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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 섬 시리즈 - 전남 신안 하의도
[작성자 ECO 전도사 2021. 3. 4.]
하의도 [荷衣島]
- 통한의 역사를 안고 살아온 인동초의 섬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가와 큰바위 얼굴 섬
- 정이 넘치는 천사의 섬과 평화의 섬
- 토지항쟁비, 농민운동기념관과 기념탑
- 신안 다이아몬드 제도 최남단 섬
-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 연화부수
- 소금박물관과 전시관, 그리고 천사상 미술관
- 뱃길의 종착지, 낙후되고 소외된 섬
하의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으로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50.76km 해상에 위치하며, 동남쪽에 상하태도, 서쪽에 능산도와 신도, 장재도, 북쪽에는 저도 등의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다.
하의 신도에서 대야도 방면을 바라본 풍경
연화부수(蓮花浮水). 물 위에 연꽃이 떠있는 모습이라 하여 ‘하의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되어 있다. 야산으로 된 지형은 농업용수와 식수에 어려움이 많고 천일염과 수산양식으로 소득을 높이고 있으며, 신도와 대야도는 모래밭과 송림이 좋아 천혜의 해수욕장이 되고 있다.
섬의 형태가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를 쓰고, 섬의 산들이 낮고 평탄하여 옷 의(衣)자를 쓰는데 연꽃이 옷을 입은 모습이라 하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하의(荷衣)라는 지명은 도교적 색채가 짙은 이름이며, 이는 연잎으로 만든 옷을 가리키는데 도교에서 전하는 8선(仙) 가운데 당나라의 하선고라는 여선(女仙)이 입던 옷이 하의였다.
동경 126°02′, 북위 34°36′에 위치하며 면적 16.11km2, 해안선 길이 32km이다. 연평균 기온 14.1℃, 강수량 1,172mm, 인구는 893가구, 1,655명(2013년 기준)이다.
하의도 개요
원래는 여러 섬들로 나뉘어 있었지만 간척 공사를 통해 연결되었다. 마을은 대부분 산기슭에 있고 주변에는 넓은 면적의 논밭이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에는 쌀, 보리, 콩, 고추, 고구마, 마늘, 파 등이 있으며 주변 해역에서는 멸치와 장어를 어획한다. 특산물에는 낙지, 유자 등이 있다.
전국의 섬을 순회 답사하다보면 특별히 필자의 발길을 멈추게 하여 오랫동안 붙들어놓는 섬들이 종종 나타난다. 그런 섬 중 하나가 바로 하의도이다. 아마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국민 90% 이상이 모르고 넘어갔을 작은 섬이다.
연꽃섬. 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에 명통한 도사가 전국의 지형을 답사하던 중 이 섬에 들르게 되어 지형을 보니 형태가 연화만개 형상이었다 한다. 그 후로 연화부수(蓮花浮水)라 하여 연꽃과 뜻이 같은 연꽃 하(荷)를 머리에 쓰고 음양설에 의거한 음산함, 즉 낮고 평탄하다 하여 옷 의(衣)를 써서 하의(荷衣)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인도 9개, 무인도 49개로 이루어진 하의도는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 차 있어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큰 섬이다. 인구 1,655명에 893가구가 있다. 면적 16.11km2, 해안선 길이 32km에 이르는 하의도. 구전에 의하면 1380년경 나주 나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한다. 임란 이후로 제갈 씨가 자리를 잡았고, 그 이후 17세기 무렵에는 김씨, 박씨 등이 차차 들어왔다고 한다.
하의도와 주변 섬들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50.76km 떨어진 곳에 있는 하의도는 차도선으로 2시간 30분, 쾌속선은 1시간 10분 정도 달리면 하의도 웅곡 선착장에 도착한다. 차도선과 쾌속선은 각각 2회씩 다닌다. 그 동안 하의도 주민들의 숙원은 2~3시간 걸리는 뱃길을 1시간대로 줄이는 것이었다. 흑산도나 홍도는 국민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기 때문에 일찍부터 쾌속선이 다녔지만 하의도는 내놓을 만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장이 좋아 수산물이 풍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늘 뒷전으로 밀렸다.
그런데 지금은 쾌속선이 투입되어 하루에 2차례 다니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수지가 맞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하의도와 상 · 하태도(신의도)가 연도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 하의도 관문 웅곡포구에 들어서면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민들의 고깃배조차 전혀 눈에 띄지 않고 행정선과 하의면에 속한 부속섬을 이어주는 신해 11호가 대기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가 있는 신안 하의에서 신의를 잇는 삼도대교가 2017년 6월 26일 착공 7년여 만에 개통했다. 삼도대교는 길이 550m, 폭 14.5m의 사장교다.
봉도선착장. 과거 중선배로 고기를 잡던 시절에는 흑산도와 홍도에서 잡은 생선을 목포와 영산포로 가져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가야 했던 곳이 이곳 봉도항이였다. 지금은 모두 옛말이라는 듯 쓰러져가는 집이 두어 채 있을 뿐이다. 예전에 이곳에서는 다리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되었다. 바로 동쪽에 접한 신의도로 연결하는 연도교 공사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업이기도 했다.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잇는 다리 건설은 나라의 미래지향적인 사업이다. 섬의 크기나 인구수로 보아 진작 완성되어야 할 다리공사이자 연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왔지만 국도사업의 우선 순위에 밀려 2010년에야 공사가 시작되었다.
목포에서 2시간 이상 걸리는 하의도와 신의도와의 연도교가 완공되면 신의면 상태항에서 진도군 쉬미항까지의 소요시간이 30분으로 단축된다. 차도선을 이용하여 신의도와 하의도 관광 그리고 김대중 생가를 방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신안군의 북부섬에 집중됐던 연도교 사업이 이곳에서는 상당히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삼도대교
실제로 연륙과 연도교가 개통된 섬지역을 보면 관광 활성화는 물론 농수산물 물류비용 절감과 수산물 판매 급증, 섬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등 다양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늦었지만 이제 다리가 완성되어 여기서 바로 보이는 신의 하태도 기동마을과 연결되면 하의도에도 활성화의 기운이 감돌 것이다.
하의도에 머무르는 동안 아쉬움이 남았다. 근현대사의 중요한 두 가지 역할을 한 하의도에 대한 지원이나 발전이 생각보다 더디다는 것 때문이다.
대통령 고향마을 발전은 대통령에 따라 지역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마련이다. 대통령의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곳 하의도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대부분 시큰둥했다. 고향이라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는 곧 「노벨평화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전남도와 신안군은 85억여 원을 들여 노벨평화상 기념관과 전망대 등을 갖춰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과 함께 하의도 방문객수가 늘어난다면, 섬의 발전도 동반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의도 둘러보기
하의도는 홍도, 흑산도를 제외한 나머지 섬지역 중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다. 멀리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경제적으로 아주 낙후된 낙도라는 의미와 다른 하나는 이곳의 뱃길이 종착지라 더이상 경유할 섬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니 하의도는 신안군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소외된 섬 중 하나이며 해변산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바다와는 별 인연이 없이 농사와 염전이 주업인 섬이다. 집들의 모습을 보면, 1980년대 새마을사업때 지붕개량으로 이루어진 슬레이트 지붕이 대부분이다.
하의도 역시 신안군의 이웃섬들처럼 여러 섬으로 나누어진 섬이 간척공사로 연결된 섬이다. 푸른 바다 위에 외롭게 떠 있는 하의도 마을들은 대부분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섬 전체가 논밭으로 가득 차 있어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섬 하의도는 유인도 9개, 무인도 49개로 이루어져 있다. 하의도는 논, 밭, 임야, 염전 등으로 구분된다. 인구는 1,655명이고 893가구 중 대부분이 농업에, 일부만 어업에 종사한다.
하의면에서 면소재지 웅곡마을은 중 · 고등학교 1개소, 면사무소, 지서, 우체국, 농협, 보건소, 농협마트, 식당, 가게가 갖춰 있는 아담한 동네이다. 그러나 면소재지답지 않게 주위에 마을은 거의 보이지 않고 관공서 등이 집중되어 있다. 선착장 정면에는 대합실과 함께 깔끔하게 단장된 농협건물이 있다. 선착장 앞에 돌비석인 섬 표지석이 있는데, 대통령을 배출한 섬답게 문구가 특이하다. 영문과 한글로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태생지」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음각으로 새겨진 예서체 글씨가 돋보인다.
선착장 옆에는 주차장을 겸한 공간에 깃봉이 일렬로 가드레일에 만들어져 있고 낮은 가드레일에는 하의도를 비롯하여 개도 등 하의도에 속한 작은 섬들의 유래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다. 그 뒤 바닷가는 온통 갯벌이다. 주차장 한 쪽에는 다양한 어구들이 몰려 있고 전복 양식 도구를 만드는 공사도 하고 있어 좀 번잡했다.
선착장에서 나오면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은 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직진은 봉도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는 후광리와 대리로 연결된다. 그 중간에 나지막한 동산을 만들고 공원으로 조성한 공간이 보인다. 양쪽으로 철제 장미 터널을 만들어 들어갈 수 있도록 했으며 정면에는 두 개의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었다.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 2주년을 기하여 제주도민이 10월에 세운 동산이다.
돌하르방 좌대에 새겨진 안내문에 의하면, 2011년 10월 15일에 김대중 대통령 서거 제2주기를 맞아 제주도민추모위원회가 세운 동산이라 한다. 김 전대통령의 제주사랑에 대한 감사와 제주도민의 추모의지를 기리기 위한 순례단을 구성해 김대중 전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고, 그 자리에서 김 전대통령을 배출한 하의면민과의 우애증진을 위해 제주를 상징하는 돌하르방 2기를 하의도에 기증했던 것이다. 돌하르방은 2.5m 높이로, 무게는 3톤이나 된다. 돌하르방 좌대에는 각각 「다시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 「역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하의로인 37번 지방도를 따라 계속 가다보면 방조제가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간다. 도로 역시 갈림길. 직진하면 대리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후광리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대리마을로 가는 길 중간에 하의도 농민운동 기념관이 있다.
농민운동기념관
후광리 김대중 전대통령 생가 앞에는 바다를 막아 마련한 논과 소금밭이 있다. 생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원래는 섬이었다. 이름은 원후광. 그러던 것을 옆의 섬과 연결하면서 주변에 염전이 생겼다. 소금밭의 일부는 2003년 개펄체험장을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염벗, 염막 등 전통소금 생산방법인 「화염」 생산시설을 복원해놓았다. 천일염전시관 가는 길은 나무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양쪽에 염전을 낀 수로 위에 만들어진 다리다. 이 다리를 건너 전시관으로 간다. 전시관은 네 개의 동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전시관을 구성하고 있다.
소금전시관은 해방되던 1945년을 전후로 천일염 생산방식이 도입되면서 그 명맥이 사라진, 신안지역의 전통 소금 생산방식인 화염(火鹽)을 복원하고 재현하여 산 교육장으로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서 나오면 체험장이 나온다. 염밭과 함께 염막이 복원되어 있다. 전시관 북쪽으로 낮은 산이 있는데 역시 작은 섬이었던 곳으로 간척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 뒤로 방조제가 있는데 오른쪽 바다는 온통 갯벌이다. 갯벌 건너 보이는 섬이 ‘장병도’인데 물이 빠지면 장병도와 하의도 후광리 사이는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로 연결된다. 그래서인지 장병도는 행정구역상 후광3구로 되어 있다.
생가에서 방조제 끝으로 가면 서부일주도로인 해안도로가 있다. 흑산도의 해안도로와는 달리 이곳은 거의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이 도로를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섬이 개도. 임도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당두선착장이 나온다. 바로 능산도를 바라보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선착장과 마을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마을은 대리2구. 대리마을은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의도에서 가장 큰 동네라 하여 붙여진 마을로 큰몰, 큰동네라 불리어왔으며 대리 북쪽마을을 지칭한다. 당두선착장에서도 목포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하의도 대리마을
이 해안선을 따라가다 조그마한 모래해변을 만나게 된다. 앞에 두 개의 작은 섬이 막아서고 있다. 마치 방파제 역할을 하듯이. 하의도는 모래해변을 보기 힘든 섬인데 이곳이 유일한 모래해변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모래구미해수욕장. 길이 100m, 폭 80m의 소규모 해수욕장으로 리아스식 해안과 일몰이 아름답다고 한다. 물이 빠지면 모래해변 바로 앞의 작은 섬과 연결된다. 이곳에는 두 개의 작은 무인도가 있는데 항도(項島)와 소항도이다.
이 해수욕장 뒤로 마을이 있는데 바로 어은마을이다. 어은마을은 하의도 최초의 마을이다. 마을 앞에 둑을 쌓아 이루어진 동네라는 의미의 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언굴, 언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을이 까마귀가 엎드려 숨어 있는 형국이라 하여 어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피섬이라고 불리는 어은2구는 어은마을에서 피섬길을 따라 산을 넘어 남쪽으로 가면 피촌저수지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난을 피해 숨어 살 만한 은둔지로서 육지와 먼 섬과 같이 깊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피도, 피은이라고도 부른다.
모래구미해수욕장에서 조금 더 가면 작은세구미골이 나오고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세구미이다. 약간의 모래해변이 있으며 그 앞 해변을 끼고 해수욕객들을 위한 휴양시설이 보인다. 모래구미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대섬이 보인다. 섬 전체가 나무로 뒤덮인 작은 섬인데 방향을 바꾸어 바라보자 새로운 형상이 드러난다.
우뚝 솟은 코, 움푹 팬 눈, 머리카락이 달린 이마 등을 갖춘 틀림없는 얼굴형상이 나타난다. 바로 하의도를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들린다는 「큰 바위 얼굴」이다.
하의도 주민들이 때가 되면 큰 인물이 나타날 말이 전래되어오는 상징성을 믿고 있던 근거이기도 하다. 섬주민들은 하나같이 이 큰 바위 얼굴을 김대중 대통령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그런데 김 전대통령이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했던 지난 4월 이후 큰 바위 얼굴의 왼쪽 눈썹 부위가 떨어져나갔고, 현재는 사람 옆모습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 바위섬이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 큰 바위 얼굴을 배경으로 기념촬영했던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세워져 있다. 그 맞은편 언덕에 큰 바위 얼굴 안내판과 함께 정자로 된 전망대 겸 쉼터가 있다. 전망대 앞에는 석양의 큰 바위 얼굴 사진과 함께 항공에서 바라본 웅곡선착장 사진이 붙어 있다. 전망대에서 옆으로 바라다 보이는 큰 섬이 신도이다.
큰 바위 얼굴 섬
하의도 역사
하의도 농민운동 : 하의도는 우리나라 근 · 현대사에서 두번 주목받았다. 하나는 300여 년 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농민들의 항쟁으로 유명한 섬이다. 하의도에 여행을 갔다면 김 전대통령의 생가와 함께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이다.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에는 하의도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이 무려 370여 년 동안의 길고 긴 투쟁 끝에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제 땅을 탈환했던 기록이 전시돼 있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돼 근현대로 이어지는 하의도 농민운동은 지주의 횡포에 끈질기게 맞서 끝내 제 땅을 되찾고 만 최초의 농민운동이었다.
하의도의 토지분쟁의 첫 불씨는 16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14대 왕인 선조 시절, 왕의 맏딸 정명공주와 결혼한 부마(임금의 사위)홍주원에게 혼수품으로 하의 3도 땅 20결에 대해 홍씨의 4대손까지 세미를 받도록 한 것이 농지탈환운동의 불씨가 됐다. 당시 하의도의 땅 25만 9,000여 m2(1등급지 기준 7만 8,000여 평)를 하사했다. 그러나 하의도의 땅이 더 개간되자, 정명공주의 가문인 홍씨 일가는 당초 받은 땅의 6배가 넘는 164만 9,600여 m2(49만 9,000여 평)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료를 받아 챙겼다. 그러자 분쟁이 시작됐다. 격분한 하의도 주민들은 한양에 올라가 신문고를 두드리기도 했고 전라감사를 찾아가 하소연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대한제국 시기에 땅은 황실의 재산으로 편입됐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광복 이후에는 적산토지로 분류됐다. 그러는 와중에 소작료 지불을 거부하며 투쟁하던 농민들은 폭도로 몰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주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받았으나 6 · 25전쟁 발발로 헛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56년 정부가 일본인 소유로 돼 있던 땅을 평당 200원에 주민들에게 유상분배하면서 370여 년 동안의 길고 긴 싸움은 끝마무리됐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농민들이 겪은 수난과 고초의 기록이 기념관에 고스란히 전시돼 있다.
농민운동 기념관
김 전대통령은 이 농민운동은 단순한 소작쟁의가 아니라 자신들이 개간한 땅의 소유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항의였고 토지탈환운동이었다며 하의 3도 농업인들은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긴 세월 동안 빼앗긴 농지를 되찾기 위한 하의 3도민들의 고통과 인내의 세월은 수많은 선구자들의 희생을 통해 소유권 반환의 결실을 거두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9년 농민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던 것이다.
농민운동공적비
농민운동기념탑
하의도 인물
김대중 전 대통령 : 하의도가 우리나라 근 · 현대사에 기록될 만한 사실 중 또 하나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1921년에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 3학년인 1936년까지 이곳에 있던 초가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 전대통령이 태어난 후광마을은 광대리 마을 뒤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후광」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광2구는 생가에서 들판 너머 서쪽으로 보이는 마을로 소포마을이다. 소포리는 작은 도랑이 있어 작은 개라고도 불린다. 이곳에 있는 원래의 생가는 터만 남아 밭으로 변해 있고 고작해야 「대통령 고향집터」라는 푯말만 있어 생가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대신, 옆에 생가를 복원해두었다. 생가는 대지 7백46평에 18평의 6칸 접집으로 안채와 창고 1동, 화장실 1동 등의 부속채와 함께 복원돼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생가
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하의도 생가복원 사업은 대구지역 노인들의 정성 어린 성금기탁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맞아 하의도를 방문했던 대구 노인복지대학 노인회가 1백20만 원의 성금을 기탁함으로써 생가복원 작업의 불을 댕겼다는 것이다. 후광리 생가 옆에 위치한 49.5m2의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관은 지난해 서거 1주기를 맞아 문을 열었다. 추모관 입구 맞은편 중앙에 김 전 대통령 영정사진을 안치하고 좌우측 벽에는 고향방문시 큰 바위 얼굴 앞에서 찍은 사진을 비롯해 재임 전후의 활동사진을 걸어 생전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김대중 기념관과 청소년 수련관
후광리는 김대중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며 김대중 선생의 호는 자기의 마을이름을 따서 후광(後光)이라고 했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시골마을로 어떻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섬마을에서 큰 인물이 날 수 있었는지 모를 만큼 외지고 소외된 곳이라 하의도의 축복이자 신안군 넘어 우리나라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경남 거제도 출신이다. 지금은 거제대교로 인해 사실상 육지가 되었지만, 6 · 25 당시는 육지로부터 고립된 섬이었기 때문에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생겼던 것이 아니겠는가.
최경주와 양용은 골프선수 또한 스포츠 분야에서 최정상에 오른 이들이다. 이들 역시 섬에서 태어났다. 최경주 선수는 전라남도 완도 출신이고 양용은 선수는 제주도 출신으로 똑같이 섬 출신이며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골프를 배웠다. 그 외 바둑의 일인자인 비금도 출신의 이세돌, 안좌도 출신의 한국 추상화의 거장 김환기 화백, 민주당 대표를 지낸 한화갑 씨 등 실로 섬 출신들의 성공담은 끝이 없다.
김대중 선생은 1950년대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하의도에서 목포로 전학을 갔다. 바람에 의지하여 가는 풍선으로 다니던 시절이라 가고 오는 뱃길이 지금보다 얼마나 위험하고 지루했을까를 짐작해본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같은 날 제삿날인 경우가 여러 집 있고 과부가 많은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부친을 회고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
초등학교 때 뭍으로 유학 보낸 아버지의 결단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목포로 간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전기(轉機)였다. 실제로 학업을 위해 하의도를 떠나서 목포로 나간다는 것은 그 당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당시로서는 섬에서 도시로 유학하는 일이 학생 자신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이었고 부모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육지인 해남이나 강진에서 목포나 광주로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인 것이다.
섬이 키우는 섬사람 기질
섬에 태어나 바다와 싸우며 성장한 섬사람에게는 특별한 정서가 있다. 육지사람들이 갖출 수 없는 강인함으로 가슴에 사무친 정서가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섬사람들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도피할 곳이 없는 절박함 속에서 살아간다. 특히 풍랑주의보에 여객선이 1년이면 3달 정도 발이 묶이고 해마다 거대한 태풍을 몇 번씩 만나는데, 그때마다 부족한 전답과 배, 집과 선착장, 가두리와 전복 양식장 등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간다. 태풍이 지나가면 다 끝난 것 같아도 또 다시 잡초처럼 일어나 끈질기게 삶을 이어가는 것이 섬사람들의 기질이다.
신안군의 수많은 섬들의 갯벌바다를 땅으로 만들어온 간척의 역사도 그 가난했던 시절에 맨손으로 해내고야 말지 않았던가. 신안군 대부분의 섬들은 육지처럼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간척으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어떤 고난이 와도 섬사람들은 그 고난을 이기고 일어설 수밖에 없음을 섬생활을 통해 체득해온 것이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남자건 여자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활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김과 미역, 톳, 전복 양식도 할 뿐 아니라 농사도 짓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소모되고 고생을 많이 하지만, 그 덕분에 강인한 정신력과 함께 인내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육지사람에 비해 다양한 경험을 소화한 그들은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도시로 나가 성공해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졌기 때문에 섬 출신들이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핏속에는 개척정신이 남다르게 흐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복양식
섬 출신들 중에 하의도 출신 김대중 선생처럼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몇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태풍과 같은 큰 고난을 이긴 사람, 척박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보다 인생을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세상의 역사를 바꾼 수많은 섬사람이 있다. 그들은 인생의 벼랑끝에 서본 사람이다. 유럽을 재패한 나폴레옹도 코르시카 섬사람이다. 섬출신이 한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많은 것 역시 강인한 모험정신과 개척정신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김대중 선생 생가를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선착장 옆에 하의도 상여소리 노래비가 서 있다. 신안군의 해양 민속문화를 후세에 길이 전승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석의 형태는 기도하는 손과 섬을 나타내고, 하반부 3개의 기둥은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한다고 한다. 안내문에 의하면 하의도 상여소리는 섬지방 특유의 민속문화인 만가의 일종이며 상례의식에서 상여를 운반할 때 부르는 노래라 설명되어 있다.
망자의 명복을 빌면서 산 사람에게는 액이 들지 말고 복만 들기를 기원하는데, 이별의 슬픔과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도 담겨 있다. 지역에 따라 「상두가」, 「상부소리」라고도 하는데, 하의도 주민들은 사투리 발음에 따라 「생애소리」로 불리어왔다.
상여소리노래비
하의도 생애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