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신라시대의 고승(高僧).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 성은 김씨.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29세에 출가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최근의 고증을 따랐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다. 얼마 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 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가서 지엄(智儼)을 청하였다.
지엄은 전날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에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鳳)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개의 마니보주 (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禮)로 맞아 제자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면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신라로 돌아온 그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 (觀音信仰)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뒤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674년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政)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 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 (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그리고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隨錄)>에 나타나는 신림(神琳)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 에서 <화엄경>을 90일 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법융의 <법융기(法融記)>, 진수의 <진수기(眞秀記)> 등은 모두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668년(문무왕 8)에 세수 78세로 태연자약하게 입적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 (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