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집 이야기에 대하여 어느분이 쓴 글입니다.
진한(신라의 전신) 6부촌 중 하나였던 돌산고허촌의 대인 소벌도리를 득성조(得姓祖)로 하는 경주 최씨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천하제일 문장가로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친 고운 최치원(857∼?)을 시조로 한다. 고운의 17대 손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이 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의 가암촌(佳巖村)에 정착하면서 가암파의 파조가 된다.
최부자집이 부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은 진립의 부친 신보(1531∼1577년)가 이조리에 살고 있는 참봉 황임종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던 황 참봉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대에서 큰 부자였던 처가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후 부인 황씨가 죽자 인근의 강씨를 계실(繼室)로 들였는데, 강씨 장인 또한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후사 없이 죽어 버렸다. 진립은 그쪽 처가 재산까지 모조리 물려받아 창졸간 거부가 되어 버렸다는 가문 내력이다.
이렇게 마련된 종자돈은 진립의 후손 동량-국선-의기를 거치면서 만석꾼의 부를 이루게 되는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후일 기영(1768∼1825)이 주위 형제와 사촌들의 시기, 해코지를 견디다 못해 현 교동 69번지로 이사 오면서 세칭 교촌파의 파조가 되는 것이다. 인근에 계림향교가 있어 교동 또는 교촌으로 불린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 최부자집은 바로 이 교촌파다.
기영-세린-만희-현식으로 만석꾼 지위를 탄탄하게 누려오던 최부자집은 고운의 28세손 준(浚·1884∼1970)대에 이르러 모든 기득권을 홀가분히 털어 버린다. 일제 강점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댔고, 이때 휘청해진 나머지 재산은 광복 이후 육영사업에 미련 없이 내놓는다.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과 청구대학 창설에 들어간 것이다. 가문 대대로 수집된 8900여 권의 고서도 함께 기증했다. 영남대에서는 그의 호인 문파(汶坡)를 따서 ‘문파문고’라 이름 지어 뜻을 기리고 있다.
첫댓글 되는 집은 이래저래 재산이 막 들어오네요. 잘 보았습니다.
암행어사님, 좋은 글 잘보았습니다.
<참고>8대부자 祈永 대에 사촌과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문제가 발생한 것은 외아들이었던 6대부자가 딸만 하나 있어서 4촌의 아들을 양자(7대부자)로 삼는데, 7대에서 8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가의 형제,사촌간에 알력이 발생한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