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익지도 않은 감이
땅에 떨어진다
떨어지면서 감은 겉껍질에 상처가 난다
깨어진 껍질에서 진물 같은 것이 나와서 제 상처를 감싼다
떨어져서도 보호해야 할 그 무엇이 그 안에 있었을까
떨어진 감은 겉에서부터 썩어갈 것 같은데
그 안에 모든 것이 썩어서 사라질 때까지
그 얇은 껍질이 감의 형상을 붙잡고 있다
조개가 빠져나간 조개껍데기가 그렇듯이
감을 감으로 불리우게 하는,
그 무엇을 그 무엇으로 불리우게 하는 것은
다 사라진 뒤에도
사라진 그것을 추억하는
그 얇은 껍질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껍질을 버린다는 것은,
껍질을 벗는다는 것은
추억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바람 속에 바스락 소리도 없이 무너져 가며
감의 기억을 붙잡고 있는 저 껍질을
비단조개의 껍데기를 오래 바라보듯
나 오래 바라보고 있다
- 복효근, <껍질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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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23일)을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 무렵에는 농촌의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동시에 의성은 한지형 마늘심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때이지요. 예년 같았으면 교우들 논과 밭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족한 일손을 메워 주었을텐데 올해엔 지우 곁에서 꼼짝없이 머물러 있어 마음만 애태우고 있네요. 사람을 돌보는 일만큼 고귀한 일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분주히 일하고 있는 교우들을 생각하면 왠지 미안한 마음입니다.
지난 속회에는 오랜만에 장로님댁에서 모였습니다. 장로님, 권사님의 환대 속에 속회예배를 드리고 권사님께서 준비하신 삶은 옥수수와 달달한 홍시, 카라멜 팝콘과 단호박 쥬스를 나누며 하하호호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함께 나눈 음식 중 달달한 홍시의 맛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남겨둔 홍시 하나를 못 먹고 온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될 만큼 정말 끝내주는 맛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감에 대한 단상에 젖었습니다. 감이 그 깊은 단맛을 내기까지 견뎌온 시간이 있었겠지요. 열매의 형태가 생기고 푸릇한 알갱이가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태양을 쪼이며 서서히 익어가면서 처음 떫은 맛은 깊은 단맛으로 변해가지요. 맛이 충분히 들어 우리의 손에 쥐어질 땐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만큼 맛있는 홍시나 단감이 되어있지요. 생각만해도 행복해지는 느낌입니다.
감에 대한 단상에 젖어있다가 내친김에 감에 대한 시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만난 시가 복효근 시인의 <껍질을 위하여>입니다. 이 시를 만나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홍시의 껍질 속 과육의 단맛을 칭송하였을 뿐 그것을 감싸고 있던 껍질에 대한 고마움을 일절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떨어져 상처 난 감이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껍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껍질이 없다면 감은 그 형태는 온데간데 없고 볼품없이 뭉개져 버리겠지요. 감의 단맛을 맛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껍질을 벗겨내 버리는 우리들에게 시인은 ‘껍질을 버린다는 것은 추억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알맹이와 껍데기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 껍데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관습적인 관념을 전복시킵니다. 우린 너무도 쉽게 알맹이를 지켜내기 위한 껍질의 안간힘을 간과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