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57. [역경의 열매] 주선애 (1-40)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 되길…” 아버지가 남긴 한 마디 유언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4일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내 삶에 기독교교육을 향한 길을 낸 건 스물셋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이 세상은 잠깐이라오. 내가 죽더라도 선애를 잘 키워 주오. 선애는 딸이지만 꼭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 주오.”
장맛비가 퍼붓던 1926년 7월 21세의 앳된 여인이 평양에서 황해도 장연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역에 내려서도 40리 길을 쉼 없이 걸어 구미포란 곳을 향했다. 폐결핵으로 요양 중인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온 여인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마지막 숨을 혼자 거둘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눈물이 흘러 빗길을 걷는 발걸음을 더 힘들게 했고 18개월 된 딸은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피하지 못한 채 엄마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 여인이 내 어머니요 어린 딸이 나였다.
아버지는 한 농가의 작은 사랑채에 창백한 얼굴로 혼자 누워있었다. “잘 왔다”는 한마디 말을 남긴 채 한참 말이 없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울음이 서서히 멎을 무렵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겨우 마지막 말을 맺으셨다. 그렇게 남긴 유언을 가슴에 품은 채 어머니는 70여년간 홀로 사셨다. 남겨진 재산도, 혼자 살아갈 만한 경험도 없이 어린 딸과 둘이 세상에 내던져진 삶이었다.
어머니 변정숙 여사는 어떻게 해야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의논해 볼 곳도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주변엔 없었다. 아버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긴 한 마디 유언을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뤄나가셨다. 갓 스물을 넘긴 나이에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에겐 경황이 없어 남편의 유언에 “예”라고 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린 게 일평생 한이 됐다. 그리고 ‘내 기어코 당신의 뜻을 몸으로 이루리라’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오셨다. 그 후로 76년이 지나 97세가 되기까지 어머니의 삶은 충분히 “예”라는 대답으로 점철됐다.
증조할아버지는 순회 전도 여행을 하던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증조할아버지의 전도로 할아버지 3형제의 가족이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 우리 할아버지 주인섭은 3형제 중의 맏아들로서 아들만 5형제를 낳아 키우셨다.
그러나 아들 다섯이 20대를 전후해 하나하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폐결핵은 치료약이 없어 그저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으며 요양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래서 아들 5형제를 모두 먼저 천국으로 보내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 주기남은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남 대동군에 있는 추빈리교회에서 일찍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아주 열심히 했던 청년이었으며 주변에 있던 꽃을 꺾어 아동 설교를 하는 등 특출난 방법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아버지에 관한 사진이나 기록은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귀한 유언은 어머니의 일평생을 지배했다. 놀랍게도 그 유언은 예언처럼 이뤄졌다. 내가 신학교에서 일생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기도와 유언이 나를 일관된 축복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 선친의 유지 받들어 평생 '기독교 선생'의 삶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 [역경의 열매] 주선애 (4) 안창호 선생의 돌더미 보며 독립 위해 헌신 다짐
* [역경의 열매] 주선애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 [역경의 열매] 주선애 (6) 산파 면허증 받고 주님과 약속한 무료봉사 실천
* [역경의 열매] 주선애 (7) 폭압정치와 기독교 박해 심해진 평양 떠나 서울로
* [역경의 열매] 주선애 (8) 보안소 수감 중 소장 아내 치료… 큰 위기 벗어나
* [역경의 열매] 주선애 (9) "이제 넘어왔습니다" 안내자 말에 "만세" "할렐루야"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1) 고달파도 슬프지는 않았던 남산 해방촌 기숙사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3) 피난중에도 찬송… 기독교인 삶은 달랐다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4) "깔치 왔네" 비웃던 아이들… 나중엔 울며 회개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5) 드디어 6년간 준비한 미국 유학길 올라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6) 2주만에 도착한 미국… 영어 울렁증에 손짓으로만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7) 태극기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의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8) "귀국 후 전 세계 복음 전할 선교사 양육" 포부
* [역경의 열매] 주선애 (19) 험난한 기독교교육과 여성교육… 두 마리 토끼 다잡아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0) 35세에 여전도회 회장 맡아… 시대 이끌 사명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1) 기독교 교육은 학문이 아닌 체험하면서 배워야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2) 오랜 남존여비 전통에…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3) 중년여성 해방구 '교회여성지도자교육원' 열어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4) 은퇴 후 어려운 교회 도우려 나이 육십에 운전면허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5) "연예인들 사이에 성경공부 붐 일어났어요"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6) 길고도 짧았던 장신대 23년, 눈물의 정년 퇴임식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7) 소외된 여교역자 노후대책 위해 안식관 짓기로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8) '분뇨 못' 뚝방촌 아이들… 사랑과 인내는 변화 가져와
* [역경의 열매] 주선애 (29) '한집 한 통장 갖기'로 쪽방촌에 새 소망 피어나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0) 묘향산 관광이나 하라고? 차라리 금식기도회!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1) 감격스런 평양 기도회, 부흥회처럼 열기로 넘쳐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2) "황장엽 선생님, 하용조 목사님 위해 기도해주세요"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3) 황장엽 선생 느닷없이 내게 "우리 형제합시다"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4) 접이칼 들고 죽어버리겠다는 황장엽 향해…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5) 황장엽 별세 소식에 '하나님, 그 영혼 받아주세요'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6) '새생활 체험학교'로 탈북자들 남한 생활 적응 도와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7) 내 인생의 다음 사역 '통일은 다가오는데…'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8) 탈북자 통일역군으로 세우려 '샬롬공동체' 열어
* [역경의 열매] 주선애 (39) 어머니들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 [역경의 열매] 주선애 (40·끝) 95년의 삶, 감사로 채울 수 있어 감사
약력=1924년 평양 출생, 장로회신학교, 영남대 졸업. 숭실대 교수, 장로회신학대 교수, 대구 신망고아원 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탈북자종합회관 관장 역임. ‘어린이 성장의 이해’ ‘장로교 여성사’ 등 저술.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1989) 목련장(1994) 김마리아상(2010) 수상.
***[역경의 열매] 주선애 (2) “이 아이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할머니의 기도
다섯 아들 잃은 아픔 많은 할머니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 받아… 외롭게 자란 날 불쌍히 여겨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75년 어머니의 고희(70세)를 맞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어머니는 집에서 10리 넘게 떨어진 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였다. 교회는 찬양하고 예배하는 곳에 그치지 않았다. 한글반을 열어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을 가르쳐줬다. 글자를 공부하며 써볼 종이가 필요했지만, 당시 형편상 살림을 맡은 오빠에게 연필과 종이를 사달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신 오빠가 쓰다 버리려 했던 몽당연필과 낡은 창호지로 글자를 연습했다. 신이 난 어머니는 글을 배우는 게 너무 좋아 부엌에서 불을 땔 때 쓰는 소나무 부지깽이로 바닥에 글씨를 쓰며 공부를 했다.
외할머니는 농가로 시집보낸 첫째와 둘째 딸이 고생하는 게 애처로웠던 것 같다. 막내딸인 어머니만이라도 도시에서 생활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미소를 하는 집과 혼사를 맺으셨다. 16세 신부와 18세 신랑의 결혼이었다. 대가족인 데다 정미소집이어서 일이 오죽 많았으랴. 16세에 시집온 며느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도맡아서 했고 추운 겨울에도 얼어붙은 대동강 얼음을 깨고 식구들의 빨래를 했다. 손잔등은 하루도 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 손으로 저녁이면 가족들의 양말을 기우셨다.
그나마 식구들이 건강하기라도 하면 행복했겠지만 하나둘 시름시름 앓아 세상을 떠나는 남정네들을 보며 마음이 어땠을까. 아버지마저 병들어 눕게 됐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도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어른들 모르게 어머니께 과일을 사다 주시곤 했다. 어른들에겐 어려워 말 한마디 못했지만 그런 남편의 보살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던지 어머니는 두고두고 내게 그 이야길 해주셨다.
나는 서문밖교회 유치원도 할머니 등에 업혀 다닐 만큼 치마폭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여섯 살 때까지 어머니 젖을 먹었다고 하면 다들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지만 사실이다.
다섯 살쯤 됐을 때 같다. 할머니가 캄캄한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나를 깨워 손목을 붙들고 조용히 길을 나섰다.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길을 한참 걸어가다 보면 모란봉 풀밭이 나왔다.
할머니는 그 풀밭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한참을 혼자 놀다 할머니에게 다가와 보면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동이 트고 햇빛이 할머니와 내가 걸어 온 길을 환하게 비춰줄 때쯤 모란봉을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체험적으로 새벽기도란 걸 알게 됐다.
할머니는 아들 다섯을 다 잃은 아픔을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받으며 사셨다. 늘 성경을 읽으셨지만, 한글을 늦게 배워서인지 잘 읽지 못하셔서 내가 선생님이 돼 드렸다. 유치원에서 한글을 익혀 할머니에게 알려드리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아이고 우리 선애는 정말 신통해. 신동이야 신동!” 지금도 그 말씀이 귓가에 맴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쌓아 올린 할머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내 친구 중 누군가가 어머니께 질문을 던졌을 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우리 주 선생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따르고 사랑을 많이 받는데 어쩜 그럴 수 있지요”라는 질문에 어머니는 “할머니 기도 덕분”이라고 답하셨다. 그리고 내게 할머니의 기도를 들려주셨다.
“하나님, 우리 선애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아버지도 형제도 삼촌이나 사촌도 없는 외로운 아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게 해주세요.”
***[역경의 열매] 주선애 (3) “남성 못지 않은 실력과 인격 갖추자” 강조
여성들 교육하면서 남존여비 때문에 남성들 공격하는 식 여권운동 늘 반대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36년을 전후해 정진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할 때의 모습.
날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과일과 견과류 등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베개 옆에 놓여있었다. 할아버지가 준비해두신 특별 간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키웠지만 모두 20대 안팎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어쩌다 나와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손녀딸 2명만 혈육으로 남았다.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내게 두루마기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뒤 남대문 거리에 나가시곤 했다. 발길이 많은 곳을 부러 찾아가 사람들이 “그놈 참 잘생겼구먼. 아들 손자요?”라고 물으면 할아버지는 머뭇거림 없이 “예”라고 답하곤 하셨다. 엄연히 여자인 날 남자로 둔갑시키는 상황에 할아버지 두루마기를 세게 잡아당기면 멋쩍은 듯 헛기침만 몇 번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에미나이(여자아이의 평양사투리)’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이놈아”하면서 남자아이 부르듯 부르셨다. 그 시절 기억 때문인지 나는 여성들을 교육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 때문에 남성들을 공격하는 식의 여권운동을 늘 반대했다. 대신 “남성 못지않은 실력과 인격을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유년시절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신앙의 본질을 처음 깨닫게 되는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친구들과 줄지어 다니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던 날이 그 순간이었다. 평양의 12월은 혹독하게 추웠다. 유독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더 추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한파 속에서도 캐럴을 함께 부르는 순간은 온 세상을 녹일 수 있을 듯 따뜻하게 느껴졌다.
새벽 2~3시가 되면 초롱의 촛불을 켜 들고 어른, 아이 30~40명이 떼를 지어 하얀 눈길을 사박사박 걸으며 교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갔다. 사방이 캄캄해도 교인들의 집만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조용히 골목길을 걸어가 불이 켜져 있는 집 앞에 소리 없이 모였다. 캐럴 대장이 시작하는 찬송을 따라 힘차게 불렀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교회여 다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적막을 깨고 찬양을 소리 높여 부르는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체험은 없어도 진정 예수님은 기쁨을 주러 오신 분이며 마땅히 세상 사람들은 주님 오심을 기뻐해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새벽송’을 받은 교인은 문을 열고 헌금을 하거나 아이들을 위해 준비해 둔 과자를 꺼내 주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는 만둣국을 끓여 꽁꽁 얼어 있는 캐럴 대원들의 몸을 녹여 주기도 했다.
캐럴 새벽송이 기쁨과 감동의 순간들로만 기억된 건 아니다. 오래도록 속이 상했던 기억도 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친구들과 새벽송을 준비하고 있는데 주일학교 부장이자 내게는 아버지와 같았던 백부님이 오시더니 “선애 너는 집에 가거라”하셨다. 단호하기만 한 백부님의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었다.
당시엔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관념 때문에 백부님은 내가 새벽송 가는 것마저 금하셨던 것이다. 물론 이후 머리가 크면서 나는 백부님을 설득해가며 캐럴 대원으로 맹활약을 펼쳤다. 여성 찬양리더들이 다양한 무대에서 성도들을 이끄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유년 시절엔 없었던 여성 캐럴대장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4) 안창호 선생의 돌더미 보며 독립 위해 헌신 다짐
“독립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 세워 놓으셔” 마음에 민족애 생겨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가 정의여학교에 다닐 때 모습이다.
현모양처(賢母良妻).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상당수의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에 적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1910~20년대 조선땅의 일본인들은 사회의식이 강한 여성이 독립운동을 펼쳐 식민지 조선을 잃을 것에 대비해 계략을 펼쳤다. 여성교육의 목표를 현모양처로 정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은 ‘오덴바(말괄량이를 뜻하는 일본 말)’라고 가르쳤다. 당시 여자아이들은 말괄량이가 아닌, 조용하고 정숙한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런 까닭으로 김활란 고황경 김마리아 선생 등이 가졌던 애국심은 희미해져 갔다.
일본어와 일본 역사는 배웠지만, 한글과 한국 역사는 배우지 못했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일제의 포악성은 더 심해졌다. 창씨개명을 통해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고 쇠붙이는 모두 공출해갔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을 위한 위문품 주머니인 위문대 만들기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체육 시간엔 목검(木劍)을 배웠다. 오후가 되면 근로봉사로 대동강 모래사장에 나가 땡볕 아래서 리어카에 모래를 실어 나르는 작업을 했고 일본군의 식량 확보를 위해 가을엔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도 부엌일을 감당해야 했다. 나 역시 캄캄한 부엌에서 혼자 밥을 지어야 했다. 아궁이에 솔가지를 놓고 신문지 같은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성냥을 그어 불이 붙으면 신문지나 솔가지에 가만히 불을 대야 하지만 겁이 많은 나는 성냥불이 붙자 무서워서 아궁이에 휙 던져 버리곤 했다. 목재상에서 사온 톱밥은 뱅뱅 돌리는 풍구로 바람을 넣어야 불이 붙었다. 적당한 양을 부어 가며 풍구로 바람을 넣어 능숙하게 불을 붙이기까지 족히 1년이 넘게 걸렸다.
정의여자보통학교 시절 소풍으로 학교에서 멀지 않은 대성산 송태에 가게 됐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거처가 있는 곳이었다. 산에 올라가는 길에 돌더미가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레 작은 돌을 쌓아 놓은 듯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선생님께 여쭸다.
“저 돌더미는 안창호 선생님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산책 나올 때마다 하나씩 세워 놓으신 거란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을 세워 놓으신 거지.”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제대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조선의 독립이라니.’ 그동안 누구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들이 뇌리를 스쳤다. 당시 조선장로교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주기철 목사님이 출교됐다. 학교에선 선교사이자 교장인 헐버트 선생님이 앞장서 가시면 학생들은 모두 뒤따라 가 신사참배를 하곤 했다. 학교 내에선 일본 말만 해야 했고 일본 선생님들에게 수업을 들었다. 일본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거나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하면 한국말을 하다가도 입을 닫아야 했다.
‘도산 선생은 얼마나 조선 독립의 열망이 대단하셨기에 이처럼 크고 작은 돌을 하나하나 산책길에 세워 놓았을까. 그래! 나는 조선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식민지 백성이다. 나도 내 나라 독립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다.’ 처음으로 신념이란 게 생겼다. 가슴에 ‘조선인 주선애’를 확실히 새기는 가슴 뭉클한 경험이었다. 그 신념이 소녀 주선애의 마음에 뿌리내린 민족애였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5) 평소 어머니가 점찍어둔 주일학교 선생님과 결혼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 서둘러 정해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지향하게 해 준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 책 표지.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는 유치원 보모가 됐다. 요즘 말로 유치원 교사였다. 백부님은 당시 동평양교회의 회계를 담당하면서 동평양유치원을 경영하셨는데 백부님의 추천으로 보모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깜냥이 안 되는 사회 초년생에게 보모 역할이 쉬울 리 없었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아이들을 돌보고 동화책 하나 읽어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6개월쯤 지났을까. 흐릿하게만 보이던 아이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고 표현이 부족한 아이들의 말도 제법 능숙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보모가 될 수 있었다. 정의여자보통학교 시절 비싼 레슨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배우게 해주셨던 피아노 연주는 아이들과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기술이었다. 두렵게만 느껴졌던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기대되고 기다려지는 길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보모로 함께 일했던 분들에게 교육과 삶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어 행복했다. 돌아보면 평생 유치원에서 일하다 나이가 들면 유치원 원장을 맡으며 동심 천국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으니 그 행복함의 크기가 작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생각지 못한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나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최기호 목사는 당시 평양신학교에 다니는 전도사였다. 어머니는 그를 훌륭하게 보고 계셨고 내 신랑감으로 점찍어 뒀다고 하셨다. 젊은 과부로 힘겹게 사셨던 어머니였기에 사위라도 빨리 맞으려고 서둘러 정하셨던 것 같다. 최 목사가 여러 차례 나에 대한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결혼이어서 덜컥 겁이 났지만, 어머니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의 목회지였던 동광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고 어머니를 모시며 살게 됐다.
최 목사는 신앙 열정을 가진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기도가 삶의 중심이었고 검소했다. 유치원 보모를 처음 맡을 때처럼 두려움으로 시작했던 결혼 생활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남편으로서 최 목사를 존경하게 됐다. 교인들은 앳되고 어린 날 사모라는 이름으로 불러줬다.
당시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고 아시아 전역을 침략해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 예배 때마다 전 교인이 일어나 동방요배(천황을 향해 절하는 것)와 황국신민서사(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를 해야 했다. 그러던 중 평양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방으로 가라는 일본 정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우리 가족은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이란 곳에서 농촌 목회를 시작했다.
농촌 생활의 행복 중 하나는 최 목사가 모아 놓은 책꽂이의 책들을 여유 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권의 책 중 내 생애의 틀을 잡아 줬던 책 하나를 붙들게 됐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서’였다. 저자는 고난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의 고뇌를 해결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장 낮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뤄 살았다.
그는 자신의 학식과 재능, 부를 모두 버리고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자며 공동생활을 했다. ‘사선을 넘어서’는 그런 자신의 삶을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그 책에 인용된 성경 구절들이 마음에 부딪히면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됐다. 책 한 권에도 생의 길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
하나님의 손길은 하나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이 무의촌(無醫村)에서 당장 봉사할 일이 무엇일까.’ 의사는 아니라도 산파(産婆) 공부를 해서 동네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6) 산파 면허증 받고 주님과 약속한 무료봉사 실천
무의촌 의료봉사하기 위해 교사생활 틈틈이 산파공부… 매일 새벽기도로 봉사 다짐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앞줄 가운데)가 1951년 무렵 경북 영덕군 영해교회 교인들과 교회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산파(産婆)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니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마침 남편 최기호 목사가 중국 봉천(현 선양)에 집회를 인도하러 가게 됐다. 당시 중국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책이 많다는 얘길 들었던 터였다.
“책을 좀 사다 주실 수 있겠어요? 산파 공부를 하고 싶은데 자격시험 준비를 위한 교재가 필요해요.”
남편은 내게 일본어로 된 책 6~7권을 선물해 줬다. 책을 보고 나니 용기가 샘솟았다.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한 듯 눈이 번쩍 뜨였다. 늘 책상 위에 뒀던 성경을 폈다. 딱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산파 공부를 하는 동안 남을 돕고 섬기며 사는 게 가장 보람된 삶인 것을 체험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뒤 초등학교 교사직을 맡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배우며 섬기는 길을 걷게 하도록 예비하셨던 것이라 생각했다.
학교 사무실 책상 서랍에 책을 넣어 두고는 남자 선생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공부를 했다. 책에 그려진 그림들이 대부분 여성의 신체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마음에 다짐하고 새기게 되는 기도제목이 있었다. 산파 공부를 하는 동안 매일 새벽기도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해서 결코 돈 버는 데 쓰지 않겠습니다. 꼭 봉사만 하겠습니다.’
황해도 해주에 가서 산파 자격시험을 치렀다. 산파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응시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떨어져도 낙심은 하지 말자고 마음을 먹고 시험을 봤다. 그런데 웬일인가. 전체 3등으로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시험을 무난히 통과하고 나니 도청에서 발급한 산파 면허증이 커다란 봉투에 담겨 집으로 도착했다. 생애 첫 자격증을 품에 안은 것이다.
마을에선 “우리 동네에 의사가 나왔다”며 연일 축하 인사를 받았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이내 몸이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아픈 사람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한번은 난산으로 아이가 거꾸로 나오게 된 상황에 봉착했다. ‘내가 이 일을 왜 시작했나’ 싶을 정도로 두려운 순간이었다.
병원에 데리고 가려면 소달구지나 손수레에 산모를 태워가야 할 판인데 그러다간 이동 중에 산모가 숨을 거둘 것 같았다. 고통스럽게 소릴 지르며 무서워하는 산모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며 안정을 시켰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태아의 몸을 조금씩 돌렸다. 가장 힘겨웠던 건 아기의 머리를 뺄 때였다. 산모도 애를 쓰고 있었지만 좀처럼 머리가 빠지질 않았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아이와 산모를 살려주세요.’
눈을 질끈 감고 기도를 한 뒤 아기 입에 손가락을 넣은 뒤 조심히 잡아당겼다. 순간 쑤욱 하며 아기가 빠져나왔다. 산모도 죽을 힘을 다 썼지만 나도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주저앉았다. 그 일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며 마을에서 찾아오는 환자가 더 많아졌다. 어쩔 수 없이 간이병원 원장처럼 갖가지 약을 사다 두고 한밤중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소화제와 해열제를 주거나 직접 찾아가 주사를 놓아주곤 했다. 물론 하나님과 약속한 것처럼 무료 봉사였다. 착한 시골 사람들은 신세를 갚는다며 별별 것을 다 가져다 줬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7) 폭압정치와 기독교 박해 심해진 평양 떠나 서울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린 평양, 박해 심하고 기독교인들 저항 거세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의 은인들 사진이다. 1945년쯤 촬영했다. 왼쪽부터 친구 명선성, 은사 임종호 선생님, 친구 이필숙.
1946년 7월 북한 땅에는 변화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소련에서 나온 김일성이 집권한 뒤 폭압정치가 시작됐다.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애국자들을 모두 잡아가는 등 공산주의 세력 확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정치인들뿐 아니라 지주와 기업가, 특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 이뤄졌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김일성정권의 박해도 심했고 기독교인들의 저항도 거셌다. 끊임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허가 없이는 어떤 집회도 할 수 없게 됐고 아이들이나 청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통제됐다. 남편 최기호 목사도 허가 없이 집회를 열었다가 잡혀 들어가 동평양경찰서에 수개월 동안 수감됐다. 최 목사는 쇠약해진 몸으로 석방됐고 우리 식구들은 연금 상태에 처해졌다. 목사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동 세력으로 찍힌 것이다. 집 밖에는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늘 서성이며 감시하고 있었다.
평양 시내에는 커다란 사진과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다. ‘위대한 수령님’이라 칭송하는 김일성의 사진과 미군들이 공산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흉측한 모습을 담은 포스터였다. 평양 거리는 억센 함경도 억양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메워졌다. 거리에는 음산한 분위기와 공포가 감돌았다. 교인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고 남은 교인들은 쑥덕쑥덕 남쪽으로 피난 간 사람들의 이야기만 나눴다.
우리 식구는 감시원들 때문에 다 같이 집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남한으로 가면 어머니는 최 목사와 함께 황해도로 휴양을 가는 척 위장하고 내려오기로 계획을 세웠다. 우리가 살았던 황해도로 가서 수소문해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 서울에서 다시 모이는 것으로 세부적인 전략을 짰다. 만남의 장소는 서울 남산이었다.
나는 38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몰래 수소문해 한 팀을 만나 합류하기로 하고 강원도로 가는 안내자를 만났다. 혹시 보안원에게 들킬까 봐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어 여벌 옷도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내 짐은 성경책과 산파 도구가 전부였다. ‘남한에 가면 생활 대책이 없을 테니 산파 도구라도 갖고 가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옷이 너무 깨끗하면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당목 적삼에 일부러 재를 묻혀 노동자로 보이게 위장을 했다. 우리 일행은 강원도로 가는 기차를 타고 여러 시간을 가서 어느 산골 역에 내렸다. 출구엔 이미 총을 멘 보안원이 서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세워 검문을 하는데 갑자기 나를 지목하더니 보안서로 따라오라고 외쳤다.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화장실 좀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요청을 한 뒤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아!’하고 번개같이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순간 회개해야 할 죄목이 떠올랐다. 산파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게 영화필름처럼 선명하게 펼쳐졌다.
‘제가 취득할 산파 자격증으로 돈벌이를 하지 않겠습니다. 꼭 봉사를 위해서만 쓰겠습니다.’
그렇게 단단히 약속해놓고는 남한에서 굶게 될까 봐 산파 노릇을 할 생각으로 도구를 숨겨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선 분명히 보셨을 것이다.
‘하나님 자복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회개 기도를 하고 보따리에 숨겨 놓은 산파 도구를 똥통에 내던져 버렸다. 가벼워진 봇짐을 들고 보안원을 따라 일행 몇 사람과 함께 한 줄로 섰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맨 뒤에 따라가던 중 마음에 결단이 섰다. 바로 산 쪽으로 도망을 쳤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8) 보안소 수감 중 소장 아내 치료… 큰 위기 벗어나
월남하다 하룻밤 만에 돌아와 자수… 산파 면허 있는 내게 아내 치료 부탁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0년 장로회신학교 재학 때 동기들과 남산에서 산기도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가 저물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마음속에선 소리 없는 외침이 그치지 않았다. ‘주여, 주여. 이 가엾은 종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칠흑 같은 밤이 됐고 산속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나무에 찔리고 가지에 걸려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이렇게 혼자서 방향도 모른 채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도망 하룻밤 만에 발걸음을 돌려 보안소를 찾아 나섰다.
동이 틀 때쯤 보안소 비슷한 건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전날 봤던 보안원 얼굴을 보니 맞게 찾아온 듯했다. 솔직하게 말했다. “도저히 도망칠 수 없어서 자수하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보안원은 나를 감방에 넣고는 저녁때까지 내버려 뒀다.
‘주님, 그냥 끌려온 것도 아니고 도망갔다가 자수했으니 얼마나 혹독한 일을 겪게 될까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처럼 저를 구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우던 중 보안원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공산주의자들의 포악성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보안원은 사상 검증을 하듯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남편이 병이 있어서 서울에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유치원 교사를 했고 평양신학교 학생이라는 것도 밝혔다. 산파 면허를 취득해 봉사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들의 질문 중 잊히지 않는 게 하나 있다.
“미국 교회와 러시아 교회를 비교해 보라.”
“가보지 못해서 잘 모릅니다.”
“신학교에 다녔다면서 그것도 모르나.”
“러시아에 교회가 있다면 정말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조금 있을 것이고, 미국에는 교인 수가 많지만 진정한 교인은 많지 않을 듯합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안원은 그냥 들어가 자라며 다시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이튿날 밤 보안소장이 나를 불렀다. 또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보안소장 방에 도착한 내게 그는 뜻밖의 얘길 꺼냈다.
“우리 집사람이 몹시 아픈데 산골이라 어디 병원에 데리고 갈 수가 없소. 산파 공부를 했다던데 우리 집에 가서 좀 봐주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내주시려는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보안소장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는 열이 높고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심한 몸살처럼 보였다. 보안소장은 몇 가지 주사약과 약통을 보여줬다. 다행히 내가 아는 약들이었다. 주사를 놓고 머리에 찬물 찜질을 해주며 밤새 정성껏 간호했다.
밤샘 간호를 마치니 피로가 몰려왔다. 잠시 졸고 있던 사이 보안소장의 아내가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고마워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가 좀 나아진 걸 보니 뭐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엌으로 향했다. 밥과 찬을 만들어 상을 차리고 보안소장과 아내가 먹을 수 있게 했다. 졸지에 간호사에 식모 역할까지 하게 됐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간호한 지 사흘째가 되자 보안소장의 아내는 회복세가 두드러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도 나처럼 남한에 가다가 붙들려 그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이윽고 결단을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
“사모님도 내 사정을 잘 아시겠네요. 소장님에게 얘기해 나를 좀 놓아주도록 하실 수 없을까요. 간곡히 부탁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다른 보안소로 끌려가 더 큰 처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튿날 아침 소장이 말했다. “고생했소.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오. 남한으로는 가지 말아야 하오.”
***[역경의 열매] 주선애 (9) “이제 넘어왔습니다” 안내자 말에 “만세” “할렐루야”
풀려난 뒤 남쪽으로 향해 걷던 중 같은 처지의 안내자 일행과 합류… 추위와 배고픔 속에 필사의 탈출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월남한 후 만난 백부와 백모님이 1955년쯤 회갑연을 갖는 모습.
보안소에서 풀려난 뒤 남쪽을 향해 무조건 걸었다. 한참을 걷다 20여명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순간 멈칫했지만 행색을 보니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인 듯했다. 얘길 나눠보니 한 명의 안내자와 함께 남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얼마나 고달픈 길을 가는지 알기에 자연스레 나를 그 무리에 들어가게 해 줬다.
안내자를 필두로 긴장감 속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이 이어졌다. 안내자가 20m쯤 앞장서 가보고 돌아와서 오라는 지시를 내리면 가고, 조금이라도 낌새가 불안하면 자리에 멈추길 반복했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도 남쪽을 향한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안내자는 “빗소리는 이동하는 소리를 묻히게 해 매복한 군인들에게 들킬 확률이 낮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며 사람들을 재촉했다.
온몸이 젖은 옷에 감싸여 점점 더 추워졌다. 미끄러운 산길을 지나다 발을 헛디뎌 벼랑에 떨어질 뻔했다. 나는 그 와중에 신발 한 짝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한 발은 맨발이 된 채 걸어야 했다. 칡넝쿨에 걸리기 일쑤라 다리와 발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종일 굶으며 이동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안내자가 아는 어느 산골 집에 들를 땐 그나마 감자와 고구마를 먹으며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가장 위험한 관문인 38선에 가까워질수록 경비가 삼엄했다. “피차 말하지 마시오. 낮엔 꼼짝말고 기다리시오. 행진하는 밤에는 안내자를 소리 없이 따라오시오.” 안내자는 거듭 주의를 줬다. 목숨이 걸린 모험이니 극도의 긴장감에 입술이 연신 떨렸다. 그래도 서울이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넘어지고 미끄러져도 말없이 따라갔다. 행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안내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넘어왔습니다.”
우리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만세”라고 외쳤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연신 “할렐루야”를 부르짖었다. 산 밑에선 남쪽 사람들이 피난민을 위한 주먹밥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웃음 짓는 아주머니들의 손길과 마음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남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무일푼이었던 나는 백부 주요남 장로님 댁을 찾아 청량리에서 을지로까지 걸었다. 겨우 집을 찾아 현관문을 열자 백부님과 육촌 형제들이 반겨줬다. 평양을 떠난 지 12일 만에 만난 혈육이었다. 이제 염려는 어머니와 남편이었다. 바다로 오기로 했는데 풍랑을 만나진 않았는지, 보안원에게 붙잡히진 않았는지 걱정됐다.
약속대로 매일 남산에 올라가 두리번거리며 초조히 기다리다 기도를 하고 내려오곤 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3~4일 후에 가족들을 만났다. 서로 부둥켜안고 “할렐루야”를 외쳤다. 이제 가족들이 머물 곳을 걱정해야 했다. 백부님 댁에선 우리 식구가 생활할 공간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이런 상황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손길을 낯선 서울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남편이 평양 동광교회에서 사역하던 시절 그 교회에 다니던 권사님을 만난 것이다. 권사님은 서울 마포에 집을 갖고 있었는데 마당도 있고 방도 많았다.
“우리 집엔 내외만 살고 있어요.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희 집으로 가족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우리 식구는 아무 짐도 없이 그 집으로 이사를 갔다. 기본적인 살림 도구를 사다 놓고 마포 동막교회에 나가 봉사하며 남산 장로회신학교 편입 수속을 준비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0) 기도하다 천국 가길 원했던 남편… 영원히 가슴에 담아
회복되지 않은 간질병 증세에도 새로운 사역지 생겨 기뻐했던 남편… 새벽기도 후 쓰러져 주님 품으로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세 번째)와 신학생들이 1953년쯤 박형룡 박사와 학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편입 등록을 마쳤다. 어찌어찌 굶지 않고 세 식구가 먹고살았지만, 생활고가 해결되진 않았다. 전차표를 살 돈이 없어 마포에서 남산까지 꼬박 걸어 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형편상 교과서나 참고서를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북한에서 공부하던 것보다 고될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듣는다곤 하지만 교실은 일본 신사 자리의 가장 넓은 방 다다미 위에 앉아 책이나 책가방을 엎어놓고 책상 삼아 강의를 듣고 적는 수준이었다.
40여명으로 구성된 반엔 열대여섯의 여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시골에서 올라온 전도사나 월남자들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은혜를 받고 그 자리에 모인 터라 저마다 신앙 열정이 뜨거웠다. 고려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온 신앙 동지들이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몇몇 남학생 중엔 평양신학교를 다녀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한 학기를 마쳤을 때쯤 경북 영덕 영해교회에서 남편 최기호 목사에게 청빙을 요청해왔다. 교인 20여명이 공동체를 이룬 40년쯤 된 교회였다. 북에서 농촌교회 사역을 하던 시절 간질병 증세를 보였던 최 목사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강단에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역지가 생긴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면소재지에 딱 하나 있는 교회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다. ‘이 예배당에 어떻게 사람들이 모이게 할까.’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무료 유치원 운영이었다. 교회처럼 이곳에 단 하나뿐이었던 유치원엔 면장 경찰서장 등 마을 지도자의 자제가 모였다. 당시 중학교를 졸업한 교회학교 선생을 조수로 두고 20여명의 아이들을 보육했다.
나는 원장이자 보모 역할을 하며 도시 유치원 못지않게 기독교 교육을 정성스레 했다. 갑작스레 비가 올 때면 아이들을 업고 우비를 씌워 집에 데려다 줬다. 부모들은 그 정성을 감사히 여겼고 우리 가정을 환대해줬다. 농촌의 순박한 젊은이들도 나를 ‘사모님’이라 부르며 잘 따라줬다.
1949년 가을, 여느 때처럼 어르신과 청년들 10여명과 새벽기도회를 마쳤다. 최 목사가 여전히 강대상 밑에 엎드려 기도하는 걸 보고 집으로 내려왔다. 아침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는데 좀처럼 최 목사가 오질 않았다.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산에서 내려온 빨갱이에게 습격을 당했나. 간질 때문에 졸도했나.’
다급한 마음에 어머니와 교회로 내달렸다. 기도하던 강대상 밑엔 최 목사가 없었다. 남편을 발견한 곳은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쓰러진 남편을 보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마을 의사를 찾아 뛰어가셨다.
남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고 가슴에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여보, 당신이 승리했군요.’ 남편은 항상 “강대상 밑에서 기도하다 천국 가야 해”라고 말했었다. 죽도록 충성하길 원했던 남편의 모습이 곧 승리자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웃 마을 목사님과 교인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위로를 전했지만,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직 주님의 영으로만 나를 위로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며칠 후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남편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불러 가셨지만 주 선생이 최 목사 일을 뒤이어 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분발하십시오.’
짧은 편지였지만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향점을 발견하게 해준 순간이었다. ‘일어나자. 주님 인도 따라 담대히 가보자!’
***[역경의 열매] 주선애 (11) 고달파도 슬프지는 않았던 남산 해방촌 기숙사
추위와 배고픔 이길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주의 길 가는 이들이 겪는 잠시 동안의 고생일 뿐이라 생각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50년쯤 장로회신학교 여학생, 교수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남산 해방촌엔 유달리 북한 사람이 많이 살았다. 이북에서 피난 온 대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송죽원’이란 학사가 생겨 그곳에서 생활하게 됐다. 건물은 꽤 컸지만, 난방이 안 됐고 전기도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한겨울에도 미군들이 쓰던 매트리스 한 개에 두 사람이 같이 누워 잤다. 너무 추워 견디기 힘들 때 조금 따뜻하게 자는 방법이 있었다.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반대로 누워 내 발은 옆 사람의 겨드랑이 밑에, 옆 사람의 발은 내 겨드랑이에 감싸고 자면 발에 따뜻한 기운이 돌아 잠이 잘 왔다.
장로회신학교 여학생들은 공부하느라 바빴다. 북한에선 영어를 배우지 못했는데 영어는 필수였고 헬라어 히브리어도 해야 하니 도통 정신이 없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식사는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죽 한 그릇이 전부였다. 영양 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 밤에 공부하려면 빈 잉크병에 석유를 담아 솜이나 헝겊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다. 그렇게 펄럭거리는 뿌연 불 밑에서 매트리스를 깔고 공부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노라면 졸음이 몰려와 꾸벅꾸벅 졸다가 불에 닿아 머리카락을 태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늘 허기지고 피곤한 상태였지만 피난민 여학생들은 금요일 저녁마다 6~7명씩 모여 철야기도를 했다. 기도처는 기숙사 인근 충무로교회였다. 기숙사는 밤 10시만 되면 사감 선생님의 점검이 있었다. 선생님의 최우선 임무는 10시 이후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커다란 대문을 굳게 잠그는 일이었다.
담장은 높고 육중한 대문은 안쪽에서 열 수 없게 잠겨 있었다. 사감 선생님의 점검이 끝난 후 몰래 모인 우리는 현관문 밖으로 나왔다. 대문 옆에 설치된 청결통(화장실)을 활용하는 게 우리가 세운 탈출전략의 핵심이었다. 청결통 위로 올라가면 담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양에서 오신 양효숙 언니가 용기를 내 담을 넘었고 미리 준비해 둔 열쇠로 밖에서 대문을 열었다. 처음이 어렵지 성공하고 보니 별 것 아니었다. 다시 들어갈 때는 여러 사람이 떠받들어 한 사람이 담을 넘은 뒤 청결통 위에서 내부 상황을 확인하고 사감 선생님이 없을 때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예배당 마루에 엎드려 개별기도를 하고 한 시간쯤 후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기도를 했다. 회개 기도를 주로 했는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 동지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마음에 시험이 드는 기도 제목을 내놓으면 한마음으로 중보기도를 해줬다.
우리에게 이 시간은 영적으로 깨끗해지는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서로 고백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아름다운 기도공동체였다. 북한에 식구들을 두고 혼자 넘어온 학생들이 마음의 치유를 받는 기회이기도 했다.
기숙사 탈출과 진입 외에 큰 문젯거리는 역시 겨울철 추위였다. 내복이 변변치 않았던 터라 기도할 때마다 이가 바들바들 떨렸다. 우리는 추위를 버텨보려고 한 사람 위에 한 사람이 엎드리고, 그 위에 또 한 사람이 엎드려 서로의 체온과 몸무게를 감당해 보느라 안간힘을 썼다. 손끝까지 꽁꽁 얼어붙을 때쯤 기숙사 담장으로 향했다. 몸은 고달팠지만, 동무들 표정엔 슬픔이 전혀 없었다. 주의 길을 가는 이들이 겪는 잠깐의 고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기도 후 담장 앞에 도착할 때면 항상 기숙사를 나올 때보단 그 높이가 낮게 느껴졌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2) 남한 첫 예배서 우렁찬 찬송 소리에 가슴 벅차
북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 떠올라 눈물…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에 삶과 인격 오롯이 표현돼 감동 받아
한경직 목사와 영락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1949년쯤 사진을 촬영했다.
누구나 생애 가장 특별한 축복이라 여길만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한경직 목사님 곁에서 정신적 영적으로 삶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잊히지 않는 축복의 순간이다. 지금도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내 영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1948년 남한에 와서 처음 예배를 드린 곳이 영락교회였다. 지금의 봉사관 자리에 있던 베다니전도교회(현 영락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마당까지 가득 차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귀에 꽂히는 우렁찬 찬송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찬송을 듣는 게 몇 해 만인가 싶었다. 북한에서 몰래 드리던 예배가 떠올랐다. 한 목사님의 모습은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성도에게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고 행복했다.
내가 잠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서울에 돌아와 영락교회 유년부 지도를 맡았을 때 한 목사님은 이따금 유년부를 찾아와 축도를 해주셨다. 목사님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데 탁월한 목회자였다. 기도 한 번을 하시더라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언어로 해주셨다.
한 목사님은 매 주일 아침 일찍 주일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본당과 교회 마당에 놓여 있는 돌계단 중간에 서 계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그곳에 서 계시며 영아부부터 중고등부, 대학부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모든 학생과 교사, 성도들과 인사를 주고받으셨다. 멀리서 지나가는 성도가 목사님께 다가서지 못해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손짓만 전해도 빠짐없이 목례로 반겨 주셨다.
한 목사님의 인격에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에 나는 탄복했다. 순수하고 복음적인 설교에 그분의 삶과 인격이 오롯이 표현됐기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새해가 되면 장로회신학교 이광순 교수와 함께 남한산성에 있는 목사님 자택을 방문해 세배를 드리곤 했다. 거실이 넓지 않아 세배할 자리가 마땅치 않았지만 나름대로 오붓하게 말씀도 나눌 수 있었고 한 해를 의미 있게 시작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우리 일행이 댁을 나설 때면 늘 문밖까지 따라 나오셔서 눈길 조심하라고 당부하시곤 했다. 그의 겸손함에 언제나 내 머리가 절로 숙어졌다. 한 목사님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닮을 수 있을까 싶을 뿐이다. 지금도 영락교회에 가면 한 목사님의 향취를 느끼곤 한다.
1950년 5월 학교를 졸업하면서 박형룡 박사님의 권면에 따라 진학의 길을 찾아봤다. 때마침 연세대에 신학과가 생겨 성서신학대학원 과정을 공부해 볼 요량으로 신청하기로 했다. 장로회신학교 추천서가 필요해 신청했는데 며칠 후 박 박사님의 사모님한테서 나를 보자는 연락이 왔다. 영문을 모르고 찾아간 자리에서 뜻밖의 얘길 들었다.
“주 선생, 어찌 학교를 배신할 수 있어요.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을 가려고 하십니까.”
나의 무지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외국에서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는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울면서 사모님께 사과를 드렸다. 기도 끝에 진학 대신 목회의 길을 내보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제일 먼저 부르는 곳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여기겠다고 결심했다. 며칠 후 부산에 있는 김형식 전도사님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그 만남은 곧 부전교회로 향하는 사역의 길이 됐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3) 피난중에도 찬송… 기독교인 삶은 달랐다
목회 중인 부산에 피난민들 몰려와… 식량 떨어지고 전사 소식 들려와도 찬송 부르며 기도로 아픔 견뎌내
1950년 5월 26일 서울 남산의 장로회신학교 제3회 졸업식 모습.
부산 변두리에 자그마한 목조 건물로 건축된 부전교회엔 교인 100여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를 이끄셨던 김형식 전도사님의 설교는 정말 뜨거웠다. 교인들은 젊은 전도사를 잘 따랐고 새벽기도는 물론 밤기도와 철야기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백남조 집사님께서는 서울에서 오는 나를 위해 흙벽돌로 방 한 칸, 부엌 한 칸을 자기 집 마당에 지어주셨다. 내겐 오랜만에 독립적인 주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정부를 수립한 지 3년도 안 돼 남침을 감행했다. 북한의 꿈은 혁명뿐이었다. 남한은 군인이나 무기가 채 준비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소련과 의논해 남한을 공산화하기로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남한은 꼼짝 못 하고 당해야 했고 전쟁이 계속되자 피난민들은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중에 조금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우리 집을 찾았다. 단칸방 뜰에는 피난 보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부상당한 군인들은 학교에 마련된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도울 사람이 모자랐다. 나는 임시 육군병원에 심방을 다녔다. 곳곳에서 열리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에 교인들과 함께 참석했다. 피난민들은 대부분 학교나 교회 건물에 모여 살았고 마당에 불을 피워 밥을 짓는 형편이었다.
부산은 점점 난민촌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보통사람과 달랐다. 피난생활 중이었지만 여기저기서 찬송 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천막교회 안에서 철야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비록 식량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물지게를 지고 멀리 다닐지라도 불평은 거의 없었다. 수많은 전사자들의 소식이 들려오면서 비보를 들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기도로 아픔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환난이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부산 거리엔 슬픔에 가득 찬 피난민들의 탄식소리가 높았지만 전쟁 통에도 크리스마스는 다가왔다. 교회마다 단출하지만 반짝이는 장식이 걸렸고 아이들은 모여서 밤샘을 하며 새벽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를 아는 교인들은 마구간 같은 곳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의 삶을 통해 성탄을 마음에 기리고 감사함을 느꼈다. 피난살이가 어렵고 고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우리 소망과 생명 되신 주님의 탄생이 더 없이 피부로 와 닿았을 것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교인들과 밤새 찬양을 부르며 예수님의 탄생을 선포하러 다녔다. 아직 부산 지리가 익숙지 않아 교인들을 따라다니며 찬양에 목소리를 더할 뿐이었지만 밤새 피곤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는데 어느 뚝방 같은 곳에 올라서서 보니 흰 눈이 내린 ‘콘셋(반원형) 막사’ 수십 개가 큰 벌판에 흩어져 있었다. 뚝방에 올라선 채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자 갑자기 막사에서 군인들이 뛰쳐나왔다.
“할렐루야.” 군인들이 눈 위에 꿇어앉아 두 손을 움켜쥐고 기도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찬송을 부르는 교인들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얼마나 자유가 그리운 자들인지요. 찬송을 부르고 싶어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릴 구원하신 것처럼 저들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역경의 열매] 주선애 (14) “깔치 왔네” 비웃던 아이들… 나중엔 울며 회개
유학 준비 중 잠시 고아원 맡게 돼… 사랑받지 못해 비행 일삼는 원생들 십자가 사랑 깨닫게 해달라 기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1960년쯤 신망원 출신인 김태연씨(가운데)의 장신대 졸업식에 참석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로회신학교 박형룡 학장님 말씀을 따라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학장님은 신학교에서 종교교육을 가르치길 원했던 날 장로교 선교부에 직접 데리고 가 소개하면서 여학생이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선교부에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셨다. 선교부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학장님의 적극적인 추천에 마음이 무겁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영어회화 선생님은 대구 중구 남산동에 계신 캠벨 선교사님의 아내 캠벨 부인이었다. 나는 동산병원 간호사와 함께 선교사님 댁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며 기초를 닦았다. 어느 날 선교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와서는 신망원이란 고아원에 가서 좀 도와달라고 청했다.
“고아원 아이들이 원장더러 나가라고 데모를 해서 원장 목사님이 나가버렸지 뭡니까. 지금 선생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데 주 선생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신망원은 대구 달서구 성당동 변두리 야산에 있었다. 복숭아밭을 일궈 작은 집을 짓고 고아 50여명을 수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6·25전쟁으로 집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둑질을 배워 비행을 저지르던 아이들을 선교사들이 모아 놓고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아이들의 언행이 너무 거칠어서 지난번 원장이 엄하게 관리하려다 충돌을 빚은 모양이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아이들에 내게 던진 첫 마디는 “깔치 왔네”였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여자가 왔다’는 은어였다. 줄임말로 표현하는 요즘 시대의 은어와는 또 다른, 그들만의 언어가 매 순간 쏟아져 나왔다. 어느 날 아침에 내 신발이 없어졌다. 다른 날 아침엔 밥그릇이 모자랐다. 돈 되는 집기를 훔쳐다가 파는 게 일상인 아이들이었다.
한두 아이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살갑게 대해봤지만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은 관심받기를 거부했다. 사탕을 주면서 이야기 하려 하면 ‘자신을 이용하려고 수단을 쓰는 것’이라고 해석해버렸다. 사람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탓이었다.
절망만 하고 있을 순 없었다. 시간을 정하고 복숭아밭에 나가 무릎을 꿇고 특별새벽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영혼들을 구원해 주소서. 부모도 소망도 없이 사랑을 모른 채 살아가는 아이들입니다. 이 동산에서 살다가 한구석에 묻혀도 좋습니다. 저들이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소서.’
하루는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예배 시간을 가졌는데 기도 중에 아이들 한두 명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죄를 회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성령이 역사하시자 온 방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울음을 참던 아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지은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두 대 훔쳤습니다.”
“담요를 도둑질해 팔아먹었습니다.”
“나는 새엄마와 싸웠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 스스로 자기를 돌아봤다. 회개 제목들이 늘어나자 울음소리도 커졌다. 밥 먹을 시간도 지났고 학교 갈 시간도 지나 버렸다. 문득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학교에 전화를 했다. 고아원에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아이들이 오늘은 등교할 수 없다고 전하고 복숭아밭으로 자리를 옮겨 집회를 이어갔다.
아이들이 복숭아나무 밑에 한 명씩 앉아 울며 기도하도록 했다. 이처럼 강력하게 통회하는 모습을 보기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이튿날 새벽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보다 먼저 복숭아밭에 나와 기도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성령의 역사가 아이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5) 드디어 6년간 준비한 미국 유학길 올라
성경학교 이상근 목사님 도움으로 3번의 시험과 신분 조사 무사히 통과… 전액 장학금과 여비·잡비 지원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가운데)가 1956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 대구역에서 동료 및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망원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2년여가 흘렀다. 대구 고등성경학교(현 영남신학대) 여자기숙사 사감으로 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박형룡 박사님과의 약속도 있었기에 신망원 사역은 늘 함께 기도하던 친구 한순애 권사에게 맡기고 이상근 목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성경학교로 출발했다.
해방 이후 교회가 부흥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성경학교로 몰려왔다. 여자기숙사에만 150여명의 학생이 있었다. 이 목사님은 미국 뉴욕성서신학교(현 뉴욕신학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목회를 하시다가 성경학교 교장을 맡으셨다. 내게 사감 역할 외에도 강의를 한두 시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기숙사에선 저녁마다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저녁이 부흥회처럼 뜨거웠다. 학생들은 통성기도를 할 때 그야말로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며 기도했다. 좀 조용히 해달라는 선교사들의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다.
나는 아이들을 자제시키기가 조심스러웠다. 학생들에게 시험이 될 것 같아 선교사들이 양보해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골 교회에서 갈급한 마음으로 신앙을 갖고 성령 체험을 한 이들을 어떻게 자제시켜야 할지 사감으로서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낮 시간을 나의 공부 시간으로 정하고 학교를 떠나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영어공부를 하곤 했다. 오후에는 시장에 가서 찬거리를 직접 사왔는데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이때도 유익했다. 영양가 있고 저렴한 반찬거리를 구입하는 요령을 체득했기 때문에 가난한 살림을 이끌어 가는 데 보탬이 됐다.
기숙사에 있으면서 미국 유학을 위한 시험을 치르려고 여러 번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다. 이 목사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미국 신학교 입학원서를 써 주시는 등 지도편달을 해주셨다. 당시 미국 유학 시험은 3번 치르게 돼 있었다. 문교부에서 지정한 우리나라 역사 시험과 외무부에서 지정한 영어 시험을 치르고 나면 끝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영어회화 시험을 한 번 더 치러야 했다.
이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에 신분 조사를 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급행료를 얹어주면 더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기다렸다. 오래 걸리더라도 양심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이 목사님은 뉴욕성서신학교가 복음주의 초교파 신학교라서 한국교회와 결이 닮았을 거라며 전공으로 기독교교육학을 추천해주셨다. 내겐 별다른 정보가 없었지만, 이 목사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했다. 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두고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지만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이 목사님을 통한 지시였음을 확신한다.
얼마 후 신분조사까지 끝나고 출국 준비도 마무리됐다. 미국 뉴욕연합장로교 지도자 양성부에서 전액 장학금과 여비, 잡비까지 지원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공로 없이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1956년 박형룡 학장님과 미국 유학을 가기로 약속한 지 꼭 6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전쟁 물자나 구제 물자를 운송하는 배를 이용하도록 돼 있었다. 부산까지 가기 위해 대구역으로 나왔다. 대구역에는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 선생님 동료 학생 등 50여명이 나와 기도로 송별해 줬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6) 2주만에 도착한 미국… 영어 울렁증에 손짓으로만
조국에 유익한 사람 되지 못하면 태평양에 빠져 죽을 각오 다지며 기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왼쪽 첫 번째)가 1956년 9월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캠퍼스에서 베티 파킨슨 부인(가운데)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배가 부산항을 떠났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무거운 선체가 움직이는데 그제야 ‘정말 고국을 떠나는구나’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당시 내게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게 지구 끝에서 반대편 끝으로 가는 듯했다. 미국까지는 14일이 걸린다고 했다. 난간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떠납니다. 이제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내 조국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돼 돌아오게 해주옵소서. 만약 내 신앙이 떨어져서 그에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이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고 돌아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지독한 뱃멀미로 14일을 고생한 끝에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미국 장로교연합회 여성부 직원인 도로시 와그너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과거 중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던 그는 동양인인 나를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대해줬다. 와그너씨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뉴욕에 가기 위해 기차 정거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3일간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해야 했다. 기차는 작은 호텔 같았다. 침대로 변신하는 의자도,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는 조그만 스위치들도 마냥 신기해 보였다. 아침 식사 때가 돼 식당칸을 찾아갔다. 열차 안에 동양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어서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았다.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본능적으로 주문을 하라는 얘기임을 알아챘다. 알고 있는 영어를 총동원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밥과 닭고기를 주세요(Rice and chicken please).”
“뭐라고요(What)?”
직원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영어가 잘못됐나?’ 미국 땅을 밟은 지 하루밖에 되지 않은 초짜가 아침 식사 메뉴가 몇 가지 정해져 있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알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손으로 앞사람의 접시를 가리키며 ‘저거 달라’고 손가락질을 해 버렸다. ‘이제부터 얼마나 망신을 당해야 하는 걸까.’ 식당을 가기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3일을 꼬박 벙어리처럼 보낸 뒤 뉴욕에 도착했다. 선교본부에서 장학생을 전담하는 베티 파킨슨 부인이 나를 반겨줬다. 무척 얼어 있던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데려다주는 대로 따라갔다. 파킨슨 부인은 긴장한 내게 농담을 섞어 가며 딸을 대하듯 대화를 이끌어 줬다. 그는 모든 외국 학생들의 어머니 노릇을 해줬던 정말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뉴욕성서신학교 건물은 어둡고 육중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따듯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모두 명랑하고 친절했다. 복도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웃고 인사하며 지나갔다. 아직 그런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어리벙벙하게 지나가곤 했다.
한국에서 나름 애를 써가며 하노라 했던 영어공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다. 실망과 좌절에 빠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의 내용을 20%도 알아듣지 못했다. 교수님이 과제를 내주는데 받아쓰기도 힘들었다. 학생들은 열심히 질문하는데 뭘 물어보는지, 교수님이 어떤 대답을 해주시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낙심도 되고 긴장도 됐다. 이 공부를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내야 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7) 태극기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항의
전쟁 후 고통받는 우리나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미국과 비교돼… “한국은 영적으로 축복” 응답받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가 1956년 미국 뉴욕성서신학교 기숙사 책상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여학생 기숙사에 있는 자매들은 친절했다. 무엇이든 도와주려 했다.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 다시 정리하고 숙제를 날마다 제출했는데 타자도 서툴고 영어도 누군가가 교정을 봐줘야 했다. 미국 학생들보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외출은 주일에 교회 가는 것
그러다 보니 기도시간이 사라졌다. ‘이건 아닌데. 내가 주를 섬기기 위해 공부하는데 기도도 못 하고 공부에만 열중하는 건 내 정체성이 무너지는 거야.’ 한국에서 아침마다 조용히 주님과 교제하던 시간이 그리웠다. 기도하다 문득 하늘을 보면서 속마음을 내뱉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죽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 바에는 보따리 싸서 집으로 가는 게 훨씬 낫습니다.”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이대로 귀국해 버리면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지 고민이 됐다. 마음속에 싸움이 또 하나 생겼다. 전쟁을 겪은 지 몇 해 안 된 황폐한 나라에서 고통당하는 내 백성을 생각하며 그들을 간절히 돕고 싶었다. 미국에 와 보니 물자가 차고 넘치는 데다 모든 게 화려하고 사람들은 사치스러웠다. 쓰레기통만 봐도 이 많은 종이가 그냥 버려지는 게 아까웠다. 모든 게 사람들이 편리하게 살도록 마련돼 있었다.
“하나님,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축복해 주시면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고통을 지나 이제 좀 살 만하니까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하십니까. 살아 있는 사람도 생필품이 모자라고 집 없는 피난민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불공평하십니다.”
기숙사 방 담벼락에 태극기를 달아 놓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항의가 쏟아져 나왔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며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얘야. 미국은 물질로 축복했지만 네 나라 한국은 영적으로 축복하지 않았느냐.” “아멘. 하나님 말씀이 맞네요. 우리가 받은 축복이 더 큰 축복입니다.”
내게 기도는 생명줄 같았다. 열심히 공부해야 했지만, 공부가 기도만큼 가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열심히 기도하려면 공부를 못하고 열심히 공부하려면 기도를 못 하게 됐다. 어느 날 아침 기도하다 졸고 나서 일어나는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기도를 앉아서 하지 말고 일어서서 다니면서 하자.’ 복도를 따라 식당으로 가면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걸어다니면서, 화장실을 가면서 기도하면 졸지 않겠다 싶었다.
복도를 걸을 때 혼자 중얼거리면서 기도하는 게 습관이 됐다. 화장실에서도, 목욕하면서도 주님과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기도에 대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앞으로 크리스천들은 이런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하겠구나.’
지금도 나의 묵상기도는 새벽기도뿐 아니라 일상의 기도도 포함된다. 일상의 묵상기도가 있게 된 건 그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가장 바쁠 때 가장 기도를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크리스천들은 일상생활 가운데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자기도 모르게 ‘선데이에만 기도하는 크리스천’이 돼간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도에 깨어 있어야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8) “귀국 후 전 세계 복음 전할 선교사 양육” 포부
석사논문 준비 중 남미 선교여행, 잘사는 서양인이 하는 전도보다 비슷한 처지 동양인 말이 더 와닿아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두 번째)가 1958년 미국 장로교 에큐메니컬 팀과 함께 과테말라 선교여행에 참여했다.
나의 석사논문은 나를 유학시켜 준 선교부의 요청대로 ‘성경 중심의 기독교대학 교육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한창 논문을 쓸 때는 식당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 우유나 빵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제출할 날짜에 맞춰 끝내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에큐메니컬 팀 직원이었다. 그는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한 달간 단기여행을 가도록 준비하면 좋겠다고 했다. 논문 제출일은 선교부에서 학교에 얘기해 연기 신청을 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1958년 1월 뉴욕 비행장에는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우리 팀은 인도에서 사역하던 여선교사와 레바논 여성 지도자, 필리핀 여변호사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모두 영어권에 살고 50세가 넘은 분들이었다.
무척 긴장되면서도 감사했다. 10년 전만 해도 공산당을 피해 38선을 넘던 내가 남미까지 선교를 가게 된다니 꿈만 같았다. 과테말라에 도착하니 완전 여름 날씨였다. 화려한 꽃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공항에 환영 나온 여성들이 우리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며 그 나라 말로 인사했다.
과테말라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버스 운전기사도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하고 상점에 들어가도 점원들이 흔들흔들 노래를 불렀다. 우리 팀은 교회 모임에 가서 각자의 나라와 교회를 소개하고 간단한 메시지를 전했다. 교회에선 외국 손님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입구에서부터 강대상까지 솔잎을 가득 깔아 놓아 은은한 향기가 예배당에 가득했다. 나는 복음이 이들의 가난한 영혼을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
한 기독교학교도 방문했는데 환영하는 의미로 우리 팀원들이 속한 국가의 국기를 강단에 붙여 놓았다. 미국 레바논 필리핀. 그런데 우리나라는 태극기 대신 북한 인공기가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1958년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68달러였다. ‘국력이 약하면 타국에서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는구나.’ 혼자 탄식할 뿐이었다.
우리 팀이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하나의 뉴스거리가 된 모양이었다. 가는 곳마다 갑자기 마이크를 들이대는 바람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38선을 넘어온 피난민이며 지금도 한국전쟁으로 우리 국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위로받으며 살고 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팀은 대체로 자기 나라의 아름다움과 특징 등을 소개하기 바빴다. 그런데 과테말라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닮아있는 가난한 한국 이야기가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나를 “세뇨리따, 코리아나, 한국 여성”이라고 부르며 더 많이 찾았다.
그들 중 한 지도자급 인사는 내게 “선교사들은 대개 서양 사람들인데 서양 사람들이 하는 전도보다 동양 사람이 하는 게 더 알아듣기 쉽고 마음에 와닿는다. 당신이 여기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고생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 십자가의 도리를 전해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이 복음을 세계에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남다른 고통을 겪도록 하셨구나.’
나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는 게 아닌지 잠시 기도해 봤다. 그리고 그 지도자에게 대답했다. “고국에 돌아가 선교사를 양육하는 일이 제 사명인 듯합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19) 험난한 기독교교육과 여성교육… 두 마리 토끼 다잡아
한국선 생소한 기독교교육학 정체성과 교육의 가치 홍보에 힘써… 여학생 모집 위해 등록금 절반만 받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세 번째)가 1961년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뉴욕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나는 1958년 8월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에 갈 때는 배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선교부에서 항공권을 마련해줘 비행기를 타고 왔다. 여의도비행장에 내렸는데 당시만 해도 여의도는 정말 시골이었다. 비행장엔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드리운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사람들은 나를 우리나라 기독교교육학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소개하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한국에 없던 기독교교육학과를 혼자 개척하고 기반을 놓으려 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미국에서 겨우 2년 공부하고 와서는 큰일들을 자진해서 하겠다고 나선 내가 지나친 만용을 부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열심을 다하는 내 모습을 보던 김성락 숭실대 학장님은 “산골 개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선 미국에서 가져온 기독교교육학과 소개 책자들을 참조해 4년간 이수해야 할 과목들을 짜봤다. 당시 이화여대에 기독교학과가 있었고 연세대 대학원에 기독교 과목이 있을 뿐, 기독교교육학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기독교교육학과가 무엇을 가르치는 학과인지 물었다. “주일학교 선생 하는 것이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부터 교육하면서 기독교교육학과의 정체성을 알리고 얼마나 필요한 교육인지를 가르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름방학 때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를 하기로 했다. 숭실대 기독교교육학과 주최로 시행한 강습회엔 해가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강습회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으면서 일반 교회에 기독교교육에 관한 관심이 확산됐다. 학생들 중에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반 대학을 다시 다니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도 꽤 됐다. 나이도 30대 중반이어서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젊은 여교수에게 수업을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학생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개척자가 가는 길은 어디나 험하다고 했던가. 기독교교육학과엔 강의를 부탁할 다른 강사도 없었다. 다른 학과장들에게는 강사를 하게 해달라고 소고기를 사 들고 온다는데 나한테는 아무도 찾아오질 않았다. 오히려 다음 학기 강좌를 맡기기 위해 다른 학교로 품앗이를 하러 가야 했다. 여자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건 교수뿐 아니라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여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여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절반만 받기로 했다. 몇 명 되지 않던 여학생들은 수줍어서 자기들끼리 뭉쳐 다니곤 했다.
1960년 4 19의거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강의를 거부하고 시내 거리로 뛰쳐나갔다. 여학생들이 내 연구실로 들어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해요. 데모에 나갈까요, 말까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등록금을 반만 냈다고 반쪽짜리 학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대학생입니다. 스스로 의견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내게 여성교육은 기독교교육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였다. 1963년 장로회신학대에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강사로 서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총회에서 특별 위탁이 왔는데 교수가 없으니 초급 대학과정으로 여전도사 교육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교역자 키우는 일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로회신학대와 숭실대를 오가며 강의하면서 여전도사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0) 35세에 여전도회 회장 맡아… 시대 이끌 사명
복음주의와 교회일치운동의 분열… 여성들이 주관해 화합기도회 열고 선도적으로 평화유지 해주길 호소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 줄 왼쪽 네 번째)가 1959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 장학생 신분으로 장로교 여성대회인 풀듀대회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여성 대표들이 전국적으로 5000여명이 모여 향후 3년간 활동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였다. 한국 여전도회에선 정신여학교 교장선생님이신 김필례 회장께서 17대부터 20대까지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를 이끌어 오셨다. 미국 선교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선생님과 풀듀대회에 동행했다. 이 대회 참석은 내게 한국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깊이 고민하게 해 준 기회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풀듀대회 체험담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에 보고하기로 한 날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내가 절대 다수의 표를 받아 여전도회 회장으로 피택된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사양했다. “전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제가 회장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5세에 회장이 된 것이다. 임원들은 모두 50대 이상이었다. 어머니 같았던 임원들은 나를 무척 아껴주셨고 신앙의 동역자인 젊은 내 친구 이필숙 전도사를 총무로 택해 주셨다. 김 회장께서 여전도회를 젊은이에게 맡겨 시대를 이끌어 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갖고 모험을 하신 것이었다.
1959년 9월 44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렸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회장은 총회보고를 위해 총무와 함께 참석하게 돼 있었다. 개회예배가 끝나고 회원 점명을 하는데 누군가가 회장을 부르더니 언성이 높아지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부끄럽게도 몸싸움으로 확대됐다. 결국 총회는 휴회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복음주의운동(NAE)과 교회일치운동(Ecumenical Movement)의 분열이었다. 너무 떨리고 무서워 총무와 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이후 교회일치운동 측은 서울 연동교회에, 복음주의운동 측은 승동교회에 각각 모였는데 우리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면 좋은가요”라며 부르짖을 뿐이었다. 여전도회 회원들에게 앞으로 닥칠 분쟁과 분열을 상상하니 기가 막혔다.
‘나 개인은 박형룡 박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게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한 건 에큐메니컬 교단이다. 이를 어쩌지.’
어느 편으로도 갈 수가 없었다. 나와 총무는 김 회장님 댁을 찾아갔다. 회장님은 차분하게 한참 생각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우선 갈라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수년 전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가 분쟁할 때 여성들이 끼어들어 분위기가 더 흉악해졌지요.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쌍방이 다시 교회 화평위원회를 조직해 분열을 막자며 노력했다. 여기에 찬성하는 교회 청장년연합회 회장 황성수 박사와 주일학교연합회 고응진 장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세 단체가 “총회 분열을 원치 않는다”고 외치며 성명을 냈다.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임원들은 ‘평화 합동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로 하고 전국 회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울 시내 큰 교회를 돌며 기도회를 주관하고 여성들이 선도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주길 호소했다. 기도는 점점 뜨거워졌고 호응은 확대됐다. 용기를 얻어 분열에 반대하는 목사님들을 개별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했다. 어떤 목사님들은 여전도회 사무실로 전화해 엄포를 놨다.
“여전도회가 제3의 세력을 만드는 것인가. 주선애 회장은 박형룡 목사를 배신하는가”라고 소릴 지르며 여전도회를 공격했다. 둘 사이에서 중보를 한다는 건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걸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1) 기독교 교육은 학문이 아닌 체험하면서 배워야
올바른 가르침의 효과 얻기 위해 실천하면서 가르치고자 노력… 삶의 현장서 복음 가치 찾아야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 첫 번째)가 1960년 서울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여성지도반 및 제3세계국가 학생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
‘분단된 내 민족을 어떻게 구원하고 한국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은 일생의 과제다. 나는 신앙교육을 통해 이 과제를 조금이라도 이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게 내 소명인 것이다.
교육은 우리가 처한 사회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의 사회화 과정이다. 단순히 서구 사회의 교육을 모방하거나 이식할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교육에는 교육 현장에 학생들을 직접 동참시키는 실제적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상적인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한 교육을 통해 올바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게 기독교 교육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토록 하는 것은 각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는 의미다. 이로써 더 나은 교회와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교육자는 사람들이 이를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배우게 해야 한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며”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행함이 따르는 교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가르침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실천해 가면서 교육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는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복음의 핵심과 신앙생활의 기본적 가치다. 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그러나 가르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복음을 깨달아 복음에 기초한 가치를 찾도록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의 가치를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게 현대 교육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선배 애국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기독교 교육을 학문으로 배운 일이 없다. 그러나 나라를 살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지도자 양성의 시급성을 깨닫고 기독교교육에 힘을 모았다. 전덕기 목사의 상동청년학원, 안창호 선생의 대성학교, 이승훈 선생의 오산학교처럼 기독교 학교들을 세워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낙후되고 혼란에 빠진 민족 구원의 길을 열어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던 박영효 선생이 선교 초기 한국에 입국하려는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를 만나 부탁한 말이 좋은 표본이 된다.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헌법을 고치기 전에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성을 기독교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은 신앙을 생활화한 지도자들을 키우는 일이라 믿고 있다. 나 역시 기독교 지도자 양성에 화급함을 느껴 학문의 부족함을 스스로 알면서도 깊이 있는 학문적 탐구보다 교육에 마음을 더 기울였던 게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교회가 이런 소명을 안고 있는 내게 통로를 열어줘 평생 이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데 대해 하나님과 교회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내가 1970년대에 맡은 과제는 여성들의 신학교육이었다. 당시 총회 결의에 따라 신학교에서 여전도사를 교육하도록 하고 초급대학 과정을 개설해 내게 책임을 맡겼다. 숭실대를 떠날 수 없다고 했더니 숭실대와 장로회신학대가 협의해 각각 ‘반 전임’으로 가르치도록 결정했다. 두 학교의 짐을 지고 번갈아 강의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2) 오랜 남존여비 전통에…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장로교 여성사’ 집필 과정 통해 나라·민족 교회 위해 크게 쓰임 믿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78년 열린 ‘장로교 여성사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여전도사 양성과는 초급대학 같았다. 하나님의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서 인격에 결함이 없는 사람들을 선택해 교육하기로 했다. 이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에 여전도사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역할이 본래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 봤다. 오랜 남존여비 전통 아래 여성이 집 밖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거나 가르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처럼 딸을 종처럼 여기거나 가난하면 팔아먹을 수 있는 재산 목록의 하나로 취급했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전도사 제도가 생겨났을까.’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연로하신 장로님 목사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조선시대 말 개화운동에 이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절제운동 기독교교육운동 문맹퇴치운동 같은 사회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도운동도 함께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엔 왜 전도사의 역할이 오히려 축소됐는가.’ 일제강점기가 말기로 오면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 등 여성들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일제 총독부가 제재하고 핍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여전도사들이 산으로 숨거나 가정으로 들어가 버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활발하던 모습들이 사라져 버렸다.
광복 이후 여전도사 제도가 복구됐지만, 활동 분야는 초기에 비해 현저하게 축소됐다. 가정 심방과 목회자를 돕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1980년대 들어서는 여전도사 무용론까지 교회에서 제기됐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를 일본의 정치적 박해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여성들의 자아의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내 동료들만 봐도 일제강점기에 여성은 조용히 집에 있어야 아름답다고 교육받았다. 목회자들이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개화기에 가졌던 새로운 사회 건설의 기세를 여성들이 이어가지 못한 탓도 있다. 우리 사회에 선배 여성 지도자들이 없었던 것도 여전도사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데 영향을 줬다.
여교역자 양성 문제에 대한 연구는 내게 한국교회여성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97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50주년을 앞두고 임원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만들어야 하는데 역사학자에게 맡기려 해도 예산이 없으니 ‘주선애 선생이 써보시오’라고 결의해버렸다. 전문가가 아니고 자료도 없고 등 여러 이유를 대며 고사할 수 있었지만 순종했다.
1년 안에 책을 만들어 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덜컥 받아들고 자료를 찾았지만 거의 찾지 못했다. 결국 생존해 계신 어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돌아가신 김양선 목사님이 소장하셨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님들의 보고서 복사본을 양성담 사모님으로부터 받아 연구의 기초로 삼았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대학부 학부장 겸 기독교교육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교육과 집필을 동시에 소화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결국 1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희년 총회에서 ‘장로교 여성사’를 배부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쓰면서 소중한 3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는 그 고통이 큰 만큼 가치도 지대해 그 대가를 치를 수 없다. 주님은 그 은혜를 무(無)값으로 주셨다. 둘째, 목석처럼 학대받아 온 여성 선배들이 정말 위대한 걸음을 걸어왔다. 셋째,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여성들이 나라와 민족 교회를 위해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3) 중년여성 해방구 ‘교회여성지도자교육원’ 열어
젊은 시절 가족을 위해 헌신만 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이들에게 꿈과 믿음의 동력 얻게 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맨 뒷줄)가 1979년 여성지도자교육원 수업 중 ‘인간관계 훈련’ 강의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 50대 여성과 대화를 나누다 가슴 사무칠 얘길 들었다. “선생님, 대학 다닐 땐 꿈이 참 많았는데 결혼하고 애들 키워 대학 보내고 나니 남편은 일에 빠져 밤중에 들어오고 아이들 역시 자기 생활에 시달리고 저는 혼자 종일 집에 앉아 있기만 해요. 이렇게 허송세월해도 될까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일까요.”
교회와 사회에 이런 중년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꿈을 주고 믿음의 동력을 얻게 하는 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로회신학대(장신대)는 월요일엔 공간이 많이 비고 교수님들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교수회의를 거쳐 봄학기에 ‘교회여성지도자교육원’을 개원하기로 결정했다.
영락교회에서 어머니반을 맡던 시절 어머니들은 “성경을 여기저기서 배웠지만 일관성 있게 배우지 못해 개론을 좀 배우고 싶다”는 요청을 하곤 했다. 그래서 커리큘럼에 성경개론을 반드시 넣고 조직신학개론, 기독교교육, 인간발달심리, 상담학 등 2년제 교육과목을 짰다. 그렇게 월요일마다 1시간 30분짜리 강의를 3과목씩 들을 수 있게 했다. 점심시간엔 서로 교제를 나누며 신학대 캠퍼스의 아름다움도 만끽하게 했다. 중년 여성들이 공부도 하고 휴식도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개원 첫날부터 60~70여명의 중년 여성들이 몰려왔다. 그다음 학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입학했다. 평신도 지도자반 1·2학년 총 5개 반에 300명 정도가 모였다.
교육원 수업 중에는 따로 날을 잡아 하루 종일 20명씩 그룹으로 교육하는 ‘인간관계 훈련’이란 필수 과목이 있었다. 자신을 발견하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워크숍은 늘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어떤 사람은 교육원을 통해 잊고 살았던 학구열이 되살아나 새로운 비전을 품고 신대원에 진학했다.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박사학위를 취득해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었다. 권사님 한 분은 여학교 동창들을 모아 성경반을 조직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가정에 복음을 전해 신앙 없던 남편들이 교회에 다니게 됐다는 보고도 받았다.
한국교회가 점차 기독교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장신대 기독교교육과도 발전을 거듭했다. 한일신학교에서 고용수 교수를 모셔왔고 오인탁 교수는 독일 튀빙겐대에서 교육철학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임창복 사미자 교수도 각각 미국 피츠버그대와 드류대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왔다. 모두 내가 기독교교육을 가르친 학생들이었다. 왕마려(Maria Mellrose) 선교사를 대구 계명대에서 모셔오면서 기독교교육연구원도 문을 열었다. 다른 학과 못지않은 교수진이 구성됐고 혼자 해오던 무거운 짐을 맡길 수 있어 해방감도 느꼈다.
이 무렵 박창환 장신대 학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이번에 주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좀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역할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이렇게 말했다. “학장님, 여자들에겐 장로 안수도 안 주는데 어떻게 제가 대학원장을 하나요. 전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제가 하면 대학 이미지도 떨어질 겁니다.”
진심으로 사양했다. 그러나 박 학장님은 “여성 안수도 안 주니까 주 선생이 해야지요”라고 거듭 요청하셨다. 나는 ‘이분이 미래를 보며 모험을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들은 즉각 미국 퀸즈칼리지에 서류를 보내 명예박사 학위를 신청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20여년 만에 정교수가 됐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4) 은퇴 후 어려운 교회 도우려 나이 육십에 운전면허
시골 마을 조그만 교회 재정 없어 사경회·교사강습 대부분 못 받아… 오랜 꿈 실행하려 용기 내 운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1984년 8월 한국교회 선교100주년기념 교육대회에서 강의하고 있다.
때때로 대학원장 회의에 참가해 보면 대학원장들은 기사가 운전하는 비싼 차를 타고 왔다. 나는 대중교통을 타거나 이따금 택시를 이용했다. 비싼 차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게도 운전 기술이 필요해보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이 60에 처음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사실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오래됐다. 40대부터 은퇴 후에 대한 꿈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창밖으로 시골 마을의 조그만 교회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교회들은 재정이 없어서 사경회도 못 하고 교사 강습도 받아볼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일 것이다. 은퇴 후 에는 이런 교회를 도와야겠다.’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시절의 계획이었다.
이제 60세가 됐으니 용기를 내야지 하고 학교 근처에 있는 운전학원에 등록하고 두 달 치 학원비를 냈다. 두 달 치를 낸 것은 시간이 충분히 없을 뿐 아니라 노인의 모든 학습은 젊은이보다 몇 배나 느리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시험공부를 위해 시간을 쓰기가 너무 아까워서 꼭 학교 출퇴근 버스 안에서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실기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무난히 면허증을 딸 수 있었다. 가족들은 나의 운전을 극구 말렸다. 오랫동안 운전한 사람도 나이 60이 되면 그만둘 때인데 왜 위험한 운전을 하려느냐고 했다.
나는 몰래 중고차를 사서 학교에 놓아두고 학교 기사에게 동승운행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학교 주변을 가끔 운전하며 익혔다. 그러다 집에까지 몰고 가서 식구들과 타협을 했다.
내가 운전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많은 중년들이 망설이다 용기를 얻었다며 좋아한다. 그래도 83세까지 23년 동안 노인인 어머니의 기사 역할뿐 아니라 그 많은 회의 참석에 이용할 수 있어서 늦게나마 배운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운전하면서 더 많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출퇴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엔 한창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박정희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데모 행렬이 거리를 누볐고 곳곳마다 길이 막히고 최루탄에 휩싸였다. 시골에선 초가집을 헐고 수도를 새롭게 만들며 길을 닦고 농사법을 바꾸는 저녁 모임들이 한창이었다.
박 대통령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하며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에 열심이었다. 고속도로를 내고 나면 마이카 시대가 온다고 했고 통일벼를 심어 쌀이 남아돌 것이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박 대통령이 밀고 나가고 있었다. 나도 장기간 집권하기 위한 홍보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나라가 새로워지고 국민들의 안색이 밝아지는 것 같아 소망이 생겼다.
어느 날 새마을운동본부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바쁘다고 핑계를 댈까’하면서도 어떻든 나랏일이니 한번 나가보기로 했다. 새마을운동을 지도하는 여성들만 몇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개화기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배들, 애국부인들, 그들의 학문에 대한 열기,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일으킨 YWCA운동,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 등 하고 싶었던 여성 관련 강연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신자든 아니든 우리나라 여성들을 상대로 사회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 사명감을 갖고 강연했다. 한 번은 새마을운동본부에서 내가 강의한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교수님이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어느 당의 정치 강연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여성교육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몇 년을 ‘새마을 여성 강연자’로 살았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5) “연예인들 사이에 성경공부 붐 일어났어요”
새벽 2~3시에 귀가하는 연예인 많아… 하용조 전도사, 낮에는 학교 생활 밤에는 성경 공부 인도로 1인 2역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운데)가 1980년대 초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오른쪽)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1970년대 중반쯤이었다. 내 연구실에 자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학생이었던 하용조 김지철 전도사였다. 두 사람은 아침마다 조용히 성경공부를 같이 하고 싶은데 장소가 변변치 않다고 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출근하던 나는 학교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학교 측이 내 수업을 대부분 2교시부터 시작하도록 배려해 준 이유다. 아침에 비어 있는 공간이었던 연구실을 두 사람에게 흔쾌히 내줬다.
하 전도사와 김 전도사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자 김준곤 목사님의 제자였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뜨거울 뿐 아니라 지성적이어서 장래를 지켜보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 하 전도사가 연구실에 와 고민스러운 일이 있다며 얘길 꺼냈다.
“지금 학교 공부를 하면서 교육전도사로 마포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영어공부를 해서 유학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다른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곽규석(코미디언)씨가 부도가 나서 낙심 중에 있다가 예수를 믿게 되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구봉서(코미디언) 정훈희(가수)씨까지 우리 성경공부에 몰려오는데 안 할 수도 없고 바쁘기는 하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힘이 듭니다.”
그 순간, 이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이자 큰 은혜라는 확신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니 교육전도사를 그만두고 그들과 성경공부 사역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생활비는 다른 방편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용기를 내라고 북돋아줬다. 하 전도사의 이야기가 내게 감명 깊게 다가와서 구씨 집에서 진행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가본 적이 있다. 10여명이 모여 있었다. 다음 주일, 내가 지도하던 영락교회 어머니반에서 그 일을 이야기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성경공부 붐이 일어났는데 그 일을 담당하던 하 전도사가 너무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 전도사에게 마포교회 전도사 일을 내려놓으라고 했어요. 우리 반에서 좀 도울 수 없을까요.”
단번에 연보가 넘치게 나왔다. 연예인 그룹장인 곽씨와 영락교회 당회장이셨던 박조준 목사님이 회합을 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곽씨는 박 목사님께 “1년만 보조해주시면 우리가 책임지고 감당할 테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어머니반에서 모은 헌금과 교회의 선교지원금이 함께 전달됐다.
마음에 흥분과 감사가 넘쳤다. 그런데 주일모임을 위한 장소가 없다는 소식이 또 들려왔다. 망원동 판자촌 사역을 도와주시던 마애린(Eileen Moffett) 선교사를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우선 자기 집 뜰을 쓰면 어떻겠느냐”며 선뜻 공간을 내주셨다.
연예인들은 대부분 밤일을 하고 새벽 2~3시에 귀가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 전도사는 낮에 학교생활을 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사역 외에도 밤마다 술에 취해 귀가한 연예인들의 전화에 잠도 못 자고 그들을 찾아가곤 했다.
연예인예배를 마치면 하 전도사의 셋방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늘 가수 윤복희 자매가 손수 다 했다. 교회라 해도 장로 권사 집사도 없으니 하 전도사가 안내하다 올라가 예배 인도하고 설교하고 예배를 마치면 연예인 성도들을 위해 택시도 잡아줬다.
연예인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 선교사로 사역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도 심장이 떨린다. 나는 하나님께서 연예인들을 통해 교회 부흥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며 이 시대에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6) 길고도 짧았던 장신대 23년, 눈물의 정년 퇴임식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9년 영락교회 목회자 사모들과 그룹 상담을 진행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생들의 데모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학생들의 배척을 받아 ‘주 교수 나가라’는 벽보가 붙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됐다. 당시 기도 중에 하나님께 받은 응답은 이렇다.
“왜 학생들을 두려워하느냐. 장로회신학대 학생들은 너의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 아니냐.”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맞습니다. 주님이 섬기러 왔다고 하셨지요. 저도 섬기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종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종들의 종입니다.”
그 후에도 시위는 계속됐지만, 학교는 내게 에덴동산처럼 평안하게 느껴졌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견해 보이고 청소 노동자들이 다시 보였다.
학교의 난방이 변변치 않아 추운 겨울날이면 벌벌 떨며 다녔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온돌방에 앉아 저녁을 먹고 나면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더 앉아 있고 싶어졌다. 하지만 교회에 강의를 가야 했다.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너는 저 사람과 뭐가 달라서 배불리 먹고 책가방 들고 교회로 가고 있는 것이냐.” 나는 또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입니다. 저 역시 저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사람입니다. 축복을 받은 제가 불평을 터트렸습니다. 용서하옵소서.”
23년 세월은 길고도 짧았다. 1989년 정년퇴직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퇴임 감사예배는 강의실 몇 개를 합쳐 강당처럼 쓰던 공간에서 진행됐다. 감사의 답사를 해야 할 차례가 왔는데 학교에서 생애를 보내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예배 후 기독교교육과 학생들이 미리 마련해 놓은 깜짝파티가 있었다. 제자들은 예쁘게 만든 화환도 씌워줬다. 그야말로 사랑이 넘치는 행사였다.
퇴임 감사예배 후 ‘내가 더 봉사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중에 목회자와 사모, 여전도사들이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때 마땅히 찾아가 의논할 곳이 없다는 게 떠올랐다. 영락교회엔 결혼 법률 청소년 신앙 직업 등의 상담은 하지만 교역자 사모와 여전도사들을 위한 상담은 없었다. 상담 사역을 맡았던 목사님께 “내가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신학생들을 장기간 가르친 경험으로 한번 맡아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매주 목요일 상담실에 나갔다. 처음엔 내담자가 별로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늘었다. 대개는 전화 상담이었다. 의논 한마디 없이 갑작스레 신학을 하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든 남편이 못마땅한 사모, 남편이 의처증에 걸려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사모 등 심각한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상담을 시작하면 두세 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울며 얘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교역자의 가정 문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사모 성경반을 조직해 매주 월요일에 모이기로 했다. 7~8명이 와서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도록 인간관계 훈련을 곁들였다. 때로는 야외로 나갔다. 사모라는 직분상 폐쇄적이기 쉬운 결점을 보완하고 좀 더 개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많은 토의와 나눔의 시간을 가지며 성경공부를 했다.
상담을 통해 정말 교회가 살려면 교역자 가정이 먼저 건강해져야 한다는 신념이 생겼다. 교역자들의 영성을 살리고 정신 건강도 관리할 수 없을까 생각하는 계기도 됐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7) 소외된 여교역자 노후대책 위해 안식관 짓기로
월남해 혈혈단신 외롭게 생을 마친 사연에 마음 아파 결의… 뜻 공감한 많은 분들 도움으로 건립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위치한 여교역자연합회복지재단 안식관 본관 전경.
여교역자 ‘노후대책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로 결의했다. 평생 고생하면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여전도사들에게 나는 빚을 지고 사는 것 같았다. 특히 북한에서 넘어온 내 또래 여전도사가 있었는데 병이 나서 교회 일을 못 하게 됐다. 갈 곳을 찾다가 기도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후 몸이 심하게 부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병문안 갈 시간을 내지 못하고 며칠을 미루던 사이 그가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부모도 자식도 없을 텐데 혼자 앓다가 생을 마친 그 전도사를 생각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에 있는 임야 9000㎡(약 3000평)이면 안식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땅만 있으면 건축은 어떻게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헌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러 번 답사를 해보니 진입로에 음성 나환자촌이 형성돼 있었다. 아무래도 안식관으론 적합지 않으니 급히 땅을 매각해 그 돈을 바치기로 했다.
나 외에도 두 사람이 땅을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평소 여교역자들의 현실에 나와 같은 시선으로 봐주던 홍순춘 전도사와 박정득 권사였다. 홍 전도사는 자기가 갖고 있던 청주시 땅 5400㎡(약 1800평)를 기증했고 박 권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임야와 전답 18만㎡(약 6만평)를 기증했다.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한 박 권사는 장사하느라 하나님 일을 못 한 것이 죄송해 ‘나중에라도 꼭 기도원을 운영해야겠다’ 싶은 마음으로 땅을 찾다가 용문산 관광지에 있는 목장을 매입했었다. 그러다 여전도사들의 노후를 위해 쓰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기꺼이 무상으로 헌납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박 권사가 기증한 땅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전답이어서 그곳으로부터 약 10㎞ 떨어진 곳에 새로 땅을 샀다. 1982년 4월 드디어 법인 설립 인가가 나왔다. 그때부터 30여년 꿈꿔오던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뤄져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됐다.
건축이 시작되자 뜻에 공감해준 분들이 목소리를 내주셨다. 한경직(영락교회) 목사님은 “안식관 건립에 협력하십시다”하며 격려하셨고, 이종성 장로회신학대 학장님은 “나머지 절반의 도움이 됩시다” 하며 돕자고 나서주셨다. 나는 “교회의 소외자를 도웁시다”라고 외치며 각각 호소문을 냈다.
처음 안식관 준공예배를 드린 건 1986년 4월 28일이었다. 그날 한경직 목사님이 오셔서 해주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교회를 부흥, 성장시키기 위해 이렇게 많이 수고한 사람들이 여교역자들인데 그동안 한국교회는 대접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축복하셔서 여교역자들과 여러 성도가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줘서 안식관 준공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선생님의 말씀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이 여전도사들이 스스로 안식관을 짓겠다고 했을 때 속으로 비웃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늙은 사라가 아기를 갖게 하실 때 나타나셨던 것처럼 여교역자 안식과 건축에도 나타나신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목사님들이 안식관을 방문해서는 “어느 나라에 이 같은 규모의 여교역자 안식관이 있겠느냐”고 감탄한다. 이제는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다. 영성훈련원이 있어서 자체적으로 영적 성장에 힘쓸 뿐 아니라 교회나 단체가 영성 훈련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8) ‘분뇨 못’ 뚝방촌 아이들… 사랑과 인내는 변화 가져와
벌금 무서워 화장실 못짓는 판자촌… 기독교교육과 학생 4명이 숙식하며 화장실 짓고 야간 중학교도 만들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둘째 줄 왼쪽 네 번째)가 1975년 제1회 망원중학교 졸업식에서 이상양(둘째 줄 왼쪽 세 번째) 전도사, 학생, 교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급작스러운 산업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확산됐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은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었는데 무척 남루한 차림의 초등학생들이 줄지어 다녔다. 하루는 아이들이 사는 곳이 궁금해 뒤따라가 봤다. 한강 쪽으로 몇 분쯤 걸어가자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천 세대의 판자촌이 둑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둑 너머에는 강 쪽으로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허가 판자촌은 공중에서 사진을 찍어 보고 새집이 생기거나 확장될 경우 벌금을 물리기 때문에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막대기를 세우고 모래를 채운 가마니로 막아놓은 화장실은 몇 곳 있었지만, 도저히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사람들은 인근 밭에서 용변을 봐야 했고 파리가 새까맣게 온 마을을 덮었다. 나는 마음이 슬퍼서 지금의 성산대교 근방 둑에 서서 울었다.
다음 날 나는 학부 기독교교육과 3학년 강의실에서 망원동 뚝방촌 사람들의 참혹한 삶을 본 대로 전했다. 강의 후 서너 명의 학생이 따라 나오면서 “저희가 한 번 가볼 수 없겠습니까” 하며 위치를 물었다. 학생들은 그날로 동네를 찾아갔고, 학생들도 눈시울을 적셨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후 하루에 100원짜리 방을 얻었다. 그 동네 한복판에 있는 비닐 창문의 한 칸짜리 온돌방이었다.
이상양 정태일 기현두 고애신 4명 학생은 그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동네에 환자가 생기면 업어서 병원에 가기도 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화장실을 짓는 일이었다. 관청에서 못 짓게 할 것을 알고 밤마다 전깃불을 켜놓고 조금씩 지었다. 땅을 길게 파고 시멘트로 화장실을 지었다. 다음은 더러운 개울 위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밤마다 몰래 노동을 했고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다녔다.
그 팀의 단장인 이상양은 폐결핵 환자였다. 성품이 부드럽고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겨 동네에서는 ‘천사 전도사’란 이름으로 불렸다. 이 전도사에게 등록금을 하라고 돈을 주면 금방 뚝방촌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써 버렸다. 학교에 갈 버스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분뇨 처리장에 드나드는 성동구의 분뇨차 기사에게 부드럽게 찾아가 대화하고 전도하며 사귀었다. 차량은 주로 한강 둑 위로 다니기 때문에 광나루까지 동선이 이어졌고 기사는 이 전도사를 차량으로 태워다 주곤 했다.
한 번은 내게 “교수님, 버스 차장들(시내버스에서 문을 여닫으며 손님을 태우고 내리던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문을 여닫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내가 알 리 없었다. “1400여번이래요.” 이 전도사는 늘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공부를 중단한 아이들을 위해 18㎡(약 9평)짜리 공간에 세를 얻어 장로회신학대에서 낡은 의자를 가져와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다. 첫날 수업을 시작하기 전 먼저 기도하자고 했더니 기도시간에 분필이 날아오는 등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전도사가 없는 돈으로 밥을 지어놓고 심방을 가면 아이들이 와서 먼저 다 먹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교육은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2~3년 후엔 공장에 나가는 아이들이 공부하기 전 자기들이 반찬을 사서 저녁을 지어놓고 이 전도사를 위해 저녁상을 차렸다. 사랑과 인내는 변화를 가져온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29) ‘한집 한 통장 갖기’로 쪽방촌에 새 소망 피어나
이 전도사 ‘내 집 갖기 운동’ 제안… 통장 보며 활짝, 동네에 희망 움터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오른쪽 네 번째)가 1976년 이상양 전도사(왼쪽 세 번째), 망원동 빈민선교를 돕던 영락교회 백합회 회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이상양 전도사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수록 뚝방촌 사람들의 상담 요청이 많아지고 도움 청원도 늘어났다. 이 전도사는 봉사하는 동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어느 날 저녁 공터에 불을 밝혀 놓고 동장과 동네 어른, 이종성 장로회신학대(장신대) 학장님을 불러 모임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는 무허가 집에 사는 이들이 집이 언제 뜯길지 모르는 불안감
이 전도사는 그들에게 새 소망을 주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 첫 단추는 ‘한 집 한 통장 갖기’였다. 이 전도사가 저축통장을 책임지고 맡기로 하고 주민들이 하루 벌이를 하면 생활비를 떼고 저축을 독려키로 했다. 그는 땅을 매입해 연립주택을 지을 계획도 갖고 있었다. 판잣집을 헐면 정부에서 보상금을 지급하는데 거기다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주민들에게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며 27㎡(약 9평)짜리 집을 지어 우리 손으로 단장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격려했다.
그는 통장을 1000개나 만들었다. 그리고 ‘한 집 한 통장 갖기’를 시작했다. 나는 금융 사고가 많을 때에 가능할까 싶은 의심도 있었지만, 이 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길 기도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귀가했다. 그러곤 이 모든 과정을 미국에 있는 마애린(Eileen Moffett) 선교사에게 알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집은 어떻게 짓는다 해도 대지가 없으니 미국에서 대지 구입비를 도와줄 곳이 없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고 기도하기로 했다. 얼마 지나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2700㎡(약 900평)를 살 수 있는 땅값이 마련된 것이다.
빈 병과 엿을 바꿔 파는 사람, 고무풍선을 자전거에 싣고 파는 사람, 생선을 이고 다니며 파는 아주머니 등이 모두 통장을 갖고 저녁이면 이상양 전도사를 찾아왔다. 저금통장을 보며 활짝 웃는 표정이 아름다웠다. 점차 술 먹는 사람들이 줄었고 싸움도 사라졌다. 동네에 희망이 움트기 시작했다.
드디어 공사가 시작됐고 흙벽돌 집이 길게 들어섰다. 때마침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의 모범이 된다며 마을 동장에게 포상금도 지급했다. 그 후로도 숨은 기도자들의 헌신으로 모금이 이뤄졌다. 영락교회 어머니 성경반이 중심이 된 ‘백합회’도 그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엔 조그마한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가가호호 방문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도 그들에겐 큰 기쁨이 된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전도사의 병세가 깊어지더니 검사 결과 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때문에 망원동에 처음 갔고 거기서 숱한 고생을 하다 그렇게 된 것 같아 죄책감에 휩싸였다. 수술하고 누워있던 병실에 찾아갔더니 이 전도사는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선생님이 이곳에 보내주셔서 제 생애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달관한 신앙 간증이었다. 3월 개학을 앞두고 시간을 내 이 전도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주 쇠약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이번에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면 제 집사람과 아들을 부탁합니다” 하며 유언처럼 자기 심중을 들려줬다. 얼마 후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77년 3월 25일. 장신대 학도 호국단 주최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장신대 학생들은 매년 3월 말 이 전도사 추모예배를 드리곤 한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0) 묘향산 관광이나 하라고? 차라리 금식기도회!
북에서 참석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게 문제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일정 틀어져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고려호텔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한민족복지재단에서 ‘6·15회담’ 기념으로 북한의 봉수교회 성도 300명과 한국교회 지도자 300명이 함께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한민족복지재단 전 이사장이었던 이승희(연동교회) 목사님의 배려로 방문단에 합류하게 됐다. 54년 만에 방문하게 된 내 고향.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볼 마지막 기회였다.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서해로 나갔다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로가 아니라 평양을 향해 직진하듯 날아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산에는 푸른색이 안 보였고 붉은 산등성이들과 바둑판처럼 몰려 있는 집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농사짓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땅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착륙한 비행장엔 커다란 벤츠 버스 10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남한에서도 보기 드문 고급 버스였다. 짐 조사가 대충 끝나자 나는 버스 앞자리에 앉았다. 열심히 북한 사람을 구경하려고 확 트인 앞 창문과 옆 창문을 번갈아 가며 내다봤다. 이동하는 길목엔 자동차는 하나도 안 보이고 이따금 시커먼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얼마나 고생한 얼굴일까’ 싶어 얼굴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30분 정도 주행하는 동안 한 사람도 우리 일행이 탄 차를 쳐다보지 않았다.
큰 버스가 10대나 줄지어 가는데 몇 대인지,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는지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볼 만도 한데 사람들은 기계처럼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말하는 자유는 물론, 보는 자유조차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고려호텔에 도착해 연동교회 권사님과 함께 9층 방을 잡았다. 내가 자라던 신양리가 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평양 시내를 완전히 밀어버리고 평지를 만들어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평양 기차역이 얼마 멀지 않고 대동문에서 보통문으로 가는 큰길에 호텔이 자리 잡은 걸 보니 내가 다녔던 서문 밖 유치원, 정의여자고등학교도 어디쯤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낮은 언덕들이 많이 있어 장대재 남산재 오동포재로 불리던 곳에 벽돌집 교회당이 우뚝우뚝 서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가 됐고 그 위엔 크고 웅장한 건물만 서 있었다.
건물 담벼락에는 큰 글자로 쓴 구호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어버이 수령님은 살아계신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미제(美帝) 침략자들을 섬멸하라.’ 사거리 한복판에 여순경이 수신호로 교통정리 하는 모습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그날 밤은 대한민국 축구팀의 월드컵 8강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방마다 텔레비전은 있었지만, 북한 선전만 나왔다. 월드컵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내려와 총무 목사님께 축구 경기 결과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목사님은 중국 베이징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4강에 진출하게 됐답니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와!”하고 소리치며 서로 껴안고 기뻐하며 야단이 났다.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딴 세계 사람들 같았다.
그때 공지가 전달됐다. 어젯밤 참석을 요청한 아리랑 축제에 300명 중 90명만 참석한 게 문제가 돼 예정된 봉수교회 방문 대신 묘향산 관광을 간다는 거였다. 한 목사님이 외쳤다. “우리가 묘향산에 관광이나 하려고 왔습니까. 차라리 여기서 금식기도회를 하면 어떻습니까.”
***[역경의 열매] 주선애 (31) 감격스런 평양 기도회, 부흥회처럼 열기로 넘쳐
긴박한 분위기 속 목회자 50여명 모여 북한을 위한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돼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오른쪽)가 2002년 평양 방문 당시 옥류관에서 이만열 교수(가운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 목사님의 외침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좋습니다”라고 동의를 표했다. “아래층에는 보위부 안전원들이 가득 있습니다. 한꺼번에 자리를 뜨지는 말고 방에 올라가서 성경책을 갖고 옷을 갈아입고 오십시오.”
단장 최홍준 목사님의 지령 같은 한마디에 현장엔 긴장감이 돌았다. 어떤 목사님은 주변 참석자에게 “우리 집 연락처를 드릴 테니 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분위기는 점점 긴박해졌다. 목회자 50여명이 함께 모여 순서를 짜고 행동할 준비를 했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됐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찬송이 그토록 절절한 호소이자 간구로 마음에 와닿았던 적이 있던가. 찬송 소리는 점점 커졌다. 부를수록 힘이 생겨 테이블을 치다가 발로 박자를 맞추면서 찬송했다. 통성기도를 할 때는 더 뜨거워졌다.
기도회는 부흥회가 됐다. 다들 오직 북한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북한 사람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든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회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이 하루하루 지옥처럼 살아가는데 나는 배부르게 잘 먹고 잘살면서 감사함을 잊어버린 죄를 고백했다.
‘내가 이곳에 그냥 살았더라면 고생하다가 벌써 죽었을 터인데 이렇게 복 받은 몸으로 살아오다니. 순교한 사람도 그렇게 많은데 나는 순교를 피해 남한으로 와서 즐기면서 살아온 것 아닌가.’
주님을 위해 죽다 살아남은 사람답게 열심히, 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지 못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렸다. 최 목사님이 “이제 이만열 교수님과 주선애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각각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안내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사님들이 많은 자리에서 말을 아껴왔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말씀을 선포하고 싶은 마음을 성령님께서 주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교수님은 평양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앙 선배들의 고귀한 헌신을 소개해주셨다. 이 교수님에 이어 앞에 나섰다. 그리고 담대하게 이야길 전했다.
“저는 이곳 평양에서 나서 여기서 자랐는데 1948년 이곳에 핍박의 기운이 감돌 때 순교할 자신이 없어 남한으로 도망갔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고향에 왔는데 마음이 착잡합니다. 곳곳마다 집채만 한 크기로 걸려 있는 현수막엔 ‘수령님은 살아 계신다’가 쓰여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우렁차게 찬양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 예배가 없었다면 그저 봉수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왔다고 보고하게 될 뿐이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북한에 대해 무관심한 채 풍요만을 추구하던 남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예배는 오후 2시까지 금식하면서 진행됐다. 2시가 넘어서자 보위부원들은 말을 바꿔서 이제 그만하고 봉수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제야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고 봉수교회로 갔다. 교회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맞은 교회 목사라는 사람은 정치 선전 같은 말만 쏟아 냈다. 연이어 칠골교회를 방문했다. 거기에서도 목사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예배당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접촉할 수 없게 한 모양이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2) “황장엽 선생님, 하용조 목사님 위해 기도해주세요”
탈북자동지회 방문해 인사 나눈 뒤 매주 북한 음식 만들어 전달…하 목사 병문안서 “예수 이름으로…”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첫 번째)가 2009년 평양 숭실대 재건 모임에서 황장엽 전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세 번째), 방지일(네 번째) 박종순(다섯 번째) 목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02년 5월 제107주년 평양 정의여고 총동문회가 열렸다. 150여명이 몇몇 은사들을 모시고 여학생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동창회 회장은 후배인 곽선부 선생이었다. 곽 회장이 “우리 황장엽 선생님을 한번 찾아뵙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나는 놀라서 국정원에 계신데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는 걱정 말라며 자기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전 회장이자 정의학교 교사를 지낸 김명현 언니도 같이 가자고 했다.
황 선생님은 매주 토요일 오전에 잠깐 탈북자동지회에 나오셔서 탈북자들을 만나 위로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송파구에 있는 황 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은 작고 구석진 방이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 분이어서 인사드리러 왔다며 간단히 소개했다. 웃음을 보이진 않으셨지만 반기는 듯했다.
황 선생님은 평양상업학교를 다녔는데 어려서 양촌에서 지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이 양촌 가까이 있어서 자주 찾아가 놀던 곳이었다. 양촌과 가까운 곳에 숭의학교 숭실대 평양신학교가 있었고 서양 선교사 자녀들도 많이 있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로워지면서 황 선생님이 가깝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 어려운 망명길을 혼자 떠나왔지만 여기서도 부자유한 생활일 수밖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까’ 싶어 동정이 가기도 했다. 경호원들이 항상 방 안과 밖에서 지키는 국정원에서 숙식하는 건 그야말로 감옥 아닌 감옥이었을 것이다. 토요일마다 이 사무실로 북한 음식이라도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토요일마다 북한 만두와 북한식 콩비지, 장조림 등을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서 갖다 드렸다. 그 과정에서 이분이 주체사상을 버리고 우리 주님의 복음으로 거듭나면 북한의 어두운 세계를 빛나는 기독교 국가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사명감을 느꼈다. 예수를 핍박한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 사람 바울로 변했듯이 그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전도를 잘하지 못하지만,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연예인과 지성인들을 교회로 이끌며 전도에 탁월한 달란트를 보였다. 그래서 하 목사님에게 전화로 황 선생님 전도를 부탁하면서 토요일에 좀 찾아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기쁘게 받아들여 책을 가져오기도 하고 선물로 모자도 사 와서 황 선생님과 사귀기 시작했다.
당시 전주대 이사장이었던 하 목사님은 황 선생님을 전주대 석좌교수로 대우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목사님 아들의 결혼식에서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황 선생님이 경청하시더니 후하게 칭찬을 하셨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 “선생님 이번 주일에 교회에 꼭 가서 하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십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황 선생님은 끝내 침묵하셨다.
하 목사님이 아산병원에 입원했을 때 일이다. 황 선생님이 병문안을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다. 나는 입원실에서 두 분께 조금 무리일 것 같은 청원을 했다.
“오늘은 황 선생님이 하 목사님을 위해 먼저 기도하시고 저도 기도한 다음에 하 목사님이 황 선생님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싶어 긴장되는 마음으로 황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그분이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시작해 제법 기도를 하시고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을 맺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그제야 황 선생님의 마음에 조금 싹을 틔운 듯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3) 황장엽 선생 느닷없이 내게 “우리 형제합시다”
만난 지 2개월여 만에 마음 문 열어… 이후 우리 집에서 생일상 마련, 매년 빠짐없이 축하예배 드려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왼쪽)가 2010년 황장엽 선생(가운데)의 마지막 생일날 방지일 목사와 함께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간절한 기대를 갖고 하용조 목사님뿐 아니라 여러 목사님께 황장엽 선생님을 방문해 기도해 주시고 전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김준곤 방지일 목사님을 비롯해 홍정길 김진홍 이철신 김상복 최일도 이수영 목사님, 김형석 이만열 교수님, 이영덕 전 총리 등을 모시고 황 선생님과 교제를 나눴고 축복기도를 해주시도록 부탁했다. 황 선생님 역시 한 번도 거부하지 않고 좋아하시는 듯했다.
황 선생님을 처음 만난 지 2개월여 후 선생님은 느닷없이 내게 “우리 형제 합시다” 하고 말했다. 나는 좀 뜻밖이라 부정도 긍정도 안 하고 미소만 지었다. 주님 안에서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사실 누구와도 형제나 자매를 맺어본 일이 없었다. ‘저분이 얼마나 외로우면 저런 말을 할까’ 싶어 내가 우선 위로를 드려야 신앙으로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으로 긍정했다. 그러나 그를 오빠라고 부른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나를 신뢰해 주는 게 고마웠을 뿐이었다.
하루는 황 선생님 생신을 앞두고 탈북자동지회 홍순경 회장과 김성민 국장이 선생님께 의논을 드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듣고만 있었다. 선생님께서 “생신이 다 뭐냐. 나는 안 한다”고 거듭 손사래 치더니, 문득 “정 그러면 주 선생네 집에서나 하면 할까”라고 하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분의 생신 잔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걱정은 됐지만 못한다고 할 수가 없어 “네, 제가 조촐하게나마 준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2010년 별세할 때까지 나는 예닐곱 차례 우리 집에서 그분 생신상을 차렸다. 탈북자동지회 임원 몇 분과 경호원 8명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정말 조촐한 생일상이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꼭 빼놓지 않았던 게 생신 축하 예배였다.
선생님은 식사도 하루 한 끼만 드시고 약간의 견과류와 과일, 차 등의 간식을 드셨다. 체중이 41㎏에서 조금만 늘어나도 단식을 한다고 했다. 근신하고 절제하는 습관이 대단했고 일본에서 공부할 때는 누워서 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앉아서 책상에 기대어 잠을 자고 그때부터 하루에 한 끼씩 드시는 습관을 들였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2010년엔 선생님이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북한민주화동맹의 새 사무실에서 뷔페를 차린다고 하셨다. 다들 놀랄만한 일이었던 게 황 선생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나올 줄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사람을 많이 데려오라고 하셨지만 여러 사람에게 청하기 미안해 몇몇 분들께만 소식을 알렸다. 장영일 전 장로회신학대 총장님과 사모님, 이철신 이성희 목사님 등이 그 몇 분 중 하나였다. 그 외에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제자들 몇몇을 불렀다. 경호원들이 멋스럽게 방을 꾸며주기까지 한 그 생일파티가 황 선생님과의 마지막 작별파티가 될 줄은 몰랐다.
얼마 후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조사가 있는가 보다’ 하면서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형사 두 명이 동행해 식사하며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에 갔던 적이 있습니까.” 나는 10년 전에 교환교수로 갔다 온 일이 있다고 답했다.
“황장엽 선생을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나는 종교인으로서 황 선생님이 주체사상에 반대되는 기독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4) 접이칼 들고 죽어버리겠다는 황장엽 향해…
굶주린 동포 도움 구하려 망명했으나 희생된 식구·제자에 대한 죄책감 심해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를 ‘한국 자매’라고 불러줬던 새뮤얼 모펫(Samuel Moffett) 선교사 부부의 2003년 모습.
황장엽 선생님은 2003년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빈 그릇과 함께 내게 건네주셨다. ‘주선애 선생께. 4월 20일은 망명 6년이 되는 날입니다. 답답한 심정을 적어 보았습니다.
잠결에 어디선가 들려온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속삭임 소리.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보니 벌써 새벽 3시 30분. 물론 이대로야 죽을 권리가 없지. 공들여 찾은 진리. 든든히 포장하여 맡길 곳이라도 정해야 하겠는데 아직 무거운 죄 봇짐 걸머지고 허둥지둥 가련한 신세. 어떻게 나 홀로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길을 찾아야 한다. 길을 꼭 찾아야 한다. 미련 없이 떠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길을, 생명을 주고받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게 인생을 안겨준 ‘위대한 어버이’께 바치는 감사와 속죄의 정성 다하여 끝까지 싸우다 싸움터에서 이 세상 하직하고 갈밖에 다른 길은 없을 터.’
2003년 4월 23일 탈북자동지회 사무실 문밖에 피 묻은 글과 칼이 꽂힌 장면이 신문에 났다. 나도 놀랐지만 많은 사람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평온한 듯 아무 말도 안 했다. 실상 그는 죽고 싶다는 말을 때때로 하시곤 했다. 항상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닌다며 보여준 일도 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국정원에 황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방 안에 들어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황 선생님이 갑자기 접이칼을 들고 나타나 죽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 큰소리를 질렀다. “뭐 지도자가 이따위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리였다. 그는 칼을 책상 위에 놓으며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고뇌는 조금 이해가 갔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라 생각하고 황 선생님의 신앙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 시대에 다시 찾을 수 없는 애국자로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할 분이었다. 북에서 남으로 오게 된 것은 남한으로 가라는, 자신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강한 명령 때문이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북한 노동당 비서로서 600만명이나 굶주려 죽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큰 고민을 하다가 남한의 도움을 구해볼 생각으로 왔다고 했다. 그러나 식구들뿐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까지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으로 마음의 고통이 무척 심했다.
나는 오랜 친구 선교사이자 장로회신학대 동료 교수인 새뮤얼 모펫(Samuel H Moffett·한국명 마삼락) 내외에게 황 선생님을 방문하도록 청했다. 그분들은 기꺼이 수락했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갔다. 꽃다발을 드리며 정중히 인사했더니 황 선생님은 “나 같은 죄인이 무슨 꽃다발입니까” 하며 받기를 거절하다가 할 수 없이 “주 선생이나 하시오”라며 내게 건네셨다.
모펫 선교사의 기도를 들은 황 선생님은, 옛날 자기가 어렸을 때 어느 선교사가 집에 와서 복음을 전해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으로 책상머리를 짚고 옮겨 가면서 “사람이 이렇게 살아요. 그리고 죽어요” 하며 책상에서 손을 밑으로 하고 그다음 손을 위로 향하면서 “죽고 나서 이렇게 올라가요. 이것만으로도 표현이 잘 되지요”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복음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 보여줬다. 어린 시절 그의 기억에 남아 있던 간결한 복음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잠겨 있던 복음을 떠오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5) 황장엽 별세 소식에 ‘하나님, 그 영혼 받아주세요’
‘한번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 기도하기 좋아한 사람이니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왼쪽)가 2009년쯤 황장엽 선생(가운데)과 수잔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2010년 10월 9일 토요일 오전 8시 30분. 전과 다름없이 황장엽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은 휴대폰이 생긴 뒤부터 6년간 빠짐없이 아침이면 같은 시간에 내게 전화를 거셨다. 그날도 다른 말씀 없이 “건강하시우?”하는 물음을 건넸다. 나도 다른 얘길 꺼내진 않고 “선생님도 건강하시지요”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튿날 아침. 그날은 온누리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예배를 위해 상암월드컵경기장에 모이는 날이었다. 축사 순서를 맡았던 터라 마음이 좀 분주했다. 시계를 보니 8시40분이었다. ‘왜 선생님 연락이 없지?’ 황 선생님은 6년 동안 하루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혹시 조찬 강연을 가면 그 전날 연락을 주셨다. 나도 피치 못할 모임이 있어 연락받지 못하면 그 전날 말씀드리곤 했다. 때로 내가 잊어버리고 그 전날 알리지 못한 경우엔 아침 식사 모임 중 전화를 받으러 방 밖으로 나와 전화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전화가 없었다.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도 받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도리가 없어 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 향했다. 예배가 시작되고 기도가 끝났을 때 한 자매가 곁에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황장엽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정말?”하며 되묻고는 내 몸이 벌벌 떨리는 걸 느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맞은편 강단에 앉아 있던 하용조 목사님에게 소식을 전했다. 목사님은 예배 도중 황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수만명에게 알렸다. 나는 순서자 자리에 앉아 마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그 영혼을 받아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사명으로 알고 전도하며 봉사한다고 했지만 한번도 주님을 모시기로 공개적으로 고백하거나 세례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신앙을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을 하나님은 아시오니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절히 기도했다. 사람들이 물었다.
“황 선생님이 구원을 받았을까요?”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시지요.”
그를 전도하기 위해 나 이상 애쓰던 수잔 솔티 북한자유연합 대표는 장례식장에서 내게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고 그가 천국에 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솔티 대표가 황 선생님을 위해 긴 편지를 영어와 한국어로 써서 보내 왔다. 평생 이렇게 마음과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써본 일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편지엔 황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이야기와 꼭 한 가지 부탁이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주체사상을 내려놓으시고 예수를 믿으세요.’ 황 선생님은 편지를 받고 내게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주 선생하고 똑같군.”
솔티 대표는 편지로 약속한 날에 한국에 와서 황 선생님을 만나면서 또다시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도록 권했다. 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결국 침묵하시더니 “주 선생한테 맡기고 나가시오”하는 게 아닌가. 솔티 대표의 그 큰 눈이 눈물로 빨개졌고 곧바로 방을 나갔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발걸음을 돌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강압적으로 할 수 없는 전도, 무능한 내게 맡기신 뜻이 무엇인지요. 저의 연약함과 미련함을 용서하시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가 그토록 원하던 통일을 주시옵소서. 영생을 허락하시옵소서.’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기도는 끊어지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6) ‘새생활 체험학교’로 탈북자들 남한 생활 적응 도와
황장엽 선생 통해 탈북자들 고충 알게 돼 하나원 찾아 정보 제공하고 삶의 방향 잡도록 지원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왼쪽 네 번째)가 2010년 ‘새생활 체험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한 탈북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황장엽 선생님 사무실에 다니면서 탈북자들을 만나다 보니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탈북자들은 생활비와 주거는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생활 방법이나 언어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돕고 삶의 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한에 와서 새로운 삶을 꿈꿔본다는 의미에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을 새생활체험학교라고 지었다. 공동생활을 통해 그들이 한층 성숙해지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네 가지 목표도 세웠다. 첫째로 탈북자 복음화, 둘째로 탈북자 한국사회 정착 지원, 셋째로 하나님 사랑으로 복지 지원, 넷째로 통일한국을 향한 북한 교회와 사회의 일꾼 양성이다.
한 달에 한 번 주일에 400명 정도가 먹을 수 있는 떡을 만들어 하나원(탈북자들의 사회정착을 돕는 통일부 산하 기관)을 찾아갔다. 담당 목사님과 함께 예배드리고 하나원에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새생활체험학교에 관한 정보를 주면서 탈북자종합회관을 스스로 찾아오도록 권했다. 동원에만 익숙한 북한에서의 습관 때문에 스스로 찾아온다는 건 탈북자들에게 생소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쉽지 않았을 걸음을 내디디고 종합회관을 찾아온 탈북자들에게 남한 사회를 배우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 자신이 남한생활을 다양하게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탈북자들을 인솔해 남한의 여러 곳을 다녔다.
새생활체험학교는 환영예배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예배는 처음 겪어 보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배우고자 하는 의욕을 북돋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성별, 나이별로 두세 명씩 조를 나눠 도우미들에게 한 조씩 맡겼다. 탈북자 선배와의 만남 시간도 가졌다. 이 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질문도 많았다. 특별 면담 요청도 했다.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님이 사역하는 다일공동체에 가서는 남한에도 노숙자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사회주의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기독교적 분위기의 공동체를 보게 했다. 노숙자들과 같이 식사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자원봉사자가 돼 섬기는 체험을 하고 북한과는 너무 다른 무료급식소와 풍부한 음식들, 자율적 시민봉사자들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현장을 보고 느끼게 했다.
홀트아동복지관 방문은 굶어죽은 시체와 공개처형 장면을 봐온 이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기회가 됐다. 수십 년간 누워 지내야 하는 사람, 기형아로 태어나거나 지체가 부자유한 장애인, 흉한 모습을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참사랑으로 정성스럽게 보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느끼도록 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참 평화가 있음을 경험하게 했다.
무료병원인 천사병원도 방문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길에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의 구순열(입술갈림증) 아동들을 시술하는 모습 등을 보면 “통일되면 북한에 가서 이런 병원을 꼭 해야 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북한에 두고 온 동생이나 아이들 생각이 떠오르는지 북한에 돌아가 이렇게 선한 일을 하며 살자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7) 내 인생의 다음 사역 ‘통일은 다가오는데…’
북방의 황폐한 땅, 죽어가는 형제들 섬기고 재건할 일꾼 역할 고민하다 탈북자들 가르쳐 인재로 키울 결심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2007년 탈북자 종합회관에서 새생활체험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새생활체험학교 참가자들은 금요일 저녁이면 우리 집에서 냉면과 돼지고기 파티를 하고 둘러앉아 자신이 겪은 탈북 과정과 남한 생활을 서로 얘기하며 감사 기도회를 가졌다. 모든 순서가 끝나는 날엔 중요한 결단의 시간을 가졌다. 목사님을 모시고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말씀을 선포하고 한 사람씩 축복기도를 해 줬다. 서로 사랑의 포옹을 통해 과거 몰랐던 하나님 사랑을 전하며 새롭게 살 것을 약속하고 결단하도록 이끌어 줬다.
‘결단의 시간’까지 오는 동안 탈북자들은 눈에 띄게 자유로움이 늘었다. 북한에서 또래 친구들과 놀 때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탈북자들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수료식에 임했다. 수료식 후에도 헤어지기 싫어 한두 시간 더 머물다가 돌아갔다. 집에 가면 아무도 없고 기다리는 식구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4박 5일씩 진행되는 새생활체험학교를 50여회 진행하면서 1100여명의 탈북자들이 이곳에 정착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하나원에 가서 탈북자들에게 학교를 소개하는 일도 빠짐없이 했다. 그간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고 느낀 것도 많았다.
한국교회가 탈북자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타국에서 온 이주민이나 조선족 노동자 정도로 여기고 대하면 서로 마음만 상해 교제가 끊기게 된다. 결국 선교는 실패로 돌아간다. 남한 성도들이 ‘탈북자는 무섭다’ ‘신뢰할 수 없다’ ‘싸우기 잘하고 불평만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탈북자 사역을 할 때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탈북자들이 남한을 모르는 것 이상으로 우리 역시 북한을 모른다. 둘째, 탈북자들을 돕는 일의 기초는 얼어붙은 마음을 사랑으로 녹여주는 것이다. 셋째, 계속 인내하라. 훈련이나 교육은 오랜 세월이 걸린다. 넷째, 사랑과 온유함이 무엇인지 그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 북한은 사랑이 결핍된 나라다. 다섯째, 탈북자들을 조급하게 통제하려고 하지 말라. 그들은 통제 때문에 병든 사람이다. 여섯째, 사람을 급히 판단하지 말라.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됐을까를 생각하라. 일곱째, 서운해하지 말라. 원래 말이 거칠고 윗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다. 여덟째, 금전 거래만은 금물이다. 아홉째, ‘평생 거지’를 만들지 말라. 계속 도와주기보다는 자립하도록 도우라. 열째, 기독교인의 삶의 양식과 태도를 보여 주되 가르치려 하지 말라. 이같이 한다면 탈북자들이 남한에서의 삶에 더욱 높은 가치를 둘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2010년 연말에 내 임기는 모두 끝났다. 내 인생의 다음 단계는 쉬는 것일지 아니면 또 다른 사역으로 인도하실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던 중에 깨달음이 왔다. ‘통일은 다가오는데 저 북방의 황폐한 땅, 죽어가는 우리 형제들을 섬기고 재건할 일꾼은 누구일까.’ 탈북자들과 같이 지내면서 나는 그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그들과 생활을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셨다. 북한 선교와 교육, 행정 등 북한을 재건하는 역할은 탈북자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그들의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북한 재건을 위한 인재를 키우자.’
***[역경의 열매] 주선애 (38) 탈북자 통일역군으로 세우려 ‘샬롬공동체’ 열어
서로 격려하며 성장 기회 갖기 위해 개원… 그들이 북 기둥이 돼 주 찬양할 날 꿈꿔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2013년 7월 서울 강동경찰서에서 탈북자를 주제로 강연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탈북자종합회관을 통해 5년여간 1100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그중 훌륭한 지도자의 자질을 보이는 사람들을 몇몇 발견했다. 중국에 숨어 있는 동안 중국 선교사들의 순수한 신앙을 이어받아 소명감이 뚜렷해진 학생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교육을 시켜 주면 북한 재건에 참여할 수 있는 리더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들 중 몇 사람을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하면서 공동생활을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지성림은 고려대 대학원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신문사 기자로 취직을 했고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주승연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과정을 끝내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과의 공동생활 경험을 기초로 북한 지도자 양성을 시작하기로 했다.
‘탈북 기독 청년과 대학생들을 찾아보자. 그들을 격려하고 꿈을 갖도록 하자.’ 이 생각을 기초로 두 사람과 의논한 결과 기초생활비만으로는 공부하기가 어렵고 월 25만원을 지원하면 밤일을 하지 않고 생활을 꾸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월 200만원을 교회에서 보내 8명의 장학생을 정하고 생활비를 지원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김동호 목사님께서도 돕겠다고 나서셨다. 감사한 일이었다.
2013년 말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내 주셨다. 한 사람은 강교자 박사였다. 강 박사는 전주대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고 대한YWCA연합회 총무와 회장으로 20여년간 활동하신 분이다. 다른 한 사람은 손성인 박사였다. 그는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농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건국대 교수로 활동했다.
우리 세 사람은 탈북자가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의 역군으로서 선구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시기가 됐음을 인식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통일을 준비하고자 탈북자들과 한국교회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운동을 일으킬 수 있도록 사무실 개원을 준비했다. 향후 진행할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2013년 12월 2일 동서울가나안교회에서 개원예배를 드렸다. 이름은 ‘남북이 함께하는 샬롬공동체’로 지었다.
학생들은 매월 한 번씩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강사를 모셔서 강의를 듣기도 한다.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과 장래의 꿈을 나누고 통일의 지도자로서 긍지를 갖고 생활한다. 특히 방학 때는 지리산으로 함께 수련회도 간다. 수련회를 통해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 격려하며 성장의 기회를 갖고 있다. 몇몇 학생들은 통일 후에 북에 가서 양계를 하겠다는 목표로 닭을 키우기도 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서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통의 창’이 돼 준다. 북한을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기 위한 준비는 남한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 북한에 가서 교회 지을 생각은 하면서 북한을 세워 갈 사람들을 양성할 생각은 못 하고 있는 현실이 염려된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했다. 탈북 청년들은 얼어붙은 땅으로 돌아가 가시밭을 갈아엎고 돌들을 골라내고 옥토를 만들어 주님의 생명의 씨앗을 뿌릴 사람들이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 같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환상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나는 영원을 향한 꿈과 함께 탈북민들이 북한의 기둥이 돼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고 있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39) 어머니들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여성들이 맡은 일 많지만 개교회주의 갇혀 의식·세계관 좁아져… 초교파적 여성 기도모임으로 깨어나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뒷줄 왼쪽 두 번째)가 2004년 초교파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장영일 장로회신학대 총장은 우리 집에서 진행한 탈북자 모임에 오셔서 말씀을 전해주시곤 했다. 총장 사모님도 오랫동안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에 정성을 쏟으시며 새생활체험학교를 할 때면 탈북자 아이들을 업어 주고 돌봐 주셨다. 두 분은 내게 큰 힘이 돼주셨다.
나는 늘 장로회신학대가 학생들에게 통일을 향한 꿈을 준비하게 하고 교단도 협력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탈북자를 돕던 노영상(윤리학) 교수와 장 총장, 교단 북한선교위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이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남북한평화신학연구소를 만들기로 했다. 꿈에 그리던 일 중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북자 종합회관을 사단법인으로 전환하기 위해 기부받은 돈 4000만원과 통일 선교를 위해 쓰려고 작정했던 나의 헌금을 합쳐 장 총장께 드렸다. 학교와 학생들이 북한 사역의 마중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소에서는 지금도 통일에 관한 연구 논문과 관련 서적을 꾸준히 출간한다. 매주 화요일 통일 선교를 준비하는 장로 100여명이 모여 강의와 토의를 나눈다.
일상 속에서 탈북자만큼 깊이 관심을 뒀던 게 우리 사회의 여성이었다. 한국교회에는 여성단체도 많고 교회마다 여성들이 맡은 일도 많다. 하지만 개교회주의에 갇힌 채 여성들의 의식과 세계관은 점점 좁아졌다.
2003년 9월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딸인 앤 그레이엄 로츠 여사가 내한했다. 로츠 여사는 이틀 동안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기독교인 여성들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켜 줬다. 대회 후 평가회를 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이 깨어 일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이 큰 공감을 얻었다. 평가회 이후 다양한 후속 모임이 진행됐고 각 교파나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차원에서 때와 상황에 따라 기도할 수 있는 모임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라를 위한 기도회이니 이름을 ‘에스더 기도회’라 정하고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한편으론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이겨내고 눈물과 피를 흘리며 조국을 되찾는 동안 기독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점검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함께 뜻을 모은 이들은 2005년 1월 서울 종로구 여전도회관에 모여 한국기독여성모임(KCWA)이란 기도모임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1907년 평양에서 성령이 휩쓴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몇몇 선교사들이 성경공부를 하며 기도할 때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겨 회개 기도를 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제자들은 세상의 화려함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귀부인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을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모임에선 회개 기도와 북한을 위한 중보기도 운동, 성결하고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자는 의식개혁 운동, 성경공부 운동이 제안됐다. 이후 종교교회 새문안교회 영락교회 연동교회 등에서 모임을 가지며 1년에 한두 번은 24시간 금식기도회를 열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 등의 제목으로 나라를 내 자녀처럼 품으며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이 어머니들은 교회를 깨우고 국가 지도자들을 깨우는 처절한 기도자이자 신앙의 어머니들이다. 이 어머니들의 기도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역경의 열매] 주선애 (40·끝) 95년의 삶, 감사로 채울 수 있어 감사
사랑 실천하는 삶 살아야…길·진리·생명이신 주님 따라 살다 보면 그 사랑 배우고 또 실천할 수 있을 것
주선애 장로회신학대 명예교수가 지난 6월 서울 강동구 자택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송지수 인턴기자
이 땅의 어머니들에겐 자녀의 올바른 세계관 정립을 통해 밝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기독 여성들부터 말씀으로 성경적 세계관을 정립하고 자녀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2016년 2월 23일 연동교회에서 ‘3·1절 맑은 사회 기독어머니 기도회’가 한국기독여성모임(KCWA) 주최로 처음 시작됐다.
‘현명한 어머니는 사회를 바꾼다’(대하 7:14)를 주제로 진행된 기도회에는 기독여성 15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다음세대의 회복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세속적인 교육관을 회개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자녀 입시에 집착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신앙 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위기에 놓인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기도를 마친 어머니들은 매주 금식기도를 하고 매일 선한 일을 한 가지씩 하기로 결단했다. 그리고 몇 가지 다짐을 가슴에 새겼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자녀교육에 진력할 것’ ‘외식과 체면을 벗고 신앙이 바탕된 가정을 추구할 것’ ‘교회를 판단하거나 비난치 말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 건설에 이바지할 것’ 등이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 한국 여성들이 이제 잠에서 깨어나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 선배들처럼 민족을 살리고자 맑고 빛나는 나라를 이룩하는 데 집중하면 복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생을, 자자손손 후대들을 위한 영적 제사장 국가를 세워 거듭나게 하는 데 바친다면 얼마나 복된 일이겠는가.
어머니뿐 아니라 기독교인 모두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 성수만큼 중요한 게 이웃 사랑이다. 이웃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존재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라 살다 보면 그 사랑을 배우고 또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통일 한반도의 꿈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뤄 주실 대한민국을 향한 역사적 선물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이웃인 탈북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마땅하다. 나와 동역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탈북 대학생들은 이제 장성해 사회에 정착했다. 지금은 아들딸을 데리고 매달 우리 집을 찾는다.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옛날 대가족처럼 30여명이 모여 식사하고 예배를 드린다. 금요일이면 탈북민들이 우리 사회의 크리스천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경공부를 한다. 열심을 다해 말씀을 새기고 도전해가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한국교회가 탈북민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다. 정통교회와 성도들뿐 아니라 탈북민 세계에도 이단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그간 충격적인 소식도 많이 들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다가가 이단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단은 특히 물질적으로 다가가 마음을 뺏는다. 생활비는 물론 쌀과 반찬까지 주며 거짓 복음을 강요한다. “하나님은 믿지만, 돈을 주기 때문에 이단교회에 안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왜 오직 예수님만 믿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통일 후 한국교회가 당면할 어려움은 상상보다 훨씬 클 것이다.
95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간의 삶을 돌아보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손길을 따라 가을 낙엽처럼 흘러왔을 뿐,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 시간을 감사로 채워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