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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聾巖宗宅)
소재지 :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 162-133 번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이현보의 종택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종택(宗宅)이다. 이현보는 1504년(연산군 10년)에 사간원정언으로 있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된 인물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 종택이 있던 분천마을이 수몰되었다.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이건(移建)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이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 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다.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분강서원(汾江書院)
안동시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에 있는 분강서원(汾江書院)은 1613년(광해군 5) 지방 유림의 공의로 농암 이현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것이 그 시작이다. 농암 이현보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때 성주목사의 선정으로 왕에게 표리를 하사 받았고 호조참판, 자헌대부, 1554년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과 어부가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전한다. 분강서원은 1700년(숙종 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후 1967년 복원하였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여 운곡 도곡재사 옛터에 서원과 종가를 함께 이건 하였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숭덕사, 흥교당, 극복재, 경서재, 유도문, 주소, 협문 등이 있다. 사우인 숭덕사에는 이현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강당인 흥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되었으며 동쪽 협실은 재임 및 별유사의 방으로,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재와 경서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정문인 유도문은 향사 시 제관의 출입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상사 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학문의 전당 서원(書院)
글 : 이희특 한학자
경상매일신문 기사 입력 : 2022년 03월 28일
조선의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이다. 후생들의 강학(講學)과 더불어 선현(先賢)을 제향하기 위하여 16세기 이후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되었다. 조선은 유교(儒敎)를 치국(治國)이념으로 정치를 펼쳤다. 나라에서는 성균관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을 세우고, 지방은 고을마다 향교를 세워 관학(官學)교육을 강화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말부터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쇠퇴하고, 과거시험 준비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향교는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향교에서 공부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자는 생원(生員) 진사(進仕)의 칭호를 받고, 다시 성균관에 나아가면 거기서 다시 대과(大科) 문과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므로 나라의 교육기관을 기피하고,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書院)으로 집중하게 된다. 재야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된 고려 말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김숙자(金淑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쳤고,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에게 그의 학통을 전수하였고, 김종직이 김굉필(金宏弼, 1451∼1504), 정여창(鄭汝昌, 1450∼1504), 김일손(金馹孫1464∼1498)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성리학이 전파되어 그 세력이 커졌다.
사림(士林)은 학문적으로 시문(詩文)보다는 경학(經學)의 깊은 뜻과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구현하려는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구하려 하였다. 특히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成宗) 초기였다.
신진 사류의 대거 진출로 당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훈구 세력과의 대립을 통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은 사림은 재야에서 학문을 전수하기 위한 새로운 장으로 서원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향교가 국가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는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고려 때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安珦, 1243∼1306)의 옛 집터에 사당을 세우고 학생들을 모아 교육하였는데, 이것이 사(祠)와 재(齋)를 함께 갖춘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조 명종 이전에 건립된 서원은 29개소였으나 선조 때는 124개소에 이르렀고, 사색당쟁이 극심한 숙종 때는 8개 도(道) 가운데, 숫자가 많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1개 도(道)에 서원이 80∼90개소를 헤아릴 수 있으며, 사액서원(賜額書院)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준 서원)도 130여 개소에 달했다.
초기 서원은 사당에 선현들을 모시고 학덕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인재를 양성하던 곳으로 나라의 정책을 비판하는 공론(公論)을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향촌사회의 미풍양속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확산된 서원은 정치 세력과 경제적 기반을 발판으로, 지방 관료들의 힘으로 간섭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고을 수령들의 적폐도 많았다. 서원에 들어가 학문 대신 붕당에 가입하여 당쟁에 골몰하는 등 서원의 폐단이 많아지자, 인조 22년 (1644)에는 서원 설립을 허가제로 하였고, 원장은 관찰사가 선임하고 원생의 정원을 20명 내외로 제한하다가 영조 14년(1738)에 대대적인 서원 정비를 하여 200개소를 철폐하고 700여 개소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고종 1년(1864) 나라를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이 서원의 특권을 철폐하고 서원 설립을 금하였으며, 1868년에는 사액서원이 아닌 서원은 모두 철폐령을 내리고, 일인일원(一人一院) 원칙에 따라 사표가 될 만한 47개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은 철폐하였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조가 망할 때까지 전국의 서원은 951개소였으니,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의 전당인 서원은 학문의 근원지요, 인재 양성의 산실 역할을 해 왔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많은 서원 중 사액서원이면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세 곳을 소개한다.
서원 제1호 : 소수서원(紹修書院)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며 사액서원이다. 소재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이다. 순흥(順興)은 조선 태종 때(1413)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세종의 여섯째 왕자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유배되어 있었는데 당시 순흥부사로 재직하던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였으므로, 도호부가 폐지되어 풍기, 영천, 봉화현에 나뉘어 예속되었다.
소수서원은 거북이 엎드리고 있다는 영귀봉(靈龜峰) 아래 자리 잡은 거북이 알을 품고 있다는 유명한 곳이다. 울창한 노송, 소백산의 초암계곡에서 발원한 시냇물과 태백산의 황지와 함께 1,300리 낙동강 원류를 이루는 죽계수(竹溪水)가 감돌아 흐르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죽계수의 계곡 주위에는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울울창창한 송림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서원에 함께 배향된 안축(安軸)은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노래했다. “아! 소백산 높아 죽계수 맑은 풍경을 어찌하오리까?”라고 경탄하였다.
아름다운 그곳에 1541년(중종 36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평소 흠모하던 최초의 성리학자 회헌(晦軒) 안향(1243∼1306)을 배향하기 위한 사당을 건립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542년 신라 사찰인 ‘숙수사’가 허물어진 곳에 사당을 세웠으며, 안향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그곳에 그를 배향하는 사당을 건립하고, 그 이듬해 1543년 사당의 동쪽에 학사(學舍)를 지어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는 서울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모셔 와 봉안하고는, 서원 이름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했다. 중국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 딴 것이다.
주세붕은 ‘교화는 시급한 것이고 학문은 존현(尊賢)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안향을 높이 받들고, 겸하여 유생들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게 하기 위하여 서원을 세웠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그 후 백운동서원은 명종 3년(1548)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나라의 공인을 받은 사액서원으로 부각하게 되었다. 퇴계는 서원의 격(格)을 높이고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沈通源)에게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서원을 청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서울에는 성균관과 사학(私學)이 있으나 지방에는 향교만 있을 뿐, 서원이 없어 학문을 권장하기 어려움으로 여겨, 전에 군수로 재직하던 주세붕이 주위의 웃음과 비방에도 아랑곳 않고, 이곳에 서원을 세웠으니, 교육기관으로 나라의 인정을 받아야 오래 유지한다고 사료되오니 서적과 편액, 그리고 토지와 노비를 내려 주십시오. 이곳에서 학문을 일으키면 인재 양성은 물론이거니와 선비들의 관습과 풍습이 교화되어 임금의 선정에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라고 글을 올렸다. 퇴계의 이 같은 청원에 따라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命)하여 서원 이름을 짓게 하여 ‘자신의 내적인 수양을 통하여 훌륭한 선현의 정신을 이어 간다’는 뜻으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명종의 친필로 글씨를 쓰고, 교재로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奴婢)를 내렸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면서 제1호의 서원이 되었다.
서원 입구 우측에 ‘경렴정’은 공부하는 유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기던 정자이다. 거기에는 주세붕ㆍ이황ㆍ황금계ㆍ이준 등 명사들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고, 그 건너편 바위에는 죽계천 암벽에 경(敬)자가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주세붕이 고찰인 ‘숙수사’를 헐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불당에 있던 불상들을 바위 아래 소(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한(恨) 맺힌 불상들이 밤이면 물 위에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비백산 하였으므로, 주세붕이 경(敬)자를 써서 바위에 음각하자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탄로되어 거기에 모여 있던 충신사림들이 떼죽음을 당함에 그 원혼(寃魂)이 밤마다 나타나서 울부짖음에 유생들이 잠을 못 이루었으므로 본시 경(敬) 사상가인 퇴계 이황이 경(敬)자를 써서 바위에 음각한 후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고도 하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경내 건물은 강학당인 명륜당(明倫堂)이 중심에 있고, 사당인 문성공묘(文成公廟)가 뒤쪽에 남향으로 있다. 그 옆엔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학구재(學求齋), 지락재(至樂齋), 장서각(藏書閣), 영정각(影幀閣),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등이 자유롭게 배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서원 형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안향(安珦)은 고려의 명신이며 대학자로 1260년(元宗 1年)에 문과에 급제한 뒤 40년 동안 벼슬에 있으면서, 두 차례 왕을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학 진흥에 큰 공을 세웠다. 충렬왕 15년(1289)엔 손수 필사하여 주자(朱子)의 초상을 그려서 귀국, 성리학 정주학을 연구하여 최초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전래하였다.
자신의 호(號)를 주자의 호(號) 회암(晦庵)을 본 따서 회헌(晦軒)이라 하고, 뒤뜰에 정사를 지어 놓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을 모셨으며, 1303년 안향은 김문정을 중국 강남지방에 보내어 공자와 그의 제자 70현인(賢人)의 화상과 태학(太學)에 사용할 제기와 악기 등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며, 1304년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文廟)의 제도를 갖추게 하여 문교진흥을 위한 섬학전(贍學錢) 장학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원나라의 학자들이 안향을 ‘동방의 주자’로 칭하며 중국의 화공으로 하여금 안향의 화상을 그리게 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318년(충숙왕5년) 왕명으로 화상을 모사하게 되었다. 그 영정이 순흥 향교에 있다가 그의 종가로 옮겨졌고,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세운 후에 서원으로 옮겨 봉안함에 그림이 해지고 채색이 흐림에 1556년(조선명종 11년) 당대 최고의 화공(畵工), 이불해(李不害)가 다시 모사하여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 헐리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영주에 소재하고 있다.
서원 제2호 옥산서원(玉山書院)
성리학의 대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서원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번지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 154호로 지정되었으며, 서원으로부터 북서쪽으로 700미터 떨어진 곳에는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獨樂堂)과 계정(溪亭)이 있다. 회재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어 김안로(金安老)를 재등용하려는 논의를 반대하다가 그들의 일당에게 숙청당하여 6년 동안 낙향해 있었는데, 당시 양동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자옥산(紫玉山) 기슭에 독락당을 지어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에 몰두할 때 4산5대(四山五臺)를 명명하였다. 사산(四山)은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무학산(舞鶴山), 도덕산(道德山)과, 오대(五臺)는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옥산서원이 소재한 곳은 사산오대(四山五臺) 가운데 자옥산을 배경삼아 울창한 수림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회재가 세상을 떠난 지 19년 만인 1572년(선조 5년)에 당시 경주 부윤 이제민(李齊閔)과 유림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자리를 정하여 생전에 은거(隱居)하던 자옥산 아래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경주 서악(西岳)의 향현사(鄕賢祠)에 있던 위패(位牌)를 모셔와 봉안하였으며, 선조 7년(1574) 옥산서원(玉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옥산서원은 임진왜란 때에도 병화(兵火)를 면하였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며, 6ㆍ25 전쟁 당시 안강전투가 치열한 격전지였음에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회재 선생이 삭탈관직 되어 6년 동안 독락당에 거처하실 때 퇴계 이황은 선생 곁을 떠나지 않고, 학문과 시문을 토론하면서 많은 필적을 남기었다.
독락당 현판을 비롯하여 시냇가 바위에 세심대(洗心臺) 등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썼다. 지금도 독락당 뒤 유물관에 기록이 남아 있다.
서원 입구 외삼문(外三門)은 역락문(亦樂門)이다. 역락문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에서 따온 것이다. 역락문을 들어서면 바로 위에 2층 누각이 있는데 이름을 무변루(無邊樓)라 했다. 그 규모는 문묘(鄕校)와 같은 형태를 갖추었으며, 강당은 구인당(求人堂)이며 앞마당 좌우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원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구인당 왼쪽 방은 원장이 기거하는 양진재(兩進齋)이고, 오른쪽은 교수들이 기거하던 해립재(偕立齋)이다.
구인당은 1839년(헌종 5년) 화재로 소실되어 중수하면서 헌종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에게 편액을 쓰게 했는데, 현재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玉山書院) 글씨는 추사가 썼고 대청마루 전면에 걸린 “玉山書院” 글씨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의 글씨이며 구인당의 구인(求仁)은 회재 선생의 저서 구인록(求仁錄)에서 따온 글이며, 편액은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다.
강당에서 볼 때 동쪽은 민구재이고, 서쪽은 암수재인데 민구(敏求)는 민첩하게 구한다는 뜻이며, 암수(闇修)는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 닦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구인당 뒤에는 제향 공간인 체인묘(體仁廟)가 있으며 사당 왼쪽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다. 체인(體仁)이라는 뜻은 회재가 행한 실천철학 공자의 인(仁) 사상을 구한다는 성리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회재의 이름은 본래 적(迪)이라는 한 글자였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여 이언적(李彦迪)이라 했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7∼1529)에게 글을 배워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이조장령ㆍ사헌부 ㆍ장령ㆍ밀양부사 등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에 명(命) 되었으나,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낙향,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다가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다시 관직에 나아가 홍문관ㆍ부교리ㆍ직제학ㆍ전주부윤을 지냈다.
그 무렵 회재 선생은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疎)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올바른 정치에 대한 도리였다. 김안로 등 훈신들의 아첨에 휘말린 중종에 대한 비판의 뜻이 담긴 내용으로, 정치의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마음이라고 주장하여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열 가지 조목을 열거하였다.
그 후 성균관 대사성ㆍ사헌부 대사헌ㆍ홍문관 부제학ㆍ형조ㆍ예조ㆍ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노모(老母)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요청, 안동부사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인종이 즉위한 후에 의정부 우찬성⋅좌찬성에 임명되었는데, 인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등이 사림 축출을 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선생은 모친의 병이 위독하여 사직을 하였으나 원상으로 있을 당시 대윤과 소윤의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탄핵으로 삭관탈직(削官脫職) 되었으며, 1547년(명종 2년)에는 윤원형 등 소윤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사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에 유배된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회재 선생은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논적(主理論的) 성리설(性理說)을 주장, 후배 학자인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되었다.
선생의 문집으로 회재집(晦齋集)이 있으며 구인록(求仁錄), 봉선잡의(奉先雜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등의 저서가 있으며, “文元”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 후에 충신으로 복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1610년(광해군 2년)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황과 함께 문묘(鄕校)에 종사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들 다섯 명을 동방오현(東方五賢)이라 부른다.
선생의 구인록(求仁錄)을 필자가 해역한 인연으로 저희 집과 가까이에 있는 양동마을과 ‘옥산서원’을 빈번하게 왕래(往來)하였으며, 2008년 저의 “유필서예전” 작품을 옥산서원 구인당에서 썼으니, 선생의 유적을 하나하나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었으며, 옥산서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존경스럽습니다.
서원 제3호 도산서원(陶山書院)
제가 쓴 병풍 가운데 ‘도산육곡’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문장 내용입니다.
이런달 엇다하며 더런달 엇다하료
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다하료
하말며 천석고맹(泉石膏盲)을 고텨무슴하료
乙亥春 錄 陶山六曲 第一 ‘木泉’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소재하며 1574년 창건하였고 1575년 사액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은 도산(陶山)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위해 도산서당을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면서도, 자연과 사물을 대할 때면 詩로서 감흥을 읊었으니, 자연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흥미는 천성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선생의 호는 집 앞을 흐르는 시내 토계(兎溪)에서 따 왔다. 그러나 퇴(退)는 물러난다는 뜻이며 계(溪)는 자연 속 시내이므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 내가 바라던 토계에 집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도산서원에는 퇴계가 지은 농운정사(隴雲精舍)와 역락서재(亦樂書齋)가 있으며, 자연과 함께 만년을 보낸 곳으로 완락재(玩樂齋)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 지어 붙이고 “자연이 즐거워 관상하고, 내 종신토록 싫어하지 않고 만족하다”라고 하였다.
(樂而玩之 足以終吾身而不厭)
퇴계 이황(退溪李滉) 선생은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였다. 도산서원에서 4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는 곳으로 당시는 예안현(禮安縣)이었다.
아버지 이식(李埴)의 여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 스물여덟 살 되던 1528년(중종 23년) 진사시(進仕試)와 1534년(중종 29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승문원ㆍ부정사ㆍ박사ㆍ전적ㆍ호조좌랑 등을 거쳐 1539년(중종 34년) 수찬관ㆍ지제교ㆍ전언ㆍ형조좌랑ㆍ승문원교리를 겸직하였으며, 충청도 암행어사 장령ㆍ사예ㆍ필선ㆍ대사성에 올랐다. 그러나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 때 이기(李芑)에 의하여 삭직을 당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가 1548년 단양군수로 지냈으나, 중형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바람에 풍기군수로 옮겼다. 풍기군은 고려 때 성리학을 최초로 전래한 안향(安珦) 선생의 고향이었다. 전임 군수 주세붕이 우리나라 최초로 창건한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명종 5년(1550)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음으로서 최초로 사액서원이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 재임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은거하였으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대사성이 되었고, 형조ㆍ병조ㆍ참의를 거쳐 첨지중추부사ㆍ부제학ㆍ공조ㆍ예조ㆍ판서를 지냈으며, 1568년 우찬성을 거쳐 홍문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뒤 은퇴하고 도산서당으로 돌아갔다.
왕의 부름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실제 벼슬에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음은 언제나 학문과 자연에 있었기 때문에, 도산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아가는 진퇴를 거듭하였다. 왜? 임금의 명을 거역하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명종은 벼슬을 떠나려는 퇴계를 그리워하여 도화서의 화원(畵員)에게 命하여 도산서당과 주변정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 보았다. 선생은 만년에 도산서당에서 생을 마감했다.
성리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을 정립하였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기대승(奇大升)과 8년 동안 논쟁을 펼치기도 하여 우리나라 성리학 체계를 완성하였다.
선생의 학풍은 제자 유성룡(1542∼1607), 김성일(1578∼1598), 정구(1543∼1620) 등에 의하여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도산서원은 1574년 도산서당 자리에 창건되었으며, 그 이듬해는 사액을 받음으로써 영남유학의 산실이 되었으며 정조 때에는 도산별시(陶山別試)를 보이기도 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은 선조(宣祖)로부터 사액 받은 것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다. 강당 전교당(典敎堂)은 보물 제210호로 지정되었고, 박약재(博約齋)는 원생들의 기숙공간이고, 홍의재(弘毅齋)는 박약재와 마주보는 건물로 동재⋅서재로 구분 배치되어 있다. 그 외 장판각엔 선생의 문집과 서간문ㆍ언행록ㆍ선조어필 등의 판각과 액자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尙德祠)는 동북쪽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그 일대가 수몰되기 훨씬 전에 자주 도산서원에 들렀습니다. 저희 선조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할아버지의 분강서원(汾江書院)과 애일당(愛日堂)이 불과 300미터 지점에 있었고, 분강(汾江)이 우리 종친의 집성촌이었으므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낙락장송 사이로 도로가 있어 버스를 타고 다니던 추억이 그립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우리나라 서원 1⋅2⋅3호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참된 학문의 전당으로 영원히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애일당(愛日堂)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612
문화재 지정 일시 : 1973년 8월 31일, 2021년 11월 19일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조선 중기 별당.
개설
애일당(愛日堂)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이며 학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별당이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산수와 전원을 벗 삼아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시가를 읊조리던 유서 깊은 장소로서 ‘효자는 날이 가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뜻에서 취한 당호이다. 이현보의 문집인 『농암집(聾巖集)』의 「농암애일당(聾巖愛日堂)」 부분을 보면 그 사실이 잘 나타난다.
“애일당은 집 동쪽 2리의 거리, 영지산(靈芝山) 한 자락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1508년 가을, 내가 어버이를 위해 외직(外職)을 구걸하여 겨우 영천(永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영천은 고향과 불과 3일의 거리로, 일상 공무로 왕래하면서도 성친(省親)하기가 달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유감스러운 것은 고향 경계가 협소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할 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1512년, 드디어 이 바위 위에 집을 짓기로 했다. 매번 가신 명절, 양친을 모시고 동생들과 더불어 색동옷을 입고 술잔을 올려 기쁘게 해 드리기를 반드시 이 집에서 했다. 그러나 어버이의 연세가 더욱 많아지니 희구지정(喜懼之情)이 없을 수 없어 집의 편액을 ‘애일(愛日)’이라 했다. 당의 편액을 애일이라 한 것부터 이미 일신의 즐거움을 위함이 아닌 것이다. 부모의 봉양에 ‘날[日] 부족함’의 뜻이 정녕 거기 있는 것이다.
늙은이 자손들이 역시 이 마루에 올라 이름을 돌아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친로이유효(親老而惟孝)’를 하도록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여가가 있으면 조용히 가슴을 열고 수양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는 것인즉, 애일당을 늙은이의 가문에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규범[世守之規範]’으로 삼고자 함이다.”
변천
애일당은 1512년(중종 7) 처음 세워졌고, 1548년(명종 3)에 고쳐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현보는 46세 때이던 1512년(중종 7) 94세의 부친과 92세의 숙부, 82세의 사정(司正) 김집(金緝) 등을 중심으로 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고 늙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애일당을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이현보의 집에서 동쪽으로 약 400m쯤 떨어진 분강(汾江) 기슭에는 예로부터 귀먹바위[耳塞巖]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이현보가 이를 인취(引取)하여 자호(自號)로 삼고 이 바위 옆 자연 암석 위에 애일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로 인하여 애일당을 영지산 위쪽으로 이건하였으며, 1975년 안동댐 건설로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 산11-17번지로 다시 이건하였다.
현재 애일당 축대 아래에 있는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刻字)는 일제강점기에 애일당을 이건하면서 처음 섰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농암 주변의 자연 암벽에 2자씩 새긴 것인데, 이 역시 수몰로 인해 글자 부분만 절단하여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애일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안에는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현보 등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다. 뒤쪽 열 양옆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2칸과 앞 열 4칸은 모두 대청이다. 그러나 전면 4칸은 칸살이 좁은 툇간이며 툇마루 끝에는 계자각(鷄子脚) 난간을 부설하였다. 원기둥을 사용하고 그 위에 2중보를 걸어 만든 5량가인데 종보는 홍예보이고 그 위에 화문(花文)을 새긴 포대공(包臺工)을 세웠다. 퇴보 역시 완만한 홍예보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부연을 단 겹처마로 되어 있다.
현황
애일당은 이현보의 유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이성원이다. 현재 애일당은 농암유적지정비사업으로 인하여 도산면 가송리 현 위치로 옮겨진 상태이다.
[애일당&분강서원&농암종택&고산정&축융봉]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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