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5장 24-34절
설교제목 : 뒤바뀐 기존 문법
비워낼 수 있는 지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붉게 물든 단풍과 노란 은행나무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겨울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빛깔로 물들인 후,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자연 앞에서 자기 비움을 배우게 됩니다. 다시 새롭게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맺기 위해, 그리고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자신을 비워내는 지혜를 잘 알아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이 세계와 우리 사회에 드리운 적대감은 나의 생각 또는 자신의 진영과 맞지 않으면, 적으로 규정하고 온갖 부정적 투사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온갖 비방하는 소리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또다시 지난 과오를 반복하는 국가권력의 형태는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권력충동은 인간의 근본 욕망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사로잡으면 인간은 한 마리 짐승처럼 폭력적이고 무자비함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내연녀가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길 거절하자, 야수의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한 장교의 폭력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권력욕은 사랑도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폭력성을 야기합니다. 이 가을 우리의 영혼이 더욱 새로워지기 위해 다시 비워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발뒤꿈치를 잡는 자
이삭의 기도를 통하여 아내 리브가는 쌍둥이를 임신합니다. 달이 차서 쌍둥이를 출산하였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여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습니다(25). 그리고 동생이 이어서 나왔는데, 손으로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지었습니다. 야곱의 뜻은 관주에 보면, ‘발뒤꿈치를 잡다’, 즉 ‘속이다’를 뜻하는 ‘야아케브’에서 온 말입니다. 출생시에 특유의 성향을 잘 드러냅니다. 야곱의 이름 속에서 전형적인 인간 삶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뒷발꿈치를 부여잡고서라도 올라서려는 야곱의 인격적인 면모는 전반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전형적인 패턴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대에서 자신의 삶을 챙취하기 위해 투쟁하며 속여서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것을 확보하려는 것은 열등한 조건에 있는 자들의 강한 무의식적 충동입니다. 그러나 이런 발뒤꿈치를 잡듯 교묘하게 속이며 자신의 소유와 권력을 탐하려는 속성이 지나치게 지배적이고, 이런 특성이 압도하게 되면, 가족공동체는 물론이고, 집단 공동체에 교묘하고 교활하게 확산되고, 사회전반은 불화하게 되고, 거짓이 진실 둔갑하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약삭빠르고 교활하고, 사기꾼적 특성을 지닌 야곱이 얼마나 도처에 깔려있는지 우리는 뉴스보도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며 사기적인 특성이 저 밖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야곱이란 인물은 과거의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전형이기 때문에, 내 안에 생생하게 꿈틀거리며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 이런 속이고 교활한 측면에 당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런 측면에 갈고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발뒤꿈치를 잡으며 살아야만 하는 세상 한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경쟁을 하면서, 누군가의 발뒤꿈치를 잡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해서 사기적인 특성을 외부로 실행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일생동안 경험했던 삶의 내용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속이려하는 자가 속임을 당하였고,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인생 중반을 넘어서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와 살기
에서는 자라서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았습니다. 에서는 붉고 털이 많은 것으로 볼 때, 다혈질이며, 남성적 힘을 자랑하고, 성격이 급하고, 직설적이며, 외향적이며 목표지향적인 특성을 지닌 성향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라서 주로 집에 살았다(27)는 것을 고려할 때, 야곱은 내향적이고 다소 소극적이며, 모험을 즐기는 성향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 맛을 보며 에서를 사랑하였고, 야곱은 집에서 늘 머물며 어머니 곁에 있었기 때문에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기 다른 자식을 편애하면서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아픈 손가락이지만, 더 아프고 애정이 가는 자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편애는 자식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다툼을 초래하기 일쑤입니다. 똑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는 형제, 자매, 남매지간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애정과 소유를 차지하기 위한 무의식적 세력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차별이나 편애의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의 가족 내에서는 공공연히 이런 편애가 드러난 것입니다. 장자권두고 에서와 야곱, 이 형제간에 원수지간으로 살아간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다른 구도에서 야곱과 에서는 우리 안의 우월하고 열등한 태도 및 기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의 그림자는 야곱이고, 야곱의 그림자는 에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대극적 그림자를 인식하고 동화시키려는 노력은 우리의 인생 전반에 중요한 과제입니다. 야곱은 교묘하게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사냥하고 들에서 돌아와 허기진 에서에게 죽을 주면서 맏아들의 권리, 장자권을 팔라고 합니다. 성질이 급한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장자의 권리가 무엇인지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붉은 죽 한 그릇에 팔아넘깁니다. 야곱은 이렇게 교묘하게 형으로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장자의 권리를 헐값에 샀지만, 아버지의 재산은 전혀 소유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일생동안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친 삶을 몸으로 살아내며, 외적 삶의 방식을 가지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자신의 소유를 확장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열등한 그림자를 동화하면서 외적 삶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낸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형의 장자권을 향한 충동은 오히려 그의 삶을 이스라엘의 시조의 반열로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은 자기실현, 개성화를 향한 왕도입니다. 내 안에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운명과 소명의 길을 열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인식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투사의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투사는 내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무의식적 인식 방식입니다. 내 안에 있는데 마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무의식적 기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나의 부정적인 또는 긍정적인 감정과 정서를 건드리는 외부에 있는 인격은 사실은 내 안에 있는 인격의 일부입니다. 주는 것 없이 싫고, 짜증나고, 상대에게서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를 보면 부러워하거나 우러러보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런 투사가 일어나는 것을 잘 목격하면 나의 그림자의 인격을 잘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 안으로 다시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대인관계의 적응력이 높아지고, 건강한 유대를 유연하게 지니며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그림자의 인격은 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림자는 꿈에서 자신과 동일한 성을 가진,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인격의 특성을 알아차리고 그 그림자 인격을 동화하려고 노력하면 인격의 규모는 확장되고, 그것은 전체성을 이루는 여정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그림자가 있으신가요? 그 그림자를 친구삼고 그림자를 잘 동화하여 인격의 확장은 물론 자기실현의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뒤바뀐 기존문법
결국 에서는 야곱의 말대로 맏아들의 권리를 판다고 맹세하며 야곱이 준 죽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이렇게 부연 설명합니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34)”
맏아들의 권리는 당시 가장적인 세계에서 반드시 장자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은 기존문법을 뒤바꾸고, 실제로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고, 야곱은 나중에 그 이름이 바뀌어 이스라엘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조상의 가계의 적통 계승자이자 12지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기존의 타고난 운명과 기존의 문법적 구조적 체계조차 바꾸어 놓습니다. 이런 야곱이야말로 정해진 운명과 정해진 문법을 뒤바꾸어 새롭게 변경될 수 있는 인격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운명은 정해지지만, 그 삶으로 변환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정신의 법칙에도 유효합니다. 정신은 일종의 상대적으로 폐쇄 시스템이라는 말을 합니다. 변하지 않은 불변의 특성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입니다. 그렇기에 정재진 질서와 균형이 깨어지고 새로운 변환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질문해야 합니다. 가치를 알고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해하였고, 에서는 가볍게 여겼습니다. 맏아들이 받을 권리는 단순히 물질적 재산 뿐 아니라 정신적 계승임을 야곱은 포착한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것은 중요하게 적용됩니다. 나는 정말 중요하고 결정적인 가치를 알고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나를 헌신할 수 있느냐입니다. 당장의 배고픔을 위해 조급해지면 중대한 가치를 놓치고 맙니다. 당장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은 중대한 가치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먹고 즐기며 충동적으로 살다 보면, 자신에게 부여된 중대한 가치를 상실하며, 오히려 삶의 언저리에서 배회하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지행동에서는 이를 지연욕구라고 붙이는데,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습니다. 나에게 객관적으로 중대한 가치를 통찰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차리면, 우리는 그것에 헌신하라 수 있고, 그 가치가 자신의 미래를 변환시켜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곱이 장자권의 가치를 온전히 알아차리고 그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바꾸어간 것처럼, 나에게 중요한 가치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헌신하여 나의 미래를 바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