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갑질’이란 생경한 용어가 등장하더니 후속 단어 ‘횡포’와 맞물려 ‘누구의 갑질 횡포’ 기사가 종종 올라온다. 최근의 예는 강남 모 학원으로 커피 배달을 갔던 라이더에 대한 학원 관계자의 갑질. 비난이 폭주하자 학원측은 학원 선생이 아닌 승하차 도우미였다고 해명했다지만...
갑-질. 갑질(甲-)은 계약서 상 쌍방을 뜻하는 갑을(甲乙) 관계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는 '갑'에 '~질'이라는 접미사를 붙여 부정적인 어감을 강조한 신조어. 2013년 즈음 인터넷에 등장해 이제는 버젓이 사전에까지 자릴 잡았다.
갑질의 기저에는 우월감이 존재한다. 권력이던 경제력이던, 하다못해 학력이던. 어찌 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우월감은 필요하다. ‘내가 너보다’ 나은 위치/상황이므로 양보/배려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그 우월감이 통제가 안 될 때다. 감정이 격해져 ‘너 따위가’ ‘네가 감히-’ 막말이 나올 때다.
갑질이 이슈가 되어도 갑은 쏘리~ 한마디로 곧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을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쉽사리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때린 놈은 금방 잊지만, 맞은 놈은 그렇지 못하다.”란 말이 생겨났다.
“배운 것 없으니 배달이나 하고 있지”가 요지인 금번 갑의 폭언에 주업이 배달인 낭만배달부도 심란해진 바, 2017년 재개봉한 영화 한 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달래본다. 저명한 시인과 섬마을 총각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일 포스티노(Il Postino)>
https://www.youtube.com/watch?v=sC2rECr2fug
감독 : 마이클 래드포드
원작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주연 : 필립 느와레(파블로 네루다), 마시모 트로이시(마리오 루오폴로)
음악 : 루이스 바칼로프
개봉 : 1996.03.09. 114분
이탈리아의 한적한 섬 칼라 디소토. 노총각 마리오는 백수다.
“고기잡이는 싫은 게냐?”
먹방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쫀다. 마라오는 허름한 자전거를 끌고 마을로 나가고, 우체국 출입문에 붙은 '임시 우편배달부 모집' 구인 광고를 본다.
상수도조차 설치되지 않은 궁벽한 섬에 우편물 올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유명한 시인이 섬마을로 들어오자 상황이 달라진다.
“급여는 좀 짠 편인데 괜찮겠나. 그래도 일주일에 영화 한 편 볼 정도는 될 거야.”
그렇게 남는 게 시간뿐인 마리오는 시인의 전용 우편배달부가 된다.
봉 쥬르노!
칠레가 고국인 시인 파블로는 우익정권이 들어서자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망명 중이다. 유럽 곳곳을 떠돌다 이번엔 동거녀 마틸드와 함께 섬마을로 들어왔다. 시인 역을 맡은 필립 느와레. 국내 팬들에게도 친숙한 얼굴이다. 1988년 개봉한 <시네마천국>에서 어린 토토에게 영화를 보여주던 알프레도 아저씨, 얼굴에 8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그라시아~
시인에게 첫 배달을 마치자 파블로가 팁을 건넨다. 과자 한 봉 사먹을 수 있는.
“돈, 돈, 돈... 장 마리? 여자야, 남자야?”
“돈나! 여자잖아”
백수를 갓 면한 임시배달부에겐 시인에게 쏟아지는 전 세계 여인들의 사랑(편지)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렇게 편지를 나르고, 또 한 봉의 과자를 사먹을 수 있는 팁을 받고... ...
어느 날 돌아가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마리오에게 시인이 묻는다.
왜 기둥처럼 우두커니 서 있나?
깊이 꽂힌 창처럼요?
아니, 장기판 말처럼 요지부동이잖나
도자기 인형보다 조용했죠.
내 책 중에 ‘근본에 관한 노래’보다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 그 책의 은유로만 날 놀리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은유가 뭐죠?
은유? 메타포레는 뭐랄까... 뭔가를 말하기 위해 다른 것에 비유를 하는 걸세.
시를 쓸 때 사용하는 건가요?
시인을 접하며 마리오의 삶에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우두커니 명상에 잠기고, 시에 대해 생각도 해보고.
난 창백한 얼굴로/ 양장점과 백화점에 들어가곤 한다./ 그 섞이지 못함이 자신이 태어나고 또 죽을/ 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 펠트 인형과도 같다./ 이발사의 냄새는 날 눈물 짓고 울부짖게 한다./ 인간으로 사는 것에 지친다.
시인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지. 시를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감정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뿐이야.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편지를 전하며 마리오는 상금이 얼마냐고 묻는다.
171,135 스웨덴 크로네!
모르겠네요. 많은 건가요?
시인은 약간은 주제넘을 수 있는 질문에도 마리오가 싫지 않다.
시인이 되고 싶어요. 여자들이 좋아하잖아요.
해변을 따라 걸어보게.
그럼 은유가 떠오를까요?
그럴 걸세.
영화가 38분에 이르면 드디어 가슴 빵빵한 여주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베아트리체 루소. 차도녀가 아닌 차섬녀다.
그녀의 첫마디는
“뭘 봐요. 여자 처음 봐요?”
흥분된 감정을 주체 못하는 마리오는 사부-시인에게 달려간다.
선생님. 큰 일 났어요.
흥분할 걸 보니 중요한 일이로군.
제가 사랑에 빠졌어요.
그거라면 문제없네. 내게 치료제가 있거든.
노! 노! 치료약은 안돼요. 낫고 싶지 않으니까요. 계속 앓고 싶어요.
말은 걸어보았나?
뭐... 그냥 쳐다보기만...
한 마디도 못했단 말인가?
몇 마디는 했어요. 이름이 뭐냐고.
우표를 붙일 때 쓰던 혀를 다른데 사용하도록 가르쳤으니 사부가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하는 마리오. 투덜대면서도 파블로는 연애를 거들어준다. 마리오와 함께 베아트리체를 찾아간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빈 노트를 꺼내 ‘나의 절친 마리오에게 파블로 네루다 드림’이라 적고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적어보라 한다. 이러니 안 넘어갈 여자가 있나. 그러나 쉬운 사랑이 있을까. 베타트리체의 이모 로사는 결사반대다.
“네 꼴을 보니 그 놈이 손톱으로 긁기만 해도 쓰러지겠구나. (말은 번지르르해도) 침대에선 시인이나 성직자나 다 마찬가지야. 심지어 공산주의자도 똑 같더라.”
땡전 한 푼 없는 날건달이 영 못마땅하다. 조카가 가슴에 품고 있는 날건달의 시를 들고 시인을 찾아가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조카 이기는 이모 없는 법. 손톱질에 쓰러지는 조카와 무일푼 날건달은 세계적 시인을 증인으로 내세우며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피로연에 참석해 축사를 해주는 시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전해진다. 체포영장이 기각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전갈이다.
늘 그렇듯 이별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전용배달부에서 제자-조수-시인을 거쳐 이젠 친구가 된 마리오와 파블로의 작별. 전용수령인이 떠나자 다시 백수가 된 마리오는 처이모 로사의 식당에서 주방을 맡게 된다. 간간히 시도 쓰고.
친구가 떠난 자리. 휑하다. 신문에서나 대할 수 있는 세계적 시인이 떠난 자리라 더 그렇다. 그러던 어느 날 칠레에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파블로의 편지라 짐작하는 마리오 일행. 그러나 열어보니 발신인은 파블로의 비서다. 시인이 남기고 간 나머지 짐을 부쳐달라는 내용의. 세상사가 그렇다. 멀리 있으면 잊히게 마련이다.
시인이 남겨둔 짐을 챙기며 회상에 잠기는 마리오. 마리오는 그리운 마음을 담아 파블로의 녹음 장비에 섬의 소리를 담는다. 파도 소리, 절벽의 바람 소리, 서글픈 그물 걷는 소리. 교회의 종소리, 마지막으로 곧 태어날 아이의 심장 소리.
5년이 지나고 파블로가 다시 섬을 찾는다. 시인의 이름을 딴 파블리또가 핀볼 구슬을 갖고 놀고 있다. 그러나 파블리또는 아빠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태어나기 며칠 전 마리오는 죽었다. 꼬뮤니스트 집회에 참석했던 그는 집권수구세력의 무력 진압 상황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베아트리체는 마리오가 남긴 음성 테이프를 들려주고, 시인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진다.
쓸쓸한 해변을 걷는 파블로의 발걸음과 집회에 참석했던 마리오의 모습이 교차 편집되고, ‘우리의 친구 마시모에게’란 헌사&애도사가 스크린에서 내려가면 영화는 끝이 난다. (병마에 시달리던 마리오 역의 마시모는 촬영이 끝난 다음날 사망했다.)
세계적 시인과 섬마을 총각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일 포스티노>. 갑질 횡포가 무색해지는 영화다.
영화는 결말 부근에서 원작을 상당히 벗어나 있다. 원작에서는 파블로가 마을을 떠난 후에도 마리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간다. 이후 파블로는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위험에 처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때 마리오가 칠레로 날아가 파블로 곁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있다.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흐뭇했던 대목.
마리오가 시인에게 사인을 부탁하겠다고 말하자, 우체국장이 ‘그런 하찮은 부탁으로 시인을 번거롭게 하면 전 인류적 손해’라고 응수한다.
시인에 대한 극진한 존경. 우리에게도 그런 세월이 올 수 있을까???
참고로 영화와 무관하게 가장 안타까운 팩트.
시인 네루다 파블로는 스리랑카에 머물 때 타밀 여인을 강간했다고 한다. 또 어떤 이유에선지 그 치부와 같은 사실을 자서전에 적었다. 안타까웠다. 위대한 예술혼에도 치명적 약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한때 존경받던 고은 시인이 떠올라 더욱 그랬다. 향년 60세인 2020년 12월11일 이역만리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한 김기덕 감독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안타까운 팩트는 우리에게 힘겨운 숙제를 남기고 있다. 위대한 예술혼과 치명적 약점. 그 둘을 분리해 볼 것인가, 싸잡아 볼 것인가에 대한.
끝으로 그나마 친숙한 파블로 네루다의 ‘시’로 영화의 여운을 이어가본다.
‘시’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것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첫댓글 집콕용 영화 한편 올려봅니다. 요양 중엔 남는게 시간뿐이라 ㅋㅋ
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도 잘 읽고 갑니다~~~~
인호님과는 엊그제 인사 나눴고,
봉섭님, 올 만에 뵙네요. 여전하시져?
예, 저는 잘 지냅니다. 아직 여러모로 불편하실 텐데 쾌차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