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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12
5월31일 [성령 강림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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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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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0DugyegLGA&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5208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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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는 교회 공동체와 개별 그리스도인들을 젊게 하십니다!>
아흔도 훨씬 넘기신 요셉 어르신께서는 요즘 동년배 친구들로부터의 미움과 지탄을 한몸에 받고 계십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세에 비해 너무 젊게 사신다는 것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 요르단강을 건너가셨습니다. 또 다른 친구들은 뒷방에서 골골하며 누워계십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친구들은 요양원에서 훨체어에 의지한 채, 겨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팔팔하십니다. 당당히 두발로 서 계십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도 다녀오십니다. 아직도 꼬질꼬질 하지 않으십니다. 머리숱도 풍성하고 허리도 꼿꼿하며 유머감각도 탁월하십니다.
요셉 어르신께서 마을 광장 앞 카페에 등장하시면 사람들은 반가운 나머지 다들 박수를 치고 좋아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요양원 친구들은 ‘무슨 그 따위 인간이 다 있냐? 하느님께서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시냐?’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요셉 어르신께 여쭈었습니다.
“젊게 사시는 무슨 좋은 비결이라도 있나요?”
“물론 있지!”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지! 이리 따라오게!”
요셉 어르신께서는 당신의 서재로 안내했습니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당신이 직접 달필로 쓰신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제목은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이었습니다. 당신이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들을 나름 종합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
① 까칠하게 굴지말자!
② Stop and Go! 멈춤과 나아감, 기도와 활동을 적절히 병행하자!
③ 여기 아파! 저기 아파!’라는 말 입에 담지 말기!
④ 시간도 많은데 잘 씻고 잘 입자!
⑤ '나 때는 말야’라는 말 절대 금지!
⑥ 최고의 얼굴 맛사지, 자주 환히 웃자!
⑦ 틈나는 대로 유머 감각 발휘하기. 그러나 너무 오버는 말자!
요셉 어르신의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을 훑어본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시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하나! 아주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그 지체인 개별 그리스도인들을 젊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니신 특징 중에 독보적인 것이 강한 생명력입니다. 넘치는 활력입니다. 신명나는 에너지입니다. 신선한 역동성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뜨뜨미지근한 우리들을 끊임없이 자극하십니다.
잠자고 있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맥없이 늘어져 있는 우리를 벌떡 일어나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고 젊게 만듭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연세가 들어도 젊게 살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가을이 지나고 혹독한 겨울이 다가와도 언제나 마음은 화사한 봄날입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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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령은 말귀를 선물하신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bjmEBixkvRY
임금님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며느리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사람이므로 가장 슬기로운 처녀를 찾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임금님이 며느리를 뽑는다는 광고를 듣고 아름다운 처녀들 수백 명이 궁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임금님은 이 처녀들에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너희들에게 쌀 한 되씩을 주겠다. 이것으로 한 달 동안을 먹다가 다시 모여라.”
처녀들은 큰 걱정이었습니다. 쌀 한 되라면 사흘이면 다 먹어 버릴 만한 적은 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녀는 멀겋게 쌀 물을 끓여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아가씨는 처음부터 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 대부분은 아예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 중에 달래라는 어여쁜 소녀가 있었습니다. 달래는 임금님의 쌀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연구를 했습니다.
‘훌륭한 임금님께서 이런 엉터리 시험문제를 내실 리가 없다.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일까?’
아침이 되어서야 달래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무릎을 ‘탁’ 치고 방실 웃었습니다. 달래는 곧 부엌에 가서 그 쌀 한 되를 가지고 몽땅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시장에 나갔습니다. 임금의 며느릿감쯤 되는 이 아름다운 처녀가 떡을 파니까 잘 팔렸습니다. 동네 총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떡을 사 먹게 되었습니다.
달래는 떡 판 돈을 가지고 다시 쌀을 사서 떡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은 떡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달래는 떡 장사에서 아주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남들처럼 굶는 것이 아니라 장사해서 번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도 건강해지고 떡판을 이고 다니며 햇볕에서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굴도 알맞게 타서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마감날이 되었습니다. 임금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궁궐로 들어오는 처녀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인력거에 탔거나 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처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송장들이었으니까요.
드디어 달래가 들어왔습니다. 달래는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며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는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주신 쌀 한 되로 장사를 하여 그 동안 제가 잘 먹고 남은 것이 한 달구지나 되었사오니 받으시옵소서.”
임금님은 달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달래는 있는 것을 앉아서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불릴 줄 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규수구나. 이 나라의 왕후는 일하기를 즐거워하고 지혜가 있는 달래가 되어 마땅하다.” [출처: ‘지혜로운 며느리’, ‘양지 물고기’님의 블로그]
‘말귀’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말이 뜻하는 내용”, 혹은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기”라고 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거나,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는 못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알아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국어를 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은 학교에서 10년 정도 영어를 학과목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겁을 먹어 한 마디도 못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제가 일반대학 다니며 군대에 갔을 때, 군대 훈련소에서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에 배속되는 한국군)를 몇 명 뽑는다고 해서 자원을 했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지원하라고 해서 저도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언어연수도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데 군대에 있는 동안 카투사에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두 명만 뽑히는 것인데 저는 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쉬운 것들인데도 한 마디도 입에서 영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10년을 배웠는데도 단순한 말도 못 하는 제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안녕하세요.”(ciao!)라는 말도 배우지 못하고 유학을 나갔습니다.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이탈리아어를 빨리 배웠습니다. 한국인들은 도저히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영어로 말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영어도 안 됐습니다. 답답해서 한국으로 전화해서 한국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한국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뭘까?’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듯이 이탈리아어를 배워서는 역시 10년을 배워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다가 어떤 신부님이 유학 나오기 전에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나라 언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와 사람과 말을 사랑해야 해!”
좀 생뚱맞은 말이었지만 그제야 제가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오로지 공부를 위해서만 언어공부를 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제가 좋아하는 ‘성경’과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이탈리아어로 읽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이탈리아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언어습득도 매우 빨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말귀는 사랑해야 생긴다’는 것입니다. 달래라는 처녀는 임금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말귀를 알아들은 것입니다. 사랑해야 말귀를 알아듣게 되는 것이지, 말귀를 알아듣고 사랑하려면 평생 말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지, 이해하면 사랑하겠다는 식의 마음으로는 평생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열매를 주시고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성령강림 때 제자들이 듣는 사람들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 수준에 자신들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 언어가 갈라져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갈라지는 이유는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물고기에게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물고기에게 말하니 물고기들은 잘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보다 물고기들이 더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게 되는 이유는 자아가 커져서 자기 생각만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말귀는 자기를 버리고 어린이처럼 순결하게 된 이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절대 우리 힘으로 맺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죽이고 성령으로 가득 찰 때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게 보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의 말을 이해할 들을 귀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들을 귀를 생기게 해 주시고 그로써 모든 피조물과 소통할 준비가 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소통을 위해 말귀를 가지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광고: 이번 주도 토요일 저녁 7시, 주일 오전 8시, 밤 10시에 제가 출연하는 오다주가 평화방송에서 방영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령 충만 은총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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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부활 시기가 마무리되는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은 오늘도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
제1독서: 사도 2,1-11: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화는 구약의 시나이 계약(탈출 19,16-20; 신명 5,4-5)과성령의 창조적 능력으로 모든 민족이(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등)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이루는 거대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접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처럼 흔적을 남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귀먹은 이들의 꽉 막힌 귀까지도 뚫어주신다. 루카는 성령강림을 시나이 당신 백성의 ‘새로운’ 계약의 공적인 ‘시작’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율법’이 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그것을 판단하여 실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형태도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오순절과의 근본적인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성령”(갈라 4,6)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당신 자신으로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을 부르셔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순례자는 모든 민족의 대표자로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의 기적도 모든 사람이 단일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온 세상 곳곳에 사는 우리가 같은 계시 진리를 믿고 있고, 또한 “하느님의 위업”(11절)을 기념하여 거행하고 있는 오늘도 그 ‘여러 가지 언어의 기적’은 계속 실현되고 있다.
제2독서: 1코린 12,3b-7.12-13: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께서는 공동체에 주어진 카리스마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모든 은총의 선물들이 단일한 성령에게서 온다고 강조한다(4-7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잘 사용하여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하나’인 것이다. 즉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2절). 그러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특별함’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계발이 철저히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다양성’은 ‘전체’ 또는 ‘공동체’를 향하지 않을 때 조직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다양성으로서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 때 전체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구성원들이 신앙과 사랑과 활동을 통하여 서로 일치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즉 오순절 날 구원의 메시지를 여러 나라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와 문화와 종족과 심지어 종교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 다 같이 ‘하느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신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은총의 선물에 들어있는 선물의 특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3.13절 참조).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예수께서는 부활 축일 저녁에 성령의 선물을 숨을 내쉬시며 주셨다.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의 선물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바로 죄가 신자들의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신자들의 공동체란 본질적으로 사랑과 은총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형제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가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령 안에서 신앙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그분 안에 생기를 되찾고, 악과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나약해지는 이 세상에도 ‘생기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라고 표현한다. 관계라고 한다면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삼위일체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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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계속해서 일깨우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용서’의 삶으로 우리 신앙인을 초대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서로의 다름에 적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 위로 내려오실 때, 사도들의 말씀을 저마다 자기 고장 말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도 2장 참조). 하나이되 서로의 다름이 존중받는 곳을성령께서는 즐겨 함께하십니다. 단절과 반목의 자리, 굳이 다름을 같음으로 여겨야만 하는 곳에서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성령을 받아 누리는 이들은 서로의 다름은 다름으로 놓아둔 채, 서로의 고유성을 감상하고 그 고유성을 찬미하는 데 열심입니다.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존중받고 찬미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 성령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성령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늘 새로운 다름을 향한 설레는 탐험의 여정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을 느끼고 체험하며 다채로운 세상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일입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 누군가에게는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온 세상을 껴안는 벅찬 감동의 시간을 기념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 삶에 함께해 주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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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성령을 받은 뒤에는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사도 2장) 그런데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성령 덕분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숨어 있었던 방에서 나가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용기를 내려고 노력한 것은 제자들 자신들이 한 일이고, 성령께서는 그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다면, 또는 믿었더라도 용기를 내지 않고 계속 무서워하면서 숨어 있었다면,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복음을 선포했고(사도 2,4),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들었습니다.(사도 2,6) 우리는 그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제자들이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잘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외국어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외국어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제자들에게 내렸지만 그 은사의 혜택은 ‘듣는 사람들’이 누렸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날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은,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은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날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삼천 명 가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 2,41), 믿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의 혜택은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내렸지만,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갖게 되고,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과 “성령을 받아라.”라는 말씀과 ‘용서의 권한’에 관한 말씀은 모두 하나로 이어진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려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또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에 관한 일을 임무로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보면, ‘용서의 권한’에 관한 말씀이 뭔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라는 말은,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이라는 뜻입니다. “선포되어야 한다.”는 “선포하여라.”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말씀에서 ‘이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키고, ‘증인이다.’는 “증인이 되어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를 보면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8) 루카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의 말에 들어 있는 ‘용서’ 라는 말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얻게 되는 ‘구원’을 뜻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말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충실하게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고”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복음 선포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권한’보다는 ‘임무’에 관한 말씀이고, 성령을 주신 것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교회가) ‘구원의 복음’을(용서를) 선포하거나 선포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권한이든지 임무든지 간에 항상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교회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 책임은 제자들에게(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주신 것과 오순절 날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였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복음 선포’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코린토 1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도 단순히 어떤 개인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 활동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도와주기 위한 은사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례성사 때 성령을 받고, 견진성사 때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임무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성령을 받고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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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를 가는 길이 어수선해졌습니다. 노후한 가스관 교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땅을 파고, 관을 묻고, 포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모든 작업은 다양한 장비를 갖춘 포클레인이 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몇 달은 걸릴 작업이 며칠이면 끝나는 걸 봅니다. 새삼 우리의 삶에 기계와 기술이 깊숙이 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원하는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물건도 인터넷 쇼핑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전제품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되었지만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볼 수 있었고,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준 사건들이 있습니다.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들입니다. 그 사건들이 오늘 우리 문명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는 태양계의 작은 행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속한 태양계는 은하계의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수학과 과학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석탄, 석유, 전기는 새로운 에너지로 변환되면서 현대문명이 열렸습니다.
두 번째는 ‘창조에서 진화’로의 변화입니다. 고고학과 생물학은 진화의 고리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시작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45억년 지구의 역사에 5번의 큰 멸종이 있었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할 때 12월 31일 11시 59분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진화는 창조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는 창조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인간은 만물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되었으니 회개하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무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새로운 빛을 밝히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새로운 희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슬픔과 고통 속에 흘리는 눈물을 위로와 격려로 닦아 주는 곳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숨어있던 다락방은 결코 갈릴래아가 될 수 없습니다. 또다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거친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은사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구체적으로 7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우리가 받아들일 때,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따뜻함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래 풍성하게 열립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령의 은사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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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엄마가 된다는 것>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에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엄마가 된다는 것>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도 하지 않은 제가 엄마가 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엄마가 되라고 하시니, 엄마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몇 번씩 결심을 해도 과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두려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주님, 당신께서 몸소 제가 엄마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기꺼이 엄마가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됩니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온 정성을 다해 돌봄으로써 엄마가 되어갑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생명을 낳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생명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아니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엄마가 되겠지만,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비로소 엄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된 순간부터 엄마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생명을 낳는 하나의 결정적이고 거룩한 사건의 종료가 아니라, 지상의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을 가꾸고 돌보는 창조의 길고 긴 여정입니다.
따라서 “엄마가 된다.”는 표현보다 “엄마가 되어간다.”는 표현이 “엄마”에게 더욱 어울리는 표현일지 모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는 출산의 고통을 겪어내야만 하겠지만 말입니다. 엄마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축하와 축복에서 생명을 낳은 신비의 주인공으로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젖고, 자신을 통해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영광스러운 끝이 아니라 고난의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엄마가 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를 낳은 엄마가 아이를 위해 자신을 죽임으로써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가 기쁘면 하늘을 날 듯 기뻐하면서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가 아프면 아이보다 열 배 백 배 아파하면서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자신은 서서히 쪼그라들면서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를 있게 하려고 자신은 기꺼이 사라짐으로써 엄마가 되어갑니다. 아이의 모든 것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품음으로써 엄마가 되어갑니다. 이처럼 엄마가 되어가는 엄마는 사랑하기에 그저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는 하느님을 참으로 닮았습니다. 엄마가 되어가는 엄마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성사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응답은 주님의 뜻대로 아들을 낳겠다는 순명의 의지만이 아니라, 엄마가 되겠다는 다짐입니다. 마리아는 이 응답에 충실하였습니다. 당신이 낳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의 처참한 십자가 아래에 서기까지 마리아는 쉼 없이 주저함 없이 엄마가 되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한 어머니, 성모님이 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아들 예수를 낳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전히 함께 하심으로서 나날이 엄마가 되어 가신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를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다짐해 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특별히 작고 약하고 버려지고 가난한 이들의 엄마가 되어가자고.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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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태리로 유학을 가라는 발령을 받은 뒤 처음으로 이태리어를 접한 날을 기억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독일어를 공부한 저에게 이태리어는 너무나도 생소한 언어였습니다. 발음도 발음이거니와 같은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와 시제마다 형태가 변한다는 사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언어 체계였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저녁을 먹는다.' '당신이 저녁을 먹는다.' '그가 저녁을 먹는다.'라는 말을 할 때 우리나라 말은 모두 “먹는다”라는 동일한 동사를 쓰지만 이태리어 동사는 각각 다르게 변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제마다 또한 그 형태가 변화되니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나마 읽고 쓰는 건 생각할 시간이라도 있지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에 각기 다른 동사 변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서른이 넘어, 내가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의에 의해 배우게 된 낯선 언어.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어설프게 배우고 이태리에 나가서 생활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 심지어 이런 수준으로 나가 석사학위 박사학위를 받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온통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어찌됐건 교구에서 명하였으니 유학을 나가긴 나가는데 그에 따를 고통스러운 시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태리에 가보니 한국에서 몇 개월 배운 이태리어는 약 일주일이 지나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말은 어찌나 빠르고 성격은 또 얼마나 급한지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어학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한국 신부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성령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사도들은 오순절을 맞이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성령이 내려앉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 개별적으로 선교를 하게 되는, 즉 다양한 지역에서 교회가 설립되는 시작점입니다. 이 언어의 능력으로 제자들은 다른 나라에 가서 선교를 하게 되고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니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약속하신 ‘진리의 영’이 마침내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태리로 왔는데 '주님께서 하실 수만 있다면 나에게도 이태리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성령 쯤은 보내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5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즉, 정확히 작년 이맘 때 즈음 저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유학 생활을 마무리 한 채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이 흐른 지금, 지난 유학생활을 돌이켜 보면 ‘이태리에서 참 많이 힘들었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언어로 공부를 하느라 난감했던 시간,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군대를 다시 가면 다시 갔지 다시는 유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향했던 여러 가지 도움의 손길도 떠오릅니다. 낯선 언어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들, 제 말을 경청해주시며 격려해주시던 교수님들, 저의 강론과 과제를 한 땀 한 땀 매만져주시던 할머니 수녀님들, 함께 공부하며 서로 힘을 냈던 외국인 친구들, 많은 기도로 지원해주신 신자분들, 없는 시간을 쪼개 언제나 꼼꼼이 저의 논문을 봐주신 지도 교수님들을 상기해 보면 그들의 도움 없이 과연 내가 건강히 비교적 짧은 시간에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동료 사제들과 우스갯소리로 나누었던 말, 즉 예수님께서 고생하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실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실제로 제 주변에는 수많은 성령의 은총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의 기도와 주변의 배려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지혜>의 은총이 있었고 공부를 통해 신앙의 진리를 깨닫는 <통찰>의 은총이 있었으며 유학 생활의 힘든 순간에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게되는 <식견>의 은총이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노력을 통해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용기>의 은총이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은총 또한 있었으며 외국인들을 형제자매로 대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공경>의 은총을 배웠고 이를 통해 성숙한 사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경외>의 은총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시어 순간순간 지치고 힘든 시간마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이 성령의 일곱 가지 은총을 기념하는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일상 안에서 우리는 때로 기적을 꿈꾸고 주님의 현존을 원합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움직임으로 인해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고 주님의 실재를 의심하거나 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총이란 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이야기 하듯, 주변 이웃들의 은사와 직분을 통해 성령의 은총들이 모이고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오늘 미사 후에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지 뽑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은사가 아닌,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입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담대히 이를 실천해 나갈 것을 오늘 미사 중에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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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경훈모 알렉시오 신부님]
<내 사랑의 호흡, 성령님!>
오순절, 성령강림 날은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교회의 주인인 교우님들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늘은 생명과 사랑의 가치를 새롭게 묵상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태초에 천지 창조 때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 태초와 영원 사이에서 우리를 터치하시는 사랑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끼셨던 인간들이 사랑을 훼손시키자, '더 사랑'을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구원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강생과 십자가, 부활과 성체 안에서 사랑과 구원이 하나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성령의 힘이', '성령으로 가득 차' 성경의 이런 표현들이 이를 강조합니다. 그러니 오직 성령께 의탁했던 사도들이 증언하듯, 강생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도, 교회의 시작인 오순절과 성체성사도 성령의 힘으로 일어났고, 지금도 계속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그 성령의 중재로 인한 사랑과 구원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시작된 우리의 인생이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 그 사랑의 힘으로 걷는 참 행복의 길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이 길에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께서 동행하십니다. 불신과 불안이 아닌, 사랑을 선택하도록 지혜로 돕는 분이 협조자 성령이십니다. 서로의 사랑 속에서 이미 현존하시어, 그 사랑의 상처와 아픔도 어루만져 주시는 위로자도 성령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향해 가는 사랑의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악과 방해물로부터 지켜주시는 보호자, 또한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과 나, 너와 나, 우리 사이에 보호와 위로와 협조! 우리들의 그 모든 삶 속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랑의 호흡이 곧 성령의 활동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누구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계획을 알아차리고, 믿고 의탁하는 날이 바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육은 늘 헛된 욕망을 쫓지만, 성령께서는 새 삶을 주십니다. 우리 삶을 거짓 자아나 육에서 영으로, 참 생명의 길로 바꾸어 주십니다. 부활 시기를 마감하는 오늘, 사도들처럼 성령께 내 모든 여정을 맡기며, 다시 태어나는 기쁨이 모두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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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성령의 사람이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간 세상에 머무르시며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고, 약속의 날에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 1,4-5)
제자들은 분부대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직 기도에 힘썼고, 그 열흘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그곳에 불처럼 강림하셨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령을 통해 이 땅에 태동한 날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을 건네주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자고 듣고 살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대한 확신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랬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일에 대해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다.(사도 2장) 이렇게 제자들의 역동적인 변화는 바로 성령 강림 때문이라고 성경은 전한다.
오늘 독서(사도 2,1-11)에 보면 잘 배우지도 못한 제자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 말을 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
베드로 사도는 더 나아가 감동적인 대중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른 곳에서는 장정만도 5000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다.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 끝났다는 두려움으로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문을 박차고 나와 담대한 설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바로 오늘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모습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해도 생활에 기쁨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할 용기와 열심히 봉사하려는 열의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때가 많다.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 선포의 사도로 변화된 제자들을 보며 우리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성령은 나이나 성별, 학력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성령의 오심을 열망하는 누구에게나 강림하신다.
우리도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 19,2)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참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믿음 생활로 사무치는 기쁨과 평화를 누린 적이 없다면 아직 성령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성령은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시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살맛 나게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기를 시작하면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 불안할 것, 미진한 것이 하나도 없게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갈등과 혼란까지 극복해 나가도록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놓으시는 위로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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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정림 라우렌시오 신부님]
<희망과 생명의 삶>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숨을 불어 넣으시는 이 장면은 사람의 첫 창조를 떠오르게 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의 숨을 통해서 사람이 생명을 얻어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숨’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숨’을 불어 넣으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제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요즘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잘 견디고 버텼고, 또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일상으로의 복귀,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희망하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 결과 멈추고 중단되었던 것들이 다시금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나긴 고통과 죽음의 시기를 통과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우리 신앙인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련과 고통 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그 희망을 성취해내는 것.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길은 우리에게 은총이 되었고, 그분의 삶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 은총과 희망은 교회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은총과 희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자 청소년 주일입니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어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며,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과연 지금의 청소년들은 이 세상 안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희망을 꿈꾸고 있으며,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요?
교회의 신앙이 우리에게 희망이듯, 우리의 신앙이 청소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더 큰 희망과 새로운 생명으로 이끌어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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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서로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종이 되는 계급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보입니다. 다짜고짜 반말하고, 아주 작은 것에도 꼬투리를 잡기도 합니다. 소위 갑질한다고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그의 인격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한 가지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인격적으로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서 존경하게 됩니다. 가게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 결국 자기만 손해입니다. 좋은 말로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을 화부터 내는 사람은 서비스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가장 낮은 자가 되신 주님께도 이렇게 소리를 치며 자신의 화를 쏟아부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 앞에 갔을 때,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겨 있는데도 방안에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은 제자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자신들 역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또 죄지은 사람이 고래를 뻣뻣하게 들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을 배반했기에 그 사실 역시 두려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문이 잠겨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평화를 먼저 빌어 주십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이라는 증거를 위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지요. 주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평화로 거듭 위로하신 뒤에,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자기 뜻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파견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숨으로 죄를 용서하는 영적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우리는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파견하신 분의 뜻은 ‘용서’라는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남을 왕의 모습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하신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때, 성령의 선물은 우리 안에서 더욱더 풍성하게 열매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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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법을 지킬 것인가?>
어느 본당신부가 레지오 단원에 대해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레지오 교본에 맞지 않는다면서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싶다고 아쉬워합니다. 사실 제일 편한 것이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법이란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최소한의 사회규범이라고 합니다. 최소한의 사회규범이기에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또 모든 이가 함께 지켜나갈 때 더욱더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법, 즉 사랑의 계명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마음의 상태까지 사랑으로 기울어져 있어야 하기에 지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키기 쉬운 작은 법인 규칙만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킵니다.
“나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법과 규칙을 뛰어넘는 주님의 법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법에 기초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더욱 주님과 가까운 관계,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삶을 우리 모두 누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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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Veni Sancte Spiritus)!>
-성령 예찬-
행복하십니까?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만나는 분마다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은 것이 요즘의 제 마음입니다. 사랑하니까 행복합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행복입니다.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하느님 사랑의 선물인 행복입니다. 바로 이를 깨닫게 해주는 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는 분이 사랑의 성령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행복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늘 읽어도 참 감미로운 고백, 행복하게 하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사람 모두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바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복입니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듯이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의 행복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바랄 참 좋은 선물 하나는 무엇일까요?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 참 행복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모든 축일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령을 선물하심으로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마음만 활짝 열면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의 성령입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령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영육의 면역력을 높이는 데는 성령의 선물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기쁨 충만, 성령 충만한 행복한 이들에게는 코로나도 무력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전례는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로운지요!
“알렐루야, 주의 얼이 우주에 충만했으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으로 하루가 시작됬고 이어지는 찬미가도 참 감미로웠습니다.
“맑은빛 밝은 빛이 옥좌서 내려 그불꽃 주님 제자 밝혀 주나니
마음에 가득차고 말솜씨 주어 화목해 말하도록 불러주시네.
위로자 성령이요 어서 오시어 우리의 혀와 마음 다스리소서
당신이 우리 함께 계셔 주시면 아픔도 해로움도 없으리이다”
참으로 성령 충만케 하는 아침 성무일도의 은혜였습니다. 방금 미사 전례 중 화답송 후렴은 물론 성령 부속가, 복음 환호송은 얼마나 아름답고 흥겹고 은혜로웠는지요.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어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화답송 후렴에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로 끝없이 이어지는 성령송가중 참 좋은 성령 선물의 나열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이어지는 복음 환호송은 얼마나 좋은지요!
성령은 불입니다. 늘 타오르게 하는 사랑의 불입니다. 성령은 물입니다. 늘 흐르는, 늘 샘솟는 생명의 물입니다. 성령은 꽃입니다. 늘 피는 사랑의 꽃입니다. 성령은 나무입니다. 늘 푸른 나무입니다. 참으로 성령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그러합니다. 성령의 은총과 열매는 또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성령의 7가지 은총입니다. 지혜, 통찰, 식견, 용기, 지식, 공경, 경외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참으로 이런 성령의 은총, 성령의 열매를 지닌 성령의 사람만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요 참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우리 모두가 궁극으로 소망해야 할 모습입니다. 바로 하느님 무상의 성령의 선물의 은혜입니다.
성령이 참으로 우리를 소통하게 합니다. 사랑의 소통이요 소통의 생명입니다. 불통이 만병의 근원입니다. 참으로 성령이, 사랑의 성령이 우리를 소통하게 합니다. 말많이 한다고 소통이 아니라 사랑의 성령이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 마음의 귀를 기울일 때 저절로 소통의 일치입니다.
보십시오. 사도행전 제1독서 오순절 날 성령이 내리니 세계 각지에서 모였던 이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들으니 완전 소통이 일치입니다. 바벨탑의 교만으로 인해 저마다의 말로 불통의 분열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 마침내 성령강림으로 소통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지요. 참으로 불통의 벽을 문으로 변화시키는 성령의 힘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두려움의 벽을 허물고 평화를 선물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결정적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참 좋은 선물이 기쁨과 평화요 용서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우리 모두 평화의 사도, 기쁨의 사도, 용서의 사도로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참으로 각자 받은 은사는 공동선에 쓰라고 주어진 성령의 선물이니 이를 깨달을 때 진정 겸손입니다. 자랑할 대상은 자기가 아니라 성령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일치를 이뤄주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명쾌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바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유일한 청원은 성령뿐입니다. 참으로 성령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마음 활짝 개방하고 갈망하는 모두에게 차별없이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늘 우리를 새롭게 하여 본래의 참 나를 살게 하는 사랑의 성령, 생명의 성령, 소통의 성령, 일치의 성령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인 성령입니다. 바로 이 성령이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합니다. 정화하고 성화하여 우리를 부단히 새롭게 함으로 날도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참 행복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령 송가 일부를 다시 나누며 강론을 마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로 바칠 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영원하신 행복의 빛 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굳은 마음 풀어주고 차디찬맘 데우시고 빗나간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
덕행공로 쌓게 하도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복락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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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숨 안에서>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 숨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 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 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 한 번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이하) 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 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역사하심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그야말로 오만가지 방법으로 알맞게 오십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환히 웃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 성령, 우리 생명의 의미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 우주는 온통 잠을 깨고 왕국을 낳는 산고로 신음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 강림의 축제가, 전례는 기념이자 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대주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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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령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평화"(요한 20,19.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기원하십니다. 스승을 잃고 두려움과 근심에 찬 시기를 지나고 있는 그들에게 평화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그분 현존 만큼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분위기입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심을 보여 주시려고 상처를 열어 보이십니다. 스승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형벌의 자국이지만 지금은 스승을 알아볼 단초인 셈이지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상처라는 걸림돌에 발목 잡힌 사람과, 상처라는 디딤돌을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 나뉠 겁니다. 지금의 예수님처럼, 상처는 "나"임을 증거하는 훈장이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마주섰을 때, 우리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느라 입은 상처를 보시고 주님은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상처는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로 새겨져 향기마저 풍길 겁니다. 상처는 성령의 은신처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지만 감행하십니다. 제자들의 인간적 수준과 상태를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예수님은 믿는 구석이 있으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변화시켜 주시고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파견은 성령을 받은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누구에겐가 파견됩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온라인상의 친구든, 아니면 우리 기도에 맡겨진 세상 저편의 누군가든 말입니다.
"숨을 불어넣으며"(요한 20,22)
우리는 창조의 첫 숨을 아버지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이 숨이 우리 영혼과 육신의 생명이 되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 모상성이 극대화되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교부들이 '신화(Deificatio)'라 일컫는 상태입니다.
"용서"(요한 20,23)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 콕 짚어 언급하신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그러셨을까요?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용서할 일이나 용서받을 일이 없는 사람도 드물 겁니다. 주님 앞에서 영혼을 살피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용서한, 혹은 용서하지 못한 사연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겁니다.
맨 힘으로는 어려운 게 용서지요. 여간 잘 하지 않고는, 열심히 애쓰다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되돌이표를 찍고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용서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성령의 숨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용서와 그렇지 않은 용서는 천양지차입니다. 용서는 성령의 증거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순간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사도 2,11)
인간의 오만이 쌓은 바벨탑의 몰락은 언어의 분열을 초래합니다(창세 11,1-9 참조). 의미를 담고 소통하는 언어의 전달 방식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문화, 습성 등등 모든 것이 갈라지지요. 그뿐입니까? 우리는 같은 언어,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공유한 이들 안에서도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한계를 자주 느끼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신 영혼은 나와 다른 문화, 출신, 인종, 성별, 공통분모 없는 삶의 기반을 지닌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알아듣는 능력 또한 받게 됩니다. 지성으로 이해한다기보다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또 성령 안에서 나누는 우리의 말을 공통분모 없는 그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말이 언어로 전달되는 차원을 넘어 사랑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말하는 주체는 사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오신 목적을 정확히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와 직분과 활동, 능력과 열매는 공동선을 위함입니다. 혼자만 간직하고 즐기라고 주시지 않으셨다는 뜻이지요. 주인에게서 받은 한 탈렌트를 땅 속에 묻었다가 혼쭐이 난 종의 이야기처럼(마태 25,24-30 참조), 자칫 성령의 은사를 외면하거나 사장시키는 잘못은 은총의 착복과 배임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올해 성령 강림 대축일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 즈음에 시작된 공동체 미사 중단이 부활 시기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풀리다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요즘 다시 긴장 상태로 이어지고 있지요. 우리의 얕은 지력이나 좁은 시각으로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온 세상을 휩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더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성령께 의탁합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모여 세상이 외치는 절규의 외마디를 알아듣는 귀가 되기를, 세상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을 닦는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공동선을 위해 모두에게 유익이 되고 힘이 되는 백배의 열매로 맺히기를 축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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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곧 ‘놀라운 모습’으로 내려오십니다. <복음>에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의 모양으로, 곧 ‘고요한 모습’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 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입니다. 곧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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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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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vHs0hEi1Y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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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걸어갈 힘을
새롭게
쥐는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사랑보다
더 깊은 성령의
신비입니다.
성령의 날들을
우리는 기쁘게
살아가고 기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관계는
성령의 관계입니다.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로
나가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시작도
성령이었습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성령의 힘임을
다시금 뜨겁게
고백합니다.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성령의
힘이십니다.
가장 아프고
힘든 곳에서도
성령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성령에 힘입어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잠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시는
성령을
받으십시오.
성령을 받아야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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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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