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 창녕인물비사㉛>
승병장으로 싸운 영산의 神人 문호장
구려회 예비역 장성(육군대학 부총장 지냄)이 1982년 <창녕문화> “영산의 사적과 향토문화재” 제하의 글에서 영산의 신인이라 불리던 전설적인 인물 문호장文戶長에 대한 언급을 다음과 하였다.
― 문호장은 그때 발군의 큰 전공을 세웠거나 특수한 전술적 방책을 고안했을 것이다.
※ <창녕문화> 제4호,1982. p52 구려회/ 영산의 사적과 향토문화재
임란 때 생원 신방즙 의병장이 이끈 영산의병군 외 또 다른 의병군이 있었으니 영산성 동쪽 골짜기 구계리에 보림사 승려가 주축이 된 승군僧軍으로 승병장은 심沈대장이라 불리는 문호장이었다. 위의 글(구려희)에 의하면 호장戶將은 곧 만호장으로 변방의 고을을 수비하는 장수를 말하는데 전시에는 고을 현감이나 군수의 무관 보좌관이라고 한다.
문호장은 영산현 아전을 지낸 신묘한 무도武道와 도술을 가진 신선, 신인神人으로 불리어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문씨란 성만 알려져 있고 이름은 불명인데 그가 구계리 구씨네의 외손이라는 사실만 확실하게 전해온다. 또 본처에게 아들을 보지 못해 죽전과 자인(경북 경산)에 첩을 두고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왜적이 영산성에 쳐들어오자 구계리(통칭 보름골)의 여러 사찰의 승려와 젊은이들을 의병으로 규합하여 왜적과 대항하였다.
왜군이 4월 하순에 창원에서 낙동강을 건너 영산, 창녕 현풍으로 질풍처럼 지나간 후 6월경 제9군 우시수승의 왜군 1만여 명이 낙동강 동안 현풍 창녕 영산 세 고을에 주둔하게 되었다.
영산성을 점령한 후 왜적은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니 영산 사람들은 산속으로 피란을 하였다. 이때 문호장은 보림사 승려들과 구계리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승병군을 조직하여 왜적과 싸우려 했다.
문호장을 승병장으로 추대하며 심沈대장이라 불렀다. 그를 심대장 또는 임대장이라 부른 것은 왜적에게 도술을 부리는 선사禪師로 유명한 사명당의 분신이거나 화신이라고 겁을 주어 “왜병들의 사기를 꺾기 위한 심리전용” 전술이라고 구려희 장군이 추리하였다.
※ 당시의 일인들은 조선에는 도사가 많고 선사仙師도 많으며 도술을 부리는 자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위 자료)
영축산성 진영을 근거해 의군들은 창과 칼이 부족하여 대나무나 참나무를 깎은 죽창까지 만들어 들고 영축산 기슭에 올라 바위를 굴리고 돌을 던지도록 준비했다. 승려들은 선장이나 몽둥이로 무장하여 왜적과 백병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왜적은 보화가 많이 있다는 소문이 난 구계리 보림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구계리 안에는 그때 보림사를 비롯해 많은 사찰이 있었다. 예전 왜구가 하던 약탈 행위 그대로 하고자 왜적이 구계리 골짝으로 몰려오자 승병군은 산기슭에 준비해 둔 바위를 굴렸다. 돌팔매로 조총을 쏘며 올라오는 적을 향해 돌을 던졌다. 굴러떨어지는 바위에 적병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깔려 죽었다. 이윽고 승병들이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가며 선장과 몽둥이를 휘두르자, 청년 의병들도 죽창을 들고 따르며 죽기 살기로 싸워 왜적을 물리쳤다.
이 싸움을 전승 계승하는 민속놀이로 영산에는 안산 바위 굴리기, 팔매질과 돌 던지기, 돌 들기, 강 건너뛰기 등 석전石戰이 오랫동안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이들 석전놀이는 사라지고 말았다.
7월 초순 제포만호 이숙이 영산현감으로 부임하고 관찰사 김이 의령의병장 곽재우에게 인근 고을 의병군과 합세하여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낙동강 좌안 3개 현의 왜적을 몰아내라고 명령하였다.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연합군은 현풍, 창녕을 수복하고 영산성의 왜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산성의 왜적은 성에 웅거하여 대항하여 쉽게 성을 수복할 수 없었다.
이때 별장 신갑이 영산현감 이숙에게 북문 쪽 수구문水口門으로 결사대가 들어가는 계책을 말했다. 수구문을 수무이굴이라고도 하는데 곧 숨은 굴이란 뜻이라 한다. 곽 장군이 신갑의 계책을 채택하여 결사대 100여 명이 북문 옆 수구문으로 진입하기로 하였다. 결사대가 수구문에 당도해 보니 어제 그제 내린 비로 영축산에서 쏟아진 냇물이 홍수처럼 범람하여 수구문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바람처럼 선장을 짚은 문호장이 나타났다.
“내가 용력으로 바위를 깨트려 냇물을 다른 곳으로 흐르도록 하겠다.”
하고 냇가의 바위를 선장으로 내려쳤다. 천둥 벼락이 내려치더니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고 영축산에서 쏟아지던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며 수위가 얕아져 수구문으로 결사대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결사대는 수구문으로 진입하여 북문 안쪽에서 공격하여 성문을 열어 의병군이 쉽계 쇄도하여 성안의 왜적과 싸우니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동문을 통해 밀양으로 도주하려 했다.
수무이굴 근처를 말재죽터라 불리는데 영축산성 성문 아래쪽으로 말 발자국, 장수의 손자국, 발자죽, 칼자국, 등을 기댄 등자국 등이 바위에 움푹움푹 남아있다, 심대장 문호장이 선장으로 바위를 깨트리면서 생긴 흔적이라고 전설처럼 전해온다.
이때 문호장이 이끄는 승병들이 동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패주해 나오는 왜군을 향해 닥치는 대로 바위를 굴리고 돌을 던지고 죽창으로 선장으로 때려죽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후에 나이가 많은 문호장은 만년교 근처 인산껄에 살았는데 그의 죽음 또한 기이하고 신비롭다.
어느 해 모심기 철에 관찰사가 영산에 순시를 나왔는데 그가 탄 말이 농군들의 밥그릇을 밟았을 때 문호장이 그걸 보고 땅을 몇 번 치며 ‘저 발자국!“ 하고 외치자 말이 꼼짝 못하고 멈췄다. 기이하게 여긴 관찰사가 문호장을 잡아오게 하여 문초하자.
”쌀농사는 만백성의 양식이온데 농군들의 점심밥을 짓밟아서야 될 일이오?“
하고 태연히 말했다. 동헌 마당에 잡아다 무릎을 꿀리고 문초하자 현감이 말렸다.
”문호장은 왜란 때 신묘한 도술과 전술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운 자입니다. 선처하소서.“
현감이 문호장의 도술을 부린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자 관찰사가 시험 삼아,
”기이한 도술을 부리니 놀랍다. 초인적인 그대를 어찌 하면 죽일 수 있나?“
하고 물었다. 문호장은 태연히 지릅대로 겨드랑이를 치면 된다고 대답했다. 과연 겨드랑이를 보니 작은 날개가 보여 관찰사가 죽나 안 죽나 시험 삼아 군사에게 치라 명했다. 설마 가는 지릅대에 맞아 죽으랴? 하고. 그런데 어이없게 문호장이 쓰러지더니 숨을 거두었다.
관찰사는 크게 놀라고 후회막급이라 현감에게 명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도 제대로 혼록되지 않았으니 유감이로다. 현감이 사당를 짓고 매년 친히 제사를 지내 유혼을 위로하라“
이리하여 영산 문호장제가 단오날에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창녕신문> 2026년 8월 11일 연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