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발 만큼 겸손한 음식도 없다. 생시엔 불평 한 마디 없이 온몸의 무게를 묵묵히 지탱했던 부위. 족발이 된 이후 격 높은 상차림 근처엔 가본 적도 없지만 불평 한 마디 없다. 그런 자리는 등심이나 갈비에게 내주고 스스로 낮은 곳에 머문다. 자연스레 지체 높은 분들보다 서민들과 친숙해졌다. 그렇건만 정작 족발 파는 이들은 겸손하지 않다. 족발 만큼 원조를 내세우는 음식도 없다. 우리나라 족발집은 둘 중 하나다. 원조인 집과 그렇지 않은 집. 대구 재래시장 안에 있는 <발군의 족발>은 원조 집이 아니다. 원조를 내세운 적도 없다. 그저 묵묵히 족발의 본질에만 충실할 뿐이다.
‘재래시장 족발집’ 편견 깬 럭셔리 족발집
재래시장 족발집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청결이나 위생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적으로 가는 서울 공덕시장 단골 족발집만 해도 좀 지저분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대구 서남시장 <발군의 족발>은 기존 재래시장 족발집에 대한 편견을 일거에 깨부순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깨끗한 집기류 등이 재래시장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식당 안팎이 봄비가 지나간 자리처럼 청결하다.
식당 모습은 대개 주인을 닮는다. 마치 수학 선생님 같은 인상의 깔끔한 주인장 이건아(49) 씨를 보고서야 이 집이 깨끗한 연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올해로 24년째인 이씨의 시장 생활은 뜻하지 않게 시작됐다. 신혼 초에 남편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자 젖먹이 아들을 업고 시작한 생선장사가 그 출발점이었다. 생선장사였던 친구 어머니가 이씨의 딱한 사정을 듣고 주선해줬던 것이다. 처음 외상으로 생선을 받아와 경산시장에 좌판을 벌였다.
이후 경북지역의 5일장을 돌면서 제철 채소와 해산물을 팔았다. 이동 스낵카에 분식을 싣고 신도시 아파트도 돌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1996년 대구 성당시장에 처음 붙박이 가게를 얻고 분식집을 차렸다. 그가 오랜 세월 시장 장사를 하면서 철칙으로 여긴 것이 두 가지다. 박리다매, 그리고 청결! 지저분한 재래시장 안에서 그의 ‘청결’은 강력한 무기였고 경쟁력이었다.
간장족발과 마늘족발
깨끗한 국내산 원족에 강한 양념 배제
족발은 전처리가 까다롭다. 리아스식 해안처럼 깊숙한 발가락 사이의 잔털과 이물질들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잔여 이물질이 많으면 잡냄새가 심하고 맛도 떨어진다. 이 씨가 점포의 깨끗함보다 더 신경 쓰는 것이 족발의 위생적인 전처리 작업이다. 족발 맛의 8할은 이 과정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100% 국내산 생족만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중국산 원족이 저렴하지만 육질의 탄력이나 신선함은 국내산을 따를 수 없다. 양질의 재료를 청결하게 처리해야 족발 본연의 맛이 난다. 요즘 적지 않은 족발들이 단맛이나 강력한 양념 맛에 의존하는 걸 이씨는 못마땅해 한다. 달고 짜고 강한 향으로 잡냄새와 부족한 맛을 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원족을 들여와서 자꾸 냉동실에 들락날락 반복한 족발도 맛이 없다. 판매 예측을 잘못해 내놨다가 팔리지 않아 냉동실에 넣은 뒤 다시 꺼내 양념해서 파는 족발들이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 적량씩 들여와 즉시 작업해서 바로 삶는다.
핏물을 뺄 때도 너무 오래 담그면 육질이 흐물흐물해진다. 힘이 들지만 미지근한 물에 담가 손으로 일일이 문질러줘야 육질이 향상된다. 가급적 짧은 시간에 핏물을 완벽히 빼면서 육질도 향상시키는 게 관건이다. 처음 족발집을 시작했을 때 이씨는 배달을 끊고 오로지 족발 연구에 매달렸다. 우선 족물에 들어가는 한약재 가짓수를 줄였다. 가급적 향과 맛이 진한 향료나 감미료는 뺐다. 그저 잡내만 나지 않게 하는 수준을 유지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족발이라면 웬만해선 맛이 없을 수 없다. 이씨가 직접 개발한 대표적인 족발이 간장족발과 마늘족발이다. 갈비에서는 흔히 만나는 양념조합이지만 족발에서는 드문 경우다.
감칠맛의 간장족발과 맵지 않은 마늘족발
간장족발 맛의 정체성은 바로 간장소스에 있다. 다시마, 건표고, 멸치, 건새우, 파, 무, 양파 등을 넣고 1시간 정도 달여 간장소스를 진하게 뽑는다. 초벌로 구운 족발에 청양고추, 각종 양념과 함께 이 간장소스가 스며들게 한다. 간장족발은 매콤하면서 간장양념의 깊은 맛과 함께 불맛이 풍긴다. 적당한 단맛과 간장소스 특유의 감칠맛에 살짝 중독성이 있다. 한약재 냄새는 거의 없다. 먹다 보면 찜닭 같은 느낌도 난다. 육질에 충분히 밴 양념장이 촉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먹는 내내 워머를 켜놓아 끝까지 따뜻하게 먹을 수 있다.
마늘족발의 첫인상은 바위에 싸락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모양새다. 족발 위에 곱게 간 마늘로 토핑을 하고 그 위에 새싹을 얹었다. 찬 성질의 돼지고기와 더운 성질의 마늘이 조화를 이룬 족발이다. 마늘이 느끼함을 잡아줘 족발을 실컷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 마늘은 그냥 생마늘이 아니다. 식초에 재뒀다가 레몬을 넣고 숙성시켜 매운 맛을 순화시켰다. 어지간히 매운 맛을 못 먹거나 마늘을 싫어하는 사람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수저로 떠먹어도 전혀 자극적이지 않다. 몸에 좋은 마늘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는 이점도 있어 어르신들 선물용으로 은근히 인기가 높다.
간장족발, 마늘족발 모두 小(2만8000원)와 中(3만5000원)이 있다. 족발을 주문하면 무말랭이 양파장아찌와 함께 구수한 배추 된장국을 내주는 데 그 맛 또한 일품이다. 순댓국을 주는 곳은 많아도 된장국은 좀 드문 경우다. 족발과 함께 먹는 된장국 맛이 의외로 괜찮다. 술국으로 먹기도 하고 다른 족발로 바꿔 먹을 때 입 안 헹굼용 등 다양하게 활용한다. 원하면 리필도 해준다.
쟁반국수
족발과 발군의 궁합, 쟁반국수
족발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쟁반국수(小 6000원, 中 1만원)다. 과일과 채소를 워낙 듬뿍 넣어 한 접시만 먹어도 비타민을 비롯한 하루 권장 양양소를 보충할 수 있을 것 같다. 배와 파인애플을 갈아 만든 소스에 메밀면을 무쳤다. 메밀은 차가운 식재료여서 생강, 마늘, 파 등 더운 성질의 양념으로 균형을 맞췄다. 한 입 먹으면 참기름 향기가 고소하다. 깻잎 향기의 여운 또한 입 안에 은은하게 남는다. 역시 쟁반국수는 족발과 곁들여 먹을 때 더 풍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이 집은 다른 족발집에 비해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온다. 장을 보러 나온 부부 고객도 눈에 띈다. 아무래도 점포가 깨끗하고 젊은 감각의 인테리어 때문인 듯하다. 야외 나들이나 소풍가기 전에 들러 포장 족발을 사가는 손님도 많다.
시장 골목을 사이에 두고 공간이 둘로 나뉘었다. 고개 들면 커다란 통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족발 맛만큼이나 다양한 표정들. 족발 접시 비우고 이 집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얼굴 또한 그 표정들 속에 섞일 것이다. 소주 향기 찍힌 겸손한 발자국 남기면서… <발군의 족발> 대구시 달서구 달구벌대로329길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