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7328]花潭서경덕(徐敬德)-山居(산거)2首
山居(산거) 二首
작자 : 徐敬德(서경덕)
(본문1)
雲巖我卜居(운암아복거)
운암에 내가 살게 된 것은
端爲性慵疏(단위성용소)
모두 성질이 게으르고 못 사귀기 때문이네
林坐朋幽鳥(임좌붕유조)
숲에 앉아 조용한 새와 벗하고
溪行伴戲魚(계행반희어)
시냇가에 가서 노니는 물고기와 짝하네
閒揮花塢帚(한휘화오추)
한가로이 꽃 언덕을 빗자루로 쓸고
時荷藥畦鋤(시하약휴서)
때로 약초밭에 호미질을 하네
自外渾無事(자외혼무사)
세상 밖에 전혀 아무 일 없으니
茶餘閱古書(다여열고서)
차 마신 뒤에 옛글을 읽네
(본문2)
花潭一草廬(화담일초려)
화담의 한 초가집이
瀟洒類僊居(소쇄류선거)
맑고 깨끗하니 신선집 같네
山簇開軒面(산족개헌면)
산들은 옹기종기 집 앞에 펼쳐졌고
泉絃咽枕虛(천현열침허)
샘물 거문고 소리 허공을 베고 울리네
洞幽風淡蕩(동유풍담탕)
골짜기 그윽하니 바람이 돌아가고
境僻樹扶疏(경벽수부소)
경계가 궁벽하니 나무도 무성하네
中有逍遙子(중유소요자)
그중에 소요하는 사람 있어
淸朝好讀書(청조호독서)
맑은 아침에 독서를 좋아하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이다.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다.
스승없이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특이한 독학 방법은 벽에 한자를 붙이고 그 한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궁리하였다고 한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 최고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일부러 비가 오는 싸늘한 날에는 자신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서경덕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그를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는 설이 있다. 스승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도 유명하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개성의 송도삼절로 꼽힌다.
이 시는 산에 살면서 누리는 한가로운 정서를 노래했다.
자연 속 운암에 살면서 세상 밖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차를 끓여 마신 뒤에는 한가롭게 옛글을 읽는다.
화담에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맑고 깨끗하여서 마치 신선이 사는 집 같다.
山居(산거)-산에 살며
花潭서경덕(徐敬德)
其 1
雲巖我卜居(운암아복거) 운암에 내가 자리 정해 살게 된 것은
端爲性慵疏(단위성용소) 오로지 성품이 게으르고 거칠어서지
林坐朋幽鳥(림좌붕유조) 숲에 앉아 그윽하게 새와 벗하고
溪行伴戲魚(계행반희어) 냇물에 가서는 고기와 짝해 노니네
閒揮花塢帚(한휘화오추) 한가롭게 꽃 언덕을 빗자루로 쓸고
時荷藥畦鋤(시하약휴서) 이따금 약초 밭을 호미로 맨다네
自外渾無事(자외혼무사) 스스로 외인으로 여겨 흐린 일 없고
茶餘閱古書(차여열고서) 차 마시며 여유롭게 옛 책을 본다네
其 2
花潭一草廬(화담일초려) 꽃 있는 못에 한 초가집이
瀟洒類僊居(소쇄류선거) 맑고 깨끗해 신선의 거처와 유사하네
山簇開軒面(산족개헌면) 산 무리 향한 집은 열려 마주하고
泉絃咽枕虛(천현열침허) 샘물은 거문고 줄이라 빈 베게를 울리네
洞幽風淡蕩(동유풍담탕) 골짜기 그윽해 바람은 맑고 넓으며
境僻樹扶疏(경벽수부소) 경계가 외진 곳이라 나무는 퍼져 무성하네
中有逍遙子(중유소요자) 그 가운데 소요하는 사람이 있는데
淸朝好讀書(청조호독서) 맑은 아침이면 글 읽기를 좋아 한다네
(번역 한상철)
원문=한국고전종합 OB花潭先生文集卷之一 / 詩
山居
雲巖我卜居。端爲性慵疏。林坐朋幽鳥。溪行伴戲魚。
閒揮花塢帚。時荷藥畦鋤。自外渾無事。茶餘閱古書。
二 明詩綜。簇作色。面作近。絃咽作聲到。朝作晨。好作閒。
花潭一草廬。瀟洒類僊居。山簇開軒面。泉絃咽枕虛。
洞幽風淡蕩。境僻樹扶疏。中有逍遙子。淸朝好讀書。
山居(산거) - 화담 서경덕?
산에 살면서
花潭一草廬(화담일초려) : 개성 땅 화담에 초가 한 간
瀟灑類僊居(소쇄유선거) : 신선처럼 맑고 깨끗하게 산다네
山簇開軒面(산족개헌면) : 앞쪽 창 열면 뭇 산들이 모여들고
泉絃咽枕虛(천현열침허) : 샘물은 베개머리에서 거문고처럼 노래하고
洞幽風淡蕩(동유풍담탕) : 골이 깊으니 바람소리 맑고 시원해
境僻樹扶疎(경벽수부소) : 사는 곳 구석지니 나무 울창하구나
中有逍遙子(중유소요자) : 이 가운데 한가하고 자유로운 사람 있으니
淸朝好讀書(청조호독서) : 청명한 아침 책 읽기를 좋아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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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살다 [서경덕(徐敬德)]
화담 연못 가에 있는 초가집 한 채 / 花潭一草廬
깨끗해서 마치 신선 사는 데 같아 / 蕭洒類仙居
산빛은 마루 바짝 펼쳐져 있고 / 山色開軒近
냇물 소리 침상맡에 들려 온다네 / 泉聲到枕虛
동 그윽해 바람은 조용히 불고 / 洞幽風澹蕩
땅 궁벽져 나무들은 우거졌는데 / 境僻樹扶疎
그 가운데 소요하는 사람 있어서 / 中有逍遙子
첫새벽에 글을 읽는 소리 들리네 / 晨朝聞讀書
송도 서화담 서경덕
본관은 당성(唐城),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복재(復齋)이다.
송도(松都, 개성의 옛 이름) 화담(花潭) 부근에 서재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화담이라는 별호로 더 알려져 있다.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송도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여
황진이(黃眞伊),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 3절(松都三絶)’로 불리기도 한다.
1489년(성종 20년) 황해도 개성 화정리(和井里)에서 종8품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서호번(徐好蕃)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급 무관의 집안에서 태어나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탐구심이 많아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들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이치를 생각하느라 밤늦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14세 때에는 <서경(書經)>을 공부하다가 태음력(太陰曆)의 수학적 계산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터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8세 때에는 <대학(大學)>에서 “그 뜻을 성실히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하고,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 있다”는
구절을 읽고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格物)을 하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탄식하고는 만물의 이름을 벽에 써서 붙여 두고
날마다 그 사물의 이치를 깊이 탐구했다고 한다.
19세 때에 종6품 선교랑(宣敎郎) 이계종(李繼從)의 딸인 태안 이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21세 때인 1509년(중종 4년)에는 경기ㆍ영남ㆍ호남 지방을 돌아보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잇따른 사화로 수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당했다.
게다가 서경덕은 우주의 근원과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데 학문의 뜻을 두고 있었기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개성 화담 부근에 서재를 짓고 은거하여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제자를 받아들여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1세 때인 1519년(중종 14년)에는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1522년에는 조식(曺植)ㆍ성운(成運) 등과 지리산ㆍ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고,
여러 편의 기행시를 남기기도 했다.
43세 때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식년시(式年試) 생원과(生員科)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으나 대과(大科)에 응시하거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1540년에 다시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1544년 조정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그 해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하여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1546년(명종 1)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개성의 숭양서원과 화곡서원에서 제향(祭享)되었다.
1567년(명종 22년)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1575년(선조 8년)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전해진다.
제자로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지은 이지함(李之菡), 허균(許筠)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박주(朴洲)ㆍ남언경(南彦經)ㆍ민순(閔純)ㆍ이구(李球)ㆍ박민헌(朴民獻)
ㆍ홍인우(洪仁祐)ㆍ장가순(張可順)ㆍ이중호(李仲虎) 등 수많은 문인이 있었다.
그러나 서경덕의 주기(主氣) 철학은 후대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경세론이나 윤리설보다는 형이상학적인 본체론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학파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의 제자인 허엽은 동인(東人)이 되고, 박순은 서인(西人)이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나뉘었다.
철학사상
서경덕은 성리학 뿐 아니라 도가 사상이나 역학(易學)ㆍ수학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는 학문을 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를 중시하였고, 성현의 말이라고 해서
그대로 따르지 않고 스스로 회의하고 사색하여 깨닫는 자득지학(自得之學)을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 사물의 이치를 따지지 않고 독서에만 의존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라고 비판하며,
직접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성현을 본받고 따르는 의양(依樣)을 강조했던 이황(李滉) 등
다른 성리학자들과는 많이 다르다.
이황은 “사물을 직접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자부하지 않았고 또 설사 안다고 해도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우니 오직 성현을 따르는 것이 배움의 가장 온당한 방법”이라며
의양을 강조했으며,
서경덕에 대해서는 “그의 학설에는 한 편도 병통(病痛)이 없는 게 없다”며
매섭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이(李珥)는 “화담(花潭)은 자득(自得)이 강한데,
퇴계는 의양의 맛이 많다”고 하면서,
서경덕의 깨달음이 이황과 같이 독서에 의존하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경덕은 격물을 중시하며, 독서에만 의지하기보다는 자연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합리적 사유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려 했으며,
주돈이(周敦頤)ㆍ소옹(邵雍)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사상을
재해석하여 기(氣)를 중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제창했다.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희의 사상을 표준으로 삼아 이(理)와 기(氣)를
서로 독립된 실재로 구별해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理)가 기(氣)에 앞서며, 이(理)가 기(氣)를 주재(主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기(氣) 바깥에 이(理)가 없다”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에서 만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였다.
그는 장재(張載)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는데,
태허를 ‘하나의 기(一氣)’로 보았다.
태허의 기가 아직 발하지 않아 말끔하여 형체를 갖추지 않은 상태를 선천(先天)이라 하고,
이미 발하여 만물로 형상화된 상태를 후천(後天)이라 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생멸과 변화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기(氣)의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선천의 기는 본래 하나이지만, 그것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천지만물의 변화가 나타난다.
선천의 일기(一氣)는 형체를 갖추지 않아 감각할 수 없지만,
후천의 기는 형체를 갖추어 감각할 수 있다.
그러나 기(氣)가 새롭게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기(氣)는 소멸되지도 않는다.
이것을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라고 하는데, 서경덕은 이를 촛불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촛불을 켜면 초가 점차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氣)가 흩어져
형체가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사람이 생겨나는 것은 기가 모이는 것이고,
죽는 것은 기가 흝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서경덕은 기(氣)의 운동은 다른 무언가에 주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서경덕은 이(理)가 기(氣)를 주재한다고 본 주자학과는 달리
기(氣)가 스스로의 작용으로 만물로 형상화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기(氣)보다 앞서 존재할 수 없으며,
이(理)는 단지 기(氣)의 작용으로 형상을 갖춘 후천(後天)의 질서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이(理)와 기(氣)는 서로 구별되는 실재가 아니라,
이(理)는 단지 기(氣)의 운동을 법칙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관점이 제시된다.
서경덕의 사상은 이황을 비롯해 주리론(主理論) 계열의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았지만,
이이 등 주기론(主氣論) 계열의 학자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쳤다.
이이는 서경덕의 사상이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요체를 분명하게 터득했다며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서경덕의 일기장존설 등은 비판하며 이(理)를 궁극적 실체로 인정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주기(主氣)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맥을 이은 임성주(任聖周)는
성즉기설(性卽氣說)을 주장하며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기일원론의 관점에서
기의 활동만으로 우주만물이 표현되며
이(理)는 기(氣)의 작용을 설명해 주는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