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비목(碑木)이여
정 원 정
그해 여름, 느닷없이 전쟁이 터졌다.
60여 년 전 6‧25의 참극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곡두들이다. 서울에서 남쪽 고향으로 피난 가던 길이었다. 유난히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충청도 어디쯤이었을까? 사랫길에서 비껴 후미진 산길로 들어섰을 때였다. 처절한 격전지의 흔적인 듯, 양쪽 큰 산 숲을 타고 내려오는 시구 썩는 냄새에 코를 막고 싶었다. 여기저기 철모가 나뒹굴고, 미처 제대로 묻어주지 못한 어느 시신은 군화 신은 채 다리 하나가 정강이까지 흙 위로 나와 있었다. 자닝스럽다 못해 무서웠다. 정말 눈을 감고 싶었다. 이제는 모짝 잊어도 되련만 어느 땐 불쑥 그때의 광경들이 기억에서 더 압축되어 발싸심을 한다.
아련히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가곡 ‘비목’은 6‧25의 전설 같은 슬픈 정서를 깊이 가슴 젖게 한다. 작사자는 전투가 휩쓸고 간 잔영을 그냥 스쳐버려도 그만일 것을 가슴 따스한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다. 대체 어떤 사객이기에 그토록 순정의 노랫말을 빚어 승화시켰을까?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 달빛 타고 흐르는 밤 /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 울어 지친 비목이여 /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2년 전 일이다. 문화공간인 ‘이미시문화서원’에 어떤 모임이 있어 가게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도곡리에 있는 문화서원은 〈덕소〉를 훨씬 지나 시골길을 한참이나 가서 찾을 수 있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그곳이 바로 ‘비목’의 작사자 한명희(韓眀熙) 선생이 거처하는 곳이라니……. 내가 그리던 선생의 젊은 모습은 간데없고 나이 지긋한 어른이었다. 하긴 ‘비목’을 작사하던 때야 젊은 시절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천여 평은 됨직한 고즈넉한 넓은 뜰에는 오래된 정원수들 사이사이로 조각품이 널려 있었다. 지은 지 오래 묵은 건물임에도 아직 허름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일까? 여기저기 속소그레한 풀꽃들이 옹기종기 어울려 있는 정원은 왠지 적막했다. 집안의 큰 홀에는 ‘비목’의 영화 포스터 외에, 기념품들과 그림 같은 서예 액자들이 벽에 줄줄이 걸려 있었다. 모두가 의미 있는 명품처럼 귀하게 보였다. 모임을 마친 뒤 선생의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선생이 손수 차를 내놓았다. 내 나이를 염두에 두었으리라. 수필 쓰는 일을 낮은 톤으로 칭찬해 주었다. 연회색 생활 한복이 잘 어울리는 선생은 수도승 같은 청렴한 기품이 풍겼다. 선생은 문화계의 최고인 예술원회원이다. 전에 서울시립대 교수였지만 ‘비목’의 작사자로 더 유명하다.
‘비목’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작사자 한명희는 1987년 『신동아』6월호에 ‘비목’을 작사하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그는 1964년 스물다섯 살의 청년 장교였다.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서 순찰하던 중 잡초 우긋한 풀숲 속에 이끼 낀 돌무덤 하나가 눈에 띄었다. 6‧25 때 숨진 어느 용사의 무덤임을 직감했다. 어림짐작에도 허투루 쌓여진 돌이 아니었다. 아마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옆에는 녹슨 철모가 뒹굴고, 무덤 위의 십자가 비목은 썩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허수해 보였다. 화약 냄새가 쓸고 갔을 그 무덤 옆에는 산 목련이 새하얗게 피고 있었다. 언젠가 그 근처에서 주워온 카빈총의 주인공이라면 꿈 많은 20대 한창 나이의 젊은 장교가 묻혔을 거라고 상상을 했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순찰 길에서 대원들과 운달아 궁노루, 곧 사양노루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날 밤부터 홀로 남은 암컷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가녀린 체구에 캥캥대며 며칠째 밤새 울어대는데, 살상의 잔인함과 회한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이 계곡 능선을 흐르는 밤에 나도 울고, 짝 잃은 암컷 궁노루도 울고 나중에는 산천이 오열하는 듯했다.”
고 작사자는 술회하고 있다.
한명희는 제대 뒤에도, 군 생활 중 거의 2년 동안 정들었던 그 능선과 계곡의 정감이 어리어.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한다. 그 시절의 비애를 앓고 있던 어느 날, 작곡가 장일남의 곡에 붙여 작사할 기회가 있었다. 회한과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숙성시키며 가슴을 젖게 하는 ‘비목’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작사자가 그토록 깊은 가슴으로 끌어안았던 ‘비목’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역정』에 보면 한국전쟁 때 건봉산에서 벌어졌던 공방전의 치열한 상황을 적고 있다. 눈앞에서 덥석덥석 쓰러지는 병사들이 눈에 띄었지만, 전사자를 그 자리에 버려둘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뒤이어 전장에 보충되는 병사들 중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어느 기득계층의 자제는 권력을 이용해 후방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나라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비목의 주인공도 힘없고 가난한 뉘 집 아들은 아니었을까? 아무도 없는 산 계곡 양지 녘에 하얗게 피었다던 그 산 목련이야 그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해름이 몰려와 산그늘이 휘휘하게 누울 적엔 그 슬픈 영혼은 지쳐 울다 어찌 되었을까? 순연한 그들의 희생이 너무도 아깝고 서럽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름 모를‘비목’의 주인공들이여!
(201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