지 않는다. 국가나 사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의 기관이라는 것에는 의심이 없지만 적극적인 선을 창출하지 못한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구원을 주지는 못한다. 기독교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구원(혹은 언약)에 근거한 교육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국가에 주신 권위와 충돌되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 기독교인들은 사학을 세운다. 정리하자면 국가와 사회는 죄를 억제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제거하거나 선을 적극적으로 창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인의 신앙과 가치 속에는 죄의 제거를 통한 온전한 선인 구원을 창출한다.
# 바벨론 포로에 대한 이해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한 점령과 포로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의 불충성에 대한 이방 민족을 통한 멸망과 약속의 땅에서의 축출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징벌하는 방식이자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하는 소망의 방식의 방식이었다(새언약). 이방인의 개입은 이스라엘에 대한 극약적인 하나님의 개입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국가를 통해서 기독사학이라 할찌라도 개입할 수 있다. 관선이사 혹은 임시 이사의 파송 방식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설수 없는 상황에서 생기는 일이다. 현재도 여러 기독사학에 임시이사는 파송중이다. 극약적인 처방의 길이다.
그런데 현재 사학법 개정에 의거하면 임시이사와 같은 외부적인 영향을 영구히 기독 사학 안에 상존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 가능할까? 하나님의 경륜 속에 국가와 사회 속에 있는 기독 사학들이 자정의 능력을 상실한 경우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기독인의 사회 법정행에 대해서
실제로 고전6장에서 기독인의 분쟁을 사회 법정에 가는 일이 정당한가의 문제는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상처를 준 것이다. 이것은 일단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는 이런 경우의 가능성을 열어둔다(권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기독 사학의 부패가 있다. 열거하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좋은 교사 운동이 고뇌한 것처럼 부패나 세속 가치를 따라서 입시위주의 교육을 한 책임을 기독 사학이 안아야 한다. 그러나 운영에 있어서 부패와 현실의 강한 요청에 의해서 입시위주의 잘못된 길을 같다는 것과 목표 자체의 설정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운영 주체를 제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 선지자적인 사명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국 시대를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굳게 서도록 왕국의 책임자들을 경성하게 하였다.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이나 관리들이다. 물론 백성 전체에게도 그러하다. 신실한 왕들이 개혁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거절하였다. 선지자들이 현재를 개선하기 위해서 이방적 세력과 항구적으로 동거하며 정착할 수는 없다. 바벨론을 부르고 앗수르를 부르지만 저들은 수와 권력을 힘으로 삼는 자들이다. 기독인들은 겸손과 잃어버림과 희생의 가치가 본연의 것이다. 따라서 함께 계속해서 언약의 나라를 구성하지 못한다. 멍에를 함께 매지 못한다.
# 죄를 간과하지 말자
질은 항상 사람의 문제다. 사람의 변화는 회개이다. 회개가 틀의 변화를 수반할 수 있지만 틀의 변화가 사람을 어느 정도 걸러내는 것이지 온전히 변화시키지 않는다. 율법적인 사람을 만들 수 있다. 죄라는 누룩의 가치는 덩어리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법을 말할 때 틀을 잘 짜고 규정하고 걸러내는 것까지이다. 그러나 거기에 원천적인 운영주체의 사람의 제한이 가해진다면 너무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낙관하는 것이다. 투명한 운영과 좋은 기독 정신의 주체들이 문제들을 제어하는 것과 항구적인 조직 속에 다른 류의 사람을 들이는 것과는 구별할 사안이다. .
왜 좋은 교사 운동은 문제들을 선별하지 않는가? 수용할 수 있는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가? 왜 전부 아니면 전무를 선택하는 오늘의 논의에 그냥 휩쓸렸는지 질문하고 싶다.
재단이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가? 재단관계자가 선교적인 의식이 있는가? 교사들의 선교적인 의식 재고를 위한 재교육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가? 기독학교이건 미션스쿨이건 신앙과 학문의 전수를 위한 독특한 교재를 갖추고 있는가? 부정적이다. 초기는 몰라도 현재는 개인적인 명예,안락한 삶의 방편이 된듯하다.
첫댓글 글을 일단 적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의 판단의 조언을 구합니다. 먼저 여러분과 대화하고 더 생각해 보고 내일 정도 좋은 교사 운동 홈 게시판과 뉴조에 송고하려 합니다.
재단이 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가? 재단관계자가 선교적인 의식이 있는가? 교사들의 선교적인 의식 재고를 위한 재교육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가? 기독학교이건 미션스쿨이건 신앙과 학문의 전수를 위한 독특한 교재를 갖추고 있는가? 부정적이다. 초기는 몰라도 현재는 개인적인 명예,안락한 삶의 방편이 된듯하다.
양/무/리/마/을/에서 논의가 활발한데, 관전평을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그곳의 논의가 굉장히 넓어진 느낌이 듭니다. 참고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ㅎㅎㅎ
양/무/리/마/을에서의 논의가 좀 더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신학적 검토가 되는 방향으로 개진되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
오예~~ 저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법, 이 법 개정전에 사립학교 재임용 탈락에 관한 법 때문에 열을 낸 적 있었는데, 차분히 생각해 봐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