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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 강의 2
1971.08.12. 유영모 선생
마음을 제가 다 쓰지 않은 거 같이 타고난 마음을 죄다 꺼내 쓰면 거기 하늘이 주신 천성(天性)이 다 거기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말씀 아닙니까? 타고난 마음을 죄다 바치면 종당 하나님이 주신 천성(天性) 내 원 바탕 그것을 안다는 거예요.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구약에 천성이라는 말씀이 오늘날 시대에는 어떻게 되는 고 하니 성(性) 이라는 자를 여편네 사내 암컷 수컷 이라는 말로 알아요. 이놈의 세상 미친 세상이에요. 성(性) 문제라 암컷이라 수컷이라 여성이라 남성이라 이 망하려고 그래요. 그보다 먼저 아버지와 아들이라. 머리와 팔 다리다. 그러기 전에는 그 사람이 미쳤다는데 요새는 돌았다고 하는데, 이 천성(天性)을 잃어버렸다. 망할 놈이야. 그런데 아주 성(性)을 잃어버렸어. 맨 끝에 암컷 수컷이라고 그게 아주 붙어있어. 성전(性典)에 한자로 전(典)자, 요새 법전이라고 하지요? 모든 법률을 죄다 기록한 책 좋은 책 좋은 책을 전(典)이라 합니다. 성품 성(性)자에 성전(性典)이라고,
사내의 여편네 이야기를 죄다 한데 모아다 써놓고 그걸 성전(性典)이라. 이렇게 내 팔아요. 그거 왜 그래요? 천성(天性)은 타고난 천성(天性)은 다 돌아서 없어졌으니까 성(性)자 떡 보면 여성이냐 남성이냐 성(性)문제라고 하고들 있는 세상이야. 그럼 천성 하늘로 올라가는 성(性)이야. 그걸 잊어버렸어요. 그래 이 성(性)자 문제 그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주 박아앉아 들으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이 암컷 수컷 이야기를 죄다 한다더라. 좀 들어가 들어야겠다. 이렇게 덤빌는지 몰라요. 이 실성한 것들이 본바탕의 그것을, 들을 런지 모르겠다. 그래 들어와 앉았다가 졸고 말겠지. 암컷이란 수컷이랑 이야기 조금도 안하면 어떻게 될 거에요? 그 전(典)이라는 글자가 그렇게 귀한 글자이지만 그 성 문제를 갔다가 말끔, 책상위에 높이 올려놓은 거예요. 그냥 전(典)이라는 글자는 책상위에 높이 차고 올려놓은 겁니다. 책 이라는 건 두 책상을 아래 긋고 올려놓은 거예요. 건너긋고 이런 게 책상이야. 거기다가 책을 척척 올려놓은 거예요.
암컷 수컷 이야기만 죄다 이렇게 써 놓은 거 그걸 떡 올려놓았단 말입니다. 그건 왜 그렇게 귀하게 올려놓나요? 전당 잡은 거예요. 전당이란 뭐야? 볼모 잡은 거예요. 이걸 잡고 돈을 돌려주거든. 이거 없어지면 돈 찾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잘 붙잡아 둬야하거든. 그래 올려놓은 겁니다. 이렇게 실성한 놈의 그것들이 다 죽게 되었는데 저 냄비구멍에 달라붙어 아직 할딱할딱 하고 있어. 나는 남성이라. 나는 여성이라 이러면서 거기 붙어있다고. 성(性)문제라면 그것만 캐려고 해요. 과연 말이에요. 이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성(性)문제 더 알고 싶으면 이 사람더러 와보세요. 나도 거기 꽤 아니, 내 가르쳐 줄게. 맹자의 진심 편을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맹자의 말씀이 마음에 가진 걸 다하면 천성(天性) 타고난 걸 안다. 좋은 말씀 아닙니까? 자기 천성을 알면 천성은 어디서 받았는데 하늘에서 받았어. 자기 천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 하늘을 알아. 공자 맹자 가르치는 게 그겁니다. 그래 마음을 다한다는 것을 진심편이라고 그래요. 맹자 진심편에 열고 보니까 그 마음을 다 쓰는 사람은 그 천성을 안다. 그 천성을 알게 되면 천성 받은 하늘을 알게 된다. 이게 진리지요.
이게 진리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성경 66권에 든 게 아니니까 진리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준하는 거, 마음은, 마음은 사람의 신명이라. 마음 이라는 건 뭐야? 사람이 가진 건데, 사람이 뭐야? 신명(神明) 이라합니다. 귀신 신(神)자하고 밝을 명(明)이라. 신명(神明)이라고 해. 그 신명이라는 소리는 뭔지 잘 모릅니다. 유신론으로 해서 신이 계신다. 그런 거 같으면 귀신 신(神)자 하나만 쓸 터인데 그 밝을 명(明)자 왜 붙여놨나? 신명(神明)을 믿어요. 천하 백성이 하나님 믿는 걸 믿는지 안 믿는지 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신명(神明)은, 신명(神明)은 아주 무지합니다. 제일 꼭대기가 신명(神明)이라고 하니까 우리말이라는 건 우리 사람 몸뚱이 속에 있는 게 신명(神明)이라는 거예요. 자기 속에 있는 신명(神明)이다. 이거에요. 주역에 괘를 열어서 좋은가 어떤가? 그걸 판단하는데도 새벽 일어나서 소세 죄다 하고 옷 정하게 입고 그리고 나서 책상을 잘 놓고 향불을 피운다. 향불을 피워놓고 고요하게 앉아서 괘를 내리는데 성경 읽는 거와 같은 겁니다.
괘를 내서, 이런가? 저런가?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정성껏 하는가? 신명(神明)께 그렇게 정성을 드려서 그 신명(神明) 앞에서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건지. 하나님 이거나 신명(神明)뿐이지, 왜 그 밝을 명자 붙였는지 몰라요. 그거 알 수없는 겁니다. 그럼 또 신명(神明)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여기 사람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는 신명(神明)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거 갖고 사는데 생각은 신명(神明) 밑에서 생각하는 거다. 그럼 신명(神明)이 모두 되어서 모든 걸 생각하는 그것이 유신 생각입니까? 무신(無神) 생각입니까? 신이라는 건 있다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까? 알 수없는 겁니다. 중국사람 고진명이란 사람이, 그래 어떻게 하면 유물론 같고 어떻게 하면 유신론 같습니다. 도인은 그렇게 말을 해요. 그렇지만 성령님이 나서면 분명히 신(神)자를 안 쓰고 상재(上帝)라고 씁니다. 상제, 아주 위에, 상재의 제(帝)자는 모든 걸 마련해서 단속한다는 뜻입니다. 저 위에 계셔서 모든 걸 단속해서 모든 걸 단속해서 단속한 법칙대로 되리라는 그런 글자입니다.
이게 정성은 지극한데 주역도 보고 하는 이 사람들이 지극히 일찍 일어나 그렇게 하는데 결단코 지금 세상에는 점을 치고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또 가서 점을 치고 이러고 야단들을 한단 말이야. 원은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한번 식전에 그렇게 정성을 해서 그렇게 하는 것뿐이지 그 후에는 다시는 그렇게 안하는 거예요. 못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표시 할 적에 그림을 그려서 글자를 만든대요. 어떻게 이것을 그릴 수 없지 않습니까? 밖을 그리는데 어떻게 밖을 어떻게 그리겠습니까? 어떻게 그려야 밖을 나타내겠습니까? 그래 생각, 생각 하다못해 저녁 석(夕)변에다가 점복(卜)을 해요. 점복은 점치는 거지. 괘를 내는 거지. 저녁에 괘를 내버린다. 점을 쳐요. 그럼 다야. 그런 법은 도무지 없다. 저녁 점은 치는 게 아니다. 그걸로 아주 가외라. 아주 밖이야. 그렇게 만들었어. 이거 역시 하늘 땅 사이에 같이 사는 민족이야. 그럼 칠억만이 살 게 된다지 않아요? 중국 백성이 불과 수십 년 지나면 십억 된다는 거야. 중화민족의 수효가 십억 된다는 거야.
그래 점친다는 점 복(卜)자, 꼭 내리 긋는데 이걸 점을 하나 찍었어요. 그것이 요긴해서 무슨 물건이 요긴해서 사람이 꼭 이렇게 잡아 둔겁니다. 회초리 하나를 이렇게 쓸데가 있어. 회초리 하나를 이렇게 잡아뒀어. 내리긋고 이렇게 점을 찍은 거 붙잡은 겁니다. 이걸 갖고 그러게 이것이 무슨 자로 쓰이는가 하니 짐을 싣는다는 거, 말 한 테다 짐을 실어요. 짐이라는 글자를 복(卜)자를 쓰지 않습니까? 짐이라는 게 요긴하니까 꼭꼭 붙잡아서 갖다 모아서 묶어서 말 수레에 싣고 가는 거니까, 그 짐이라는 게 복 그래요. 그 약마복중이라, 약한 말에다가 짐이 너무 무겁다. 그걸 약 마 복중 이라고 써요. 그거 점 복(卜)자는 짐이라는 복 자에요. 요긴하길 레 꼭꼭 만들어다가 짐이라는 걸 싸서 말에게 싣고라도 가야지. 그거지. 별게 아니에요. 복 괘로 점을 보는 게 아닙니다. 요긴해서 꼭 붙잡는 거야. 그 점친다는 건 무슨 소리인 고 하니 사람의 의견으로는 결정할 수가 없는 일이 있어요. 이렇게 좋을 것도 없고 저렇게 좋을 것도 없는데 암만 온 백성들에게 물어도 결정을 못하겠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이 어떻게 해요? 제비 뽑아야 합니다. 글자 써놓은 거 갖고 꽈서 툭 던지든지 해서 그거 뽑으라고 그 나오는 거 봐서 해. 안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의견 갖고는 결정할 수 없거든. 그래 제비 뽑아요. 그 제비뽑는 그 짓이에요. 다른 짓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점친다는 거 다 이상한 거 같아요. 제비 뽑는 그거라. 사람의 사정에는 그래요. 아무리 성신을 받고 해도 사도들이 성신 받았다고 뭐든 궁금한 거 있을 때 그걸 물으면 성신이 대답해 줍니까? 그러지 않지 않아요? 뭐 하나님을 믿고서 성신을 받고 성신의 뜻대로 한다고 하는 사람도 갑갑할 때는 물어보는데 성신이 대답 해 주세요? 그렇게 안 되거든. 성신하고 연결이 된다 하더라도 전화하는 거 같이 말하고 싶을 때 하고 이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 어떤 때 갑갑하면 제비 뽑지 않을 수밖에 없어요. 그럼 제비뽑는 일도 점치는 것과 같지 아니랄 게 어디 있어?
가장 성신이 내리시고 모든 게 그렇게 될 때에도 우리 사람은 그런 생각이 나는지 모릅니다. 예수가 부활하신 뒤에 오순절에 성신을 받고 그리고 그 바쁘게 복음을 전해서 믿으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에 들어간다. 이렇게 할 때에 왜 그런 생각이 쓱 듭니까? 우리가 사도가 열두 사도가 있으니 그거 다 뜻이 있어. 그렇게 하신 걸, 열둘이 성하게 그때까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어떻게 가룟 유다 하나가 그걸 망쳐 버렸나? 어째 열두 개 이에서 한 개가 빠졌나? 그게 마음에 미흡해. 그걸 보충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성신이 사도하나 새로 뽑아라. 어디 있는 아무개 사도로 해라. 이랬으면 시원할 텐데, 아까 오순절 성신을 받고 이런 사람들도 그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 일어나지 마라. 이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는 성신 아니에요. 사람의 생각에 그 이하나 빠진 거 하나 해 박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나거든. 그래 하자고 그래요. 물론 기도하고 해요. 기도하고 정하는 건 아니니까 대답을 얻을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떻게 하는데도 사람의 의견을 하든지, 그중 한사람 쓸 만하다고 이렇게 했으면 하는데 둘이 나왔어. 둘이, 둘이 나왔으니 이것도 절대 할 수 없다. 물을 데가 없으니 이것도 물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때야말로 성신이 다시 오셔서 일러주시면 되는데, 그렇게 안 되어요. 그래 할 수없이 제비 뽑았지요. 그럼 그러한 일은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릅니다. 주님이 그것을 생각하실 때 어떻다고 하실지 성신이 강림하실 때 그걸 어떻다고 하실 런지 할 수 없는지 그건 나로서는 안 할일을 공연히 한 거다. 성신 받은 제자들이라도 안할 걱정을 하고 있는 거다. 나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은 안치겠다. 제비 뽑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그건 편안한 세상에 사니까 그렇지 우리도 위태한 세상에 살면 우리도 제비뽑을 일이 생깁니다. 무지공천에 들어가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게 될 때 그때 거기 그 자리에 있자고 할 수도 없고 자기 가려는 데로 가자고도 할 수가 없어. 왜 동서남북을 모르는데 내가 어떤 방향으로 어디로 가야하는걸 방향을 알아야지요.
방향을 모르는데 어떻게 해? 그럼 그 자리에 있으면, 있으면 거기가 어떤지 알아야지. 그 자리가 어떤지 알아야지. 거기 무슨 짐승이 있는지 도적이 있는지 알 수 없어. 있을 수도 없고 가자니 방향을 모르니 그럴 때는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때 제비뽑겠다는 생각이 나는 겁니다. 지팡이를 던져보던지, 연필을 하나 던져보던지, 던져보라. 던질 때 어떻게 하냐? 연필이라면 연필 뾰족한 데가 어떤 쪽으로 가르쳐 주는지? 연필 뾰족한 데가 가르쳐 주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내가 나가보겠다. 이런 마음으로 던져 봐요. 그래 그게 나오면 그 방향으로 가는 거야. 가는 것은 그건 아주 점을 바로 친 거니까 고대로 가면 자기에게 좋게만 나오겠어? 아니야, 그게 아니에요. 안가지 못하는 데서든. 가야하거든. 그래 그리로 나가거든. 나가다가 정말 바로가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지 반대로 되었어. 점점 갈 데를 멀게 가지면 그거야. 어찌할 수 없지. 그 마귀의 장난이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수밖에. 우리 이 세상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믿는 자는 아무 걱정을 도무지 안할 거 같지요? 이 세상은 그런 세상 아닙니다. 물론 주역하면 주역, 그것이 괘라는 게 비과학적이라면 비과학적입니다. 비과학적이지만 어떻게 놀라운 게 있는 게, 보통 지금 과학만 가지고 생각할 수 없는 게 거기 있어요. 그 괘라는 게 맨 처음에 여덟 가지를 괘라는 게 걸어놓는다는 글자, 그거와 같은 겁니다. 턱 내 걸어놔요. 여러분이 죄다 보고 생각하라고 걸 괘(掛)자와 같은 거예요. 걸어놓고 그 걸어놓고 생각해 거기에 64가지가 있다고, 맨 처음에는 여덟 가지를 그렇게 걸어놓게 생긴 건데 여덟 가지가 겹쳤어요. 위 아래로 겹쳤어. 여덟을 겹쳐서 자꾸 엇바꿔 놓으면 모두 예순네 가지가 되요. 그래 64괘라. 그래, 처음에는 예순네 가지가 이렇게 했었어요. 그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도 없고 글도 글자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그려놨다는 거지요. 그 후에 사람들이 그것도 맨 처음에 누가 해놨는지 모릅니다. 말이 있어요. 이거 문황이 했나보다. 혹은 주공이 했나보다. 이러는 거예요. 말을 거기다 붙여놓는데 예순네 가지 걸어놓은 거기에다가 말을 붙여요. 말을 붙이는데 그거 단 이라는 글자를 씁니다. 절단해서 뭘 로 정한다는 뜻이겠지요.
단상이라고 그러는데 그 여덟 가지가 무엇인 고 하니 하늘하고 땅, 그 하늘을 어떤 거라고 걸고 생각해 가지고 걸어갈 수 있어. 하늘하고 땅, 그거 우리가 할 거예요. 불하고 물하고, 그것도 걸어놔요. 또 높은 산하고 깊은 바다하고, 그거도 걸어놔요. 또 바람하고 천둥 번개 하는 전기하고, 그걸 또 걸어놔요. 그럼 그중 큰 거, 그 여덟 가지를 택해서 그걸 걸어놨어. 그래 그림을 그리는데 획은 두 가지만 정해요. 힘찬 획하고 약한 획하고 획 두 개를 만들어요. 힘찬 획 하나 쭉 긋는 거, 하나 쭉 긋는 거, 그건 힘차게 긋는 거, 그렇게 하고. 약한 획은 반 잘라진 막대기 같은 거, 두 토막 벌려놨어요. 그건 약한 거, 그걸 뚝 뻗어서 강하게 한 게 그게 양이고, 잘라져서 토막이 나서 두 토막으로 표시하게 된 게, 그게 약한 거예요. 음이라고 그래요. 그 강한 획 약한 획을 해가지고 그거를 세 번만 써가지고 그려라. 여덟 가지를 그러고 그리라. 그랬어요.
약한 획 강한 획 두 획을 가지고 그려라. 하늘을 먼저 그려봐라. 잘라진 획하고 한 일자로 뻗친 획하고 그걸 갖고 하늘을 그려봐라. 꼭 세 번만 써가지고 그려봐라. 하늘을 가만 생각해 보면 하늘이라는 건 높을 거야. 클 거야. 기운이 셀 거야. 이렇게 생각이 들었거든. 그건 맨 처음 시작해. 아주 힘차지. 강하지. 그럼 하나를 뚝 긋지. 그 다음에는 또 힘차지. 뚝 긋지. 맨 나중에 그것도 힘차지. 그 강한 획 셋을 그 엇 거든. 이게 하늘이야. 그런 생각으로 해 놓았으니, 그거 오래 힘들여 자꾸 생각할거 없습니다. 강하고, 강하고 강하다. 그거 하늘이지, 뭐. 잘 그리지 않았어요? 거기대해서 땅을 그리면 땅, (끊김)
또 약하지 그럼 맨 나중에 끄트머리 또 약하지 별 수 없어. 세 번 다 약해. 그래 땅을 그렸지요. 그 다음에는 불을 하나 그리고 싶어요. 세 번 써가지고 그 불을 한번 그어봐라. 지금 사람들은 불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았습니까? 불의 이치를 자세히 압니다. 불이 제일 어디가 뜨거운지 아세요? 사람이란 생각하기에 그중 많은 데가 뜨겁겠다. 또 그중 많은데 뜨거운 데는 그중 가운데겠다. 이렇게 생각되어요. 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불의 성질을 제일 잘 알았어요. 불이 제일 어디가 뜨거우냐? 꼭대기가 뜨겁습니다. 거죽이 뜨겁고 꼭대기가 뜨거워요. 또 보기에 많은 데가 아닙니다. 끝에 뾰족한 데가 제일 뜨거워요. 그때 사람들은 그걸 알았어요. 꼭대기에 강한 획으로 긋습니다. 불을 그리는데 강한 획을 그었어 꼭대기거나 거죽이 제일 뜨거우니까 그 셋째 획도 강한 획으로 긋습니다. 그중 약한 데는 가운데가 약해요. 가운데가 약하니까 끊어 진 획으로 가운데를 그어요. 그래 옛날에 불이라고 가운데를 그려놨어요.
잘 그리지 않았습니까? 이 과학적 아니에요? 참 과학적이에요. 가령 우리가 불에다가 지금 전기 있어서 불을 저도 잘 안 씁니다. 불에다가 성냥까지를 하나 꺼내서 요기다 불을 붙이고 싶다. 그런데 마음에 얼핏 붙어야 하겠으니까 그중 두터운 맨 가운데 거기가 제일 뜨거울 거 같아서 성냥을 거기다 쑥 집어넣어 안 붙습니다. 또 몹시 뜨거우면 가운데 가서 나무 떼기 가운데 가서 거기 제일 약한 데인데, 약한데 어떻게 붙을 리가 있습니까? 약한 데는 거죽으로 통한 여기가 거죽에 닿았으니까 거기 굵은 데 얼핏 붙지 않아요. 그 끄트머리가 닿아야 얼핏 붙을 텐데 그 끄트머리가 닿아야 붙을 텐데 가운데가 쑥 들어가 여간 붙습니까? 안 붙어요. 정말 급하면 불의 성질을 알면 그중 꼭대기 뾰족한데 거기 대지. 암만 급해야 쑥 집어넣지 말고 꼭 성냥개비 끄트머리만 혹 붙어야 하는데. 그 성질을 알았기에 강한 획으로 긋고 가운데만 약한 획으로 긋고 밑에 또 강한 획으로 긋고 그래서 불을 그려놓은 거예요. 그 불 화(火)자를 써라. 그건 어려워요. 어떻게 쓰는 건지, 이건 이치가 있거든. 거죽은 강하고 속은 약하다. 그 이치대로 그렸으니까 그건 뭐 한번 하는데 잊어버리지 않아요.
또 그다음에 물을 그리는데 물을 어떻게 그릴까? 물이라는 건 아주 약한 놈입니다. 물은 거죽으로 봐서는 그것처럼 부드러운 게 없어요. 거죽으로는 죄다 부드럽습니다. 물 온통 덩어리가 져서 내 밀리는 데는 그걸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통으로 우리를 당할 수가 없어요. 강합니다. 그래 물을 그릴 때에 가운데는 강한 획을 그렸어요. 물 수(水)자내리 긋는 거, 그거 강한 획으로 긋는 겁니다. 가운데 강한 획을, 거죽은 약하니까 끊어진 획을 썼어요. 먼저 끊어진 획, 가운데 통자로 또 이쪽 가장자리 또 끊어진 획, 그렇게 그건 우리가 옛날부터 아주 잘 아는 게 뭔고 하니 물 수(水)자가 뭡니까? 가운데 획 내리긋고 양쪽은 구부러져 끊어졌어요. 그래 그 물 수자가 그대로 물을 그린 거예요. 그렇게 묘한 겁니다. 그리고 산하고 바다를 그려야 할 텐데. 산을 어떻게 그리느냐? 산은 밑에가 넓지 않습니까? 맨 밑에 가운데 크고 넓으니까 그 속에는 바위도 있겠지만 푸석푸석한 흙도 많고 또 골이 진데도 있을 거고 많이 약할 겁니다. 또 가운데도 약해요. 맨 꼭대기 거기는 뾰족하기는 한데 거기는 부서져 내리지는 않고 맨 꼭대기는 그거 몇 천 년이 되도 몇 만 년이 되도 그대로 있어. 그건 강한 획이 아니면 안 되거든.
그래 맨 꼭대기 강한 획으로 맨 꼭대기 강한 획으로 하고 그 다음으로 약한 획으로 한 게 그게 산이에요. 그러나 물은 말이지, 바다는 물이 으레 있으니까 그게 약한 거지. 그래 약한 획으로 긋고 그 다음에 들어갈수록 암만 가도 밑으로 새지 않는 아주 든든한 걸로 강한 걸로 바닥을 한 게 분명 하거든. 강한 획 강한 획 위에만 약한 획으로 한 게 그게 연못 깊은 연못 바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여덟 가지 그린 거예요. 그 여덟 가지 그린 것이 그것이 글도 나기 전이에요. 말을 거기다 붙이기를 계다. 불이다. 물이다. 산이다. 바다다. 바람이라. 우뢰라. 요즘 같으면 전기라고 그럴 텐데 우뢰니 번개니 그때 우뢰 뢰(雷)자를 썼습니다. 그걸 겹쳐서 예순 네 가지를 썼는데 겹친 게 놀라운 게 산을 올려놓고 밑에다가 연못을 그려요. 그렇게 그려놓은걸 보고 저게 어쩌느냐? 아 지금 사람들은 거기 집 하나를 지었으면 좋겠다. 이랬을지 몰라요. 그때 사람들이 거기다가 이름을 붙이는데 산이 있어. 그 앞에 깊은 못이 있어. 그럼 그 형을 어떻게 하냐? 그 위에 있는 산이 모래 한 알이 떨어져도 떨어지지요. 떨어지면 그 연못으로 들어갈 거 아닙니까? 그래 자꾸 벌려서 손해를 보게 되어요.
그 밑에 정자 지어서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고 모래 한 알이 떨어져, 떨어져 내려가 별 수 없다. 그래 손 그래요. 벌릴 손자 손, 또 놀라운 게 있습니다. 땅을 하나 떡 갖다놓고 산을 땅 아래다 갖다 놓아. 위에 땅이 있고 아래 산이 있으니 그걸 어떤 경우로 생각을 해요?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어떤 양반이 거기다 이름을 붙여놨는지 모르지만 땅이 위에 있고 산이 아래 있다. 그런데 그걸 뭐라? 겸손 겸(兼)자입니다. 겸손, 겸손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묘합니다. 그 어떻게 겸손이 됩니까? 이건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이렇게 둥그런지도 모르고 땅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던 때인데 그런데 그걸 어째 그때 그렇게 했습니까? 그것참 놀랍지요. 산이야 기껏해야 태산이 높다 해도 하늘밑에 산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 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이따위 시를 하지 않습니까? 태산이 높다. 높다. 태산을 넘으니 천하가 좋을 것 같더라. 이따위 시를 모두 하는데 태산이 높다하면 올라가면 올라가진다.
이 소리만 하는 건데 그것은 무엇인가 하는 고 하니 개미새끼가 하는 소리입니다. 태산 올라가면 자꾸 올라갈 수 있다. 하는 건 개미새끼가 하는 소리에요. 그럼 엄청나게 큼직한 사람이 하면 어떻게 되어요? 하늘을 그리는데 땅이 위에가 있고 산이 아래가 있다고 그건 뭐야? 옛날 사람이 그런 걸 생각하는데 참 놀라운 일이에요. 겸손하다. 그 겸손하다. 누가 한 말인데 산이 한 말입니다. 나는 겸손합니다. 나 어떤지 태산이 말을 한 거지. 이 개미 새끼 같은 사람이 태산이 높다 해도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 리가 없어. 그런데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메를 높다 하더라. 이러고 아주 다 정말 시를 잘 지었다. 이러는 건데, 그래 지금도 등산가들이 많이 있지를 않습니까? 태산을 정복하면 자기가 태산보다 더 큰 줄 알고 오르다가 떨어져 죽지를 않습니까? 어떤 의미로 등산가 되는 것도 거만도 있다면 있습니다. 모험하고 등산을 하더라도 조심하고 조심을 끝까지 해야 합니다. 실족 낙상은 발이 미끄러져 떨어져 죽은 건 그건 경망한 일입니다. 그건 등산가의 자격이 없습니다. 모험한다고 모험만 하는 게 세상 어디 있습니까? 모험 속에는 절제하고 조심하는 게 겹쳐야 합니다. 그거 없으면 등산가 자격 없어.
그런데 이거보세요. 오늘 이거 깨닫기 쉬워요. 땅이 위에가 있고 산이 아래가 있는데 거기다 말을 붙이기가 겸손하다고 붙였어요. 오늘 사람 알기 쉽습니다. 왜? 땅이 돌아가는걸 알아 공중에 뜬걸 아니까. 공중에 떡 떠있으면 이렇게 아이들 거시기하는 무슨 공이 있다든지. 공이 있다든지. 요새 토마토라고 한 개가 있다하면 땅은, 땅은 지금 공 같은 거 아닙니까? 공은 떠있지 않습니까? 지금 사람은 이거 아주 알기가 쉽습니다. 공중에 떠 있으니까 그럼 산은 공중에 공이 떠있다든지 토마토가 한 개 떴다든지 귤이 한 개 떴다든지 오톨도톨 한 게 그게 산 아닙니까? 귤껍질에 오톨도톨한 게 그게 산이에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잔 개미새끼 같은 건 그 불쑥 올라간 데를 아이고, 저 산꼭대기 올라가면 힘이 든다. 할런지 몰라요. 그런데 그 산 귤의 껍질같이 오톨도톨 내민 거 그걸 뭣이 높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땅 밑에 있는 산이 땅위에 있는 게 아니라 땅 밑에 있지를 않습니까? 오톨도톨 한 거 또 귤 덩어리 밑에 있어요. 그런데 있는 둥 마는 둥하지 높기는 뭣이 높아? 그래 자기 처지가 그러니까 그저 겸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한문에도 겸손한 거를 정말 알려면 지옥에 가서 같이 앉아 생각을 해봐요. 과연 겸손이란 이렇다. 이 세상에 제일 높은 재상이 되었을 지라도 나는 맨 끄트머리에 조금 있는 둥 마는 둥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될 거니까 가장 겸손한 거 아닙니까? 그럼 바이블을 읽고 영생의 길을 가려고하는 크리스챤도 점괘만은 알아야 합니다. 신학자가 되고 사상가가 되어가지고 온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것을 축여주고 가르쳐주고 하는 그 선생이 세상을 내려다보면 대단히 높이 올라앉은 거 같은데 그러나 온 세상이란 하늘나라란 거기에 대해서는 붙는 둥 마는 둥 하는 태산 같은 것이 붙은 둥 마는 둥 있는지 없는지 맨 밑구멍에 말석에 가서 어떻게 형용만 조금 이렇게, 겸손해야지 별수가 어디 있습니까? 그럼 점괘를 가지면 겸손을 참으로 배울 수가 있습니다. 바이블 읽는 사람이 주역도 함께 섞어서 보면 좋겠어. 성경처럼 겸손한 걸 가르치는 책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밝혀 주는 것은 주역의 점괘가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거 아닙니까? 나는 오늘 아침에 이렇게 자기로 말미암아 가지고 이렇게 해서 지금 이 말씀 하는데 까지 왔어요. 지금 맨 끄트머리 나도 몰랐던 건데 겸손 겸(兼)자 한자를 갖다가서 끝을 마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끄트머리에요. 한 점 찍힌 듯 만 듯한 겁니다.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거예요. 학사 석사 박사 몇을 겹쳐서 모두 한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나라 앞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이 우주 거기에는 있는 둥 마는 둥 붙어있는 한 점입니다. 우리의 있는 존재는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존재에요. 그러니까 겸손 겸(兼)자는 별수가 없는 겁니다. 겸손한 걸 바로 가르치는 거는 주역 점괘에 아주 소상하게 알려주는 겁니다. 적어도 점괘는 여호와 하나님이 걸어놓으신 겁니다. 동양사람 그 배우려고 할 때 겸손한 걸 배우려고 할 적에 점괘를 봐라. 그러고 하신 거예요. 그 이사람 이 모양입니다. 이제는 이것도 그만 말아야 하는데 암 말아야지요. 말미암아 나갈까요? 찬송 한 장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