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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된 “뭉쳐야 찬다”를 보면, 어떤 경기에서는, 안정환 감독이 상대진영에 있는 선수들을 향해, 다급하게 “빽, 빽”하기도 합니다. 그 때의 상황들을 보면, 모든 선수들이, 상대진영에 가 있는 동안, 상대선수들이 갑자기 역공을 시작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안 감독은, 선수들에게, 우리 진영으로 속히, 돌아오라고 “빽, 빽”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상대진영에 머물지 말고, 속히, 돌아오라는 겁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빽, 빽”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도, 이러한 경우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외치는 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제껏 향하던 향방을 바꾸라는 겁니다. 우리가 도로에서 주행을 하다가 유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길을 잘못 들었거나 목적지를 지나왔을 때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났을 경우, 곧 바로, 유턴해서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막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란, 우리가 바쁘게 일을 행하다가도, 잠시, 멈추어서,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 우리의 계획, 우리의 방향을 집중하는 겁니다. 삼상 7: 5을 보시면,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고 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금 행하는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 유턴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왔던 과거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프고, 힘들고, 상처로 얼룩진 과거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아름다웠던 과거, 행복했던 과거, 그리움으로 가득찬 과거를 그리워하며,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20대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서울 양재동까지 걸어서 일주일동안, 무전 전도여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몹시 피곤함 속에서 귀가했을 때의 발바닥은, 팽팽한 풍선과도 같았고, 건드리면 툭하고 터지는 봉선화 봉우리와도 같았습니다. 집에서 걸어다니지 못하고, 무릎으로 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니까, 이 모든 현상이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또, 몇몇 지인들과 원주 소금산 산행을 하거나 경기도의 화담숲과 강원도 백담계곡을 여행하던 때를 생각하며, 그 때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죠? 언제입니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도 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언어소통, 두려움, 근심걱정이 없기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향해,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구원, 우리의 구원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번은,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 1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을 때도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 복을 주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행복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 깨졌습니다. 이에 대해, 사탄이 깨뜨렸다는 틀에 박힌 말은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행복을 깬 것은, 우리입니다. 내 자신입니다. 하와가 왜? 선악과를 먹었습니까?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습니까?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행복을 깨뜨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 겁니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을 되새기며,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제라도”라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어서,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말이 2: 1입니다. 보시면,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도,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는, 롯과 그의 가족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롯의 사위될 자들에게도 구원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욘 1: 1을 보시면,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며,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며 자신들의 잘못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성경을 읽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성경읽기와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의 겉모습입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까? 그렇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성도라는 것, 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을 해야 합니다. 본문 중간을 보시면, “마음을 다하여”라고 합니다. 즉, 본문은, “이제라도 마음을 다해서 돌아오라”는 겁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하라는 말씀은, 쉐마로 알려진 신 6: 5에서도 언급됩니다.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 잠 3: 5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타이어가 제 역할을 하려면, 공기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으로 가득차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스라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주의해야 할 것은, 내 자신의 욕망, 내 자신의 의지를 따라감으로,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의 중심에는 언제나, 내 자신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또는, 맡은 바 직분을 행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면서, 내 의지를 중심으로 행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상숭배를 한 겁니다. 그럼, 어찌해야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시 51: 17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또, 마 5: 4을 보시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내 안이, 나로 가득차 있으면, 애통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 안이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의 내 부족함이 절실히 드러나기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게 슬픔이 있을 때만, 내게 억울함이 있을 때만, 내게 고통이 있을 때만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부족함을 보며, 애통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가득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라도 마음을 다해서 돌아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구원의 문을 닫지 않고 열어놓고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마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을 보시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마음을 찢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의 습성 중의 하나가, 슬픔을 당했을 때, 억울함을 당했을 때, 위험에 처했을 때, 또는, 몸이 부정할 때, 옷을 찢으며 크게 소리치는 겁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때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며, 옷을 찢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들고 찬송하면 뭐합니까? 혈기를 부리지 말아야지. 아멘을 크게 하면 뭐합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 은혜를 받으면 뭐합니까? 자아가 죽어야지. 주의 일을 잘하면 뭐합니까? 순종이 안 되는 걸. 신령하면 뭐합니까? 신실하지 못한 걸. 성경을 줄줄 외면 뭐합니까? 고집이 꺾여야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적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기도했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는 세리였습니다. 그것은, 세리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을 찢는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해, 이스라엘이 습성에 따른 의례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통회하고, 애통하는 마음에서의 회개를 요구하신 겁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회 가운데, 믿음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과거 한 순간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속에서, 좀 전, 우리를 스쳐지나간 순간의 시간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기에, 한국 교회에는 “신령한 예배는 있어도, 생활 예배는 없다”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겪는 위기는, 믿음의 비전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활 예배가 없기 때문이며, 잠시, 믿음으로 뜨거웠던 과거의 정점만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에는, 성경 지식으로 가득하지만, 가슴은 냉랭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의 모습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 앞에 큰 산이 생기면, 부들부들 떨다가 무너집니다. 삼상 15: 22을 보시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나 삼상 15장에서나 미 6장에서나 무엇을 가지고 나오길 원하십니까? 이제, 우리도, 옷만 찢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찢으며, 하나님께 돌아감으로,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에게 복을 내린다고 합니다.
본문을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아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아느냐?”라고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1장입니다. 여기를 보시면, 이스라엘이 훗날 자녀들에게 말하기를,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하며, 또,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라고 합니다. 즉,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조금도 없기에, 하나님께 소제와 전제도 드릴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본문 끝을 보시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합니다. 이것은, 왕하 7: 1에서, 엘리사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고 예언할 때, 한 장군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한 상황과 같습니다. 본문의 상황이나 왕하 7장의 상황이나 똑같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먹을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지 않고, 곡식과 마실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겁니다. 이로 인해, 제물이 없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던 하나님의 성전은, 풍성한 제사로 인해, 기쁨과 감사로 차고 넘친다는 겁니다. 교회의 마이너스 성장, 성도들의 영적 방황등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방안들이 제시되지만, 그러한 방안들은, 우리가 옷을 찢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회복과 우리의 믿음회복을 위해 행해야 할 것은, 우리의 가슴을 찢는 회개를 통해,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요 4: 23을 보시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행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 있으며, 이스라엘의 행복도, 그들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 있습니다. 그래서, 시 50: 15을 보시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역시,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함으로,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있을 곳은 에덴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