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判敦寧直菴尹公神道碑銘 윤사국(尹師國, 1728~1809) 행장 신도비
생 : 영조 4년 무신년(1728년) 8월 19일~
몰 : 순조 9년 기사년(1809년) 3월 29일 향년 82세 졸
[*칠원 윤씨(漆原 尹氏) 가문의 인물인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의 세계(世系, 조상의 계통)와 가통을 기록한 묘갈명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묘로(墓路) 남동쪽에 세워 신령이 지나가는 길을 비추는 비석이며, 신도비에 새기는 글을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 한다.
*신도비명은 보통 신중의 생애·업적을 기록하는 서문과, 전통적 시 형식으로 요약한 명문(銘文)으로 구성된다.
*신도비명 구성
비액(碑額): 제목으로 인물의 직함·시호·이름 등을 적는다.
비제(碑題): 인물의 전체 직함을 적고, 끝에 ‘神道碑銘幷序(신도비명병서)’를 붙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서문(序文): 신중의 생애·경력·가계 등을 적어 분량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判敦寧直菴尹公神道碑銘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직암(直菴) 윤 공(尹公)의 신도비명.
公諱師國字賓卿號直菴。漆原之尹。以新羅太師始榮爲初祖。入我朝有諱碩輔。弘文館直提學。選廉謹吏。燕山甲子直言。卒于謫。後贈吏曹參判。歷三世諱自莘。文科正郞。光海政亂。棄官歸鄕以終。仁廟改玉。累贈至吏曹參判。於公爲六世祖。高祖諱遇丁掌令。曾祖諱叙績正郞贈吏曹參判。祖諱志和正言贈吏曹判書。考諱敬宗進士早卒。以孝稱。贈左贊成。
*칠원 윤씨(漆原 尹氏) 가문의 인물인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의 세계(世系, 조상의 계통)와 가통을 기록한 묘갈명(행장)이다.
公諱師國字賓卿號直菴。漆原之尹。공의 휘(이름)는 사국(師國)이고, 자는 빈경(賓卿)이며, 호는 직암(直庵)이다. 본관은 칠원 윤씨(漆原尹氏)이다.
以新羅太師始榮爲初祖。신라 시대에 태사(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초조)로 삼는다.
入我朝有諱碩輔。弘文館直提學。選廉謹吏。燕山甲子直言。卒于謫。後贈吏曹參判。조선 왕조에 들어와 휘 석보(碩輔)라는 분이 계셨는데, 홍문관 직제학을 지냈고 청렴하고 신중한 관리(廉謹吏)로 뽑히셨다.
연산군 때인 갑자사화(1404년) 때 바른 말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으며, 훗날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歷三世諱自莘。文科正郞。光海政亂。棄官歸鄕以終。(그 뒤로) 3세를 지나 휘 자신(自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내셨다. 광해군 때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仁廟改玉。累贈至吏曹參判。於公爲六世祖。인조반정(仁廟改玉) 이후 거듭 추증되어 이조참판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윤사국)에게는 6세조(6대조)가 되신다.
高祖諱遇丁掌令。고조부의 휘는 우정(遇丁)이며,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내셨다.
曾祖諱叙績正郞贈吏曹參判。증조부의 휘는 서적(叙績)이며, 정랑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셨다.
祖諱志和正言贈吏曹判書。할아버지의 휘는 지화(志和)이며,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셨다.
考諱敬宗進士早卒。以孝稱。贈左贊成。아버지는 휘가 경종(敬宗)으로, 진사(進士)였으나 일찍 돌아가셨다. 효성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셨다.
妣贈貞敬夫人林川趙氏。府使顯期女。兩世之贈以公貴也。本生考諱敬龍。觀察使。前妣贈貞夫人平山申氏。府使糓女。繼妣貞夫人延日鄭氏。參奉纘憲女。圃隱先生之後。公鄭夫人出也。
* 윤사국(尹師國) 선생의 어머니(생모와 적모) 및 가문의 혼맥에 대한 기록이다.
妣贈貞敬夫人林川趙氏。府使顯期女。(養家 양자로 들어간 집.) 돌아가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된 임천 조씨(林川趙氏)로, 부사(府使)를 지낸 조현기(趙顯期)의 딸이다.
兩世之贈以公貴也。부모와 조부모 등 (앞서 언급된) 2세대에 걸친 관직의 추증은 공(윤사국)의 신분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 자식이 높은 관직에 오르면 부모와 조상이 추증을 받는 제도에 따른 것입니다.)
本生考諱敬龍。觀察使。친아버지(생부)의 휘는 경룡(敬龍)이며,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셨다.
前妣贈貞夫人平山申氏。府使糓女。친가의 전모(첫째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사를 지낸 신곡(申糓)의 딸이다. (※ 윤사국의 일가 친척인 윤경종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繼妣貞夫人延日鄭氏。參奉纘憲女。圃隱先生之後。친가의 계모(이어 얻은 어머니, 생모)는 정부인 영일 정씨(延日鄭氏)로, 참봉(參奉)을 지낸 정찬헌(鄭纘憲)의 딸이며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다.
公鄭夫人出也。공(윤사국)은 바로 이 정부인 영일 정씨의 소생(몸에서 태어남)이다.
* 양반 가문에서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형제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원문을 보면 윤사국 선생은 본래 '윤경룡'의 아들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숙부 혹은 백부인 '윤경종'의 양자로 들어가 가문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법적) 부모의 기록이 함께 적혀 있는 것이다.
以英廟四年戊申八月十九日生。六歲隨往觀察使公洪陽任所。遊賓館。見乞兒飢卧惻然。使人哺以粥。觀察公聞而喜曰。兒有濟人意。遠大器也。及觀察公卒于定州府。公時年十七。與仲氏龍仁公治喪勘簿。纖悉無憾。自幼才氣穎發。文藝風就。及長尤嫺功令業。
*윤사국(尹師國) 선생의 탄생, 유년 시절의 일화, 그리고 영민했던 청소년기를 다룬 기록이다.
以英廟四年戊申八月十九日生。
영조 4년 무신년(1728년) 8월 19일에 태어났다.
六歲隨往觀察使公洪陽任所。遊賓館。見乞兒飢臥惻然。使人哺以粥。
6세 때 아버지인 관찰사공(친부 윤경룡)의 임지인 홍양(洪陽, 지금의 충남 홍성)에 따라갔다. 객관(賓館)에서 놀다가 한 어린 거지가 굶주려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죽을 먹이게 했다.
觀察公聞而喜曰。兒有濟人意。遠大器也。
관찰사공(아버지 윤경종)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아이가 사람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장차 먼 훗날 크게 될 그릇이다"라고 했다.
及觀察公卒于定州府。公時年十七。관찰사 공이 평안도 정주부(定州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의 나이는 당시 17세였다.
與仲氏龍仁公治喪勘簿。纖悉無憾。둘째 형(仲氏)인 용인공(龍仁公, 윤사홍)과 함께 상례를 치르고 재정과 행정 장부(簿)를 세밀하게 대조하며 정리하는데,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한 점의 아쉬움이나 실수가 없도록 완벽하게 처리했다.
自幼才氣穎發。文藝風就。及長尤嫺功令業。
어릴 때부터 재능과 기운이 빼어나게 드러났고, 문장과 학문적 성취가 일찍부터 바람이 불듯 빠르게 이루어졌다. 자라서는 특히 과거 시험 규정에 맞춘 학업(功令業)에 매우 능숙했다.
英廟己卯擢謁聖文科。特命入侍慰諭。亟稱其有觀察公典型。盖觀察公自金吾郞受上知最深。而惜其未究用也。是冬與翰圈。庚辰召試付檢閱。辛巳陞六品。及新圈。僚官欲取武家子二人。其人國舅切戚也。公執不可。欲陳䟽罷圈。
*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과정과, 권력층의 압박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군자로서의 강직한 기개와 청렴함(정조(貞操))을 보여준 핵심 일화이다.
英廟己卯擢謁聖文科。特命入侍慰諭。
영조 35년 기묘년(175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였다. 왕이 특별히 명령하여 대궐 안으로 들어와 자신을 뵙도록(入侍) 한 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였다(慰諭).
亟稱其有觀察公典型。盖觀察公自金吾郞受上知最深。而惜其未究用也。
영조는 공을 보고 그의 아버지인 관찰사 공(윤경종)의 풍모와 규범(典型)이 남아있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대개 관찰사 공은 의금부의 관리(金吾郞) 시절부터 영조의 신임을 가장 깊게 받았으나, 그 능력을 끝까지 다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을 영조가 늘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是冬與翰圈。庚辰召試付檢閱。
그해 겨울에 사관을 선발하는 후보자 명단인 한권(翰圈)에 올랐다.
경진년(1760년)에 왕이 임하는 시험(召試)을 치른 후, 역사를 기록하는 관직인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辛巳陞六品。
신사년(1761년)에 품계가 정6품으로 승진하였다.
及新圈。僚官欲取武家子二人。其人國舅切戚也。
새로운 사관 후보자를 뽑는 선발(新圈) 시기가 다가왔다.
함께 일하던 동료 관료들이 무관 집안의 자제 두 명을 사관 후보자로 선발하고자 했다. 알고 보니 그 자제들은 당시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 왕비의 친정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公執不可。欲陳䟽罷圈。
공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執不可). 그리고 왕에게 상소(陳䟽)를 올려 이번 사관 선발 시험 자체를 취소(罷圈)시키고자 했다.
*알성문과(謁聖文科): 국왕이 성균관 문묘에 가서 공자에게 잔을 올리는 의식을 행한 뒤, 현장에서 즉석으로 선비들을 모아 치르던 특별 과거 시험이다.
*한권(翰圈) / 신권(新圈): 조선 시대 외교 문서와 역사를 담당하던 예문관(사관)이나 홍문관의 관리를 뽑을 때, 기존 관리들이 추천권을 행사하여 유능한 인물의 이름에 동그라미(圈)를 쳐서 후보 명단을 만들던 인사 제도. 대단히 명예로운 자리였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청탁 압력이 심했다.
上聞之。命入侍問其狀。趣出命行圈。嚴敎荐下。公徐起圈進。二人者不與焉。上怒特補舊葛坡權管。旋以道伯親嫌遆還。
* 외척 세력에 맞서던 윤사국(尹師國) 선생의 강직함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과, 이로 인해 임금(영조)의 진노를 사서 변방으로 좌천되는 시련을 겪는 내용이다.
上聞之。命入侍問其狀。왕(영조)이 이 소문을 듣고, 공을 대궐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령하여(命入侍) 자세한 사정(其狀)을 물었다.
趣出命行圈。嚴敎荐下。
왕은 어서 물러가서 명단 선발 절차를 그대로 진행하라(行圈)고 재촉하며, 엄한 명령(嚴敎)을 거듭 내렸다.
公徐起圈進。二人者不與焉。
공은 천천히 일어나 선발 명단(圈)을 작성하여 올렸으나, 그 외척 자제 두 명(二人者)은 끝내 명단에 포함하지 않았다(不與焉).
上怒特補舊葛坡權管。
왕이 크게 노하여, 특별히 공을 변방인 구갈파(舊葛坡)의 권관(權管)으로 임명하여 좌천시켰다.
旋以道伯親嫌遆還。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旋), 도백(道伯, 함경도 관찰사)과 친인척 관계의 기피(親嫌) 조항에 걸려 직책이 바뀌어 돌아왔다(遆還).
*구갈파 권관(舊葛坡 權管): 구갈파는 함경도 삼수(三水) 지역에 있던 변방의 군사 요새(진보)이다. 권관은 그곳을 지키는 가장 낮은 품계(종9품)의 무관직이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인 예문관 사관(문관 정6품)에게 변방의 말단 무관직을 내린 것은 엄청난 징벌성 좌천이었다.
*친혐(親嫌): 조선 시대의 인사 원칙인 상피제(相避制)를 의미한다. 권력을 쥐거나 감독하는 자리에 친인척이 있으면 공정성을 해칠 수 있어 서로 같은 곳에 근무하지 못하게 피하도록 한 제도이다. 윤사국 선생은 이 상피제 덕분에 변방 고생을 면하고 곧장 복귀할 수 있었다.
壬午除正言。旋爲吏曹佐郞。兩湖飢。有北糓泛舟之役。將遣督運御史。難其人。上曰尹某深沈有識慮。可任國事。命入侍仍差御史。公卽日馳到兩湖界。董飭以躬。措畫有方。未數月運數十萬斛。無一臭載。旣竣仍監賑列邑。湖民賴無捐瘠。賑畢反面。上大加褒嘉。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영조 38년(1762년) 임오년에 사간원 정언과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요직인 이조 좌랑에 임명된 후, 충청도와 전라도(양호)에 닥친 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독운어사(督運御史)'로 파견되어 뛰어난 행정 능력과 구휼 성과를 올린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壬午除正言。旋爲吏曹佐郞。
임오년(영조 38년, 1762년)에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兩湖飢。有北糓泛舟之役。將遣督運御史。難其人。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큰 기근이 들었다. 이에 북쪽(평안도·황해도)의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대대적인 수송 작업(北糓泛舟之役)이 결정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총괄하고 감독할 독운어사(督運御史)를 파견하려 했으나, 워낙 중책이라 적임자를 찾기 어려워했다(難其人).
上曰尹某深沈有識慮。可任國事。命入侍仍差御史。
왕(영조)이 말하기를, "윤 아무개(윤사국)는 됨됨이가 진중하고 침착하며 식견과 사려가 깊으니, 가히 나라의 큰일을 맡길 만하다"라고 했다.
왕이 직접 대궐로 불러들여 면담한 후, 곧바로 그를 독운어사에 임명하였다.
公卽日馳到兩湖界。董飭以躬。措畫有方。
공은 명을 받은 바로 그날로 말에 채찍질하여 양호 지역의 경계에 도달했다. 몸소 현장을 지휘하고 단속했으며(董飭以躬), 치밀하고 올바른 계획과 방책을 세워 대처했다(措畫有方).
未數月運數十萬斛。無一臭載。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무려 수십만 곡(斛, 섬)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곡식을 수송 완료했는데, 그 과정에서 썩어서 버려진 쌀(臭載)이 단 한 톨도 없었다.
旣竣仍監賑列邑。湖民賴無捐瘠。
수송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왕의 명으로 그 지역의 여러 고을을 돌며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일(監賑)을 계속 감독하게 했다.
충청·전라도 백성들은 공의 노력에 의지하여(賴), 굶어 죽거나 몸이 말라 쓰러지는 비극(捐瘠)을 면할 수 있었다.
賑畢反面。上大加褒嘉。
기근 구제 작업을 모두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와 왕을 뵙고 보고를 올리니(反面), 왕이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고 상을 내렸다(大加褒嘉).
*독운어사(督運御史): 국가적인 재난이나 전쟁 시에 군량미 혹은 구휼미의 대규모 수송(조운)을 총괄 지휘하고 감독하기 위해 특별히 임명하여 파견하던 임시 어사 직책이다.
*견적(捐瘠): 굶주려 몸이 마르거나(瘠), 굶어 죽어 시체가 버려지는(捐) 비참한 재난 상황을 뜻한다.
拜持平。以在外削職。癸未叙。承命按廉嶺南二邑。丙戌登瀛選。除副修撰副校理。差關北監市御史。以親老遞。上䟽乞養。優批特許。臺臣柳知養䟽論和緩主子鄭厚謙。上駕幸毓祥宮。特除公掌令。命傳啓。聖意欲其論知養也。公只陳前啓而退。上怒命投畀大靜縣。旋以親老移配海南。
*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사헌부와 홍문관의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다가, 조선 후기 정국의 핵이었던 화완옹주와 정후겸의 권력 문제(유지양의 상소 사건)에 휘말려 임금(영조)의 뜻을 거스르고 제주 대정과 전라도 해남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 절개의 시련을 담고 있다.
拜持平。以在外削職。癸未叙。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도성 밖에 가 있었다는 이유로 관직이 삭탈(削職)되었다가, 계미년(영조 39년, 1763년)에 복권(叙)되었다.
承命按廉嶺南二邑。
왕의 명령을 받아 영남(경상도) 지방의 두 고을을 암행(按廉)하며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고 민생을 살폈다.
丙戌登瀛選。除副修撰副校理。
병술년(영조 42년, 1766년)에 문관의 최고 영예인 영선(瀛選, 홍문관 관원을 뽑는 선발)에 합격하여, 홍문관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에 제수되었다.
差關北監市御史。以親老遞。上䟽乞養。優批特許。
관북(함경도) 지방의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감시어사(監市御史)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혹은 부모님)가 연로하시다는 이유로 관직이 교체(遞)되었다. 왕에게 상소를 올려 늙으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청하니(乞養), 영조가 넉넉하고 따뜻한 답서(優批)를 내려 특별히 허락해 주었다.
臺臣柳知養䟽論和緩主子鄭厚謙。
(그 무렵) 사헌부·사간원의 관리(臺臣)였던 유지양(柳知養)이 상소를 올려, 화완옹주의 양자이자 당대 권세가였던 정후겸(鄭厚謙)을 탄핵하고 비판하는 논의(䟽論)를 펼쳤다. (정후겸은 영조가 끔찍이 아끼던 딸 화완옹주의 양자로, 영조 말기 조정을 장악했던 최고의 권력자였다. 유지양이 목숨을 걸고 그를 탄핵한 것이다.)
上駕幸毓祥宮。特除公掌令。命傳啓。
영조가 숙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에 거둥하였을 때, 특별히 윤사국을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하고 격식에 맞춰 왕에게 올리는 보고(傳啓)를 하라고 명령했다.
聖意欲其論知養也。公只陳前啓而退。
왕의 속뜻(聖意)은 윤사국으로 하여금 (감히 권력자를 탄핵해 조정을 시끄럽게 한) 유지양을 역으로 논죄하고 비판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公只陳前啓而退。그러나 공은 영조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헌부가 이전에 올렸던 통상적인 보고(前啓)만을 그대로 진술하고 물러 나왔다.
上怒命投畀大靜縣。이에 영조가 크게 노하여 공을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으로 유배(投畀)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영조는 윤사국을 이용해 유지양을 처벌하고 정후겸을 비호하려 했다. 하지만 윤사국은 왕의 의도를 알면서도 비겁하게 동료 관료를 짓밟거나 권력자에게 아첨할 수 없다고 판단해 왕의 명령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대정현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혹독한 유배지로 꼽히는 곳이다).
旋以道伯親嫌移配海南。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구갈파 사건 때처럼) 전라도 관찰사(道伯)와 친인척 관계로서 서로 피해야 하는 상피제(親嫌)에 걸리게 되어, 유배지가 전라도 해남(海南)으로 옮겨지게 되었다(移配).
*정후겸(鄭厚謙):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화완옹주의 양자로, 영조 말년에 조정을 장악했던 최고의 권력자였다. 훗날 정조가 즉위한 뒤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사형당하게 된다. 윤사국 선생은 이 거대 세도 권력과 왕의 압박 속에서도 대간으로서의 공정함과 신념을 지킨 것이다.
*육상궁(毓祥宮): 영조의 친어머니인 숙빈 최씨(영화 동이의 주인공)의 신위를 모신 사당. 영조가 지극정성으로 참배하던 곳.
*투비(投畀): 먼 변방이나 외딴섬으로 내쫓아 유배 보내는 형벌.
初洪相鳳漢怒公不附己。屢齮齕公。人或勸公往見釋憾。公笑不應。至是厚謙倚主橫甚。權傾一世。天怒且震疊。而公侃然不膺旨。輿論韙之。未幾蒙宥。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권력자들의 회유와 압박에 흔들리지 않고 대간의 소신을 지켜내자, 조야의 여론(輿論)이 그를 칭송하고 결국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던 홍봉한과 정후겸의 권세 앞에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은 선비의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
初洪相鳳漢怒公不附己。屢齮齕公。
당초에 정승 홍봉한(洪鳳漢)은 공(윤사국)이 자신에게 의탁하지 않는 것(不附己)을 분하게 여겨, 여러 차례 공을 모함하고 헐뜯었다(屢齮齕公).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로, 영조 말기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노론의 거두였다. 윤사국은 이런 최고 권력자의 줄서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여 미움을 샀던 것이다).
人或勸公往見釋憾。公笑不應。
이에 주변 사람들이 혹시라도 공에게 "직접 가서 홍봉한을 만나 오해와 원한을 푸는 것이 어떻겠냐(釋憾)"고 권유하기도 했으나, 공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笑不應). (권력자에게 고개를 숙여 편한 길을 가기보다는, 비록 핍박을 받을지언정 자신의 청렴함과 지조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와 대범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至是厚謙倚主橫甚。權傾一世。
이때에 이르러서는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鄭厚謙)이 옹주(主)의 배경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 너무나 심해져, 그 권세가 온 세상을 뒤흔들 정도(權傾一世)였다.
天怒且震疊。而公侃然不膺旨。輿論韙之。
(앞선 유지양 탄핵 사건으로) 왕(영조)의 진노가 벼락치듯 거듭 들이닥치는(震疊) 삼엄한 상황이었음에도, 공은 강직하고 당당한 태도(侃然)로 왕의 부당한 의도(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세상의 여론(輿論)이 모두 공의 행동을 옳게 여겼다(韙之). (왕의 엄명과 세도가의 권력이라는 이중의 압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윤사국의 강직함(侃然)은 조정과 사림(士林)의 엄청난 존경을 받게 되었다. '韙(옳을 위)' 자는 그의 선택이 역사적으로 정당했음을 공인하는 표현이다.
未幾蒙宥。
그리하여 유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은혜를 입어 유배에서 풀려나게(蒙宥 몽유) 되었다.
*홍상 봉한(洪相 鳳漢): 정조 임금의 외할아버지이자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을 뜻한다. 당대 노론 세력의 영수이자 영의정(相)을 지낸 최고 권력자였다.
*기흘(齮齕): 측면 이(齮)와 앞니(齕)로 물어뜯는다는 뜻으로, 권력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집요하게 헐뜯고 공격하여 해치려는 행위를 비유하는 말이다.
*간연(侃然):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굽히지 않으며, 두려움 없이 당당한 모습을 뜻하는 표현이다.
*위지(韙之): 그것을 옳게 여기다(韙)라는 뜻으로, 사림과 백성들이 그의 대간으로서의 행동과 절개를 절대적으로 지지했음을 의미한다.
戊子拜兼文學。上語筵臣曰尹某不柔弱。政合春坊。己丑除弼善掌樂正。尋以執義違牌。投畀海美縣。旋宥。庚寅除江東縣監。民無債逋。軍絶簽擾。未一朞闔境頌之。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영조 44년(1768년) 무자년부터 영조 46년(1770년) 경인년까지 세자 시강원(춘방)의 요직을 거치고, 대간의 직무를 수행하다 다시 유배를 가며, 이후 지방관(강동현감)으로 파견되어 훌륭한 선정을 베푼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戊子拜兼文學。上語筵臣曰尹某不柔弱。政合春坊。
무자년(영조 44년, 1768년)에 세자시강원 겸문학(兼文學)에 임명되었다. 왕(영조)이 대궐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윤 아무개(윤사국)는 성품이 나약하지 않고 강단이 있으니(不柔弱), 참으로 세자를 교육하는 관청(春坊, 시강원)의 직책에 딱 맞아떨어진다(政合)"라고 했다. (영조는 비록 윤사국이 자신의 명을 거역해 유배를 보내기도 했으나, 그의 강직하고 타협 없는 성품을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훗날 왕위를 이을 세자(정조)의 올바른 교육을 맡길 적임자로 윤사국을 지목한 것이다).
己丑除弼善掌樂正。
기축년(영조 45년, 1769년)에 시강원 필선(弼善)과 장악원 정(正)에 제수되었다.
尋以執義違牌。投畀海美縣。旋宥。
얼마 후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을 때 왕의 부름(패, 牌)에 응하지 않았다(違牌)는 죄목으로 충청도 해미현(海美縣)으로 유배(投畀)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용서를 받고 풀려났다(旋宥).
* ('위패(違牌)'는 왕이 대궐로 입궐하라는 명령(패)을 내렸으나 정당한 이유 없이 응하지 않은 죄를 뜻한다. 대간(언론관)으로서의 지조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왕의 호출을 거부하다가 해미읍성으로 유명한 해미현으로 유배를 갔으나, 영조가 그의 진심을 알았기에 곧바로 석방해 주었다).
庚寅除江東縣監。
경인년(영조 46년, 1770년)에 평안도 강동현감(江東縣監)으로 임명되어 내려갔다.
民無債逋。軍絕簽擾。
(그가 부임하자) 백성들 사이에 세금이나 빚을 내지 못해 밀리는 일(債逋)이 없어졌고, 군역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괴롭히는 폐단(簽擾)이 완전히 끊어졌다(絕).
未一期闔境頌之。
부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未一期) 고을 전체(闔境)가 그의 어진 정치를 칭송하였다(頌之).
*(조선 후기 지방 행정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였던 '재정 문제(세금 체납)'와 '군역의 폐단(군포 징수와 강제 징집)'을 탁월한 행정력과 청렴함으로 완벽하게 해결했음을 뜻한다. 앞서 양호 구제 작전에서 보여준 물류·행정 능력이 지방 고을의 수령으로서도 독보적으로 발휘된 것이다).
*춘방(春坊): 왕세자의 교육과 보필을 담당하던 관청인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의 별칭. 동궁(東宮)을 봄(春)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
*위패(違牌): 신하가 임금의 명령서인 '패(牌)'를 받고도 정당한 사유나 허락 없이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죄를 뜻한다. 주로 대간들이 자신의 탄핵이나 소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항의의 표시로 행하곤 했다.
*채포(債逋): 백성들이 관가에 내야 할 세금이나 대여한 곡식(환곡) 등을 제때 내지 못하고 밀리는 것을 말한다. 윤사국 선생의 수완으로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졌음을 의미한다.
*첨요(簽擾): 군적에 이름을 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리들의 농간과 침탈을 뜻한다. 조선 후기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던 폐단 중 하나였는데, 윤사국 선생이 이를 엄격히 단속해 근절시켰음을 보여준다.
辛卯內移館職。以善治命仍任。壬辰連除副校理應敎兼輔德中學敎授。追上尊號于顯廟。以讀金寶官陞通政。除左副承旨陞至左承旨。遞拜兵曹參議。
*영조 47년(1771년) 신묘년부터 영조 48년(1772년) 임진년 무렵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중앙 홍문관 관직으로 복귀하고, 국가 의례의 공로로 당상관(통정대부)으로 승진하여 승정원(승지)과 병조의 핵심 요직을 역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辛卯內移館職。以善治命仍任。
신묘년(영조 47년, 1771년)에 내직(중앙 관직)인 홍문관 관직(館職)에 임명되어 도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강동현을) 너무나 잘 다스렸기 때문에, 왕이 "고을을 잘 다스렸다(善治)"라는 명을 내리며 강동현감 직무를 그대로 계속 맡도록(仍任) 하였다.
壬辰連除副校理應敎兼輔德中學敎授。
임진년(영조 48년, 1772년)에 연달아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응교(應敎)에 제수되었으며, 세자시강원 보덕(輔德)과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임하였다. *(마침내 도성으로 복귀하여 학술과 언론을 담당하는 홍문관의 중책(응교)을 맡는 동시에, 왕세자(훗날의 정조)를 교육하는 시강원 보덕과 왕실 교육기관인 중학의 교수직을 다시 겸임하게 된다. 정조와의 정치적·학문적 유대가 더욱 공고해지는 시기이다).
追上尊號于顯廟。以讀金寶官陞通政。
현종(顯廟) 임금에게 뒤늦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국가적 행사가 있었다. 이때 왕의 도장과 명칭을 기록한 금보(金寶)를 읽는 관리인 독금보관(讀金寶官)의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품계가 당상관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로 승진하였다. *(국가 경사나 왕실 의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품계가 올랐다. 이 행사를 통해 윤사국은 마침내 관료 사회의 핵심인 '당상관(堂上官)' 반열에 오르게 된다.)
除左副承旨陞至左承旨。遞拜兵曹參議。
승정원의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제수된 후 승진을 거듭하여 좌승지(左承旨)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관직이 바뀌어 兵曹參議(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승지'는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에 해당하며, '병조참의'는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의 핵심 당상관(정3품 수석 국장 및 차관보급)이다. 왕의 최측근이자 군사 행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조정의 핵심 인재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관직(館職): 조선 시대 문관 엘리트들의 요람이었던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성균관(成均館) 등의 직책을 통칭하는 말. 주로 학문적 소양이 깊은 이들이 보임되었다.
*현묘(顯廟): 조선 제18대 국왕인 현종(顯宗)을 높여 부르는 묘호.
*독금보관(讀金寶官): 국가의 큰 제사나 종묘 의례 때 왕이나 왕비에게 올리는 어보(도장)와 책문의 내용을 백관과 조상 앞에서 장엄하게 낭독하는 영예로운 임무. 이 의례를 무사히 마치면 포상으로 품계가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통정(通政):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를 뜻한다. 이때부터 '대감' 혹은 '영감'으로 불리며 가마를 탈 수 있는 고위 관료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승지(承旨):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비서실인 승정원의 정3품 관직. 좌승지는 승정원의 서열 2위로, 주로 영의정이나 병조(군사) 등 핵심 소통을 담당했다.
癸巳除谷山府使。邑俗荒陋。葬祭不以時。文諭士民。俾一遵禮制。擇置訓長於各面。課諸生講製而賞罰之。一以禮敎爲治。乙未瓜遞。拜大司諫。是冬丁內艱。
*영조 49년(1773년) 계사년부터 영조 51년(1775년) 을미년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곡산부사로 부임하여 유교적 례(禮)와 교육으로 고을을 개혁한 선정, 그리고 중앙으로 복귀하여 대사간에 임명된 후 겪은 모친상의 기록이다.
癸巳除谷山府使。
계사년(영조 49년, 1773년)에 곡산부사(谷山府使)에 제수되었다. *(승지와 병조참의 등 도성의 핵심 요직을 거친 후, 외직인 황해도 곡산의 수령(종3품 부사)으로 나가 지역 민생을 직접 챙기게 되었다).
邑俗荒陋。葬祭不以時。
그 고을의 풍속이 거칠고 누추하여(荒陋),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제때(예법에 맞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文諭士民。俾一遵禮制。
이에 글(격문이나 지침서)을 지어 선비와 백성들을 타이르고 깨우쳐서(文諭), 모두가 한결같이 유교의 예법과 제도(禮制)를 따르도록 만들었다. (무력이나 형벌로 백성을 억누르기보다, 도덕과 문화적 수단(글)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먼저 변화시키고자 한 전형적인 유학자 목민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擇置訓長於各面。
각 면(面, 행정구역)마다 덕망과 학식을 갖춘 사람을 골라 훈장(訓長)으로 임명하여 배치하였다.
課諸生講製而賞罰之。一以禮敎爲治。
지역의 학생(諸生)들에게 경전을 읽고 외우는 경강(講)과 글을 짓는 제술(製)을 과제로 내어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성과에 따라 상과 벌을 엄격히 주었다. 이처럼 철저히 예교(禮敎, 예법과 교육)로써 고을을 다스렸다. (의미: 기초 교육 기관의 체계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철저한 학업 관리(상벌)를 통해 고을 전체의 지적·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렸음을 뜻한다).
乙未瓜遞。拜大司諫。
을미년(영조 51년, 1775년)에 임기가 차서 교체(瓜遞)되었다.
(도성으로 복귀하여)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대사간'은 왕에게 간언을 올리고 언론을 담당하는 사간원의 최고 수장(정3품 당상관)이다. 과거 정언, 지평, 장령, 집의 등 언론직을 두루 거치며 외압에 굴하지 않았던 윤사국의 강직한 기개를 조정이 높이 평가하여 언론의 수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是冬丁內艱。
그해 겨울에 어머니의 상(丁內艱)을 당했다.
*곡산(谷山): 황해도 북동쪽에 위치한 요충지로, 행정 구역상 '부(府)'에 해당하여 당상관급(정3품) 수령인 부사가 파견되던 큰 고을이다. (훗날 다산 정약용도 곡산부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강제(講製): 조선 시대 유생들의 학업을 평가하던 방법. 강(講)은 책을 보지 않고 외우거나 뜻을 풀이하는 구술시험이고, 제(製)는 주어진 시제에 맞추어 시나 문장을 짓는 논술시험이다.
*과체(瓜遞): '과기(瓜期)가 되어 교체되다'라는 뜻. 참외가 익어 수확하는 시기(1년)처럼, 관리의 정해진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
*정내간(丁內艱): 부모의 상을 당하는 것을 '정우(丁憂)'라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상을 당한 것을 특별히 '내간(內艱)'이라하고. 아버지는 외간(外艱)이라 한다.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고위 관직에 있더라도 부모상을 당하면 즉시 사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해야 했다.
正廟戊戌制闋。連除承旨諫長。時方親鞫。公以病違召。賊臣洪國榮攘臂曰鞫座違召無臣分。公不爲動。撤鞫而遞。時徐文貞等三公名在連啓。公之不出。不欲參其啓也。
*정조 2년(1778년) 무술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모친상을 마치고 복직한 뒤,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세도 정치가 홍국영(洪國榮)의 서슬 퍼런 압박과 협박 앞에서도 대간으로서의 절개와 신념을 지켜낸 핵심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正廟戊戌制闋。連除承旨諫長。
정조 2년 무술년(1778년)에 어머니의 삼년상(상복을 벗음, 制闋)이 끝났다. 조정에 복귀하자마자 연달아 승지(承旨)와 언론의 수장인 사간원 대사간을 뜻하는 간장(諫長)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윤사국이 상을 마치자마자 그의 강직함을 신뢰하여 왕의 최측근 요직과 언론 총책임자 자리를 연이어 맡기며 전폭적으로 중용했다).
時方親鞫。公以病違召。
마침 그때 정조 임금이 몸소 죄인을 심문하는 친국(親鞫)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윤사국)은 병을 핑계로 임금의 부름(위召)에 응하지 않고 나가지 않았다(違召).
賊臣洪國榮攘臂曰鞫座違召無臣分。公不爲動。
그러자 역적이나 다름없는 신하(賊臣)였던 홍국영(洪國榮)이 팔을 걷어붙이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국문하는 자리에 왕의 부름을 거역하고 나오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臣分)가 아니다!"라며 공을 사정없이 압박했다. 그럼에도 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不爲動). (당시 홍국영은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임하며 정승들도 무서워하던 권력의 정점이었다. 그런 홍국영이 대놓고 으름장을 놓았음에도 윤사국은 선비의 지조로 꼿꼿이 버텼다).
撤鞫而遞。
결국 국문하는 자리가 해산(撤鞫)되었고, 공은 임금의 부름을 거역했다는 명목으로 관직에서 교체(遞)되어 물러났다.
時徐文貞等三公名在連啓。公之不出。不欲參其啓也。
당시 서문정공(徐文貞, 서명선) 등 삼공(三公)의 이름이 연명 탄핵 상소(連啓)에 들어있었는데, 공이 나아가지 않은 것은 그 불의한 상소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묘(正廟): 조선 제22대 국왕인 정조(正祖)를 높여 부르는 묘호.
*제결(制闋):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는 제도적 기간이 다 끝나서 상복을 벗는 것을 의미.
*친국(親鞫): 중대한 모반죄나 역모 사건이 터졌을 때, 국왕이 의금부 등에 직접 나가 죄인을 국문하는 엄중한 사법 행위.
*홍국영(洪國榮): 정조의 즉위를 도우며 집권 초기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임해 군권과 인사권을 독점했던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세도정치 권력자. 그의 기세가 워낙 하늘을 찔러 정승과 판서들도 그 앞에서는 쩔쩔맸다. 윤사국 선생은 영조 대의 홍봉한, 정후겸에 이어 정조 대의 홍국영까지 당대 최고 권력자들의 핍박을 모두 소신으로 정면 돌파한 것이다.
*서문정(徐文貞): 정조 즉위에 큰 공을 세워 영의정에 오른 정승 서명선(徐命善)을 시호(文貞)로 높여 부른 말. 홍국영은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던 서명선 등 원로 정승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간들을 압박해 무리한 탄핵을 시도하고 있었다.
己亥暫入喉院。除安東縣監。安是大邑。倉凡十三。糓爲累萬。公初莅任。按簿査逋。作糶糴案。分戶排糓。劃作層格。如年表法。使民皆易知。吏莫售奸。著爲法。逋未徵完。而翌年移東萊府使。因繡啓奪告身。
*정조 3년(1779년) 기해년부터 정조 4년(1780년) 경자년 무렵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안동부사(원문에는 현감으로 기록)로 부임하여 장부 체계를 혁신해 아전들의 부정부패를 근절한 업적과, 이후 동래부사로 옮긴 뒤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하는 시련을 기록하고 있다.
己亥暫入喉院。除安東縣監。
기해년(정조 3년, 1779년)에 잠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喉院)에 들어갔다가, 영남의 요충지인 안동현감(安東縣監, 실제 직제는 부사)에 제수되었다. (홍국영의 위협에 맞서 관직을 던졌던 윤사국은, 홍국영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다시 승정원(목구멍처럼 왕의 명령을 출납한다 하여 '후원'이라 부름)으로 복귀한 뒤 안동의 수령으로 나갔다).
安是大邑。倉凡十三。糓爲累萬。
안동은 매우 큰 고을(大邑)이어서, 관청의 창고가 무려 13개나 되었고 그 안에 쌓인 환곡(곡식)은 수만 석에 달했다.
公初莅任。按簿査逋。作糶糴案。
공이 처음에 부임하여, 장부를 일일이 대조하며 징수하지 못하고 밀린 세금과 곡식(逋)을 철저히 조사한 뒤, 환곡의 대여와 회수를 기록하는 환곡 장부(糶糴案 조적안)를 새로 만들었다.
分戶排糓。劃作層格。如年表法。
각 가구(戶)를 나누어 배정된 곡식을 배열하되, 가로세로의 칸과 층(層格)을 나누어 마치 역사의 '연표(年表法)'와 같은 도표를 만들었다.
使民皆易知。吏莫售奸。著爲法。
그리하여 백성들은 누구나 자신의 환곡 현황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고(易知), 간악한 아전과 향리들은 더 이상 속임수를 쓸 수 없게 되었다(莫售奸). 이를 고을의 영구한 법식(法)으로 정착시켰다. (당시 환곡 제도는 아전들이 복잡한 장부를 조작해 백성들을 등쳐먹는 가장 가혹한 수탈 수단이었다. 윤사국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났던 수학적·행정적 재능을 발휘해, 현대의 '엑셀 스프레드시트'나 통계표와 같은 연표(年表) 형식의 혁신적인 회계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장부를 투명하게 공개하니 비리가 원천 차단되었다).
逋未徵完。而翌年移東萊府使。
미납된 환곡이 아직 다 징수되어 끝나지 않았는데, 이듬해(1780년)에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因繡啓奪告身。(그로 인하여 안동을 조사한) 암행어사의 보고(繡啓)로 인해 관직과 신분(告身)을 박탈당하였다.
*후원(喉院): 임금의 목구멍(喉)처럼 왕명을 세상에 전달하는 관청이라는 뜻으로,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을 멋스럽게 부르는 말.
*조적안(糶糴案): 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糶) 가을에 이자를 보태어 거두어들이는(糴) 환곡(還穀) 제도의 공식 장부. 조선 후기 지방 아전들이 가장 많이 장난을 치며 백성을 수탈하던 대목인데, 윤사국 선생은 이를 투명한 표 형태로 바꾸어 부패를 원천 차단했다.
*수계(繡啓): 임금의 비밀 명령을 받고 지방을 염탐하던 암행어사(본문의 繡는 어사의 별칭인 비단 자수 옷에서 유래)가 임금에게 올리는 서면 보고서이다.
*고신(告身): 조선 시대 임금이 관리에게 주던 직인과 품계가 적힌 벼슬 임명장(사령장)이다. 이를 빼앗겼다는(奪) 것은 관직과 양반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잃고 파직되었음을 뜻한다. 지방관 교체기에 아전들의 농간이나 어사의 오해로 행정 처리가 덜 끝난 책임을 지게 된 억울한 상황이다.
壬寅文孝世子定號元子。特叙除右承旨。以禮房勞陞嘉善。拜兵曹參判,同義禁。差承文提調。癸卯拜大司憲。尋除漢城右尹,副揔管。選特進官差謝恩副使。除戶曹參判。是冬赴燕。
*정조 6년(1782년) 임인년부터 정조 7년(1783년) 계묘년에 이르기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파직의 시련을 딛고 중앙 정계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종2품 가선대부(판서·참판급)로 승진하고, 연경(베이징)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등 가문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壬寅文孝世子定號元子。特叙除右承旨。
임인년(정조 6년, 1782년)에 후궁 의빈 성씨의 소생(훗날의 문효세자)이 왕의 맏아들인 '원자(元子)'로 명칭이 정해졌다.
이 국가적 대경사를 맞아 특별히 죄를 사면받고 복권(特叙)되어 왕의 비서실인 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첫아들(원자)이 태어나자 대사면령을 내렸고, 안동 시절의 장부 문제로 억울하게 관직을 잃었던 윤사국을 가장 먼저 대궐로 불러들여 승지에 임명했다).
以禮房勞陞嘉善。
원자 책봉식과 관련된 왕실 의례를 담당하는 예방 승지(禮房)로서 의식과 행사를 완벽하게 치러낸 공로(勞)를 인정받아,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로 승진하였다. (정3품 당상관에서 드디어 고위 관료의 상징인 종2품으로 품계가 껑충 뛰어올랐다).
拜兵曹參判,同義禁。差承文提調。
국방부 차관에 해당하는 병조참판(兵曹參判)과 의금부의 재판관을 겸하는 동의금(同義禁)에 임명되었고, 외교 문서를 관장하는 승문원의 제조(提調)를 차임(임시 임명)받았다.
癸卯拜大司憲。
계묘년(정조 7년, 1783년)에 백관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 종2품)에 제수되었다. (과거 영조 대에 사헌부의 하급·중급 관리(지평, 장령, 집의) 시절 권력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법을 집행했던 윤사국이, 마침내 정조 대에 이르러 사정기관의 최고 우두머리(검찰총장 및 감사원장 격)인 대사헌 자리에 오른 것이다.
尋除漢城右尹,副揔管。
얼마 후 수도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의 부시장 격인 한성우윤(漢城右尹)과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揔管)에 제수되었다.
選特進官差謝恩副使。除戶曹參判。是冬赴燕。
임금 앞에서 학문과 정사를 토론하는 특진관(特進官)으로 선발되었으며, 청나라에 보내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임명되었다.
이와 동시에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고,
그해 겨울 청나라 북경(燕, 연경)을 향해 출발하였다.
*원자 책봉을 청나라 황제에게 인정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국가의 핵심 외교 사절(부사)로 발탁된 것이다. 재정을 다루는 호조참판의 직책까지 함께 받아 세밀한 행정과 외교적 안목을 모두 공인받았으며,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뚫고 북경으로 행차하게 된다.
*문효세자(文孝世子): 정조 대왕과 의빈 성씨(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 성덕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1782년에 태어나 온 나라의 축복 속에 원자로 정해졌으나, 5세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였다.
*가선(嘉善): 조선 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인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뜻한다. 현재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 요직으로, 판서로 나아가기 바로 전 단계의 명예로운 품계이다.
*승문원 제조(承文提調): 사대교린(事大交隣) 등 중국 및 이웃 나라와의 외교 문서를 전담하던 승문원의 당상관 직책. 문장력이 대단히 뛰어난 인물들만 임명되었다.
*사은부사(謝恩副使) / 부연(赴燕): 조선 시대 청나라에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으로 보내던 외교 사절단의 부대표(2인자)이다. 연(燕)은 옛 연나라의 수도이자 청나라의 수도인 베이징(燕京)을 뜻하며, 부연(赴燕)은 베이징으로 사신 길을 떠난다는 의미이다. 당시 동지사나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오는 것은 고위 관료로서 국제적 안목을 넓히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였다.
甲辰還。除義州府尹。淸嚴自律。邊門肅然。築喜雨垌。民力紓。復三一齋。儒風勸。設窺伺將。禁條嚴。東宮封冊勅至。冠盖相望。供億旁午。公左右接應。衆務畢擧。儐使嘆其綜密整暇。
*정조 8년(1784년) 갑진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청나라 사신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국경지대의 핵심 요충지인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부임하여 거둔 탁월한 치적과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기록하고 있다.
甲辰還。除義州府尹。
갑진년(정조 8년, 1784년)에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곧바로 국경 요충지인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제수되었다. (의주는 청나라와의 무역, 외교, 밀무역 단속, 국방이 집중된 곳으로, 조정에서 가장 유능하고 청렴한 최고위 관료(종2품)만을 골라 보내는 자리였다).
淸嚴自律。邊門肅然。
공은 청렴함과 엄격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렸고(淸嚴自律), 그 결과 변방의 국경선(邊門, 책문)이 엄숙하고 정연해졌다.
築喜雨垌。民力紓。復三一齋。儒風勸。
백성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며 희우동(喜雨垌)을 축조하여 백성들의 삶과 노동력을 여유롭게 만들었고(紓), 교육기관인 삼일재(三一齋)를 중건하여 선비들의 학문하는 풍토(儒風)를 권장하고 일으켰다.
設窺伺將。禁條嚴。
국경 너머 적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정탐하는 장수(窺伺將)를 배치하였고, 밀무역과 국경 침범을 막는 금지 조항(禁條)을 엄격히 세웠다.
東宮封冊勅至。冠盖相望。供億旁午。
(그 무렵 청나라 황제가 조선의) 동궁(문효세자)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공인 문서(封冊)를 든 청나라 사신(勅)이 도착하였다.
이에 따라 사신단의 고관들이 탄 수레와 말(冠盖)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그들을 대접하고 공궤하는 물자와 행정 업무(供億)가 사방에서 복잡하게 얽히며 폭주하였다(旁午). (세자 책봉 사신단은 수백 명에 달하며, 이들을 완벽하게 대접하고 호위하는 것은 조선 조정의 사활이 걸린 거대한 국가적 외교 행사였다. 의주는 그 사신단이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디는 관문이었다).
公左右接應。衆務畢擧。儐使嘆其綜密整暇。
이러한 대혼란 속에서도 공은 좌우로 완벽하게 접대하고 대처하여(接應), 폭주하는 수많은 행정 업무와 대접(衆務)을 빠짐없이 완벽하게 완수해 냈다(畢擧).
사신을 영접하는 총책임자였던 빈사(儐使)는 윤사국의 일 처리 능력이 "매우 치밀하고(綜密) 흐트러짐 없이 여유롭다(整暇)"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의주부윤(義州府尹): 청나라로 가는 유일한 육로 관문인 의주를 다스리는 종2품 관직. 외교, 국방, 대중국 무역(책문후시)을 모두 총괄해야 하는 자리였기에, 행정 능력과 외교적 식견이 검증된 최고의 인물만 임명되었다.
*공억방오(供億旁午): 사신이나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물건을 공급하는 일을 '공억'이라 하고, 일이 사방으로 마구 얽혀 정신없이 바쁜 모양을 '방오'라 한다. 거대한 청나라 사절단을 맞이하여 의주 관아가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음을 보여준다.
*빈사(儐使): 외국 사신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왕을 대신하여 국경에서부터 수도까지 사신단을 정중히 영접하고 안내하기 위해 조정에서 특별히 파견한 정승·판서급의 수석 영접사(원접사)를 뜻한다.
*종밀정가(綜密整暇): 여러 복잡한 일을 종합하여 짜임새 있게 처리하는 것이 '종밀'이고, 태도가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으며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상태를 '정가'라 한다. 위기나 격무 속에서도 대정치가로서 품위와 능력을 잃지 않은 윤사국 선생의 면모를 극찬한 표현이다.
丙午遞還。拜大憲。因事罷。旋叙除刑曹參判。丁未連除左尹,大司成,同中樞。戊申又除泮長。因齋儒捲堂事坐罷。未幾叙。
정조 10년(1786년) 병오년부터 정조 12년(1788년) 무신년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의주부윤의 임기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와 사헌부, 형조, 한성부의 요직을 거치고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대사성(반장)을 지내며 겪은 영욕의 정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정국의 뜨거운 감자였던 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학(권당) 사건으로 인해 파직을 당하는 등 교육 행정가로서 겪은 시련의 대목이 담겨 있다.
丙午遞還。拜大憲。因事罷。
병오년(정조 10년, 1786년)에 의주부윤의 임기를 마치고 교체되어 도성으로 돌아왔다. 사정기관의 수장인 대사헌(大憲)에 제수되었으나, 어떤 정치적 사건(因事)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파직(罷)되었다.
旋叙除刑曹參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죄를 사면받고 복권(旋叙)되어, 사법부를 담당하는 刑曹參判(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
丁未連除左尹,大司成,同中樞。
정미년(정조 11년, 1787년)에 연달아 수도 서울의 부시장 격인 한성좌윤(左尹),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인 대사성(大司成), 그리고 동지중추부사(同中樞)에 제수되었다. (윤사국이 단순한 행정·외교 관료를 넘어, 국가의 이념적 중심이자 엘리트 양성 기관인 성균관의 수장(대사성)으로 발탁되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학문적 깊이와 성품이 교육계에서도 깊은 신뢰를 받았음을 뜻한다).
戊申又除泮長。因齋儒捲堂事坐罷。未幾叙。
무신년(정조 12년, 1788년)에 또 다시 반장(泮長, 성균관 대사성의 별칭)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성균관 기숙사에 유숙하던 유생들(齋儒)이 조정의 정책이나 처사에 반발하여 단체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는 동맹휴학 및 시위 사건인 '권당(捲堂)'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책임(坐)을 지고 파직당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권(叙)되었다.
己酉莊獻世子遷園禮成。以紙牓書寫官陞嘉義。拜都承旨。
기유년(정조 13년, 1789년)에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 화산의 현륭원(顯隆園)으로 옮기는 천원(遷園) 의례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공은 이때 임금의 명령서나 문서 등을 종이에 직접 정성스럽게 써서 올리는 지방서사관(紙牓書寫官)의 임무를 수행한 공로로 품계가 정2품 자헌대부·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으며,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都承旨)에 제수되었다. (정조의 필생의 숙원이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현륭원 천봉)'이라는 대업에 윤사국이 명필로서 깊이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 공로로 마침내 정2품 판서(장관)급 반열인 '가의대부'에 오르고 판서로 가는 필수 관문인 도승지가 되었다).
*좌파(坐罷): '연좌되어 파직되다' 혹은 '죄에 걸려 파직되다'
出爲原春監司。寧越舊有子規樓。端廟遜位時所御也。樓毁失其所。一日火燒民廬。紋礎現而樓址得。公廼鳩材度工。不日而樓成。時上追感莊陵遺事。命設配食壇。侑當日死事諸臣。公實主其事。已而重建子規樓事聞。上異之。命公書揭端廟御製子規詞于樓楣。特賜上駟。
*정조 15년(1791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원춘감사(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인 단종(端宗)의 영월 유배지 유적(자규루)을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중건한 신비로운 일화와 이에 감동한 정조 대왕의 포상을 기록하고 있다.
出爲原春監司。
(얼마 후) 외직으로 나가 원춘감사(原春監司,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 '원춘도(原春道)'는 조선 시대에 강원도를 부르던 별칭 중 하나로, 수부 도시였던 원주(原)와 춘천(春)의 앞 글자를 딴 명칭이다. 고위 원로 대신으로서 영동·영서 지방 전체를 통치하는 도지사(관찰사)로 부임한 것이다.
寧越舊有子規樓。端廟遜位時所御也。樓毁失其所。
영월에는 옛날부터 자규루(子規樓)라는 누각이 있었다. 이는 단종(端廟) 임금이 왕위를 물러났을 때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었을 때 잠시 머무시던 곳(관풍헌 곁의 누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며 누각이 파괴되어 그 정확한 위치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一日火燒民廬。紋礎現而樓址得。公廼鳩材度工。不日而樓成。
(윤사국이 옛 터를 찾으려 애쓰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불이 나 민가(民廬) 몇 채를 태워버렸는데, 불이 꺼지고 나니 흙 속에 묻혀 있던 무늬가 새겨진 주춧돌(紋礎)이 선명하게 나타나 마침내 누각의 정확한 터(樓址)를 찾게 되었다.
이에 공이 곧바로 재목을 모으고 장인을 독려하여 일 처리를 헤아리니(鳩材度工), 며칠이 걸리지 않아 자규루가 멋지게 완공되었다. (실록과 야사에 기록된 기적 같은 대목이다. 윤사국이 단종의 한이 서린 자규루를 복원하려 영월을 수색했으나 터가 매몰되어 민가가 들어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천둥번개와 화재로 민가 5채가 타 없어지자 옛 주춧돌이 마법처럼 밖으로 드러났고, 윤사국은 이를 천운으로 여겨 즉시 복원 공사를 단행했다. 당시 영월부사는 이동욱이다).
時上追感莊陵遺事。命設配食壇。侑當일死事諸臣。公實主其事。
마침 그때 정조 임금 역시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의 옛일에 깊은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이에 정조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사육신 등)을 함께 제사 지내는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관찰사였던 공(윤사국)이 실제로 그 모든 총괄 업무를 주관하였다.
已而重建子規樓事聞。上異之。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월에서 자규루를 다시 세웠다는 소식(장계)이 조정의 정조 임금에게 들려왔다. 왕은 터를 찾게 된 신비로운 화재 일화 등을 듣고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上異之). (정조는 마침 사육신 등 충신들을 위한 배식단을 설치하려던 참에 자규루 터가 마법처럼 드러나 중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단순한 우연이 아닌 천지신명이 감응한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命公書揭端廟御製子規詞于樓楣。
이에 왕은 (명필로 이름 높았던) 공(윤사국)에게 명령하여, 단종(端廟) 임금이 유배 시절 친히 지으셨던 '자규시(子規詞)'를 큰 글씨로 쓰게 한 뒤, 자규루의 누각 문인방(樓楣)에 걸도록 하였다. (단종의 피눈물이 섞인 시인 '자규시(일명 자규시: 一自寃禽出帝宮~)'를 윤사국의 뛰어난 글씨로 현판에 새겨 영구히 보존하게 한 것이다. 왕의 신임과 신하의 필력이 결합된 최고의 영예였다).
特賜上駟。
그리고 왕의 마구간에서 기르는 가장 좋은 말(上駟, 상사)을 공에게 특별히 하사(特賜)하였다. ('상사(上駟)'는 네 마리의 준마가 끄는 어차용 말이나 왕실의 최고급 명마를 뜻한다. 변방 요새를 지키거나 대규모 군사적 공을 세운 이에게나 내리는 파격적인 포상을, 누각을 중건하여 왕의 효심과 의리(義理)를 빛낸 윤사국에게 내린 것이다).
原州人金載俊誣告寧越嚴建中。公承命按覈。誅其魁釋其枉。越人頌之久不衰。因江陵校宮魚鱐减定事。校儒發通侮詆公。本倅防報營關。公啓論之。命黜本倅。刑配通儒。公亦䟽引廢務。命以外補察任。公乃黽勉視事。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원춘감사)로 재임할 당시, 지역의 억울한 무고 사건을 공정하게 판결한 치적과, 향교 유생들의 집단 반발 및 지방관과의 갈등 속에서도 추상같은 기개로 법도를 바로 세운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原州人金載俊誣告寧越嚴建中。
원주 사람 김재준(金載俊)이 영월 사람 엄건중(嚴建中)을 거짓으로 모함하여 고발(誣告)하는 일이 있었다.
公承命按覈。誅其魁釋其枉。越人頌之久不衰。
공(윤사국)은 왕의 명령을 받아 사건을 철저히 국문하고 조사하여(按覈), 그 무고를 주도한 우두머리(魁)를 처벌(誅)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썼던 엄건중을 풀어주었다(釋其枉). 이에 영월(越) 백성들이 공의 공정함을 오랫동안 칭송하여 그 기세가 오래도록 쇠하지 않았다. (조선 시대 '무고죄'는 사회 기강을 흔드는 중죄로 여겨졌다. 윤사국은 철저한 실무 능력과 증거 조사를 통해 영서 지역의 억울한 백성을 구제하고 정의를 실현했다).
因江陵校宮魚鱐减定事。校儒發通侮詆公。
(그 무렵) 강릉 향교(校宮)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말린 대구 제물인 '어숙(魚鱐)'의 수량을 감축하여 정한 일(减定事)이 있었다.
이에 반발한 강릉의 유생들(校儒)이 여러 고을에 통문(發通)을 돌려 관찰사인 공을 모욕하고 비방하였다(侮詆公). (역사적 사실): 《정조실록》 15년(1791년) 6월 5일 기사에 이 사건이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윤사국은 어민과 해안 백성들(海戶)의 가혹한 부담을 줄여주고자(釐海戶之弊), 강릉 등 영동 9개 고을 향교에서 공자 제사(석전제) 때 무려 200여 마리가 넘는 말린 대구(어숙)를 과도하게 거두던 폐단을 국가 예법(오례의)에 맞춰 대폭 줄이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강릉 유생들은 "도지사(道伯)가 감히 성인(공자)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라며 격렬히 반발하고 집단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本倅防報營關。公啓論之。
해당 고을의 수령(本倅, 강릉부사 이집두)이 감영의 지시(營關)를 가로막고 유생들의 편을 들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공이 상소(啓論)를 올려 이 문제를 엄중히 논죄했다.
命黜本倅。刑配通儒。
이에 조정(정조)에서는 해당 수령을 파직하고(黜本倅), 선동을 주도한 유생들을 형벌에 처하고 유배(刑配)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강릉부사 이집두는 유생들의 서슬에 눌려 주동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생들의 통문을 윤사국에게 전달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유생들은 체포된 동료를 향교에 숨겨두고 서울로 상소를 올리러 가기도 했다. 윤사국과 정조는 이를 "선비의 탈을 쓰고 국가 기강과 조정을 능멸한 행위"로 보아, 강릉부사를 파직(선파후나)하고 주동 유생들을 엄중히 유배 보냈다).
公亦䟽引廢務。命以外補察任。公乃黽勉視事。
공 또한 관내에서 이러한 불미스러운 소동이 일어난 것에 책임을 지고 사직 상소(䟽引)를 올린 뒤 업무를 중단(廢務)했다.
그러나 왕(정조)이 "지방관(外補)으로서 맡은 바 직무를 그대로 살피라" 며 유치(留置) 명령을 내리니, 공은 이에 힘써 격려하며 다시 집무를 취해 업무를 보았다(黽勉視事).
*안핵(按覈): 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기 위해 죄인을 심문하고 증거를 대조하는 엄격한 사법 조사를 뜻한다.
*어숙(魚鱐): 제례나 국가 의례 때 제상에 올리던 포를 뜬 말린 물고기. 당시 향교나 관아의 재정 분담을 줄이기 위해 수량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향교 유생들의 이권과 자존심이 얽혀 집단 반발이 일어난 것.
*본졸(本倅): 그 고을의 수령을 뜻하는 말로, 강원도 관찰사 관할하에 있던 강릉부사를 말한다.
*영관(營關): 관찰사가 머무는 '감영(營)'에서 산하 고을에 내리는 공식 행정 명령서인 '관문(關)'을 뜻한다.
맹면시사(黽勉視事): 맹면(黽勉)은 능력이 부족함에도 '부득이하게 애를 쓰고 힘을 낸다'는 뜻이며, 시사(視事)는 관리가 공무를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의 거듭된 유임 명령에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복귀한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壬子命諸道修社厲壇。公飭列邑建屋修壇。備尊俎正儀式以聞。特加奬諭。命晉資以勸諸道臣。公五年在藩。感激恩畀。殫心對揚。嚴考績察民隱。山海痼瘼。釐革幾遍。以至梵宇改觀。楓岳諸寺楣扁多公筆。以外補不敢丐遞。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강원도 관찰사(원춘감사)로 재임할 당시 국가 종교례(제단 정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품계가 승진한 공로와, 5년 동안 강원도를 다스리며 거둔 치적 및 명필로서 금강산 사찰에 남긴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壬子命諸道修社厲壇。
임자년(정조 16년, 1792년)에 왕(정조)이 여러 도(道)에 명령을 내려, 전염병이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로하는 국가 제단인 사려단(社厲壇)을 대대적으로 개수하도록 했다.
公飭列邑建屋修壇。備尊俎正儀式以聞。特加奬諭。
공(윤사국)은 관내의 여러 고을(列邑)에 엄격히 신칙하여 제사 지낼 건물을 짓고 제단을 수축하게 하였으며, 제사 그릇과 제물(尊俎)을 완벽히 갖추고 제례 의식(儀式)을 올바르게 바로잡은 뒤 왕에게 장계로 보고(以聞)하였다. 정조 임금은 그의 철두철미한 일 처리를 보고 특별히 칭찬하고 격려하는 교지(特加奬諭)를 내렸다.
命晉資以勸諸道臣。
그리고 전국 8도의 관찰사들(諸道臣) 중에서 윤사국의 치적이 가장 독보적이었으므로, 다른 관찰사들의 귀감이 되도록 격려하기 위해 공의 품계를 특별히 높여 주라(命晉資)고 명령했다. (이 공로로 윤사국은 정2품 하(下) 단계인 자헌대부(가의대부)에서, 정2품 상(上) 단계이자 판서 중의 수장급이 받는 정헌대부(正憲大夫)로 품계가 승진하게 된다.
公五年在藩。感激恩畀。殫心對揚。
공은 무려 5년 동안이나 강원도 관찰사(在藩)로 머물렀다.
자신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왕의 은혜와 신임(恩畀)에 깊이 감격하여,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왕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 보답하였다(殫心對揚). (조선 시대 관찰사의 임기는 보통 1년에서 길어야 2년이었다. 한 도의 관찰사를 5년 동안 유임시킨 것은 정조가 윤사국의 행정과 통치 능력을 100%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인사이다).
嚴考績察民隱。山海痼瘼。釐革幾遍。
수령들의 성적 평가를 엄격히 하고 백성들의 숨은 고통을 살피니, 산간과 해안(강원도 전역)의 고질적인 폐단(痼瘼)들이 거의 다 고쳐지고 혁신(釐革)되었다.
以至梵宇改觀。楓岳諸寺楣扁多公筆。以外補不敢丐遞。
사찰(梵宇)들까지 외관이 새롭게 바뀌었으니, 금강산(楓岳) 여러 절의 처마에 걸린 현판(楣扁)은 공의 글씨(公筆)가 많았다. 지방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감히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구하지(丐遞) 않았다.
癸丑大臣請內移。拜工曹判書。移拜刑判兼繕工監提調。除江華留守。翌年遞。連拜漢城判尹,知春秋知義禁,都揔管,典牲署典設司提調。
*정조 17년(1793년) 계축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5년간의 강원도 관찰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조정의 판서(장관급) 및 정2품 최고 요직들로 영전하여 국가의 핵심 정치를 이끄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癸丑大臣請內移。拜工曹判書。
계축년(정조 17년, 1793년)에 조정의 대신들이 (윤사국이 변방에서 오랫동안 고생했으므로) 도성 안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할 것(內移)을 청하였다. 이에 왕(정조)이 그를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하였다. (5년 동안 강원도를 완벽하게 다스린 성과를 인정받아, 마침내 국가 육조(六曹)의 장관인 정2품 판서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오늘날의 국토교통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격이다).
移拜刑判兼繕工監提調。
곧이어 사법과 형벌을 총괄하는 법무부 장관 격인 형조판서(刑判)로 전임되었으며, 토목과 건축 공사를 담당하는 관청인 선공감의 최고 책임자(提調)를 겸임하였다. (젊은 시절 사헌부·사간원의 대간(지평, 장령, 집의, 대사헌)을 거치며 권력에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엄정하고 투명한 사법 능력을 정조가 높이 사서 국가의 형정을 총괄하는 형조판서에 앉힌 것이다.
除江華留守。翌年遞。
(국방과 왕실 보장의 핵심 요충지인)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에 임기를 마치고 교체(遞)되었다. ('유수(留守)'는 조선 시대 수도 외곽의 수도권 4대 요충지(강화, 개성, 광주, 수원)를 지키는 정2품 고위 군사·행정직이다. 강화도는 왕실의 보장처(피난처)이자 외교·국방의 핵심이었기에 판서급 중에서도 가장 신임하는 인물만 갈 수 있었다).
連拜漢城判尹,知春秋知義禁,都揔管,典牲署典設司提調。
도성으로 복귀한 뒤 연달아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漢城判尹), 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의 최고위직인 지춘추사(知春秋), 왕실 사법기관인 의금부의 지의금사(知義禁), 군무를 총괄하는 오위도총부의 도총관(都揔管)에 제수되었으며, 제례용 가축을 기르는 전생서와 국가 의례 시설을 장식하는 전설사(典設司)의 최고 책임자(提調)를 역임하였다.
*제조(提調): 관청의 실제 행정 실무를 총괄·감독하기 위해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료가 겸임하던 최고 책임자 직책.
乙卯追上尊號于景慕宮。以金寶書寫官陞正憲。除觀象監提調。時臺臣迭論鄭東浚之罪。鄭公景淳有士友重望。而以東浚族黨。亦被誣詆。公素與鄭公友善。前正言宋文述欲因是陷公以非理。上䟽醜辱。盖公在東藩時。査啓金城倅魚用謙賣鄕事。用謙坐謫怨公甚。文述䟽受用謙嗾也。䟽到喉院。
*정조 19년(1795년) 을묘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정2품 최고 품계인 정헌대부(판서급 최고위)로 승진하는 경사와 함께, 당대의 치열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과거 청렴하게 일 처리(지방 수령 처벌)를 했던 일로 인해 원한을 사서 모함(상소)을 받게 되는 정국의 위기 상황을 담고 있다.
乙卯追上尊號于景慕宮。以金寶書寫官陞正憲。
을묘년(정조 19년, 1775년)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에 뒤늦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국가적 행사가 있었다.
공(윤사국)은 이때 왕의 도장과 명칭을 기록하는 '금보서사관(金寶書寫官)'의 임무를 맡아 글씨를 썼는데, 그 공로로 품계가 정2품 상(上) 단계인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완전히 확정 승진하였다. (정조의 필생 숙원이었던 사도세자 추숭 사업에 윤사국이 다시 한번 명필로서 핵심적인 기여를 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품계가 완연한 정2품 최고 서열로 굳어졌다).
除觀象監提調。
(그 공로로) 천문, 지리, 기상, 역법을 담당하는 관청인 관상감의 최고 책임자(提調)에 제수되었다.
時臺臣迭論鄭東浚之罪。
당시 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臺臣)이 번갈아 가며 정동준(鄭東浚)의 죄를 논핵하고 있었다.
鄭公景淳有士友重望。而以東浚族黨。亦被誣詆。
그런데 사림과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과 존경이 두터웠던 중신 정경순(鄭景淳) 공이, 단지 정동준과 같은 일가 친척(族黨)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억울하게 비방과 모함(誣詆)을 받게 되었다.
公素與鄭公友善。前正言宋文述欲因是陷公以非理。上䟽醜辱。
공(윤사국)은 본래 정경순 공과 사이가 매우 돈독하고 친밀(友善)했다.
그러자 전직 사간원 정언이었던 송문술(宋文述)이 이 틈을 타서 윤사국을 터무니없는 비리(非理)로 엮어 빠뜨리고자, 왕에게 상소를 올려 입에 담지 못할 추잡한 말로 모욕하고 비방하였다(醜辱).
盖公在東藩時。査啓金城倅魚用謙賣鄕事。用謙坐謫怨公甚。文述䟽受用謙嗾也。
대개 이 모함의 원인은, 공이 과거 강원도 관찰사(東藩)로 있을 당시에 금성현감(金城倅)이었던 어용겸(魚用謙)이 향직(지방 관직이나 이권)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 비리(賣鄕事)를 철저히 조사하여 왕에게 고발(査啓)했기 때문이었다. 어용겸은 이 죄로 파직당하고 유배(坐謫)를 가게 되자 윤사국에게 깊은 원한(怨公甚)을 품었고, 송문술의 상소는 사실 이 어용겸의 사주와 부추김(嗾)을 받아서 올린 것이었다.
䟽到喉院
그 모함 상소가 마침내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喉院)에 도달하게 되었다.
*경모궁(景慕宮): 정조 대왕이 뒤주에 갇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친아버지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내내 경모궁의 격을 높이고 존호를 올리는 등 효성을 다했다.
*정헌(正憲): 정2품 문무관의 최고 품계인 정헌대부(正憲大夫)를 뜻한다. 참판급 품계인 가선대부보다 높은 판서급의 최고 자급으로, 이 자리에 오르면 조정의 원로이자 중신으로 대우받았다.
*동번(東藩): 동쪽의 울타리라는 뜻으로, 조선의 동쪽 국경과 영토를 지키는 강원도 관찰사를 멋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매향(賣鄕): 지방의 수령이나 아전이 향촌 사회의 자치 기구 직책(향임, 좌수나 별감 등)을 지방의 부유한 자들에게 돈을 받고 불법으로 팔아넘겨 사리사욕을 채우던 부패 행위이다. 윤사국 선생은 강원감사 시절 이를 단호하게 적발해 처벌했던 것이다.
*후원(喉院): 왕의 비서실인 승정원(承政院)의 별칭.
上命却之。特除公刑判。公不出膺。命入侍。以人言之捏無。縷縷慰諭。公退又陳䟽乞歸田自靖。優批削文述職。
*송문술(宋文述)의 모함 상소를 받은 정조 대왕이 윤사국(尹師國) 선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보호해 주는 모습과, 선생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상소인인 송문술을 처벌하고 선생을 위로하는 극적인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上命却之。特除公刑判。
왕(정조)이 그 모함 상소를 전해 듣고는 즉시 물리치라고 명령하였다(命却之). 그리고 오히려 공(윤사국)을 특별히 형조판서(刑判)에 제수하였다.
(정조는 송문술의 상소가 악의적인 모함임을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상소를 가차 없이 기각(却)하는 동시에, 사법부 장관인 형조판서 자리를 다시 맡김으로써 윤사국의 청렴함과 공정함을 왕이 직접 공인해 준 것이다).
公不出膺。命入侍。
그러나 공은 (구설에 오른 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바로 관직에 나아가 명을 받들지 않았다(不出膺). 그러자 왕이 대궐 안으로 들어와 직접 자신을 뵙도록(命入侍) 명령했다.
以人言之捏無。縷縷慰諭。
정조는 면담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말(송문술의 상소)이 터무니없이 조작되고 꾸며진 것(捏無, 날조)임을 명확히 짚어주며, 실타래를 풀듯 상세하고 조목 조목하게(縷縷) 공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하였다(慰諭). ('날조(捏)'와 '없음(無)'이라는 단어를 써서 신하의 무죄를 확신시켜 주고, 억울함에 상심해 있을 윤사국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왕이 친히 긴 대화로 다독였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대목이다).
公退又陳䟽乞歸田自靖。優批削文述職。
공은 물러 나와서도 다시 상소(陳䟽)를 올려 "고향(田)으로 돌아가 조용히 스스로를 닦으며 지내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넉넉하고 따뜻한 답서(優批)를 내려 공의 사직을 만류하는 한편, 공을 모함했던 송문술(文述)의 관직을 삭탈(削職)하는 처벌을 내렸다.
*각지(却之): 거부하거나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정에서 부당하거나 무리한 상소가 올라왔을 때 왕이 이를 채택하지 않고 반려하는 행정 조치.
*날무(捏無): 날조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뜻. 정조 대왕이 직접 송문술의 상소를 '완전한 거짓말'로 규정했음을 보여준다.
*귀전자정(歸田自靖):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밭)으로 돌아가 스스로 마음을 평안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 고위 관료들이 억울한 일에 휘말렸을 때 자신의 결백함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청하던 전통적인 사직 표현이다.
*우비(優批): 신하가 올린 사직 상소 등에 대해 왕이 내리는 지극히 정중하고 따뜻한 거절 및 격려의 답변서이다.
丙辰因前任禁堂時事。安置蔚山。尋宥還。又拜刑判。引入如初。嚴敎促膺命。敦廹益摯。公不獲已蹔肅卽遞。特除藥院提調登診。筵敎曰卿不幸當金城査事。宋文述䟽出於報復。有何引義之端。盖文述之受嗾。上已洞燭也。* 정조 20년(1796년) 병진년,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한때 울산으로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으나, 이내 복귀하여 정조 대왕의 절대적인 신뢰 속에서 다시 형조판서와 내의원(약원) 제조로 중용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丙辰因前任禁堂時事。安置蔚山。尋宥還。
병진년(정조 20년, 1796년)에 이전에 재임했던 예문관(禁堂) 시절의 일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산(蔚山)에 안치(安置, 유배)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를 받고 도성으로 돌아왔다(尋宥還). ('금당(禁堂)'은 예문관의 별칭으로, 과거 사관 시절에 다루었던 문서나 인사 문제 등 해묵은 조정의 당쟁 사건에 다시 휘말려 잠시 울산 유배를 겪었으나 정조가 곧바로 사면해 주었다).
又拜刑判。引入如初。嚴敎促膺命。敦廹益摯。
복귀하자마자 왕은 또다시 그를 형조판서(刑判)에 제수하였다.
공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대궐에 나아가지 않았으나(引入如初), 왕은 엄한 명령(嚴敎)을 내려 관직을 받아들일 것을 재촉하였고, 그 권유하고 핍박함이 더욱 간절하고 지극했다(敦廹益摯). (정조는 윤사국을 사법 수장(형조판서)으로 쓰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윤사국이 사양하자 오히려 임금이 더 간절하게(益摯) 출사를 종용했다).
公不獲已蹔肅卽遞。特除藥院提調登診。
공은 어쩔 수 없이(不獲已) 잠시 대궐에 나아가 감사의 절을 올린 뒤 즉시 관직에서 물러났다(蹔肅卽遞). 그러자 왕은 특별히 내의원(藥院)의 최고 책임자인 약원제조(藥院提調)에 임명하여 임금의 건강을 진찰하는 자리(登診)에 참석하도록 했다. (윤사국이 형조판서 직을 사양하자, 정조는 그를 임금의 몸을 가장 가까이서 돌보는 '약원제조'에 임명하여 자연스럽게 독대하고 면담할 기회를 만든 것이다).
筵敎曰卿不幸當金城査事。宋文述䟽出於報復。有何引義之端。
(진찰하는 자리에서) 임금의 대궐 명령(筵敎)이 내려지기를, "경(卿)이 불행하게도 과거 금성현감의 비리를 조사한 일(金城査事)을 맡는 바람에, 송문술의 상소라는 보복을 당하게 된 것뿐이다. 경에게 무슨 의리를 내세워 사직할 만한 단서가 있겠는가(사직할 이유가 전혀 없다)!"라고 하셨다.
盖文述之受嗾。上已洞燭也。
대개 송문술이 (비리 관리였던 어용겸의) 사주와 부추김(嗾)을 받아서 상소를 올렸다는 내막을, 왕(정조)께서는 이미 촛불을 켠 듯 훤히 꿰뚫어 보고 계셨던(洞燭) 것이다.
*금당(禁堂): 사법 및 국문 기관인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을 뜻한다. 왕명을 받아 중죄인을 심문하는 핵심 요직이다.
*안치(安置): 유배 형벌 중에서도 죄질이 무겁거나 고위 관료에게 내리던 형벌로, 지정된 유배지 구역 밖으로 절대 나오지 못하게 격리하는 엄격한 유배 방식이다.
*돈박익지(敦廹益摯):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임금이 신하에게 '속히 출사하라'며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독촉하는 모양을 뜻한다. 군주가 신하를 얼마나 아끼고 필요로 하는지 보여주는 정조 특유의 소통 방식이다.
*약원 제조(藥院提調): 궁중의 의약과 국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관청인 내의원(內醫院, 별칭 약원)의 최고 감독관이다. 국왕의 몸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고 진맥(등진)에 참여해야 하므로, 임금이 인간적으로도 가장 깊이 신뢰하는 정2품 이상의 중신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동촉(洞燭): 텅 빈 굴속(洞)을 촛불(燭)로 비추듯 환히 들여다본다는 뜻으로, 왕이 사건의 진상이나 신하의 충심을 의심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극찬하는 표현이다.
丁巳入耆社。戊午以七耋偕老。特陞崇政。拜判義禁宗簿寺提調。因關東卜定事配淮陽。公實罷卜定。而混被譴也。*정조 21년(1797년) 정사년부터 정조 22년(1798년) 무오년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70세가 되어 정승급 원로들의 명예 전당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품계가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하는 영광과 함께, 강원도(관동) 지역의 물자 조달(복정) 문제로 인해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유배를 가게 되는 정계의 부침을 기록하고 있다.
丁巳入耆社。
정사년(정조 21년, 1797년)에 기사(耆社, 기로소)에 들어갔다.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이상의 고위 관료 중 나이가 70세 이상인 퇴직·원로 대신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서 깊은 국가 최고 예우 기관이다. 국왕인 태조와 숙종, 영조 등도 나이가 차면 입소했을 만큼 조선 사대부에게는 가문의 가공할 만한 영예였다. 윤사국은 이해에 딱 70세(칠질)가 되어 당당히 입소했다).
戊午以七耋偕老。特陞崇政。
무오년(정조 22년, 1798년)에 나이 71세(七耋)가 되도록 부부가 함께 건강하게 살아 동갑으로 백년해로(偕老)하고 있다는 이유로, 왕(정조)이 특별히 품계를 숭정대부(崇政大夫)로 높여 주었다(特陞). ('숭정대부'는 명실상부한 종1품의 최고위 품계로, 정승(삼공) 바로 아랫단계이자 판서(장관) 위의 좌찬성·우찬성급 서열이다. 조선 시대에는 노 대신이 부부 모두 70세를 넘어 함께 장수하는 것을 국가의 큰 상서로움이자 축복으로 여겨 왕이 파격적인 가자(품계 승진)를 내렸다).
拜判義禁宗簿寺提調。
(종1품으로 승진한 후) 사법기관의 수장인 판의금부사(判義禁)에 제수되었으며, 왕실의 계보와 의례를 관장하는 종부시의 최고 책임자인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겸임하였다.
因關東卜定事配淮陽。
(그 무렵) 관동(강원도) 지방에서 국가에 바칠 특산물이나 물자를 강제로 배정해 거두던 '복정(卜定)' 일에 연루되어, 강원도 회양(淮陽)으로 유배(配)를 가게 되었다.
公實罷卜定。而混被譴也。
그러나 사실 공(윤사국)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그 가혹한 복정 제도를 오히려 폐지(實罷)했던 인물이었으나, 행정적인 조사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죄를 지은 무리에 휩쓸려 억울하게 처벌(混被譴, 혼동되어 견책을 받음)을 당한 것이었다.
*기사(耆社): 조선 시대 정2품 이상의 문관 중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국왕 직속의 기구인 기로소(耆老所)를 뜻한다. 태조와 숙종, 영조 등 임금들도 나이가 들면 입소했을 만큼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였다.
*숭정(崇政): 종1품 문무관의 품계인 崇政大夫(숭정대부)를 뜻한다. 정승(의정부 영·좌·우의정)으로 나아가기 바로 직전 단계의 최고위 직급이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나 천민뿐만 아니라 양반 가문에서도 부부가 함께 70세를 넘어 장수하면 국가에서 지극히 경사스럽게 여겨 임금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주곤 했다.
*복정(卜定): 조선 후기 중앙 관청이나 궁방에서 필요한 공물과 특산물을 지방 고을에 강제로 할당하여 징수하던 임시 세금 제도이다. 관리들의 수탈 통로로 악용되어 백성들을 가장 괴롭히던 고질적 폐단 중 하나였다. 윤사국 선생은 강원감사 시절 이를 혁파했으나, 정조 말년 조정에서 이 제도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과거 감사였다는 이유로 도리어 누명을 쓰고 유배를 당한 비극적인 대목이다.
*혼피견(混被譴): 사실관계가 명확히 가려지지 않고 마구 뒤섞여(混) 억울하게 죄와 책임을 뒤집어썼음(被譴)을 한탄하는 표현이다.
己未特宥。拜判敦寧。旋拜左參贊知中樞。庚申除尙衣院提調。上聞公回巹在明年。命二子之在兩南邑宰者。換授湖西兩邑。俾便榮養。異數也。是夏仙馭賓天。公哀痛如親喪。及回巹期至。公追念聖敎。輒泫然涕泣。家人不敢請設酌。*정조 23년(1799년) 기미년부터 정조 24년(1800년) 경신년에 이르기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나 요직에 복귀하는 과정과 정조 대왕이 서거 직전 선생의 가문에 베푼 눈물겨운 특별한 은혜(특혜), 그리고 정조 서거 후 선생이 보여준 깊은 충심을 기록하고 있다.
己未特宥。拜判敦寧。旋拜左參贊知中樞。
기미년(정조 23년, 1799년)에 특별히 사면(特宥)을 받았다. (도성으로 돌아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종1품 원로 관직)에 제수되었으며, 얼마 후 의정부 좌참찬(左參贊)과 지중추부사(知中樞)에 제수되었다.
庚申除尙衣院提調。
경신년(정조 24년, 1800년)에 왕실의 의복과 보물을 관리하는 상의원의 최고 책임자인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에 제수되었다.
上聞公回巹在明年。命二子之在兩南邑宰者。換授湖西兩邑。俾便榮養。異數也。
왕(정조)이 공의 회근(回巹, 결혼 60주년 기념일)이 바로 내년(1801년)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왕은 영남과 호남(兩南)에서 고을 수령(邑宰)을 지내고 있던 공의 두 아들을, 도성과 훨씬 가까운 충청도(湖西)의 두 고을로 임지를 바꾸어 임명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늙으신 부모를 가까이서 편안하게 봉양하고 영광스럽게 모실 수 있도록(榮養) 배려해 준 것으로, 실로 파격적이고 이례적인 임금의 은혜(異數)였다. ('회근(回巹)' 혹은 회혼(回婚)은 부부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를 뜻하며, 조선 시대에 가문과 국가의 거대한 축복이었다. 정조는 늙은 신하 윤사국이 부인과 함께 결혼 60주년을 편히 맞이할 수 있도록, 멀리 가 있던 아들들을 서울 근교로 발령 내주는 눈물겨운 사적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是夏仙馭賓天。公哀痛如親喪。
그러나 그해 여름(1800년 6월 28일), 정조 임금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仙馭賓天). 공은 친부모의 상사(親喪)를 당한 것처럼 하늘이 무너지듯 애통해 하였다.
及回巹期至。公追念聖敎。輒泫然涕泣。家人不敢請設酌。
이듬해 마침내 약속된 회근연(결혼 60주년) 날이 도래하였다. 그러나 공은 자신을 위해 두 아들의 임지까지 바꾸어주며 기뻐해 주었던 선왕(정조)의 거룩한 가르침과 은혜(聖敎)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며, 그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輒泫然涕泣). 이에 집안사람들은 감히 축하 술잔을 올리는 잔치(設酌)를 열겠다고 청하지 못했다.
*회근(回巹), 회혼(回婚): 결혼한 지 만 60주년(한 갑자)이 되는 해를 축하하는 의례. 조선 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부부가 모두 70~80대까지 건강하게 살아남아 회혼례를 치르는 것을 가문의 가장 큰 영광이자 국가적인 경사로 여겼다.
*선어빈천(仙馭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높여 부르는 한자 성어. 신선이 전차(馭)를 타고 하늘의 손님(賓天)으로 올라갔다는 도교적 표현에서 유래했다. 정조 대왕은 1800년 6월에 갑작스럽게 서거하였다.
*이수(異數): 일반적인 제도나 관례를 깨고 임금이 신하에게 특별히 베푸는 파격적이고 독보적인 우대 조치를 뜻한다. 아들들의 임지를 부모 봉양을 위해 옮겨주는 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현연체읍(泫然涕泣): 눈물이 이슬처럼 뚝뚝 떨어지는 모양이 '현연'이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체읍'이다. 자신을 알아주던 지음(知音)이자 군주였던 정조 대왕을 향한 늙은 신하의 지극한 충심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슬픈 표현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믿어주고, 노년의 결혼 60주년 잔치까지 세심하게 아들들의 보직을 변경해 주며 챙겨주던 정조 대왕이 서거하자, 가문의 경사스러운 잔칫날조차 왕을 그리워하며 통곡으로 보낸 윤사국 선생의 지극한 충성심과 인간적인 면모가 가슴 깊이 다가오는 대목이다.
丁卯以八耋例陞崇祿。戊辰除判敦寧。己巳春微感漸谻。神明不少亂。盥櫛如常。掃室堂正枕簟。翛然而逝。壽八十二。實三月二十九日也。葬于長湍五冠山觀察公墓右岡負巳原。*순조 7년(1807년) 정묘년부터 순조 9년(1809년) 기사년까지, 윤사국(尹師國) 선생이 80세가 되어 종1품 품계로 한 단계 더 격상되고, 노환 속에서도 정신을 맑게 유지하며 평온하게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임종) 순간과 장지(묘소)를 기록하고 있다.
丁卯以八耋例陞崇祿。
정묘년(순조 7년, 1807년)에 나이 80세(八耋)가 되어 조정의 관례(例)에 따라 품계가 정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위 대신이 80세를 넘기면 국가에서 장수를 축하하며 품계를 한 단계 높여주는 전통(종1품 숭정대부 ➔ 정1품 숭록대부)이 있었다. 순조 대에 이르러 윤사국은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문관 최고의 영예이자 최고 품계인 '정1품'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되었다).
戊辰除判敦寧。
무진년(순조 8년, 1808년)에 다시 정1품 원로 대신의 관직인 판돈령부사(判敦寧)에 제수되었다.
己巳春微感漸谻。神明不少亂。盥櫛如常。
기사년(순조 9년, 1809년) 봄에 가벼운 감기 기운(微感)이 돌더니 병세가 점차 위중해졌다(漸谻).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정신과 지각(神明)이 조금도 흐려지거나 어지럽지 않았으며(不少亂),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는 일(盥櫛)을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하게 행하였다.
掃室堂正枕簟。翛然而逝。
방과 대청을 깨끗이 청소하게 하고(掃室堂), 베개와 대자리를 바르게 정돈한 뒤(正枕簟), 마치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롭게(翛然, 소연히) 세상을 떠나셨다(逝). ('소연(翛然)'은 얽매임이 없이 홀가분하고 영혼이 맑은 상태를 뜻합니다.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고, 주변을 정돈한 뒤 잠들듯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이상적인 '고종명(考終命)'의 모습을 묘사한 감동적인 문장이다).
壽八十二。實三月二十九日也。
향년 82세였으며, 돌아가신 날은 실로 3월 29일이었다.
葬于長湍五冠山觀察公墓右岡負巳原
경기도 장단(長湍)의 오관산(五冠山)에 있는 아버지 관찰사 공(윤경종)의 묘소 오른쪽 언덕(右岡), 사방(巳方, 동남쪽)을 등지고 들어앉은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장단 오관산은 현재 휴전선 인근 민통선 지역에 위치.)
*수연이서(翛然而逝): 수연(翛然)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듯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우며 얽매임이 없는 모양'을 뜻한다. 평생 공명정대하고 떳떳하게 살아온 선비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채 마치 잠들 듯 평화롭게 세상을 떠난 고결한 임종을 극찬하는 표현이다.
配貞敬夫人海州崔氏。郡守駿興女。領議政忠貞公奎瑞曾孫。生先公二年。卒先公四年。墓在公墓右岡。有二男長載伋僉正。次載僖今府使。庶男載俁。庶女適李勉緝。載伋男循誼,從誼。女適韓琬。載僖男復誼縣令。女適李駿遠,李升謙。載俁男徹誼。從誼二男。復誼二男三女。女適李寅相,鄭老容。李駿遠男象敬。餘幷幼。公質性端良。容儀溫雅。望之文氣炯炯在眉宇間。有孝友篤行。常以早孤爲至痛。* 윤사국(尹師國) 선생의 부인과 자손들의 가계(후손 기록), 그리고 선생의 천품과 성품, 행실에 대한 총평을 담은 비문의 마지막 단락이다.
配貞敬夫人海州崔氏。郡守駿興女。領議政忠貞公奎瑞曾孫。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해주 최씨(海州 崔氏)이다. 군수를 지낸 최준흥(崔駿興)의 딸이며, 숙종 대 영의정을 지낸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의 증손녀이다.
生先公二年。卒先公四年。墓在公墓右岡。
부인은 공(윤사국)보다 2년 먼저 태어났고,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공의 묘소 오른쪽 언덕(같은 뫼)에 있다. (부인은 1726년생으로 1805년(향년 80세)에 별세했으며, 부부가 모두 천수를 누렸다).
有二男長載伋僉正。次載僖今府使。庶男載俁。庶女適李勉緝。
자녀로는 두 아들이 있으니, 맏아들은 첨정(僉正)을 지낸 윤재급(尹載伋)이고, 둘째 아들은 지금 부사(府使)를 지내고 있는 윤재희(尹載僖)이다. 서자(庶男)로는 윤재우(尹載俁)가 있고, 서녀(庶女)는 이면집(李勉緝)에게 시집갔다.
載伋男循誼、從誼。女適韓琬。
(맏아들) 윤재급의 아들은 윤순의(尹循誼)·윤종의(尹從誼)이며, 딸은 한완(韓琬)에게 시집갔다.
載僖男復誼縣令。女適李駿遠、李升謙。
(둘째 아들) 윤재희의 아들은 현령을 지내고 있는 윤복의(尹復誼)이며, 딸들은 이준원(李駿遠)·이승겸(李升謙)에게 각각 시집갔다.
載俁男徹誼。從誼二男。復誼二男三女。女適李寅相、鄭老容。李駿遠男象敬。餘幷幼。
(서자) 윤재우의 아들은 윤철의(尹徹誼)이다.
(손자) 윤종의는 아들 둘을 두었고,
윤복의는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딸들은 이인상(李寅相)·정노용(鄭老容)에게 시집갔다.
(사위) 이준원의 아들은 이상경(李象敬)이다.
그 외의 나머지 후손들은 모두 나이가 어리다(幼).
*자손 (아들과 딸, 손자녀)
*적장남 윤재급(尹載伋): 관직은 첨정(僉正)을 지냈다. 아들로 윤순의(尹循誼), 윤종의(尹從誼)를 두었고, 딸은 한완(韓琬)에게 시집갔다. 윤종의는 다시 아들 둘을 두었다.
*적차남 윤재희(尹載僖): 비문을 쓸 당시 현재 부사(府使, 고을 수령)를 지내고 있었다. (※ 정조 대왕이 회혼례를 앞두고 부모 봉양을 위해 충청도로 옮겨 준 두 아들이 바로 이 재급과 재희이다.) 아들로 현령(縣令)을 지낸 윤복의(尹復誼)를 두었고, 딸들은 이준원(李駿遠), 이승겸(李升謙)에게 각각 시집갔다. 윤복의는 다시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고, 딸들은 이인상(李寅相), 정노용(鄭老容)에게 시집갔다. 사위 이준원은 아들 이상경(李象敬)을 두었다.
*서자 및 서녀: 서자로 윤재우(尹載俁)를 두어 그 아들로 윤철의(尹徹誼)가 있으며, 서녀는 이면집(李勉緝)에게 시집갔다. 이외의 다른 손자나 증손들은 모두 나이가 어리다(幼).
*선생의 성품과 천품에 대한 총평: 선생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단정하고 어질었으며(단량), 외모와 거동은 온화하고 우아하셨다(온아). 멀리서 바라보아도 문장가로서의 영민한 기운(문기)이 눈썹과 이마 사이에 반짝반짝 빛이 났다. 또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운 행실(효우독행)을 실천하셨는데, 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자란 것(자고)을 인생의 가장 큰 슬픔과 한(至痛)으로 여기며 사셨다.
公質性端良。容儀溫雅。望之文氣炯炯在眉宇間。
공은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어질었으며(端良), 외모와 거동은 온화하고 우아했다(溫雅). 그를 바라보면 빛나는 문장가의 기상(文氣炯炯)이 눈썹과 이마 사이에 완연히 드러났다.
有孝友篤行。常以早孤爲至痛。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독실하게 실천하였으며(孝友篤行), 늘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윈 것(早孤)을 인생의 가장 큰 아픔(至痛)으로 여겼다.(비명 첫머리에 나왔듯, 17세의 나이에 평안도 정주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상례를 치렀던 기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며 효를 다했던 인물임을 재확인해 준다).
*충정공 최규서(忠貞公 奎瑞): 숙종 대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영의정을 지낸 청렴하고 이름 높은 정승이다. 윤사국 선생의 가문이 당대 명문가인 해주 최씨 가문과 굳건한 혼맥을 맺었음을 보여준다.
*고(巹) / 회근(回巹): 앞 단락에 나왔던 회혼례(60주년)를 뜻한다. 부인이 선생보다 2세 연상이었으므로, 선생이 73세(무오년, 1798년)에 종1품 숭정대부로 승진했을 때 부인은 75세였다. 정조 대왕이 이 두 노부부의 장수와 아름다운 해로를 얼마나 기쁘게 여겼는지 가계 기록을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자고(早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외롭게 자란 처지를 뜻한다. 앞 단락에서 윤사국 선생이 17세 때 친아버지(윤경룡)의 상을 당해 지극정성으로 장례를 치렀던 기록과 연결딘다. 평생 높은 관직에 오르고 세간의 존경을 받았으면서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효심과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참된 선비의 면모를 보여주며 비문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 직암 윤사국 가문 핵심 가계도 요약
조부: 윤지비(尹志斐)
부친: 윤경종(尹敬宗, 평안도 관찰사)
둘째 형: 윤사홍(尹師弘, 용인현감)
본인: 윤사국(尹師國) + 부인 해주 최씨 (영의정 최규서의 증손녀)
장남: 윤재급(尹載伋, 첨정) ➔ (손자) 윤순의, 윤종의
차남: 윤재희(尹載僖, 부사) ➔ (손자) 윤복의(현령)
이로써 직암 윤사국 공의 신도비명 중 가문의 인적 기록과 최종 인물 평문(行狀)이 모두 끝이 났다.
이 뒤로는 비명의 마지막 형식인 '명(銘)', 즉 공의 위대한 생애와 업적을 한 편의 시(詩) 형태로 압축하여 돌에 새겨 영원히 기리는 네 글자 주기의 운문(韻文)이 배치됩니다.
每遇觀察公諱日。達曙哭如袒括時。至甲子觀察公下世之歲。公年七十七。舁往省墓。撫莎哀號。素食終其朔。事鄭夫人一念洞屬。夫人晩嬰奇疾。公左右扶將。躬執藥餌。再奉潘輿。備極榮養。伯氏早世。只有一女。視之踰己女。伯嫂患疹。邀醫有馬無牽。公爲之執鞚。與仲氏友愛篤摯。聯枕撫背。晨夕湛樂。時與仲氏及妹氏李相國夫人。
每遇觀察公諱日。達曙哭如袒括時。
매번 아버지 관찰사 공(윤경종)의 기일(諱日)을 맞이하면, 새벽이 될 때까지 통곡하기를(達曙哭) 마치 아버지가 막 돌아가셔서 상복을 입고 머리를 풀 헤치던 그때(袒括時, 17세 부친상 당시)처럼 슬퍼했다.
至甲子觀察公下世之歲。公年七十七。舁往省墓。撫莎哀號。素食終其朔。
갑자년(정조 24년, 1804년)에 이르니 마침 아버지 관찰사 공이 세상을 떠나신 지 딱 한 바퀴(60년, 하세지세)가 되는 해였는데, 공의 나이 77세였다. (늙고 병든 몸이었음에도) 가마를 타고 아버지의 묘소에 가서 성묘를 하였는데(舁往省墓), 묘소의 떼(잔디, 莎)를 어루만지며 슬피 부르짖어 통곡했고, 고기를 먹지 않는 소박한 식사(素食)를 하며 그 달이 다 가도록 상기를 지켰다(終其朔).
事鄭夫人一念洞屬。夫人晩嬰奇疾。公左右扶將。躬執藥餌。
어머니 정경부인(海平 鄭氏)을 섬김에는 한결같은 효성이 뼈에 사무칠 정도였다(一念洞屬). 어머니가 늙막에 기이한 질병(奇疾)을 앓게 되자, 공이 좌우에서 몸소 부축해 드렸고(左右扶將), 직접 약과 음식(藥餌)을 다려 올렸다.
再奉潘輿。備極榮養。
어머니를 수레(潘輿)에 두 번이나 모시고 부임지에 가며, 자식으로서 영광스럽게 봉양하는 도리(榮養)를 극진히 다했다.
伯氏早世。只有一女。視之踰己女。
큰형님(伯氏, 윤사임)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早世) 겨우 딸 하나만 남겨두었는데, 공은 그 조카딸을 보살피기를 자신의 친딸보다 더 지극하게 여겼다(視之踰己女).
伯嫂患疹。邀醫有馬無牽。公爲之執鞚。
큰형수님(伯嫂)이 마마(홍역, 疹)를 앓아 의원을 급히 모셔 와야 했는데, 마침 말은 있었으나 고삐를 끌고 갈 하인이 없었다. 그러자 공(윤사국)이 직접 말의 고삐를 잡고(執鞚) 달려가 의원을 데려왔다.
與仲氏友愛篤摯。聯枕撫背。晨夕湛樂。
둘째 형님(仲氏, 용인공 윤사홍)과의 형제간 우애 또한 독실하고 간절하여(友愛篤摯), 베개를 나란히 베고 누워 서로의 등어리를 어루만져 주었으며(聯枕撫背),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하는 즐거움이 깊고 지극했다(晨夕湛樂).
時與仲氏及妹氏李相國夫人。
때때로 둘째 형님 및 여동생인 영의정(相國) 이시수(李時秀)의 부인과 함께 (화목하게 어울렸다).
列侍太夫人側。諸子女環坐。竟日怡愉。以供歡笑。觀察公甞營三山墓舍。有弟兄安得同携手。長侍先塋度此生之詩。屋未建而觀察公捐館。公痛先志未就。仍其地改建。取詩扁曰同携。
列侍太夫人側。諸子女環坐。竟日怡愉。以供歡笑。
(공은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太夫人)의 곁에 나란히 모셔 서고, 여러 자녀가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하루가 저물 때까지(竟日) 화락하고 기뻐하며 어머니에게 기쁨과 웃음을 안겨다 드렸다.
觀察公甞營三山墓舍。有弟兄安得同携手。長侍先塋度此生之詩。
과거에 아버지 관찰사 공(윤경종)이 삼산(三山)의 선영 아래에 제사를 지내고 묘소를 돌볼 재실(墓舍)을 지으려고 경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형제들이 어찌해야 손을 나란히 맞잡고(同携手), 영원히 조상의 묘소를 모시며 이 남은 삶을 보낼 수 있을까"라는 뜻의 시(詩)를 지어 두었었다.
屋未建而觀察公捐館。그러나 집(재실)을 다 짓기도 전에 관찰사 공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捐館).
公痛先志未就。仍其地改建。取詩扁曰同携。
공(윤사국)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先志未就)을 늘 가슴 아프게 여겨, 아버지가 점찍어 두었던 바로 그 땅(仍其地)에 집을 새로 고쳐 지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옛 시 구절에서 뜻을 취해 현판의 이름을 '동휴(同携)'라 하였다. (아버지의 꿈이었던 '형제들이 손을 잡는다'는 구절에서 이름을 따서 동휴정(同携亭)이라는 정자(혹은 재실)를 지어 바친 것이다).
與仲氏朅來寓慕。及太夫人下世。仲氏與李公夫人相繼殞逝。公悲痛如不欲生。撫字諸侄諸甥。人不知其爲姪與甥也。其於追遠報本。享先敦宗之節。一出於至性。値先忌雖大耋之後。澡浴齋明。非病則必躬。
與仲氏朅來寓慕。
(앞서 지은 동휴정에서) 둘째 형님(仲氏)과 함께 가끔씩 찾아와 머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을 부치곤 했다(寓慕).
及太夫人下世。仲氏與李公夫人相繼殞逝。公悲痛如不欲生。
그러다 어머니(太夫人)가 세상을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형님과 (여동생인) 이공(이시수 영의정)의 부인마저 상계하여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殞逝).
공은 그 슬픔과 통고함이 너무나 깊어 마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듯(如不欲生) 슬퍼했다.
撫字諸姪諸甥。人不知其爲姪與甥也。
(공은 슬픔을 딛고) 형님과 여동생이 남기고 간 여러 조카(諸姪)와 생질(諸甥, 누이의 자식)들을 거두어 정성껏 어루만지고 길러내니(撫字), 남들은 그 아이들이 공의 친자식이 아니라 조카나 생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다.
('무자(撫字)'는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교육한다는 유교적 표현이다).
其於追遠報本。享先敦宗之節。一出於至性。
조상을 추모하고 은혜에 보답하며(追遠報本),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고 종족 간에 화목을 돈독히 하는 정성과 예절(享先敦宗之節)은 모두 그의 지극한 천성(至性)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値先忌雖大耋之後。澡浴齋明。非病則必躬。
선조의 기일(先忌)을 맞이하면 비록 80세가 넘은 고령(大耋之後)이었음에도,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澡浴齋明), 아주 큰 병이 든 것이 아니라면 제사를 반드시 몸소(必躬) 주관하여 올렸다. ('대질(大耋)'은 80세 이상의 고령을 뜻한다.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든 나이임에도 제사 전날 목욕재계를 하고 모든 제례를 정성껏 직접 집행한 철두철미한 유학자적 실천력을 찬양하고 있다).
先世十二代碑碣表誌。經紀畢具。墓皆置田。歲一行祭。體太夫人遺意。爲外氏建祠屋竪墓表。歲致祭需。如夫人在時。遵宗兄遺托。營其返葬。嫁其稚女。以次胤繼宗祀之絶。一門內外叔侄兄弟。至袒免之親。喪而斂葬之。昏而聘醮之。屋宇以庇之。衣食以周之。
先世十二代碑碣表誌。經紀畢具。墓皆置田。歲一行祭。
선대 조상 12대에 이르는 무덤의 비석, 돌기둥, 묘표, 묘지명(碑碣表誌)을 직접 경영하여 빠짐없이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다(經紀畢具). 또한 각 묘소마다 제사 비용을 댈 토지(묘답, 置田)를 마련해 두어, 해마다 빠짐없이 한 차례씩 시제를 지내도록 했다. (가문의 역사와 계보를 증명하는 비석을 정비하고, 후손들이 돈 걱정 없이 제사를 영구히 지낼 수 있도록 경제적 기반(묘전)까지 마련해 둔 철두철미한 가문 경영 능력이다).
體太夫人遺意。爲外氏建祠屋竪墓表。歲致祭需。如夫人在時。
어머니(太夫人)의 유훈과 뜻을 받들어(體), 외가(外氏) 가문을 위해 사당(祠屋)을 지어주고 묘표를 세워주었으며, 매년 제사에 필요한 제수 용품(祭需)을 보내주기를 마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와 똑같이 변함없이 행했다.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 출가외인이 된 어머니의 외가(외가댁)까지 이토록 살뜰하게 챙긴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지극한 효심이자 배려이다.
遵宗兄遺托。營其返葬。嫁其稚女。以次胤繼宗祀之絶。
종형(사촌 형)의 남겨진 부탁을 받들어, 종형이 타향에서 죽자 고향 선영으로 돌아와 묻힐 수 있도록 장례(返葬)를 치러주었고, 그의 어린 딸을 거두어 시집보내 주었다(嫁其稚女). 또한 자신의 둘째 아들(次胤, 윤재희)로 하여금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한 종형의 제사(宗祀)를 이어받아 대를 잇게 해 주었다.
一門內外叔侄兄弟。至袒免之親。喪而斂葬之。昏而聘醮之。屋宇以庇之。衣食以周之。
집안 일가친척 내외의 숙질(아저씨와 조카)과 형제들은 물론이요, 족보상 아주 먼 친척인 '탄면의 친족(袒免之親)'에 이르기까지, 상사를 당하면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었고(喪而斂葬之), 혼인이 있으면 예물을 대어 장가를 들고 시집을 보내주었다(昏而聘醮之). 살 곳이 없으면 집(屋宇)을 마련해 주어 보살폈고, 굶주리면 옷과 양식(衣食)을 대어주어 구제해 주었다(周之).
京鄕宗族之踵門者。隨求曲應。各得其歡心。扁其堂曰希范。盖慕希文義庄故事也。在安東。與嶺外諸宗。榮掃漆原先墓。行旅酬禮。設敦本契。買田備享需。
京鄕宗族之踵門者。隨求曲應。各得其歡心。
한양(京)과 지방(鄕)을 막론하고 문중에 살길이 막막하여 공의 집 문턱을 밟는 일가친척들(踵門者)이 있으면, 그들의 요구와 사정에 따라 세심하게 모두 응해주어(隨求曲應), 저마다 기쁜 마음을 얻고 돌아가게 했다.
扁其堂曰希範。盖慕希文義莊故事也。
(공은 친족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집 당호(堂)에 '희범(希範)'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는 대개 송나라의 정승 범문정공(範文正公, 범중엄의 시호가 '文正', 자는 '希文')이 가문의 가난한 친족들을 돕기 위해 토지를 기부해 공동체 기금을 만들었던 '의장(義莊)'의 옛 고사(故事)를 흠모(慕)했기 때문이다. (범중엄은 "내가 부귀해진 것은 문중 전체의 복이니, 나 혼자 누릴 수 없다"라며 친족 구제 기금인 '의장'을 세운 유교 사회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윤사국은 범중엄(자 희문)을 본받겠다는 뜻으로 집 이름을 '희범(希範, 범중엄을 바라보다)'이라 짓고, 실제로 가난한 일가 친척들에게 집과 식량을 아낌없이 내주며 조선판 의장 제도를 실천했다).
在安東。與嶺外諸宗。榮掃漆原先墓。行旅酬禮。
과거 안동부사로 재임할 당시에,
영남(嶺外) 지역에 살고 있던 문중의 여러 종친과 함께 본관인 칠원(漆原, 지금의 경남 함안 칠원읍)의 조상 묘소를 영광스럽게 성묘하고 정비했다(榮掃). 그 과정에서 오가는 여비와 접대 예법(行旅酬禮)을 완벽하게 갖추어 처리했다.
設敦本契。買田備享需。
그리고 문중의 근본을 두터이 하기 위해 '돈본계(敦本契)'라는 종친계를 조직하였고, 친히 토지(田)를 사들여 해마다 종가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과 물자(享需)를 넉넉히 대비할 수 있도록 마련해 두었다. (안동부사 시절의 행정력을 발휘하여 영남 지역에 흩어져 있던 칠원 윤씨 종친들을 하나로 묶고, 가문의 구심점인 칠원 선영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뒤, 영구적인 제사 기금(돈본계와 묘답)까지 구축했음을 뜻한다).
印經籍建書堂。勸諸宗之學。篤故舊恤困窮。愛好人倫。奬勸後生。與人言。色笑盎然。每引前輩嘉言善行。以自警而警人。公之家世。自直學公以下。淸名直節振一世。而與時不諧。欝而莫伸。觀察公又位不稱德。未克展布素蘊。公痛念門戶零替。年纔弱冠。奮志力學。以光大先業自期。
印經籍建書堂。勸諸宗之學。
유교 경전과 서적들(經籍)을 인쇄해 보급하고 서당(書堂)을 건립하여,
문중의 여러 젊은 종친들(諸宗)에게 학문에 힘쓰도록 권장하였다.
*(앞서 가난한 친족들을 먹이고 재워준 데(희범의 의장) 이어, 가문이 대대로 명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재 양성(교육 복지)'에 아낌없이 투자했음을 보여준다).
篤故舊恤困窮。愛好人倫。奬勸後生。
옛 친구들과의 의리를 두터이 하고(篤故舊), 곤궁하고 처지가 딱한 이들을 구휼하였으며(恤困窮), 인류의 올바른 도리와 윤리(人倫)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또한 후배와 젊은 유생들(後生)을 칭찬하고 격려하여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
與人言。色笑盎然。每引前輩嘉言善行。以自警而警人。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얼굴빛과 웃음이 온화함으로 가득 넘쳐났고(色笑盎然), 늘 앞서간 훌륭한 선배들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嘉言善行)을 인용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깨우치도록 했다.
*(조정에서는 법과 기강을 엄격히 집행하던 서슬 퍼런 대신이었으나, 일상생활에서는 대단히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늘 옛 성현들의 일화를 통해 자기를 성찰하던 겸손한 성품을 묘사했다).
公之家世。自直學公以下。淸名直節振一世。而與時不諧。欝而莫伸。
공(윤사국)의 가계는 고려 말의 명신인 직학공(直學公, 윤택) 이하로 대대로 맑은 명성과 곧은 절개(淸名直節)가 온 세상에 진동하였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적 상황이나 흐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與時不諧), 그 뜻이 억눌린 채 조정에서 마음껏 펴 보이지 못했다.
*(칠원 윤씨 가문은 전통적으로 올곧은 선비 정신을 가졌으나, 탕평책 이전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주류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기에 오랜 기간 가문 전체가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나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觀察公又位不稱德。未克展布素蘊。
(공의 아버지인) 관찰사 공(윤경종) 또한 그 지위와 관직이 그가 지녔던 고결한 덕망과 능력에 미치지 못하여(位不稱德), 가슴속에 품고 있던 훌륭한 경륜과 포부(素蘊)를 온전히 세상에 펼쳐 보이지 못하고 일찍 별세했다.
公痛念門戶零替。年纔弱冠。奮志力學。以光大先業自期。
공은 자신의 가문(門戶)이 이처럼 안타깝게 쇠락하고 침체한 것(零替)을 마음 아프게 여겨, 나이 겨우 스무 살 안팎의 성년(弱冠)이 되었을 때부터, 떨치고 일어나 뜻을 세워 학문에 매진하였다(奮志力學). 그리하여 "반드시 우리 조상들이 남기신 위대한 가업과 명성을 다시금 찬란하게 빛내겠다(以光大先業)"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기약했다.
遂策名淸朝亨衢大闢。而顧深自禔躬。介然特立。不求進取。不交熱官要人。不與世俯仰。非其義。禍福榮辱。不足動其心。立朝五十年。多忤寡合。雖歷淸華致崇顯。而官跡常在用舍之間。始而見嫉於柄相。
遂策名淸朝亨衢大闢。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대궐의 명부(사관 명단 등)에 이름을 올리니(策名), 출세와 영전의 탄탄대로(亨衢)가 활짝 열리게 되었다(大闢).
而顧深自禔躬。介然特立。不求進取。
그러나 공은 도리어 깊이 스스로의 몸과 행실을 맑고 올바르게 닦았으며(深自禔躬), 대쪽같이 굳건하게 홀로 우뚝 서서(介然特立) 사사로운 출세나 지위의 진취를 구하지 않았다.
不交熱官要人。不與世俯仰。
당대 세도를 부리던 잘나가는 관료(熱官)나 핵심 권력자(要人)들과 사사로이 교제하지 않았고, 세상의 유행이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고 처신하지 않았다(不與世俯仰).
*(권력자의 줄서기 요구를 철저히 거부했던 그의 성품을 나타냈다. '부앙(俯仰)'하지 않았다는 것은 권력에 빌붙어 구차하게 굴지 않았다는 전형적인 군자의 지조를 뜻한다.
非其義。禍福榮辱。不足動其心。
의리가 아닌 일이라면(非其義), 그것이 자신에게 가져올 재앙과 복록,
영예와 치욕(禍福榮辱)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마음을 조금도 뒤흔들지 못했다(不足動其心).
立朝五十年。多忤寡合。雖歷淸華致崇顯。而官跡常在用舍之間。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한 50년의 세월 동안, (권력자들의 뜻을) 거스르고 부딪치는 일은 많았으나 뜻을 같이하여 화합하는 일은 매우 적었다(多忤寡合). 비록 맑고 화려한 요직(淸華)을 두루 거쳐 최고위직의 영예(崇顯)에 이르렀으나, 그의 관직 이력(官跡)은 언제나 임금의 중용과 파직·유배라는 부침의 사이(用舍之間)에 늘 놓여 있었다.
* ('다오과합(多忤寡合)'은 강직한 신하의 운명을 상징하는 말이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50년 공직 생활 동안 파직과 유배를 반복했지만, 그의 뛰어난 행정력과 청렴함을 안 임금들이 결국 다시 불러내어(用舍) 정1품에까지 이르게 한 파란만장한 삶을 압축한 것이다).
始而見嫉於柄相。
처음에는 권력을 쥔 정승(柄相)에게 미움과 시기(見嫉)를 받기도 했다.
中焉積惡於權凶。終至驀地醜誣。成是貝錦。駭機之發。人莫不危之。公乃夷然若無事焉。獨被兩聖朝則哲之知。雷霆方震而霈澤旋降。阱石交加而昭晰備至。寵以華衮之褒。接以家人之禮。前後拔擢。皆出在心之簡。是盖公貞亮謙愼。斷猗無他。有以孚格于上也。於是乎位隆上卿。壽躋九袠。琴瑟偕老。芝蘭趾美。
中焉積惡於權凶。終至驀地醜誣。成是貝錦。
관직 생활의 중간에는 권세를 부리던 흉악한 자(權凶, 홍국영 등)에게 미움을 사서 원망이 쌓였고(積惡), 결국에는 느닷없이(驀地) 추잡한 모함과 왜곡을 당해, 참소하는 무리들이 마치 비단 무늬를 짜 맞추듯 허물을 조작해 내기까지 했다(成是貝錦).
駭機之發。人莫不危之。公乃夷然若無事焉。
깜짝 놀랄 만한 위기의 음모(駭機)가 터져 나왔을 때,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공의 처지가 매우 위태롭다(危之)며 숨을 죽였으나, 공은 도리어 마음이 평온하고 태연자약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행동했다(夷然若無事焉).
獨被兩聖朝則哲之知。雷霆方震而霈澤旋降。阱石交加而昭晰備至。
(그 결과) 오직 영조와 정조 두 성군(兩聖朝)의 현명하고도 명철한 신임과 알아주심(則哲之知)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왕의 진노라는 벼락(雷霆)이 치는가 싶다가도 곧이어 은혜로운 단비와 요술 같은 사면(霈澤)이 내렸고, 함정에 빠뜨리고 돌을 던지는 격심한 모함(阱石)이 사방에서 교차하는 와중에도 공의 결백함은 촛불을 켠 듯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다(昭晰備至).
*(앞서 다루었던 '송문술의 보복 상소 사건' 당시 정조가 내막을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洞燭) 윤사국의 억울함을 다 풀어준 감동적인 신원의 역사를 압축한 문장이다).
寵以華袞之褒。接以家人之禮。前後拔擢。皆出在心之簡。
임금은 아름다운 곤룡포와 예복을 내려 칭찬하는 듯한 과분한 찬사(華袞之褒)로 공을 총애하였고, 대궐 안에서는 마치 한 집안 식구와 같은 친밀한 예우(家人之禮)로 대접해 주었다.
그의 공직 생활 앞뒤로 이루어진 수많은 발탁과 승진은, 모두 임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전폭적인 선택(在心之簡)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是盖公貞亮謙愼。斷猗無他。有以孚格于上也。
이는 대개 공이 지녔던 곧고 밝은 충성심과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貞亮謙愼), 그리고 단호하면서도 사리사욕이 없었던 정직함(斷猗無他)이, 마침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지극한 신뢰를 얻어냈기 때문(孚格于上)이었다.
於是乎位隆上卿。壽躋九袠。琴瑟偕老。芝蘭趾美。
그리하여 마침내 지위는 최고 대신의 반열(정1품 上卿)에 이르러 융성해졌고, 나이는 거의 아흔 살(九袠, 향년 82세)에 가깝도록 장수하였으며, 아내와 거문고와 비파를 타듯 백년해로(琴瑟偕老)를 누렸고, 자손들(芝蘭) 역시 가문의 명성을 이어받아 그 아름다운 자취를 훌륭하게 빛내게 되었다(趾美).
名德俱完。後祿未艾。古所云天爵修而人爵自來者。不其然歟。七典藩邑。修弊擧墜。條理井井。夙夜勤勞。殆忘寢食。實惠遠猷。民國永賴。及歸琴鶴蕭然。十口屢空。而未甞以家累嬰懷。自庚申天崩。益無意於世。退居三山。門無輪蹄。惟以圖書自娛。彙編魯論一部。
名德俱完。後祿未艾。
명성과 덕망이 모두 완벽하게 갖추어졌고(名德俱完), 후손들이 누릴 복록과 영예 또한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後祿未艾).
古所云天爵修而人爵自來者。不其然歟。
옛 성현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숭고한 도덕과 덕성(天爵)을 닦으면, 세상의 지위와 관직(人爵)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라고 하였는데, 공의 삶이 참으로 그렇지 아니한가(不其然歟)!
*(맹자(孟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찬사입니다. 윤사국은 억지로 출세와 권력을 쫓은 것이 아니라, 오직 선비의 도리와 인성(천작)을 닦았더니 판서와 정1품이라는 세상의 영예(인작)가 저절로 찾아왔음을 역사적으로 증명했다는 극찬이다).
七典藩邑。修弊擧墜。條理井井。夙夜勤勞。殆忘寢食。
(공은 공직 생활 동안) 총 일곱 차례나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七典藩邑)을 맡았다. 부임하는 곳마다 누적된 폐단을 고치고 무너진 기강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修弊擧墜), 행정의 조리(條理)가 우물 정(井) 자 모양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연하였다.
밤낮으로 백성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느라(夙夜勤勞) 거의 잠자고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역사적 확인): 윤사국 공이 거쳐 간 대표적인 지방관 보직은 앞서 비명에서 읽은 홍양(유년기 부친 임지), 구갈파(권관), 강동현감, 곡산부사, 안동부사, 동래부사, 의주부윤, 강원도 관찰사 등입니다. 안동의 환곡 연표법, 강릉의 어숙 폐단 개혁 등 그가 가는 곳마다 행정이 '정연(井井)'해졌음을 칭송한다.
實惠遠猷。民國永賴。
백성들에게 베푼 실질적인 혜택(實惠)과 국가를 위한 원대한 책략(遠猷)은, 백성들과 나라(民國)가 영구히 의지할 만한 자취(永賴)가 되었다.
及歸琴鶴蕭然。十口屢空。而未甞以家累嬰懷。
(50년 공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진 재산이라곤 오직 거문고 한 대와 학 한 마리뿐으로 집안이 썰렁했고(琴鶴蕭然), 열 식구의 밥그릇이 자주 빌 정도로 가난했으나(十口屢空), 단 한 번도 집안의 가난과 생계 문제(家累)를 마음에 두고 괴로워하지 않았다(未甞以家累嬰懷).
*('금학소연(琴鶴蕭然)'은 고대 중국의 청백리 조변(趙抃)이 청렴하게 관직을 마치고 고향에 갈 때 오직 거문고 하나와 학 한 마리만 데리고 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종1품, 정1품의 최고위 장관급 직책을 수십 년간 지내고도 정작 본인의 집은 쌀독이 비어 굶주릴 정도로 완벽한 '청백리(淸白吏)'의 삶을 살았음을 보여준다).
自庚申天崩。益無意於世。退居三山。門無輪蹄。惟以圖書自娛。彙編魯論一部。
경신년(1800년)에 정조 임금이 갑작스럽게 승하(天崩, 하늘이 무너짐)한 뒤로는, 세상에 나아가 벼슬할 뜻을 완전히 접어버렸다(益無意於世). 이에 삼산(三山)의 시골집으로 물러나 은거하니 대문 앞에는 고관들의 수레나 말의 발자국(輪蹄)이 완전히 끊어졌고, 오직 책(圖書)을 읽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으며 공자의 논어(魯論, 노론) 한 부를 정성스럽게 편집하고 묶어내는 일에만 몰두했다.
*(자신을 알아주던 지기이자 주군이었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윤사국은 원로 대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모두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갔다. 문부(門前成市)를 이루던 세객들을 물리고 오직 성현의 말씀인 《논어》(노나라에서 전해진 논어라 하여 '魯論'이라 칭함)의 주석을 연구하며 생의 마지막을 고결하게 정리한 학자적 면모를 보여준다).
朝夕誦讀。酒戶甚寬。微醺則止。素有臨池之工。深得古人筆髓。八十後作蠅頭細字。丁卯書進遲遲臺碑。蒙𦤎比之賜。公之考進士公。卽我高祖考宅相也。吾先君子曾撰其墓誌。公於先君子。愛慕如親昆弟。以時來候。談笑移晷。語及先故。輒涕沾于襟。晩秀隅侍。每承撫頂之誨。歷歷如昨日事。今白首孤露。獨留斯世。忍把筆銘公之墓。撫念往昔。安得不潸然而悲。
朝夕誦讀。酒戶甚寬。微醺則止。
(말년에 은거하면서도) 아침저녁으로 책을 소리 내어 읽었으며(朝夕誦讀), 타고난 술 용량(酒戶)이 매우 넉넉하고 넓었으나 늘 기분 좋게 취기가 돌 정도(微邊則止)에서 멈추었다.
素有臨池之工。深得古人筆髓。八十後作蠅頭細字。
평소에 글씨를 연습하는 공력(臨池之工)이 깊어, 옛 명필들의 서예 뼈대와 진수(筆髓)를 깊이 터득하였다. 나이 80세가 넘은 후에도 파리 머리만 한 아주 작은 글씨(蠅頭細字)를 정교하게 쓸 수 있었다.
*('임지(臨池)'는 후한의 명필 장지가 마당의 못(池)이 검게 변할 정도로 붓을 씻어가며 글씨를 연습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윤사국 공이 당대 조선 최고 명필로 꼽혔던 서예적 내공을 찬사하는 대목이다. 80 고령에도 손이 떨리지 않고 정교한 소해(小楷)를 썼다는 것은 대단한 기력과 수양을 뜻한다).
丁卯書進遲遲臺碑。蒙皐比之賜。
정묘년(순조 7년, 1807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지지대비(遲遲臺碑)'의 비문 글씨를 직접 써서 올렸는데, 이 공로로 순조 임금으로부터 범의 가죽(皐比, 고비)을 하사받는 은혜를 입었다.
*(역사적 소장처): '지지대비'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지지대고개)에 현재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 비석이다.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한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자꾸 지체되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고개인데, 순조 임금이 아버지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울 때 당대 최고 명필인 80세의 노대신 윤사국에게 비문 글씨를 쓰게 한 것이다. '고비(皐比)'는 범 가죽을 뜻하며, 옛날 학덕이 높은 스승이나 대가에게 내리던 최고의 예우 선물이었다.
公之考進士公。卽我高祖考宅相也。吾先君子曾撰其墓誌。
공(윤사국)의 아버지이신 진사공(관찰사공 윤경종)은 바로 나의 고조할아버지(高祖考)의 생질(조카)이자 가문의 뛰어난 인재(宅相)이셨다. 과거에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先君子)께서 일찍이 그의 묘지명(墓誌)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公於先君子。愛慕如親昆弟。以時來候。談笑移晷。
그리하여 공(윤사국)은 나의 아버님을 대함에 있어, 서로 아끼고 그리워하기를 마치 친형제(親昆弟)처럼 하셨다. 철마다 늘 찾아와 안부를 물으셨고, 한 번 만나면 해의 그림자가 옮겨갈 때까지(移晷, 몇 시간 동안) 담소를 나누셨다.
語及先故。輒涕沾于襟。晩秀隅侍。每承撫頂之誨。歷歷如昨日事。
대화를 나누다 조상들의 옛이야기(先故)에 생각이 미치면, 공은 언제나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곤 하셨다. 나(저자 자신, 晩秀)는 어린 시절 방구석에서 두 어른을 모시고 앉아 지켜보았는데, 그때마다 공께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교훈과 가르침(撫頂之誨)을 내려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今白首孤露。獨留斯世。忍把筆銘公之墓。撫念往昔。安得不潸然而悲。
이제 나 또한 머리가 하얗게 세고 부모를 잃어 외로운 처지(白首孤露)가 되어 홀로 이 세상에 남았는데, 차마 붓을 잡고 나를 아껴주셨던 공의 무덤에 새길 비명(銘)을 지으려 하니, 지나간 옛날을 어루만져 생각할 때 어찌 눈물이 줄줄 흘러 슬프지 않겠는가(安得不潸然而悲) !
銘曰。명(銘)에 이른다.
侃侃直菴。直學之孫。民生也直。先聖有言。其直維何。至誠無僞。外遠巧令。內絶求忮。在家孝弟。在邦靖恭。廣我親親。同人于宗。兩朝知照。珪璋特達。發軔蘭臺。曳履卿月。虛舟不繫。駭浪何憂。知我者天。進退由由。菟裘晩隱。巋然靈春。爲善餘慶。貽厥來雲。晉人心畫。魯公家碑。貞珉十二。公實營之。欝彼五冠。攀栢舊岡。我銘不磨。哲人之藏。
(본문(서문) 뒤에 붙어 고인의 생애와 덕망을 4언시(四言詩) 형태로 압축하여 찬양한 핵심 부분이다.)
侃侃直菴。강직하고 굳세셨던 직암 선생이시여,
直學之孫。성균관 직학(直學) 어른의 손자이시도다.
民生也直。사람이 태어날 때는 본디 정직한 법이라고,
先聖有言。옛 성인(공자)께서도 말씀하셨네.
*民生也直,先聖有言 (민생야직 선성유언): 이 구절은 《논어(論語)옹야(雍也)》 편에 나오는 공자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공자의 원문: "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 (사람의 삶은 본디 곧은 것이니, 곧지 않으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것일 뿐이다.)이 글에서는 '인(人)'을 '민(民)'으로 바꾸어, 인간은 누구나 하늘로부터 정직하고 바른 성품을 부여받고 태어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즉, 직암 선생이 평생을 편법 없이 정직하고 강직하게 살다 간 것이 바로 성인이 말한 인간 본연의 바른 도리를 실천한 삶이었음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其直維何。그 정직함이란 과연 무엇인가?
至誠無僞。지극한 정성으로 거짓이 없는 것이라네.
外遠巧令。겉으로는 교묘한 말과 아첨을 멀리했고,
內絶求忮。속으로는 남을 시기하고 구하는 마음을 끊었네.
在家孝弟。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를 다했으며,
在邦靖恭。조정에서는 온화하고 공손하셨도다.
廣我親親。친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넓게 펼쳐,
同人于宗。일가친척들을 한집안처럼 화목하게 만드셨네.
兩朝知照。두 임금(양조)께서 그 가치를 알아주셨으니,
珪璋特達。귀한 옥(珪璋)처럼 뛰어난 인재로 드러나셨네.
發軔蘭臺。사헌부(蘭臺)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曳履卿月。판서와 참판(卿月)의 지위에 오르셨도다.
虛舟不繫。비어 있는 배처럼 마음에 얽매임이 없으니,
駭浪何憂。거친 파도가 몰아친들 무슨 걱정이 있었으랴.
知我者天。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니,
進退由由。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유유자적하셨네.
菟裘晩隱。말년에는 토구(菟裘, 은퇴하여 살 곳)에 은거하시니,
巋然靈春。오래도록 건강하신 모습이 마치 영춘(靈春) 같으셨네.
爲善餘慶。선을 쌓은 집안에 경사가 넘쳐나니,
貽厥來雲。그 복을 자손(來雲)들에게 물려주셨도다.
*'토구(菟裘)'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나오는 고사이다. 노나라 은공이 정무를 넘겨주고 은퇴하여 노후를 보내려고 마련했던 땅의 이름으로, 이후 사대부 문학에서 '벼슬을 그만두고 평화롭게 은퇴하여 살아가는 시골집이나 전원'을 뜻하는 대표적인 대유적 표현으로 쓰인다.
*'영춘(靈春)'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전설 속의 장수나무인 '대춘(大春)'을 뜻한다. 대춘나무는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8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하여, 고인이 은퇴 후에도 마을의 큰 어른으로서 오랫동안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며 존경받았던 모습을 신령스러운 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晉人心畫。진(晉)나라 사람의 명필 서체와,
魯公家碑。안노공(안진경)의 가문 비석처럼 훌륭하구나.
貞珉十二。열두 자 높이의 곧고 단단한 비석은,
公實營之。공이 살아생전에 직접 마련해 두신 것이라네.
*'심화(心畫)'는 서한(西漢)의 학자 양웅(揚雄)이 《법언(法言)》에서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書吉心畫)"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노공(魯公)'은 당나라의 위대한 서예가이자 충신인 안진경(顔眞卿)을 지칭한다. 안진경은 가문의 명신들을 위해 수많은 신도비와 묘비명(예: 안씨가묘비 등)을 남겼는데, 그 글씨는 매우 웅장하고 충직한 기상이 넘쳤다.
欝彼五冠。攀栢舊岡。我銘不磨。哲人之藏。
欝彼五冠。울창한 저 오관산(五冠山)이여,
攀栢舊岡。측백나무 우거진 옛 언덕을 우러러보네.
我銘不磨。내가 지은 이 비명은 영원히 닳지 않으리니,
哲人之藏。이곳이 바로 철인(哲人)이 잠드신 곳이로다.
*'오관(五冠)'은 고인이 묻힌 산의 이름인 오관산(五冠山)을 가리킨다. (오관산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인근의 명산으로, 고인의 가문 선영이나 묘자리가 이곳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반(攀)'은 (나무나 바위를) 붙잡고 올라간다는 뜻이다.
* '백(栢)'은 측백나무나 잣나무를 뜻하며, 옛날부터 묘지에 심어 고인의 절개를 상징하던 나무이다.
*'철인(哲人)'은 사리에 밝고 덕이 높은 성현을 뜻하는 말
* '장(藏)'은 감추어 둔다는 뜻, 고인의 유해가 자연 속에 평온하게 안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 이 네 구절은 쓸쓸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원히 푸른 산천(欝彼五冠)과 절개의 나무(攀栢)를 배경으로, 고인을 잃은 슬픔을 달래며 돌에 새긴 글(我銘不磨)을 통해 현명했던 한 사대부의 수양과 삶(哲人之藏)을 역사와 대자연 속에 영원히 박제하겠다는 문인으로서의 엄숙한 선언이다.
원문: 屐園遺稿卷之十一○玉局集 / 神道碑銘 判敦寧直菴尹公神道碑銘 《극원유고 11권》 옥국집 신도비명 판돈녕직암윤공신도비명
屐園遺稿 : 이만수(李晩秀)의 문집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1
해역 : 구글AI
윤사국 신도비 찬술자(判敦寧直菴尹公神道碑銘)
이만수 李晩秀 1752년(영조 28)~1820년(순조 20). 68세 졸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중(成仲), 호는 극옹(屐翁)·극원(屐園). 이정신(李正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철보(李喆輔)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며, 어머니는 안수곤(安壽坤)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부사과를 지냈으며, 1789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직각이 되고 도당록(都堂錄: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선발하기 위해 작성한 의정부의 제2차 추천기록)에 등록되었다.
1795년 대사성으로 규장각제학을 겸했으며, 이듬 해 정리자(整理字) 만드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듬 해 대사간에 이어 1799년 대사성으로 우유선(右諭善)을 겸했고, 1800년 제조·예조판서·검교직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다. 이어 공조판서를 거쳐, 순조가 즉위한 뒤 수원부유수가 되어 화령전(華寧殿)을 완성한 공으로 품계가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1801년(순조 1) 판의금부사·대제학·형조판서·병조판서·내각제학(內閣提學)·호조판서를 거쳐, 1803년 사은정사(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4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06년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 1808년 호조판서를 거쳐 1810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치안 유지를 잘못했다는 죄로 이듬 해 파직되고, 경주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어 공조판서·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14년 우빈객(右賓客), 1816년 좌빈객을 거쳐 다음 해 빈객이 되었다. 1819년 예조판서에 이어 1820년 수원유수로 나갔다가 그 해 임지에서 죽었다.
글씨를 잘 써 정주에 「양성기적비(兩聖紀蹟碑)」, 장단(長湍)에 「서명선사제비(徐命善賜祭碑)」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극옹집』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정원용 鄭元容 1783년(정조 7)~1873년(고종 10)
조선 후기에, 좌의정, 중추부판사,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정석증(鄭錫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순(鄭啓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동만(鄭東晩)이다.
어머니는 예조판서 이숭우(李崇祐)의 딸이다. 예조판서 김계락(金啓樂)의 사위로, 이조판서 정기세(鄭基世), 목사 정기년(鄭基年), 부사 정기명(鄭基命) 등의 아들을 두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02년(순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검열·홍문관부응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덕완군(德完君: 뒤의 철종)을 영립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궤장(几杖)을 받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의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다시 정계에 나섰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이듬해에는 실록청의 총재관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권문세가 출신으로 20여 년 간 여러 차례 의정(議政)을 지냈지만, 늘 검소하게 생활하며 청렴결백했다고 한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과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사국 尹師國
1728년(영조 4)~1809년(순조 9)
조선 후기에, 강원도감찰사, 형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빈경(賓卿), 호는 직암(直庵). 증조는 윤서적(尹叙績)이고, 할아버지는 윤지순(尹志淳)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윤경룡(尹敬龍)이다. 진사 윤경종(尹敬宗)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59년(영조 3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예문관에 들어가고, 이어 양호감운어사(兩湖監運御史)·지평·경상도암행어사·정언·수찬·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안동현감·동래부사가 되었다.
1783년(정조 7)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강원도감찰사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공조·형조의 판서와 강화유수·한성판윤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나이 80세가 되자 숭록대부(崇祿大夫)의 관계에 승진하여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서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조정의 금보(金寶)·옥책(玉冊)과 당시 사찰·누관(樓觀)의 편액(扁額)을 많이 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