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어 이순신이 돌아가려 하는데 정운이 나아가 싸우려 했다 이때 정걸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은봉전서 부산기사 中
이순신이 가장 믿었던 정운 순절 현장에 있었던 정걸 그는 누구인가?
임란 당시 80세를 바라보던 정걸은 수사와 병사 절충장군을 지낸 화려한 군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572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1577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
1581년 절충장군
1582년 장흥부사
1583년 전라도병마절도사
1583년 경상도병마절도사
1587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어떤 이유로 정걸은 31살 아래인 이순신의 휘하에서 복무했을까?
공무를 본 뒤에 활을 쏘았다 조방장 정걸도 와서 만났다. 난중일기 1592년 2월 21일자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면 되고 경험 전수등 적지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순신은 군 경험이 화려한 정걸이 필요했고 조정에 정걸 같은 분을 조방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게 중론이다.
둘째 정걸은 전라좌도수군절도영 5관 5포중 하나인 고흥 출신이고 수로와 해전 부분에 있어 배울 게 많았다는 것이다.
또 정걸이 직접 전투에 참전했던 왜란 전초전이라 할수 있는 1555년 을묘왜변에서 판옥선에 총통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는데 경험이 전수 되었다는 점도 살펴볼수 있다.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배의 지자ㆍ현자포를 쏘았다. 난중일기 1592년 4월 12일자
정걸은 이순신과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한산해전 당시엔 적의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며 임란사의 큰 획을 긋는 계사년 행주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창 싸울 때에 화살이 거의 다되어 진중이 위태롭고 답답하였는데 정걸이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바다로부터 성중에 들여왔다. 난중잡록 1593년 2월 12일
10배가 많은 왜군을 상대로 조선군은 적의 공격을 하루에도 수차례나 막아냈고 전투막바지 화살이 동이나 당시 충청수사였던 정걸은 배 두 척에 화살을 실어 한강을 건너와 행주전투의 빛나는 승리를 가능케 했고 권율은 도원수로 초특급승진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행주전투는 무엇인가?
먼저 1592년 견내량 일망타진 작전을 통한 한산해전 승리를 이끈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서남해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왜군이 압도적인 병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어도 수륙병진을 통한 공격이 불가능 했고 행주전투가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엔 위에서 언급했듯 조선수군이 판옥선으로 보급해주었기 때문에 왜군은 더이상 싸우는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철수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 입장에선 오랜 군경험 특히 수군지휘관 경험이 더욱 더 필요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정걸은 전쟁이 종전되기 1년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또 그의 아들과 손자도 전투에 참전 전사하였고 불과 2년만에 3대가 연이어 순국하였다.
이순신의 조방장을 지낸 정걸은 당시 78세의 노장이었다. 그리고 이순신보다 20년 앞서 수병사를 모두 지낸 분이기도 하다. 시간이 된다면 안동사에 배향을 드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공부할 게 참 많네요. 잘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