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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 : 17. 나무와 열매 18. 열매 19.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 20. 열매로 안다
마 7 : 17. 나무와 열매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요한일서 3: 10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분별된다.
1]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목사와 거짓 목사를 구별해야 한다.
그 기준은 그의 행위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이처럼, 사람은 그의 행위로 판별한다.
참된 생명은 단순히 말에 있지 않고 인격과 삶에 있다. 그의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구별된다.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마 7 : 18. 열매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1]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요일 3: 10 -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구별된다.
또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가 찍혀 불에 던져지듯이, 불 경건, 불의, 악, 거짓을 행하는 목사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다.
마 7 : 19.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들이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불경건, 사욕(私慾), 불의, 악, 교만, 거짓을 추구하고 행하는 목사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참된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자들은 참으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던져질 것이다.
1]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것은 거짓 교훈과 악 사상의 무리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는 악 사상의 소유자들로서 심판을 받은 일이 많다. 그러나 최후 심판이 오기 전에는 이 무리가 다시 일어난다.
이는 마치 밭에서 잡초를 제하여도 얼마 후에 다시 잡초들이 나옴과 같다.
2]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마 7: 15-19 )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찰리 채플린의 일화이다. 하루는 그가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 그곳에서는 마침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만큼 채플린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유명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다. 모두들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다.
그런데 심사 결과가 재미있게 나왔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 했다. 그는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이다.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화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어떤 참기름 가게에 가면 이러한 간판이 붙어있다.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 참기름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미 "참" 자가 붙어있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그 앞에 수식어가 3개나 더 붙어있다. 이처럼 세상에는 가짜가 많은 것이 항상 문제다.
이런 가짜만이 아니다. 종교에도 가짜가 있다. 우리 하나님 말고는 다 가짜다. 신앙에도 가짜가 있다. 마음에 예수가 없으면 가짜다. 일군에도 가짜가 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다. 요즘 예수 이름으로 나타난 이단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주님은 거짓 선지자 구별법을 가르쳐 주셨다.
(1) 외형으로 보지 말라.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 구별법으로 외형으로 보지 말라고 하셨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으로 봐서는 안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했다. 그들은 상당한 학문과 신앙생활 잘하는 척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 삼상 16: 7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교회 밖에도 이단이 많지만 안에도 이단이 많다. 사람들은 진짜 큰 이단 천주교가 위험한 줄을 모른다. 버젓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부정하고 십자가 대속을 부정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이단도 있다. 그들은 연구한 실적은 많아 학위는 풍부하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아 쓸데없는 것만 연구했다. 신앙을 사회개혁 정도로 생각하는 민중신학도 이단이다. 그럼 이단과 사이비를 어떻게 분별해낼까?
(2) 삶의 열매로서 분별하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요즘은 접목술이 발달하여 온갖 요술을 다 부리지만 일반적으로 나무에서 다른 열매가 맺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문으로 말하면 "선목선실, 악목악실"이다. 나무가 선해야 열매도 선하고, 나무가 악하면 열매도 악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을 따라 살면 참 선지자지만 육신으로만 살면 거짓 선지자다.
신기하게도 이단 사이비 교주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다. 세금포탈이나 공금 횡령뿐 아니라 상습적으로 간음한다든지 거짓으로 속이고 감금하며 나쁜 짓을 많이 한다.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전도에 도입하는 이단도 있다.
(4)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종말을 말씀하셨다.
19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것은 과수원을 하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불에 던져야 한다.
* 마 13: 41-42 –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거짓 선지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런데 이단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사람 생각이 거짓 선지자다. 우리에게서 악의 열매가 열리면 지금 신앙에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회개해야 한다. 환경 탓이나 남이 탓이 아니다. 그게 작용하여 사건이 촉발되는 건 사실이지만 범죄한다면 이것은 더 근원적인 문제다. 마음이 하나님과 말씀을 떠나 있고 성령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이 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 4-5)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 23-24) 하셨다. 우리는 모두 말씀에 서서 밖의 거짓 선지자는 물론 자기 안의 거짓된 생각에 미혹 되지 말고 참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마 7 : 20. 열매로 안다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구별된다.
1]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은 판연히 구별된다. 진실한 종들과 위선자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또한 그들의 최종적 처소인 천국과 지옥도 판연히 나누인다. 불경건, 불의, 거짓, 악을 행하는 거짓 목사들은 불, 곧 지옥의 불에 던진다.
2] 아름다운 열매 ( 마 7: 16-20 )
세상에는 선한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있다. 본문은 이들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와 이들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다.
거짓 선지자는 그들의 열매에 의해 알 수 있으므로 이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본문이 주는 경고의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거짓 선지자들의 가장 큰 특색은 위장이다. 그들은 선지자와 같은 선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위장을 한마디로 양의 탈을 쓴 이리로 표현했다.
그것은 그들이 양 같은 순전함과 거짓 없는 단순함으로 위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순수함과 선한 모습으로 나아오지만 그들의 목적은 노략질하며 성도들을 미혹하여 멸망으로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는 양들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만을 부지하려는 자들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특성이 있다.
첫째, 거짓 선지자는 보냄을 받아서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유익과 목적을 구하기 위해 나아온 것이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아 나온 것이 아니다.
둘째, 거짓 선지자는 우리들에게 넓은 문을 제공한다.
그들은 편하고 쉬우며, 안락한 넓은 문으로 우리를 미혹하여 결국에는 타락과 멸망을 가져온다.
(2) 주님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를 알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다.
① 자신의 가르침에 모범을 보고 알 수 있다.
참 목자는 양들이 가야 할 곳을 알려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양들의 앞에 서서 양들을 직접 인도하고 앞장선다. 따라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첫 번째 방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에 솔선수범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면 된다.
거짓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많은 짐을 지우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의 가르침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참 선지자는 갈 길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먼저 그 길로 행함으로 참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 준다.
②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듯이 거짓 선지자에게서는 거룩함과 성결의 열매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그럴듯하게 들려도 그들의 생활이 무절제하고 엉망이며 경건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참 선지자가 아님을 깨닫고 그들의 가르침에 미혹되지 않아야 한다.
(3) 주님은 우리의 열매를 원하신다.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다. 하나님은 꽃에 의해서 그들을 평가하지 않으신다. 오직 열매로 그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는 무엇인가?
① 사랑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의 열매이다. 진실한 성도는 이기적이지 않는다. 만약에 스스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메마른 이기주의로 흐른다면 그는 아직까지도 사랑의 그리스도 안에 깊숙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다.
② 겸손의 열매다.
주님의 삶은 겸손으로 시작하고 겸손으로 종결되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타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겸손으로 시작하여, 모든 인류의 더러운 죄를 입고 돌아가시므로 종결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덕목이 겸손이다. 타인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모든 일에 겸손을 보임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③ 자기를 부인하는 열매다.
자기중심의 생각은 모든 편협과 아집의 근원이다. 그리하여 독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다.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쳐 놓은 이기주의와 편협주의의 철창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다.
(4) 거짓 선지자들의 결말
본문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을 말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거짓 선지자들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지자들이다.
따라서 본문 말씀의 심판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 받고 귀한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날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나무가 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된다. 우리의 발밑에는 언제나 날 선 도끼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3] 가르치는 자를 시험해 보라 ( 마 7: 15-20 )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설교자와 교사들을 그들의 열매로 시험하라고 말씀한다. 두 가지로 그들을 시험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설교자의 삶의 열매를 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교리의 열매를 보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의 삶의 열매가 완벽하게 아름다우면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면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속게 되어서 사탄의 열매들을 맺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설교자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에 사로잡히기에 그가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옳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다우면 그의 가르침도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보고 조심하라고 했다. 또 다른 시험도 마찬가지인데, 설교자가 너무나 아름다운 진리와 엄청난 교리를 가르치지만 그의 삶에서 열매가 썩어버리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옳으니 그의 삶도 괜찮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보라고 한다.
* 요 8: 36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본성이 자유할 때만이 바른 설교자와 교사가 될 것이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당신은 성령으로부터 보복심을 받는 경우나 하나님으로부터 신경질적인 마음을 받는 경우가 없다. 하나님이나 성령으로부터 자기도취에 빠진다거나 육체의 정욕에 빠지는 그러한 마음을 받는 적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단코 이러한 행동들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산상 수훈을 살펴보면서 성령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집중적인 관계를 맺을 것을 강권하시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성령의 표준은 주의 자녀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하는 점이다.
(1) 겉치레의 가능성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서 주님은 가장 위험한 교사들을 서술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사탄의 영이 있는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한다.
겉치레를 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쉽다. 우리의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우리에게도 경건의 겉치레가 바로 따라온다. 요한일서 1: 7은 성도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을 제시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 뜻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려야만 하거나 숨겨진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한, 경건의 겉치레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물론 겉치레는 자신의 목적과 성공을 위하여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위선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반드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겉치레를 먼저 조심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이기는 쉽다. 말하고 설교하는 일은 쉽다. 잘못된 삶으로 지옥으로 보내는 설교도 쉽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바울은“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 27)라고 고백하였다.
말의 표현이 화려할수록 그 진리가 삶 가운데 나타날 확률은 낮아진다. 여기에 설교자에게는 청중에게 없는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은 무엇을 설교한 후에 본인이 그렇게 살지 않아 그 설교 내용이 아무 효력이 없게 된다. 또한 설교자는 그 표현에 있어서 절제(금식)가 필요하다. 화려한 말을 하려는 자세나 멋진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 욕구, 세상 문화에서 귀히 여기는 것들을 끌어들이고 싶은 충동을 삼가(금식)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있어서 절뚝거리게 만든다. 대신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금식은 음식을 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자기도취에 빠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금식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면서 기뻐하는 경향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솔직하게 말할 뿐이지 바르게 행동할 의도가 전혀 없다. 이는 자기도취에 빠졌을 뿐이지 조금도 변한 것은 아니다. 솔직하다고 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교하고 교활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옳은 것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변화된 바른 삶이 없기 때문이다.
(2) 인내할 자리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 경고는 너무 쉽게 과격한 열심을 가지고 이단 시비를 가르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하신다.
* 눅 9: 51-56 –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당신의 육에 속한 의심을 성령의 분변이라고 오해하는 것을 주의하기를 바란다. 열매만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삶의 열매가 가시나무의 열매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는 나쁜 뿌리가 있다. 가시나무 뿌리가 아닌 것에서 가시나무의 열매를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겨울에는 당신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장미 나무와 가시나무를 구별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따라 속을 필요가 없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열매를 기다리라는 의미다. 우리는 우리의 특별한 확신을 그리스도의 기준으로 삼고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보며 깜짝 놀라는 가운데 그들을 타락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확신이 우리 안의 하나님 자리를 차지해 버렸기에 이렇게 무섭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확신의 빛 가운데 걸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걸으라고 말씀하셨다.
언제나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을 거절하는 것과 복음 자체를 거절하는 것의 차이점을 구별하라. 아마도 당신이 진리를 제시하는 당신의 방법을 거절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뜻이 반드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인내의 자리를 만드시오. 당신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기다리시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시간이 지나면 옳은 가르침은 옳은 열매를 맺을 것이요 잘못된 가르침은 잘못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3) 행함의 원칙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당신의 개인적인 삶을 보고 정말로 그러한가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한 권리가 있다. 만일 당신이 거듭났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정말로 그러한가를 자세히 점검받아야 한다.
만일 우리의 삶의 행함이 꾸준하게 거룩하려면 우리의 삶의 원칙이 거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좋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행기가 새를 모방하는 것은 가능하듯이 사람이 성령의 열매를 모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각각에 있어서 같은 것인데 그 뒤에 생명의 원칙이 없다는 점이다. 비행기는 일관적으로 날아다닐 수 없다. 간헐적으로 나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성령을 모방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없도록 자신을 차단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면 비슷하게 가는 것 같다. 우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올바르게 행동하려면 내면의 원칙이 올바르게 서야 한다. 곧, 위로부터 거듭나며 성화 되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의 삶은 열매를 드러낼 것이다.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는 서신서에서 선명하게 설명해 놓았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은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보증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을 드러내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 요 15: 1-5 –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4)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의 힘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공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으로 사람을 시험한다. 주님도 그의 대부분의 삶을 공적으로 사셨다.
* 요 18: 20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우리 주님의 원수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행한 일들이었다. 주님의 기적은 주의 능력을 공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오늘날 공적으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 그렇지. 나는 성도의 삶을 살고 있지. 그러나 아무에게도 내가 성도라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분명 성도가 아닐 것이다. 공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는 같이 가게 되어 있다. 만일 무엇이든지 그 뿌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밖으로 나와서 공적으로 드러나길 원한다. 분명하게 외부로 나타나야 하며 공적이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공적으로 나타나기를 격려하셨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좋든 나쁘든 밖으로 나와서 보여야 한다.
* 마 10: 26 -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사람들이 그들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숨길 수 없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결국 공식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나타나 알려지게 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공식적으로 증언할 때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를 경고하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악한 사람들이 두려워서 네 빛을 발 아래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에 역행함으로 당신의 영혼과 몸이 지옥에서 파멸될 것을 주의하라.
* 마 10: 16 –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우리 주님은 주님의 제자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결국 주님의 원수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께서 주의 보좌 위에 계신 것이 분명하심 같이 불가피한 원칙은 반드시 그대로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실제로 누구인가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밝은 해 아래로 끄집어내신다.
바울은 성화와 음란을 짝지어 말했다. 이 뜻은 모든 종류의 고상한 영적 감정이 정상적으로 삶을 통하여 표현되지 않으면 잘못된 차원에서 반응하게 된다는 뜻이다. 자연 세계에서도 사람이 건강하기 위하여 외부와 접할 필요가 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 공적이며 또한 열린 외부적인 부분은 성경이다. 성령은 계시 된 사건의 세계로 만일 우리가 성경의 세계에서 살면 우리의 뿌리는 건강하고 우리의 삶은 올바르게 된다.
“나는 전에 한번 경험이 있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요점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근원에 마음을 두라. 그렇게 하면 당신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삶 속의 어떤 의식적인 경험에 사로잡히면 결국은 전혀 소용이 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