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성천(全聖天, 호:霞隱, 1913~2007.7.31)/윤사무엘 교수
전성천 목사는 일제시대에 6년간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에 가서 7년간 공부하였다.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예일대학교에서 교회사로 신학박사(Ph.D.)를 받고 귀국하여 잠시 고위 공직자(2공화국 때 문공부 장관)의 자리에 있었지만 생애의 태반을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과 함께 보냈다. 노동운동, 빈민운동의 현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며 많은 개척교회를 세웠다. 반 이상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하였다. 지금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전성천은 경북 예천군 지보면 지보리 400에서 1913년 9월 30일(호적에는 12월 4일)에 전옥영(全沃永)선생과 김남이(金南伊)권사 사이에 태어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이 흘러내리고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성천은 낙동강 소금배에 대한 추억이 있다. 큰 아버지(전병원장로, 1876~1957)의 영향으로 온 집안이 일찍부터 예수를 믿었다. 어머니 김남이 권사는 신앙이 훌륭한 분이었다. 1929년 지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본으로 유학을 갈 때 어머니는 찐 고구마 몇 개를 넣어주면서 당부하기를 ‘어려움이 있으면 꼭 기도하거라. 그리고 어디를 가나 주일은 철저히 지켜야 한다.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되더라도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동경 욱문관(郁文館) 중학(1934년)과 청산학원(靑山學院, 아오야마가꾸인)대학을 1937년에 졸업하였다. 이어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1940년 청산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6년간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귀국하여 개척교회를 세우고 1942년 12월 14일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2001년까지 10개 교회를 시무하였다.2) 1941~1947년 사이에 조선신학원(한국신학대학 전신)에서 가르쳤다. 이 기간 중 1943년 9월에서 한 달간 항일투쟁 협의로 경기도 경찰국(광화문 소재)에 검거되어 43일간 모진 고문(비행기 고문 9회)을 받고 심신을 지탱할 수 없어 시립중앙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1949년부터 1년간 대한기독교 교육협회 총무 일을 하였는데 이때 아내를 사별하였다. 곧 6‧25동란이 일어났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951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고(Th.M.), 1952년 예일대학 신학부(1701년 설립)에서 신학석사(STM)를 받고 역시 예일에서 흄 펠로우(Hume Fellow)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여 1955년 6월 9일(목)에 철학박사(Ph.D. 기독교 윤리 및 사회학 전공)를 받았다(42세). 논문제목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분열과 연합”(Schism and Unity in the Protestant Churches of Korea)였다. 1927년 백낙준박사가 예일을 졸업하고 나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박사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교수생활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미국에 와서 공부만 한 것이 죄스러워 모든 미련을 버리고 고국으로 갈 결심을 굳게 했다.
미국 유학생활 7년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1955년부터 1년간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총장과 부총장은 조교수로 채용하려고 노력했으나 학무위원들과 기존 교수들이 방해를 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6년에는 1년간 국방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가르치고 싶었는데 자유주의 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학교 강사비로 생활이 되지 않자 토건회사를 차려 전일기업을 경영하였다. 문경에 있는 시멘트 공장을 건설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한국방송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자유당 문화부장을 지냈다.
1956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우선 연동교회로 전필순목사를 찾아가 요청했더니 청년부를 맡아달라고 해서 1960년까지 5년 동안 무급으로 봉사를 하였다. 이 때 현재의 아내와 결혼을 하였다. 1949년 첫 부인과 사별한 후 7년만의 일이다. 김옥(金玉, 서울대 미술과 졸업)과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처(金仁玉) 소생인 영희(16세), 영일(13세), 영민(10세) 등 3남매를 떠맡는 새 부인은 어려움을 잘 참아내었다. 현재 아내 사이에 영란(1957년 생), 영주(1961년 생), 영백(1965년 생)이 태어났다. 또 1956년에 있었던 일로 토건업을 동생들에게 맡기고 자유당에 입당하여 문화부장이 되기도 했다. 1958년 2월 6일에 아버지께서 74일기로 별세하셨다. 같은 해 서울 동대문 갑구 국회의원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1959년부터 1962년 사이에 서울신문사 회장을 지냈다.
1959년 1월 31일, 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정부대변인인 공보실장 발령을 받았다. 그 당시 막강 실세였던 이기붕의장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장관이 되었다고 모두들 축하하는데 어머니는 ‘목사공부한 사람이 목사가 되어야지 장관이 된 게 뭐가 좋은가?’ 라며 별로 반가워하지 아니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4선 출마 결심을 하고 그 의향을 국무회의에서 묻자 전실장만 ‘현재 상황으로는 안 됩니다’고 만류하였다. 결국 그는 1960년 4월 7일 경무대에서 사표를 내라고 통보를 받고 해임당했는데 이 일 직후 4‧19가 일어나고 20일 뒤에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는 1961년 4월 5일에 3‧15 부정선거(책을 인쇄하여 돌린 죄) 죄목으로 5년 구형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30명의 정치범과 같은 방을 사용했다. 동물 취급을 받으며 형무소 생활을 했다. 결국 교도소 안에서 5‧16을 맞게 되었다. 잡범 감방으로 옮겨 악랄한 신입자 신고식을 거쳐 세 평짜리 감방에 스무 명이 앉아 생활을 하는 수모도 당했다. 변소 냄새, 추운 날은 추운대로, 더운 날은 더운대로 지내야 했다.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없고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누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2년 옥살이를 살고 출소하였다. 이 기간 중 어머니는 울면서 밤낮 기도로 세월을 보냈다. 모범수로 지내면서 동료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출소 때에는 특이한 송별파티를 받았다(1962년 6월 4일).
1964년에 한 정치인으로부터 공화당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으니 거절하고 그로부터 5년간 신민당(윤보선 전 대통령이 창당)창당위원으로 정무위원 및 대통령 선거 사무차장을 지냈다. 사실 차기 정권을 인수하면 교육정책의 과감한 개혁을 통해 실력있는 교수를 적극 채용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바로 이 기간 중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지평교회에서 6년을 목회하였다(1964~70). 동네 주민들은 무척 가난하여 ‘지평에서는 참새도 굶어죽는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지평은 청량리에서 기차로 2시간 내려가야 하는 곳이었다. 6년 동안 매 주일에 가서 열심히 설교를 하여 교인이 150명까지 달했고 교회 설립이래 60년이나 되는 동안 늘 남의 도움으로 겨우 꾸려 오던 이 교회가 2년만에 완전 자립을 하게 되었다. 지평교회에서 목회를 한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77세인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별세하셨다(1965년 11월 7일).
이 무렵 미국에 있던 친구 마삼락(Samuel Moffett)박사가 대학교수 초청장과 함께 비행기표를 집으로 보내왔다. 오하이오주 옥스퍼드시에 자리잡고 있는 웨스턴여자대학(Western College for Women)에 교수로 오라는 것이었다. 여러 날 고민하다가 미국에 가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 고국 산천을 한달 동안 두루 돌아보고 싶었다. 60이 가까운 나이에 이제 떠나면 다시 올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경기도부터 돌기로 하고 자동차로 여행을 출발했다. 산비탈에 즐비한 천막들이 있기로 가보니 당시 경기도 광주에 몰려든 가난한 사람들의 무리는 집이 없었고 사막의 유랑민이나 집시처럼 모두들 천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술집만 즐비하며 간간이 복덕방 간판이 보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병원이나 교회는 없었다. 전기나 수도 시설이 없었고 촛불과 남포불이 천막의 어두운 구석을 비쳐줄 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베드로가 로마로 벗어나 도망갈 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로마로 들어가는 것을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하는 심정으로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고 여기에서 영세민을 위해 봉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내도 어렵게 동의를 하여, 1970년 9월 30일(57세 생일날) 비행기표를 마삼락박사에게 돌려보내고, 성남에 땅을 물색하여 광주 대단지에 제일교회를 세웠다. 설립자로 동참해 준 분 가운데는 새문안교회의 강신명 목사, 남대문교회의 배명준 목사, 연동교회 김형태목사, 기독교서회 총무 조선출목사, 덕수리교회 김충효목사, 전필순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피어선신학교 김용준교장, 정신여고 박희경교장, 미국장로회 선교부 총무 우열성(Dr. Stanton R. Wilson) 목사 등이었다.
이리하여 1970년부터 1983년 사이에 경기도 광주 대단지(현 성남시) 영세민 구호사업을 하였다. 온 가족이 대단지로 이사하여 열심히 교회를 섬기며 지역봉사를 한 결과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첫 예배시 한 명도 나타나지 않던 철거민들이 계속 몰려들었던 것이다. 장례식이 많은 편이어서 ‘장례전문 목사’라는 별명도 들었다. 교회를 개척하느라 집도 팔고 땅도 팔았지만 아내는 300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아내가 빌려온 돈은 한달에 5부 이자를 주는 것이었으니 교회를 건축하느라 여기 저기 빌려 쓴 돈을 갚을 길이 없었다. 외국에서 선교헌금이 답지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브란스병원의 도움으로 의료사업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리하여 1년만에 500명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광주 대단지는 워낙 가난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주일 헌금이나 십일조 등을 가지고는 아직도 교회가 자립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서울시는 청계천에서 판잣집을 철거하고 거기 살던 주민들을 50리가 넘는 이곳까지 실어다가 줄 때에 약속했던 주민생활 대책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청계천만 복개하면서 그 위에 3‧1 고가도로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런 까닭에 광주 대단지에 들어온 사람 가운데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다. 1년이 지나니 주민의 80%가 일자리가 없는 빈민촌이 되었다. 이런 현황을 교인들과 주민들이 합심하여 여러 번 관계당국에 진정서를 냈다. 서울시를 비롯하여 내무부, 총리실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여, 1971년 3월 25일 서울시 광주 대단지 사업소장은 그 사업소 게시판에 ‘철거민이 아닌 이주민에게는 배정된 택지를 줄 수 없다’는 무효공고를 내었다. 다시 2차 공문이 나와 이미 지어놓은 주택은 불법으로 지은 것들이니 6월 10일까지 자진해서 철거하지 않으면 시에서 철거해버리겠다는 최후통첩이 바로 광주 대단지 7만 명의 폭동의 씨앗이 된 것이다. 광주 대단지 불하가격 시정 투쟁위원회는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궐기대회를 1971년 8월 10일에 열기로 결의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동시에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모이면 자칫 터질지도 모르는 폭력사태에 대비해서 사전에 경찰병력을 강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일에 비가 조금씩 내리는 날씨 속에 예정 시간이 30분이 지나도록 서울시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군중들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궐기대회가 시작되었다. 서울시장이 빗길에 30분 지체되었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구호 가운데,
“백원에 매수한 땅 만원으로 폭리 말라” “배고파 우는 서민 세금으로 자극말라…” 화가 난 군중들은 성남 출장소를 향해 움직였고 난동을 피웠다. 관공서를 부수고 눈에 보이는 관용 차량을 불태웠다. 이러할 때 전목사는 청와대에 급히 연락하여 전상근 과기처 종합기획실장을 내려오게 하여 중재와 협상으로 사태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테니 빨리 해산해 주세요’ 이 일이 있은 후 양택식 시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무려 2만 가마의 쌀이 들어오고 21억원에 이르는 생활보호자금이 지급되어, ‘죽음의 도시’로 불리던 광주 대단지는 ‘희망의 도시’ ‘삶의 도시’로 변모했다. 함께 동고동락하던 전목사의 목회의 힘이 그 배후에 있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후 성남시는 갑자기 커지게 되어 30만 인구로 팽창되었다. 광주 대단지가 성남시로 이름이 바뀐 뒤 광주 대단지 제일교회는 1973년 9월 2일자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성남교회로 교회 이름을 바꿨다. 1979년에는 새로 신축하여 성전봉헌예배를 드렸다.
1975년부터 1978년 사이에는 기독교방송 사장으로 봉사하였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대학에서 교수를 하였다. 이 기간인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한국 정신박약아 보호회 회장을 맡으면서 약자를 위해 봉사했다. 1981년부터 1년간 한국 복지재단 장안복지회 이사장으로 봉사하였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피어선 신학교(현 평택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가르쳤다. 1985년부터 1993년 사이에는 대신대학(현 안양대학교) 초빙교수로 가르쳤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신학원에서 강의를 하였다. 1993년에는 나성대학교에서 하계 및 동계 특강을 하였다. 성남장로교회(통합)와 분당 푸른교회 원로목사로 계셨으며, 황간 사랑의 교회 당회장으로 시무하고 있다. 부인 김옥권사 사이에 2남 4녀를 두고 있다. 2007년 7월31일 소천하셨다.
|
첫댓글 예천 지보 내고향에 이런 훌륭하신 분이 계셨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가을 바람으로 오신주님 ..............
주여...당신께로 ... 바람으로 오셔서 저를 씻어주시고
맑은 하늘로 오셔서 저를 순수 하게 하소서 ....
텅빈 운동장처럼 주여 세상의 아무것도 담지 않케 하시고 ...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만으로 채워 주소서 .............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