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 비원(秘苑)에서
전미영
소슬한 가을 바람이 한동안 무뎌진 나의 마음을 흔들고 지나간다.
바람에서 전해지는 향기 때문일까 불어오는 바람에 뒹구는 낙엽
소리 때문일까 요즘 들어 부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아진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에는 맑고 푸른빛이 가득하다.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을 걷고 싶어지는 걸 보면 나도 어느덧 가을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한가한 일요일 오후.
동네에 있는 무궁화 꽃길을 걸어본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변
이어서 일까. 단풍든 나뭇잎이 곱지가 않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낙엽
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나뭇가지에서 분리되는 아픔을 겪은
잎들이 무수히 떨어져 쌓여있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떨어져 내린 잎
들은 무심한 사람들의 발끝에 채인다. 꽃길을 걸으면서 아직도 조바
심 내며 잔가지 끝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뭇잎에서 나를 본
다. 나는 아직도 푸른 잎으로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일
까.
봄 햇살은 대지에 스며들어 싹을 틔우고 가을 햇살은 온갖 열매와
함께 자연을 물들이고 우리네 각박한 마음도 물들인다. 청명한 하늘
위를 떠다니는 구름은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
기 위해 누군가 밤새워 그려놓은 그림은 아닐까. 이렇듯 가을은 모든
이들에게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오늘처럼 눈이 부실만큼 푸르른 가
을날이면 어찌 작은 숲길을 따라 낙엽이 쌓인 길을 걷고 싶지 않으
랴.
십 여년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서울은 그저 아득하기만 한 도
시였다. 그때는 직장 일로 서울을 자주 가긴 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어 이름난 곳을 둘러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다. 그래서 예나 지금
이나 서울은 아득하기만 하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분들과 서울을 가게 되었다. 마음이 통하는 몇
몇 사람들과 함께 가을 여행 삼아 창덕궁 뒤뜰에 있는 비원을 다녀오
기로 했다.
비원(秘苑)은 창덕궁 뒤쪽에 자리한 정원(庭園)으로 왕가에서 휴
식을 취하던 곳이다. 그 동안 줄곧 비원이라 불려 왔지만 지금은 후
원(後苑)이라 부른다고 한다. 후원은 낮은 야산과 작은 골짜기 등 본
래의 모습을 그대로 둔 채 산세를 살려 가꾼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왕의 동산'이라 하여 금원禁苑)으로도 불려지는 그곳은 어떤 곳
일까?
창덕궁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는 동안 마치 소풍
가는 아이의 마음처럼 조급하고 들떠있는 자신을 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작은 키에 생활 한복을 차려입은 가이드가 일행을 맞아준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코스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인지 가이드는 잰걸음
으로 한참이나 앞서가고 일행은 뒤따르는 것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궁궐의 역사를 말해 주고 곳곳마다 설명을 덧붙이지
만 귀에는 들어오지 않고 내마음은 벌써 후원에 가 있는 것을 어찌하
랴.
어느덧 일행은 내의원 담장을 돌아 창덕궁과 창경궁이 만나는 낙
선재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대문은 창경궁으로 들어서는
문이고, 왼쪽으로 나 있는 대문은 후원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창경궁
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지만 비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내 마음을 아는 냥.
후원은 만여 평이 넘는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화전 놀이 가시던 동
네 앞동산쯤으로 생각했는데 만여 평이라니. 어릴 적 교회에서 자주
소풍을 갔던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뛰어 놀기에는 좋은 야
트막하고 평평한 동산을 떠올렸고 내가 꿈꾸는 마음속 정원과도 같
은 곳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비원으로 향하는 대문을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무엇인가 기대되는 일이 있을 때 나타나는 앞선 마음 때문이었을 게
다. 창덕궁과 창경궁 담 사이로 난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 고갯마루에
섰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부용지(芙蓉池)와 높은 언덕 위에 이층
다락집처럼 우뚝 서 있는 주합루(宙合樓)가 보인다는 가이드의 말에
도 아랑곳없이 나는 낮은 경계석 너머 피어있는 야생화에 그만 눈길
을 빼앗기고 말았다. 많이 본 듯도 한데 이름을 물어봐도 아는 이가
없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일행은 저만치 앞서있다.
부용지 한가운데는 둥근 섬이 하나 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天圓地方)'는 음양오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그러면 네모난 연못은 땅이며 그 위에 떠 있는 둥
근 섬은 하늘을 말하는 것인가 떠 있는 섬 옆에는 연못 속에 두 다
리를 넣은 부용정(芙蓉亭)이 있다. 그 또한 섬 같기도 하고 하늘의
구름 같기도 하다. 연못 앞에 서니 꽃향기가 지천으로 퍼지고 맑은
가을 하늘 또한 연못 속에 잠겨 구름만이 떠다닌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늙지 않는다'는 가이드의 말을 놓칠세라 금마
문 옆에 통돌을 깎아 세운 불로문(不老門)을 들어섰다. 불로(不老)
가 아니라 건강을 빌면서, 오른쪽으로 넓은 연못인 애련지(愛蓮池)
와 당시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지어졌다는 연경당(演慶堂)
을 지나서 창덕궁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 왔다. 잘 다듬어진
고궁의 향취가 가슴에 그윽하게 전해온다.
후원 같은 정원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도 정원이 있다.
그 정원에는 꽃도 있고 나무도 풀도 함께 자란다. 때론 짙은 안개
로 덮이기도 하고 오늘 같이 맑은 날엔 햇살이 곱게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그림자를 드리울 때도 있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에 낙엽이 되는 것들도 있다. 생활에 지치고
세상살이에 덧없음을 느낄 때면 나는 마음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잠
시 쉬어 가기도 한다. 아직은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는 마음의 여
유는 없지만 곧 잎이 무성한 계절이 돌아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의 정원에는 언제나 꽃을 피울 수 있는 꽃씨를 가득
담아두고 싶다. 지친 바람도 쉬었다 가고 햇살도 노닐다 갈 수 있게
마음 문을 더 크게 열어야겠다.
후원이 생기고 부터 줄곧 함께 한 육백 년이나 되는 다래나무나 향
나무의 모습은 아니지만 누군가 쉬어갈 수 있게 그늘이 되고 싶다.
나는 사시사철 푸른 관상수 보다도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잎 푸르
고 무성하여 가을이면 단풍들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에 눈꽃을 피
우는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로 살고 싶다. 내 마음의 정원에도 그런
나무 하나 심고 싶다.
2001 9집
첫댓글 내 마음의 정원에는 언제나 꽃을 피울 수 있는 꽃씨를 가득
담아두고 싶다.
나는 사시사철 푸른 관상수 보다도 봄이면 움트고 여름이면 잎 푸르고 무성하여 가을이면 단풍들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에 눈꽃을 피우는 넓은 잎을 가진 활엽수로 살고 싶다. 내 마음의 정원에도 그런나무 하나 심고 싶다.
후원 같은 정원은 아니지만 내 마음 속에도 정원이 있다.
그 정원에는 꽃도 있고 나무도 풀도 함께 자란다. 때론 짙은 안개
로 덮이기도 하고 오늘 같이 맑은 날엔 햇살이 곱게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그림자를 드리울 때도 있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에 낙엽이 되는 것들도 있다. 생활에 지치고
세상살이에 덧없음을 느낄 때면 나는 마음에 난 오솔길을 걸으며 잠
시 쉬어 가기도 한다. 아직은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는 마음의 여
유는 없지만 곧 잎이 무성한 계절이 돌아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내 마음의 정원에는 언제나 꽃을 피울 수 있는 꽃씨를 가득
담아두고 싶다. 지친 바람도 쉬었다 가고 햇살도 노닐다 갈 수 있게
마음 문을 더 크게 열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