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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7]
과연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는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같지 않는 사실에 입각하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인간들을 똑같게 만들려고 들지 않는 가르침이다. 인류의 가장 큰 희망은 사람 간의 바로 이런 상이함에 있다. 능력과 성향이 서로 다른 데에 있다. 하느님이 포괄하시는 힘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의 무한한 다양성, 각각 한 사람에게만 열려있는 이 다양성에서 드러난다. … 한 군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귀한 보배로서 실존의 성취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보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각자가 서있는 제자리라는 것이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길」 중에서).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 나는 영원히 갈래”
(패닉, ‘달팽이’).
지난 이야기 1 - 현명함이 보여주는 행복의 길
이제 이 연재가 예정된 순서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지난 이야기들을 요약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말이 우리의 일상에서 넘쳐나지만 이 말이 본디 가진 무게와 다의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우리의 분명한 체험입니다. 이것이 철학에서 행복에 대한 숙고된 생각을 기대하는 이유이겠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의 여러 가지 상이한 뜻을 곰곰이 살펴보는 것이 행복의 철학을 위한 여정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피상적이지 않고, 삶의 체험에 부응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의를 내려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이 현명함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관점을 매우 중요한 토대로 삼아, 그의 주장이 뜻하는 내용을 오늘의 관점에서 명료화하려 노력하고
논증의 설득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공들인 숙고의 결과로 그의 입장이 가진 포괄성과 타당성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현명함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윤곽을 그려본 행복은 본연의 의미에서의 ‘잘 사는 삶’입니다.
현명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어그러진 사회적 통념이나 질서 잡히지 않은 정념이 강요하는 ‘모방의 욕망(르네 지라르)’의 충족을 행복으로 믿는 것에서 벗어날 때, 그리고 타인에 대한 비교우위에 행복을 종속시키는 어리석음을 멈출 때 행복의 진면목을 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명함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매 순간 스스로 판단과 의지를 통해 행하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므로, 현명함을 통한 행복은 보편적인 것이되, 각자의 상황에 대한 고려와 자율성을 요구하는 개별성의 영역도 포함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현명함을 요약하자면 객관적 행복의 조건을 사려 깊게 발견하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의 삶의 영역에서 그를 위한 효과적인 길을 모색해 가며 차근차근 실천해 가는 덕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명료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진 행복의 관점을 정립해 놓고서도 조금씩 마음에서 자라나는 아쉬움이랄까 의문이랄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 이야기 2 - 나에게 고유한 행복의 길을 찾아서
그건 ‘지금 여기의 나’의 상황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이러한 행복의 개념이 개별성을 포괄한다 하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태도는 ‘객관적 덕’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모범답안으로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이 정해진다면 ‘이런 행복에 나의 개성과 독특한 바람이 담길 수 있을까?’ 하는 근심과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지는 못하지만 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하고 떼어내기 어려운, 감정과 삶의 궤적과 취향을 표현해 주는 것들이 행복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따라 실천이성의 관점에서 정립된 행복의 윤리학이 과연 나의 고유함을 구성하는 다양한 차원의 의미 있는 것들을 다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난 호에서, 행복에서 주관적인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을 ‘의미물음의 인간학’이라는 주제어 아래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이를 단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철학사와 사상사에 비추어서도 성찰해 보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기 진실성’이라는 현대철학의 개념을 곰곰이 따져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를 찾는다.’, ‘자기실현을 한다.’, 아니면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말들로 행복에 대한 추구를 표현할 때, 사실 여기에는 ‘좋은 삶’이라는 객관적 행복과 ‘자기 진실성’에서 오는 주관적 의미들의 만남과 갈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길에서 답을 찾아보다
행복에 대한 탐구는 이런 두 가지 방향의 갈망들이 서로 상보관계를 이룬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러려면 손쉬운 조화보다는 먼저 그것들이 충돌하는 지점들을 담담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숨겨졌던 ‘자기 진실성’에 대한 바람이 얼굴을 드러내는 표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관습적’ 삶의 방식과 객관적 행복의 조건에 대해 주관과 개성의 이름으로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정의 철학’이 지닌 의미는 획일화의 경향을 지닌 근대와 현대의 삶의 조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색이 가진 맹점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 진실성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데에 이르거나 ‘부정으로서의 자유’만이 옹호될 때 이는 이미 좋은 삶의 실현이라는 긍정적인 행복의 개념과 더 이상 화해 불가능한 모순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나 안에서만 유래하는 개성과 독특함을 주장하는 입장은 자아가나 밖의 풍성한 수원들에서 분리될 때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른 삶보다도 더 피상적이고 진부한 삶의 모습에 머물게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진실성이 객관적 행복과 접점을 찾는 중요한 계기로서, 인생의 깊이에 대한 관심과, 내면성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를 초월하는 영역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서만, 객관적 행복과 주관적 의미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를 넘어선다.’ 또는 ‘초월’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안에서 현실적 필요나 욕망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갈망과 동경을 가지고 있을 때, 이미 이런 ‘초월’을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동경과 갈망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같되 그것들의 얼굴은 참으로 다양하기만 합니다.
이제 행복의 철학이 가야 할 길은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의 다양한 의미를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앞으로 두 번쯤에 걸쳐 곰곰이 생각해 보려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6]
나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은 행복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개성 없어 보여 싫지 / 그것은 세상 어느 곳엘 가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잖아 / 누구의 이해도 바라지 않고 지난 일에 집착하지 않아 / 아무도 이해 못할 말을 하고 돌아서서 웃는 나는 아웃사이더 / 명예도 없고 금전도 없어 자존심이 있을 뿐이야”(봄여름가을겨울, ‘아웃사이더’).
“우리들은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자꾸만 잊어 버린다. 우리들은 물음표를 충분히 깊게 던지지 않는다”(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에서).
필경사 바틀비 - 근대적 삶의 방식과 개인의 운명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고래를 쫓아 사투하는 에이해브 선장이 주인공인 대작 「백경」으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을 대개 해양소설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종교적 상징과 의미가 놀랄 만큼 풍부하게 담겨있기도 합니다. 깊고 거대한 이 작품은 작가의 세계관의 장대함과 근대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작가의 작품 가운데 좀 덜 알려진 걸작이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이 단편에서 멜빌은 독자들에게 근대적 세계상에 짓눌리는 개인의 삶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명료한 문체 속에서도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짧지만 풍부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시대를 많이 앞선 작품이라 할 이 단편을 최근 들어 몇몇 철학자들이 새로이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멜빌이 보여주는 근대인들의 상황에 대한 심오한 직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공황이 밀려오는 20세기 초 미국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창백한 외모를 지닌 주인공 바틀비가 필경사로 등장합니다. 변호사의 소송장을 옮기는 것이 맡겨진 임무인 이 직업을 우리는 산업화된 사회 안에서 같은 일의 반복과 관료주의 속에서 자아상실로 내몰리는 수많은 개인들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섞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필경사 일을 수행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주어진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분명한 거부를 표시합니다.
그는 상사의 지시에 오직 “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고만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이 대답에 충실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산업사회 안에서 바틀비의 비극적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고 소설은 그 귀결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이 그저 몰락인 것인지 아니면 소리 없되 의미 있었던 획일화와 몰개성의 시대상에 대한 저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 몸짓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만큼은 이 소설에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부정의 대답은 행복을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양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신조로 삼는 근대 이후의 공리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한 미력한 개인이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거부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객관적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로서의 ‘행복의 윤리학’이 각 개인의 독자적이고 고유한 삶의 의미에 대한 ‘의미물음의 인간학’을 담지 못할 때 생겨나는 공허감을 바틀비의 부정의 몸짓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허먼 멜빌은 문학을 통해 근대적 삶의 조건에 살고 있는 개인의 비극을 가슴 서늘하게 그렸지만, 이러한 산업사회 안에서 본연의 자신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 안에서 ‘근대성 비판’이라는 중요한 주제로 20세기 내내 꾸준히 다루어져 왔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 로마노 과르디니의 「근세의 종말」 같은 저술들에서 우리는 근대정신의 본질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사유의 시급성을 논하는 대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교수 시절에 저술한, 20세기 신학의 손꼽을 성과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 신앙 - 어제와 오늘」을 봐도 근대정신의 부정적 그늘에 대한 성찰과 이의제기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근대성의 비판이 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도한 객관주의와 양적으로 계측 가능한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의 근대성 비판은 파스칼, 키르케고르, 니체 같은 전 시대의 사상가들의 예언자적인 통찰에 크게 힘입고 있습니다.
과도한 객관적, 타산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행복에 관해 새롭게 가져온 관점의 전환은 바로 자기 진실성 / 진정성(authenticity)에 대한 높은 가치부여입니다.
이제 객관적으로 좋은 삶을 실현해가는 것에서가 아니라 나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찾고 그것을 주위의 견해와 상관없이 주체적으로 고수해 가는 데서 행복의 비밀을 찾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예술가인 셈이고 그러기에 20세기 들어 예술가들의 평범치 않은 삶의 궤적들이 미화되고 영웅시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진정성’이라는 가치의 발견은 분명 큰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가 「불안한 현대사회」라는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듯, 이는 현대의 과도한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주관적 의미의 중요성에 눈을 돌린 것은 근대적 삶의 방식에 깃든 병리현상에 대한 처방이었지만 ‘진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에는 전통, 역사, 공동체와 같은 삶의 의미와 행복의 풍요한 원천을 잃고 피상적인 것들로만 가득 찬 삶으로 귀착될 수 있다고 테일러는 말합니다.
사실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듯 생의 ‘깊이’와 접촉할 수 있을 때만 논의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름지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로 유명한데, 그가 한 이 말에는 사실 ‘말할 수 없는 것’ 곧 인생의 의미의 한없는 깊이의 중요성이 함축되어 있기도 합니다. 세상의 개별적 사건들은 세상 안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세상 자체의 의미는 세상 안에 매인 관점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진정성(본래성)’ 개념을 처음으로 철학에서 다룬 하이데거는 자신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는 진정한 본래성의 체험을 ‘양심의 부름’을 통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결단성을 통해서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혜안을 음미하면서 우리는 행복과 의미라는 두 개념을 이어주는 진정한 ‘자기 진실성’은 오히려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그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행복에서 ‘초월성’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5]
현명함이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넌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널 잊지 않을게”(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현명함은 인간적인 좋음에 관계하며, 숙고할 수 있는 것이 관계한다. … 잘 숙고하는 사람은 인간적 행위로 성취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것을, 헤아림에 따라 적중시키는 사람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7장).
“글쓰기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남들이 가는 길은 걷고 싶지 않았다”(마쓰모토 세이초[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시조]).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논증의 요약
우리는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관한 생각에 공감하면서 그의 논증을 따라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통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 본질을 예리하게 드러냅니다. 그 결론으로 다다른 행복이라는 개념의 핵심적 내용들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행복은 순간적이고 사라지는 것들에만 의존할 수 없고, 또한 부분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적인 유용성을 가진 것들을 얻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삶 전체를 그 목적으로 삼고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좋은 삶’ 자체를 뜻합니다. 여기서 좋은 삶은 삶의 한순간의 스냅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뜻하지만 그것은 또한 특별한 순간에 체험되는 ‘생동감’이나 ‘기쁨’과 대립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좋은 삶은 살아있는 기쁨의 순간들이 파편이나 고립된 체험으로서 허무하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맥락 속에서 견고한 자리를 부여받고 지속적이고 항구히 발생할 수 있게 하는 샘이자 지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전체적 관점에서의 좋은 삶은 정지된 추상적인 것이거나 단지 가능성으로서만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활동’ 자체를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꽃들이 한철 찬란하게 피었다가 속절없이 지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전체적 안목에서 보면 언제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정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각각의 꽃들 없이 정원의 근사함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꽃 하나하나의 ‘화양연화’가 정원의 아름다움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듯이, 인생의 폭죽 같은 희열의 순간들 자체를 숙고된 의미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행복의 숙고’에서, 비트런드 러셀의 표현을 빌린다면 ‘행복의 정복’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방식을 발견하고 자신의 것으로 익혀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 가는 길 - 현명함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회 안에서 행위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존재이자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에게 가능한 좋은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 ‘실천적 삶(bios praktikos)’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실천이란 마치 소수의 사회참여적인 사람들에게만 관련되는 삶의 방식으로 들리지만,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모든 자유인은 실천적 삶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실현하고 행복이라 일컬어질 만한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천적 삶이란 공동체 안에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가지고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나누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인간에게 고유한 좋은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좋은 삶의 실현을 위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요구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재화나 직업적 보장 같은 현실적인 기반이기도 하겠고, 건강이나 화목한 가정, 명예 같은 무형의자산, 그리고 인격으로 대표되는 윤리적 덕성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조건들의 조화 없이는 좋은 삶으로서의 실천적 삶의 방식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러한 통합의 능력, 곧 실천적 삶의 영역에서 행복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인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현명함(프로네시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현명함’이 현대인들에게 자주 오해되는 것은 그의 개념이 포괄하고 있었던 실천적 삶의 현실적 조건과 윤리적 가치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점점 양립되기 어려운 상반된 선택지로서 이해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군주론」의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래로 자주 현명함은 생존과 성공을 위한 영리함과 책략의 기술로 환원되곤 합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이마누엘 칸트의 입장처럼 자주 현명함은 도덕성과 구분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근본적으로는 이기적인 영역의 능력으로 폄하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현명함은 훌륭한 실천적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차원의 지적인 능력을 모두 아우릅니다. 그는 단기적으로 부여된 과제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명민함으로서의 그러니까 생존과 성공의 수완으로서의 현명함의 모습을 인정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남고 나의 자리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능력은 더 높은 단계의 현명함, 곧 그때그때의 선택을 훌륭한 인생이라는 더 큰 맥락에서 수행할 수 있는 전체적 안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고 사람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명함의 가장 심오한 능력은 다름 아닌 모든 덕을 덕이게 하는 도덕적 판단력입니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윤리적 가치가 체화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명하게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생존과 성공과 도덕을 대립시키는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결코 ‘현명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현명함의 개념은 곱씹을수록 인생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합니다. 인간 삶의 현실을 냉철히 인정하면서도 이상을 간직하는 대단한 식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탄하면서도 현명함만으로 행복을 해명하기에는 뭔가 허전한 데가 있습니다. 이처럼 모범답안으로 주어진 행복의 길에서 나의 자리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객관적 행복만큼 나의 길을 걷는다는 주관적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이 의미를 묻는 순간 우리는 ‘자기 진실성’ 또는 ‘진정한 나’라는 개념과 대면하게 됩니다.
지난 세기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이었던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누구보다 심오한 사유를 하였고, 그러기에 그들은 행복의 윤리학을 의미물음의 인간학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하는 이들에겐 매우 귀중한 대화의 상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과 또 다른 몇몇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보려 합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4]
행복이란 말에 어울리는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요?
“뭐가 의미 있나 뭐가 중요하나 정해진 길로 가는데 / 축 처진 내 어깨 위에 나의 눈물샘 위에 / 그냥 살아야지 저냥 살아야지 죽지 못해 사는 오늘 / 뒷걸음질만 치다가 벌써 벼랑 끝으로 / 어차피 인생은 굴러먹다 가는 뜬구름 같은 / 질퍽대는 땅바닥 지렁이 같은 걸 / 그래도 인생은 반짝반짝하는 저기 저 별님 같은 / 두근대는 내 심장 초인종 같은 걸, / 인생아”(옥상달빛, ‘하드코어 인생아’).
“행복은 오락 속에 깃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 행복한 삶은 덕스러운 삶을 말한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 6장).
좋은 삶, 행복 그리고 인생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좋은 삶’으로 정의합니다. 행복에 관해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좋은 삶의 ‘기준’을 되도록 명료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는 좋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한 가지 분명한 출발점을 두는데 그것이 바로 매일의 삶을 인생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은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 과거의 삶의 역사, 미래의 전망, 삶의 궁극목적을 아우르는 ‘인생 전체’라는 지평에서만 의미 있게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삶의 사건들에 대한 즉각적 반응과 해석에 제한되지 않는 이러한 지평은 당연히 꽤 높은 차원의 성찰력과 반성력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삶을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존과 생명의 관점과 관련된 ‘조에’라는 그리스 단어가 아니라 품위 있게 자신을 도야해 온 인간의 전 생애를 가리킬 수 있는 ‘비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과 관련해서 말하는 인생은 단순히 순간이 긴 시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련하고 활동하여 마침내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다다른 역동적인 완성의 여정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생각하는 것은, 한 인간의 인생을 생존의 영역과 구분되는 좋은 삶이라는 규범적 이상을 통해 조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과 좋은 삶의 상관관계에 대해 분명하고도 섬세하게 추적해 가는 것을 보면서 감탄하고 머리로 납득하지만, 무엇인가 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나 일종의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는 실제의 삶이 철학자에게서 배우게 되는 성찰을 통한 품격 있는 인생의 한 장면이라기보다는, 한 치 앞을 알기 어려운 거칠고 절실한 생존의 영역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좋은 삶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시간만이 인생은 아닙니다. 인생 안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듯, ‘벌거벗은 존재’로서 살아남고자 투쟁하고 고통을 견디며 인생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인생은 언제나 그 심연에 살고자 하는 생명의 절실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 - 살아내는 것, 살아남는 것
‘인생’이라는 말은 자주 우리의 ‘심간’에 파문을 일으키며 ‘미혹’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고작 두 음절의 이 짧은 단어를 혼자 앉아 천천히 발음해 보면, 갑자기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뒤엉켜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회에 젖는 이유입니다.
이 낱말을 담담함과 단순한 긍정에서 말할 수 있는 이라면, 다른 모든 외적 기준과 상관없이 이미 좋은 인생을 살아온,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훨씬 많은 이에게 인생이란 말은, 단순한 기쁨이나 우아한 관조이기 이전에 고뇌와 처절함의 상흔이 어린 생존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실에서 인생은 ‘좋은 삶’의 성찰과 실천의 아름다운 결실 이전에, 우선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절박함 속에서 견뎌내고 살아낸 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서와 고금의 성현들이 밝혀낸 인생에 대한 아름답고 영롱한 지혜를 대할 때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인생은 왜 나의 인생과는 이리도 다른가!’ 하고 탄식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는 기준에 나의 인생을 비추어보며 부끄러워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생을 살아낸 것이, 생존 투쟁에서 자신과 가족을 지킨 것이,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살아남는 것’ 자체의 소중함과 가치를 말해주는 이를 만날 때 한없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제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애니메이션 ‘원령공주’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죽음을 안겨다 줄 수 있는 문화와 기술의 시대에서 ‘살아남아라.’라는 단순하지만 엄숙한 가르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읽은 뛰어난 두 편의 중국 소설들을 통해, 곡절 많은 인생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나라에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현대 중국의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위화의 「인생」이라는 소설입니다(중국의 대표적 영화감독 장예모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 푸구이가 파란만장하고 쓰디쓴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작품은 위화보다는 한 세대 앞선 작가 모옌의 대작인 「인생은 고달파」입니다. 천 쪽이 넘는 이 소설에서 저자는 구비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입담으로, 주인공 서문뇨가 현대 중국의 격동의 50년을 관통하여 견뎌내고 ‘살아내는’ 인생길을 슬픔과 해학, 설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냅니다.
절실하게 좋은 삶을 생각한다는 것
위화와 모옌의 소설은 살아남는 것 자체의 고귀함을 예찬하고 응원하고 위무합니다. 그런데 살아남음을 정말로 진실하고 절절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역설적으로 좋은 삶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말없이 전합니다.
인생이 살아내는 것, 견디어내는 것, 살아남는 것이라는 무거운 진실을 외면하는 철학과 사상은 공허한 말잔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좋은 삶이라 말하는 것은 생존의 시간과 격리된 곱디고운 순수한 사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절실한 마음의 일이어야 합니다.
또한, 좋은 삶을 바라고 묻는 것이 인생의 고통을 잊는 한순간의 위안의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꾸려는 결심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살아남음의 장함’은 결국은 좋은 삶의 길에서만 충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납득하는 사람만이, 행복을 탐구하는 여정에 절실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생존의 시간의 무게와 좋은 삶의 절실함을 아는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3]
행복은 정말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요?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새벽바람처럼 걸어, 거니는 그대여”(심규선 Lucia with 에피톤 프로젝트).
“그런데 그것은 온 생애를 통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봄이 오는 것도 아니요, 하루아침에 그리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인간이 복을 받고 행복하게 되는 것도 하루나 짧은 시일에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6장).
변해가는 마음, 사라지는 행복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유명한 문장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시작입니다. 몇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법한 얼핏 보면 통속적인 소재에서 그 시대와 사람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독자들을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절실한 통찰에 이끄는 힘에 이 소설의 비범함이 있습니다.
시작 문장 역시 걸작에 어울리게 단순하면서도 심오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사상과 심리를 알아갈수록 이 문장은 명제가 아니라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아무튼 이 긴 호흡의 작품을 읽어가며 독자들은 불행만이 아니라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비극을 보면서 인생이란 대체 어디서 왜 어긋나게 되는 것인지를 곰곰 따져보게 되고, 또 다른 등장인물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 자신이 이 작품을 쓰던 40대에 고민하였을, 훌륭한 삶을 위한 ‘결정적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합니다.
좋은 문학작품이 늘 그렇듯 「안나 카레니나」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삶을 함께 체험합니다. 그 삶은 욕망과 만족과 공허가 끊임없이 서로를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격전지입니다. 소설에서 안나는 (아마도) 한때는 그녀에게 상류사회에 자리 잡았다는 만족감을 주었을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을 점차 위선과 허위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그녀에겐 새로운 행복의 돌파구였던 브론스키와의 격정적 사랑 역시 결국엔 환멸과 증오로 변해갑니다.
톨스토이의 냉정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욕망이 충족을 통해 행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변해가는 마음과 함께 또 다른 욕망으로 바뀐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됩니다.
욕구의 충족이 행복의 비밀이라는 상식이 이렇게 변해가는 마음 앞에서 좌초하는 것은 소설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끊임없이 만나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마음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주하는 욕망은 나의 주위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의 세계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변화 안에서 행복은 순간과 한철의 즐거움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우리의 ‘올바른’ 상식은 우리에게 항구함에서 행복을 찾으라 합니다. 그러기에 욕망에서 행복을 찾는 생각은 모순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러한 모순을 인식하는 것을 바로 행복에 대한 철학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구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나라인 마케도니아 출신으로서 고대 그리스 시대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 정착해 활동한 철학자입니다. 스승 플라톤, 플라톤의 스승이자 철학자의 대명사 격인 소크라테스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지닌 진정한 의미의 고전철학을 세웠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철학에는 크게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서양철학은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의 궁극적 이치를 탐구한 자연철학자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두 명의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존재와 생성이라는 철학의 심오한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는 철학을 인간사로 이끌어와 수사학과 권력의 기술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대중화시킨 소피스트들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철학자들이 내세운 질문들과 논증들을 비판하기도 하고 심화시키기도 하면서 존재와 인간사 모두를 포괄하는 철학의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인간사에 관련해 그들은 무엇보다 특별히 삶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행복에 대한 질문 역시 이러한 성찰에 속합니다. 그들의 철학의 내용과 태도는,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 대한 예리한 관찰에서 시작해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의 세계로 다가가고 반대로 윤리적인 가치를 깨닫는 것과 매일매일의 삶을 만나게 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고전적 철학을 가장 명료하고 체계적으로 종합하였고, 우리는 우리 탐구의 주제인 행복에서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와의 ‘대화’를 통하여 적절한 출발점을 발견하고 긴 여정의 안내를 받게 됩니다.
행복의 자리는 선에 있는가, 욕망에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행복을 우선 욕망이라는 현상을 통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현상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 윤리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좋음(선)”이라는 개념과 연관시킵니다. 그런데 스승들의 철학적 탐구를 이어받되 사람들의 상식과 접점을 찾아서 행복을 ‘인간의 선’ 안에서 이해합니다. 여기서 선이란 도덕적 가치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건강, 부, 지위, 성공, 좋은 인간관계들, 긴 수명, 미모, 행운 모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가 애써 살아가는 이유가 좋은 것들을 추구하고 욕망하는 것이기에 어느덧 ‘좋음’이 곧 욕망의 대상인 것으로 쉽게 오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오해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관계를 반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이 오해인 이유는 욕망과 좋음에 대한 관계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좋음’을 통해 욕망에 대해 말하고 평가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욕망을 통해 ‘좋음’의 내용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욕망과 행복 사이의 모순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도에 있습니다. 욕망이 선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에 반성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은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참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불일치의 이유를 욕망에서 찾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에서 볼 때 행복의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됩니다. 먼저 행복이 지속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 하나의 사건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바라봐야 하고 이러한 인생을 규정짓는 삶의 방식에 입각해 행복을 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욕망이 좋음에 의해 질서 있게 정향될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가 반성되지 않은 욕망에 의해 단지 좋은 것으로 보이는 대상에 고착되어 살아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행복은 좋은 삶이며 그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바로 행복에 대한 탐구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아닌 생 전체를 말하는 행복의 정의는 충분한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떤 삶이 다른 삶보다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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