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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싶다(3)
이제부터라도 순종하며 따르리라
2024년 11월 24일 / 눅 5:1-11
눅 5:1-11 / 하루는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많은 군중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다. 2) 호숫가에서 작은 배 두 척을 대어 놓고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그 배들 중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 3) 그리고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떼어놓게 하신 후에 앉으셔서 군중들을 가르치셨다. 4) 말씀을 다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제 깊은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라. 그러면 많은 고기가 잡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시몬이 대답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시 해보겠습니다.’ 6) 시몬이 그대로 하였더니 그물이 가득차서 찢어질 지경이었다. 7)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하였다. 배가 가라 앉을 정도로 곧 두 배에 고기가 가득 찼다. 8)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오 주님,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주님을 모시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죄인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이 잡힌 고기를 보고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료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 11) 그들은 곧 배를 호숫가에 댄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우리는 지금 어느 곳에 와 있는지 나름대로 찾아보아서 더욱 성장하여서 성숙해지기를...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되새기면서 성경보다 찬송 몇 곡을 묵상하며 부르고 싶다.
♬ 597장 이전에 주님은 내가 몰라
❶ 이전에 주님은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지극한 그 은혜 내게 넘쳐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 ❷ 나 받은 달란트 얼마런가 나 힘써 그것을 남기어서 갑절로 주님께 바치오면 충성된 종이라 상주시리 ❸ 천하고 무능한 나에게도 귀중한 직분을 맡기셨다 그 은혜 고맙고 고마워라 이 생명 바쳐서 충성하리 ❹ 나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뵈어도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 세상 부귀 안일함과
❶ 세상 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❷ 세상 일에 얽매어서 세상 일만 하다가 주님 나를 부르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권세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따라 가오리다. ❸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주님께서 보시고 훗날에 나를 보며 무어라 하실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영광 버리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만 따라 가오리다.
♬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❶ 탕자처럼 방황 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던 부더런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이제 갑니다 날 받아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❷ 불순종한 요나와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따뜻한 주님의 손길이 내 손을 잡으셨네. 오! 주님 나이제 갑니다 날받아 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생명 바치리다. ❸ 음탕한 저 고멜과 같이도 방황하던 나에게 너그런 주님의 용서가 내 맘을 녹이셨네. 오! 주님 나이제 갑니다 날받아 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생명 바치리다.
♬ 280장 천부여 의지없어서
❶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 하시면 나 어디가리까
후렴 :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아멘
❷ 전부터 계시 주께서 영 죽을 죄인을 보혈로 구해주시니 그 사랑 한 없네
❸ 나 예수 의지함으로 큰 권능 받아서 주님께 구한 모든 것 늘 얻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과정들을 보면서
4복음서에는 5차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A. D. 27년 2월경 안드레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제자(아마 사도 요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가 부름을 받은 사건이었다(요 1:35-51). 이때 그들은 선생인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좇게 되었다. 그들은 그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안드레는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했다. 이때 요한도 형 야고보를 예수님께 데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은 빌립에게 전도하셨으며, 빌립은 다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이때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도 여행에 가끔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아직 자기 직업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일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첫 번째 부르심이 있은 지 약 1년 뒤(마 4:18-22, 막 1:16-20) 요 1:35-41에 언급된 4제자(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는 더욱더 확고히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 부르심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일어났다. 이 부르심의 결과로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안드레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각각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예수님은 이때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직업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두 번째 부르심이 있은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눅 5:1-11) 네 제자가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예수님은 이때 베드로가 이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다. 이적을 경험한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그들은 이 부르심 이후부터 그들의 직업과 소유, 가족을 모두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좇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어부로 사는 일을 떠나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어부가 되었다.
4.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었다(마 9:9-13, 막 2:13-17, 눅 5:27-32). 이 부르심은 앞에 언급된 네 제자를 부르신 직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 역시 그의 직업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좇았다.
5. 12제자 전체를 사도로 부르신 사건이었다(마 10:1-4, 막 3:13-19, 눅 6:12-16). 예수님은 이때 많은 사람 중에서 12명을 제자로 선택하여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복음의 동역자로 삼기 위해 자기 곁에 두고 양육하셨다.
2.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는가?
1. 예수님의 12제자 중 최대 7명까지는 부름받기 전의 직업을 추정할 수 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처음 제자 중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어부였다(막 1:16-20, 요 21:2). 도마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로 같이 갔다는 점에서(?) 어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빌립도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요 1:43-44)이라는 점과 벳새다가 ‘어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의 어촌이라는 점에서 어부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에 도마와 빌립이 어부였다면 예수님의 12제자 중 절반이 어부였던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고기를 낚던’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꾸어 놓으셨다(마 4:19, 막 1:17).
2. 한편 ‘레위’라고 불리기도 했던 마태는 세리였다(마 9:9, 10:3). 그는 세관에 앉아있을 때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 바로 앞서 언급한 어부들과 마태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삶의 현장에서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종(또는 전문 사역자)으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사회생활을 중단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일의 순서가 바르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나머지 다섯 제자의 직업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알아낼 수 없다. 그런데 그중 흥미로운 사람이 하나 있다. 그는 시몬인데 성경은 그를 가리켜 ‘가나안 사람’(마 10:4, 막 3:17)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단어는 흔히 생각하는 대로 ‘가나나’나 ‘가나안’과 연관이 있지 않고, 아람어 ‘카난’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말을 누가는 ‘셀롯’이라는 헬라어로 번역해서 시몬에게 붙이고 있다(눅 6:15, 행 1:13). 마태, 마가가 사용한 ‘가나나’와 누가가 사용한 ‘셀롯’은 같은 의미로서 모두 ‘열심당원’을 말한다. 예수님 시대의 세속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열심당원’들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종교, 민족적 열심과 무력으로 물리치고 야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 이런 점에서 ‘열심당원’들은 오늘날 이슬람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카에다’나 ‘탈레반’과 같은 과격한 민족, 종교 무장 세력을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에게 ‘부역’했던 세리를 부르신 동시에, 로마제국과 그들에게 협력한 마태와 같은 유대인들을 원수로 생각해서 무장투쟁을 벌였던 혁명가를 제자로 삼으신 것이 된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는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님의 자비와 사랑의 품속에서는 좌우의 구분이 눈 녹듯이 녹아버린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4. 나머지 제자 중에 유다가 있었다. 그중의 하나를 누가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소개하고 있고(눅 6:16, 행 1:13),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부르고 있다(마 10:3). 이 유다는 성경에 활동상이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요 14:22 참조). 다른 유다는 4복음서 모두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고 소개하고 있다(마 10:4, 막 3:19, 눅 6:16, 요 6:71). 여기에서 ‘가룟’은 그의 출신지인 ‘케리요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는 ‘돈 궤를 맡은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요 13:29). 요즘의 ‘회계’인 셈이다. 그는 사단에게 사로잡혀 스승을 배반한 자로서(눅 22:3) 예수님으로부터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말씀까지 들었다(막 14:21).
5. 예수님의 12제자 중 나머지 두 명, 곧 바돌로매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서는 이름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 중 바돌로매를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가 강력하지 않은 실정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12제자가 되었다. 이들 중 과반수가 어부였고, 나머지는 세리, 혁명가, 그리고 직업조차 밝혀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의 학식이나 심지어는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 일곱 지도자의 선발 조건이었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행 6:3)에게도 훨씬 미달하는 그야말로 ‘장삼이사(張三李四)’였다. 얼핏 보더라도 이미 닦여지고,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복음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놀라운 기적의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늘 깨닫지 못하고, 의심하고, 서로 다투는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왜 이 세상의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을 놔두시고, 이들과 같이 세상적으로 뒤에 처진 사람들을 택하셨을까? 예수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식, 지혜,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써 감당해 나가는 것임을 보여주시고자 문제도 있고, 소외되고, 부족한 사람들을 고치시고, 싸매시고, 훈련하셔서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는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만일 이들이 교만하다면 그것은 진짜 교만의 대명사요 주제 파악조차 못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였다. 자타가 인정하는 엘리트인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더니 바울이라는 사도가 되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고전 1:26-3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여러분 가운데 과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습니까? 부자가 있습니까? 2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29)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0)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는 일을 그리스도께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바르고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를 자유롭게 살게 해주시려고 친히 그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31) 그러므로 성경에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누가 감히 잘났다고 고개를 들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주는 분이셨다(고후 4:7).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물론 우리도 예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고 고백해야 한다.
직업과 자라온 배경, 심지어 정치적인 성향은 서로 달랐지만, 예수님의 12제자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실 때,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제자의 길의 첫 번째 사항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르는 것’이다(막 1:16, 18, 눅 5:11, 14:33). 신약성경에서 ‘따르다’(아코루떼오)는 동사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 중 기본이 되는 사항이다.
참 제자가 되려면 세상의 재물과 인정까지 뒤로 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즉각 따라야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준비되었는지? 부족한 것이 많겠지만 이제라도 이번 성탄절까지 최선을 다해 모자란 점들을 찾아 보완하도록 하자.
♬ 324장 예수 나를 오라 하네.
❶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❷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 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❸ 심판 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 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❹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보시고 크신 영광 보여 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3.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과 잘못된 것은 곧 내가 보충하며 고쳐야 하는 과제였다.
4복음서 그중에서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을 안타까우리만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다 보면 제자들의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이 드러나리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들의 모습은 이런 상식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실망스럽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주옥같은 말씀과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직접 듣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을까? 우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제자들의 간 길에 어디쯤 와 있을까?
1. 복음서에 기록된 12제자들의 부족한 모습
4복음서가 기록될 즈음이면 예수님의 제자 중 상당수가 초대교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 모습이 복음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복음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에 대한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 몇 가지만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세 차례에 걸친 선상(船上) 장면/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호수)를 건너가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마다 제자들은 두려워 떨거나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아서 예수님께 책망받는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막 4:40). 밤 4경(새벽 3-6시경)에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위험에 빠졌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하시려고 바다 위로 걸어오셨는데,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여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휩싸였다(막 6:45-52). 그 후 예수님께서 4천 명을 먹이신 후 배를 타고 가시면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18, 21).
성서학자들(에른스트 베스트, 프랭크 메이테라 등)은 복음서에 나오는 ‘배(船)’가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데, 세 차례에 걸친 선상(船上) 장면에서 제자들이 이처럼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면 제자들은 아직 교회를 이끌어갈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사도로 우뚝 설 수 있었다(요 2:22, 행 4:13, 14).
2.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수난 예언 직후 제자들의 반응/ 4복음서는 복음서 간의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전반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후반부는 고난과 십자가를 서술하였다.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정점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자리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의 결과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자신이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를 예고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이 같은 수난 예고가 세 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제자들은 그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 예고 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막 8:32). 여기에 사용된 ‘항변하다’는 동사의 원어 ‘에피티마오’는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꾸짖다’와 같은 단어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꾸짖은 것이 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며’(에피티마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수난 예고 때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막 9:32). 그리고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며 다툼을 벌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세 번째 예고 때는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요즘 말로 청탁을 하고, 나머지 제자들은 이 두 형제에게 화를 냈다(막 10:35-41). 요컨대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십자가에 집중하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세상 부귀와 권력을 차지하는 데만 정신이 쏠려있었다.
3. 시간이 갈수록 실망스러운 예수님과 12제자들의 관계/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이 같은 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선되기커녕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는 데 있다. 성서학자인 떼오도르 위든은 주님과 제자들의 관계가 3단계에 걸쳐 나빠지는 기현상(奇現象)을 발견했다.
첫 단계는 무지(無知)의 단계이다(막 1:16-8:26). 주님께서 능력 있는 말씀과 기적을 행하시는 현장을 함께 한 제자들이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 번째 단계는 오해(誤解)의 단계이다(막 8:27-1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메시아 /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실 분으로 오해했다.
세 번째 단계는 배반(背叛)의 단계(?)이다(막 14:10-16장). 12제자 중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배반했고(마 26:14-16),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으며(막 14:66-72), 나머지 열 제자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막 14:50).
2. 성경은 왜 12제자들의 부족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가?
12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많은 신학자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복음서는 왜 제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가장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복음서에 기록함으로써 이 같은 결과가 생겼다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사건 이전에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 이를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부활과 성령체험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의 본질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렌즈의 역할을 한다.
3. 목회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기둥이 된 사도들도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기 전에는 늘 부족하고 환난과 핍박이 닥칠 때 배반, 부인, 도망했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능력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크게 쓰셨다는 메시지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장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한다.
4. 우리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역할을 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3. 잠시 쓰러졌지만 즉시 되돌아온 제자들
12제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잘못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예수님을 배반하거나(가룟 유다), 부인하거나(베드로), 또는 도망했다(나머지 열 제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와 좌절의 현장에 그대로 주저앉아있지 않고 눈물로 회개하며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1.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께서는 ‘새 언약’의 의미가 있는 성찬식을 제정하셨다(막 14:17-25).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고하셨다(막 14:27-28).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또한 내다보셨기에 그들과 이처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처럼(막 14:27)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내 통회자복하며 되돌아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심으로써 그들을 회복시켜 주시고,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명하시고(눅 24:4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까지 주셨다(마 28:18-20). 그들이 성령 충만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행 1:8).
결 론
지금까지 제자들이 늘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직접 부르셔서 제자가 되었고, 능력을 주셨을 때 사역을 잘 감당해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더라도 이내 회개하고 예수님 품에 돌아와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벧전 2:21) 환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이다.
행 1:8 /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롬 11:29 /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은 결코 철회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약속을 어기시지 않습니다).
사 60:1-3 /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예루살렘아, 이제 일어나 환한 얼굴로 기뻐하며 네 얼굴에서 광채가 빛나게 살아라! 내가 네게로 다시 왔으니 네 빛은 바로 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내 영광이 너를 환하게 비추어 태양과 같이 밝을 것이다. 2) 온 세상이 깜깜하여 세계 만민들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지만 너 시온산 꼭대기 위에서는 나 여호와의 빛이 환하게 밝아 오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게서도 나의 영광이 환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3) 나의 영광이 네게서 밝게 빛날 때 세계 만민들이 그 빛을 보고 네게로 오며 세계의 왕들이 네게서 반사되는 빛을 보고 찾아와서 시온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