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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마 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15-20 / [형제가 죄를 짓거든;눅17:3] 만일 어떤 형제가 네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만일 그가 말을 듣고 잘못을 고백하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만일 듣지 않거든 ㄹ)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모든 사실이 확증되도록 하라. (ㄹ. 70인역 신19:15)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 상대조차 하지 말라. 18)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어 놓은 것은 무엇이나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내가 또 진정으로 말한다.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가 죄를 짓게 되었을 때 다른 구성원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얼마나 건강하고 바른 신앙을 가졌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권면에 대하여(15-17)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형제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 아닌 성도 상호 간의 도덕적 범죄를 가리킵니다. 공동체 구성원이 다른 형제의 범죄에 대해 반응하는 과정과 그 과정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잘 살펴야 합니다. 먼저 그 공동체가 범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성도들 사이에 관계가 긴밀하므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연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잘 소통하며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성도들은 서로의 삶에 바르지 않은 신앙이 스며들 때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스스로 죄악을 깨달을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거나 꾸짖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형제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15). 그러나 그가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동체의 다른 성도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18-20) 신앙 공동체가 구성원 사이에 말씀과 사랑으로 연합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18). 바르지 못한 것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권면하되 사랑으로 기다리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단 사랑으로 사려 깊게 대하되 죄악과는 타협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마음이 서로 하나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가장 작은 모임 중에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에게 “두 사람이 함께 앉아서 율법 말씀을 연구할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라는 유대 랍비의 속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로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살피고 계실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영원히 임재하실 분이라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며 언제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늘 돌아보며 가꾸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적용: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위해 당신은 어떤 헌신과 도고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봄만 되면 오랜 시간 동안 땅 속에서 숨 쉬며 기다리던 모든 식물들이 빛을 향해 소리 없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땅을 뚫고 새싹을 틔운 후 영양분으로 삼은 빛을 향해 고요히 경이를 보여 주며 계속 뻗어 갑니다. 광합성 작용입니다. 잎사귀는 이 작용을 통해 햇살을 당분으로 만들고 당분은 뿌리를 자라게 합니다. 영양분을 공급받은 뿌리는 줄기와 잎을 풍성하게 합니다. 봄은 성장에 땅을 뚫어야 하는 말 없는 용기가 필요함을, 빛을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소명임을 가르쳐 줍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애정을 가지고 기도로 권면해 봅시다. 인내와 사랑으로 품어주고 함께 견뎌주면서 관계를 세워 갑시다. 오늘도 사랑으로 예수님의 뜻을 세워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교회생활과 기도생활
마 18:15-20 / 이상호 목사(세광교회)
18장의 앞절에 목자로 표현된 하나님께서 죄지은 양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우리는 자연히 우리에게 죄지은 형제를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네 형제와 옳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라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인으로서 죄를 지은 사람들을 회복시키는데 드는 노력의 지침입니다.
1부. 오늘은 죄지은 형제에 대한 처리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15-17)
교회생활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1. 조용히 찾아가 1:1로 만나라.
화해를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라 할지라도 우리도 용서받은 죄인이기에 조용히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때 권면하여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2.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라.
죄를 범한 사람이 권면을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을 세우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그 죄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증인들은 화해의 시도가 이루어졌다는 것과 타당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세 사람이 객관적으로 권면하고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친교는 또한 모든 상황에서의 사랑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친교를 더 넓게 가지는 것은 화해를 붕괴시키는 개인적인 반응을 배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증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친교의 분위기는 먼저 정죄하기 전에 화해를 마음속 깊이 원하며 화해를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3. 교회 앞에 공포하고 이방인 취급하라.
권면해도 회개하거나 화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더 큰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공동체를 위해서는 교회 앞에 공포하고 아예 이방인 취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죄한 자를 형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하십니다. 형제가 아니므로 이방인과 아예 당시 가장 혐오스런 직업인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2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시는 하나님(마 18:18-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었이던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있느니라." (마18:19, 20)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잊고 있는 이 세상에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자 애쓰십니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 지니라."(렘22: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꼭 이루어져야 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는 안타까운 상황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진정한 마음을 받아 주지 않고 오히려 오해하고 멀리 떠날 때, 너무도 너무도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굴러 본 일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일로 발을 동동 굴러 보셨나요?
1.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응답하시지 못해
우리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고, 하나가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요17:11, 2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으로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하면 응답하시겠다고 알려 주셨고, 그리고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두 마음을 품으면 아예 응답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약1:6-8)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던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
그런데 만약 우리가 기도할 때 목사님생각 따로, 장로님생각 따로, 집사님생각 따로. 성도님들 생각 따로라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응답하셔야 되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이루어 주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하지도 않고, 기도하긴 하는데 정욕으로 잘못 구하고, 한 믿음으로, 한마음으로 합심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응답하실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땅에서 풀지 않기 때문에 응답하시지 못해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 것이 있대요.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거짓말이랍니다.(히6:18)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행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땅에서 서로 풀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도 푸실 수가 없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가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맺힌 것이 많지 않습니까? 부부간에, 부모 자식간에, 형제간에, 친구간에, 이웃간에 맺힌 것이 많습니다. 아니 맺힌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구요?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즉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과라도 맺힌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시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기 때문에 참석하시지 못해
요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나 단체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임재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에 정작 계셔야 될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해 계시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모임이나 단체가 수없이 많이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계2:9)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4)
미국에서 일어난 이야기라고 합니다. 한 흑인 소년이 백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당 계단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슬픈 듯이 울고 있었습니다. 안에서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럴수록 소년은 더 슬펐습니다.
갑자기 이 소년은 누군가가 따뜻한 손길로 어깨를 감싸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옆을 돌아다보니 예수님께서 아주 슬픈 얼굴로 옆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 여기 왠일이세요"
"너는 왜 여기서 슬피 울고 있느냐?"
"저는 흑인이라 저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도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거기 함께 있겠노라"(마18:20). 할렐루야! 아멘
그러나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믿음도 없고 행함도 없는 자기들의 의만 들어내려는 모임에는, 하나님께서 참석하실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직 풀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오늘 중 풀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마다 크고 비밀한 것으로 응답받으시므로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해드리는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마 18:15-20 / 이한규 목사
<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라 >
물질의 최소 입자인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한 몸처럼 붙은 핵과 그 주위를 끊임없이 도는 전자로 이뤄졌다, 결국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삼각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힘이 나타난다. 사람도 두 사람이 합심하고 그 관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위대한 삼각 상호관계를 통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난다. 삼각관계가 다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하는 아이가 생기면 신비한 삼각관계로 부부관계가 더 견고해진다. 더 나아가 부부 사이에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면 거룩한 삼각관계로 부부관계가 더욱 더 견고해진다.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활용하라. 그 삼각관계에서 상상을 초월한 힘이 나온다. 부부관계에서도 둘만 좋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사람의 앞날은 알 수도 없고 자신할 수도 없다. 둘만의 좋은 관계가 예상치 못한 사고나 실수로 어이없이 깨질 수 있기에 서로만 바라보는 좋은 상호관계로 안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거룩한 삼각관계를 이루려고 두 사람이 합심할 때 그 관계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서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고 놀라운 역사가 이뤄진다.
<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
본문 20절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하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 성도들과 함께하시는가?
1. 사랑으로 권고할 때
본문 15절을 보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이 구절에서 ‘형제’는 믿음의 형제를 뜻하고 ‘죄’는 실제적인 범죄보다는 인간관계에서 사람을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것 같은 도덕적인 죄를 뜻한다. 형제가 형제를 무시하거나 따돌리는 것은 일종의 죄다.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면 그에게 가서 개인적으로 권고하라고 했다.
그 개인적인 일대일의 권고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셨다(16절). 좀 더 강하게 권고하라는 뜻이다. 그 두세 증인의 권고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다(17절). 교회는 진리의 터전이고 사랑의 전당이고 교제의 도장이다. 그런 교회의 권고마저 거부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멀리하라는 뜻이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멀리할 때는 “어떻게 교회가 사람을 멀리하느냐?”는 의문이 없도록 사랑과 용서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멀리하되 미워하면서 따돌리는 식으로 멀리하지는 말라. 즉 교회에서 이단 교인과 같은 교회 파괴 세력이나 교회 접수 세력은 단호히 멀리하되 보통 사람을 멀리할 때는 선한 목적을 가지고 회개와 성찰 기회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만 멀리하라. 그런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2. 믿음으로 행동할 때
본문 18절을 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은 내가 땅에서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늘도 그 믿음의 행동에 반응한다는 말씀이다. 즉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내 손에 있다는 비유적인 말씀이다.
믿음의 행동이 중요하다. 사랑도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고 행동을 통해 온다. 사랑을 낭만적인 감정으로만 여기지 말라. 낭만적인 사랑의 우상화가 결혼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어렵게 만든다. 결국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말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관계를 일시적으로 좋게 만들지만 희생적인 사랑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만든다.
공동체에서 누군가가 희생적인 사랑의 모범을 먼저 보이면 그로 인해 공동체가 점차 살아난다. 부부관계에서도 내가 희생적인 사랑을 보이면 배우자도 점차 닮아간다. 그것이 가정과 교회에서 남을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비판하기 전에 사랑으로 행동하라. 내가 변하면 상대도 변한다. 내가 먼저 섬겨 주면 상대도 점차 섬겨 준다. 그만큼 나의 믿음의 행동이 중요하다. 특히 공동체가 함께 믿음으로 행동하면 서로에게 선한 도전이 되면서 복된 역사가 더욱 크게 나타난다.
2012년 제주도에서 열린 기독교선교연맹(C&MA) 한인 총회 때 어렵게 목회하는 미국의 한인 목사를 다수 초청했다. 그때 상당한 예산이 들었다. 총회 날짜가 가까워져도 재정이 많이 부족했다. 그때 한 목사가 집 보증금 일부를 빼서 헌금했다. 그 사실을 극소수 총회 임원만 알았다. 그때 그 목사가 가장 감사했던 일은 그의 아내가 전혀 반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그의 집을 이전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부부나 공동체가 함께 믿음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놀랍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원리로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두 가지 삶을 행하라고 하셨다(눅 10:25-28).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영생 진리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 사랑들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내 호주머니를 비울 때 표현된다. 수입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수입의 30분의 1을 이웃과 나눌 때 나도 행복해지고 물질로부터 자유를 얻는 마음의 복도 주어지고 결국 물질의 복 가능성도 커진다.
3. 합심해서 기도할 때
본문 19절을 보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동해도 하늘이 그 믿음에 반응하는데 특히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욱 반응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한 대로 이뤄 주신다는 말씀이다.
두 사람의 합심은 때로는 여러 사람의 합심보다 더 힘들 수 있다. 큰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목표와 이상과 비전이 개인의 특성을 압도하면서 하나 됨의 중심이 되지만 두 사람이 합심하려고 하면 개인의 특성 차이로 인해 서로 부딪칠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합심이 어려운 상태에서도 합심을 이뤄내고 그렇게 합심한 상태로 기도하면 기도 응답의 역사는 더욱 놀랍게 나타난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에서 불행으로는 한 순간이지만 불행에서 행복으로는 영원한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지금 관계가 좋고 행복하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관심을 가지는 일에 잠시도 태만하지 말라. 일과 세상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지만 상대에 대한 관심은 더욱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우주와 전 세계를 소홀히 할지언정 서로에게는 소홀하지 말라.
가정과 교회에서는 너무 따지지 말고 설명도 너무 요구하지 말라.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논리와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그저 사랑하고 존중하고 섬긴다. 따지고 싶을 때는 기도로 하나님께 따지지 말고 아뢰라. 그처럼 사랑과 관심과 섬김과 합심 기도로 행복을 만들어 가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와 복을 얻어 누리라.
4. 하나님을 앞세울 때
본문 20절을 보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세 사람이 마음만 맞아도 큰 힘이 된다. 그런데 두세 사람이 예수님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하면 더욱 큰 힘이 된다. 예배는 모든 문제를 내면에서도 풀어 주고 외적으로도 풀어 주는 기적의 씨앗이다. 그처럼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를 높여 주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고로 높이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앞세우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반드시 기억해 주실 것이다.
어느 날 한 소녀가 어버이날에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으신 분이에요. 첫 번째는 누군지 아세요?” 아빠가 말했다. “하나님이지.” “아니에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니까 제외해요.” “엄마지.” “아니에요. 가르쳐 드릴까요? 미래의 내 낭군님이에요.” 그때 딸을 보면서 아빠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딸에게 첫 번째로 좋아할 좋은 청년을 보내 주소서.”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높이고 섬기며 살라. 또한 서로의 뜻과 꿈을 앞세워 주라.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말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라. 삶과 관계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라. 그런 거룩한 삼각관계를 통해 복 받는 일에서도 일등 성도가 되라. 왜 거룩한 삼각관계에 정통해져야 하는가? 인간관계가 늘 좋을 수는 없는데 그처럼 인간관계가 안 좋을 때는 거룩한 삼각관계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길 때 사람만으로는 온전한 화해가 힘들어지고 늦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이 그 관계의 중심에 계시는 거룩한 삼각관계가 이뤄지면 화해는 쉬워진다. 사람이기에 갈등 가능성이 늘 있음을 인식하고 종종 생겨나는 갈등을 하나님을 앞세우는 삶으로 잘 극복해서 삶의 위기를 삶의 기회로 만들고 나와 내 가정과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감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복의 주인공이 되라.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마 18:15-17 / 안효관목사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한 여자 청년의 가방에서 돈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돈을 잃어버린 청년의 후배인 다른 여자 청년이 한 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후배는 선배에게 잘못을 빌었고, 선배는 후배를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당시 제가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던 때라 한편으로는 교회 앞에 참으로 송구스러웠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화해하며 일을 끝낸 것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가 교회 안에서 돈을 훔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청년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 청년이 교회당에 들어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해도 어른들은 그 청년의 인사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청년이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청년들 사이에서는 서로 잘못을 시인했고,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여전히 용서할 수 없는 아이로 낙인이 찍혀버린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른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 마치 죄인을 바라보듯이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심지어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 그런 교회를 그 청년이 계속 다닐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 청년은 교회를 옮기고야 말았습니다. 자신도 분명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고 선배도 용서를 해 주었지만, 주변에서 바라보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그는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교회를 옮기고 만 것입니다.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던 제 입장에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그런 일이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청년을 용서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가 잘못을 구했고, 당사자끼리 용서를 했다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 청년을 예전처럼 대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죄를 지은 그 자체를 옳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한 순간의 잘못을 우리의 기억 속에 각인시켜 놓고, 오래 동안 그를 그 잘못과 연결시켜 아주 못된 사람으로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를 용서한다고 생각을 해도,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를 볼 때마다 예전의 잘못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 마음으로는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교회 안에서 형제가 실수하고 죄를 범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처음 말씀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네 형제"라는 말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형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르심을 받고, 한 믿음 가지고 지금까지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하던 형제를 말합니다.
그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에는 무조건 정죄하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네 가지 단계를 거처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가 조용하게 그를 찾아가 권고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 나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처럼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다 인정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실수했을 때에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스스로 변명하며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실수를 하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한 것처럼 비판하고 헐뜯기를 좋아합니다. 그게 죄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만일 누군가가 실수하고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또 죄를 범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그를 찾아가서 그가 죄에서 떠나도록 권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일 누군가가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보통 사람들이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실수를 소문내는 것입니다. 그가 왜 그런 실수를 하고 그런 죄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입이 간지러워서 내 속에 감추어두지 못하고 험담하고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마치 잘못이 있는 것처럼 어떤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소문을 퍼뜨리는 것만이 험담이 아닙니다. 잘못하고 실수한 사실을 소문으로 퍼뜨려서 그 사람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 역시 험담에 속한 것입니다.
험담하는 것은 성경에서 철저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논단한다'는 말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타인을 험담하고 중상모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한 공동체 안에 속한 사람의 허물과 실수가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험담하고 중상모략하는 것은 공동체를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험담하는 것은 단 한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어려움을 겪는 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전혀 근거 없는 뒷 이야기가 무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 하나 첨가됩니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말이 여러 사람을 거치면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만큼 커지고 맙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넘어졌습니다. 그 광경을 누군가가 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아무개가 길을 가다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어. 아마 많이 아플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아무개가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아마도 무릎이 깨졌을 거야." 그 다음 사람에게 전달될 때에는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갔다"고 하고, 그 다름 사람에게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달됩니다. 그러다가 말이 커지면 나중에는 "영안실에 실려갔다"고 말이 퍼질 수 있습니다. 그게 말입니다. 소문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을 험담하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실수나 범죄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그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때론 나의 말 한 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실족케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는 엄청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조용히 그를 찾아가서 그를 깨닫게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부부가 에베소에 있을 때에 아볼로라고 하는 사람에 에베소에 와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부터 성경을 배운 사람이었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에 와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참 잘 가르쳤습니다. 늦게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던 브리스길라 부부도 아볼로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의 가르침 중에서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아볼로가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긴 한데,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 뿐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 부부는 조용히 아볼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해서 아볼로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그런 브리스길라 부부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 훌륭한 설교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아볼로가 성경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 말씀을 듣다가 요한의 세례만 알뿐 성령세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아볼로를 향해 "당신의 그 가르침을 잘못된 것이오. 왜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가르치는 것이요? 당신은 성령세례도 모른단 말이오!"
만일 그랬다면 아볼로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물론 아볼로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주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말씀의 권위도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가르칠 용기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 부부는 그렇게 공개적으로 아볼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하게 아볼로를 찾아가서 성령세례에 대한 말씀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더욱 힘을 얻어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허물을 들추어내면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결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화가 나고 부끄러움 때문에 더 좋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누군가의 실수나 허물을 알게 되었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조용히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깨닫게 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먼저는 내 스스로 안에서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추어 줄 수 있어야 하고,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가 그의 잘못을 가르쳐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험담하고 실수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도 잘못이지만, 험담하는 사람의 말에 동조하거나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삼가해야 합니다. 그게 모두를 위한 길입니다. 험담하려는 사람을 위해서도 그렇고, 허물이 발견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그것을 들음으로 같은 죄에 빠지게 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험담하는 말을 들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할 때에 내 기분이 어떨까?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함으로서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일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일까?' 우리는 스스로에게 먼저 그것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할 때에 용기를 내 "나는 듣지 않겠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용기있게 충고해 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실수하고 죄를 범했을 때 해야 할 두 번째 태도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설득해야 합니다. 이 두 번째 태도는 첫 번째 단계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혼자 가서 조용하게 권하여도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이 말씀 속에 함축된 첫 번째 의미는 할 수 있으면 형제가 범죄한 사실을 알리는 범위를 좁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지 않는 일들이 여러 사람이 알려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범위를 좁혀야 합니다.
한 두 번 권고한 다음 권고를 무시하고 죄를 은폐하고 자복하지 않는다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 역시 험담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의 잘못을 지적한 우리 스스로 화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형제를 찾아갔다면, 그것까지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세 증인만을 데리고 가라는 것은 첫 번째 단계에서 잘못한 형제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형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의 잘못을 정확하게 짚어서 그의 잘못됨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데리고 갈 두 세 명의 증인도 증언에 신실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때 증인에게도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 번째 범죄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지혜롭게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찾아가서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두 번째 더 많은 사람이 찾아간다는 것은 자칫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형제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형제의 닫혀진 마음을 열어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증참할 말에 대해서 분명하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내 말을 동조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증인"이라는 말에는 목숨을 내 놓는 각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증언을 했을 경우 생명이라도 내 놓을 수 있는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그 형제가 잘못과 범죄에서 벗어나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설 수 있기를 바라는 진실한 마음으로 함께 가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서 두 세 사람이 더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약점을 잡아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몰아세우기 위해서 여러 명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보다 두 세 사람이 함께 가서 사랑으로 권면하면 그가 좀더 쉽게 마음의 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 속에는 또한 '한 번 말해 주었는데 말을 듣지 않으니 나는 모르겠다' 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이 교회에 알려서 교회가 권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세 번째 단계입니다. 17절에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교회에 말하라"는 말씀은 교회에 소문을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알려서 지도자들이 찾아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그를 권면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교회는 때론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온 교우들에게 알려 기도함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형제의 인격을 손상하고 형제의 마음을 고통스립게 만드는 상황이라면 교회는 은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교회는 때로 치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가 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치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잘못했을 경우 그의 잘못을 바로 잡고 더 이상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매를 대는 것처럼, 영적인 회초리인 치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치리를 받아들일 때에만 그는 바르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을 때에는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출교하라는 말씀입니다. 출교(黜敎)란 교회 밖의 사람처럼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권위와 권면을 무시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계속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깨뜨리는 암초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으로 온 이스라엘이 화를 입었던 것처럼, 죄를 범한 한 사람, 회개하기를 거부한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엄청난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노력을 한 후에도 돌아서지 않으면 출교를 시켜서라도 교회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한 일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이나 범죄 하나가 온 공동체에 퍼져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죄의 힘이 선의 힘보다 훨씬 강하게 퍼집니다.
그러기에 죄를 범한 형제가 빨리 죄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은 그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는 미워하되 죄에 빠진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그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죄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죄를 범한 형제가 있더라도 결코 우리가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형제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하고 그가 온전한 신앙인으로 회복되도록 돕는 일을 할 분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읽은 말씀에서 우리 주님은 "소자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함께 신앙생활하던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죄에 빠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그 형제가 그 죄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서로 지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죄에 빠진 형제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처럼 온유한 심령이어야 합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형제를 권면할 때 그 형제가 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가 당하는 죄의 고통의 짐을 함께 지겠다는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도 그와 똑같이 그런 죄에 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만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죄를 범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그런 죄의 자리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중앙가족 모든 식구들은 죄에 빠져 죄악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식구들이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되었다면 빨리 깨닫고 하나님께 두 손들고 돌아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혹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한 형제가 있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형제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생명을 구원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중앙가족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모두 함께 깨끗한 믿음과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는 복된 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도하며 축원합니다.
교회와 기도
마 18:15-20 / 김홍도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에 얼마나 큰 특권을 주셨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중요한 특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형제가 범죄하면 너와 그 사람과만 대면해서 권고하라.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한 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증참케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서 말하고 교회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잘라 버리라.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게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 18:18-20)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칙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땅이 하늘을 지배하는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마태 18:18)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땅에서의 행위가 하늘에까지 연장된다는 말입니다. 하늘이 먼저 매는 것이 아니고 땅이 먼저 맨다고 했고 하늘이 먼저 푼다고 하지 않고 땅이 먼저 풀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움직임은 땅의 움직임에 의해서 결정되고 지배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든지 매거나 풀거나 하는 것이 하늘에서 먼저 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행위가 하늘에까지 미치는 것은 땅이 하늘을 지배하는 까닭입니다.
출애굽기 17:9 이하에 보면 모세가 산 꼭대기에서 손을 올리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승리와 패배의 결정은 하늘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먼저 결정되었습니다. 즉 땅에서 모세가 하는대로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사람이 원치 않으면 안된다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를 통하여 이룩하는데 교회가 가만 있으면 하나님의 역사는 안나타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을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할 수 있고 방해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기기를 바라시지만 모세가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이길 수가 없고 손을 올리면 승리하는 것은 땅이 하늘을 지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에스겔서 36:37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인수(人數)를 늘리시기 원하지만 그들이 구하지 않으면 못하신다는 것은 땅이 하늘을 지배한다는 원리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5:l1에 보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이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여기 내게 부탁하라는 뜻은 "내게 명령하라"는 뜻입니다.
"Command ye me!" "내게 명령하라! 내게 명령하라고 했으나 사람들이 감히 이 말을 못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명령합니까? 그러나 땅이 하늘을 지배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여기서 설명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힌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이것을 하시옵소서. 우리는 이것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어쩔 수 없이 당신은 이것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강력하고 능력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셔도 땅이 결정할 때까지 기다리시지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늘은 땅이 움직인 다음에야 움직이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의 조화>
왜 하나님께서 땅이 하늘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실까? 여러분 영원한 천국 안에서는 안 그렇지만 이 세상 시간 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제한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하실 자유가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자유의지를 가지셨고 인간도 자유의지를 가졌으므로 이 두 의지가 조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제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방안에 책상, 걸상, 마루, 천정만 있다면 당신은 아무 제한도 안 받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 영이 없는 물질만 가득하다면 하나님은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돌이나 나무같이 창조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을 반역할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게 하셨습니다. 억지로 순종만 하게끔 만든 것이 아닙니다. 책을 여기 놓으면 여기 있고 저기 놓으면 저기 있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해서 인간을 만드신 이후에 오늘날까지 제한을 받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독자적으로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원하는지 않는지를 물어서 행사하게끔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신 날부터 오늘날까지 사람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권위를 수락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장차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일치가 되기 때문에 거기서는 하나님의 제한을 안 받으시지만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기전 이 시간이라는 기간 동안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제한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 시간 안에서는 제한을 받으시는가? 장차 올 영원한 세상에서는 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조화를 이루어 상충(相衝)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책상, 걸상처럼 아무데나 놓는대로 가만 있는 물건이나, 시계가 태엽을 감아주면 돌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 돌아가는 피동적인 사람을 원치 않고 자유의지로써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장차는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영원한 뜻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장차 천국에서는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할 수도 있으나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편에서 영원히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지의 조화가 하나님께 기쁨이요 참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는 하나님은 제한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매면 하늘에서도 매주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 모두가 다가 아니라 그 중에서 교회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영원한 세계의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위는 전부 교회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교회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땅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바를 교회를 통하여 계십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뜻을 무시하면서까지 그의 뜻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땅에서 협조하는 뜻이 없이는 행치 않으십니다. 땅에서 원해야 하늘에서 행하십니다. 땅에서 결정해야 하늘에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뜻과 인간의 뜻이 조화되어야 행하시고 거기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 굉장히 부흥되는 교회들마다 중요한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담대하게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교회는 이 원리를 알기 때문에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주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고 땅에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구하면 하나님이 그 응답을 해 주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로 온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므로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부흥된 것은 합심하여 기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큰 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인 줄만 알면 구하고 믿고 나갈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세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아무 것도 행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땅에서 자유의지로 반응을 보일 때 움직입니다. 교회는 설교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늘에 있는 뜻을 땅으로 끌어 내려야 합니다. 어떻게 끌어 내립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란 적은 일도 아니요 경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의 일입니다. [① 하나님의 뜻을 선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 라"(18절) 여기 "너희가"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행치 않습니다. 그런고로 교회는 폭을 넓혀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많은 기도를 드리면 많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큰 역사를 이룩할 수가 있습니다.
집에서 쓰는 물탱크가 아무리 커도 저수지의 물탱크보다는 적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기도하여 구하고 선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많은 제한을 받습니다. 교회의 기도는 도관(導管)과 같습니다. 장차 교회가 새 예루살렘으로 화하기 전까지는 "교회가 매야 하늘에서 매이고 교회가 풀어야 하늘에서 풀립니다" 교회의 사명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 교회들의 기도 여하에 따라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교회가 부흥할 수도, 쇠할 수도 있고 많은 영혼을 죽이기도, 살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버리면 버림받고 교회가 심판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땅에 있는 교회에서 하는대로 하늘에서도 행하십니다.
기도는 수도 꼭지를 트는 것과 같이 많이 틀면 많이 나오고 적게 틀면 적은 물이 나오고 잠그면 아주 안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많이 내리고, 조금하면 조금 내리고, 안하면 아주 안내리는 것입니다.
[② 성령 안에서 일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9절).
하나님께서 교회가 구하는 것을 다 시행하시되 땅에서(교회) 합심(合心)해서 일치하는 마음으로 구할 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일치하는 마음은 성령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에스겔서 11:19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사도행전 11:19에 온 무리가 한 곳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마음을 같이 해서 합심해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 주신다 했습니다. 마음의 일치 뜻의 조화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일부는 이런 뜻을 가지고 일부는 저런 뜻을 가지고 해서는 역사가 안 나타납니다. 참으로 일치하게 되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③ 함께 모이는 것]
"두 세 사람이 내 이름드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18, 19, 20절에 각각 한 가지씩의 원칙이 들어있는데 이 20절에는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님도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도 다락방에 다같이 모였더니 성령의 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자주 모이고 기도할 때에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기도하고 혼자 예수 믿는다고 교회 안나가도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모이고, 주 예수 이름으로 모이고, 주의 영광을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 앞에는 모든 우상을 깨뜨려 버리고 육체의 소욕을 각각 제거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교회는 강하고 부흥합니다. 무엇을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합심해서 무엇을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무엇을 풀면 하늘에서도 풀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교회에 주신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교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주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명령을 하면서 구하면 그것이 다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하는 교회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고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깨닫는 사람은 사업에도, 개인 생활에도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의 사명이며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합심하여 담대하게 교회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나도 그들 중에
마 18:15-20 / 박지온목사
오늘 제목 말씀을 "나도 그들 중에" 라고 잡았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 여기에 모든 답이 다 나오는 거죠. 아마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구체적인 해답을 좀 찾아야 되겠습니다. 뭔가 이렇게 들뜰 것도 없고, 좀 조용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실적인 역사를 체험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그 자폐 치유캠프에 참여하면서 그 어려웠던 부분이 뭐냐하면, 그 천사도우미, 자폐 치유캠프하면서 자폐아를 한 3일간 맡아줄 수 있는 자원자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열리고 보니까, '모자라서 되겠나!' 이렇게 애를 먹었는데, 한 네 사람 정도가 남도록! 하나님이 똑 공급을 해 주셔서 잘 감당을 했습니다. 그 중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 못 들었습니다. 어린이 자폐는 어린이 사역자들이 하고, 저희들은 이제 자폐 어머니들, 아버지들 중심으로 이제 치유에서 맡아오는데, 그 어린이들을 맡아 있는 그 천사 도우미 중에,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들이 오셔 가지고 도우미를 하는데,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에 가면, 마치고 올라가면 먼저 뭐부터 해야 되느냐?' '목욕부터 해야 되겠다!' 그래요.
아이들 보살피느라고 '밥은 그래도 먹었는데 세수도 못했다!' 그래요. 얼마나 아이들이... 뭐 여유를 줄 수가 없으니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어떤 분들은 또 조금 덜한 아이들도 있지만, 심한 아이들은 진짜 밥 먹을 여가도 없어요. 뭐 세수는 생각도 못하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일단 첫날하고, 둘째 날 당연히 다른 겁니다. 첫날 아이를 인계 받아서 맡아있는데, 밥 먹을 여가도 없이, 세수할 여가도 없이 그랬는데, 하나 딱 감사한 것은, 일단 밤 되면 잠을 잘 자더라는 겁니다. 원래 아이들이 그 엄마를 떠나 가지고 첫날밤부터 잠 못 자거든요. 잠 못 자고, 밤새도록 시달려야 되고, 잠 못 자는 정도가 아니고, 또 쉬도 하고 하니까, 화장실도 몇 번따라 다녀야 되고, 이런 중에 잠은 잘 잤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몇 일, 한 이틀 지나서 그 어머니를 만나서, '잠은 참 첫날부터 잘 자더라!' 그러니까,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 겁니다. 왜? 아이가 잠을 잘 안 잔데요. 그런데 첫날부터 딱 떼어놓는데, 천사 도우미의 손을 통해서 밤에 잠을 자는데, 그냥 잠을 잘 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변화되는 것을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는데,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그런데 벌써 아이가 다 컸는데, 뭐가 안 되느냐? '엄마' 소리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가는 과정에서 아이가 엄마 소리도 하고, '엄마 소리까지 했으면 이제 입이 안 열리겠나!'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주일 학교 사역자들의 고백이 이렇게 모여서 포럼을 하는데, 얼마나 은혜를 받았던지, 본인들이 울먹이면서 포럼을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전에는 그 천사 도우미들이 제가 이렇게 올라가면, 층계를 올라가면, 곳곳에서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거의 없어요. 왜? 전부 집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아이들이 그냥 예배를 다 드려요. 그리고 그 집회 인도하는 그 분이, 거의 '정상적인 아이들도 이 정도보다는 차라리 더할 것 같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뭘 말하고 싶으냐 하면, '된다, 안 된다!' 그 말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과 뜻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성령으로 그 가운데 역사 할 때에, 우리의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치료가 되겠지! 저렇게 치료가 되겠지!' 그런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상상밖에 어떤 결과와 결실들이 사실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을 장황하게 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하시고, 그렇게 벌써 계획하신 중에서도 우리가 그것을 못 믿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첫날 딱 참석을 하려고 하는데, 첫날부터 눈이 쏟아 졌거든요. 눈이 쏟아졌는데, 눈이 쏟아지면서 무슨 마음이 드느냐 하면, '아, 되겠나!' 해 보지도 않고, 지금 하나님이 다 되도록 계획했는데, 내 마음은 '되겠나!' 뭐가 오느냐하면, 불 신앙입니다. 또 나는 올라가다가 아직 차 성능을 눈길에는 한번도 안 달려 보았으니까! 바로 이제 재를 넘어 가지고 올라가야 되는데, 바로 이제 정상의 한 2/3쯤 올라 가 가지고, 계속 이 자동차가 헛 바퀴 도니까! 올라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 큰일났구나! 올라가지를 못하는데...' 뭐 내가 그 정도니까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뭐 이렇게 밟아도 올라갈 기미가 없어요. 그냥 계속 바퀴는 헛바퀴 돌고... 옆에 사람은 얼마나 용을 썼든지! 그 날 밤에 너무 피곤해 가지고... 배도 뭐 얼마나 고팠던지, 나는 그 운전하느라 정신 없고, 옆에 앉았는 사람은 더 용을 써 가지고, 밖에 뛰어나가 가지고 그 모래 포대를 끄집어내려니까, 모래 포대가 또 얼어 가지고 잘 되지도 않고...
그런데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 중에서 'TCS'인가, 이렇게 깜박깜박 불이 오더라 구요. '왜, 이 불이 자꾸 오냐? 미끌리니까 오는가 보다!' 마음에 선뜻 지나간 생각이 매뉴얼을 보면서, TCS라는 그 말이 뭔가 이 미끄럽고 이럴 때에 사용하는 어떤 장치라는 것이 마음에 생각이 들어요. 구체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보니까 버튼 앞에 TCS라는 것이 있어요. 딱 눌렀죠. 눌리고 이제 액셀레이터를 밟으니까, 거짓말처럼 올라가는 겁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뭘 느꼈느냐 하면, 하나님은 위기에서든지, 어떤 문제에서든지, 이미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 해결의 방법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다 예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 신앙 때문에 그것을 못보고 못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그저... 쉽게 말해서 믿고 한 걸음만 들어가면 되는데, 그게 안되어요. 제가 이 몸이 아프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일단 해보지도 않고, 아프면 '안되겠다!' 불 신앙부터 먼저 오는 겁니다. 부닥쳐 보면 또 해요.
나는 이번에 계속해서, 연속해서 지난 한 주간도, 또 그 지난 한 주간도, 계속해서 지금 금요일까지 강행군을 했거든요. 목회 대학원 할 때도 끝까지 참석한다는 것은... 아예 해보지도 않고 '힘들다!' 내가 좀 건강 상태를 견디지 못하겠다 싶어서, 그냥 계속해서 시간이 저녁까지 되어 있으니까, '수요일까지 하고 류 목사님 메시지 끝나고는 돌아와야 되겠다!' 아예 그렇게 생각하고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또 참석을 해보니까 참석이 돼요. 금요일까지 또 참석했죠. 이번에도 지금, 처음에는 내가 이 담임목사 메시지 때에는, '좀 힘들겠다!' 그렇게 있다가 속리산을 또 안 갈 수 없으니까! '가야되겠다!' 그러다가, '주여, 지난번도 했는데, 또 가보겠습니다!' 또 갔어요. 가니까 또 다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불 신앙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항상 불 신앙 때문에 아예 일도 해보지도 않고, 현장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사건 속에 접해 보지도 않고, 낙심부터 먼저 하는 겁니다. 그게 심해지면 아예 시작도 못해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세워놓고, 제가 그랬죠. 작가가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폭탄 터질 때도 나올 수 있도록 프로그램 다 해 놓았는데, 버튼만 딱 눌리면 올라가도록 다 계획해 놓았는데, 이걸 못 보고 안 믿으니까, 구체적으로 성취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엄청난 축복과 역사를 다 준비해 놓았는데, 문제는 불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무라는 것! 여러 가지를 안 나무랐어요. 뭐 '힘이 없다! 기능이 없다!' 아닙니다. 불 신앙입니다. 내가 불 신앙 때문에 모든 문제가 오는구나!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불 신앙하게 되는 배경이, 지난번에 '어린아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하면서, 불 신앙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내용이 '생명이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내가 불 신앙하느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 신앙에 중요한 배경이, 기도에 중요한 배경이, 내가 생명 받게 되는 그게 배경이 되어서 강단의 말씀과 연결되고, 예배가 저절로 회복되고, 그 다음에 여기서 모든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도 같은 배경을 여러분 먼저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19절에 말씀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다 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이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 거기에 간단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전부 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다 아닙니까! 누가 복음 19장 5절에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가 바로 이말 듣고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는 순간에 다 끝났어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 다 끝났습니다. 이 구원과 함께 모든 문제가, 삭개오의 가정, 가문 전체에 문제를 다 해결했던 부분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희들 중에 함께 있겠다!' 이게 다 답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너와 함께 계시고, 우리들 중에 계시느냐! 그것이 성경에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 '예배하는 중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 배경입니다. 우리 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 모여 가지고 장난하는 것, 뭐 노름하는 게 아니고, 뭐 마작 하는 것이 아니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뭐 하는 겁니까? 예배하는 것!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잡담하고 있는 게 아니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는 중에! 이 사실을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말세에 사단의 가장 악랄한 계략이 뭐냐하면, 예배 못 드리게 하는 것! 예배가 안되도록 하는 것! 그 예배가 안되도록 하는 것! 그건 뭐 가정예배로부터 모든 예배를 다 말하게 되죠. 그렇게 하는 중에서 뭐냐하면, 예배드릴 수 있는 마음에 여유를 다 빼앗아 버려요. 바쁘다! 분주하다! 그 다음에 다른 복잡한 일들 많다! 그 다음에 가정사정! 무슨 사정을 통해서 뭘 빼앗느냐? 예배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 다음에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로 뭐냐? 갈등! 목회자와의 갈등, 성도들과의 갈등, 교회의 갈등! 이래서 이게 오면 뭐냐? 예배가 안되거든요.
그 다음에 이 다락방 안에서도 뭐냐하면, 바로 이게 문제더라 구요. 그러니 뭐 여러분 중요한 것은, 본 교회 목회자가 다락방이 되었던, 안 되었던 중요한 것은, 예배 안되면 다락방 백 번, 천 번 한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응답에 연결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강단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 '참,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다!' 이게 연결되는 그 모든 곳에서 다 응답이 나오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여기서 나오게 되고, 여러분 다락방에 실제적인 응답이 나오고, 포럼에 응답이 다 여기서 나오게 되고... 이 사실 자체가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되고, 우리가 연결되어야 되죠.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에게 참 생명이 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회 중심, 예배 중심!' 이것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그런 현상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이 안 되는 곳에는 예배라는 것이 강조되면 율법이 되게 됩니다. 율법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이 생명 관계가 안되고, 참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바로 안된 가운데서 예배 드려라! 그러면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거든요. 예배가 참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어떤 그 복음을 넣지 않고 가정예배 드릴 때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정예배 그러면 '너무 지루하다! 고통스럽다!' 그것밖에 생각이 안나요. 왜, 요즘은 그 가정예배를 잠깐 드리고, 시간도 조절하고 그러는데, 옛날에는 가정예배가 그게 아니거든요. 일단 기도 시작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나와야 되니까! 그건 뭐 시간에 한정이 없어요. 그러니 아예 '가정예배!' 그러면, '오늘 죽었다!' 이래가지고, '기도!' 그러면 아예 팔베개해서 잠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강요하니까 뭐가 되느냐? 안 드릴 수는 없고, 안 드리면 부모한테 혼나니까! 그 '드린다!' 이것은 예배라고 하는 것이 바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이건 죽을 지경입니다.
여러분 정말 예배가 예배될 수 있는 길은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참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생명과 믿음!' 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예배는 강요할수록 고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주일성수! 주일 예배드려야 복 받는다!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예배드리는 순간이 괴롭습니다. 왜? 할 일이 안 그래도 많은데, 내가 억지로 예배드려야 되니까!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순간에 오만생각이 다 들고, 평소에 안 하던 20년 전 생각까지 다 나오니까, 이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다고 또 뭐 그런 생각 속에서 또 피곤하면 졸리니까, 설교자가 앞에 있는데 졸면 또 안되니까, 그래서 개발해낸 것이 눈뜨고 조는 방법도 개발해 내고... 오랜 신앙생활 하다보니 아주 뭐 재주가 무궁무진하게 나오더라 구요.
그것이 여러분 '율법적이다!' 다른 게 아닙니다. 생명 없이 나올 때 다 율법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뭘 해야 되겠다!' 어떤 격식과 어떤 규범에 매여 가지고, 안 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 생명이 임하게 될 때에, 말씀 받는 순간에 즐겁습니다! 감사하고, 기쁨이 오고, 내게 새 힘이 오고, 이런 사실이 될 때마다 그 예배드리는 순간순간이 감사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기다려지게 되는 겁니다.
뭐 '주일 성수를 준비해라!' 말씀이 안 깨달아지고, 말씀이 안 즐거우면 주일성수라는 사실 자체가 안되게 되어 있어요. 뭐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안나오는데, 그러면 이 사실이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면, 자연적으로 '거룩한 성일'이라 말 붙일 것도 없어요. 내 모든 축복과 은혜가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아니까! 구체적으로 나도 모르게 준비가 되어지고, 기다려지게 되고, 기쁨이 되어지게 되는 사실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8장에 흐르는 배경이 바로 그런 배경입니다.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때에 상상 못할 문제들이 나오거든요. 그런 축복과 은혜가 계획이 되고 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안되면서, 이 바탕이 안되면서 18장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놓았습니다. 뭐냐?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어린아이 되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뭐 '어리게 되어라!' 그러면 이해가 되겠는데,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겸손도 뭐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겸손이라는 것도... 오늘 제가 지난번에 말씀 그대로 이어서 좀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생명관계가 안되고, 또 부모 자식간에 관계가 안되면, '겸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이 생명 관계로 와지는 겸손이죠. 이게 안되면 구체적으로 안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17절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랬습니다. 교회 말이라는 것은 메시지요,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무슨 말을 합니까? 목사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무슨 문제냐 하면,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교회 중심이 되고, 바로 뭐냐? 메시지 중심이 됩니다! 내 삶에 전체가! 그러면 나도 모르게 뭐가 오느냐? '메시지 중심이 된다!' 그럴 때에, 말씀전체를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누구를 통해서 내게 오늘 필요한 말씀이 나옵니까? 목사님 통해서! 그러니까 어떤 일이나, 어떤 사건과, 어떤 문제를 통해서 목사님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느냐? 이것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가다가 참 기적적인 일이라는 것이, 이것은 뭐 교회 밖에서는 상상을 못하는 거죠. 목사가 별스럽지 않는 소리를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생애를 바꾸는 엄청난 문제가 나오더라 구요. 그리고 또 목사가 되지도 않는 말 같은데도 그 사람에게는 엄청난 해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고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도저히 뭔가 이 수준이나 지식적으로 봐서 그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일인데, 그 사람이 들을 수도 없는 입장인데, 교인들이 와서 목사가 말했기 때문에, 또 무조건 듣는 겁니다. 듣고 또 따라가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걸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또 혹시 여러분들이 뭐냐?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남편들이 목사가 말했다고 다 듣느냐! 이렇게 될 겁니다. 이게 뭐냐? 생명관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서 임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것은 뭐 '된다, 안 된다!' 이전에 이것이 연결되면서, 목사를 통해서 말씀한 것이 내 모든 삶에 해답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내용이더라 구요. 이런 부분들이 오늘 여기 본문에서 또 말씀이 나왔죠.
그 다음에 문제가 또 뭐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그러니까 예배 중에, 기도 중에 나오는, 이건 또 다음에 문제가 조금 언급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만은, '두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그 다음에 너희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이것은 교회에 어떤 치리 권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만은, 개인적인 기도 응답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교회 메시지가 내게 응답되는 메시지로 연결되면, 바로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관계, 그 다음에 중직자들과의 관계, 그 다음에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 특별히 여기에 이런 내용가지고, 구역과의 관계, 또 구역에 메시지와의 관계, 이런 문제들이 저절로 전부 연결되어집니다. 어느 한 통로도 막히게 될 때에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신앙의 삶에 수정해야 될 해결해야될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때에 여기에 중요한 것이, 어린아이와 그 다음에 부모! 여기에다가 겸손이다라는 말을 붙일 것 없이,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교회에서 말하는 겸손이라고 하는 이것은, '낮아진다, 뭐다!' 이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린 아이와 어머니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가 안되면 겸손이라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되어질 수가 없어요. 또 여러분 교회 안에서 와 가지고, 또 이런 관계없이 목사 앞에, 장로 앞에, 혹은 성도들 서로 서로간에, '낮아진다! 섬긴다!' 되어질 수가 없어요. 섬겨질 수도 없고, 그것은 안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뭔가 이 심리적인 배경에서 좀 생각해 보고 우리가 바로 붙잡아야될 그런 내용입니다 만은, 제가 어떤 그 기록을 보는 동안에 재미있는 것을 봤어요. 일본문화와 정신병이라는 그런 글을, '박상회 집사님' 글을 보면서 이런 것을 말해 놓았어요. 어린아이들이, 일본에 지금 어린아이들의 정신문제가 나오는 배경이, 어린아이들이 '아마애'를 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랬더라 구요.
그 '아마애'라는 것은 뭐냐하면, 응석, 어리광, 그 다음에 어린 아이들이 막 부모한테 자꾸만 엉뚱한 짓을 하는 것, 일부러 막 엉뚱한 짓을 하는 것, 이런 것도 응석과 어리광이라는 말로 다 해석이 안 되는 그런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어서 그렇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그런 대상을 잃어버렸고, 그런 대상의 가치가 상실되었다! 이게 일본문화에, 정신병에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나는 그 문제를 보면서, 오늘 이것을 설명할 때에 좀 어떤 면에서 아주 중요한 설명에 내용이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무슨 문제냐 하면, 부모와 자식관계가 끊어져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생명 관계가, 이게 희미해져버렸어요. 일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부모 아닙니다! 결혼했지만, 내가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내 부모가 아닙니다!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 일본에 중요한 문제가, 자기 부모와 사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부모가 아니고, 내 어머니가 아니니까! 자연적으로 뭐가 안나옵니까? 어리광이 나올 수가 없죠. 이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정신병이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 말합니다. 참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진실한 생명관계가 안 나오면 불안하게 됩니다! 여기에 평화가 없어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응답 나올 수가 없어요. 예배라는 이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예배에 성공한다! 그것 이전에 이 문제 아닙니까! 그 다음에 또 왜, 안나오느냐? 왜, 그게 안 되느냐? 부모의 절대적인 위치가 사라져버렸어요. 부모한테 무조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절대적인 이게 사라져버렸어요. 부모의 가치가...
이것은 아마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를 절대적인 위치로 아닙니다. 왜? 부모보다도 누구중심으로 가정에서 키웠느냐? 전부 어린애 중심입니다. 어린애는 왕이고 부모는 하인입니다. 부모절대의 위치가 안되어요. 조금 커버리면 부모보다 자기 중심인데, 절대적인 부모를 의지하고, 의뢰하고,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똑같은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이 생명 관계가 안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생명관계, 이게 되어버리면 문제는 간단하죠.
그 다음에 이 믿음이 되었으면, 여러분 믿음이 요즘 이상합니다. 전부 자기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완전히 믿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데, 자기 소원이 더 강한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이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가 안 되느냐? 말하자면 소위 일본에 용어로 '아마애' 가 안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실을 조금만 마음으로 한번 열어보세요. 진실한 생명관계! 이것이 안되면 예배가 안되고,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여기에 모든 응답이 다 닫히는 겁니다.
예배가 안 된다! 말씀들을 때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구나!'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나의 형편과 처지는 전혀 안 되는데...' 이런 고민 안 합니다. '그건 목사님만 그렇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나오지, '하나님께서 오늘도 목사님을 통해서 내게 이런 말했다! 도저히 안될 수밖에 없는 이런데도 말했다! 그래서 내가 고민하다!' 이게 요즘은 안되고 있습니다. 거의 안됩니다. 아예 그건 뭐... 왜? 절대적인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니까, 목사와의 관계! 이게 안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사실들을 조금 뭔가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다락방은 혁명이다! 시대다! 신앙에 회복이다! 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메시지를 말할 때에 그 메시지 붙잡고 여러분 기록 안 합니까! 그러면서 그걸 붙잡고 기도 안 합니까! 이런 구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말보다, 이것이 체험되게 될 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 성경에서 오늘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기도응답이 아닙니까! 19절부터 바로 그런 이야기죠.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기도응답이에요.
그래서 기도응답도 예배 중에, 그 다음에 같이 그룹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것, 소위말해서 소그룹이라든지, 아니면 기관이 모여서 기도하던지...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한다! 이것을 가지고 류 목사님이 표현을 뭐라고 그랬느냐? '썰렁 기도'라 그랬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하면 왕왕 거리고 뭔가 분위기가 잡히는데, 뭐 모이라 그러니까 많이 모이지도 않고, 한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붙들고 앉아서 기도하면, 진짜 썰렁하더라 구요. 저는 우리 집에서 가정 예배드릴 때에, 집에 딸아이도 있고 아이들이 있을 때는 기도하면 그래도 뭔가 기도가 웅성웅성 나오는데, 두 사람 영감 할매가 앉아 가지고, 이 기도하니 진짜 설렁하더라 구요. 생명관계가 안되면 이 기도가 안 나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앞에 것이 전제가 된 후에 이 기도가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라는 것 전부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응답이 다 나온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메시지를 붙잡고 두 세 사람이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우리가 뭘 하던지 계속해서 메시지 붙잡고 여러분 모임 있잖아요, 모임 있을 때에 강단을 통해서 나온 메시지가 계속 모임의 주제 아닙니까! 그 것 붙잡고 두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가장 설렁한 기도라도 생명관계가 이루어지면 이것은... 두 사람보다 더 힘든 것이 뭐냐? 혼자 앉아서 기도하는 것 더 힘든 문제죠. 두 사람이 하면 눈치 살펴서, '네가 아직 기도하니까, 하다가도 끊었다가 또 하고...' 이렇게 해도 되지만, 혼자 하는 건 그 자체조차도 안되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말 생명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여기에 놀라운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지난 그 17장에 나오는 변화 산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이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고백이라는 것 위에 기도라는 것이 나옵니다. 고백이라는 것 위에 기도가, 진실한 고백 속에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 나의 아버지시오, 참 생명관계의 고백 속에서 그때부터 뭐냐? 진지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사실이 체험되면서 뭐라 그랬습니까? 영광의 주 오실 메시아의 역사가 체험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라도, 잘못된 것이라 할 값이라도, 뭐냐? 헌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교회에 진실한 헌신의 고백이 언제 나오느냐? 정말 생명관계가 체험이 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사실화 될 때에, 나도 모르게 헌신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충성하겠습니다!' 거짓말 할 값이라도, 그 순간에 이게 실제적으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여러분 이런 확신이 있을 때에, 어렵고, 힘들고, 문제 될 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어리광이라 그러면 이상하죠, 이럴 때에 뭐가 나옵니까? '아버지 내가 왔습니다! 아버지 안 되면 죽어버리렵니다!' 여러분 이게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이 안되면 이런 말이 안 나옵니다.
그게 뭔가 '신비적인 기도다! 무슨 기도다!' 이전에 여러분들이 정말 복음 체험하고,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어리광 아닌 어리광이 나옵니다. 이게 낮아질 때로 낮아진 것이거든요. 그때 나도 모르게 뭐냐? 하나님 때에 따라서는 뭔가, 누가 모릅니까! 예를 들어서 '박지온 목사가 왔습니다!'가 아니고, '하나님 나 목사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 이상한 인간이지만 하나님 앞에 내가 왔습니다! 하나님 지온이가 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배경도 절대적인 주권자요, 생명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기도가 안나옵니다. 이게 안되게 되어 있어요.
뭘 말씀합니까? 여러분 기도응답 속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구체적으로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야 진실한 고백이 나오고, 그 고백잡고 뭐가 나옵니까?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에 응답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예배가 안 되어 집니까? 진짜 회개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서 말씀이, 정말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붙잡고 고백이 안 나오면, 여러분 개인기도라는 것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기도, '아버지!' 그러는 진실한 고백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뭐 겸손이 다른 게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하실 수 안 있습니까! 왜 안 해줍니까? 아버지 삐쳤습니까?' 거기에 진짜 하나님 앞에 진실한 고백이 나오고, 그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물론 제가 이번에 기도제목들을 이렇게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기도 제목들이 많이 정리가 되었어요. 많이 정리가 되었는데, 어떤 문제에서 기도제목이 정리는 되었지만, 말하자면 어리광을 부리는 기도는 없어요. 진짜 뭔가 여러분 중심에, 가정이나 개인이 하고 싶은 기도는, '성령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 물론 그 기도인데도, 그 보다 더 숨어있는, 중심에 아버지 앞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거의 안 섰더라 구요. 그걸 써 놓았으면 제가 또 고함을 지를까 싶어서 그랬는지... 어떤 면에서 차라리 여러분, '성령 충만!' 누가 모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는 성령 충만이면 다 됩니다. 그것도 우리가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생명관계 회복! 하나님 앞에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내 중심에서 진짜 감추어져있는 부분들을 내어놓을 수 있는 기도가 나온다! 그러면 응답이 되는 겁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이게 응답이...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인 기도!' 그럴 때에, 뭐 다른 게 아닙니다. 이 부분입니다. 구체적인 기도가 그냥 점잖은 자리에서는 안 나옵니다. 정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여기 뭡니까? 구체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 중에서 여러분 체질이, 여러분 정말 체질이 뭐냐? 이게 중요한 거죠. '복음을 가지고 있는 기도냐?' 아니면, '복음이 안된 자의 기도냐?' 여기 이제 문제가 나오더라 구요. '하나님이 응답하시느냐? 응답 안 하시느냐?' 중요한 중심의 문제가 여기 나오죠. 성경을 볼 때에 자기 중심, 자기 체질 어떤 것으로 중심이 되어있고, 어떤 체질이 되어 있느냐? 이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 그 해석이 달라지게 되어있어요.
예를 든다면, 일제치하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 소망이 없었어요. 6.25 비롯해서, 오면서 그런 중에서는, 우리도 모르게 뭔가 성경을 보면서도, 똑같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뭐가 강조되었느냐? 재림이 강조되어 있어요. 항상 '말세, 내세!' 여기에 강조되었습니다. '죽으면 천당 간다! 지금 힘들어도 좋다! 우리는 죽으면 천당 간다!' 그래서 헌신은 늘 부정적이고, 늘 뭔가 이 폐쇄적인 이런 어떤 현실감을 갖고,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잔뜩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삶의 어떤 힘이에요. ]
그래서 우리 저 지난 주일입니까? 유 장로님이 뭔가 이 장년들이 나오셔서 노래 안 불렀습니까! 옛날 노래가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그때 노래가 뭐 허사 가인데,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이게 여러분 보세요, 요즘 아마 아이들이 이런 노래 부른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못 씁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때,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왜? 이 땅에 소망은 하늘나라이지, 우리가 이 땅에 것을 다 부정했습니다.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왜, 필요 없습니까? 지금 우리 경제 필요하잖아요. 우리 부자 되어야 되는데... 그때는 그게 아닙니다. 왜? 이 땅은 일제 치하에 눌렸고, 6.25로 눌려 가지고 진짜 소망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늘소망 뿐이니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중심이 되니까, 소망이 없는 것이 중심이 되니까, 자연적으로 성경해석이 말세 중심입니다. 내세에 대한 중심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죠.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참 복음이 중심이 되어있고, 복음이 체질이 되어 있으면, '아파도 복음입니다! 실패해도 복음입니다! 성공해도 복음입니다! 돈을 가져도 복음입니다! 못 가져도 복음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뭘 가졌느냐? 이게 성경해석의 전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저는 그 치유라는 배경가지고 이렇게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강단에 섰다 그러면, 모든 설교가 치유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치유! 그 다음에 전도! 내가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제 메시지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가만히 있어도 전도된다!' 왜? 복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활동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 상당히 소망과 용기를 주는, 이런 어떤 메시지들이 많이 나가죠. 그러면 건강한 사람은 화닥닥거리며 뛰어다니면서 전도하는 것! 그것도 정상입니다. '뛰어다녀라! 활동해라! 현장 들어가라!' 이것도 또, 그렇게 같은 맥락에서 역시 복음 전도라는 이런 메시지가 또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복음이라는 체질이 되어 있고, 복음이라는 것이 되어 있을 때는, '아파도 복음! 가만히 있어도 복음! 뛰어다녀도 복음!' 이런 해석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말하자면 복음이라는, 전도라는 것이 하나님이 마음에 맞느냐? 이게 문제거든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 왜, 지금 교회와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 배경을 말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과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파도, 고난스러워도, 고통스러워도, 실패해도 승리한다!' 그 배경이 뭡니까? 복음! 하나님의 방향에 맞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뭡니까? 아파도 성경 해석이 전도고, 슬퍼도 전도고, 돈 많이 있어도 전도고 선교고, 없어도 전도고 선교고... 이러니 뭡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고 원하시는 것이니까! 아픈 속에서도 축복! 돈 있어도 축복! 없어도 축복!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을 세워서 세계 복음화의 주인공을 삼으셔서, 늘 말씀한 거죠.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폭탄이 터져도 전도!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와 역사가 바로 여기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드리면서 무슨 말씀하느냐?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고, 기도가 정말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기도가,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예배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기에, 여러분 하는 모든 삶에, 모든 일에, 이미 주님께서 가는 장소와 사건과 일마다, 이미 뭡니까? 응답이 와 있더라! 응답의 역사가 와 있더라!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교회에 왔다! 또 송현 교회에 왔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이 자리에 왔다! 이 교회에 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 왔음으로 인해서, '내 중심과 내 체질이 하나님의 방향과 과연...' '맞게 되어있다!' 여기에 모든 축복이 약속되어지는 겁니다. 이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 없느냐? 다른 교회 안 되느냐? 아닙니다. 똑 같습니다. 거기도 역시 선교와 전도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고, 그 사실이 모든 삶에 중심이 되어있다! 그러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거니까!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이 거기도 마찬가지고, 여기도 마찬가지고,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교회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 성도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기에, 이것이 안된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도와주자! 이게 안된 것이 있다면 생명을 걸고 이 땅에 이 일을 위해서 행하자!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중심이요, 하나님 앞에, 복음에 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 참 생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내가 예배에 성공해야 되겠다!' 그것을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예배 성공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참 생명이 내 안에 와 있구나! 내가 그 생명에 그 이름 부를 때마다 새 힘이, 말씀들을 때마다 새 힘이, 목사님 메시지를 통해서 새 힘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이, 새 능력이 구체적으로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때에 와집니다. 이 사실이 날마다 체험되게 될 때 나도 모르게 진실한 고백이 나갑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진짜 절대주권자인 그분 앞에, 내 인생을 다 맡아서 나를 확실하게 인도하시는 그분 앞에, 어리광 아닌 어리광이, 떼짱 아닌 떼짱이, 믿음의 고백으로 터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중심에 깊은 곳에 비밀 중에 비밀도 우리 주님 앞에 내어놓는다!' 그 말이 아니고 저절로 토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간증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에,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개인이, 함께 교회와, 그 다음에 구역과 가정을 통해서, 개인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주의 계획과 뜻을 따라, 함께 방향 맞추었다! 뭐 '교회를 건축한다!' 이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 부수적인 일입니다. 이 일에 방향 맞추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엄청난 기도의 응답들이 사실적으로 일어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 붙잡고 오늘 이 말씀 안에서 한 주간도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합심하여 일하는 교회
마 18:15-20 / 성홍모목사
초대 교회는 같은 성도들끼리 부를 때에 사용한 것으로 '형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라는 이름은 들고 들어도 실증나지 않고 좋은 이름입니다. 옛날 장자라는 사람은 "형제는 수족과 같고 부부는 의복과 같다. 의복은 다른 옷으로 바꾸어 입을 수 있어도 수족은 한번 없어지면 다시 불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형제우의'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굳이 부부에게 비유하고 있지만 형제사랑을 강조하여 수족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형제라는 말을 들을 최초의 사람은 가인과 아벨의 형제였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형제인데, 두 사이에는 경쟁심이 일어났고, 마침내 형이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이는 최초의 살인이 벌어진 것입니다. 가장 사랑해야할 사이인데, 이 세상에 나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경쟁상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잠언17:17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위급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형제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말할 때에 형제주의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리스도주의, 그리스도가 중심인 종교입니다. 한 분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고, 한 주님을 믿다보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요, 자매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어로 형제라는 말은 "아델포스"라고 하는데, 같은 태에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한 가족관계를 나타내기도 하였고, 가까운 친척을 의미하기도 하였고, 비유적으로는 동료, 친구, 동포에 대하여 친근하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같은 성도들을 형제라고 하였고, 초신자들을 대할 때에 형제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믿음의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마23:8에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너희는 다 형제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대표들이 모인 총회에서 사용된 성도를 부르는 이름으로 형제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행15:22-23에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사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사도와 장로된 성도들 자신이 형제라고 하였고, 편지를 받는 이방인 성도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가 사용한 성도들 간의 호칭이 바로 형제라는 말이었습니다.
"형제" 참으로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형제'라는 말에는 사랑이 담겨있는 말이요, 높고 낮은 계급이 아닌 서로가 용납하고 받아주며, 서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를 형제라고 하는데,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신 큰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형제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 형제라는 이름이 이방인 성도들에게까지 확대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큰 가족의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장자요, 맏아들이시며 독생자이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함께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우리들은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한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롬8:29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에 주신 말씀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에 형제애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유지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도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15절 말씀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의 하신 말씀의 뜻은 알겠는데, 실제로 이 말씀대로 사람을 권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분명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이성관계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잘 나오는데, 그래서 같은 성도요 형제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가정이 원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의 가정을 보면 불안한 느낌은 받는데, 확실히 캐묻기도 어려운 일이요, 확실히 알았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은 죄인이면서 내가 뭐라고 누구를 권면한다는 말입니까? 권면하는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오히려 무안하게 만들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다 죄인이요, 하루에 몇 번씩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죄인을 나무라고 교육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할 사람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15절 말씀에 "죄를 범하거든"이란 말에 난하주에 보면 "어떤 사본에는 네게 죄를"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에게 죄를 범하는 한 형제가 있으면 조용히 나 혼자 찾아가서 권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는 형제가 그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할 생각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요즈음에 교인을 당회로 불러들여 권면하고 문제를 시정하려고 한다면 화를 내고 싸우자고 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여기 뿐인 줄 아십니까? 다른 교회에 가면 될 것이 아님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누가 고자질하였습니까?" 이렇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권면하고 권징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요, 형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찾아가서 권면하는 것은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요, 죄 지은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죄를 고백하는 일도 용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커지기 시작합니다.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고, 교회 앞에 말하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긴다고 하는 것은 징계한다는 말인데,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개인적으로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라고 지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 교인들을 향하여 어떤 원칙을 제시하고 권면할 때에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깨닫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말씀을 드리면 나를 때리는 말이라고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 말씀은 아무개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어떤 누구를 망신스럽게 하거나, 질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형제를 참 형제로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얻으려고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예전에 교회 다니다가 지금은 세상에 치우쳐 살아가는 이들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만나서 권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를 다시 교회로 이끌어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잃은 양 찾기 운동"을 벌여, 예전에 다니다가 낙심한 교인들을 찾아내고, 다시 불러들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이었지만, 그는 종으로 살려고 힘썼습니다. 고전9:19-22에 보면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잃지 않고, 사람을 얻으려고 하면 끝까지 노력해야만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쉽게 포기하고, 내 책임이 아니라는 듯이 회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게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찾아가서 그를 권면하시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하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여 권면하라고 하십니다. 좋았던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최선을 다하여 권면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 안에는 권징이라는 것이 있어서 몇 가지 벌을 줄 수 있습니다. 견책, 수찬정지, 출교가 있습니다. 근신하라고 견책할 수 있습니다. 수찬정지에는 무기와 유기가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견책보다 훨씬 엄한 벌입니다. 그리고 출교라는 것은 교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요,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심한 말로 하면 지옥가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는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18절 말씀은 교회의 어떤 결정과 권징에 대한 것을 인정하지만,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어떠한 견책도 인정하지만 다시는 풀 수 없도록 단단히 매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죄인이 회개하고 개심하면 교회는 그에게 내린 책벌을 해제하고 풀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범법자라고 하여도 재기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범법자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들끼리라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나님도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설교하지 않는 어려운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로서 19절 말씀부터 20절까지만 설교하면 쉬운 일이지만 15-18절의 말씀을 다루어 본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교회라는 곳은 합심해야 하는 일들이 많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명하시면서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피치 못하여 권징할 때에는 기도하지 않고는 하지 말 것을 권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을 권면하려고 찾아가는 두 세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는 하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한 두 세 사람은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19절의 말씀은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으로 주신 말씀이면서 기도에도 합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많은 말씀이 개인기도, 한 사람의 기도를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합심하는 기도, 연합하는 기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두 세 사람이라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 함께 있으며,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합심하여야 하는 일들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장학위원회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일년에 2회 장학헌금을 드리고 있으며, 예산을 배정하고, 여전도회가 합심하여 장학금을 모아 신학생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여러 교우님들이 합심하여 청년들을 단기 선교에 보내시면서 1200만원이라는 많은 돈을 모아주셨습니다. 십시일반이라고 하였는데, 조금 조금씩 모아주신 것이 거금이 되어 청년들의 단체 활동 경비와 선교비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청년들이 다음 세대에도 우리 교회에서 몸담고 신앙생활하고 이 교회에서 주인 노릇 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힙합이란 이상한 춤을 추고 흔들어도 여기서 장로가 되고, 권사, 집사가 되고 이곳을 비우지 말고 지내라고 참아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비라고 하지만 용돈까지 보태주면서 격려하고 선교의 열정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합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연합하고 일치하고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20절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는 언제나 주님이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을 저작하였고, 그것을 가지고 수많은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는 습관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교육자 호레이스 만은 "습관은 밧줄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습관이란 밧줄을 매일 짜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짜여진 습관은 절대로 파손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요, 예전의 습관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기에 새로운 습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습관이 만들려면 40일 정도 강 훈련을 해야 바뀔 수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는 7가지의 습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도적인 사람이 되라",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 하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시너지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집단으로 하여금 시너지를 활용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의 넉넉하고 관용하고 앞장서는 성품으로, 사람들을 한 마음으로 이끌어 시너지를 창조하게 하는 것이 지도력이라는 말입니다.
'시너지(synergy)'라는 말은 전체가 각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너지란 "각자가 제 각기 일하여 얻은 결과의 합보다 둘 이상 함께 일하여 얻은 결과가 수량이 많아지거나 품질이 좋아지거나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때에 시너지가 창출되고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왼팔은 뒷짐지고, 오른팔로만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면 약 50kg을 들어 올릴 수 있답니다. 그러면 이제는 오른팔을 뒷짐지고 왼팔로만 들어올리면 약 20kg을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50kg과 20kg을 합하면 70kg을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인데, 두 팔로 합하여 들어올리면 무려 110kg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합니다. 각각이 일하면 70kg이지만 두 팔로 들어올 때에 110kg을 들어올렸으니 40kg을 더 들어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너지가 발생하였다, 창출되었다고 합니다. 수량이 많아지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일어나는데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어도, 두 사람이 서로가 등을 대고 힘을 합하여 일어나려고 하면 거뜬히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plywood" 베니어판- 합판을 생각합시다. 얇은 2mm 합판에 하중을 가하면 600파운드, 두 개를 합하면 두 배가 아니라 8배가 강해지고, 합판 세 개를 합하면 무려 15배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너지 효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합심하여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내어놓고 일할 때에 시너지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합심하여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형제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합하여 함께 기도하면서 이 험한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장학위원들이 힘을 모아 신학생들을 장학하고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합심하여 한 마음으로 힘써 일해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형제들입니다.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있습니다. 형제를 잃지 않으려고 권면하고 용서하고 함께 기도하는 중에 연합과 일치를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합심하는 교회
마 18:15-20 / 이정선목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서로가 사랑하고 존중하며 돌보는 것이 마땅히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교회 안에서 소자 중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매우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앞에서 소자로 표현된 교회 안의 구성원이 여기서는 형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어서, 한 형제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범한 것처럼 읽혀지고 있습니다만,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으로 번역되어 있는 성경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사본들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인데, 신약성경 사본의 줄기는 크게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바티칸 사본으로 나뉘어집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동양과 서양의 문물을 집대성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자기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로마는 그리스가 이룩한 문명을 기초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는데, 세계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로마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그렇게 소원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와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가 발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전통과 맞물려서 신약성경의 사본도 그 계열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이가 발달하지 않아서 파피루스에 기록을 했어요. 파피루스는 나일강 유역에서 자라는 갈대인데, 이것을 자르고 펴서 가로 세로로 놓고 눌러서 말리면 종이가 됩니다. 여기에 성경을 기록했는데, 문제는 이 종이가 오래 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지나서 해어지게 되면 다시 베껴 써야겠지요? 그리고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손으로 필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사본들이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오류도 생겨나고 사본들끼리 내용도 달라지고, 그래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사본의 계열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15절의 경우는, 바티칸 계열의 사본에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으로 되어 있고,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으로 되어 있어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들도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마다 해당 구절에다 그것을 표시해 놓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네게’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또는 들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말이지요.
어쨌거나 이 본문에서는 문맥상으로 보면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의미가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형제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죄라고 하면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람에게도 죄를 범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집 나간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눅 15:21)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21)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닌 것입니다.
교회 안의 형제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보통 다툼이 생겼을 때는 서로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해결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전후 문맥을 보아서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도덕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범했을 때, 또는 교회 안에서 다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가서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권고한다는 것은 책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도록 촉구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했다고 해서 곧바로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줄을 알면서도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거나 동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과 조용히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거나 또는 그 사람을 흉보고 비난하게 되지요?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사자끼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물 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돌다 보면 처음 시작했을 때와 많이 달라지기 일쑤이고, 그렇게 돌다가 당사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오해가 또 오해를 낳게 됩니다.
잘못한 형제를 찾아가서 권고한다는 것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마음에 품고 가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잘못을 일깨워서 올바른 데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고 형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 거예요. 나는 사과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설령 그 형제가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용서했다고 해서 그 형제를 그대로 놔두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닙니다.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한데 그대로 두면 수렁에 빠진 것을 건져내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문제를 공개하고 일을 키울 것이 아니라, 조용히 개인적으로 그 형제의 죄를 회개하도록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그 형제가 권고를 받아들이고 회개한다면 그 형제를 얻은 것이 됩니다. 그 형제를 죄의 수렁에서 건져낸 것이란 말입니다.
일이 그렇게만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때때로 잘못한 줄을 알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아직 미움이 남아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혹은 잘못을 시인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듣지 않고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한두 사람의 증인을 데리고 가서 권고하는 것에 대한 증인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때 이 증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싸움에 편들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한데 권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증인, 목격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율법에서는 한 사람의 증거는 효력이 없습니다.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거가 일치해야 그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형제가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 혼자 떠들어서는 효력이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증인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다른 증인까지 있는 데서 자기 잘못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기란 웬만큼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까 증인을 데리고 가는 것도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웬만하면 이 단계에서 대부분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단계는 교회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교회의 권위가 작동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관으로 이 땅에 세우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교회의 근거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는 구원 받을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인간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위임받아서 관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그 홍수에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그런 교회의 권위로 이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와서도 죄를 회개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최고의 영적 권위를 갖는데, 그리스도께서 위임하신 권위에 굴복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이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 구원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형제와의 관계가 다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세리를 차별하고 교제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친구가 되셨고,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회개하기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권고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언제 그 형제가 회개하고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을 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가 바로 그것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어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딱 한 번 주어진 기회입니다. 회개할 기회는 땅에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땅에서 회개하지 못한 것을 하늘에 가서 회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땅에서의 삶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를 믿으면 하늘의 백성이 됩니다. 땅에서는 안 믿다가 하늘에 가서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거나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땅에서 회개하지 못하면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을 수 없고, 땅에서 사랑하지 않으면 다시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땅에서 충실한 삶을 산 사람이 하늘에서 충성된 자의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여기서 두 사람은 누구일까요? 일반적인 두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앞에서 서로 다투었던 두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마침내 합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단계에서 단둘이 만나 권고할 때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고 두 사람이 합심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합심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두 번째 단계에서 다른 증인들 앞에 가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합심하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뉘우치는 척만 하고 마음속으로는 회개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합심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합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단계까지 왔다면, 그만큼 자기 고집을 꺾고 합심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인데, 교회의 권위 앞에 순종하고 더 많은 양보를 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합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결국 합심하게 되었다면, 이것처럼 아름답고 귀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시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다투고 서로에게 죄를 범하는 것처럼 옳지 않고 또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교회 안의 형제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입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죄를 범한다는 것은 한 몸 안에서 손이 눈을 찌르거나 발이 머리를 차는 것처럼 성립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결코 용납될 수도 없는 일이지요.
반면에, 교회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합심하는 것은 가장 귀한 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무엇이든 이루어주실 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다시 약속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한 마음을 품고 주를 섬길 때, 우리와 함께 주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제가 평생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의 분쟁을 겪지 않는 것입니다. 제 신학교 동기 목사님 한 분은 미국의 어느 한인교회에 부임했는데, 몇 년만에 교회에 분쟁이 생기고 재판까지 했어요. 대체로 미국에서는 목사와 당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재판을 하면 당회가 이기더군요. 그래서 목사가 교회를 떠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목사를 따라 나와서 새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많이 있지만, 미국의 한인교회들은 왜 그렇게 조용할 날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그 가운데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지키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기 않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가 꿈꾸는 교회는 형제들이 합심하는 교회입니다. 합심하지 않는 곳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늘 주님 말씀하신 대로 지혜롭고 올바른 절차에 따라, 또 우리의 믿음의 순종으로 다툼이 해결되고 형제들이 합심하는 데 이르는 교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교회, 그래서 우리 주님이 함께 계시는 교회,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 서
마 18:15-22 / 서윤발 목사
1. 김 한 타스로 소년원에
우리 금정구 관내에 소년원이 한 군데 있다는 것 아십니까? 10살 조금 넘은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대략 20살 이전까지의 아이들이 죄를 짖고 잡혀와서 거기서 같이 생활하는 겁니다.
좀 오래된 일인데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그 소년원에 가서 그 원생들하고 같이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강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원생들이 갇혀 있는 방안에 들어가서 그 방 원생들하고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 보면 이 원생들이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는지 모릅니다. 찬송도 잘 부르고 말씀도 잘 듣고 게 중에 기타 치는 애들이 있으면 또 기타로 찬송가도 쳐줍니다. 물론 그 아이들이 다 기독교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자기들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거죠.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준비해간 과자나 떡 같은 것을 나눠줍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처음 만난 원생들하고 인사를 하고 나면 반드시 묻게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너 무슨 일로 들어왔냐?' 그겁니다.
어찌 보면 그런 질문을 하면 화내지 않겠느냐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데 의외로 선뜻 선뜻 이야기를 잘 해 줍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누가 무슨 죄를 짖고 들어왔는지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대신 나서서 설명해 주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 애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이 애는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막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린 아이들이 정말 상상하지 못할 별의 별 죄를 다 짖고 들어온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요 아이들 얼굴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서로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죠.
그런데 그 아이들의 사정을 다 들으면서 참 딱한 아이들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게 중에 한 아이는 이제 열 서너 살 된 것 같았는데 큰 죄를 짖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김 한 타스를 훔치다가 잡혀서 들어온 애가 있었습니다. 그게 정말인지 교도관에게 물어보니까 맞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니 어떻게 김 한 타스 가지고 이런 아이를 교도소에 보낼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까 교도관이 하는 말이 그 김을 팔던 주인이 끝까지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겁니다. 아마 김을 팔던 주인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이런 녀석은 본 떼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녀석들도 훔칠 생각을 안 한다. 물론 도적질을 하는 것은 범죄이지요. 김 한 타스가 아니라 한 장을 훔쳐도 범죄는 범죄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김 한 타스 훔치다가 교도소 생활을 했는데 지금은 어려서 부끄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겠지만 나중에 그 아이가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도 다 부정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자기가 그 때 교도소 생활한 그 일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겠는가? 그리고 그런 아이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 대해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아마 힘들 겁니다. 내가 원칙대로 벌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도 원칙대로 해야 된다.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원칙대로...
죠지 오웰이라는 사람이 1998년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미래 사회가 감시와 통제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24시간 감시합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비디오로 촬영되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녹음이 되어서 잘못된 행동과 말을 할 때 마다 거기에 따른 제재를 받는 겁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야 말로 정해진 원칙대로 하는 겁니다. 평등하지요. 그러나 행복하겠습니까? 사회는 온통 불안과 불신으로 가득하게 되고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합니다.
2.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기 쉽다.
물론 모든 범죄자들을 다 용서하고 석방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용서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처벌을 해야 하는지 많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퍅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마 한 번도 용서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어렵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허물이 있어도 좀 너그러울 수 있습니다. 나도 그만한 허물은 있었던 사람인데...그리고는 용서하게 되는 겁니다.
'레미제라블(Lesmiserable)'이라는 소설을 한 번쯤은 다 읽어 보셨을 겁니다. 프랑스 작가인 빅토르 위고(V. Hugo)가 쓴 소설인데 이 '레미제라블'이라는 말은 '비참한 사람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 제목 그대로 당시 프랑스 서민들은 정말 비참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으로 여겨지지도 안을 만큼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나중에는 견디다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도 그런 프랑스 사람들의 상황을 대변하면서 레미제라블이라고 제목을 붙였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설이 '장발장' 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장발장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요.
이 소설을 보면 장발장이 처음에는 가난과 배고픔 때문에 견디다 못해 빵 한 조각을 훔쳐먹고 19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합니다. 참 비참하지요? 나중에 장발장은 석방되었지만 있을 곳이 없으니까 헤메다가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의 주교가 아주 친절하게 맞아 줬습니다. 그래도 이 장발장이 나오면서 은잔을 훔쳐 나왔는데 경찰에게 걸려버렸다. 그래서 교회로 끌려갔는데 그 주교가 말하기를 은잔은 내가 준 것이고 은촛대 줬는데 이거는 왜 안 가지고 갔습니까? 그러는 겁니다. 용서죠. 그 한 마디 말에 장발장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몇 년 후에 장발장은 이름을 바꾸어 살면서 공장주로 성공하고 시장까지 되면서 많은 좋은 일을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게 되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장발장이 불법으로 죄수의 신분을 감추고 이름을 바꿨다는 것을 알게 된 형사 한 사람이 끝까지 장발장을 쫓아다녀서 거의 붙들릴 뻔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거드럼 피우던 귀족들은 줄줄이 처형을 당하고 시민들의 사회가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는 장발장을 쫓아다니던 형사가 오히려 숨어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사를 청년들이 붙들어 가지고는 장발장에게 끌고 왔습니다. 형사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장발장은 이 형사를 풀어주라 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사가 묻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나를 죽이고 싶도록 미울텐데 어떻게 나를 살려주시오?" 그랬더니 장발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참으로 넓은 것이 많소. 저 광활한 대지를 보시오. 얼마나 넓습니까? 바다는 저 대지보다 더 넓은 것이오. 저 하늘은 바다보다 더 넓은 것이오. 그러나 저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소. 그것이 무엇인지 아오? 그것은 용서라고 하는 관대한 마음이라오."
참 멋진 말이지요? 멋있는 게 아니라 감동적인 말입니다. 용서를 받은 사람이 용서하게 되고 용서하게 될 때 세상은 달라져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 넓어질 수 있고 그 마음에 자비가 넘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일을 기억하시죠? 어느 날 주님께서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소문난 여자 한 사람이 주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옥합을 주님께 붓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옥합이 돈이 얼만데 쓸데없이 허비하느냐?' 면서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이런 죄인이 감히 주님을 가까이 하느냐?' 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기 힘들어도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3. 용서받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 받은 자라고 해서 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넓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큰 용서를 받은 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얼마나 많이 용서받은 자인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받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닫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떤 나라의 국왕이 국가의 재정 결산을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왕에게 1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빌려갔으면서도 값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를 붙들어 왔는데 1만 달란트라면 오늘날 돈으로 따지면 몇 조원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그러니 이런 돈을 빌려서 이 때 까지 값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평생 벌어도 절대 값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국왕이 신하들에게 명령하기를 이 사람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일부분이라도 갚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신하가 막 절을 하면서 좀 봐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이 국왕이 마음이 너무 넓어 가지고 이 사람을 보니 너무 불쌍해서 그 빚을 아예 탕감해 줘 버렸습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한 순간에 몇 조원을 번 겁니다. 이제 안 갚아도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엄청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풀려나서 집에 가는 길에 보니까 잘 아는 사람이 한 사람 오는 겁니다. 이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빌려가서는 안 갚은 사람이거든요. 100 데나리온이면 한 5-6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는 몇 조원도 용서받았는데 자네 500만원 없는 걸로 하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당장에 멱살을 잡고는 갚으라고 협박하다가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이 괴씸 하잖아요? 자기는 몇 조원을 용서 받아놓고 자기 친구가 몇 백 만원 안 갚는다고 감옥에 넣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가서 일러 바쳐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또 왕이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도로 잡아 오라 해서는 감옥에 넣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냥 용서했으면 둘 다 사는 건데 그걸 용서하지 못해서 둘 다 감옥살이하게 된 겁니다. 왜 용서할 수 없었을 까요? 이 사람은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액수를 탕감 받았는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깨닫지 못한 겁니다. 아무리 크게 용서받았어도 자기가 그렇게 용서받아 산 사람이라는 걸 깨닫지 못할 때 그 용서는 아무 변화도 만들지 못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이렇게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고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4.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가 이 이야기의 의미를 알게 되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의 이유를 알게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먼저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몇 번...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치면서 세 번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 정도로 대폭 늘려서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용서하면서 몇 번 용서했는지, 참으면서 몇 번 참았는지 계산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계산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주님이 나를 얼마나 용서하셨는지, 주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사는 성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지 못하고 용서를 이야기하면 몇 번까지?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됩니까? 그렇게 계산을 하게 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알고 나면 계산을 할 수 없는 겁니다.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에 평강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해 보십시오. 주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시고 평강을 주십니다. 용서하며 주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더 큰 긍휼을 얻게 됩니다.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겁니다.
마가복음 2장 10절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했습니다. 주님은 죄를 심판하는 권세를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용서하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을 또 보면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했습니다. 용서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모습을 볼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일을 하는데...
여러분,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서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마음 속에서부터 용서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도대체 그 이유가 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을 떼먹고 달아났다든지, 큰 손해를 입혔다든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리 큰 이유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사소한 문제로 싫어 졌다가 나중에는 그 사람의 말투도 밉고 목소리도 밉고, 옷 입은 모습도 밉고 심지어는 걸어가는 자세까지 밉워지는 법입니다. 어떤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미우니까 이것, 저것 다 미운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밉다고만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할 때 마다 부글 부글 끓어 오릅니다.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만 상처를 입히는 것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W. Shakespeare 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너의 원수로 인하여 난로의 불을 뜨겁게 지피지 말라. 오히려 그 불이 너 자신을 불태울 것이다"
롬 12:20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불태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사람은 원수의 머리를 불태우는 사람입니다.
마음속에 미운 사람이 있거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넓은 마음속에 주님의 평강과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지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치유 공동체, 사명 공동체
마 18:15-35 / 최영기목사
교회는 치유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와서 치유를 받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병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회는 또한 사명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군사가 되기 위하여 훈련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훈련소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 사명은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치유만을 강조할 때에 어린애 같고 이기적이고 쓸모 없는 크리스천이 키워집니다. 사명만을 강조할 때에 교회 생활이 건조해지고 탈진 상태에 이르기가 쉽습니다. 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보통 교회는 둘 중의 하나에 치우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에 치우치는 교회라면 그래도 괜찮은 교회입니다. 둘 중의 하나 조차에도 집중을 하지 아니하고 교회가 왜 존재해야하는지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교회가 안타깝게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사명 공동체와 치유 공동체로서 명심해야할 교훈을 발견합니다.
Ⅰ. 사명 공동체는 서로 바로 잡아준다
교회는 치유 공동체이기 때문에 잘못해도 용납해주어야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사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잘못 할 때에는 바로 잡아주어야합니다. 어떻게 바로 잡아줄까요?
1. 도전한다
우리는 형제자매가 죄를 지을 때에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저처럼 부딪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무시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형제 자매가 죄를 지을 때에는 도전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공동체를 파괴하든지 아니면 본인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라면 공동체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2. 은밀하게 한다
주님은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충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형제 자매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도전을 하지는 않고 이웃에게 말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죄를 지어서 자신과 공동체를 다쳐주고 있다고 생각되면 남에게 말하지 말고 본인에게 먼저 말하여야합니다.
3. 회복을 목표로 한다
예수님은 상대방이 여러분의 충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얻는 것, 즉 회복이 목적입니다. 충고할 때에 둘이 만나서 조용히 하라고 하는 것도 회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자는 것이 목적인데 소문이 나면 본인에게 쓸데없는 수치를 심어주고 올바른 삶을 사는 데에 지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목표가 회복이기 때문에 방법과 태도를 잘 선택하여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6:1에서 누가 죄를 짓는 것을 발견하거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라고 말합니다. 그럼으로 질책을 하거나, 정죄를 하거나, 언성을 높이면 안 됩니다. 도전을 했는데도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 않는 이유는 온유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복을 목적으로 하기보다 정죄하는 마음으로 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 잡아주라고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말에 그러한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우월감을 갖고 바로 잡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같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갖고 바로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형제 자매가 죄를 지을 때에 공동체와 자신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기가 되고 마음속에 분노가 하나도 없을 때에만 잡아주어야 합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고 분노가 있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잡아주려다가 오히려 상대방을 더 죄를 짓게 만들고 더 큰 파괴를 공동체에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없고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에 바로 잡아주어야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합니다.
4. 객관성을 유지한다
혼자 조용히 찾아가서 충고를 해도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숫자의 사람을 대동하고 찾아가는 이유도 여전히 여러 사람이 알기 전에 조용히 상대방이 회개하고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작은 숫자이지만 다른 사람을 대동하는 이유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도전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해를 해서 잘못 생각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지 않고 도전하는 본인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공정함과 객관성을 중시하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에 어떤 범죄이든지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벌할 수 없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신 19:15). 한 사람의 증언은 위증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장로에 대해 고발하는 것이 있을 때에 두세 사람의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딤전 5:19). 이 당시에만 해도 교회 조직이 정착되지 않았고 초대 교회는 직책 중심이기보다 은사 중심으로 사역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 장로라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서 고발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의고발에 의존하지 말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을 때에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장로 즉 지도자라면 목자나 집사가 될 것입니다. 저에게도 가끔 목자나 집사님에 관해 부정적인 얘기를 들려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제가 무시합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더 같은 얘기를 들려주면 사실인지 아닌지 도전해야할 것인지 않을 것인지를 고려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제가 조심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와서 사람들의 누구에 관하여 어쩌고저쩌고 한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물어보면 사람들이라는 것이 자신입니다. 또 실제로 두세 사람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어도 정보의 근원을 살펴보면 같은 한 사람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듣지 않은 것으로 넘겨버립니다. 두세 사람을 통하여 확인된 사건이 아닌 것은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니까 듣고 잊어버리는 것으로 하고 남에게 전하기 않으면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애매한 오해와 모략 중상으로 상처를 받는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5. 교회 이름으로 징계한다
두세 사람을 대동하고 가서 얘기를 들어보았고 대동한 사람들이 듣기에도 분명히 죄를 지었고 두 세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회개를 촉구했는데도 회개를 거부하면 이제는 은밀한 것을 버리고 공개해야합니다.
공적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충고하였는데도 회개를 거부하면 그때에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하여야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권위와 능력을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에서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18절). 교회에서 같은 마음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고 작은 인원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9-20절). 주님께서 같이 하시면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지혜를 구할 때에 지혜를 주시고 공동체에 같이 하시며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회의 결정을 무시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진정 삶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정체를 노출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은 이방 사람이나 세리, 즉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예를 들자면 회원 교인 명부에서 삭제됩니다. 회원 교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만이 될 수가 있습니다. 회원 교인 자격을 잃으면 물론 모든 사역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하라는 것은 왕따를 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그렇다면 안 믿는 사람처럼 취급하여서 복음을 들여주고 회개를 촉구하여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하도록 하여야합니다. 고린도 전서에 보면 이러한 예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자기 아버지 아내와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는 워낙 음란한 고장이라 교인들도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몰랐거나 도전할 용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 사도 바울을 강하게 지금 말로 하면 제적시킬 것을 명합니다(고전 5:4-5절). 그러나 목적은 무엇입니까?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쓴 고린도 후서에 보면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러한 권면의 말을 합니다. 충분한 벌을 내렸으니까 용서해주고 사랑해주라는 것입니다(고후 2:6-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교회는 사명 공동체입니다. 악한 영과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상과 싸워서 그들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출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사명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은 도전하여서 바로잡아야합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이 젊은 성가대 대원과 음행을 범했는데도 쉬쉬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를 묵과했기 때문에 전도는 더 이상 안되고 교인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새로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저버리고 부흥하던 교회가 마침내는 손꼽을만한 숫자의 사람만 남는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여 용서함 받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도전하여서 죄로 인하여 개인과 교회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Ⅱ. 치유 공동체는 서로 용서한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사명 공동체인 동시에 치유 공동체입니다. 치유가 경험되기 위하여서는 용서가 기조가 되어야합니다.
1. 용서는 횟수가 아니고 태도이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은 베드로가 형제가 잘못할 때에 몇 번 용서해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랍비는 3번까지는 용서해주지만 그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한번의 실수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비하면 3번 용서하는 것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동체는 바리새인들보다는 더 용서하여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7번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70번씩 7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70번씩 7번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490번을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용서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도에 관심이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 기조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입니다.
2. 용서는 자유를 준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큰 특징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하지 않으면 자유를 상실합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지배를 받아야합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생각하듯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생각을 지배당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은 생각만이 아닙니다. 삶 자체도 지배를 합니다. 교회 사역이 하고 싶어도 그 사람이 이미 하고 있으면 하지를 못합니다. 가고 싶은 모임이 있어도 그 사람이 참석한다는 것을 알면 피하게 됩니다. 또 친했던 친구라 할지라도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과 친한 것을 알면 관계가 멀어집니다. 이러다 보면 소화 불량, 고혈압, 불면증 등 신체적인 증상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하면 정신 질환에 걸리기까지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삶은 자유스러워야하는데 이처럼 한 사람의 영향 밑에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여야하는 것입니다.
3. 형제를 용서 않으면 자신도 용서 못 받는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하여 예수님이 용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왕에게 1만 탈란트 빚을 진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탈란트가 노동자 15년 임금에 해당하니까 2만 불로 쳐도 1만 탈란트면 2억 달러입니다. 그 당시에는 세금을 걷을 때에 입찰을 하도록 해서 낙찰을 받은 사람이 세금을 거두어 약속한 만큼만 왕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자기 수수료로 챙기는데 아마 흉년이 들었거나 다른 어떠한 이유로 약속한 액수를 바치지 못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때에 왕은 아내와 자녀들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다 판다고 해도 돈을 다 갚을 수 없는 것을 알지만 벌로써 그러한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 종은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사실 일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액수이지만 어떤 약속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이것을 보고 왕이 불쌍해서 탕감을 해주었습니다. 이 종은 나가서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찾아가서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까 백 데나리온이면 약 석 달치 봉급에 해당하니까 작은 액수는 아닙니다. 이때에 동료가 시간을 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듣기 않고 고발해서 감옥에 처넣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것을 보고 마음이 안 되어서 주인에게 고했을 때에 주인이 노발대발해서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못한 종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투옥시키라고 명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형제자매를 용서해야합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죄도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이 용서했느냐 안 했느냐에 달린 것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는 항상 하나님 쪽에서 보는 면과 인간 쪽에서 보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해가 떴다가 졌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을 하는 것입니다. 둘 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남을 용서하게 되어있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합니다. 특별히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없어야합니다.
자신이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용서는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었지만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믿음이 결정인 것처럼 용서도 결정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으로 받은 상처의 기억도 남았고 아픔도 남았고 관계도 전과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을 빌어줄 수 있으면 용서한 것입니다(롬 12:14). 감정에도 불구하고 나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도우면 용서한 것입니다.
용서할 때에 우리는 자유함을 맛봅니다. 2002년을 마감하면서 용서로 묵은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가벼운 마음으로 맞으시기 바랍니다.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마 18:18-20 / 박찬길목사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를 나갈 때에 저희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교회는 다 부흥되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목회해라" 담임전도사로 목회 나가는 아들이 걱정이 되셨는지 위로와 힘을 주시기 위해서 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집사님이신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때로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곳이기 때문에 다 부흥되어야 하는데 어느 교회는 부흥이 되고 어느 교회는 부흥이 안 되는 것일까? 어느 누구보다도 교회의 부흥을 하나님이 원하실 텐데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 목회를 20년째 하면서 보면 부흥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부흥되지 않는 교회도 있거든요. 우리 지역만 봐도 부흥하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못하는 교회가 있어요. 목사님들이 열심히 없어서 그러나? 어느 목사님은 아주 열심히 목회하는데 생각처럼 부흥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예전에 고민했던 질문입니다.
부흥하는 교회와 부흥하지 않는 교회의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의 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흥시키는 것이고,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평범하게 사용하시기 위하여 부흥하지 않는 것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셔서 부흥되는 것이고,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덜 역사하셔서 부흥도 덜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교회성장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부흥되는 교회나 부흥되지 않는 교회는 나름대로 의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목사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선교 비전이 확실하고 교인들이 열정적으로 뜨겁게 헌신하고 시설이나 여러 가지 입지조건이 좋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부흥하지 않는 교회는 설교가 특징이 없고 교인들의 분위기가 차갑고 열정이 없고 헌신하지 않으며 교인들의 벽이 두텁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부흥되는 교회와 부흥되지 않는 교회의 중요한 원인 일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개역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지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묶고 푸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은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서 매고 푸는 관계가 하늘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교회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공동체와 이 세상에서의 매고 푸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설교 처음 부분에 교회의 부흥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여기에 대입하면 교회 부흥의 키워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셔서 부흥되고, 부흥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잠잠히 계셔서 부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되는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부흥이 되는 겁니다. 전적으로 교인들에 의하여 부흥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려는 의도는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나서서 막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가 움직일 때에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19절에 가면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 열쇠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천국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잖아요. 그 중요한 것이 이 땅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삶이 좌우되고 교회의 부흥도 좌우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땅에 키워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19절을 봅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주실 것이다"
부흥의 키워드는 기도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있어야 하고 위치가 좋아야 하고 시스템이 좋으면 부흥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비록 변변한 건물도 없고 위치가 썩 좋지 않고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기도하는 교회이면 그러한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힘은 기도에서 나오는 거예요.
부흥하는 교회를 가만히 보면 공통점이 있잖아요. 기도하는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영적이기 때문에 기도 외의 것으로 부흥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기도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부흥하는 것이고 기도를 소홀히 하는 교회는 침체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열매가 있는 것이고 기도를 게을리 하는 교회는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은혜롭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실 텐데,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하여 복된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영적으로 메마르고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는 거예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인은 은혜가 충만한 것이고 기도가 없는 교인은 영적으로 메마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성도들이 하는 모든 일은 기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열심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키워드는 기도예요. 기도해야 가정이 평화로운 거예요. 기도해야 사업이 잘 되는 거예요. 기도해야 지혜가 있어서 공부도 잘되는 거예요. 기도해야 승리하는 거예요. 할렐루야!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군대와 아말렉 군대가 싸울 때에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이상한 것은 모세가 두 팔을 들고 기도할 때에는 이스라엘이 이기는데,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겁니다. 성도가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겁니다. 성도는 기도하는 동안에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면 믿음이 너무 좋아서 기도하지 않고 큰소리 치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구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 해주신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지요. 구하지 않은 것까지 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이 너무 좋지요? 어떻게 하면 저런 믿음을 가질까 참 부러워요. 그런데 부러워할 것 없어요. 엉터리 믿음이거든요. 기도하지 않고 되는 것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 열심히 기도로 풀 때에 하늘에서도 풀게 해주시고, 이 땅에서 기도로 매일 때에 하늘에서도 매게 해주신다고 하셨는데, 기도하지 않고 풀어지고 기도하지 않고 매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풀어지기도 하고 기도를 통하여 매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땅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늘의 역사가 좌우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기도하는 대로 역사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지만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기도는 철도 레일과 같아서 기관차가 아무리 강한 엔진을 갖추고 있어도 레일이 깔린 곳만 달리듯이, 하나님은 능력이 강하지만 기도하는 성도에게만 역사하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뒷받침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교회도 부흥되고, 성도들의 신앙도 풍성해지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심령의 부흥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크게 역사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성도가 기도할 때에 빨리 응답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에서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합심한다는 것은 마음을 모은다는 것을 말하지요. 기도제목을 놓고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사실 기도하는 데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데는 두 마음이 되기 쉽고, 악한 일을 하는데는 한 마음 되기가 쉽습니다. 보세요? 선한 일을 합시다 하면 의견이 분분해요. 이렇게 합시다. 저렇게 합시다. 나중에는 싸움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 아닌 것에는 얼마나 빨리 마음이 하나 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제껏 남의 허물을 흉보는 것에 두 마음인 것을 보지 못했어요. 흉보는 일에는 얼마나 의견일치가 쉽게 되는지 밤새도록 헐뜯어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오히려 신나지요. 더군다나 나와 감정이 좀 있는 사람이면 침을 튀기면서 흉봅니다.
여러분,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에 교회를 부흥시켜주시고, 기도할 때에 가정을 부흥시켜주시고, 기도할 때에 심령을 부흥시켜주시기 때문에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국민일보에 이런 글이 실렸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군의 공세로 35만 명의 영국군이 됭케르크 반도에서 포위되었습니다. 절망의 상태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어요. 그때에 영국 국왕인 조지 6세가 위기에 처한 영국군을 구원하기 위해 온 국민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각료들과 모든 공무원들이 집무실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장인들과 농부들은 일터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군대를 살려주십시오. 도버해협을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영국 국민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을 들으시고 역사하셨습니다. 독일군의 총공격이 있기 전날 밤에 독일군 주둔지에 강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게 했습니다. 독일군 탱크는 움직일 수 없었고 폭격기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됭케르크 반도와 도버해협 상공에는 별들이 반짝였습니다. 그날 밤에 영국은 군함을 이용해서 35만 명의 군사들을 모두 탈출시켰습니다. 합심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진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합심기도는 무엇일까요? 생명을 구원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여러 곳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부분을 보면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생명 구원의 귀중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을 구원하는 데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귀하고 가치있고 소중한 일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일에 하나되라고 했으니까 생명 구원하는 것만큼 선한 일이 어디에 있어요. 지난주간에 우리교회에서 지방회를 했는데, 대외적으로 큰 행사를 처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걱정을 했는데, 여러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감당하니까 얼마나 잘했어요. 우리 예배당이 가득 차도록 많은 분들이 왔었는데... 여러분이 화면으로 보셨잖아요. 정말 잘했어요. 목사님들 칭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수고는 여러분이 하고 칭찬은 목사가 다 받았어요.
여러분, 온 교우들이 합심하니까 좋은 결실이 맺혀지듯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도 합심하여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땅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늘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요즘 우리가 사순절 새벽기도를 하고 있고, 3월 30일에는 전도주일을 계획하여 준비하고 있는데, 기도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하여,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만큼 확실한 전도작전은 없습니다. 온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생명이 구원되는 것이고 교회의 부흥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합심한다는 것은 공간적인 의미도 있지만, 시간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새벽에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만 있으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못해서 나오지 못하는 교우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우들도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우리 교회는 새벽 6시에 새벽 기도를 하니까 그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하는 겁니다. 30분전에 일어나서 예배를 위해서 준비하고 6시가 되면 찬송 한 장을 부르고 주보에 게시된 성경을 읽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은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집이 멀어서, 몸이 불편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이런 방법으로 새벽기도를 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교회는 모든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사순절 새벽기도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모든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고난주간 새벽기도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일에 핑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피곤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아서 피곤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싸움이라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전쟁은 기도의 역사였습니다. 군사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만 기도할 때에 불가능을 가능케 했습니다. 더욱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기도가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기도가 중요합니다. 사무엘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하며 기도하기를 강조했습니다. 기도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20세기에 성자라고 흔히 불리는 테레사 수녀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극빈자, 병자, 고아, 죽어 가는 사람, 노인들을 불러서 모아놓고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을 당시에 126개국 600여 곳에 사랑의 집을 만들어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임무가 대중을 돌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한 개인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사랑할 줄 모릅니다. 나는 한 번에 한 사람 밖에 거둘 줄을 모릅니다. 단 한 사람... 당신도 내가 하듯 그렇게 한번 시작해 보세요. 나는 단 한 사람만 인도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42,000명이 넘는 사람을 인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한 모든 일은 바다의 물 한 방울을 보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물 한 방울을 보태지 않는다면 바다는 물 한 방울이 모자랄 것입니다. 당신 자신, 당신의 가정, 당신이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어느 순간에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온 교우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썩는 밀알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합심해서 온 교우들이 기도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온 교회가 기도하셔서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저와 여러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한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온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온 교우들이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기도의 무릎을 주시옵소서. 말씀에 순종하여 무릎꿇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시고 땅에서 무릎꿇어 매고 푸는 이들에게 하늘에서도 매고 푸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마 18:18-20 / 안효관 목사
서울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께서 쓰신 글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고발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정의의 사도가 돼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부유한 자들을 악한으로 매도하고 모든 권위를 무조건 무너뜨리려고만 합니다.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대변한다고도 말하고, 가난한 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함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매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지식인과 노동자 간의 갈등뿐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흐름을 고발자들이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변화시켜 보겠다는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나 고발로는 세상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부류는 ‘방관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갈등에 무조건 눈을 돌리고, 세상의 문제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방관자의 특징은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자신과 자신의 가정만 평안하다면 모든 것을 괜찮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만 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도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혼란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책임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특히 리더십들은 방관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부지런히 문제의 원인을 파악해 대안을 마련하고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화해자들’입니다. 때로 그들은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습니다. 어느 누구도 포기할 수 없다며 조금씩 양보하자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어느 쪽도 비난하지 않으며,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는 양 머리를 숙입니다. 화해자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무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화해자는 어느 한 편에 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진정한 화해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화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화해자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들은 비판을 일삼는 고발자들도 아니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찌들어 사는 방관자들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화해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도 그렇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그렇고, 더 나아나 우리나라 안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고발자나 방관자로 살아가도록 사회로부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화해자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게 안타까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아주 중요한, 그러나 우리가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용서받지 못하고 화해되지 않는 채 살아가게 될 것이고,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 용서하고 화해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용서를 받고 화해된 기쁨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 기도처럼 용서받기 전에 먼저 용서하고 있는지를 우리 자신에게 깊이 되물어보아야 합니다. 분명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먼저 용서하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의 마음을 품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용서를 베푼 적이 더 많습니까? 용서를 받고 싶은 적이 더 많았습니까? 부끄럽게도 이 안목사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는 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 죄인인 우리 인간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능은 용서가 아니라 미움과 저주과 갈등과 분노와 죽음일 뿐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라는 것은 진실한 것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그분의 성품인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큰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죄 씻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그 값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진실한 신앙인인가를 스스로 진단해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용서’라는 시험지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그 기쁨과 감격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내 안에 용서 받은 기쁨과 감격이 아직도 남아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쁨과 감격이 있을 때에만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에는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권리도 포기해야 하고, 내 욕구와 감정도 절제해야 합니다.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자아’라고 하는 괴물을 잠재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용서이고 화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용서의 사람들이었고 화해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좁은 지역에서 많은 가축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가축을 먹이는 종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8-9) 아브라함은 롯에게 삼촌입니다. 삼촌이라면 자신이 먼저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권리로 롯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자신은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합니다. 포기할 뿐만 아니라, 그 권리를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롯에게 먼저 자기가 원하는 지역을 선택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롯은 비옥한 땅인 요단 들판을 택해서 떠나갔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옥한 땅을 선택해 떠나간 롯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툼을 피하고 화해를 선택한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삭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은 흉년이 들자 불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땅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이삭이 사용하던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우물 하나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우기가 아니면 비가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기 위해서는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아무데나 판다고 우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물을 파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비와 인력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우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우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부족간에 치열한 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렸습니다. 이삭은 아무런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그랄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그 우물이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다툼이 일어나자 이삭은 그 우물을 그들에게 줘버리고는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또 찾아와서는 그것도 자기들 것이라고 우겨댑니다. 이삭은 또 다시 그 우물을 그들에게 줍니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옮겨와서 다시금 우물을 팠습니다. 그랬더니 더 이상 그랄 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투는 게 싫어서 - 다투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이삭에게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축복해 주십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창 27:24)
우물 때문에 싸움을 걸어오고 괜한 트집을 잡는 그랄 사람들에게 이삭은 다툼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재산과 권리를 포기함으로 용서하고 화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런 이사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려 할 때에는 때로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익과 권리를 다 찾으려 하는 것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이익을 포기하면 우리가 본 손해보다 더 넘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십니다.
용서의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당연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의 미움과 질투 때문에 어린 나이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도 자기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갔다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고 상처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의 나이 아직 20도 채 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아마도 요즘으로 하면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이에 외국으로 노예로 팔려간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시련과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모든 고통의 상황을 믿음으로 이겨나갑니다. 결국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9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2년간 계속된 흉년 때문에 가나안 땅에 살던 야곱의 가족들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 애굽까지 찾아가야 했습니다. 늙은 아버지 야곱은 막내 베냐민과 함께 집에 남아 있고, 요셉의 형들 10명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을 찾아왔습니다.
애굽에서 만난 요셉과 그의 형들은 이제 그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라고 하면 세상 두려워할 것이 없는 권세의 자리였습니다. 작은 나라 가나안에서 온 요셉의 형들 정도야 말 한 마디로 죽은 목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를 종으로 팔아 그렇게도 마음을 아프게 했고, 죽도록 고생하게 만들었던 형제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히려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굽의 국무총리라고 하는 막강한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는 동생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할 것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여러분, 우리가 만일 그 입장이었다면 요셉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을 망친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던 그 아름다운 시절의 행복을 빼앗아가고, 대신에 엄청난 고통 속에서 지내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앞에 놓고, 복수할 수 있는 기회인데 복수하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먼저 보내신 것뿐이다.’ 여러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요셉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자신의 모든 삶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고통당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계획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신앙이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을 용서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다는 것은 우리도 요셉과 같은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이 있습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 속 깊은 곳에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으로는 도저히 온전한 용서가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에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17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아버지 야곱이 죽었습니다. 장례가 끝나자 형들은 다시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에는 아버지를 봐서라도 복수를 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니까 요셉이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이미 17년 전에 요셉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과 복수로 가득찬 마음도 고통스럽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17년 동안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여전히 총리라고 하는 큰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는 요셉이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날 용서한다고 한 말은 어쩌면 거짓일지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계시니까 요셉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의 마음을 엄습해 온 것입니다.
요셉이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자 형들이 먼저 선수를 칩니다. 요셉을 찾아가서 ‘우리가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종이 되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에 요셉은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용서했건만 아직까지도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난날 지었던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형들의 어리석은 모습 때문에 울어야 했고, 지난 17년 동안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던 형들이 불쌍해서 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19-21) 성경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형들을 이런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십자가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고는 이런 용서가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말씀을 우리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용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19절에서 말하는 “두 사람”은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 자를 말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은 그 화해의 모습으로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리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처럼, 땅에서 서로 용서하고 모든 것을 푼 상태에서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이미 모든 닫혀졌던 것이 풀려졌기 때문에, 그 때 드린 기도는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에 ‘아직 땅에서 풀려지지 않는 것은 없나’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땅에서 풀려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하늘에서도 풀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형제를 향하여 닫혀져 있는 것처럼 하늘의 문도 닫혀져 있는데, 어떻게 기도에 응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풀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꼬이고 얽힌 것들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기도에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 안에는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 인간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아름답고 복된 생애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내가 조금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어도 내가 먼저 용서의 손을 내 밀고 화해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 5:9)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작은 삶의 모습들 속에서 용서하고 화해의 삶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더불어 누리시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하는 사람들
마 18:18-22 / 박종순 목사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 가운데서 취미 이야길 해보겠습니다. 바둑, 장기, 낚시, 축구 탁구, 배구, 등산, 골프, 여행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1부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그는 아멘 대신 "아다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락이나 취미나 여가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상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가슴속에 오래 담고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 동정, 그리움, 아끼는 마음,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둬도 좋지만 미움, 아픔, 원한,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담고 있을 것들이 아닙니다.
본문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날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였습니다.
유대 랍비들의 교훈은 사람이 지은 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그 이상은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다 네 번을 더해 일곱 번 용서할까요?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490번도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도 완전히 다 용서해 버리는 것인데, 490번을 용서하라는 것은 없던 일로 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용서는 "없던 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490번을 반복해 "나는 너를 결코 잊을 수가 없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라며 "내 눈에 흙", "내 눈에 흙"을 되뇌어 보십시오. 한이 쌓이고 쌓여 산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할거야, 없던 일이야"를 490번 반복해 보십시오. 상한 감정과 원한이 눈처럼 녹아져 버릴 것입니다.
1. 용서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가운데 `하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가엾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아끼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단어가 있습니다.
`카파르`라는 단어의 뜻은 덮다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가운데 `아폴뤼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놓아주다, 가게하다, 풀어주다, 보내버리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리조마이`라는 단어의 뜻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허락하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용서의 성격이고 내용인 것입니다.
덮어주는 것, 풀어버리는 것, 이유도 까닭은 따지지 않고 허락해 주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내가 널 용서는 하지만 따질건 따지고 캘 건 캐고 밝힐 건 밝히고 나서 용서해 주겠다"라고 한다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는데는 이유도, 조건도, 과거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왜 용서해야 합니까?
본문 23∼35절을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빚을 갚기로 한 기한이 지나자 주인이 종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재촉하자 그는 땅에 엎드려 조금만 참아 달라며 하소연했습니다. 주인은 종의 정상을 참작해 연기가 아니라 탕감을 해 주었습니다.
상상도 못한 은혜를 입은 종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100데나리온을 꿔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이 나쁜 놈, 돈을 꿔갔으면 제 때에 갚아야지 떼먹기로 작정했느냐"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리고 파출소에 신고해 그 사람을 유치장에 가둬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에게 전후사정을 알렸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32절 이하를 보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저를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것이 옳은 일이어늘 저에게 폭행을 하고 옥에 가두었단 말이냐"라고 했고, 34절을 보면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고 했습니다.
1만 달란트는 현시세로 3조원이고, 100데나리온은 200만원정도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이 사람은 500만원을 받으려다가 3조원을 손해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계산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운 죄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용서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을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했습니다.
죽을 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시체였고 진노의 자식이어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네가 용서받을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는 일에는 이유도 까닭도 구실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호프대학에서 71명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과거의 상처나 원한을 기억하도록 했더니, 혈압이 오르고 맥박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화를 낼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시간 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습니다.
1,32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누군가를 용서한 사람이 한을 품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캐서린 그리핀은 "친구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친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보다 친구를 사귀고 친구와 교제하며 사는 사람들이 치명적 병을 이길 가능성이 높고, 더 강하고 탄력적인 면역체계를 갖게 되고 정신건강이 향상되고 사회적 유대가 약한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합니다. 이것은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입니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 멜른 대학교에서 276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친구와 사귀고 사이좋게 지나는 사람은 감기에 걸릴 확률도 4분의 1이라고 합니다. 276명 콧구멍 속에 감기 바이러스를 떨어트린 후 5일 동안 격리한 후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평소 친구나 친지들과 사이좋게 지낸 사람들은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뭡니까?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돕는 것이 친구입니다.
마태복음 6:12에서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남을 용서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교훈대로 용서해야 합니다. 즉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은 용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용서해야 내가 받은 용서가 유효하고, 용서해야 내 심령이 편하고, 용서해야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평안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용서와 사랑과 화해는 점점 사라져가고 증오와 갈등과 다툼이 점차 거세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까지 그러면 안됩니다.
심리학에서는 계슈탈트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바라보느냐 어떤 조명아래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예뻐 보이기도 하고 미워 보이기도 한다는 법칙입니다. 여성의 경우 달빛아래서 보아야 예뻐 보입니다. 단점이 희미한 빛으로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0미터 정도 거리에선 바라보면 0.3정도의 시력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쁜 점이 가려져 예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위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법칙입니다. 용서하면 원수가 친구로 변합니다. 적이 동지로 변합니다. 추녀가 미녀로 변합니다.
칼릴지브란이 쓴 "예언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책 속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서 있지는 말라
본문 35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중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중심이란 진실한 마음. 거짓 없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한을 품으면 나 자신의 정신 건강과 신앙에 손해가 됩니다. 실상 그 사람은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라는 낱말의 뜻은 말씀드린 대로 이유 없이 허락해주고 무조건 덮어주고 혐의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습니다.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캐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용서합시다. 원한이나 혐의를 가슴에 담아두지 맙시다.
일본에서 노인 3,136명을 추적조사 했습니다.
에히메 대학 의학부가 마쓰야마시 부근의 농촌을 중심으로 60∼84세 노인 3,136명을 4년 반 동안 추적조사 한 결과 보고에 따르면, 남자는 부인이 있는 경우보다 없는 경우가 사망률이 79프로나 높았고, 여자의 경우는 남편이 있는 경우가 없는 경우보다 사망률이 55프로 더 높았습니다.
뭘 말합니까? 서로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살아야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고 아내가 남편을 괴롭히면 빨리 죽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용서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 사회를 용서의 강물이 흐르게 합시다.
용서하고 기도하고 용서하고 찬송합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듭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마 18:19-20 / 정필도 목사
저와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해서 가다 보니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근이 왔습니다. 왜 기근이 왔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아브라함은 아마 혼란에 빠졌을 겁니다. 신앙도 흔들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지도 않고,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기는 했지만 잘못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큰 불행을 겪을 뻔 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니까 아내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 봐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이 연약하고, 부족한가를 이 사건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많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떤 때든지 기도 없이 결정하거나 기도 없이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는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놀라운 사실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사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그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져주셔서 조금도 상함이 없이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더 견고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축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창세기 12장 16절에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아브라함을 후대함으로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나귀와 낙타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3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까지 많이 주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7장에 보면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가 에서가 죽이려 하니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게 되면서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신뢰하지 않는 만큼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대로 됩니다.
창세기 25장 20절에 보면 이삭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을 했는데, 20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아이를 주셨는데 한꺼번에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 뱃속의 쌍둥이는 절대 하나가 되지 않고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미래를 가르쳐 주시고 예언해 주셨으면 그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나가면 되는데 야곱과 리브가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에서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다가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또한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욕심이 앞서면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든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남의 것 떼먹고, 믿음을 저버리고, 양심도 저버리며, 의리도 저버립니다. 생각해보면 이 욕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게 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이 이런 죄를 짓게 놔두십니까? 야곱이 뛰는 자라면 라반은 나는 자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품삯도 열 번이나 속고, 장가가는 것도 속아서 라반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욕심이 많으니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해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덮어놓고 라헬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자기 욕심을 앞세웠다가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본의 아니게 네 명의 여자를 데리고 살게 됩니다. 거기에서 나온 13명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다르니 서로 분쟁하고 미워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아버지가 특별히 요셉을 사랑하니까 요셉을 미워하여 결국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요셉을 잃어버린 야곱은 얼마나 슬픔으로 세월을 보냅니까. 그뿐 아니라 라헬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베냐민인데 그는 성질이 못돼서 창세기 49장 27절에 보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고 했습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 사람들, 즉 베냐민에게 속한 그 후손들은 소돔 고모라보다 더 음란하고, 더 악한데 싸움을 잘합니다. 인구는 얼마 되지 않는데도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맞붙어도 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결국에는 남자 600명을 제외하고는 다 죽어 그 지파가 없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욕심! 을 앞세우니까 복잡해지고, 문제가 많이 생기고, 얼마나 고생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야곱과 같이 욕심이 많아 고생하는 분이 계신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시고 욕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인도해주시는 대로 따라가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편안하고 제일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처럼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욕심을 앞세우면 고생을 많이 합니다.
야곱은 이렇게 욕심 때문에 고생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20년 만에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는 거부가 되어 나옵니다. 그뿐 아니라 야곱은 늙어 갈수록 더 믿음이 성장하여 나중에는 선지자와 같이 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성숙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어서 기근을 당했을 때 살 수 있었고, 또 야곱은 요셉 덕분에 애굽에 가서 임금의 대접을 받으며 세상의 모든 복을 누리며 여생을 잘 살다가 천국에 갑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에는 몇십 명 안 되었는데 애굽에 가서 몇백만 명의 큰 민족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는 조상들이 됩니다.
인간은 허물이 많고, 욕심을 따라 살다 보니 실수가 많아서 복잡한 문제가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잘 되도록 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에서 보듯이 누구에게나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믿음의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그 증거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모든 것, 어떤 일이 생기든지 걱정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이 놀라운 축복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약속하신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을 잃으면 안 됩니다. 믿음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모든 복을 다 받는 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믿음으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다 받아 누리는 축! 복을 받게 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재산, 건강, 명예, 자식도 잃어버릴 수 있지만, 믿음만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믿음이 얼마나 귀한 복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헤매는데, 택한 백성이라도 넘어뜨릴 수만 있으면 넘어뜨리려 합니다. 거짓 선지자와 이단이 얼마나 많고, 지진과 기근, 질병, 환란, 고통이 얼마나 많이 몰려오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너무 타락하고 미혹되기 쉽습니다. 낙심하여 믿음 잃기가 너무 쉽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무장을 잘 해야 합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언제나 기도할 제목이 생기면 부부가 손을 잡고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급하고 크면 세게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해결 못할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친구와 의논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항상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한 장소에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의 구심점은 오직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장소에 모여 두세 사람이라도 기도하면 그 가운데 주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세 사람이라도 교회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면 해결 못 할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죽였습니다. 베드로도 죽이려 데려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위기를 당했습니다. 이런 위기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한 장소에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밤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쇠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려 베드로가 무사히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 성도들이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2000년 전에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어납니다. 지금도!
1960년 케냐 마우마우 마을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선교사 매트 히겐스 부부가 마침 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우마우 지역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을 때, 차가 고장 난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케냐인과 선교사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밤을 지냈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되었고 차를 수리한 후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수 주일이 지난 후에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가서 클레이 브랜트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가 최근에 무슨 위험한 일이 없었냐고 물었습니다. 클레이는 3월 23일 밤에 갑자기 이 선교사 부부를 위해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꾸 걱정이 되고 부담이 들어 16명을 모아서 그 부담과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합심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시간에 마우마우의 한 청년이 친구들과 함께 이 선교사 부부를 죽이기 위해 차에 접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6명의 장정들이 칼을 들고 차 주변을 지키고 있어서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16명의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지키신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전의 역사가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프리카의 예수 믿는 청년이 고열로 너무 아파서 헛소리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곳의 선교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다만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열이 나는 환자에게는 얼음찜질을 시켜야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얼음을 얻을 수 없어 걱정하고 있는데, 이 환자의 어머니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불가능이 없다는 설교를 들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니 하나님께 얼음을 구하자고 하며 선교사님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합심해서 기도하는데 놀랍게도 하늘에서 작은 공만한 얼음들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우박이었습니다. 마침내 그 얼음으로 아픈 청년이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민족이 죽게 되었을 때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왕에게 나아갔으며, 모르드개에게 부탁하여 모든 유대인들이 대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합심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죽는다고 결정된 그날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이 원수들이 죽는 날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서 항상 어려움을 당할 때 사무엘 선지자는 모든 백성에게 미스바로 나와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게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회개하면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꼭 응답받기를 원합니까? 회개하면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회개는 안 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달라는 기도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면서 부르짖으면 하늘 보좌를 움직입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어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올 때 하나님이 큰 우뢰를 발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고,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평안을 누리며 살았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이 나라에 어려움이 와도 해결될 줄 믿습니다. 남북통일도 해결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기도하면 해결 못 할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7천 명의 기도 회원을 모집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기도제목이 생기면 7천 명에게 연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 모여 기도하고, 그 기도제목이 해결될 때마다 책으로 써서 나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좋아지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번 기도 십일조에는 이광훈 목사님을 특별히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광훈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인도하시는데 다른 교회에서 보니 보통 80% 이상이 참석해 은혜를 받고, 그 후에는 교회가 부흥이 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간증거리가 얼마나 풍성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특별히 7번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부터 나오시면 분명히 놀라운 은혜를 받으실 것이고, 사흘 동안 결심하고 기도하셔서 암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길 축원합니다. 모든 고민이 해결되길 축원합니다. 문제를 안고 살지 마시고, 그 문제를 통해서 오히려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