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녀 師母(사모)님
글/최봉암
스승을 師傅(사부)라고 하는데요,
지식으로써 마음(인격)을 만들어 주시니 몸을 만들어 주신 아버지와 동등하다 하여 師父(사부)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스승의 부인 역시 어머니와 격(급)이 같으니 師母(사모)가 되겠지요. 예로부터 사모님이란 스승의 부인을 일컫는 호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선 스승의 부인에게만 한정해서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화하는 상대자가 여자인 경우 아주머니라는 표현이 있고 또 여사라는 호칭도 있습니다만, 요즘에는 상대를 높인다(존중)는 의미로 사모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30~40년 전까진 마땅히 스승의 부인 또는 일반적으로 교사(교직자)의 부인이나 윗사람의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호칭했으며 그 호칭을 듣는 당 본인은 그것을 명예와 긍지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30~40년 전까지 우리사회엔 식모라는 직업이 있었습니다.
밥 어미, 주로 부엌일을 하면서 집안의 모든 허드렛일을 해주는 여자 직업인데요, 직업이라기보다는 종(노예보다는 약간 위 계급으로, 소액의 보수를 받는 노예라고나 할까요?)이었습니다. 따라서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었으며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역시 살기위한 궁여지책으로 택한 직업(일)이었습니다. (요즘 사회의 파출부와 하는 일은 거의 같으나 사회적인 인식은 천양지차로 그 격이 다릅니다.)가난한 집안의 여식(딸)이나 가정이 없는 여자들이 여유 있는 (부자)집안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했으므로 좀 고상한 표현으론 가정부라고도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 사장인 부잣집의 식모로 일하던 여자가 있었습니다.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도 식구들에게, 부인이나 심지어는 초등학생인 막내둥이아이한테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는 처지였는데요, 호칭은 “야~ 식모. 식순아 또는 OO(이름)”이었습니다. 반대로 집(주인)식구들에 대한 호칭은 사장님, 사모님 그리고 자제들에겐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했지요.그런 생활을 꽤 오래하다가 나이가 들어가자(많아져서) 미군부대 인근에 있는 윤락가의 여성(윤락녀-창녀)으로 전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흑인장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몸(姓-성)을 파는 일이었지만 식모생활보다는 월등히 낳은 직업이었습니다. 육체적 노동의 강도(힘들기)도 덜하고 경제적으로 여유도 생기고 비록 미군 장교의 임시부인(현지처)이기는 하지만 어엿한 가정주부인 것입니다.
당시, 인근에 살던 불량스런 한 청년이 그 사정을 포착하여 매우 유용하게 활용을 했습니다. 미군의 현지처가 된 창녀(전직 식모)에게 접근하여 자기의 잇속을 채우는 술수를 부리는 것입니다.
즉 “사모님”이라고 호칭을 하며 매우 정중하게 접근을 했습니다. 고급스런 의복과 장신구등을 선물하고 친구들에게 점잖은 복장을 갖추게 하여 소개를 하는 등 교양 있고 유능한 사업가 행세를 했습니다. 특히나 여자의 위신을 높여주기 위해서 각별히 노력을 했습니다. 즉 여러 사람이 보고 듣는 곳에서 소리 높여 “사모님.”하고 불러 주는 등의 행위를 했습니다. 직업도 없는 불량배인 그 청년의 속셈은 여자의 동거남편이 부대의 보급 장교인 점을 이용하여 군수물품을 편취(도둑질) 할 속셈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낡은 트럭을 타고 부대 내에 용무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들어가서 창녀인 여자가 그의 남편인 보급 장교와 미리 연락을 취하여 범행수작을 해 놓은 대로 새 트럭으로 바꿔 타고 나오는 등의 수법으로 많은 물품을 훔쳐다가 시장에 팔아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창녀에겐 더욱 고급스러운 선물과 품위 있는(격조 높은)예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창녀도 역시 그 일을 좋아했고 협조를 했습니다. 동거남편인 미군 장교는 복무기간이 끝나면 자기나라로 가버릴 테니까요. (비록 도둑질이지만) 그런 수법으로라도 돈을 많이 모아 두자는 속셈이었습니다.
어느 날, 남 못지않은 미모에 곱게 단장을 하고서(어엿한 부잣집 젊은 마나님의 모습으로) 전에 식모살이 했던 댁을 방문했습니다. 비록 천대받고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한 동안 몸을 의탁하고 살았던 정도 있으려니와 자신도 이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어엿한 생활인이라는 것을 자랑(과시)하고 싶었겠지요.
백화점에 가서 최고급의 상품으로 선물을 마련해가지고 옛 상전의 집을 찾았(방문했)습니다.
그러나 반갑게 맞아 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문전에서 박대를 당했습니다. 사장 사모님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온갖 잡놈 다 붙어먹고 사는 창녀 주제에 감히 내 집에 얼씬거려?(들어오려고?) 어림없다.”하면서 내민 선물마저 손등으로 걷어 치면서 “에잇 더럽다. 검둥이 놈 붙어먹고 사는 년 물건 받으면 나까지 오염된다.”
창녀는 기가 막히고 너무나도 서러운 나머지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그래! 너만 사모님이냐? 나도 사모님 소리 듣고 산다. 내가 창녀라서 더럽다고? 네 남편, 사장 놈도 빳빳한 지폐 치켜들고서 날 찾아(買淫-매음 하려고) 왔더라. 이 세상에 사모님, 창녀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나도 너같이 부잣집 고명딸로 태어났더라면 사장님, 교수님 남편모시고 사모님 소리 들으며 위세 부리고 잘 살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피눈물어린 절규였습니다.
그 후, 창녀는 미군 장교를 따라서 이민 갔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책의 어느 구절에도 그러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양반, 상놈의 씨(종자)가 따로 있다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