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루니통신 13/190528]93세 아버지의 고향 나들이
운전도 주차도 몹시 미숙한 놈이 93세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 나들이를 나섰다. 속으로 엄청 긴장을 하면서도 태연한 척, 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렸다. 23일 아침 8시 여주 여동생집 출발. 전북대병원 도착 10시 30분. 방광내시경을 찍고 노송동 작은엄마를 만나게 해드렸다. 숙부는 2년 전 여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지난 1월 돌아가셨다. 시숙과 제수씨의 상봉.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하기에 서로 위로하고 염려하기에 바빴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한 그릇 사드리고, 고향 앞으로. 숙모는 다음날 새벽차로 닭과 바나나, 참외를 사가지고 내려오셨다. 시숙을 그렇게 보내고 마음에 걸려 밤새 잠 한숨 못주무셨다는 거다.
고향집에는 큰딸이 광양에서 올라와 집안청소를 하고 이런저런 반찬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 덕분에 대문 열쇠를 따고 들어가는 ‘씁쓸한 기분’을 면할 수 있었다. 잔디마당에는 토끼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보자마자 풀 뽑기에 바쁜 아버지 기분은 어떠하셨을까? 당신이 어머니와 함께 60년을 넘게 사신 집이다. 뒷밭에 마늘을 몇 개 살펴보더니 앞으로 한 달은 더 있어야 뽑을 것같다고 하신다. 양파도 1주일은 더 둬야 하겠지만, 다시 올 시일이 마땅치 않으니 뽑기로 했다. 꽃을 피운 키 큰 줄기의 양파가 ‘수놈’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씨를 받는 수놈 양파는 뿌리에 큰 심이 들어있어 먹잘 것이 없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아버지가 끈 두 개로 ‘마늘 묶는 법’을 자상하게 알려주신다.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제껏 당신이 전부 다 하신 일이다. 일단 캐어서 밭에 널어놓고 말린 후 한 접(100개)씩 묶기 위해 줄기를 좀 길게 잘라 5개씩 이쪽 저쪽에 대고 끈을 힘껏 잡아다니며 묶으란다. 그렇게 한 접씩 완성해 처마 밑 횃대에 매어놓으라고 한다.
네 푸대쯤 되는 양파를 마당에 널어놓고, 어머니 산소에 모시고 갔다. 어버이날에 드리려고 만든 사모곡 책자를 묘 앞에 놓고 기도를 했다. 동생은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식혜를 한잔 따라드렸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서슴없이 들어와 아버지를 반겼다. 늘 문이 닫혀 있으니까 동네가 텅빈 것같이 적적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동네 이야기꽃을 피우다 아버지의 사촌동생(나로선 아재)이 최근 병원에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5월초 연휴에 인근 산 속에서 복숭아나무 관리를 하다 오후 7시반쯤 어두워지자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오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고라니를 피하려다 넘어지면서 당신의 왼쪽 발을 심하게 다쳤다는 것. 복송뼈가 으스러졌다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만약 휴대전화가 없었다면 아무리 고함을 쳐도 누구 하나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곳이어서 영락없이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이다. 내일 문병을 가기로 하고 고향에서 첫날밤 잠을 청하다. 다음날 새벽부터 아버지는 꽃밭과 집 뒷마당의 잡풀을 뽑느라 바쁘고, 마당에는 제초제를 뿌렸다. 또 언제나 와볼까? 하는 마음이 앞서시는 것같았다.
오수면사무소에 들러 면장과 인사를 하고 슬레트지붕 철거가 언제쯤 되겠느냐고 물었다. 일단 행랑채와 사랑채의 슬레트지붕을 걷어가야 철거를 하고 집을 지을 계획이어서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뭣도 모르고 슬레트(석면)에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암을 유발하는 물질로 전문가가 아니면 손을 댈 수 없게 돼 있다. 농가 주택 개량사업에 그야말로 암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농협에 들러 면세유 지급여부 등 일도 보았다. 다음날 전주 수병원에 아재 문병을 갔다. 왼쪽 장딴지에 큰 철심을 박고 복숭아뼈 주변에 못을 여러 개 박은 것을 보고, 아버지는 자식뻘 사촌동생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했다. 봉투를 받은 아재는 자기가 드려야 하는데 그런다며 어쩔 줄 몰라했다. 문병 후, 태평동의 이모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의 두 살 아래 동생인 이모는 우리 형제들이 전주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한결같이 잘해 준 고마운 분이다. 시숙과 제수의 상봉에 이어 형부와 처제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서로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근황들을 주고받았다. ‘이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무슨 재미가 있겠냐’며 ‘그저 마음 편히 계시라’고 서로 신신당부를 한다. 중국집에 유산슬밥을 주문해놓고 한 시간여 말씀을 나누다. 아버지가 이모에게 ‘맛있는 것 사들라’며 봉투를 드리자 이모가 ‘형부에게 용돈도 받는다’며 즐거워한다.
논산 막내딸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딸네집에서 자동차로 10여분이면 닿는 왕전 사돈집에 가서 사돈내외께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막내사위의 여동생내외도 불러, 연산에 있는 맛집 ‘왕막국수집’에서 8명이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늘 신세만 지는 사돈내외에 저녁이라도 살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좋아하셨다. 우리 남매에게도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이다. 철따라 딸기와 도토리묵 등을 십수년째 거의 무제한 제공해 주셨으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까? 어디 그뿐인가. 취나물, 아욱 등 푸성귀를 막내사위가 시도때도 없이 날라댔다. 대체 남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못줘서 애가 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했는데, 바로 이분들이 그렇다.
다음날 아침, 새벽 5시 막내사위(나로선 매제)는 부모집으로 달려가 농삿일을 거들고 8시에 돌아왔다. 거의 매일의 일과라고 한다. 밭이 1천평이 넘는데, 팔순을 훨씬 넘긴 노모의 일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는 효심의 발동이다. 그렇게 새벽일을 하고 학교(중학교 교장)에 출근하는 큰아들이 얼마나 든든할까? 주말에는 아예 붙어사는, 아예 농사꾼에 다름아닌 아들이 늘 마음에 걸리신다고 한다. 오전 9시, 막내딸집에서 아침을 맛있게 들고, 다시 여주를 향하여 출발. 11시 무사히 도착, 아버지를 안전하게 모시고 여동생에게 ‘인계’한 후 판교집으로 향했다. 오후 5시, 내가 10명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책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3박 4일, 아버지의 고향나들이에 내 승용차가 한몫 단단히 해 기뻤던 날의 일기.
첫댓글 좋은 풍경이네
늦게까지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
한 세대가 이제 다 끝나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