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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 · 정현숙
아버지와 부부와 딸 둘, 그리고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펼쳐진
오광선(吳光鮮)-정현숙(鄭賢淑) 부부의 40여년에 걸친 항일 독립운동사
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 독립전쟁에 투신한 오광선과 정현숙. 독립장 1962 · 애족장 1995
1. 의병의 아들로 민족교육을 전수받다
아버지와 부부와 딸 둘, 그리고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펼쳐진 오광선(吳光鮮)-정현숙(鄭賢淑) 부부의 40여년에 걸친 항일 독립운동사는 사실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사이자 살아 있는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오광선의 초명은 성묵(性黙)으로 1896년 5월 13일 용인 원삼면 죽능리 어현(일명 느리재)에서 아버지 오인수(吳寅秀, 1867~1935)와 어머니 이남천(李南天, 1872~1957)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호군공(護軍公) 오희보(吳希保)의 14대손이다. 형제는 4남매이다.
부친 오인수는 18세부터 사냥을 시작해 용인 · 안성 · 여주 일대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고 한다. 인근 포수들의 친목모임인 화포계(火砲契)에서 매년 1등을 차지해 명포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여름에는 강원도까지 원장을 다니며 사냥을 했다. 사냥으로 전국을 떠도는 바람에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29세에 첫 아들 광선을 얻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오인수는 장남 오광선을 같은 마을출신이며 일찍이 서울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꾀하고 있던 여준(呂準, 1862~1932) 선생이 고향 죽릉리에 세운 삼악(三岳)학교에 다니도록 했다.
삼악학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여준 선생이 평양의 오산(五山)학교에 교원으로 일하면서 이를 본따 고향에도 같은 교육과정으로 1906년경 지은 학교로 여겨진다. 후일 오광선이 직접 작성한 이력서에 의하면, 1907년 4월경 이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05년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강제강탈하자, 부친 오인수는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접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일본 토벌대와 수비대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상황을 지켜본 아들 오광선은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토벌대는 아버님을 체포하기 전에 아버님의 반려나 다름없는 애견부터 죽였다. 당시 11살이던 나는 붙잡혀 가시는 아버님을 동구 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와서 죽은 애견을 묻으면서 한없이 울었다.”
김두찬, 「오광선 장군」 『신동아』 1971년 2월호
오인수는 약 7개월간의 모진 고문을 받으며 8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해야 했고 6년 동안의 모진 옥살이를 한 후, 병든 몸을 이끌고 1913년 12월 출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친이 옥살이하는 동안 오광선은 1911년 삼악학교의 고등과에 들어가 1913년 3월 졸업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공부할 수 없게 되자, 백부는 그의 나이 17세에 1913년 12월 부친이 출옥하자마자 서둘러 결혼시켰다고 한다. 신부는 14세로서 산 하나 넘는 이웃 마을인 용인 이동면 화산리(堯山里) 태생인 정정산(鄭正山), 즉 후일 정현숙이었다. 정현숙은 용인 죽릉리에서의 신혼살림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14살 신혼살림때)남의 땅에다 농사를 지어먹고 살았으니 언제나 쪼들릴 수 밖에 없었어요. 시아버님께서 포수 일을 하시면서 간간이 살림을 보태주셨지요. 나는 그때부터 일복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 농한기에도 다른 집일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 갔었지요. 워낙 힘이 꿋꿋해서 여자지만 남자 이상의 일을 했거든요”
<광복군 따라 대륙유랑 30년> 《주간여성》 1974년
이미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오광선은 신혼생활 와중임에도, 여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종로에 있는 상동(尙洞)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우당 이회영이 숙감을 맡은 바 있는 이 학원은 서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한 뒤 평양 오산학교에 재직했던 여준 선생도 학감을 지낸 민족사학이었다.
아울러 학원은 상동교회와 함께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합 장소로 활용되었다. 학원에는 친족이면서 같은 용인 삼악학교 출신인 조카 오일선(吳一善)과 오의선(義善) 등 동기생들이 진학했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는 민족적 사립학교를 없애고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사립학교 규제법을 공포하였다. 이로 인해 재정난에 허덕이던 상동청년학원은 1915년 문을 닫게 되었다. 어렵게 고학하던 학교가 폐교되자, 오광선은 학원의 은사인 장지영(張志映) 선생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하였다.
하지만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싶었던 오광선은 장지영 선생에게 자신의 꿈을 토로하고 노자를 받았다. 함께 망명길에 오른 동지는 조카 오일선과 오의선 형제, 그리고 조선대학에 다니던 김중훈(金重勳)․이동민(李東民) 등 5명이다. 이들은 1915년 가을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 신의주에 내린 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독립운동을 결심한 오광선 일행은 북경에 도착해 당시 중국 실권자들과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던 신규식(申圭植)을 만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군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신규식은 오광선 일행을 원세개(袁世凱) 총통에게 소개하여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오광선은 원세개 총통 앞에서 항일투쟁에 참여할 것이며 중국에 대해 신의를 지키겠다는 선서식을 하였다. 이때 자신의 이름을 광선(光鮮)으로 바꾸어 서명하였는데,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뜻이라 한다. 오광선은 1964년 3월 30일 서울민사법원의 허가를 받아 정식 개명하였다(<오광선 호적등본>, 서울시 동대문구청).
오광선 일행은 원세개 총통의 주선으로 북경 북부 하북성에 위치한 보정(保定)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보정군관학교는 1912년 북경 근교의 보정에서 원세개 정부의 육군군관학교로 개교하였으나, 1923년 8월 폐교하였다. 약 6,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장개석과 부이 등이 이 학교출신이다.
한인 중에는 무정 장군이 1924년 포병과를 졸업했다(한상도, 『중국혁명 속의 한국독립운동』, 집문당, 2004 ; 王新哲․劉志强․任方明 편저, 『保定陸軍軍官學校史硏究』, 北京:中國社會出版社, 2005).
오광선 일행은 6개월을 기한으로 폭탄제조법은 물론, 군관이 되기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학교가 중국내전으로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방황하던 차에 오광선이 마침내 찾아 가기로 결심한 곳은 바로 만주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였다. 봉천(현 심양)에서 출발한 오광선은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까지 700리를 걸어 6일 만에 꿈에 그리던 신흥무관학교에 마침내 도착하게 되었다.
2. 중국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생도, 교관이 되다
오광선이 찾은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는 통화현에서 고뢰산 · 청하자의 첩첩산중을 한참을 돌아 현재 광화진(光華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3km 떨어진 합니하 강가에 자리하였다. 훈강(파저강波瀦江) 상류에 해당하는 합니하는 구릉진 산을 휘감으며 넓은 평야와 언덕을 만들었는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시키기에는 더 없이 좋은 요새였다.
교사와 연병장은 광화진 쪽에서는 물론, 합니하가 흐르는 곳에 나 있는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겨져 있어 적으로부터 쉽게 노출되지 않았다.
부푼 꿈을 안고 천신만고 끝에 신흥무관학교를 찾아온 오광선은 그러나 학생들에게 일제밀정으로 오인 받아 감금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었던 탓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 거동이 수상쩍으면 일제 밀정으로 오해받아 학생들이 자체 조사하는 사례가 빈번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만해 한용운이 일제강점 직후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생도들이 총을 쏴 죽을 뻔한 일이나, 1919년 8월 밀정혐의로 구타하여 사망시킨 윤치국 사건을 꼽을 수 있다. 다행히 삼악학교 은사였던 여준 선생이 교장을 맡고 있어 면담을 통해 오해에서 풀려나 입교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오광선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열심히 학업과 훈련에 임해 1918년 12월 수석이라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여준 교장선생은 이후 오광선에게 부친과 부인 등 가족을 합니하 무관학교로 불러들여 같이 살게 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본국 고향으로 몰래 소식을 전하였는데, 용인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정현숙 여사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제가 20살이 되던 해(1919년-편자 주) 봄 그이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압록강 대안(對岸)에서 2백리 떨어진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와 있으니 그리로 오라는 것이었지요. 간단한 살림도구를 챙겨 용인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을 지나 명죽리에서 내렸어요. 거기서부터 육로를 한달 동안이나 걸어 만주로 들어갔지요.”
<광복군 따라 대륙유랑 30년> 《주간여성》 1974년
한 달 동안의 피나는 여정 끝에 정현숙 여사 일행은 합니하에서 오광선과 상봉할 수 있었다. 짧지만 단란한 정현숙의 가정생활이었지만, 피나는 독립운동 뒷바라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무렵 정현숙도 고국의 가족들 안전을 위해 현숙(賢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신흥무관학교 터 강 건너편에는 현재 ‘까우리꽌즈(高麗館子)’라는 한족 마을이 있는데, 아마 오광선 일가도 이 마을에서 거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오광선에게 학교측은 합니하에서 200여리 떨어진 해룡현(海龍縣) 성수하자(成水河子)에 위치한 동흥(東興)학교 군사교관과 체육교사로 재직하게 하였다. 이후 이청천(李靑天, 중국에서는 池靑天으로 불림)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하자, 오광선은 다시 합니하로 와 교관으로 일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합니하로 수많은 한인 청년들이 몰려오게 되자, 학교측은 5월 고산자진 대두자(大肚子) 마을에 새로 분교를 설치했다. 이 곳은 합니하로부터 약 40키로 떨어진 ‘고산자진(孤山子鎭) 전승향(全勝鄕) 승희촌(勝喜村)’ 조선족촌 뒷산이다. 마을이름은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기뻐한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오광선이 고산자진 신흥무관학교에 교관으로 옴에 따라 독립군 양성에 더 활기가 띠었다. 이후 오광선은 이청천 장군의 고급 참모로서 평생 동지이자 상관으로 모시게 되었다.
3. 봉오동 · 청산리 승첩에 참전하고 자유시참변을 겪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무장독립전쟁에 대한 기대가 커지자, 서간도와 북간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은 본격적인 무장단체로 개편하였다. 우선 서간도에서 활동 중인 한족회(韓族會)와 신흥무관학교 등이 상해 임정과 협의하여 5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하고, 독판에 이상룡 · 부독판 여준, 사령관에 이청천, 참모부장에 김동삼을 각각 임명했다.
12월에는 북간도에서 대종교계인 중광단(重光團)을 이끈 서일 총재가 김좌진을 영입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두 부대는 1920년 10월 유명한 청산리와 봉오동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오광선은 서로군정서(부독판 여준)의 제1대대 제1중대장과 3중대장(1920. 10. ~ 1921. 2.)을 거쳐 제 1대대장(1921. 2. ~ 1923. 7.), 그리고 별동대장(1923. 8. ~ 1925. 9.)과 경비대장(1925. 10. ~ 1927. 4.)을 맡아 각종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0년 12월 러시아 국경인 밀산에서 각 독립군 부대가 통합되어 대한독립군단(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 · 김좌진 · 조성환, 부대원 약 3천5백여 명)이 재발족되자, 오광선은 이 군단의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1921년 1월 이만을 거쳐 5월 중순경 자유시(현재의 스보보드니)로 들어가게 되었다.
1921년 6월 대한독립군이 겪은 ‘흑하사변’(이른바 자유시참변)은 한국 독립운동사상 일대 참극이었다. 제정러시아의 짜르정권을 무너뜨린 공산계 러시아군(적로군)은 왕당파인 백계 러시아군(백로군) 사이의 내전에서 한인 독립군부대를 이용할 목적으로 1918년부터 자유시로 불러들이고자 했다.
이에 홍범도 · 이청천 · 김혁 등은 자유시로 이동해 신무기로 무장을 갖추고 만주와 러시아 지역 무장부대의 단결을 도모하기로 하고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다보니 러시아로 망명한 한인 2세 출신 파르티잔으로 구성된 빨치산 출신부대와 만주 독립군 간에 세력다툼이 일어났다.
급기야 한인 독립군 부대의 무장을 두려워한 소비에트 정부의 배신에 의해 빨치산 출신부대로 하여금 대한독립군을 공격하게 하는, ‘동족간의 참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독립군의 피해는 사망 272명, 익사 31명, 행방불명 250명, 포로 917명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다.
흑하사변으로 인해 독립군 지휘관 이청천과 채영 · 오광선 등 간부급 84명은 중범자로 분류되어 극동공화국 제5군단 관할 하의 이르쿠츠크 군 형무소로 이송되어 특별수용 되었다. 대부분의 나머지 병사들은 탄광과 벌목장에 노역병으로 보내졌다.
형무소의 수형생활은 춥고 배고팠을 뿐아니라 가혹한 민족차별과 좌익으로의 전향을 강요당했다. 이청천과 오광선에게는 일본인으로 자처하는 자가 회유를 하려 하였고, 이를 거부하자 급수 · 급식을 단절하였다.
이들은 “영하 40도의 감방에서 통나무 의자의 나무껍질을 조용히 씹으면서” 계속 전향을 거부하였다.(김두찬, 「오광선 장군」 『신동아』 1971년 2월호)
당시 상해에서 발간되고 있던 『독립신문』 1922년 7월 22일자에 실린 ‘동포에서 읍고함’이란 기사에는 “더욱 급박한 일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채영 · 이청천 등 장교 70여명이 러시아 감옥에서 하루 검은 떡 한 근씩 먹으니 며칠 안에 말라죽을 것이외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실렸다.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로 강제 이송된 독립군 간부 84명이 1년만에 70명으로 줄어들 것은 이처럼 모진 학대와 시베리아의 혹한, 영양부족 등으로 희생된 결과라 하겠다.
오광선도 당시를 회고하기를, “물도 없이 검은 빵 두 쪽으로 연명해야 했던 옥살이 아래 옆에 놓인 생나무 책상을 씹어 먹을 만큼 허기가 졌던 사형수였다.”고 전하였다.(오광선, 「반세기의 증언」, 『조선일보』 1964년 3월 27일자.)
이러한 러시아군의 만행이 계속되자, 이청천 장군은 몰래 오광선을 탈출시킴으로써 수형생활의 참상을 동지들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오광선은 야음을 틈타 운명의 탈출을 결행하였고, 다행히 감시망을 벗어나 만주 국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어 흥안령 북쪽을 돌아 시베리아 흑룡강변 우루강을 거쳐 밀산에 이르러 김좌진 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혹한과 배고픔을 참아내며 약 한 달만에 “얼음에 뒤덮인 바이칼호를 맨발로 걸어” 2만여 리나 되는 길을 헤치고 걷는 극한의 탈출이었던 것이다.
결국 김좌진 장군은 상해임정 김구 선생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임정의 국제적 여론환기 노력으로 레닌의 지시에 의해 1922년 8월, 이청천 등 독립군 간부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의 주력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자, 여준은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을 규합하기 위해 새 학교를 만들려했다. 여준은 일제와 러시아의 탄압에 무기력하게 대처하는 임시정부의 처사에 반발하여 그의 개조를 요구하는 한편,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는 결의서를 발송한 터였다.
나아가 폐교되었던 신흥무관학교를 아예 길림시 액목현(額穆縣) 황야강자향(潢池崗子鄕)으로 옮기기로 하고, 1922년 초 검성학장(儉成學莊)을 세우고 교장에 취임했다. 이어 가장 믿음직한 제자인 오광선을 불러 체육선생으로 삼았다. 이상룡의 며느리인 허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남만주의 난리(경신참변) 후에 신흥무관학교는 길림성 액목현 교하에다 옮기고 ‘금성중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교장에 여시당(여준) 선생님, 평교사에 오광선 선생님이 맡았다. 오광선 씨는 여준 선생의 처가쪽 조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동안 남만청년동맹(사회주의단체 : 필자 주)의 청년들이 금성중학교를 점령하려 했으나 홀홀히 그들 뜻대로 물려줄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 세우고, 어떻게 꾸려 온 학교인데...(허은 구술 · 변창애 기록,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음사, 1995)
검성중학교는 1923년 가을 무렵 제 1회 3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여준과 오광선은 이곳을 서로군정서의 새로운 기지로 삼기위해 둔전제를 실시하여 장기 전략을 세웠다.
오광선은 이후 용인출신의 무관이자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김혁(金爀, 1875~1939)이 주관하여 만든 대한독립군단에서 여단부관을 맡았다. 같은 동향 출신인 김혁 장군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이는데, 취송(聚松)이라는 오광선의 호도 김혁 장군이 지어 준 것이라 한다.
4. 만주 독립군들을 키운 ‘만주의 어머니’ 정현숙
오광선은 액목현으로 가족을 옮겼으나, 몇 번의 이사를 거듭하고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정현숙 여사는 첫딸인 오희영(姬英, 1924~1969년)에 이어 2년 후에 둘째딸 오희옥(姬玉, 1926년생)을 낳았다. 둘째딸 오희옥은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어머니는 만주 가서 산의 나무를 다 자르고 밀어 논밭을 만들었대요. 농사짓고 거기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대. 우리 어머니는 정말 여장군 같아요. 일꾼 일곱명 두고 농사짓는데, 거기서 하루에 12가마씩 밥을 지어서 독립군들에게 먹였대요.
무관학교 교관이고 체육교사였던 아버지가 밤늦게 여러 학생들을 데려오면 밥 다 해먹이구. 어렸을 때 생각하믄 마당이 무척 넓고 그 안에 학교가 또 하나 있고, 대문 쪽에 총 쏘는 건물을 만들었어. 건물 밖으로 지나가면서 일본 놈하구 싸우려고, 대문이 있구 무척 넓어요. 학교 마당 같아요. 옆에는 학교라해서 가서 애들 공부하구....”
김명섭, 「용인지역 3대독립운동가연구 서설-오희옥 여사 인터뷰」 『용인향토문화연구』 5집, 2003
오광선-정현숙 일가는 이 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한번, 설날 뿐이었다. 교관인 오광선이 밤이건 새벽이건 갑자기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였기에 집안의 식량은 매일 비었다고 한다.
“밥만 먹으면 빨래하고, 산에 들어가 풀을 베거나 나무를 태우는게 일이었어요. 저녁에는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아왔습니다. 이웃의 중국사람들이 퍽 친절해서 빵이나 밀가루 등을 갖다 주기도 했어요.”
이렇게 헌신적인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 정현숙 여사가 얻은 별명은 ‘만주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을 들인 학교는 점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좌경화됨에 따라 1927년 청년강습소로 개칭되고야 말았다. 그러자 교장인 여준과 교관 오광선 등은 더 학교에 머물지 않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5. 대전자령 승첩 후 산해관을 넘어 독립군 교관으로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반무렵 중국 만주의 정세는 일본군의 침략 노골화와 공산주의자들의 발흥으로 매우 불안하게 변화하였다. 전쟁 발발의 위기와 내부 좌익세력의 도전 속에서 재만한인 민족주의 세력은 각 진영의 대동단결과 무장투쟁 역량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북만주의 신민부 관할지역에서는 김좌진 등이 김종진 · 이을규 등 아나키스트들과 연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자유연합적 정치이념을 모색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김좌진 · 김종진 암살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따라 이청천과 홍진 등이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내걸고 1930년 7월 위하현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1931년경 당원만 수만명에 달하고 군구도 36개 지구로 확대되는 등 크게 성장한 한국독립당은 홍진이 중앙위원장을 맡았고 이청천이 당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오광선 역시 군사부 위원에 배치되어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2월 초 한국독립군 지도부는 연변에서 봉기한 2천여 명 길림구국군과 합류하여 항일 공동작전을 펼치기로 협의하였다. 한국독립군 부대는 유격독립여단으로 명명하고 한 · 중 연합의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군의 주요 전투지역을 살펴보면,
일면파 전투(1932. 2. ~ 3.)
연수현 전투(1932. 3. ~ 4.)
아성전투(1932. 5.)
쌍성전투(1932. 8. ~ 11.)
경박호전투(1933. 1.)
동경성전투(1933. 6.)
대전자령 전투(1933. 6.)
동녕현 전투(1933. 9.) 등이다.
이 중 경박호전투와 함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의 승리는 독립군 사상 3대승첩의 하나로 기록될 만큼 매우 값진 승리였다.
그러나 한 · 중 연합군은 중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발호로 한국군 지도부가 무장해제 당하는 등의 위기에 직무하였다. 이 무렵 상해 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의 밀사가 도착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주석과 장개석 국민당 위원장의 면담이 성사되어 곧 낙양에 군관학교를 세울 계획이니 중국 본토로 이동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독립군 지도부는 이를 승낙하고 이청천을 책임자로 결정하여 오광선 등 39명은 1933년 11월 노동자로 변장하여 2~3명씩 조를 이루어 산해관을 넘어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이청천, 「광복군과 나의 투쟁」 《희망》 1953년 2월호)
1934년 2월 28일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중국 전역에서 모집된 한인 92명이 특별반으로 편성되어 본격적인 군관양성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청천이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했고 오광선이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낙양분교 한인반은 한국독립군 출신과 김구 계열, 김원봉 계열로 나눠져 세력간 경쟁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쌓임에 따라 2기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4월 중단되고 말았다.
6. 김구 주석 명을 따라 북경 비밀공작, 체포와 석방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경으로 파견되어 비밀공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김구 주석은 만주에서의 독립기지를 재건할 목적으로 오광선으로 하여금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을 규합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오광선은 1936년 북경에서 금은방을 차리며 잠행하게 되었다.
오광선이 낙양에서 북경으로 파견될 무렵, 오광선의 가족들은 이청천의 가족과 함께 북경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현숙 여사와 가족들은 북경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천진으로 옮겨 2년 정도 살았다.
당시 오광선이 중국철도에 공무원으로 다녔으므로, 가족의 생활비는 물론 이청천 장군의 가족을 봉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천진에서 살던 오광선의 가족들은 남경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 가족들과 합류하였다. 이 무렵 남경에서 첫 아들인 오영걸(吳榮桀, 1936~2001)이 태어났다.
북경에 홀로 남아 첩보활동을 펼치던 오광선은 마침 그 곳에 들른 일본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의 암살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 침투한 다른 공작원의 체포에 따라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1백여 명의 만주군 보안대와 일본 경찰의 기습으로 체포되어 1936년 10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상황을 아버지 오광선에게 직접 전해들은 둘째딸 오희옥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구 선생님이 우리아버지한테 비밀공작 사명을 맡겼어. 청년 몇 명 데리구 가서 비밀공작하라고.…아버지는 북경서 금은방을 잘 했는데, 어떤 한국인 스파이한테 걸려서 별안간 다들 자는데 한밤중에 우당탕 쳐들어 와 담을 넘어서 잠옷바람에 다 걸렸대요. 그 중에서 한사람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이 있었대요.
창칼 끈으로 끊고 뛰어내렸는데, 50미터 간 후에 우리아버지가 마지막 총을 옆구리를 맞았대요. 병원에 입원했다가 감옥으로 가신거죠.
고문형을 받아서 일본순사들이 가시로 막 찌르고 고문해서 정신을 몇 번 까무러쳤대요. 그래도 중국 낙안군관학교만 나왔다구.
끝끝내 다른 얘기를 안했대요. 여기 ‘오원지(吳原之)’는 중국사람으로 행세한 거잖아요. 신흥무관학교 나왔다고 하면, 죽이지 뭐 한국사람인데….그래, 3년만에 풀려 나온거죠. 다 죽어 가는 것을 들판에 그냥 버렸대. 겨우 기어가 중국집으로 들어갔대요.”
김명섭, 「용인지역 3대독립운동가연구 서설-오희옥 여사 인터뷰」 『용인향토문화연구』 5집, 2003
7. 광복군 여전사 둘을 키운 정현숙 여사
오광선의 체포소식을 들은 남경의 임시정부 지도부와 가족들은 오광선이 처형당했을 것으로 여겼다.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가운데, 임정 요인들은 오광선의 아들을 유복자로 여겨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오광선의 수감 직후 부친인 오인수도 사망하여 가족의 고통은 매우 컸던 것이다.
이후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져 임시정부 요인들 모두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 오광선의 가족들 역시 남경에서 기강으로, 다시 중경으로 함께 이동하였다.
기강에서는 토교(土喬)라는 작은 마을에서 임정 요인 식구들 10여 세대가 함께 살면서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정현숙 여사 식구들과 함께 토교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정정화 (鄭靖和, 김가진의 며느리)는 저서전 『장강일기』(1998)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토교에서도 정씨는 홀로 삼남매를 키우느라 늘 궁색한 처지로 형편 필 날이 없었고, 백범은 오광선의 가족들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이들에 비하면 영걸 어머니 정씨는 아무래도 고생이 심했다.
내가 다른 이들보다 특히 영걸 어머니에게 정을 쏟고 희영이나 희옥이에게 좀더 잘해 주려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영걸 어머니는 만주에서 농사를 해본 경험도 있고, 몸도 건강해서 내 밭일을 많이 도와주었으며, 나는 그 대신 그집 삼남매의 옷가지 손질이며 일부자리 만들기 등 주로 바느질 일을 도와주었다”
정현숙 여사는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이 결성되자, 그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에 가입하여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오희영과 희옥 자매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공작 등에 활약하였다.
오희영은 먼저 광복군에 입대하여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했고,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광복군에 지원하였다. 특히 맏딸 희영은 광복군 징모처 제6분처에 소속되어 최전선인 부양(埠陽)으로 가 일본군에 맞서면서 선전활동과 초모공작에 투입되었다. 당시 16세의 오희영이 최전방에 자원하던 때를 지복영(池復榮)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어느날 중경에 갔던 김학규 지대장이 서언 한국광복군총사령부로 오희영을 데리고 왔다. 오희영은 나보다 여섯 살 아래로 이제 겨우 16세였다...오희영은 만주로 아버지 오광선을 찾아가기 위해 최전방을 자원했다.
그것은 바로 적후(적 점령지구) 공작을 뜻했다. 어린 나이에 성패를 예측할 수 없는 그 험한 길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참으로 한국의 딸로, 망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너나없이 서럽고 또 서러웠다.”
지복영 지음 이준식 정리, 『여성 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 민족문제연구소, 2015
이후 오희영은 중경 임시정부로 가 1944년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김구 주석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申宋植, 1914~1973)과 혼인하여 ‘부부광복군’의 모범을 보였다.
장남 오영걸은 구술하기를 부친이 북경에서 잡혀간 후 주로 김구와 이시영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며, 누님 오희영의 결혼식에 김구 주석이 주례를 서 주었다고 기억하였다. 신송식은 혼인 후 1945년 6월 임시정부 주석 비서로 임명돼 부부가 함께 활동하였다.
오광선은 1938년 10월 출옥한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흑룡강성 하얼빈 인근의 대석하와 흥안령지역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하였다고 한다. 오광선은 만주 각 곳을 편력하면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을 맞이하게 되었다.
8. 광복군 국내지대장, 국군의 뿌리라 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소식을 들은 오광선은 곧 상해로 건너가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을 만났다. 이 장군은 오광선에게 광복군 소장계급장을 달아주고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오광선에게 부여된 임무는 미군정 당국과 협의해 광복군을 정식 군대로 인정받고 국군자격으로 입국케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오광선은 중경에 있는 부인과 두 딸, 아들을 데리고 귀국하여 미군정 하지중장과 담판하였다.
그러나 임정과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군정의 방침으로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에 직접 전용항공기로 중국에 가 김구 주석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오광선은 11월 임정을 법통으로 추대한 대한국군준비위원회(위원장 유동열)의 총사령을 맡았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모든 사설군대의 해산을 종용받자, 1946년 4월 광복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또 개인자격으로 입국한 이청천 장군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미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에 반대하다가 정부 수립을 계기로 국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948년 12월 육사 8기 1차로 입교하여 이듬해 1월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맞았다. 당시 오광선은 서울에 남아 있다가 단신으로 국군에 합류하였다. 이후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8년 동안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오광선 장군은 1967년 5월 향년 73세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단간셋방에서 쓸쓸히 작고하였다.
오광선과 정현숙 부부의 일생은 항일 독립운동과 자유한국 건설로 점철되어 있다. 오광선은 부친과 고향 삼악학교의 스승인 여준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상동청년학원에 이어 만주로 망명하였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교관생활과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였다. 또 한국독립군 실전부대장으로 한중 연합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는 등 부친과 스승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다.
여준 선생의 사망 이후에는 임정 백범 주석의 명에 따라 이청천과 함께 독립군 양성간부로 활약하고 나아가 일제치하의 북경으로 잠입해 첩보활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렀다. 항일전쟁과 자유한국 건설에 뿌려진 오광선의 삶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거대한 뿌리임에 틀림없다.
정부에서는 두 분의 공훈을 기리어 오광선 선생에게는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고, 정현숙(정정산) 여사에게는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