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씨앗 틔우기 / 곽주현
5월은 농부에게 바쁜 달이다. 곡식의 씨앗이 대부분 이달에 파종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땅콩도 빠지지 않는다.
작년 이맘때 거리를 가다가 우연히 지인을 만났다. 그분도 농사를 짓고 있어 자연스럽게 요즈음 파종하는 씨앗 이야기가 오갔다. 손에 든 불룩한 비닐봉지를 열어 보이며 땅콩을 심고 오는 중이라 말한다. 많이 남았으니 필요하면 주겠다 한다. 한 번도 길러 본 적이 없어서 선뜻 달라고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콩 종류라 기르기 쉬우니 가져다 심어보라고 손에 쥐여 준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며 가꾸는 방법도 자세히 설명한다. 지금이 파종 적기이니 서두르라 한다. 가을에 수확해서 일 년 내내 두고두고 간식거리로 먹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 이튿날 농장으로 가서 관리기로 땅을 갈아 이랑을 높게 만들었다. 땅콩은 물 빠짐이 좋아야 잘 자란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흙을 헤집어 씨앗을 넣고 두둑 전체를 비닐로 덮었다. 그렇게 해주면 땅이 따뜻하고 습기 유지가 되어 발아가 잘 된다. 경험도 없고 해서 시험 삼아 한 줄만 심었다.
10여 일이 지나자 비닐 이곳저곳이 볼록볼록하게 솟아올랐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새싹이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검은 비닐이 씨앗을 덮고 있어서 싹이 올라오는 때를 잘 맞추지 못하면 열에 데워져 뭉개지기 때문이다. 20일이 지나도 반만 올라오고 그다음은 기별이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되짚어 봐도 잘 모르겠다. 종자 주인이 말한 대로 잘 따라 했는데도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심고 구멍마다 물을 주기는 했지만, 그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습기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시 파종하기에는 이미 시기가 늦었다.
하루는 고향 친구가 맥주나 한잔 달라며 농장에 들렸다. 냉장고에는 항상 그것이 준비되어 있어 마을 분들과 자주 목을 축인다. 땅콩 이랑을 보더니 이게 농사냐며 핀잔을 준다. 자기는 모종판에 키워서 심었는데 남은 게 있으니 가져가라 한다. 이럴 때는 친구의 방문이 몇 배나 더 반가워 탁자에 비워진 맥주 캔이 줄을 선다. 그렇지 않아도 드문드문 자라는 땅콩을 볼 때마다 속상했는데 잘 됐다. 내년에는 자기가 모종을 길러 줄 테니 직파하지 말란다. 이렇게 좋을 수가! 어이 친구, 한 잔 더.
올 4월 중순이었다. 아직 작물을 심지 않은 땅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관리기로 갈아엎고 땅콩 심을 준비를 했다. 마침 그 친구가 지나가기에 모종이 잘 크고 있냐고 물었다. 그제야 올해는 웬일인지 거의 발아가 안 되었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진작 말하지 그랬냐며 자네 때문에 농사 망치게 생겼다고 골을 내다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와 함께 농막으로 들어와 캔 맥주를 꺼냈다.
집에 오자마자 부랴부랴 실한 알 땅콩 400개를 골라 물에 불렸다. 한 시간쯤 지난 후 그것들을 큰 쟁반에 종이 행주 두 장을 겹쳐 깔고 골고루 펴 놓았다. 그다음에 다시 종이 행주 두 장을 덮었다. 그러고는 씨앗과 종이가 적셔지게 약간의 물을 붓고 비닐봉지에 넣어 수건으로 감쌌다. 쟁반을 찜질 매트에 올려놓고 온도를 35도로 맞추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수건을 제치고 보니 와, 벌써 제 살을 뚫고 나온 놈이 있다. 겨우 12시간쯤 지났는데 이렇게 빨리 발아되다니 놀랍다. 최소한 3일은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말이다. 100여 개의 뾰쪽한 새순이 시샘하듯 올라오고 있다. 작물을 키우는 것은 열매를 거두는 게 목적이지만 덤으로 이런 생명의 신비와 만나게 되면 농사짓는 즐거움이 배가 된다. 돌처럼 딱딱한 알갱이가 여건이 마련되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 싹이 튼 것이다. 이 속 깊은 이치를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냥 ‘자연의 섭리다.’라고 뭉개 버리고 만다.
똑같은 씨앗이지만 발아의 속도가 각각 달랐다. 72시간이 지나자 398개가 성공했다. 아직도 몸통만 부푼체 변화가 없는 남은 두 개를 반으로 갈라봤다. 씨눈이 마른 체 그대로 있다. 아마 지난가을 그 땅콩을 수확하기 전에 습기가 많은 땅속에 있어서 그때 싹이 트다가가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이럴 때 사람들은 꼭 수치로 나타내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발아율 99.5%, 이거 대단한 거다. 혼자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속으로만 그랬다고.
씨앗을 농장으로 가져와 정성껏 한 구멍에 두 개씩 심었다. 10여 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초록 잎이 돋았다. 하나도 빠진 곳이 없다. 땅콩이 주렁주렁 달리겠지? 그건 누구도 모른다. 오직 자연만이 안다. 가을을 기다리자.
첫댓글 발아 기술까지 터득 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글 재미있습니다.
축하는 요. 농부가 되면 그런 것쯤은 다들 다 잘해요.
진짜 생동감이 넘칩니다. 단숨에 읽었어요. 이 글도 공모전에 내세요.
글감이 없어서 고심하다 겨우 썼는데 칭찬해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저도 가을 기다릴게요.
무엇을 가꾼다는 것은 시간을 익히는 것이니까요.
시중에 판매하는 땅콩은 대부분 중국산으로 고소한 맛이 없어요.
손수 재배하여 가을에 캐서 볶으면 주전부리로 그만한 게 없답니다.
농약방이나 하나로마트에서도 모종을 판매하는 곳이 있어 비싸기는 하지만 사다 심으면 편리합니다.
직접 발아해서 심는 정성이 놀랍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발아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쓰시는 거 질투해도 괜찮죠?하하.
질투라니요. 부끄럽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글을 맑게 쓸 수 있나요? 자꾸 읽게 됩니다. 제가 또 땅콩의 고장 출신이라요 하하
그런데 400개를 다 세셨어요? 우와.
이것도 글이 될까하고 망서리다 썼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번 모임에서도 재밌게 들었는데 글로 읽으니 또 새롭네요. 선생님 표정이 떠올라 더 즐겁게 읽었습니다.
새벽에 땅콩 싹이 났는지 살피는 선생님의 손길 따라 잠시 숨이 멈췄어요. 너무 신비로워서요.
와, 선생님 대단하세요.
진짜 농부 다 되셨어요.
저는 작년에 시누이 두 분이서 심었는데 완전 망했답니다.
뿌리가 들지 않았답니다.
올해는 포기랍니다. 히히!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글이 술술 읽힙니다.
진심 부럽습니다.
글쓰기 공모전에 내도 되겠어요. 아주 잘 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