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여정 최 건 차
2월 26일은 내 생일이다. 1965년 24번째의 생일은 감개무량하고 가슴 벅찬 환희의 날이었다. 미8군 카투사로 의정부에서 군복무을 하던 그 날 아침은 몹시 추웠는데 하늘이 맑았고 음력으로 치면 정월 스무하루였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날이어서 부모님과 형, 누나 그리고 누이동생들이 사는 삼양동 집에 가서 어머니가 끓여주는 생일 미역국을 먹을 참으로 3일간의 생일휴가를 받았다.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에 들어서니 무슨 잔치나 행사가 열릴 것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크리스마스 때와 좋은 날에나 먹는 칠면조 통구이와 쿠키며 특별한 요리들이 가득 준비돼 있었다.
오늘이 내 생일인데 어떻게 된 거냐며 취사반장 무어리 중사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은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탄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라며 나더러 선택받은 행운아라고 축하 해주었다. 나는 스텝 사전트(下士, Staff Sergeant)여서 하사관 전용 식당에서 웨이트리스에게 음식을 주문해 먹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격식을 차려 아침을 먹으려는데 우리 테이블을 맡은 웨이트리스 미스 박이 금방 다가와 반갑게 맞으며 “오늘은 미국의 국경일입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늘 친근하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그녀가 싸진 초이님께서도 즐겁고 좋은 날이 되세요”라며 메뉴를 내민다. 나는 오늘이 내 생일이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고 주문한 대로 받아서 맛있게 먹기로 했다. 아침이라 에그후라이와 빵을 기본으로 칠면조 고기와 쿠키 등을 2개의 접시에 가득 담아다 주었다.
미국이 차려준 생일상을 받은 샘이다. 오늘따라 미군 부대에서 맞는 내 생일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워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호적에는 내 생일이 5개월이 늦은 양력 7월 22일 자로 되어있었다. 일본에서는 태어난 년 월일 그 날짜대로 출생 신고를 하는데 왜 이렇게 늦어졌는지를 어머니께 여쭈어보고 뜻밖에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났던 1941년 2월은 엄청 추웠고 악성 유행성 독감이 나돌아 영아들의 생사가 파리목숨처럼이었다. 나도 태어난 7일 만에 독감에 사로잡혀 엄마의 젖을 빨지 못하고 곧 죽을 것처럼이어서 출생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기의 숨이 끊어지면 하는 수 없이 산에 묻으려고 다다미방 윗목에 포대기째로 놔두고 지켜봐야 했다.
형과 누나 다음으로 내가 태어났다. 형과 누나는 두 살 터울인데 나는 누나와 4살 터울이고 내 아래 누이동생과도 두 살 터울이었다. 나보다 먼저 누나와 두 살 터울로 태어난 아기가 그때도 유행성 독감에 걸려 죽고, 2년 후에 내가 다시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는 이번 아기도 행여 잃게 될까 봐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살피는데, 아기가 전혀 젖을 빨지 못해서 입안에 조금씩 흘려주고 있었다. 잠자는 것 같이 겨우 숨이 붙어있어 지켜보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가늠이 안 될 만큼 4개월이 흘렀다. 5개월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아기가 기적적으로 꼼지락거려 어머니가 젖을 물려주니 조금씩 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서 점점 회복되어 새로 태어난 것처럼이어서 출생 신고를 하게 된 날이 1941년 7월 그날이다. 정확하게 5개월 동안을 잠자는 것처럼이었다가 깨어나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아기는 어머니의 젖을 연신 빨면서 잘 자고 밥도 잘 먹었다.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는 또래들보다 더 건강하게 키도 크고 몸집도 튼튼하게 자라며 식탐이 많았다. 날이 갈수록 장난이 심해져 유아 시절에도 이런저런 사고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 나는 일본에서 살 때 교토 작은외할아버지댁에서 변을 보려 실내 변소에 갔다가 거꾸로 처박혀 참변을 당할 뻔도 했다. 해방 후 조선에 나와 탐진강 상류의 물가에서 살던 때였다. 물놀이를 좋아하다가 큰물에 빠져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또 6‧25 전후에는 빨치산 해방지구의 공산 치하에서 소위 빨치산 소년병으로 활동했다. 연락병으로 활동하다가 군경토벌대의 총격에 죽을 뻔했고, 역병에 걸려서도 두 번에 걸쳐 거의 죽었다가 회복되었다.
내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죽음의 공포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로 팔순을 넘기며 여태껏 살고 있다. 그간 몰랐던 나의 영아 시절 비밀스러운 5개월과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며 위태롭게 보낸 유년 시절이 회상된다. 사선을 넘나들면서 기구하게 살아온 생애다. 십 대를 마감하는 1960년 군에 입대하였는데 폭력이 난무하는 열악한 내무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탈영을 시도하며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하사 때부터 주경야독으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카투사로 가게 되었다. 미군들과 생활하면서 지난날의 고난에 대한 보상을 분에 넘치도록 받았다.
카투사 생활이 끝나고 한국군에 복귀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또 한 번 좋은 기회가 주어져 광주 육군보병학교에서 간부교육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1968년 1·21사태 시에는 전방 5분대기 전투소대장으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그다음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귀국한 후 육군 선박중대를 창설하고 군을 떠났다. 1975년 4월 15일 예비군 창설 7주년을 맞았다. 부산시 최우수 직장예비군중대장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을 알현했다. 박대통령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했다. 이어서 KBS TV에 출연하여 20분간 생방송에 들어갔다. 국방과 안보에 관한 소견을 미국 제39대 대통령 카터의 연설문인 “변천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하지만 불변의 원칙은 고수해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대박이나 직장 태창목재와 부산의 명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신앙생활을 잘하려다 목사가 되었다. 정년으로 은퇴하기까지 40여 년간 목회에 장로교 경기노회장과 수원시 경목위원장 직 등을 역임했다. 천국에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기도하는 등반을 즐기고 있다. 202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