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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만1세
즉위
카를만은 슈바벤 왕 아달베르트1세의 장손이다. 아버지 아달베르트는 왕의 아들이었으나 주후 1333년에 칼을 놓고 산티아고 기사단에 들어갔고, 형 아달베르트는 1336년에 폐렴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카를만은 열한 살에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토스카나 여공 에르멘가르트 폰 글로가우이니, 그는 아비에게서는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하고 어미에게서 이탈리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람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거짓을 말할 줄 몰랐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한번 노하면 오래 갔고,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믿는 바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아내는 브란덴부르크공 '현명한' 로타르 우도넨의 장녀 클라라 우도넨이다. 사료에 따라 그녀를 게으르다 하기도 하고 부지런하다 하기도 하니, 아마 자기에게 이로운 일에만 부지런하였을 것이다.
1343년 6월, 아달베르트1세가 왕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늙은 왕은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8월 7일, 군사가 다 모이기 전에 왕이 자리에서 죽었다.
군대는 이미 모여 있었고, 왕은 없었다.
카를만이 열여덟에 왕관을 받았다. 함께 물려받은 것은 조부가 시작한 브뤼게 백작령 전쟁과, 들판에 서 있는 만 이천의 군사와, 아직 아무도 값을 매기지 못한 그 자신이었다.
8월, 제국의 계승 서열이 바뀌어 하로트링겐공 안셀름 에티코넨이 첫자리에 올랐다. 한 달 사이에 에티코넨 하나는 왕관을 쓰고 에티코넨 하나는 제관 앞에 섰으니, 이 가문이 왕가와 황가를 함께 넘보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그 하로트링겐공은 왕의 조부와 창을 겨눈 일도 있고 그 부름에 응한 일도 있는 사람이었다. 훗날 그 사람이 카를만의 사돈이 되고 그의 주군이 되리라는 것은 그때 아무도 몰랐다.
빌링엔과 니우포르트
1343년 10월, 빌링엔에서 첫 싸움이 있었다. 슈바벤군 만 이천 칠백 구십 하나가 이천 이백 십육과 마주쳤다. 저녁이 되었을 때 적진에서 걸어 나온 자가 없었다.
승전보를 들고 온 자가 왕에게 아뢰었다.
"조부께서 보셨더라면 기뻐하셨을 것이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조부께서는 이런 것을 승리라 부르지 않으셨다."
이듬해 정월, 니우포르트에서 두 번째 싸움이 있었다. 만 천 백 팔십 셋이 나갔다. 이천이 돌아왔다.
왕이 명부를 가져오게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하였다. 서기가 세 번 목이 쉬었고 초를 세 번 갈았다. 새벽에 이르러 명부가 끝나자 왕이 물었다.
"다 읽었느냐."
"다 읽었사옵니다."
"그러면 다시 읽어라."
그달에 플란더렌공 마르크바르트2세 폰 글로가우가 이겼다. 조부가 시작한 전쟁이 손자의 패배로 끝났다. 브뤼게는 글로가우의 것이 되었다.
같은 달, 왕은 옥에 갇혀 있던 전 브뤼게백 군터 에티코넨을 놓아주었다. 군터는 지난 대에 일족을 배반하고 사로잡힌 자였다. 그가 옥문을 나서며 옥리에게 물었다.
"새 왕이 몇이더냐."
"열여덟이옵니다."
군터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면 브뤼게는 스무 해쯤 편하겠구나."
십 년 뒤에 그 말이 틀렸음이 드러났으나, 군터는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가 없다.
슈비츠
1344년 3월, 왕이 슈비츠 여백 이다 알레라미치에게 백작령을 거두겠다고 통보하였다. 이다의 아들이 작센공 휘하의 첼레백을 먼저 물려받게 되어 있었으니, 그리되면 슈비츠가 작센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이다가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어느 법에 따라 거두시나이까."
왕이 답하였다.
"그대의 아들이 작센 사람이 되기 전에 거두는 것이다."
"제 아비가 삼대를 섬겼사옵니다."
"그러니 사대째는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백작령 하나를 되찾는 데 세 해를 썼다.
그 세 해 동안 동방에서 아나톨리아를 향한 이교도의 성전이 일어났다가 꺾였다. 왕은 가지 못하였다. 그가 믿는 바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아는 자들이 이를 두고 아까워하였으나, 슈바벤의 군사는 그때 알프스 골짜기의 성 하나를 두고 있었다. 사람이 큰일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작은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1347년 정월에 반란이 진압되었다. 이다가 끌려와 작위를 잃을 때 왕이 물었다.
"세 해를 끌었다. 무엇을 얻었느냐."
이다가 답하였다.
"전하께서도 세 해를 쓰셨나이다."
왕이 그를 죽이지 않고 내보냈다. 슈비츠는 작센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같은 달, 왕은 유대인들에게 빌린 삼백오십 두캇을 갚았다. 이 숫자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하르가니
1345년 5월, 왕이 만드 부족 출신의 하르가니 쿨름바이드를 대장군에 앉혔다. 만드는 먼 남쪽의 부족이요 그는 슈바벤에 연고가 없는 자였다. 제후들이 반대하였다.
"이 땅에서 나지 않은 자에게 이 땅의 군사를 맡기실 수 없나이다."
왕이 말하였다.
"이 땅에서 난 자들에게 맡겼더니 니우포르트에서 이천이 돌아왔다."
그해 유월과 칠월에 연이어 압승이 있었다. 1348년 정월, 왕이 하르가니에게 말 관리인 자리를 내렸다. 제후들이 다시 말이 없었다.
필리베르트의 눈
1343년에 왕위에 오를 때 카를만의 후계자는 숙부 필리베르트 에티코넨이었다. 상트갈렌백이며, 성서에 통달하여 사람들이 그의 강론을 들으러 먼 곳에서 찾아왔다. 얼굴에는 오래된 칼자국이 있었고, 혼자 있을 때면 벽을 향해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를 성인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고 미친 사람이라 부르는 자가 있었다.
1346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베르톨트 샤테누아가 필리베르트의 콜로네이아 소유권을 명분 삼아 비잔티움에 선전포고하였다. 한 사람의 권리를 위하여 제국이 움직인 것이다.
떠나기 전날 밤, 시종이 방을 지나다가 숙부가 벽을 향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필리베르트가 조카에게 하직하며 말하였다.
"동방에는 사도들이 걸어 다닌 길이 있다. 나는 그 길을 밟아 보고 싶었다."
왕이 말하였다.
"전쟁길이옵니다."
필리베르트가 답하였다.
"사도들도 전쟁길로 갔다. 다만 저들이 든 것이 칼이 아니었을 뿐이다."
제국이 졌다.
1349년 6월, 카를만이 베르톨트 대제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다음 달인 7월, 항복의 조건으로 필리베르트가 비잔티움의 감옥에 넘겨졌다. 조카가 제국의 인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숙부가 제국의 값으로 팔린 셈이다.
9월, 비잔티움이 조건을 내걸었다. 두 눈을 내놓으면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 필리베르트가 응하였다.
그가 슈바벤으로 돌아와 조카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이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왕이 물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필리베르트가 답하였다.
"사도 바울도 다마스쿠스 길에서 눈을 잃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얻었다. 나는 사흘을 더 기다려 보겠다."
그리고 다섯 달을 기다렸다. 1350년 2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다만 그가 후계자의 자리를 잃은 것은 눈을 잃기 전이었다. 1348년 2월에 왕의 장남 헤리베르트가 태어났으므로, 숙부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비잔티움은 값을 매길 것이 눈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서 눈을 받아 간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1349년 10월, 어머니 에르멘가르트 폰 글로가우가 죽었다. 왕은 토스카나 공작령과 피렌체, 시에나, 루카를 물려받았다. 그가 태어난 이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 중 가장 큰 것이었고, 마지막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1358년 6월, 아달베르트 에티코넨이 구호기사단의 대기사단장이 되었다. 왕이 축하의 사자를 보냈다. 대기사단장이 답하기를,
"그대의 왕국을 위해 기도하겠다. 다만 나를 아비라 부르지 말라. 나는 이미 다른 아버지를 섬긴다."
왕은 이 말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부자가 서로 만났다는 기록은 어느 사료에도 없다.
왕비의 셈
1352년 3월, 왕이 장인 브란덴부르크공 로타르3세 우도넨의 전쟁에 그의 편으로 나섰다. 처음에 왕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왕비 클라라가 청하니 왕이 말하였다.
"북쪽의 백작령 하나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왕비가 물었다.
"전하께서 브뤼게를 다시 치실 때, 북쪽에서 누가 전하 편에 서겠나이까."
왕이 답하지 않았다. 왕비가 다시 말하였다.
"오늘 아버지께 군사를 빌려주시면, 그날 아버지께서 군사를 갚으실 것이옵니다."
그해에 슈바벤 군사가 브란덴부르크로 갔다.
1353년 4월에 로타르3세가 수사 백작령을 얻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왕이 브뤼게를 향해 선전포고하였다.
사료를 모으며 살펴보니, 이 왕비를 두고 게으르다 적은 기록과 부지런하다 적은 기록이 나란히 있다. 두 기록이 모두 옳을 것이다. 사람은 남의 일에는 게으르고 자기 집 일에는 부지런한 법이니, 왕비에게는 브란덴부르크와 슈바벤이 모두 자기 집이었다.
브뤼게, 십 년 뒤
1353년 12월, 왕이 마르크바르트2세 폰 글로가우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브뤼게에 대한 정당한 소유권이었다. 곁에서 아뢰기를,
"십 년 전 일이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러하다. 십 년을 기다렸다."
이듬해 정월,
일족인 프로방스공 레오폴트1세가 마르크바르트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폭군이라 불렀다. 에티코넨이 에티코넨을 치는 일은 이 가문에서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물었다.
"그대도 에티코넨이 아닌가."
레오폴트가 답하였다.
"그러하다. 그러니 네가 브뤼게까지 가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사자가 돌아와 이 말을 전하니 왕이 말하였다.
"저 사람의 대답이 옳다. 다만 나는 저 사람이 아니다."
7월에 나사우가 떨어졌다. 9월, 베산콘에서 큰 회전이 있었다. 이만 이천 팔백 육십 여섯이 만 사천 육백 육십 하나와 부딪쳤다. 물러난 뒤 슈바벤 쪽에 만 팔천 오백 팔십이 남았고 저쪽에 이천 팔백 칠십 둘이 남았다. 하르가니 쿨름바이드가 중군을 몰았고, 용병단장 자코이와 에란문이 양익을 맡았다. 만드 부족의 사내가 슈바벤의 군사를 몰아 부르군트의 들판을 갈아엎은 것이다.
12월에 슬로이스 남작령이 떨어지고 마르크바르트의 손자가 사로잡혔다. 포로의 이름을 아뢰니 필리베르트라 하였다. 왕이 오래 말이 없다가 명하였다.
"눈은 건드리지 말라."
1355년 정월에 브뤼게 남작령이 떨어지고, 5월에 게라에서 이겼다.
그달로 전쟁이 끝났다. 브뤼게 백작령이 마르크바르트2세의 손에서 카를만의 손으로 넘어갔다. 열여덟에 잃은 것을 서른에 되찾았다.
같은 달, 왕이 하르가니 쿨름바이드에게 토스카나 공작령을 내렸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이탈리아를, 남쪽 부족에서 온 사내에게 준 것이다. 제후들 중에 그날 말을 꺼낸 자가 없었다.
같은 달, 왕이 숙조부 테오도릭 에티코넨에게 말레 남작령을 내렸다. 테오도릭은 조부 아달베르트1세가 늘그막에 후처에게서 얻은 막내이니, 항렬로는 왕의 할아버지뻘이요 나이로는 왕보다 열세 살이 아래였다. 이듬해 초에 성년이 되어 서른한 살의 쿠니군데 폰 안홀트에게 장가들었다. 왕이 남작령을 내리며 말하였다.
"항렬은 숙조부께서 위이시니 절은 내가 하겠다. 땅은 내가 위이니 봉은 내가 주겠다."
이 가문에서 항렬과 힘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을 사람들이 이때부터 이야기하였다.
원한을 덮는 값
1357년 10월, 왕이 차남 로타르를 마르크바르트2세의 외손녀 게르베가 폰 글로가우와 약혼시켰다. 곁에서 아뢰기를,
"이태 전에 그 조부에게서 브뤼게를 빼앗으셨사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러니 그 손녀를 데려오는 것이다."
"원한이 가시겠나이까."
"가시지 않는다. 다만 덮인다. 원한은 사람으로 덮는 것이 가장 싸다. 군사로 덮으면 해마다 값을 치러야 한다."
이보다 앞서 1351년에 니더바이에른백 마티아스 에티코넨이 죽어 그 외동딸이 상속하니, 그 남편의 가문 사람이 물려받게 되어 니더바이에른의 에티코넨 계열이 끊길 형세가 되었다. 왕은 이를 막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왕이 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때 그의 손에는 브뤼게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1355년 6월, 왕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하고 먼 친척 노르트가우백 카를 에티코넨에게 섭정을 맡겼다. 8월에 돌아왔다.
두 달이다. 성묘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기에는 짧은 날수이며, 우리 형제들 중 누구도 그가 성지에 닿았다는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배가 어느 항구에서 뱃머리를 돌렸는지, 왕이 무엇을 보고 돌아섰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해 11월에 왕비가 잉태하였고 이듬해 6월에 차남 로타르가 났다.
소피에
왕의 장녀 소피에는 1343년, 곧 그가 왕관을 쓴 해에 났다. 1352년 정월에 하로트링겐공의 장손이자 후계자인 안셀름 에티코넨과 약혼하였으니 그때 아홉 살이었다. 1359년 3월에 성년이 되어 혼례를 올렸다.
혼례 전날 밤에 소피에가 물었다.
"제가 어디로 가는 것이옵니까."
왕이 말하였다.
"하로트링겐이다."
"거기가 어떤 곳이옵니까."
"제관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이다."
소피에가 다시 물었다.
"한 걸음이면 가까운 것이옵니까, 먼 것이옵니까."
왕이 답하지 않았다. 두 해 뒤에 그 한 걸음이 없어졌다.
이교도
1358년, 왕이 튀링겐공 안드레아스 폰 글로가우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명분은 일족 헬렌 에티코넨의 괴팅겐 소유권이었다. 그해 11월 도르트문트에서 크게 이기고 이듬해 10월 에르푸르트를 함락하였으며, 1360년 5월에 이겼다.
헬렌이 괴팅겐백이 되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왕은 친족에게 땅을 주는 방식으로 사람을 얻었다.
1360년 7월, 사사나 십자군이 일어났다. 상대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한 아즈텍 제국이었다. 왕이 참전하였다.
이듬해 2월 헤이버링에서, 3월 토튼햄에서 크게 이겼다.
그달에 왕이 사로잡은 이교도들을 사람들 앞에서 처형하게 하였다. 곁에서 아뢰기를,
"저들이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왕이 말하였다.
"저들은 제단에서 죽이고 우리는 법으로 죽인다."
넉 달 뒤인 1361년 7월, 뷔르템베르크백 프레데리가 아즈텍의 제단에 산 채로 바쳐졌다는 소식이 왔다. 왕은 이 소식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돈과 재상
1361년 10월, 황제 베르톨트 샤테누아가 후사 없이 붕어하였다. 제위는 하로트링겐공 안셀름 에티코넨에게 돌아갔다. 에티코넨의 장계가 제관을 쓴 것이니, 이 가문이 노르트가우의 작은 백작에서 일어난 지 삼백 년 만의 일이었다.
새 황제는 카를만의 사돈이다. 1352년 정월에 그 장손 안셀름과 왕의 장녀 소피에가 약혼하고 1359년에 혼례를 올렸으니, 왕의 딸이 그 집 며느리요 그 집 장손이 왕의 사위다.
이 사람의 내력을 적어 둘 필요가 있다. 왕의 조부 아달베르트1세가 프로방스를 치려 하였을 때, 하로트링겐공 안셀름은 프로방스공 레오폴트 에티코넨과 손을 잡고 그 앞을 막아섰다. 뒷날 아달베르트1세가 일족의 반란에 몰려 도움을 청하니, 안셀름은 지난 결전을 묻지 않고 군사를 몰아 그 편에 섰다. 곧 이 사람은 카를만의 집안과 한 번 싸웠고 한 번 구해 준 사람이다.
11월, 새 황제가 카를만을 재상에 임명하였다. 인을 내리며 안셀름1세가 말하였다.
"그대의 조부와 나는 프로방스에서 서로 창을 겨눈 일이 있다."
카를만이 말하였다.
"뒤에 조부께서 부르시니 오셨다고 들었사옵니다."
"그러하다. 겨눈 일도 있고 응한 일도 있다."
"오늘은 어느 쪽이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오늘은 그대가 무릎을 꿇는 쪽이다."
일곱 해 전 브뤼게 싸움에서 마르크바르트의 편에 서서 왕을 막아섰던 프로방스공 레오폴트1세가, 바로 그 옛날 안셀름과 손을 잡았던 자다. 이 가문에서는 어제의 적과 오늘의 주군이 같은 편에 서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가 평생 두 황제를 섬겼다. 첫 번째 황제는 그의 숙부에게서 눈을 가져갔고, 두 번째 황제는 그의 딸을 데려갔다. 그는 제관을 쓰지 못하였으나 제관을 자기 집안에 들여놓았다.
이르멜트루드
같은 달, 왕이 이르멜트루드라는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 이듬해 8월에 딸이 났다. 왕은 그 아이를 이르멜트루드 폰 발덴스타인이라 이름 짓고, 자기 자식임을 공공연히 밝혔다.
왕비 클라라가 물었다.
"감추실 수도 있었사옵니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감출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브뤼게를 십 년이나 기다렸겠는가."
왕비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딸은 훗날 아라곤의 사생아왕 페르난도에게 시집갔으니, 왕이 감추지 않은 것이 결국 한 집안을 얻는 일이 되었다. 그가 정직하였던 것인지 셈이 밝았던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이백팔십육 두캇
1362년 4월, 왕이 상부르군트공 미카엘2세 폰 뉴엔부르크에게 선전포고하였다. 일족 고첼로 에티코넨의 베른 소유권이 명분이었다.
9월과 10월에 세 번 싸워 세 번 이겼다. 중군은 호엔베르크 시장 군트람이, 좌익은 비엔나 사중백 람베르트 폰 노르트가우가, 우익은 트렌트의 군주주교 필리베르트가 맡았다.
12월, 왕이 제국과 비잔티움 사이의 싸움에 나섰다가 비잔티움 황제 요안네스에게 사로잡혔다.
이듬해 정월, 이백팔십육 두캇을 내고 풀려났다.
값을 듣고 왕이 웃었다고 한다. 곁의 신하가 무엇이 우스우냐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숙부께서는 두 눈을 내고 나오셨다."
십오 년 전 이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갚은 빚이 삼백오십 두캇이었다. 곧 슈바벤 왕의 몸값은 슈바벤 왕국의 빚보다 쌌다. 비잔티움 사람들이 값을 잘못 매긴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아는 값이 원래 그러하였는지는 이 붓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죽음
1363년 3월, 왕이 안셀름1세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비잔티움의 옥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이었다. 사돈이 인을 다시 내리며 물었다.
"몸이 성치 않으시다 들었소."
왕이 말하였다.
"돈으로 나온 몸이니 아직 성하옵니다."
같은 달에 병이 났다.
석 달을 누웠다. 4월에 의원들이 물러갔고, 5월에 왕이 성사를 받았다. 그동안 브뤼게에서도 토스카나에서도 소식이 오지 않았다. 왕이 되찾은 것들은 모두 조용하였다. 6월에 이르러 장남 헤리베르트를 불렀다. 아들은 열다섯이었다.
왕이 물었다.
"브뤼게가 어디 있느냐."
"북쪽이옵니다."
"누구의 것이냐."
"전하의 것이옵니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달에 죽었다. 향년 서른여덟이었다. 헤리베르트가 열다섯의 나이로 슈바벤 왕국과 그 부속령을 이었으니, 그의 아버지가 물려받은 나이보다 세 살이 어렸다.
왕은 즉위할 때 만 이천의 군사를 물려받았고, 죽을 때 아들에게 왕국 하나와 이탈리아의 절반과 황제의 인척 자리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열다섯이었고, 왕국은 열다섯 살이 지키기에 너무 넓었다. 슈타이어마르크백 볼프람 에티코넨이 섭정을 맡았다.
장례 때 사람들이 왕의 스무 해를 헤아렸다. 백작령 하나를 얻는 데 세 해, 브뤼게를 되찾는 데 열두 해, 제국의 인을 두 번 받았고, 성지에는 닿지 못하였으며, 두 황제를 섬겼고 그중 하나는 그의 사돈이자 한때 그의 조부와 창을 겨눈 사람이었다. 그가 시작한 것 중에 끝을 보지 못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가 시작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권13 소평
수도원장이 이르되, 카를만은 물려받은 것으로 시작하여 물려주는 것으로 끝난 사람이다. 조부의 군대를 받아 조부의 전쟁을 잃었고, 어미의 땅을 받아 남에게 주었으며, 아비에게서는 받은 것이 없어 아들에게 아비 노릇을 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다.
그가 두 눈으로 값을 치른 숙부를 보았고, 이백팔십육 두캇으로 값을 치른 자기를 보았다. 사람의 값이란 그가 가진 것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잡은 자의 셈으로 정해지는 것이니, 비잔티움 사람들은 눈먼 성직자에게서 눈을 가져가고 왕에게서는 돈을 가져갔다. 저들이 무엇을 더 귀하게 여겼는지는 저들만이 알 것이다.
상세한 논의는 권14를 마친 뒤 상권의 논찬에서 아울러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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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벤공 때와 다르게 왜이렇게 길어졌느냐는 항의(?)가 나올 지 모르겠지만,
제 탓이 아니라 ai 탓입니다. 본인이 너무 짧다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예상보다 2~3회 더 나올 것 같네요.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감사합니다.
첫댓글 재테크 노하우 게시판에 크킹 연재가? 하고 눌러보니 우선 초기자본으로 작위와 영지가 필요하겠군요. ㅋㅋㅋㅋ
시조인 에티호가 성인으로 공경받는다고 하는데, 역시 가문에 금칠하는 데는 이만한 것도 없는 듯...
글로 게시판을 정복하면서 따로 경계를 만들고 싶을 정도가 되면 총리께 충성서약을 하고 봉지를 수여받을 수 있습니다(?)
게시글과 상관없는 게시판 이름 짓는게 하나의 소소한 재미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ㅋㅋ(..)
@통장 Swear Fealty
Land is Goo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