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라워호와 매스터호
1620년 8월 14일, 102인의 puritans라는 청교도들이 탄 두 척의 범선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스피드웰 호와 메이플라워 호였다. 스피드웰 호가 고장이 나자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타서 미국으로 향했다. 험한 바다를 120일 만에12월 11일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 폭풍우 때문에 처음의 목적지 버지니아에는 도착하지 못하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들이 10년 후 보스턴 주변으로 대 이주를 하여 뉴잉글랜드 퓨리터니즘의 기수가 된다.
청교도란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반대한 신교도로서 교리를 정화(淨化)하여 실천하자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영국 정부가 신교도를 탄압하자 처음에는 네덜란드로 망명했지만 거기서도 종교적 자유가 주어지지 않아 미국을 선택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원주민 인디언들과의 마찰, 가혹한 자연 환경 그리고 황무지를 피와 땀으로 개간하며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이상 실현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이들 102명을 오늘날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영국 뉴잉글랜드 최초의 이민(移民)인 102명의 청교도를 '필그림 파더스' 라 부른다. 이들을 북아메리카로 수송한 선박은 무게 180t, 길이 27.5m, 돛 3개를 가진 범선이다. 원래는 포도주를 운반하던 상선(商船)이었다. 1620년 8월 14일 사우샘프턴을 출항했으나, 같이 출항했던 스피드웰호가 누수(漏 水) 고장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 같은 해 9월 16일 단독으로 영국의 플리머스 항(港)을 출발해 미국으로 향하였다. 11월 19일에 케이프코드만(灣)을 경유하여 12월 11일 오늘날의 프로빈스 타운에 입항하여 선박수리와 보급(補給)을 받은 후 12월 21일 매사추세츠 주(州) 연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을 플리머스로 명명하였다. 이 선박은 이듬해 봄까지 플리머스 항에 정박했다가 4월 5일 런던으로 되돌아갔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미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남미로 간 배와 북미로 간 배에는 모두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탔지만 두 배에 탄 사람들의 동기는 서로 달랐다. 신앙적인 동기를 가지고 미국을 향해 떠났던 102명의 청교도들은 세계적인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남미로 떠났던 교인들은 신앙도 잃고 돈도 잃고 말았다. 지금도 남미의 대부분 나라가 가난의 굴레속에 살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란 책 한권에 의한 콜럼버스 한사람의 집념과 모험심이 서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란 미지의 대륙이 유럽인들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또 에스파냐 사람에 의한 신대륙 식민지 경영의 발단(發端)을 구축하게 되자 해양대국인 영국인이 그냥 있을 수야! 콜럼버스가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다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1504년에 이사벨이 죽은 뒤 그의 화려했던 지위와 직책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지 않았으며1506년 55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지금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삶? 아니면 나를 위한 삶인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기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영광을! 아니면 나의 야망을 위함인가?
오늘 나는 어떤 배를 타고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가?
미국의 독립의 서막인 보스턴 茶사건
1773년 12월16일 밤, 영국 정부의 지나친 간섭에 격분한 매사추세츠 식민지인 보스턴 시민들이 인디언으로 분장하고 항구에 정박 중인 동인도 회사의 선박 두 척을 습격해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리고 그 안의 차를 모조리 바다로 내던졌다. 이것이 미국 독립혁명의 불씨가 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 얼마 전에 영국 의회는 미국 식민지 상인들에 의한 차의 밀무역을 금지하고 차 무역의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에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영국 정부는 이 사건 뒤에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자치권을 정지하는 등 징벌적인 법들을 부과했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더욱 단결해 영국 정부에 대항하며 '혁명 정부'의 모체를 구성했다. 이 사건은 75년 4월 보스턴의 서쪽 교외 렉싱턴과 콩코드 부근에서 영국군과 급진파 식민지 주민 사이에 일어난 무력 충돌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미국 독립혁명전쟁으로 이어졌다. 보스턴에서는 차사건 얼마 전인 1770년 3월에 보스턴 주둔 영국군이 주둔군 숙사 앞에 모여 있던 군중에게 발포해 5명의 사망자를 낸 이른바 '보스턴 학살'사건이 터져 본국 군인과 식민지 주민 사이의 관계가 일촉즉발 상태였다.
보스턴은 미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로 백인에 의한 첫 정주취락(定住聚落)이 이미 1630년에 만들어졌다. 미국 청교도의 본거지이자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미국 최초의 퍼블릭 스쿨 가운데 하나인 보스턴 퍼블릭 라틴어 학교가 1635년에 설립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교외의 케임브리지에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이 설립됐다. 흔히 '미국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에머슨 호손 롱펠로 소로 등 미국 문학사를 수놓은 수많은 문인들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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