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 사연
거제로 건너와 일 년 반이 지난다. 전임지 삼 년 근무 이전이니 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 기억이다. 창원 시내 단독 주택지에 들어선 남녀공학 고교였다. 다른 동료들은 생활지도가 어렵다면서 이삼 년 만에 이웃 학교로 옮겨갔는데 나는 학교 만기 오 년을 다 채웠다. 아이들은 인성이 점차 반듯해져갔다. 창원천 천변을 걸어 출퇴근하면서 도심에서도 계절이 가고 옮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 근무지를 떠날 때 남아 있던 동료가 학교 이미지를 개선시켜주어 고맙다고 했다. 교사들이 선호하지 않는 학교로 떠밀리다시피 배정받아 빨리 다른 학교로 옮겼는데 학교 만기를 채워 근무한 나를 남달리 봐주었다. 임지를 옮기기 전 그간 신어왔던 슬리퍼가 낡아 헤져 새로 사야 할 형편이었다. 앞으로 정년까지 남은 기간은 육 년인데 옮겨갈 학교에서 삼 년만 근무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때 슬리퍼를 마련하면서 옮겨갈 학교에서 삼 년을 신고 남은 삼 년은 털고 명예퇴직을 생각하고 있었다. 공립학교 교사는 지역 근무 연한이 있어 창원은 팔 년까지였다. 이후는 임지가 어디로 정해질지 몰라 명예 퇴직해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다.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이다. 명퇴하려던 마음을 접고 근무지를 옮겼더니 희망과 전혀 다른 거제로 옮겨오게 되었다.
임지를 바꾸면서 기본으로 챙겨가는 것이 있다. 인장과 칫솔과 컵과 슬리퍼 정도다. 전임지에서 쓰던 것들이다. 슬리퍼는 그간 몇 해 신어 거의 다 낡았다. 그래서 바로 버리진 않고 원룸에서 신기로 하고 만물상회에서 낮은 가격대 슬리퍼를 새로 구했다. 옮겨간 임지에서 일 년 남짓 신었더니 싸구려 슬리퍼라 쉽게 떨어져 갈아야 했다. 그래서 이번 주 초 고현으로 나가 새로 구했다.
거제로 옮겨오면서 혼자 지낼 취사도구와 주방기구들을 여러 가지 다 갖추었다. 그 가운데 새로 준비해야 것들도 있었다. 전기밥솥이 그런 경우였다. 아내는 값이 나가는 압력 밥솥을 사라했지만 나는 저가 밥솥을 골랐다. 와실로 와서 아침과 저녁이면 매 끼 새 밥을 지어 먹는다. 일 년 반이 지나니 사용 연한이 다 되어선지 내솥 코팅이 벗겨져 누룽지가 눌어붙어 설거지가 불편하였다.
엊그제 시내로 나가 슬리퍼를 새로 사면서 낡은 전기밥솥도 바꾸었다. 고현의 가전 전문 매장을 찾았더니 내가 구하려는 일인용 전기밥솥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다른 매장에 가서 미니 전기밥솥을 마련했다. 와실로 와 밥을 지으니 전에 쓰던 밥솥과 달리 누룽지가 붙지 않아 설거지가 간편해 좋았다. 내가 앞으로 남은 정년까지 일 년 반 탈 없이 쓰게 될 밥솥이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구월 넷째 수요일이다. 이번 주 월요일 오후 밥솥을 사 화요일 아침과 저녁밥을 지잘 어 먹었다. 수요일 아침도 아무 탈 없이 밥이 지어졌다. 전에 쓰던 낡은 밥솥은 누룽지가 붙어 설거지 때 불편했는데 그렇지 않아 좋았다. 그런데 수요일 오후 퇴근해 와실로 들었다. 일본 열도로 향해 간다는 태풍 간접 영향인지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 산책을 나가지 않고 이른 저녁밥을 지었다.
전기밥솥 전원을 끼우고 밥이 지어질 사이 감자를 깎아 두부를 넣은 된장국을 끓였다. 된장국이 마련되는 사이 밥이 다 지어지는데 밥솥에 이상이 왔다. 밥이 다 지어지지 않고 보온으로 넘어가 있었다. 전원 플러그를 뽑아 몇 차례 다시 시도해 겨우 설익은 밥을 먹었다. 밥솥을 샀던 매장으로 전화를 넣었더니 주인장은 밥솥을 가져오면 환불이나 다른 제품으로 바꾸어주겠노라고 했다.
저녁 식후 그 밥솥을 포장지와 제품 사용설명서와 계산서와 함께 엊그제 들렸던 매장으로 나갔다. 입구 계산대에서 밥솥 사용 이상 상황을 설명했더니 환불할지 다른 제품으로 교환할지 물어와 당연히 교환을 원했다. 매장에는 이틀 새 새로운 제품이 더 진열되어 있었다. 가격대가 비슷한 미니 밥솥을 하나 골랐다. 정년을 맞을 날까지 앞으로 일 년 반 동안 탈 없이 쓸 수 있으려나. 2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