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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2. 信天함석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이-- 그건 역사 관계로 그랬겠지요, 본래 그랬겠어요? 오랜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이 사람으로 치면 만성병 들었다 그말이야. 아주 일생의 불치병. 우리 할머니 파킨슨병 들듯이. 그 병이 아주 우리 문제에 대한 심볼이예요. 그거 죽지도 않고 낫지도 않고 그대로 그대로 그렇게 되는데, 그래서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년 이년 몇 해나 가겠는지, 죽어두 조금씩 조금씩 죽어가는 거예요. 그러니 찬 지독한 거 아니요? 그런데 그러니까 아주 남들도 보기에 앓는 사람으로 알지도 않아. 자기도 앓는 사람 같지도 않고. 빤히 앓을 것 같으면 어느 약을 쓰든지 하고 남도 동정을 한다든지 어떻게 낫든지 그러지 않겠어요? 이 만성병이 기막힌 건데, 우리나라 국민성의 나쁜 게 만성병에 들었단 말이야. 무엇을 철저히 해서 끝을 낼려고 하는 그 생각이 없어. 그저 그럭저럭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뭐. 사람이 다 그런거지 뭐‥‥ 그런 식으로 뜰미직- 그렇단 말이야. 진리에 아주 멀단 말이야. 그러니 참에 갈 수가 없어.
그래 난 요새 생각에 자꾸 뿌리 생각. 뿌리에까지 가야 한다. 어느 그 -저 그거는 뭐 이 아래 내려가면 그게 있어요. "우리는 터가 있는, 저 뿌리가 있는 나라 -터가 있는 나라라고 그랬던가 - 그거 아주 좋은 말이예요. 하느님이 우리보고 말하기를 내가 이때까지 땅을 흔들었지만. 이따 가다가는 이제 땅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뒤흔들겠다고 그런 말을 했다. 그래 우리는 인제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지금 당하는 우리의 고난은 다른 거 아니고 우리 그 중간적인 것, 이거 떨어 버리시려고 그러신다. 다 떨어질 것은 떨어지고 아주 확실한 것만이 남을거다. 그래서 우리는 터가 있는 나라를 가진다고 그랬어.(히브리 12:26∼ ) 이 보통 우리 이 나라 이 대한민국이란 결코 뿌리가 있는 나라가 아니예요. 미국도 물론 그렇고 이 세상의 어느 나라도 그건 뿌리가 있는 나라라고 볼 수 없어. 왜 그런고 하니 이 세상 나라는 어느 때 가도 망할 거니까. 지구위에 있던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어요- 왜 그런고 하니 그건-그 있다가 망하고 있다가 망하고 하는 나라는 거 어째 나왔나? 그건 본래 그 '참나라' 가 있어서 된 건데, 그 본래 그 나라가 없으면 사람들이 나라라는 걸 세울 줄을 몰랐을 거예요. 나라가, 이 정치적인 나라가 있기 때문에 그걸 보아서 저기 있는 나라를 생각한 거 아니라, 역사상에 나오는 순서로 하면 아마 그럴 수 있을 거지만. 그러나 마치 이건 무언고 하니 본래 처음부터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지. 우리가 말을 하게 됐으니까 거꾸로 올라가서 하느님도 말씀을 하실거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그게. 역사의 순서는 사람이 제가 말을 하는 거니까 하느님도 말을 할거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들었다, 듣겠다 그러겠지만 그거는 경험적인 우리의 역사에서 하면 그렇지만, 원래는 어떤고 하니, 말이 없는데 내가 말을 어떻게 시작을 했겠나? 내가 말을 시작을 한게 아니라 말이 나를 시작을 했지. 말은 그것이 나가기 전부터 있는 말이다. 그럴 거 아니요? 그래야 그게 이제 어느 뿌리에 가 닿은 거라 그 말이야.
그래 그 말씀은 없어질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이 소위 지상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건 그건 다 중가운데 내려오다가 됐지만 그걸 따져 올라가면 본래 사람이란 이 개체대로 난 이것이 스스로 완전한 거 아니고, 이 사람이란 그저 '나'뿐이지 이 나만 있으면 됐지, 어디 가서 나 혼자만 얼마든지 살 수 있지 그러겠지만 그건 망상이지 그렇지 않다 그말이야. 사람은 전체 없이 개체라는 거 어디 있어요? 그런 법이 없어.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려니까 그건 할 수 없이 처음에 아담이라는 사람 있고 그 다음에 둘째 있고 셋째 있고 그렇지만 사람은 처음부터 여럿이란 말이야. 그럼 그게 언젭니까? 그거는 진화가 됐으니까 진화가 돼오는 과정이니까 말이야. 인류 있기 전에는 인류 비슷한 인류 선배가 있었지. 걷기 전에는 또 원숭이와 구별이 없을만한 뭐 그런 거 무엇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또 따져보면 언제부터라고 그럴 수 없어. 있을 때부터가 그렇게 그 물로 이렇게 있어서. 이전체로 난거가 어울린게‥‥ 그런거지. 어느 요 한 개인이 있어가지고 하나가 둘 되고 둘이 넷 되고‥‥ 그렇게 형식적으로 그런 거 아니라 그말이야. 그래 그 사람의 존재가 본래부터 나 혼자 떨어져 있는거 아닌데, 그리니까 그게 "나라"란 맡이야. 그런 거 있기 때문에 사람이란 나면서부터 개인 살림을 못하게 생겼고 전체가 살림을 해. 전체가 살림을 하는데 처음에는 하면서도 그걸 의식을 못하고 살아오던 것이 그 다음에 생각을 하니까 '아 그렇다! 사람이란 이게 개인으론 살 수가 없는데'--그래 가지고 그럼 이걸 우리가 규모 있게 해야지-그래서 그걸 조직화한 게 소위 나라라는 거애요.
그래 그 본래 있는 - 그러게 예수님이 나셔서 "하늘나라"라는 말 하신 건 거길 거꾸로 올라가신 거예요 본래 그 안에 어느 나라가 있어서 이런 지금의 세상 나라가 있는 건데, 이게 중가운데 잘못되어 있어가지고 이러는거니까. 이것이 옳게 되려면 저기 '저 나라' 가 와야 된다. 그걸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 말은 "나라"라고 하셨지만. 그래서, 맨첨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그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게 해 달라고 하는 거는, 그건 예수님이 그러신다고. 당신이 말씀하신 다음부터는 이 세상에 있는 로마 제국도 다 없어지고 무엇도 없어지고 아주 사람들이 모두 다 무슨 종교 살림만 하게 되는 그렇게 생각하신거냐 하면 그런 거 아닐꺼요.
그게, 이 세상에 있는 건 이 세상에 있는 이것대로, 이 죄악과 섞여있는 세상이니까 천상 이런 무슨 정치적인 이 나라가 있어 가지구 하지만. 차차 이게 그래도 맑아져서. 저기 저 본래 거기서 온. 자기네가 알지도 못하고 있던. 뭐 본 뿌리라고 할까 본향이라고 할까, 거기 있던 그 모습에 가까이 - 사람은 자기네도 못하던 그걸 목표로 하구 올라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유교에서 대학을 가르치는데 . 사유종시(事有終始)하고 --그거 재미 있어요 ---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끄트머리가 먼저 나와요. 事有終始라고 그랬어 아주 좋은 말이예요. 그거 왜 보통 말할 때는 시종(始終)이라고 시작이 먼저고 끄트머리가 마지막이지, 그래 우리 말에도 '종시 그러다가 운운' 한다던지, '종래 그런다' 라든지 그러지 않아요? 그게 '시종' 인데 왜 대학에 사유종시요 일에는 끄트머리와 시작이 있다. 물유본말(物有本未)이라 물건에는 밑둥과 끄트머리가 있다. 그러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그랬어. 그게 마지막에 나올 것이 처음부터 있었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처음에 나온 것이 처음이 못돼-- 처음에 나온 것보다도 더 전에 있는 것이 그게 정말 처음이야 처음에 있는 것보다 더 전에 있었던 것이란 원고하니 끄트머리, 수억만 년 간 다음에 올 그게 처음부터 있었다. 그래 목적 속에 변천의 과정이 거기 들어있다 그말이야. 씨알 속에, 씨 속에 나무가 들어 있고, 그 거는 어디서 나왔나. 씨는 또 물론 나무에서 나왔지. 그럼 그 나무는 어디서 나왔나, 그건 또 씨에서 나왔지. 그래서,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그러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하면 계란이 먼저라고 할 수도 없고 닭이 먼저라고 할 수도 없지. 없지만 우리가 사물을 따져 올라가는 그런 걸로 하면 무엇인고 하니, 그건 계란도 있기 전. 닭도 있기 전 처음부터 닭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현실에 나타난 거는, 종(種)이라는 거 species. Darwin의 Origin of Species 있지 않아요? 「종의 기원」 이라는 거 썼는데, 종의 기원이 어디 있어, 변천하는 과정에서 났지. 변천은 어디서 났어. 변천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건 현실의 이 세계에선 따질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럼 진리의 세계에서 할 때에는 본래 그러니까 하나님이 먼저 계셨다고 하는 말을 하지 하나님이 뭐야. 몰라-, 뭔지 모르지만, 첨부터 있는 그 무엇이예요 왜 그런고 하니, 무얼 설명하는데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갔다고 하면 설명이 안 되니까. 없는 가운데서 그것이 나왔다, 그 없는데서 그게 어떻게 나왔소? 또 묻지. 물음을 끝낼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깐 이 -사람이 묻는 거, 그걸로는 해결이 안되요. 그러니깐 그걸 설명하노라고 해서 이제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그래요. 그 한 마디가 무서운 한 마디라고 내가 그래. 불교 사람들은 또 뭐라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무슨 천지를 만들었다고 그래, 천지가 자연히 있는거지. 하나님이 뭘 만드는 이라면 그것도 욕심 있는 이 아니야? 욕심 있다면 그것도 불완전한 존재 아니야? 그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거예요. 그거는 이 현실계의 것을 제까지 끌고 가니까 그렇지 그걸 누가 모르나, 그러지만, 그래 그걸 내가 비유할 땐 음악에 비유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음악의 세계란 내가 가만-이 있어두 언젠지 모르게 내 속에 음악이 흘러 갈거거든. 흘러갈 것인데. 이것을 종이에 쓰려면 난 작곡가는 아니지만, 작곡을 하려고 할 때는 참 어려울거요. 건 왜 그런고 하니 글을 쓸 때면 지내본 거 있어서 그래. 글을 쓰자-그러면, 갖가지 생각이 일어나구 그러는데, 이제 무엇이라고 부터 쓰겠나, 이제 붓을 대놓기만 하면 이어 글이 시작이 되는데, 이게 대기가 참 문제얘요. 왜 그런고 하니 요말을 하려면 고 뒤에 요말을 해야 될꺼구. 고 아래 또 요말을 해야 될꺼구, 이러다 이러다가 이틀도 가구 사흘도 가구, 일주일도 가구 -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그런 경험을 해 보는데, 아마 예술가도 그럴 거라 그말이야, 무슨 있긴 있는데, 그걸 참 표현을 하려고 그러는데 그러자면 붓이 그리 쉽게 내려지겠어요? 안내려질 거 애요.
그런데 그걸 능히 붓을 이렇게 대는 데가 그게 아주 거 무서운 자리라 그말이야. 그거 생각하고 감히 대겠어요? 그래 우리 명상한다든지 기도한다 그러지만, 기도 한다 그래도 기도의 말을. (몸짓을) 이렇게 하구 "하나님 아버지" -- 거 맹랑한 사람들이요. 그러구 (말이 쉽게) 나오겠어요? 정말 생각을 하면 말이 나올까 말까, 감히 시작을 할 수가 없질 않어? 어디서 시작을 하겠어 어디서 어디서 뭐라고 시작을 하겠어. 그러게 그러노라면 그러다가 내가 시작한 거 아니지만 어디서 입이 터져서. -그러니까 참 기도는 내가 하는 거 아니라 기도 제가 터치구 나오게 돼야하지, 그래야지. 그러니 애기가 나오기도 전에 지레 끄집어내려고 하지 말아요. 무어라고 기도해야지-안하구 그러면 사람들이 시간 간다구 그러지 않겠나- 비웃지나 않겠나-- " 그 생각 할거 없어. 말이 안나가면 열흘이라도 가만 앉아 있든가 그렇게라도 하고 있어요. 그럭하다가 나도 모르게 나왔으면 나온 거, "그래도 별로 신통한 것 없드구먼" 그럴는지 모르지. 좋아 그래도 괜찮아. 내게 문제지 네게 문제냐 - 그 말이 된 말이 아니지만. 그 말을 하는 나로서는 그게 달라요 내가 만들어가지고 요렇게 하면 재미가 더, 턱 서두가 잘 되야지- 이런 생각도 해보고 말이야. 애? 거 쓸데없는 생각이예요. 그런 걸 다 꺾어버리구-- 꺾어버리구-그러구 나온 기도는 하다마는 기도의 한 끄트머리 밖에 안돼요.
하루 종일 그러구 그러구 그러구 그러다가, 글쌔 아까 얘기대로, "그거 그래야 뭐 별 신통한 것 없구나" 할런지 모르지만, 그런 과정을 밟다가 밟다가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뭐라도 할 소릴 해야지-- 그건 물론 아니지-. 그러구 앉아서 . 운을 때지 않고 있노라면 어느 시간에 가서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입이 열리게 될 거요. 그렇게 해서 접근을 해 가노라면 스스로 자기도 무엇이 속에서 이렇게 꿈틀거리는 걸 느낄거요. 그러니 다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요 인간의 세계의 지식이라는 거 때문에 여러 가지 지식의 건 때문에 여기서 놀아. 여기서 이렇게 노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칠칠치 못한거라 그말이야. 그러기에 우리는 그걸 이겨야 돼 우리는 다수라면 겁을 내는데, 한 사람 아니고 여러 사람이면 겁을 내고. 돈도 조금이 아니고 많이라면 겁을 내고 그래. 그걸 겁을 내는 한엔 못이긴다.
우리가, 우리 생각에도. 우리가 옳아요. 내 판단이 옳아요. 지금 우리나라 정부 저따윗 거 몇 100개가 있다 해도 그 사람들 하는 것보다도 내 생각이 옳다! 그건 뭐 무엇을 준다고 해두 안 바꿔, 내 생각이 옳다 - ! 설혹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건 내가 "아니!" 할 거지 고치지 않을거요. 그런데 왜 내가 그걸 이기지 못하나!? 이기는 힘이 내가 없다 그 말이야. 그것이 서러운 데예요. 참 뻔히 우리가 옳은데. 적어도 이 뿌리는 하느님한테 가 닿은 줄을 내가 알지만 그래도 저걸 이길 힘이 없단 말이야. 그것이 우리가-어제 거기서도 한 말인데-참 우리의 비애가 있는데가 그거야. 그게 내가 잘 못해서 그래. 그게 참 참 뿌리에. 아까 하던 말로 하면 致虛極 守靜篤, 허를 하기를 아주 극에까지. 고요하게 하기를 아주 도탑게-거길 아직 못갔기 때문에 그래. 아주 내가 정말 철저한 마이너스 자리가 돼야겠다고 그러구 아주 완전히 진공상태엘 갔다면 이 절대의 힘을 가지고 무엇이 일어나는 것이 있을 거예요. 예수님은 그걸 경험하셨기 때문에 큰말 하지 않아요? 믿음이 겨자씨 알만큼만 돼도 못할 거 없다고. 겨자씨도 무한이 작은 것이지만 적고 큰 것이 문제가 안 된다 그 말이야. 간디도 자기 혼자 가지고도 다 이겨낼 수 있다 그랬어. 그거 뭐 망상을 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과대 망상증이 들어서 그러는 거 아니예요. 무언가 자기 확신에서 나온 거지.
그런데 우린 싸운다고 하면서도 하나도 만나보면 확신 가진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 믿는다는거 거짓말이야 이름으로 그저 믿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우리의 무력함이야. 참으로 강한 사람은 지고 이기고가 문제가 안돼요. 본래부터 이긴 건데 뭐. 본래부터 이긴 건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뭐 이루워지려니 하고 기도하는 거 아니라 본래 다 주신 걸로. 본래 주신 줄로 믿고 해야 돼 우리는 시작할 때부터 이겨 놓고 싸움해야 돼. 싸움을 해서 이기는 거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거, 그래야 옳은 거요. 그러니까 싸움을 해서 이기자는 사람은 그건 못견딜 거요. 이겨도 또 신통치 않은 거고. 본래부터 그건 이겼기 때문에 이기는 거요, 그러고 나면 간디의 말이 옳지 않으냐--. 비폭력 운동 사챠 크라하는 약자의 운동이 아니다. 우리도 무기가 있으면 그걸로 싸우면 좋겠는데 그게 없으니까 비폭력으로 하는 수밖에 없지-그런거 아니란 말이야 약자의 논리. 비폭력이 그런 거 아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본래부터 높은 자세에 있다. 그러니까 하는 거다. 그래, 인도에 와 있는 영국인이 그 당시에 가령 한 10만명∼20만명 된다 합시다. 전 인도 인구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리만큼 적은 숫자인데. 그 얼마 안 되는 사람 가지고 그때 3억 되는 인도인을 다 죽일 수 있느냐? 우리 인도 사람이 같이 대항해 싸우지 않고 가만있는 것은 비겁해서 그런다기 보다는 - 10만의 영국인이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은, 자네도 스스로 이것을 생각을 해 보면 말이야 우리 3억 인도인이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영국 사람한테 복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 생각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 아니냐-? 그거 생각해 보시요 그런가 안 그런가. 너희가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은. 3억이나 되는 인도인이 영국 사람에게 복종해서 그러는 거 아니다. 그것을 알게 해야 될 거 아니냐? 인도인이 무기가 형편없어서 가만있는 거냐? 그런 건 아니다. 그런 걸 무의식면에서가 아니라 민중이 그걸 자각을 해서 "그렇다!" 아무리 영국 사람이 무기를 한없이 가졌다 그러더라도 전 민중이 정말 모두 "전체 이것이 그 무기가 무서워서 가만이 있는거냐? 그런 건 아니다" 그 자리엘 간다면 그 속에 그만큼 속이 차서 자기 힘이 있는 줄을 자각을 하면 그때엔 거 무서울거에요. 그러면 그 민중을 어떻게 못할 거다.
그런데 물질만을 아는 사람은 -오늘 아까 오전에 한 얘기도 별 얘기가 아니라 그거야. 되풀이 되풀이해도 얼마든지 되풀이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거 이런데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죽는 것보다는 이걸 우선 살려놓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 논리가 그럴듯하지만 그거 문제라 그말이야. 유물론자들 조차도 2보 전진 1보 후퇴라 그래요. 한 걸음 전진하기 위해서는 두 걸음 후퇴해도 좋다. 그런데 이 크리스천들이 그걸 몰라도 되나. 퇴보 했느냐 전진했느냐 그러지만 그건 걱정할 것 없어. 그거는 전략으로 그러는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에 절대에 있어서 본래 이긴 싸움을. '이겨가지고 하는 싸움' 의 태도에 들어가면. 한 때 전진했느냐 후퇴했느냐가 문제 안돼. 그거는 산에 올라가는 줄만 알면 어떤 땐 올라도 가고 어떤 땐 내려도 가고 그러지 않아요? 내려가지만 그게 내려가는 코스가 아니라 올라가는 길이지 . 올라가느라고 내려가는 거니까. 산에 올라가는데 일직선으로 요렇게 올라가는 사람은 없지 않아요? 어디 그런 법이 없어. (손짓으로) 이게 이렇게 이렇게 자꾸 그러면서 올라가는 모양으로, 역사진행이 본래 그런 건데, 정신의 역사는 물론 더 그럴거 아닐까. 이런 마음이 그게 뭔고 하니 다 이겨가지고 싸움 시작하는 그거예요. 본래 그건 우리의 이기는 싸움이다 그러구. '이겨가지고 싸움.' 그래 '예수님 부활해가지구 십자가에 달렸다. '(내가 늘 말하는) 그것과 마찬가지 논리예요. 그래. 그 점이 우리가 아주 약하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걱정이예요. 그러니까 정말 속에 그런 확신을 가진 사람은 뭐 정부의 시책이 어떻다든지 그거 별로 걱정 할거 없어요. 어서 하라고 그래.
꼭 세상에서 하는 게 바벨탑 쌓는 것같에 쌓을 때까지는 자꾸 쌓아 올라가서 하늘에 닿을 것 같은데 다 쌓아서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다음에 자꾸 무너져. 바둑 잘 두는 사람은 처음에는 지는 것처럼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딱 하나 놓고 이거 다 먹어치운단 말이야. 말하자면 그러는 모양으로 거 생명의 역사가 그런 건데 뭐. 그걸 믿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이렇게 약해지지 않겠는데. 그거 믿는 것이 없기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 그러니까 마음이 산란해지고 그래. 옆에서 보는 사람이 왜 이렇게 이 민중이 무표정이냐? 그 사람들이 그거 믿는 마음이 없어서 그래. 무표정이 무엇이겠어요. 이게, 두 스포츠를 하는데 -저번날에 저 고영근 목사 말 잘했어. 스포츠를 이게 열심으로 장려한다고 하는데 스포츠에 정신이 뽑혀 있는 동안에 자기네 무엇을 하느라고 그래서 자꾸 이걸 장려한다는 거예요. 거 옳은 말이예요. 그런데 그런 걸 입을 헤 벌리고 가서 그걸 보고 있는데 아주 정신 빠진 사람이예요. 사실은 정부에서는 아주 지혜가 있어요. 그 스포츠에 돈 얼마나 들이는지 아세요? 막대한 돈 들여가면서,-그 사람들 돈 주면서 오라고 해서 오는 거예요. 돈 주어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하나도 계획 없이 하는 거 없어요. 그래 예수님이 "이세상의 일에서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하늘나라 아들들보다 지혜가 있다" -저 해먹을 때에는 우리보다 영악해. 그러니까 예수님도 답답해서 그랬을꺼예요. 왜 그렇게 너희는 모르느냐- 그것도 모르느냐 -? 하고.
그래. 요새는 이 뿌리라는 생각 -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이 뿌리 없이 굴어. 그래서 자꾸 자꾸 반복해서 하는 말입니다마는 3 .1운동 - 3.1운동 인도사람들과 동시대에 했거든 1919년이면 1920년 간디가 하던 때 우리가 했는데. 우리가 간디 알고서 한 것도 아니고 간디가 우리 사정 알고 한 것도 아니고 다 동시에 제각기 나온 거지만 왜 간디의 운동은 그렇게 되고 우리 운동은 3·1운동 그거 하나로만 되고 말았느냐. 저번에 영국 사람이 하나 왔는데 내가 그 얘길 설명하면서 영어가 부족해서 내 속에 있는 말을 하는데. 3·1운동은 나왔지만, 그 다음에 그걸 우리가 연구도 하지 못하고 그것을 훈련도 계속해서 하지도 못하고 그걸 조직화해서 그렇게 할 줄도 몰랐다 그러구 하니까, 내가 고렇게 하려고 하면서도 표현이 부족한 줄을 아니까 그 사람이 영어로 'accidental' 그러는 거야. 참 고마웠어. 아닌게 아니라 그건 참 accidental 우발적이라 그말이야. 3·1운동도 그저 accidental. 4·19두 accidental, 그게 무엇이 흐름이 있어서 된거 아니고. 그것으로 고만이야. 그 다음에 뭣이 되는 것도 없어. 그저 그러구 말아. 그게 아주 우리의 잘못이라 그 말이야.
3·1운동을 보면, 가능성은 참, 이 나라의, 이 사람들을 가졌으면, 뭐 인도보다 못지않게. 훈련만 하면 될 수 있다- 그 생각이 드는데. 4·19의거는 세계 어느 나라 학생보다도 우리나라 학생들 가졌으면. 크게 시민운동 할 수 있다 그랬는데 그저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만다 그말이야. 그걸 8개월 후에 5·16이 났구 그 다음엔 4·19는 죽어들구 마니, 그건 실패 아니냐. 그 실패의 원인이 뭐냐 그러면 제 문제를 몰라. 문제의 소재를 몰라서 그래. 문제가 3·1운동 때에는 독립만 얻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표면에 나타나는 건 독립이지만 독립만 얻으면 되느냐 하면 그게 아니야. 또, 4·19때는 이승만 타도하구 그만인데, 이승만만 내쫓으면 목적 됐느냐 하면. 그런 줄 아는 데가 잘못이라 그 말이야. 그 때에 그 사람들이 의식은 못했지만 좀더 역사적으로 보면 4.19의 의미가 어디 있느냐 -그건 3·1운동두 마찬가진데 -4·19의 그 역사적인 의미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면 우리나라에 적어도 조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그놈의 그 소위 양반적인 양반식 정치, 그것 때문에 넘어진 정신을, 이 마음을 개조하는 데에, 말하자면 민족을 개조한다고 할까 이제(그 악의) 뿌리를 그것을 뽑아 버리는 게 우리의 목적이었어야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정치운동이 아니라 사회혁명이 되어야 한다 그말이야. 사회혁명이 아니라 말하자면 정신혁명이 목적이어야, 속에는 그것이라 하는 걸 알았어야 할 건데. 또 그거는 당시에는 몰랐어도 지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인 줄 알고 계속해 그거를 연구해 갔어야 하겠는데, 그거 한 사람이, 뭐 우리 알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저 고걸루 끝나고 말았어. 그러니까 accidental 아니냐? 우발적인 거 아니냐? 하나의 돌발사건 모양으로.
3·1운동두 그래. 3·1운동도 일본사람 내쫓는거만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일본사람 오기 전부터 그 썩어진,-그것 때문에 일본이 온거니까.-그거 그 병을 고치는 게 우리의 문젠데, 그 점에 착목하지 못했다 그말이야. 다소 조끔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것 뭐 힘 있게 그런 운동이 됐느냐 하면 그러지 못했어. 그러니까 그거 그대로 실패 안 됐느냐. 그러면 지금도 역시 똑같이 마찬가지 그 문젠데, 지금도 뭐 이 정부의 정책 고치는 거, 또 9호 조치 하구 뭐 그거 고치는 게 목적이라기보다는, 훨씬 그보다는 더 깊은 것. 우리 민족의 본래부터 큰 문제가 되어 온 그 어느 그 잘못된 그 점을 그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게, 감히 거기에 손을 대는 게 그게 우리 운동의 근본 목적이라면 목적이 돼야 할꺼예요. 그런 건 이제 뭐 말할 필요도 없이 폭력가지군 어림도 없어. 그것 가지고는 그건 못 들어 가는 거. 육신은 그까짓거 칼로 죽이면 고만이겠지만. 정신의 문제인데 그것이 어떻게 폭력으로 되겠나. 될 수 없는 일이요. 그것보다 훨씬 깊은 문제예요. 그러니까 마지못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면 폭력을 썼으면 좋겠는데 마지못해서 그런다는 그런거 아니까. 원체 이게 그보다는 깊고 높은 문제다. 그러면 스스로 자기가 섰는 데가 얼마만큼 높은 자리라는 것을 알거 아니예요? 그래야 져도 이기고 이겨도 이기고. 절대의 자리. 지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래 Hemingway의 말 좋지 않아요? "Destroyed but not defeated,"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오기를 defeated, 패하기 위해서 나온 것 아니다. destroyed, 파괴 , 짓밟히기는 아마 할 지 몰라. 하지만 not defeated 좌절. 실패는 없다. 그런데 그 Hemingway가 왜 자살했다구 그러는지 몰라. 나 알 수 없어. 참 아까워. 그래 요새 자꾸 뿌리생각 하게 돼. 좀 해 보시요. 자꾸 파고 들어가야 돼. 직접 싸우는 운동에 참가하는 거 문제가 아니라, 그건 그리 급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보통은 그걸 행동주의라 그러는데, 행동주의는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어느 깊은 데서 나오느냐가. 그 뿌리가 무엇이냐가 문제지 , 이건 있는대로 이거 (몸둥이) 식대로 움직이지만 그거 뭘하겠어요. 아까 말대로 바벨탑 다 쌓았다가 다 쌓았다고 하는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거 될거야. 그러니까 지금이 행동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 또 아무려면 행동할 줄도 알아야지 행동도 못하고 밤낮 앉아서 생각을 위한 생각을 한다면 그거 뭘 하겠어요. 그 생각을 하구 해도 붕 뜬 생각이기 때문에 되풀이 되풀이해서 그런건데. 사람이 생각이 참 생각일 것 같으면 행동을 자동적으로 불러내는 게 그게 생각이지. 행동으로 나오지 못하는 건 그건 산 사색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생각과 행동이. 말씀과 행동이 그게 하나로 있는 거 아니요?-그러니까 거길 아직도 못가 그렇지. 거길 가면‥‥그래서 당장에 무슨 어느 목적을 정해 놓고 요걸 달성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 속에 절대의 하나님의 힘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있다. 우리 속에 간디의 말대로 영혼의 힘이, Soul force가 일어나나 못 일어나나에 있다. 그거는 간디의 말대로 하면, 싸-트와 아힘사가 결함을 해야 한다. 싸-트는 참이고. 아힘사는 사랑인데 , 참과 사랑이 결합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불살생의 그 신앙 아니고는 안된다고 아주 그렇게까지 말을 했어. 그건 간디가 자기 체험을 말하는 거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 지금 하는 거는 싸우긴 싸워도 뿌리가 옅으단 말이야. 옅으니까 힘은 정말 적어진다 그말이야. 지면서두 안져야 그게 정말 참 군인인데, 왜 그런고 하니 싸움이라는 거 질수도 있구 이길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기면 힘이 나고 지면 힘이 나가버리는 사람은 그건 형편없는 사람이예요. 이기거나 지거나 -질 때도 있지. 하지만 진 것이 진 것 아니다.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런 정신 있어야 참일 거 아니예요?
나 아까 - 아까만 아니지 요새 명동거리를 거닐 때는 어떻게 돼요. 명동거리를 걸어오다 무엇을 보았나 그러면 무어라고 대답하겠어요. 대답해 보시요 명동만이 아니고 어디나 그렇겠지만 좋게 걷는 방법이 있어. 누구도 아무것도 보지 말고 눈을 뻔히 뜨고 가라구 알겠소? 어딜 보면 그건 못써. 그러면 마음이 팔려. 그러면 마음이 보기 싫은 것도 있고 분한 것도 있고 더러운 것도 있고 별별 것이 다 있지만 말이야, 그저 눈을 벙하게 뜨고 가. 그렇게 한다구 넘어지지 않아, 넘어질까봐 걱정말라고. 눈을 뻔히 뜨고 가면, 다 왔는데 하나도 기억되는 물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그런지 안 그런지 실험해 보라구. 눈을 뻔히 뜨고. 어딜 보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보는 것도 아니고. 또 듣는 것도 그렇지, 무엇을 듣자고 그러문요 저 사람이 무슨 소릴 하냐 하고 들으려고 하면 다른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고 고것만이 들려요. 실험을 해 보세요. 나는 그걸 어디서 배웠는고 하니 영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처음 외국엘 가면 모두가 영어로 지껄이는데 영어를 그렇게 오늘날까지 배웠건만 하나도 안 들려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런데 가서 얼마 동안 있으면 차차 저기서 오는 사람의 말도 알아듣게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듣고 보는게 바로 그거예요. 촛점이 문제야. 눈은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어떤 이와 시선이 마주쳤나 안 마주쳤나. 시선이 마주치면 그건 보통이 아니예요. 그러기 때문에 대개의 사람은 시선을 피해버려. 다만 한 예외만 남아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는 마주치면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있지만 말이야. 그 외에는 그런 거 없지 않아요? 그건 여간해 못하는 거요. 그러니 시선이 마주친다는 거 참 무서운거야요. 그래, 그러게 될수록은 내 정신을 무엇에도 안두어야 눈을 뻔히 뜨고 갈 수가 있어, 그래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이라. 세상소리를 보는 보살이라 세상소리를 본다고 그러지만. 세상소리를 다 본다는 건 무슨 소리냐 하면. 누구의 소리도 안 들으니까 세상 소리를 듣지, 아 어느 사람의 고거 요렇게 속삭대는 속된 말을 특별히 자기의 가까운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들어주고 그런다면 거 보살노릇을 하겠어요? 그러기에. 참 보는 건 눈을 뻔히 뜨고도 보는 것이 없이 보는 거 그것이 참 보는거. 참 듣는 거는 귀를 멍-하니 해서 들으면서 두 듣는 거 없는 거, 그러면 아마 참들을 거 .
싸움도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 이겨도 좋고 져도 좋고 그런 사람이 그게 정말 이기는 사람 아니겠느냐-. 그런데 대개 무슨 뿌리라는 지경에 간다는 건, 사상은 radical해야 된다고 하는,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어요. 나는 젊어서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어요. 내깐으론. '사상은 radical 해야 된다.' 그런데 그러면 아주 싫다는 사람 많을 거요. 아이구, 예수를 믿어두 웬만치 믿어야지 너무 뭘 그러면 못쓴다. 다 그러지 않아요? 원만치 하는게 좋다고. 왠고하니 세상은 라디칼한테 견뎌내질 못해서 그래. 그걸 자기가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하고 옆에 가까이 있으면 거북해서 못 견뎌. 하지만 그래야 돼요. 그런데서 부다껴 가야 돼 .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라는 이는 radical해요. 그저 뽑아놓은 잘드는 칼같지, 이 사람 한테도 좋고 저 사람 한테도 좋고 그런 것이 아니야. 그래 바로 전에 칭찬을 했던 베드로보고도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리 만큼. 그게 무슨 음성을 높여서 감정으로 그랬겠소만, 그게 무서운 이 아니요? 부드러운 말로 했을수록 더 무섭지 않아요? 그러지 않고는 참이 뭣인지를 맛을 알 수가 없고, 참이 뭣인지 맛을 모르는 사람 천만 명이 있어도 힘이 안된다 그 말이야. 그 대신에 참의 맛을 안 사람이 한 사람이 있으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돼. 져도 좋고 이겨도 좋다 난 지고 이기고를 문제로 삼는 것 아니다-그러구 싸워가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싸움이 그만큼 무게가 있을건데 그렇지를 못하다 그말이야. 그러니 이것은 우리 당대에 와서 된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수백 년, 뭐 적어도 천년 이래의 우리에게 든 병이라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걸 고쳐가는 게 우리 싸움인데 이 싸움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대적하는 싸움이 아니라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대적하는 싸움이다∼. Martin Luther King의 말이 좋아요, "날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죽여도 미움은 남지 않아? hater는 아무리 죽여도 hate는 남지 않아?"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것은 미운 놈 있으면 죽여 버리자는 거야. 다 모조리 죽여 버리면 된다 하지만 끝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evildoer 악을 하는 놈 evildoer를 아무리 죽여도 evil은 남는다. 왜 어째서? 내가 남으니까. 네가 나쁜 놈이다, 그래가지고 그걸 죽여 버리면 그 악이 죽인 놈한테로 옮겨 와. 도둑놈을 내가 그걸 죽였으면 그 도둑질이 내게로 쑥 들어와 내가 강도 됐다 그 말이야. 그러니까 그 전보다 더하지 않아? 문제는 evildoer를 없애는 거 아니라 evil을 세상에서 없애자는 거 우리 목적인데. 우리 악한 자와 싸움하는 거 아니라 악을 이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 그럼, 악을 이 세상에서 없애려면 그 악자(惡者)라는 그 사람을 내가 설득을 해서 내 편으로 끌어와야, 내 친구로 도로 찾아와야 그 사람을 내가 찾아오는 것이 목적이지 죽여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건. 이 세상의 권력주의자들은 그래. 제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잔인하게 다 죽여버리고 우리끼리 잘 살면 되지 않아 그러지만. 우리는 그럴 수는 없다 그 말이야. 저 사람을 찾아와야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기뻐하신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선 집에 무사히 있는 99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하나 때문에 마음을 더 쓰는 분이시니까 우리 하늘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면 그 하나를 내가 찾아와야 한다. 고 바로 내게는 죽여 버리고 싶은 고거를 죽이질 능히 않고 어떡하면 그거를 내가 찾아 헤매도록 해 주시겠나, 그럭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가롯 유다가 생겼으니 말할 거 있어요? 감히 내가 걸다 한다고 그럴 수 없지만,-적어도 우리 싸움의 목표는 그런 데 있다고 하는 거. 그러니까 평화주의 안 가질 수 없다 그말이야. 싸움을 안 하면 몰라도 싸움을 하려거든 평화적인 입장에서 하게 생겼지. 누가 감히. 이 인간속의 내 편과 저 대적을 가릴 사람이 누구냐. 누가 누구를 감히 내 편이고 누가 감히 누구를 내 대적이라고 그럴 수가 없지 않아요? 내가 무얼 가지고 그래. 그럴 자격이 없어. 하나님이 안하시는 걸.
하나님이 이 자식도 내 자식, 헤매는 자식도 내 자식 그러시는 하나님인 걸. 이 우주의 원리가 그런 걸.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 그 말이야. 생명은 그 자체 속엔 선악의 구별을 안 한다 그 말이야. 화복의 구별을 안 하는 게 생명인데, 그런 걸 내 생각으로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해석을 해. ∼케 하면 하나님이 이걸 기뻐하시겠지- 미워하시겠지- 그러구 말이야. 그건 내 표준으로 하는 거니깐 내 신학이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말이야. 이런 말 하면 그건 하나의 빈말 아니요? 이상론 아니요 그러겠지만, 이상론이 이상론이지만 그것을 내가 실제로 살릴 때. 내 맘의 태도로 늘 실천의 태도로 가면 그건 무서운 것이 돼. 이거를 앉아서 토론으로라도 하면 어린애도 저 중학생도 할 수 있는거겠지만. 그걸 정말 그대로 실지로 하겠나? 그런 문제엘 들어가면 이때까지 말하던 학박사님들도 슬그머니 꽁무니 뺄거예요, 그래, 뺄 사람 다 빼고 난 다음에 정말 이제 싸울 분이 남지, 토론할 때엔 아직도 실컷 한 다음에 자 이젠 그대로 그럼 한다-그렇게 하면 토론에서는 '가' 표에 손을 들었던 사람도 그 중에 몇이 안 될거요.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아주 불철저 뜰미직- 한 성격의 국민이라 그 말이야. 그런 것이 이날까지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는 동안에 이게 생긴 거란 말이야. 살아가려니까 이렇게 됐겠지만, 하지만 살아가려고 그런 짓을 하니까 살림답지 못한 살림, 더럽게 더럽게 역사가 돼왔단 말이야. 덮어놓고 제 민족의 칭찬만 하는 그런 따위 애국자들, 에이 그거 듣지 마시요. 그 사람들이 애국하는 거 아니라 괜히 그럭하구 해서 뭘 들쳐 먹으려고 덮어놓고 뭐 우리 민족 어쩌구 저쩌구 뭐 에베레스트에 뭐 한국이 뭐 서긴 뭐 섰단 말이야? 돈이나 썼지. 몰라, 한국사람 다 그렇기야 하겠어요? 뭐 한 묶음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물론 없겠지. 비교를 하자니까 그렇지. 아닌게 아니라 개중에 무슨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됐겠지 거저 뜻 없이 의지가 없이야 됐겠소? 하지만 그건 비유해 하자니 하는 말이고.
여간 내기가 쉬운데, 물질로 하는 거는 어느 물질로 하는 것도 속에 정신적인 무슨 버티는 것이 없으면 아마 안 될거요 그런데 이런 때일수록 소수의 사람이라도 그걸 자꾸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어야 돼. 남에게 강조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내 문제로. 비근한 내 문제로. 생각을 하면 자꾸 이렇게 커져요. 분명해 지고. 생각 안하면 없어지는 거. 그래서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 그건 뭐 어길 수 없는 철리(哲理)예요. 하나님이 빼앗는 거 아니야. 내가 내버리니까 그러지. 그걸 말을 이제 하시려니까 그런거지. 하나님이 뭘 빼앗으시겠어요? 생명의 법칙이 그런거지. 진리의 법칙이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 때 불행이라면 참 불행한 때에 났는데 그 대신에 강하게, 강하다는 게 별거 아니고 정신적인 고지에 서나 못서나 그것인데. 정신적인 고지 말인즉은 쉽지만 그렇지만 거기 서자면 서려는 사람 많지 않을거요. 하지만 정신적인 것이 본래 그렇지 않아요? 죽을 각오를 하고도 거기에 서는 사람이라면 그런다면 자연히 자기 마음에 무엇이 생기는 거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럴수록 그러면 보람을 느낄 거예요. 그거는 뭐 세상에서 주는 보람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느끼는 보람인데. 건 이제 좀 나이가 많아야 알거요.
나는 참 힘없는 사람인데. 의지가 약해서 그렇지만. 죽음이 가까이 오니까 차차 그런 게 조끔 이렇게 보여 일을 도무지 다--- 잘못해 놓아서. 4.19 건설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거래도 좋아. 이만한 마음이라도 내 양심에 양심을 속인다는 마음 느끼지 않고. 여기서라도 증거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느 만큼 마음속에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래, 죽기 전에 이런 말이라도 할 기회가 있었으면 몇 사람에게라도 그렇게 했으면 고마운 일이다- 본래 이렇게만 하고 말잔 것은 아니지‥‥ 그 생각을 하면 참 슬프지. 세상에 나올 때 이렇게만 하다 말고 죽자고 나온 건 아닌데, 하나님이 나를 내실 때 그러신 거는 아마 아닐 거예요. 그건 내가 잘못해서 이랬다‥‥ 그 후에도 물음이 있을 거요. 하지만. 그런 후회 때문에 약해지지 말고 이제라도. 다 타다가 남은 부지깽이라도, 이제라도 붙여서. 말짱이라도 하고 죽으면 되지 않아! 그것도 못하고 죽을까봐 걱정이지. 거긴 믿어야 돼! 지극히 적은 빤짝이라도 있기만 하면 하느님이 잊어버리시지 않아요. 절대 안 잊어버리셔! 너희가 뿌린 눈물 한 방울이라도 그걸 흘려버리지 않고 병에 담는다고, 내버리시지 않는다고 그렇게 표시 했어. 이제 그거를 믿지 않으면 이 우주고 뭐고 할거 없어요. 그래- 생맥주라도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그대로 죽었으면 좋지 차라리. 그러나 아마 그렇진 않을 거예요,
나는 이 세계가 세계전쟁이 또 나서 다 죽어 버린다든지 이 인류가 망해 버린다든지 그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생각 하다 죽어서 밑진다는 생각 없어. "좋다! 거 안 없어질 거다." 뭐가 무슨 식으로 되겠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을 거다!" 그래 노자의 말이 사이 불망자수(死而不亡者壽)라. 죽어도 죽지 않는 게 '수' 다. 죽어도 망하지 않는 게 그게 정말 참 영생이예요. 몰신불태(沒券不殆)라, 몸이 죽어도 위태하지 않아, 몸이 죽으면 그 때문에 없어지는 거라면 그건 위태한 거예요. 몸이 꺼져도 까딱이 없는 거 그게 정말‥‥ 그래 예수는 뭐 그 점에서는 더 분명한 말을 말씀하셨으니까. 그건 성경을 읽어 봐야지 .
이 평화주의 문제가 좀 문제가 돼서 그걸 자꾸 생각을 했습니다. 참 무자비하게 아주 나쁘게, 노동자에 대한 정책이 틀려먹었어. 요새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도 못해. 신문에 쓰지도 않으니까. 집안에 무슨 불행한 일이 있었는지 우선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문제를 바로잡는 일의 첫 걸음인데. 알지도 못하니! 사람이 다 죽게 됐는데! 벌써 자기네 마음으로는 다 죽기로 작정한 - 요새 표어가 그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경관하고 맞붙어서. 너 죽고 나 죽자! 17∼18세 난 처녀아이들이 결심이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그것이 우리 보기에 아주 순수한 참 진리에 대한 그런거냐 하면 그렇지를 못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게 안타까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무섭게 돼 가는 그런 것을. 그 마음을. 무슨 목적 때문에 하는 싸움이냐는 것을 그런 것을 (알려줘서) 그걸 치료해 줄 수가 있을까‥‥ 그런데 당국의 정책은 또 아주 악독하게 치닫기만 해. 학생의 세계와는 아주 달라요. 3층에서 떨어져서 두 팔이 부러지고 허리도 부러지고 그런 사람도 있지만‥‥
(1977. 9, 18명동 가톨릭 회관 오후 3시. 테이프가 다돼서 미완결 - 이부분 소지자를 찾습니다. 이 테이프를 정성들여 녹음하고 제공해주신 유병환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조형균)
<< 테이프를 가지고 계신 분은 hyeonpil56@gmail.com 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977년 9월 18일 성경모임 명동 카톨릭회관에서 하신 말씀 (씨알의소리 1996년 2-6월호)
씨알의소리 1996년 2-6월호 130-132호
저작집30; 14- 241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