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노벨상수상 강연>2024.12.08 스웨덴 한림원
빛과 실-오래된 서류철에서 8살 때 일기장에서 시집 [빛과 실]을 찾아 냈다.
사랑이란 어디에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엇일까?
가슴과 가슴 사이를 이어주는 금실이지.
나의 글쓰기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12살 때 광주를 뒤로 하고 서울로 이사를 갔는데, 그해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때쯤 우연히 서가에 거꾸로 꽂혀 있던 광주학살의 현장 사진첩을 볼 때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두 가지 상반되는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다.
군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 주검의 사진을 보고는;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군인들의 총격에 의해 다친 사람들에게 자진해서 헌혈하는 시민들을 보고;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그 이후 글 쓰는 작가가 되어 시와 단편, 장편 소설을 썼다. 특히 장편소설을 쓰는 데는 3년에서 7년씩 걸렸다. 삶을 글과 맞바꿈 하는 것이었다. 온 몸으로 글을 써는 것이었다.
<채식주의자>는 독자에게 던지는 역설과 질문의 형식으로 써진 소설이다. 한 인간이 완전히 결백한 존재로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포기하면서까지 기꺼이 식물이 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희랍어 시간>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감촉하는 것으로 우리는 서로 소통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인간의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연한 부분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언젠가 사랑, 따뜻함에 대해 장편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홀연히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려 있는 걸 깨달었다. 광주와 제주에 일어났던 비극적 역사였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 때, 광주는 더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 우리에게 광주는 시공간을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다.
광주항쟁 민주화투쟁에서 전남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며 죽기로 결심한 15세 박동호의 수기: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며 아프게 합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동호의 수기를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망월동 묘지를 찾을 때마다 눈꺼풀에 맺힌 태양의 주황빛 따스함은 생명의 빛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죽은 자에게 내 몸과 말과 마음을 빌려드려 그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과거가 현재를 도우며,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꽂혔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런 압도적 폭력에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인간이 같은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폭력성과 잔혹함, 사랑과 연민의 이 극명한 양면을 가진,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의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걸으려면 죽은 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소년이 온다>는 그렇게 태어났다. 어둠에서 깨어난 소년이 현재로 다가옵니다. 참혹과 폭력속에서 걸어 나와 지금 여기 당신에게로 다가옵니다. 그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얼마나 참고 견디며 사랑해야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사랑이란 어디에 있을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꿈 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생명은 살고자 한다. 생명은 따뜻하다. 죽음은 차갑다. 죽인다는 것은 차갑게 만드는 것이다. 1948년 학살(4.3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겨울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심해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촛불을 밝힌다. 잔혹함의 밑바닥에서 생명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사랑하는 사람의 뼈 한조각을 붙들고 애도를 종결하지 않는 할머니가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이다. 고통과 사랑이 같은 온도로 끓고 있는 사람이다.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가? 작별하지 않는 사람들의 가슴들은 금실로 연결된다. 소설을 쓰는 내 작업은 ‘세계는 왜 폭력적이며, 동시에 왜 이토록 아름다운가?’ 라는 두 가지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라고 일관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여기에 대한 의심이 일어났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랬고 나의 첫 소설 때부터 언제나 사랑을 향하고 있었던 아닐까? 사랑이란 나의 심장이라는 개인적 장소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과 가슴을 사이를 이어주는 금실로 존재하는 건 아닐까? 나의 언어는 전류가 되어 가슴과 가슴을 잇는 실이 된다. 그 실에 접속된 사람의 가슴에서 공감이 일어나는 순간 세계의 불빛이 켜진다. 그것은 영원으로 부풀어 오를 만큼 찬란한 순간이다. 제 언어의 금실에 연결되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