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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을 베고 누워도 행복하여, 하늘과 땅이 마음대로 흐르도록 내버려두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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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d Mountain Poems 7
Hanshan - Gary Snyder
I settled at Cold Mountain long ago, |
한산시편 7
한산 - 게리 스나이더
오래 전에 한산에 터를 잡았더니, |
19세기 서양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은 자연파괴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문명의 정신적 뿌리인 기독교 사상의 기본은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문명이 흥기(興起)한 이래 자연은 끊임없이 파괴되어 왔으며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들은 인간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식탁을 풍성하게 꾸미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거대한 침묵의 자연들은 보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초한 이 재앙으로 인해 인간은 서서히 자연의 소중함과 생명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헤밍웨이 부부가 잠든 아이다호 주 켓첨(Ketchum) 마을의 묘지
아메리카 대륙은 그 원시성(原始性)이 충만한 생명의 보고(寶庫)였다. 그러나 백인들이 상륙한 이후부터 그 광활한 대륙은 파괴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미개척지가 훼손되었고, 20세기에 이르러서 복구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자연과 친숙하게 살아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시이튼(Ernest Thompson Seton)의 <동물기:Wild Animals I Have Know>,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단편 <프랜시스 매콤버의 짧은 행복한 생애:The Short Happy Life of Francis Macomber>나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소설 <헉클베리 핀의 모험: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 등에서 아메리카의 자연은 참으로 장엄하게 그려져 있으나, 이제 그것은 그 원형을 찾을 길이 없어졌다.
그럴 즈음에 일어난 자연회복 문학 운동이 바로 생태문학이었고,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1930-)였다.
그는 1930년에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태어났으나 곧 이주하여 시애틀(Seattle) 북쪽 레이크 시티(Lake City) 근교의 농장에서 가난하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노닐던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10년에 걸쳐 치열한 선(禪) 수행과 한문, 동양화를 공부했으며, 동양사상 중 도교(道敎)의 무위(無爲)사상과 불교의 공(空)사상에 심취하였다. 일생을 유랑처럼 떠돌면서 자연을 통해 명상하고 영혼을 단련하였다. 대학을 마치고는 한때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에 들어가 체류하면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에 매료되기도 했고, 또한 동양의 신비사상에 심취하여 티베트(Tibet)와 네팔(Nepal)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중부 네바다 시티(Navada City) 인근의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 산록(山麓)에서 은거하고 있다.
그의 시를 특징짓는 첫 번째 요소는 숲에 대한 애착이다. 그가 성장하던 당시 시애틀 근처는 한창 원시림들이 벌목되고 있었다. 원래부터 미국 태평양 연안은 강수량이 풍부하여 숲이 생성되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울창한 원시림이 한창 베어진 시기가 게리 스나이더의 소년기였고, 아이러니컬하게 그 역시 나중에 벌목공과 삼림 감시원 등의 직업으로 호구(糊口)하며 숲의 생태를 더욱 잘 파악하게 되었다.
그의 시에 흐르는 또 하나의 특징은 유랑행(流浪行)이었다. 그는 젊은 시기 거의 대부분을 유랑으로 보내었고, 시에라네바다 산록에 은거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여행을 훌쩍 떠났다. 한 때 그는 여행과 돈벌이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유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호기심과 유랑벽으로 모든 것을 떨치고 자신의 본능으로 살아나갔던 그의 삶은 생태운동가이자 시인이 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의 동양시(東洋詩)에서 영향을 받아 여러 동양의 시, 특히 일본의 시를 번역하고 연구하였다. 위의 시는 그가 일본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번역을 한 시이다. <한산시편:寒山詩篇>은 중국 당나라의 승려 시인 한산(寒山)의 시를 모은 시편집이다. 시인 한산은 당태종(唐太宗)의 시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속성(俗性)이 곤(困)이며 법명(法名)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세간에서는 그를 한산자(寒山子), 혹은 빈자(貧子)라 불렀으며, 절강(浙江)성 천태산(天台山)의 한암동(寒巖洞)에 은거하였다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추앙되어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으로 불려졌으며, 청나라 옹정제(擁正帝) 때에는 그를 높여 묘각보도화성한산대사(妙覺普渡和聖寒山大士)라 칭하면서 화성(和聖)이라고 일컬어져, 그와 동시대의 시인인 합득(拾得)과 더불어 화합(和合) 이성(二聖)이라고 하였다. 그가 죽은 후 태주자사(台州刺史) 은구윤(誾邱胤)이 여러 편의 시를 모아 <한산자시집전:寒山子詩集傳>을 편찬했다.
안휘(顔輝)가 그린 한산(寒山)의 초상화
이 시는 비교적 일찍이 서구에 소개되어 많은 시인들에 의해 번역과 편찬이 이루어졌다. 제일 먼저 1954년에 아서 웰리(Arthur Waley)가 이 시의 일부를 번역했고, 뒤이어 게리 스나이더가 1958년 열 아홉 편의 시를 번역했으며, 뒤를 이어 1970년 버튼 왓슨(Burton Watson)이 독자적으로 번역을 하였다. 본격적인 시편집은 1985년 프랑스 시인 패트릭 카레(Patrick Carre)에 의해서 출판되었는데, 모두 130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그 이후 영국 작가 헨릭스(Robert G. Henricks)가 시집을 출판했으며, 스탬블러(Peter Stambler)가 80편의 시를 번역하여 2005년에 내놓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군(一群)의 명상 시인들이 중국 시인의 한시(漢詩)에 주목하게 된 근원적 배경은 중국의 시학(詩學)이 침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서양의 입장에서 볼 때 표의(表意)문자인 동양의 한자는 말과는 독립적으로 사물의 형태를 모방하거나 지시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회화성과 의미의 함축성으로 인하여 서양의 표음(表音)문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 영어보다 연상작용과 상상력을 유발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이러한 한자들로 구성된 중국의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정신적 활동을 진작(振作)하게 함으로써 보다 근원적이고 내면적인 궁극에 다다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중국의 시가 침묵의 언어로 이루어진 대표적인 시 양식이라는 또 하나의 근거는 한자로 구성된 시어의 문법적 특성에 있다. 한자는 이미 변화가 없는 언어이기 때문에 격(格:Cases))과 성(性:Genders), 법(Moods)과 시제(Tenses)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 시에 등장하는 산이나 새, 바위 등은 복수가 되든 단수가 되는 의미에 변화가 없을뿐더러 심지어는 동사(動詞)조차 생략되어 명사(名詞)들로 이루어진 시도 가능해진다. 또한 행위의 주체마저 나타나 있지 않아, 시인을 그 장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중국의 한시는 단 몇 마디의 단어만으로도 장면과 정서와 경험의 보편성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시인뿐만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주변에 눈을 돌릴 필요 없이, 그 장면이나 정서에 정신을 집중하게 해 준다. 이렇듯 묘사를 최대한 지양하고 침묵을 바탕으로 하는 중국 시에서 생태주의 시를 지향하던 여러 시인들이 새로운 시의 양식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위의 시를 통해 전형적인 은둔자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속진(俗塵)을 떨쳐버리고 산중에 은거하여 자연의 소리를 경청하며 시를 읊는 이러한 동양적인 은둔자의 모습을 우리는 중국이나 우리의 여러 문학과 평전에서 많이 보아왔다. 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우리의 정서와 생활자세가 20세기를 살아가는 서양인에게는 동경과 탐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시는 한시(漢詩)를 번역한 탓에 정형률(定型律)의 아취(雅趣)가 흠뻑 배어 나온다. 원시는 변형된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두 행마다 묶이어 한 조를 이루고, 이 다섯 개의 구절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한가롭고 유유자적한 정경을 화면 가득히 펼쳐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단순히 자연을 벗삼아 음풍완월(吟風玩月)을 즐기는 정경이 아님을, 시를 연거푸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시는 자연으로 회귀한 시인이 침묵과 명상을 통해 우주의 섭리와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고자 하는 내용이다. 동양의 선(禪)사상에서는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불법(佛法)의 수행을 쌓는데, 이 법(法)을 터득하는 것이 우주의 생성과 소멸, 인간 역사의 영고성쇠의 흐름을 깨닫는 것이며, 그 오묘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 머물며 자신의 마음을 무념(無念)의 상태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Epikouros)가 주장한 아타락시아(Ataraxia:평정심)이고, 노자(老子)가 설파한 무위(無爲)의 마음인 것이다. 스나이더는 자연을 거닐며 숲에 바람이 불고 시냇물이 흘러가며,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때로는 지나쳐보고 또 때로는 가만히 응시하면서 불변무상(不變無常)한 대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있다. 마치 산뜻한 수묵화(水墨畵)같은 이 시를 통해 독자들 또한 잠시나마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마음의 평안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석여(石如) 손수용(孫秀龍) 작, <관폭조(觀瀑照)>
위의 시와 비슷한 정서의 한산시편 하나를 더 소개한다.
| 寒山有一宅(한산유일택) 宅中無蘭隔(택중무난격) 大門左右通(대문좌우통) 堂中見天碧(당중견천벽) 房房虛索索(방방허삭삭) 東壁打西壁(동벽타서벽) 其中一物無(기중일물무) 免被人來借(면피인래차) |
Cold Mountain is a house Without beams or walls. The six doors left and right are open The hall is blue sky. The rooms all vacant and vague The east wall beats on the west wall. At the center nothing Borrowers don't bother me. |
한산에 집 한 채 있어 그 집에는 난간도 벽도 없나니, 여섯 문은 좌우를 통해 방안에서도 푸른 하늘 보이네. 방은 모두 텅 비어 쓸쓸한데 동쪽 벽은 무너져 서쪽 벽을 치는구나. 이 가운데는 한 물건도 없나니, 빌리러 오는 이의 보챔이 없네. |
대표적인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인 게리 스나이더는 전후(戰後)의 불안정한 사회 현실을 명상과 생태의 탐구로 치유하고자 하였고, 그것을 평생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가 자연을 통해 표현한 여러 시작품들은 많은 도시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 "돌을 베고 누워도 행복하여, 하늘과 땅이 마음대로 흐르도록 내버려두네."라는 그의 즐거운 외침을 따라, 우리는 반복적인 일상을 잠시 놓아두고 침묵의 계절로 빠져드는 숲길을 거닐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