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럼 2005.9.16.금
전주시 금상동의 회안대군 묘소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 법수뫼 마을에는 태조 이성계의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바로 위형님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묘소가 있다.
당초 회안대군과 전주와는 아무 연고가 없었다. 회안대군이 전주에 살다가 이곳에 묻힌 후 그 자손들이 대대로 터를 내린 것은 왕자의 난 때문이다.
이성계는 전처인 한씨 소생에서 여섯 형제, 후처 강씨(康씨) 소생에서 두 형제 등 모두 여덟 아들을 두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 여덟 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
그러자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불만을 품고 이성계의 후처 소생인 두 아들을 모두 죽인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그 후 전처 소생이자 둘째 아들인 방과가 세자가 되어 제2대 임금인 정종이 된다. 그러나 정종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임금 자리를 이어야 했다. 이 자리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바로 넷째인 방간과 다섯째인 방원이었다.
두 형제의 권력 다툼은 정종 2년인 1400년 드디어 무력 충돌로 나타난다. 이 싸움에서 형 방간이 동생 방원에게 패하여 사로잡힌다. 이것이 2차 왕자의 난이다.
회안대군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사면되어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된다. 얼마 후 회안대군은 조선의 풍패지향인 전주로 옮겨 살 것을 허락받고 이곳으로 옮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태종도 나이가 들어 아들인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그러자 오래 전에 귀양을 보낸 형 회안대군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태종은 형의 귀양을 풀어주고 한양으로 올라오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를 거절한 회안대군은 태종이 재차 올라오라고 하자 병중의 몸으로 상경한다. 그러나 회안대군은 도중에 은진 땅에서 병사한다.
이때가 1420년 회안대군의 나이 57세, 귀양길에 오른 지 20년의 세월이 지난 터였다.
회안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국장의 예우를 지내도록 하고 지관을 불러 길지를 택하도록 했다.
태종이 세 사람의 지관을 보내 묘소의 자리를 잡게 했다. 묏자리를 정한 지관들은 한양으로 돌아가 태종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태종이 <어떤 자리더냐>고 묻자 지관이 <대대로 군왕이 나올 자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태종이 깜짝 놀라면서 <회안의 자손이 대대로 군왕이 된다면 내 자손은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라며 다시 전주로 내려가 지맥을 자르라고 했다.
지관들은 전주에 내려와 맥을 자르고 뜸을 떴다. 그 자리가 자그마치 수십 군데였다.
지관들이 다시 상경하여 태종에게 보고하기를 <이제는 회안대군의 자손들이 대대로 호미 자루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그때서야 안도했다.
그로부터 거의 600년이 다 된 지금도 뜸자리와 맥을 자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1, 2차 왕자의 난은 왕위 쟁탈 때문에 일어난 골육상잔이다. 그러나 지맥을 자른 것은 왕권 유지를 위한 <죽은 자와의 골육상잔>이었다.
최근 회안대군의 묘소 인근에 노인시설 건축이 허가되자 종친회가 들고 일어났다. 혈과 맥이 끊어진다며 건축주를 상대로 자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종친회측은 새로 들어설 노인시설 위치는 회안대군의 분묘와 600미터 직선거리에 있는 고양이 바위 (일명 괭이바위)간의 혈과 맥을 끊는 위치라고 주장하면서 이의 철회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해당 부지를 종친회에 팔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회안대군의 묘소는 전북도에 문화재로 지정해주도록 요구해 현재 계류 중에 있다.
회안대군은 살아서는 동생과의 권력 쟁탈에서 패해 평생 회한(悔恨)을 안고 유배지에서 살았다. 죽은 뒤에는 자신이 누워있는 묘소의 지맥이 끊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또다시 회한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 잘려나간 지맥을 지키기 위해 후손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편할 날이 없는 것 같다.
( 정복규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