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 도미오와 아내 지요는 어느 날 아쓰타지구 초대 지구부장이던 야마우치 에쓰로에게서
아쓰타무라의 사명을 듣게 되었다. "아쓰타무라는 말이죠,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고향이랍니다. 야마모토 선생님도 청년시절에 도다 선생님과 함께 아쓰타무라에
오셔서 세계 광선유포를 결의하셨습니다. 이곳은 학회본부에서는 멀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만큼 스승과 유대가 깊은 곳은 없습니다. 아쓰타무라에서 활동에 힘쓰는 우리에게는
세계 어디보다도 빨리 광선유포의 모범이 되는 지역을 구축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아쓰타무라(자신의 소속 이름으로 바꿔도 좋겠습니다)에 살며 학회활동을 할 수 있다니
굉장한 일이 아닙니까!" 의의를 찾아내고 의의를 자각하는 일에서 가치 창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한 마음과 풍요로운 마음이 생긴다.
정열적으로 외치는 야마우치의 이야기에 이노 부부는 불탔다. 용감하게 홍교를 하러 뛰어
다녔다. 고뇌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들으면 눈보라도 무릅쓰고 달려가 불법대화를 거듭했다.
이 무렵 아쓰타무라에는 세이쿄신문이 오타루에서 우편으로 왔다. 그래서 아쓰타의 학회원은
발행일로부터 3, 4일 늦게 신문을 받아 보았다. 부부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세이쿄신문을 좀더 빨리 받아 볼 수 있을까. 동지는 모두 그것을 갈망하고 있어…….'
이노 부부는 '세이쿄 그래픽'을 보면서 입회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기관지와 잡지가 가지는
무게와 그 파급력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세이쿄신문을 자신들이 받아다가
배달원에게 전하는 중계 역할을 자진해서 맡고 나섰다. 1966년의 일이다. 이노는
전기제품 판매점을 경영하고 있어 업무로 사용하는 차를 가지고 있었다. 세이쿄신문을
받는 장소는 이시카리강 나루터 근처에 있었다. 부부는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차로 집을
나서서 신문을 받아 아쓰타무라로 운반했다. 겨울에는 다 운반하기까지 3시간 정도 걸렸다.
도미오와 지요는 곧 아쓰타총블록의 총블록장과 총블록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아쓰타총블록은 아쓰타무라뿐 아니라 인접한 하마마스무라도 포함한다. 그 무렵
아쓰타무라까지는 세이쿄신문 수송체제가 갖춰졌지만 하마마스무라는 여전히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부부는 '우리가 어떻게든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쓰타무라에 도착한
신문을 직접 하마마스무라로 운반하기로 했다. 아쓰타무라에서 하마마스무라 사이에는
급한 커브가 이어지는 좁은 산길이 있다. 급커브 바로 앞이 절벽인 곳도 있어 다 돌지 못하고
절벽으로 떨어지는 차가 있을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비나 눈 등으로 앞이 잘 안보이는 날에
이곳을 지나가기란 매우 힘들었다.
어느 해 11월, 이노 부부는 세이쿄신문을 차에 싣고 하마마스무라로 서둘러 갔다.
길은 산속 자갈길로 눈이 쌓여 바닥이 얼어 있었다. 절벽위 급커브로 접어들었다.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다 돌지 못할 것 같았다.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멈추지 않고 길바닥을 미끄러져 갔다. "위험해요!" 아내 지요가 소리쳤다.
절벽 건너편 산이 도미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틀렸다!' 그런 찰나에 차가 멈췄다.
차체 앞이 절벽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살았다! 어본존이 지켜주셨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듯했다.
이후 이곳을 지나는 것이 두려웠다. 커브에 접어들면 핸들을 잡은 손이 긴장해서 떨렸다.
그래도 세이쿄신문을 싣고 이 험한 길을 신중하게 달렸다.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광선유포는 추진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책임감이 용기가 되어 마음의 불안을 이겨냈다.
사람은 사명을 자각했을 때 자신의 벽을 부술 수 있다.
이노 부부가 자진해서 세이쿄신문을 운반해주었기 때문에 그날 안으로 아쓰타무라와
하마마스무라 동지의 손에 신문이 배달되었다. 마을의 동지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고 용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학회활동에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주목 받지 못하는
수수한 활동도 있다. 모두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고생스러운 일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싫어해 좀처럼 하려고 들지 않는 일도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며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창가(創價)의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신이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노고하며 조직을 지키고
있는지'를 가만히 통찰하며 간파했다. 조직을 한그루의 과수라고 한다면, 그의 시선은
꽃과 과실을 지탱하는 가지와 줄기 그리고 뿌리를 향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특히
땅에 묻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활동에 힘쓰고 동지를 지탱해주는
학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려고 했다.
간부는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이 되어 학회를 지키고 지탱하는지'를 간파해,
깊이 감사하고 최대로 상찬해야 한다. 그곳에 창가학회의 영원한 번영이 있다.
신이치는 이노 부부가 운영하는 찻집인 '아쓰타강'에서 지요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광선유포를 위해 고생한 일은 모두 자신의 복운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언젠가 그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감하게 불법을 위해, 벗을 위해
노고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커피 맛이 좋군요. 도다 선생님께도 대접해드리고
싶군요." 그리고 준비한 네모진 두꺼운 종이에 시를 적어 부부에게 증정했다.
"아쓰타강
향기로운
스승의 도읍"
아쓰타무라는 맑은 날씨가 계속 되었다. 10월 3일도 상쾌한 파란 하늘이었다.
이날은 도다강당에서 홋카이도 광포 공로자를 기리는 추선법요가 열렸다.
작고한 분의 명단에 올라온 152명은 모두 신이치에게 잊을 수 없는 공전(共戰)의 동지
들이었다. 근행의 중심자를 맡은 신이치는 고인의 명복과 유족의 번영을 정중히
기념했다. 법요가 열린 자리에서 고인에 대한 명예칭호 수여도 거행되었다. 그속에
'삿포로 여름 투쟁'이라고 불리는 1955년 8월, 삿포로에서 열린 하계지방지도가 계기가
되어 입회한 이시자키 요시하루의 이름도 있었다. 하계지방지도의 삿포로 파견대
책임자인 신이치는 이시자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남편인 이시자키 요시하루는
미입회였지만, 두달 전에 아내 세이코가 입회한 상태였다. 세이코는 '이번 지방지도를
통해 삿포로에 홍교의 큰 물결을 일으키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남편인 요시하루에게
"우리 집에서 학회 좌담회를 여니 당신 친구도 참석하도록 말해 봐주세요"하고 부탁했다.
요시하루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내에게서 "창가학회는 예전에는 '창가교육학회'라고
해서, 홋카이도 사범학교에서 공부한 교육자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이 초대
회장이에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그렇다면 동료들에게 참석하도록 청해보자'
고 생각하고 말을 건넸다. 그리고 교사 6명이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 참석간부는
도쿄의 지구부장과 남자부 간부였다. 좌담회에서는 남자부원과 부인부원이 체험담을
발표했다. 교사들은 코웃음을 치는 듯한 태도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유만으로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육자인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단정짓고 있었다. "모든 교육은 종교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결실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독일의 교육가 프뢰벨의 경구(警句)다.
선입견은 진실을 보는 눈을 가리고 만다.
질의응답에 들어가자 교사들이 "신심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하는데 학회원 중에
실업자나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는 등 반론하기 시작
했다. 참석간부인 지구부장이 "지금은 그렇다고 해도 신심을 지속하면 반드시 해결
됩니다" 하고 답변했다. 그러자 "그것은 핑계이지" "그럼 언제가 되면 해결되는가,
내일인가, 모레인가!" "결국 종교는 아편이라고 믿으면 순간적으로 도취될 뿐이지"
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 그들은 무엇을 말해도 진지하게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학회에 대한 편견이 있어, 어쨌든 말로 상대편을 꺾으려는 감정이 앞섰다.
지구부장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우물거리며 쩔쩔맸다. 이마에 땀이 배어났다.
함께 있던 남자부 간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청년이 나가자
한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은 도망쳐버리지 않았나.
우리에게 지는 것이 두려운것이겠지."
얼마 뒤, 청년이 다른 좌담회에 참석한 신이치를 데리고 돌아왔다.
신이치가 어서를 손에 들고 나타나 불단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제목을 삼창했다.
엄숙한 분위기가 회장(會場)을 감쌌다. 그리고 신이치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는 창가학회 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라고 합니다. 이번에 도쿄 본부에서
파견되어 삿포로에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교사들은 신이치에게 감도는 기백에 압도되었는지 가냘픈 목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그 중에는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신이치는 재차 "저는
야마모토라고 합니다." 하고 말하고 상대의 얼굴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마지못해 이름을 말했다. 불법대화를 할 때는 상식 풍부하게 그리고 상대를 감싸는
자애로운 큰 마음이 중요하다. 또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
신이치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여러분이 불법(佛法)에 관해 정말로 듣고 싶으시다면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불법의 개요를 말씀드린 뒤에 질문도
받고, 간담하고자 하는데 어떠십니까. 괜찮지요."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치는 자신의 입회 동기부터
이야기하고, 인간은 믿는 대상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종교는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고, 종교의 여하가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결정할 뿐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밑바탕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니치렌대성인불법(日蓮大聖人佛法)은 무엇인가'를 언급했을 때, 한 교사가
끼어들어 말했다. "니치렌은 불교계에서는 이단이 아닌가."
다른 교사가 위세를 부리며 외쳤다. "니치렌은 배타적이야. 종교간의 분쟁을
낳는 위험사상이 아니냐!" 신이치는 손으로 제지하며 말했다.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이러면 제대로 대화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해산합시다. 그러나 정말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다시 와주십시오." 교사들은 중상적인 언사를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돌아갔다. 또 이시자키 세이코가 데려온 3, 4명의 부인들도
서둘러 인사하고 나갔다. 세이코는 남편과 함께 신이치를 다른 방으로 안내하자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야마모토 실장님, 이런 좌담회가 되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신이치는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광선유포의 투쟁에는 갖가지 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많은 경험과 역사를 쌓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잊지 못할 좌담회의 추억이 생기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