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침(李龜琛)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74ADC0CE68B1514X0
생년 1514(중종 9)
졸년 1592(선조 25)
시대 조선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무신
[상세내용]
이귀침(李龜琛)
1514년(중종 9)(주1)~1592년(선조 25)(주2).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증조부는 풍산부정(豊山副正) 이외(李偎)이고, 조부는 심곡도정(深谷都正) 이숙인(李淑仁)이며, 부친은 군산군(群山君) 이금손(李金孫)이다. 외조부는 김맹진(金孟珍)이고, 처부는 제주고씨(濟州高氏) 고자겸(高自謙)이다(주3).
관직은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웅천현감(熊川縣監)‧육조낭청(六曹郞廳)‧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평안도병마절도(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536년(중종 31) 임금으로부터 진법(陣法)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1543년(중종 38) 도총부도사 재임 시절, 시관(試官)으로 사사로이 청탁을 받고 응시자의 편의를 봐주었다가 체직을 당한 시점에서 동서(同壻) 관계인 정랑(正郞) 이영성(李永成)이 죽었는데 문상하지 않았고, 입관(入棺) 날에는 잔치까지 벌인 혐의로 파직되었다.
1559년(명종 14)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재임 시절 방비를 잘했다는 이유로 향표리(鄕表裏)를 받았다.
1561년(명종 16) 동지사(冬至使)로 북경(北京)에 사행을 다녀온 가자(加資)되었다.
1563년(명종 18) 평안도병마절도 재임 시절 변경 지역의 방비에 책임을 다하지 않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72년(선조 5)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재임용되었으나, 1573년(선조 6) 교만하고 잔학하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슬하에 아들 내금위(內禁衛) 이종인(李宗仁)을 두었다.
[주 1] 생년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6, [定宗大王宗親錄](58a쪽)을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 졸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36]) 권5, [定宗大王內外子孫錄](31a쪽)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가계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36]) 권5, [定宗大王內外子孫錄](31a쪽)을 참고하여 가계를 추가.
이종인(李宗仁)
[무과] 선조(宣祖) 13년(1580) 경진(庚辰) 별시(別試) 병과(丙科) 25위(33/44)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774C885C778B1556X0
자(字) 백춘(伯春)
생년 병진(丙辰)(주1) 1556년 (명종 11)
졸년 계사(癸巳)【補】(주2) 1593년 (선조 26)
향년 38세
합격연령 25세
본인본관 전주(全州)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이종인(李宗仁) 1556년(명종 11) ∼ 1593년(선조 26)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 자는 인언(仁彦) . 병사를 역임한 이귀침(李龜琛) 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호협하여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하고,
[이력사항]
선발인원 44명 [甲1‧乙7‧丙36]
전력 내금위(內禁衛)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이귀침(李龜琛)
품계 : 가선대부(嘉善大夫)
관직 :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처부(妻父)]
성명 : 안광국(安光國)【補】(주3)
본관 : 순흥(順興)【補】
[주 1] 생년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6, [定宗大王宗親錄](58a쪽)에는 생년이 "정사(丁巳)"(1557)로 나옴.
[주 2] 졸년 :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1593) 6월 1일」 기사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3] 처부 : 『선원록(璿源錄)』(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1047]) 권6, [定宗大王宗親錄](58a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경진별시문무과방목(庚辰別試文武科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貴 388 1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