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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가르침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1-35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23) [무자비한 사람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춰 보는 것에 비할 수 있다. 24) 셈을 하는 중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나왔다. 25) 그가 빚을 갚을 돈이 없음을 알자 왕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29)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30)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35)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베드로가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형제가 죄를 범하였을 때의 내용으로 다시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용서에 대하여(21-22)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용서의 한계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범죄한 형제를 방임하는 것은 그 형제를 위해서도 공동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도를 바르게 파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그 범죄한 형제를 기다려 주고 신앙 공동체의 연합을 이루어 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4장 23-24절에 라멕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면 베드로의 일곱 번 용서의 언급은 그 자체로 훌륭한 신앙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놀라운 일곱 번의 제한마저도 철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용서도 아니고 우리의 용납도 아니며 우리의 권한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엔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 사이에 끝없이 반복되는 보복과 형벌의 굴레를 한없는 자비와 용서로 바꾸도록 명령하고 계십니다.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23-35)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의 결산을 배경으로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용서받은 성도의 용서하는 삶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통해 아주 과장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당시 무게 또는 화폐 단위로 금이나 은을 계량할 때 사용한 단위인데 한 달란트는 대략 34kg 정도였습니다.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일당 정도로 은 3.4g의 무게였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죄악의 무게와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은혜의 크기는 성도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될 용서와 화해의 크기와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 역시 인간 사이에 얽힌 비교적 작은 허물을 용서할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자세이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확고하게 기록된 것입니다.
적용: 진정한 용서는 진정한 신앙의 승리입니다. 용서를 통해 화평을 이루고 진정한 믿음의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위로하실 것입니다.
전혀 꽃을 피울 준비가 되지 않은 장미들은 화원에서 흔히 총알(bullet)이라고 합니다. 섬뜩하면서도 교훈적인 사실입니다. 꽃을 피우지 못한 장미는 버려집니다. 자기 안으로만 너무 단단하게 파고들어 본영의 향기를 발산할 줄 모릅니다. 육체를 가진 영적인 존재는 우리에게는 오므라든 봉우리를 열 기회가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받은 우리는 반드시 남을 용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주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신의 큰 허물을 보지 못하고 이웃의 작은 실수를 크게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있습니까? 오늘 용서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 설 교 >
용서하는 삶
마 18:21-35 / 이상호 목사(세광교회)
영국의 유명한 윌링톤 제독의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데리고 있는 군인 가운데 행동이 불순한 부하가 있었는데 어떻게 하든지 사람되게 만들어 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무섭게 훈련을 시켜보기도 하고, 때론 달래보기며 하며,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서 사람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결정적인 실수를 해서 그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이 되어 "사형" 결정을 하려고 부관에게 그를 부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부관은 그 병사를 불러 왔고 윌링톤 제독이 그를 세워놓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너는 더 이상 사람으로써 가치가 없는 놈이야 ! 너를 사형시킬거야"
그말을 듣고도 조금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병사가 밖으로 나갔을 때 윌링톤 제독의 부관인 "윌슨"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저 병사를 사람 만들려고 모든 방법을 다해 보셨다고 했는데 한가지 방법이 빠진 것 같습니다?" 너무 뜻밖에 말에 놀라한 제독이 부관에게 물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러자 "각하? 그를 진정으로 용서해 보셨나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셨나요?" 이 말을 들은 제독은 자신이 그의 잘못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렇게 한 다음 그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가장 든든한 부관이 되었고 영국 최고의 제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한사람을 변화시켜서 위대한 제독을 만들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의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받지 않아야 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인가?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해를 끼치면서 살아갑니다. 단지 내가 그렇게 사는 것을 모르는 것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아야할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말하길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어 "용서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천국은 완전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은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이 "용서의 능력"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용서하며 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용서의 비밀'을 깨닫고 용서하고, 용서받는 귀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어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탕감"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던져버렸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38:17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고 하셨고 사 43:25절에는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던져 버렸다는 말이나, 도말했다는 말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 합니다. 한마디로 기억지도 아니하고 잊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감정을 누르고 억제하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감정이 언젠가는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건 용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증오"가 됩니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방을 피하고, 만나지 않고 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역시 올바른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여러분! 함께 살면서 피한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만나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되면 또 고통스러운 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하기는 해야겠는데 먼저 내게 찾아와서 용서를 빌면 용서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의 정신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상대방이 잘못을 빌든지, 안 빌든지 그런 것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기를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지금 잘못을 행한 줄도 모르지만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 가고 십자가에 달리시자 그렇게 당당했던 제자들도 다 배신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제자는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셔서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왜 비겁하게 나를 두고 도망갔느냐, 왜 저주하였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와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하시고, 음식을 준비하여 저들을 사랑으로 맞이하여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용서의 정신'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믿음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두번째로 어떤 사람이 이런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하나님께 용서받는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의 용서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상하게 삼 3번 용서해 주는 것을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번이나 용서해 주었는데 하면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세 번용서 한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도 진정으로 용서하여 그의 잘못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몇 번 용서해 주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법으로 말하면 "집행유예"입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죄를 지으면 지금 용서해 준 죄까지 더해서 벌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유대의 규례에 3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세번 정도는 용서해 주라는 것은 "하나님도 유대인들이 서너가지 죄를 범하면 책망하셨는데"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관대할 수 없다"는 잘못된 편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는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해 주리이까? 라고 했습니다. 대단하게 인심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 주라는 것은 횟수로 치면 "490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490번'이 아닙니다.
'끝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용서해주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님처럼 죽는 날까지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런 용서를 먼저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졌습니다. 얼마의 빚을 졌다고 했습니까? 일만 달란트의 빛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6000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일군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돈으로 계산해보면 약 3조원이 됩니다.
한 푼도 쓰지않고 6000천만 날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빚을 갚겠습니까? 아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의 몸과 처와 자식들,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안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서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탕감받고 나오다가 자기에게 빛을 진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얼마의 빚을 졌느냐 하면 100데나리온의 빚을 졌습니다. 100데나리온 하면 일군이 100일 동안 일한 삯입니다. 우리 돈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약 500만원 정도였습니다.
물론 몇 만원이라도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지요. 그런데 인정사정도 볼것 없이 끌고 가서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지게 되고, 그 소문이 끝내는 왕에게 까지 전해졌는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에게 그를 다시 잡아 오라고 해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는 얘기가 오늘 본문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은 죄를 무엇으로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죄를 탕감 받았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형제의 조금마한 잘못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그 죄를 다시 묻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용서의 감격으로 용서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미국의 강철왕이었던 카네기의 성공비결은 그의 넒은 마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관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동기가 있었습니다. 젊어서 회사에 입사해서 한동안 회사 공금을 전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답니다.
한번은 엄청난 거금을 가방에 담아 물품재료를 사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갔는데 사람도 만원이고 몸이 피곤해서 열차난간에 앉았다가 그만 졸다가 돈가방이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놀란 카네기는 기관실로 달려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참을 지나서야 기관실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기관사에게 자기의 사정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회사 사활이 걸려 있는 문제인데 한번 멈춰서 기차가 후진으로 가게 할 수 없느냐고 사정을 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애원을 했던지 난생처음 기차가 멈춰서 한참동안 후진을 해서 돈가방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 돈가방을 찾는 순간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누가 나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해도 일부러 한 일이 아니라면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각오를 갖게 되었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업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당해본 사람이 어려움을 아는 것처럼, 용서받은 감격을 아는 사람이 용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고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내 자신입니다. 남에게 검은 것을 묻히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검은 것을 묻혀야 합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어둠속에 살아갑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니 한마디로 매일 매일이 지옥입니다.
어느 동네에 아이들에게 매를 맞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도 때리니까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복수하려고 궁리 끝에 자기 몸에 다이나마이트를 꽁꽁 묶고 다녔습니다. 건드리면 터져버리게, 그런데 어떻게 이 소식이 친구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아무도 가까이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친구들에게 안맞아서 좋다 싶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혼자만 다니니까 너무 고독합니다. 뿐만 아니라 혹시 어디에 부디쳐서 터지면 어떨까? 늘 혼자 불안하게 살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죽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되면 자기자신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용서의 사람으로 말한다면 구약에 요셉이란 사람"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형들에 미움으로 구덩이에 빠지고 나중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리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디발 아내의 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도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를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을 그렇게 미워했던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가 축복받고 잘되었다는 말은 성경에 한곳도 없습니다. 반면에 요셉은 성경에 가장 귀한 믿음의 사람으로 축복받는 사람이 되어짐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먼저 용서하면 손해보는 것처럼, 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용서하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유명한 화가였던 네오나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빈치가 예수님과 12제들의 마지막 만찬의 모습을 그리면서 두 사람을 그리는데 가장 크게 고심을 했답니다. 다빈치가 직접 제자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기에 영감으로 그려야 하는데 제일 그리기 힘든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 유다였습니다. 먼저 가롯 유다를 그렸는데 평소에 자기를 가장 괴롭혔던 사람을 모델로 가롯 유다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1제자들을 그렸는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고민하다가 수도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 했습니다. 제자들의 특성을 따라 이렇게 그렸는데 가롯 유다는 이런 마음으로 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에 대한 원한을 풀고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에 대한 영감을 얻지 못할 거라고. 수도사의 충고로 그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고 돌아와서 영감을 얻어서 작품을 완성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분노의 감정이란 밀가루 속에 넣은 누룩과도 같습니다. 오래 품을수록 마음은 점점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빠를수록 좋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회복 되어야 하겠습니다.
용서를 통한 쓴 마음의 치유
마 18:21-35 / 김필곤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용서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답니다. 설교하던 중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목사님은 물었답니다. "아무도 없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맨 뒤에 앉은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답니다. 목사님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답니다. "응, 있었는데… 다… 죽었어."
우리 성도님은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보기만 해도 분노가 치미는 사람이 없습니까? 속된 말로 밥맛 떨어지는 사람은 없습니까? 만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기 싫은 사람은 없습니까? 누구에게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과 전화를 하는데 자신과 함께 신앙 생활하다 교회를 떠난 사람 중 몇 명은 죽는 날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나 그 교인들로부터 심각한 상처를 받았으면 목사님에게 그런 쓴 마음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명예에, 나의 감정에, 나의 물질에, 나의 건강에, 나의 사업에, 나의 인생에 심각한 피해를 주어 절대 용서해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쓴 뿌리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히12:15)”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쓴 뿌리는 독이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의 뿌리입니다. 비유적으로 불신과 배교를 나타내는 완고한 기질을 가리킵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불행하고, 부정적인 사건들로 말미암아 생긴 상처로 인하여 마음이 독한 마음, 쓴 마음으로 변한 사람입니다. 이 쓴 뿌리는 문맥적으로 볼 때 교훈이나 악한 사상을 가지고 교회의 화평과 성결을 손상시키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쓴 뿌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쓴 뿌리는 교회에 내에 사악한 영향을 끼칩니다.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예리한 상처, 괴로운 상처를 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입은 심각한 상처로 핵심 감정을 말합니다. 이 상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정상적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쓴 뿌리는 특징은 "쓴 뿌리가 나서"라고 표현한 것처럼 성장을 합니다. 치유되지 않으면 더 악화되고 깊어집니다.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쓴 뿌리는 고통과 괴로움이란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뿌리 깊은 분노가 생깁니다. 앙심이 생깁니다. 원한이 맺히게 됩니다. 미워하게 됩니다. 그 상처가 마음을 지배해 버려 쓴 마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휘저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을 비틀거리게 하고 곁길로 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라고 말씀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 중에 인생을 괴롭히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런 쓴 뿌리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마음의 쓴 뿌리를 우리가 어떻게 치유 받아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심리적인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치유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쓴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을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서로 화평해지고 용서할 때 서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원한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쓴 마음이 단 마음으로 변합니다. 용서할 때 쓴 뿌리가 단 뿌리로 변합니다. 용서할 때 분노가 사그라지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응어리가 풀리고 한이 풀이는 것입니다. 용서할 때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것을 말씀합니까?
1. 우리가 어떻게 쓴 마음을 치유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용서가 비결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난 10일 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남성이 9차례나 찔러 한 여성을 살해했습니다. 언론은 '정사갤 살인사건'으로 광주에 사는 진보적 생각을 가진 백씨가 부산에 사는 보수적인 김씨를 죽였다고 이념논쟁으로 보도했지만 사실은 둘 다 "둘 다 전땅크(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칭하는 은어) 지지자였다"고 합니다. 김 씨는 논리적인 글과 뛰어난 외모 때문에 사이트 회원들 사이에서 '여신'으로 불렸는데 백 씨가 지난해 9월 김 씨에 대한 성적 비하 표현을 했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며 글을 올리자 김 씨가 화를 내며 백씨를 즉각 고소했고 백씨는 친필로 사과문을 써서 게시판에 올리고 김 씨가 사는 부산까지 찾아가 해운대 경찰서 앞에서 사진을 찍어 사과글을 올렸답니다. 그러나 수차례 사과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지 못하자 분노한 백씨가 살해로 앙갚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부모는 백씨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딸을 죽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딸의 인생을 망쳐 논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회사를 망하게 한 사람, 자신에게 엄청난 재산 손실을 준 사람,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놓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이 정도 용서해 주면 많이 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경건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4를 더해 완전수를 만들어 7번까지 용서해 주면 예수님이 칭찬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22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490번까지 반복적으로 용서해야 할 대상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의 인내심에 한계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이겠습니까? 있다면 아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일 것입니다. 어떻게 끝없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빚은 진 종이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얼마나 되는 액수입니까? 그 당시 화폐 단위로 일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빛은 육천만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유대 전역에서 거두어들인 일 년 세금이 고작 900 달란트 정도였다고 하니 1만 달란트란 얼마나 엄청난 액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1년은 365일이니까 노동자가 164,384년 동안 벌어야 갚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하루 품삯 10만으로 계산한다면 6조가 넘는 돈입니다.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탕감해 준 근거는 무엇입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불쌍히 여겨서입니다. 주인의 긍휼한 마음, 자비의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 종이 자기에게 배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빚을 갚지 못하니까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종의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벌을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마음을 가지고 살면 바로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기껏해야 천만원 정도이고 내가 하나님께 준 상처는 6조가 넘는데 그것 가지고 평생 목을 비틀고 저주하고, 분노를 품고,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형벌을 당해야 할 인생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다 찢기시면서 용서해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 자존심 하나 건들면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에 조금만 상처를 주어도 그것을 생채기로 간직하고 씹고 씹으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뭐 그렇게 많이 죄를 지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32-3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니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 용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생각하면 끝없이 용서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쓴 마음은 치유가 됩니다. 100데나리온은 만달란트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용서함 받고 생명을 구원받았는데 나의 감정을 조금 상하게 하였다고, 내 재산에 손상을 입혔다고, 명예에 상처를 입혔다고 용서하지 못하며 쓴 마음 가지고 사는 인생되지 말아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은 용서해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억울하게 27년 동안 외딴섬의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치하여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습니다.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백인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범행을 털어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그 범죄로 인해 재판을 받거나 처벌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문회 자리에서 반드 브렉이라는 경찰관이 자기의 죄를 털어 놓았습니다. 자신과 동료들이 18세 소년을 총으로 쏘고 시체를 불태운 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 시신을 바베큐처럼 불에 그슬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8년 후 반드 브렉은 다시 그 집으로 가서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했는데, 불쌍한 그 아내는 경찰관들이 남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몸에 휘발유를 끼얹은 뒤 불을 붙이는 광경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아들과 남편을 차례로 잃은 노부인에게 법정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판사는 물었습니다. "반드 브렉 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부탁한 후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추가했습니다. "반드 브렉 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두 번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나는 반드 브렉 씨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것과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것을 반드 브렉 씨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요일4:20)"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았다면 무엇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평생 쓴 마음 가지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로 용서해 주며 회복된 마음으로 살겠습니까?
2.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계속 쓴 마음을 품고 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3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주인의 진노를 당합니다. 그 빚은 내가 다 갚을 때까지 감옥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보십시오. 35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용서하지 않는 자가 피해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람,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당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것을 품고 삽니다. 그러면 피해를 보아 손해고 그것을 잊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손해입니다. "인생의 응어리를 풀라"의 저자 크리스티 김은 영적 성숙의 출발점은 용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출석했어도 속 사람이 변화하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상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성숙을 위해서는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용서하지 않은 자가 당하는 영적 피해를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용서하지 않으면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둘째,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을 탑니다. 셋째, 용서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넷째,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이성과 결혼하게 됩니다. 다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과 멀어집니다. 여섯째,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을 닮아갈 수 없습니다. 일곱째,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여덟째, 용서하지 않으면 몸이 쇠약해집니다. 아홉째, 용서하지 않으면 외롭게 삽니다. 열째,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에 묶입니다. 열한째, 용서하지 않으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열두째,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죽는 날까지 쓴 마음을 품고 살면 죽는 날까지 손해입니다. 왜 그렇게 계산적으로 불리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 나라 사람들 일본 사람들 끝까지 용서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인,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 세명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 무단침입으로 야만인들에게 붙잡혀 곤장 100대씩을 맞게 되었답니다. 다행이 야만인 추장은 이들에게 단 한가지씩 소원을 들어 주기로 했답니다. 첫째로 미국인 "제 등뒤에 방석 6장을 올려 주십시요." 추장은 소원을 들어 주었답니다. 그리고 곤장 100대를 맞았답니다. 하지만 방석이 너무 얇아 70대째에 방석이 다 찢어져 정신을 잃었답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일본인 "제 등위에 침대 매트리스 6개를 올려 주십시요.” 일본인의 소원을 들어 주고 곤장이 시작 됐답니다. 일본인은 100대를 맞는 동안 줄곧 웃기만 하다 일어 났답니다. "역시 나는 모방의 기술이 뛰어난 민족이야" 하며 좋아 했답니다. 야만인 추장은 한국인을 향해 "자, 네 소원은 무었이냐?" 하고 물었답니다. 한국인은 쓱 웃으며 “저 일본 놈을 제 등뒤에 올려 주십시오” 라고 했답니다. 신문에 보니까 직장인 10명 중 6명은 회사 내에서 복수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직장인 1323명을 대상으로 '직장 내 소심한 복수 경험 여부'를 조사한 결과 '여성'(64.3%) '남성'(49.9%)가 복수를 했다고 합니다. 서울 동작구에서는 여자 친구가 배신했다고 칼로 28번 찌러 숨지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울산에서는 여자가 결별을 통보하자 찾아가 자매를 죽인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부산에서는 변심한 애인에게 복수한다고 복면을 쓰고 찾아가 교제할 때 쓴 돈 다 내놓으라고 흉기를 들어대며 500만원을 빼앗은 일도 벌어졌습니다. 부산에서 사귀던 남자 친구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룸 출입문 앞에서 불을 낸 여인이 방화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사랑하다 배신당하면 프랑스 여자들은 배신한 남자의 연적을 죽이려 한다거 합니다. 이탈리아 여성은 배신한 남자를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영국 여성은 다른 남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 여인은 연놈을 감옥에 보낸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며 복수하면 통쾌할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 손해입니다. 한 때 받은 상처가 핵심감정이 되면 그 감정은 그 사람을 움켜잡고, 평생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사는 가격보다 그 유지비가 훨씬 더 많이 드는 물건입니다. 인간 영혼에 가장 강력한 독소로 작용하여 자신을 괴롭히고 인간관계에 불화와 갈등을 조장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정서의 독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화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상처를 만들어 내고 분노와 적개심, 복수심을 증가할 뿐 아니라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하는 당사자입니다.
쓴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과거 사건에 갇혀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쓴 마음은 적개심을 도발하여 다른 사람에게 증오심을 품게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적개심과 원한을 품고 살게 됩니다. 쓴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쓴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거나 실망했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사건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1) 신체적인 결과로 화학적 균형이 깨집니다. 우리가 분노하면 뇌하수체, 신장, 갑상선과 다른 내분비선으로부터 특정 호르몬이 나오게 된답니다. 이런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게 되면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나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궤양성 대장염, 독성 갑상선종, 고혈압들의 질병에 걸릴 수 있답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을 유발합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신체적 피로를 가져오게 되고 성경은 골수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를 생산하는 기능은 뼛속에 있는 골수이므로 뼈의 건강은 몸의 건강을 좌우하게 됩니다. 쓴 마음은 뼈에 직접적이며 아주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잠15:30; 잠 17:22).
2) 영적 결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영적 성장에 큰 지장을 초래합니다. 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요일4:20-21). 쓴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를 반복하면서도 내가 이웃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쓴 마음을 가지면 그 쓴 마음이 우리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배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하여도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3) 쓴 마음은 감정적인 나쁜 결과를 나타나게 합니다.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우울증입니다. 원한을 계속 품으면 감정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적 에너지가 다했을 때 피곤해지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적 에너지를 다 쓰게 되면 그 결과로 우울해 집니다. 우리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맞출수록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4) 쓴 마음을 품으면 정신적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정신이 그 분노의 종이 되어 폭군처럼 마음을 사로잡아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5) 쓴 마음의 결과는 자신에게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신5:9). 부모의 엄격한 훈련에 대한 자녀들이 쓴 마음을 품으면 자녀들은 그릇된 대상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갑니다. ‘나는 결코 아버지와 같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녀는 비교의 기준을 그의 아버지로 삼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3. 쓴 마음을 용서를 통해 깨끗이 치유하면 어떻게 회복될까요?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주고 괴로움을 준 자를 더 이상 빚진 자로 간주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큰 용서의 강물이 내 삶의 전반에 흥건히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를 빚쟁이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내게 피해를 주고 아픔을 준 자를 빚쟁이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가 달라진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시어머니를 내 인생을 망친 남편과 아내를 내 인생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친 부모를 더 이상 나에게 손해를 끼친 분으로 상처를 주신 분으로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면 우리의 죄를 기억치도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4)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모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용서하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아직 기억이 있습니다. 아직 상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갖는데 문제를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문제로 상처를 후비며 괴로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사건이 잊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로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행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미래를 향해 발전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 없이 겉으로만 용서한 척한다면 결국 과거에 얽매여 미래를 향해 보다 발전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용서한다고 고통이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통이 우리를 계속 붙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과거의 시간에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그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그들에게 불리하게 이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쓰라린 감정이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한 순간 사탄은 이미 틈을 탈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엡 4:26,27). 용서는 혈액순환과 같습니다. 우리 몸에서 더러운 피가 심장을 거쳐서 새 피로 만들어진 후 다시 온 몸을 순환함으로 모든 세포 세포가 항상 싱싱하게 살아 있게 됨과 같이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죄책감이나 혹은 증오감에서 죽을 지경이던 사람이 해방을 얻어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용서는 힘이 있습니다.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며,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준 사람으로 말미암은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며, 분노로 인한 고혈압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완화해 줍니다. 용서는 개인의 심리적 건강과 안녕의 회복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강력한 치료적 체계로서 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증진시키고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는 영적 힘이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는 바로 다른 한사람의 죄의 결과를 내가 용납하고 살아가겠다고 희생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쓴 마음이 회복되면 오히려 내가 받은 상처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내가 상대방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을 때 그러한 행위가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으면 그러한 행위가 일어남으로서 내게 미치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뛰어난 목적들로 감사하게 됩니다. 내게 거슬리는 자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보게 됩니다. 나를 공격하는 개인을 원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삶에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별히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은 갈대아 사람들의 공격으로 많은 재물의 손실을 보았지만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욥1:20-21). 요셉은 형제들로 말미암아 애굽의 종살이를 했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도구로 보았습니다(창50:20). 다윗도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할 때 쓴 마음을 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습니다(삼하16:9,1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인류의 궁극적인 구원의 큰 목적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눅23:34).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보면 그 사람에 대하여 쓴 마음을 계속 품지 않습니다. 나를 최고로 공격하는 자를 하나님의 지배하에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배웁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히12:6-7).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우리에게 맺히게 합니다. 고난은 자신을 조사해 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고전11:31-32). 고난은 우리의 자랑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잠13:10).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은 무너집니다. 고난은 우리의 약함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고후12:7-10).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해 줍니다(시3:4). 고난은 우리가 영적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엡6:11-18).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순결케 하고(히11:6) 우리로 하여금 악을 더욱 증오하게 만들며(히11:25) 기도하게 합니다(딤전2:1-2). 내 적대자를 위해 기도하게 합니다. 웃음으로 인사하게 합니다. 그의 적극적인 성품을 칭찬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변호하게 합니다. 그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게 합니다. 그의 필요한 것을 채워주게 합니다.
■ 고든 맥도날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훌륭한 아내와 함께 훌륭한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목사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안락하고 풍파없는 그의 삶은 권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는 교인 중 한 사람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잊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여인은 목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한 교인에게 토로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은 즉시 당회에 전해졌고 당회원들은 이미 그 교회를 떠나 다른 선교 단체의 총재로 봉사하고 있는 그를 소환해서 징계하였습니다. 그는 당회의 징계에 순복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당회원들의 지도하에 징계를 받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당회원들은 그가 충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다시 목회 일선에 복귀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그 후 뉴욕시의 어려운 지역에 들어가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의 목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당회는 다시 그를 자신들의 교회로 불러 담임 목사직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럽게 다시 그 교회에서 목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미 다른 곳에 가있는 사람을 과거의 문제로 불러 치리한다는 것도 보통일이 아닙니다. 오리발을 내밀며 버틸 수도 있을 것이고 교회 교인들도 과거사이니 그저 덮어 버리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듭을 확실히 풀었습니다. 그저 묵인하고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며 비방한 것이 아니라 확실히 정리하고 용서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담임목사로 모셔 정상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용서입니다. 이것이 쓴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입니다. 과거의 문제, 그것은 과거의 사건입니다. 과거의 허물 그것 역시 지나간 사건입니다.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용서란 과거를 마음에 품고 덮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하고 사람들과도 정상적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실수가 현재와 미래의 정상적 관계를 갖는데 거침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그 어떤 실수를 하였다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정상적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35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로 쓴 마음 치유받아 회복되어야 합니다.
현대인의 한계(용서)
마 18:21-28, 34-35 / 이정익목사
가곡 가운데 “이별의 노래”가 있습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유명한 시인입니다. 이 시인이 어느 날 여대생과 눈이 맞아 함께 가출을 했습니다. 부인이 소문을 듣자니까 제주도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과연 어떤 모습으로 갔을까요?. 분명 눈에서 불이 튀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가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채를 잡아야 하나?’ 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활이 얼마나 어려우냐며 보태 쓰라고 돈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을 보내려면 추울텐데 입으라고 남편과 그 여인을 위한 겨울옷이 담긴 보따리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런 소리 안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내가 떠나고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았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둘은 헤어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인이 배를 타고 떠나갑니다. 눈앞에서 여인을 실은 배가 멀리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인이 시를 지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입니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많이 겪게 됩니다. 때로는 갈등의 일, 분노의 일, 감정 상하는 일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때 그 감정들을 지혜롭게 처리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다보면 싸울 일이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때로 물질 때문에 싸울 때도 있습니다. 물질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우상도 되고 영적 걸림돌도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서 무섭게 절제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살다 보면 용서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감정이 앞서고 분노와 복수심만 가득 찹니다. 용서하려면 내 마음과 심각하게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우리는 매일 그 싸움에 지곤 합니다. 제주도에 갔던 시인의 아내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마음에 감정의 상함이, 복수심과 분노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내는 분노와 복수심의 감정을 한수 높게 처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한방에 고꾸라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매일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마주하며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갈등과 불화, 감정의 대립을 하게 되고 그것이 원한 관계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또한 불화함으로 마음과 감정이 상하게 되어 큰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부부간에도 일어나고 형제간에도 일어나고 교회에서 교우 간에도 일어납니다. 그때 오는 타격은 감정의 상함으로 끝나지 않고 영성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삶에 기쁨을 잃게 되고 마음 문이 닫혀 지옥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용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대화하던 중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21-22)” 사실 베드로는 내심 칭찬을 기대하고 “일곱 번까지 용서할까요?” 하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여기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수는 490번을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35절부터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임금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일만 달란트가 얼마만큼의 돈인지 아십니까? 1달란트는 노동자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6천배입니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하루 임금이 10만원이라면 10만원의 6천만배의 돈이 일만 달란트입니다. 혹자는 오늘 돈으로 10억 달러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시 온 유대 땅에서 거둬들인 한해 세금이 800달란트였다고 하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돈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큰돈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 받고 왕궁을 나오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빚진 자에게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르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소식을 임금이 듣고 크게 노하여 그 사람을 다시 불러 “네 빚도 당장 갚으라” 하고 그를 다시 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35절 끝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리라.”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이 세상은 당장이라도 심판받게 될 것이고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의 중심은 긍휼과 은혜와 용서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55장에도 하나님의 긍휼이 나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여기서 젖을 사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의 복음과 용서의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6절부터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 용서의 신학이 성경 전체에 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도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하시며 용서의 신학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용서의 진수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우리에게 어찌 이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신학을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본문이 이 시대에 주시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갈등의 이유
옛날의 생활은 단순했습니다. 이웃도 몇 명 되지 않아 갈등의 요인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삶이 복잡해졌습니다. 사람들도 많아졌고 서로의 이해관계도 아주 첨예해졌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문제로 갈등하고 불화하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이것은 친구와 이웃뿐 아니고 부부와 형제와 부모 자식 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교우끼리 자주 만나다 보니까 성격 차이로, 질투심으로, 물질문제로 불화한 관계가 되기도 하고 사역하다가 불화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과 바나바도 사역우선순위 문제로 심각하게 다투다가 일시적으로 갈라서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의 삶에는 갈등, 불화, 원한 관계를 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이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핍박은 그냥 욕하고 비웃는 수준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이 있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영적으로 혼란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모든 상황에서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 같아서는 용서는커녕 복수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큰 것입니다. 용서할 능력은 없는데 용서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과 투쟁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투쟁하고 싸우지 않으면 용서를 흉내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투쟁하고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용서의 한계
오늘 본문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즉 무제한의 용서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용서는 어디까지 입니까. 사고 친 사람들도 불법을 행한 사람도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말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 다 용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라는 것은 마치 오늘날 무제한적 복지를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웃을 돕고 나누고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이웃을 돕고 나누고 구제하는 복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도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지란 구제대상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거나 힘들거나 실패해서 지금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들은 빨리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정신이고 복지정신입니다.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나서서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지의 개념이고 성경의 정신입니다. 저 북한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지금 북한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잃고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도 스스로 살아갈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개척교회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개척교회도 스스로 유지하기에는 힘이 모자랍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큰 교회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도움이고 구제입니다. 그렇다고 일본이나 미국이나 만 명 모이는 교회까지 다 도와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빚을 탕감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해서 사기치고 불법을 자행하고 강도질 한 사람까지 다 용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것 까지 용서하지 못해서 마음으로 갈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핍박받고 고난당하며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까지 받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용서의 대상들입니다. 모르고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죽이고 조롱하는 군인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용서의 기도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용서하라는 의도와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본문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뜻에는 세 가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용서 이유
하나는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원래 상처를 준 사람보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훨씬 괴로움이 큰 법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받으면 그때부터 삶의 기쁨을 잃게 되고 사람들이 싫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오래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마음속에 기쁨과 평화를 잃게 되어 삶이 지옥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하고 싸워야 합니다. 빨리 용서하기 위해서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때 잃은 기쁨을 회복할 수 있고 내 마음에서 지옥을 몰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치유나 회복은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같은 용서는 나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무장공비에게 잃었습니다. 무장공비는 두 아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아비 된 마음속에는 공비를 죽이고 싶은 복수심에 불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득 ‘공비를 죽이고 원수를 갚으면 죽은 내 두 아들이 살아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은 그 공비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내가 평화로워지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다. 불화와 갈등이 생기면 나 자신이 불행해집니다. 기쁨도 잃게 되고 영적으로 균형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동체가 심하게 훼손됩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생기면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균열이 생기고 파괴되기도 합니다. 교회의 경우도 그 안에 갈등이 생기면 교회공동체가 흔들리고 모두가 시험에 들게 됩니다. 나라도 갈등하면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서로 불화와 갈등의 문제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감정이 상하게 되면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갈라서고 형제가 원수가 되며 가정이 파괴됩니다. 또한 교회도 분열되고 찢어지고 서로 원수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고 실제로 죽임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원수를 갚고 싶고 죽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기독교 공동체와 복음전파의 길에는 심대한 훼손을 입게 됩니다. 그러니까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용서의 신학은 그래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이고 공동체의 건강을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갈등이 많고 용서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교회가 갈등이 없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모두 교회공동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한 여러분들의 노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조용히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 자신이 용서받을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씀하는 핵심 신학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임금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100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먼저 임금으로부터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본문은 이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러운 죄를 탕감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즉 여기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하나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구원받았으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고민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이미 죽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은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왜 고민도 하지 않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고 질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제도를 고치고 구습을 뜯어 고치는 혁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의 문제를 털어내기 위해서 내안의 나와 무섭게 투쟁하는 일이 신앙개혁입니다. 내안에는 구태, 고집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보고 용납하고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안에 엉킨 감정을 풀지 않고 원한과 증오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도 용서해야 하지만 먼저 나를 위해서 입니다. 용서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과 힘겨운 싸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마침내 내 안에 잃어버렸던 기쁨을 회복되고 천국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진심으로 용서하십시오
용서받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한때 욥이 위대하게 된 것은 고난을 잘 통과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욥기를 자세히 보니 욥의 위대함은 고난을 잘 통과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욥이 가장 힘들 때 비난하고 공격한 친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준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잘 이겨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원수까지도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은 고난을 이겨낸 영광이 아니라 원수를 용서한 용서의 영광입니다.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하며 사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윤활유와 같습니다. 미움은 관계에 모래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상처 난 마음을 아물게 하기보다는 그 상처를 키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마치 꽃에 물을 주듯이 상처에 미움이라는 물을 주며 살게 됩니다. 상처에 미움이란 물을 주면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더욱 악화됩니다. 미움으로는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오직 용서하는 사랑으로 상처가 치유됩니다.
앨런 패턴은 "우리가 입은 깊은 상처는 우리가 용서할 때까지는 치유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특효약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용서를 베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용서를 통해 사람들의 흉기를 향기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향기로운 것입니다. 미워하며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함으로써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시다.
세상은 악합니다.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미워하고 증오심에 사로잡혀 살며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선은 용서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려 하면 서로 손해 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 불행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일곱 번만 용서할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온전히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임금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임금님이 빚 진 신하를 불러 빚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신하는 어쩌다가 임금님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만 달라트라는 거액의 채무를 안고 있었습니다. 1 달란트는 일만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한 사람이 하루 일하고 받는 일당입니다. 1만 달란트는 얼마입니까?
1만 달란트란 어떤 사람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돈입니다.1만 달란트는 당시에 한 사람이 약 5000번 계속 태어나 돈을 벌어 빚을 갚아도 겨우 본전만 갚을 수 있는 천문학적 액수입니다.큰 빚으로 인해 자기 재산은 물론 자신의 몸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까지 다 노예로 팔아야 할 상황입니다. 신하는 임금님께 엎드려 간청합니다. "제발 노예로 팔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임금님은 빚진 신하의 지은 빚이 너무도 커서 기한 연장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임금님은 그와 그 가족을 불쌍히 여겨 아예 탕감하겠다는 파격적인 은혜를 보여줍니다.큰 빚을 진 신하는 이제 자신을 짓누르던 빚을 다 갚아야 하는 의무와 죄책감에서 해방됐습니다.하늘을 날 듯이 황홀하고 감격했습니다.
성경의 비유에서 채권자는 하나님이며 사람들은 1만 달란트 빚진 빚쟁이입니다.하나님의 공의 앞에 의인은 결코 없습니다.이런 엄청난 빚의 해결방법은 오직 채권자가 탕감해주는 길뿐입니다.구원의 역사는 내 공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주홍같이 붉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죄가 깨끗이 용서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가 바로 내게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 사함 받고 구원을 선물로 받았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로는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알지만 삶 속에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마치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은 것처럼 자신의 의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또는 자신의 믿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은 일 만 달란트의 빚을 한 푼도 받지 않고 탕감해준 임금님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다 탕감해주시고 우리의 더럽고 부끄러운 행위를 지워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탕감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자기 몸을 학대하며 평생을 고행을 하며 죄값을 치른다 해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만년 동안 고통을 겪는다 해도 죄값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외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죄가 전혀 없으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 형벌을 받고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의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갑자기 우리의 큰 죄를 다 탕감해주셨을까요? 불쌍히 여기셔서 탕감하셨습니다.(2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죄 짐에 눌려 신음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죄로 인해 자유를 잃고 사단의 종 노릇 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무 조건 없이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죄의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게 깨끗이 지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에 늘 감격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용서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예배 드려야 합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죄의 큰 빚을 탕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큰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본문에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너무나 기뻐 집으로 돌아가다가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입니다. 그래서 붙잡고 빨리 빚을 갚으라고 독촉했습니다. 그러자 그 동료는 "조금만 참아주게나. 곧 갚겠네." 하고 사정했으나 듣지 않고 빨리 빚을 갚도록 고소하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탕감 받은 종은 탕감이 취소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얼핏 채무의 문제 같지만 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용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이 엄청나게 큰 용서를 받은 존재임을 잊고 삽니다. 하나님 앞에 큰 잘못을 수없이 범하여 영원히 지옥에서 죄값을 치러야 마땅한 운명이었지만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죄가 다 탕감 받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큰 용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저주받아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 은혜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처럼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마음이 아주 너그러워져서 다른 사람의 웬만한 잘못은 용서하고 이해해 줄만 한데 용서에 인색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심해도 너무 심합니다. 그런데 그처럼 인색한 신하와 우리 자신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일 만 달란트 빚진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인데 이웃이 우리에게 작은 잘못을 저지르면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작은 손해라도 입힌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따라붙어 남김없이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픈 상처를 입힌 사람에게 잊지 않고 분노심에 불타 몇 배나 더 큰 상처를 입히려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은 철천지 원수가 아닙니다. 자신과 함께 사는 가족입니다. 자신과 동행하는 친구입니다.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교인들입니다. 동역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허물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미워하며 원한을 풀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속 좁고 은혜를 쉽게 잊어버린 백성들을 보실 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나는 너의 일만 달란트에 해당되는 큰 죄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너는 그 백 만분의 일에 해당되는 형제의 작은 허물도 용서할 수 없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큰 죄를 사함 받는 큰 은혜를 입은 자답게 이웃의 잘못과 죄를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천국을 맛 보게 됩니다.
그처럼 우리가 은혜를 잊지 않고 탕감해주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본문 33절에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입은 은혜의 빚을 눈에 보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갚는 것이 바로 주님께 빚 갚는 삶입니다.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에게 잘못을 하였을 때 미운 마음, 섭섭한 마음이 솟아날 것입니다. 악착같이 원수 갚겠다고 하기 쉽습니다. 악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힘들면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셨음을 바라보며 여러분도 그를 불쌍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서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부모 자식간에 서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교인들간에 서로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섭섭하게 한 사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용서하지 못할 때 생기는 감정의 쓴 뿌리는 결국 인체를 산성화시켜서 효소의 활성도를 떨어뜨리며 각종 병원균에 대한 저항력도 감소시켜 병적인 체질로 만든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쓴 뿌리는 정서적으로 주변을 오염시켜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듭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일생 동안 과거의 끈에서 자유 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의 육체와 인격을 파괴뿐 아니라, 신체적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불면증, 변비, 소화불량, 두통, 면역력 저하, 세포재생산 능력의 감소, 암 등 질병을 유발합니다. 평생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심을 품고 살아간다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자신입니다. 복수를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혼까지 파멸로 몰고 가게 됩니다.
용서하면 놀라운 은혜가 입합니다. 치유의 은혜가 임합니다. 정서적 고통을 완화해 주고, 우울과 불안을 감소시켜주며, 개인의 자존 감을 회복시켜줍니다. 용서는 분노의 폭발을 막아주며, 분노와 죄의식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해 주며, 해를 입힌 사람을 향한 증오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용서는 신체적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건강을 촉진시켜주고, 혈압을 낮추어 줍니다. 용서는 건강을 가져올 뿐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용서는 창조성과 활력을 강화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용서하면 영적 축복도 임합니다.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게 하고 진정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용서는 행동이며 선택입니다. 용서는 능동적인 행동이며 에너지가 많이 소요됩니다. 과거는 한 조각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상처라는 것이 어차피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의 큰 죄를 용서하셨음을 기억하고 나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이 스데반에 대해서 설교를 하던 중, 한 사람이 질문을 하는 바람에 설교가 중단되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셨습니까?" 당혹스러운 질문에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원수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때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큰 힘입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들,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쉽게 감정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진심으로 용서하도록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스데반의 진심 어린 용서를 통하여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처럼 우리들의 진심이 담긴 용서가 우리의 원수까지 변화시키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큰 용서를 체험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어 무서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만 달란트의 은혜
마 18:21-35 / 우선동 목사
비유의 내용
이 비유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용서라는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23절에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다른 천국 비유들과 같은 방식으로 이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여기서의 종들은 단순히 노예가 아니라 임금을 모시는 고위 관리들을 가리킵니다. 24절에서 임금이 결산해야 하는 신하 중에 만 달란트 빚진 신하 하나가 등장합니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까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6000일의 품삯이고 평범한 한 노동자의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므로 만 달란트라면 6000만 데나리온이고 한 노동자의 20만년 연봉에 해당됩니다. 지금의 액수로 환산하면 한 6조원정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비유에서 종종 과장법으로써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를 강조하시고 청중들의 주의를 끄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 당시나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그 신하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은 고대의 관습대로 그 신하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당시 노예의 가격이 500~2000데나리온이었다고 볼 때 빚을 갚는 행위라기보다는 빚을 갚지 못한 것에 대한 형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임금의 무서운 명령 앞에서 신하는 엎드려 절하면서 26절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의 이 말은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말입니다. 설령 임금이 기간을 연장해 준다고 하더라도 만 달란트의 빚은 그의 인생에서 벌어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자비로운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하는 인자한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의 빚을 한 순간에 탕감 받고 더 이상 빚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몸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8절 이하에서는 또 다른 반전의 장면이 시작됩니다.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신하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백 일치 품삯 그러니까 약 4개월 벌이에 해당하고 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입니다. 그런데 이 신하는 자신이 만 달란트를 면제 받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28절에서 그 동료의 목덜미를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러자 그 동료가 엎드려서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빕니다. 이 장면은 조금 전에 자신이 임금에게 했던 태도와 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빚진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해도 순간 그는 조금 전 임금 앞에서의 자기 모습을 이 친구에게서 보았어야만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불쌍한 친구를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고 맙니다. 여기서 또 다른 반전이 시작됩니다. 31절은 길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동료들이 보고 그 모든 악한 행동들을 만 달란트 빚졌던 임금에게 다 알려주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그 신하를 불러서 32절 이하처럼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엄하게 책망하고 나서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2. 만 달란트의 의미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5절에서 주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아주 하찮아 보이는 형제의 잘못에 대해서도 무제한의 그리고 마음으로부터의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요,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의 삶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죄를 ‘빚’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그렇게 쓰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죄’라는 헬라어 단어는 ‘빚’을 의미하는 말이고, ‘사하여’라는 단어는 27절의 “탕감하다” 또는 35절의 “용서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비유에서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대조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 용서의 크기와 성도 사이의 용서하는 것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만 달란트’ 입니다. ‘만’은 당시에 수를 세는 가장 큰 단위였고 ‘달란트’는 화폐의 가장 큰 단위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주님께서는 말로 표현하실 수 있는 최고의 액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 달란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
만 달란트는 인간이 영광의 하나님을 향하여 범한 죄의 크기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갚을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죄의 빚을 진 인생은 답이 없고 길이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고 그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부유해질 수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원하는 꿈을 성취하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비롯한 모든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외한 그 어떤 것으로도 ‘만 달란트의 빚’이라는 인간 실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여러분이 행하는 어떤 선행도 ‘만 달란트의 빚’을 해결해 주지도 못합니다. 아무도 자기 힘과 노력으로 이 빚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 밖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만 달란트는 예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현재의 절망적인 모습입니다.
2)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
사실 이 신하에게 10년 혹은 100년의 상환 기간을 더 준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이 절망의 실존에서 빚진 신하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임금의 탕감 선언 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하가 탕감 받은 만 달란트는 하나님의 무한한 속죄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줍니다. 만 달란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속죄의 능력과 크기를 보여줍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 해 주는 일은 그저 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채무문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서 만 달란트의 죄 값을 그분이 직접 그리고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았고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16장이 만 달란트의 은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4절 가사에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3. 참된 복음
결국 이 비유는 복음의 핵심과 전체 구조를 온전히 보여줍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스린 죄인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있는지를 먼저 설명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상태였습니다. 롬1:18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것은 임금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진 신하의 절망적 상태와 동일합니다. 이런 죄인의 절망적 상태를 설명하고 난 후에 바울은 롬3:21에서 복음을 제시합니다. 한글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그러나 이제는(But now)” 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것은 놀라운 반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차별 없는 은혜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절망적인 죄인에게 나타난 복음의 은혜를 길게 설명한 후에 롬12:1에서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지를 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 이후의 로마서의 남은 이야기는 만 달란트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입은 의인 그리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의인의 삶,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하는 방식이고 오늘 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4.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법이 은혜입니다. 아무리 무섭고 추하고 버려진 인생일지라도 만 달란트의 은혜가 바꾸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신자의 삶은 자기가 받은 은혜의 영광과 크기를 점점 더 알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엡3:18-19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무한한 것이기에 사도는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점점 더 많이 깨달아가기를 또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그들 안에 충만해지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뿐입니까? 사도 바울은 엡1장에서도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1:17-1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이 당면한 생활의 문제,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를 구하지 아니하고 영적 삶의 진보를 위해 가장 먼저 기도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크기를 에베소 성도들이 알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그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 성도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누리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내가 받은 은혜가 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만 달란트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신자의 성화입니다. 이런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그 은혜의 깨달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 은혜가 임할 때 우리는 변화되어 형제에 대하여 자매에 대하여 서로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고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표범의 무늬처럼 변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온갖 더러움과 약함과 추함을 다 덮고도 남는 은혜, 만 달란트의 은혜입니다.
용서에관한 베드로의질문
마 18:21~3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는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설명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사백아흔 번이 됩니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백아흔 번이든 일흔일곱 번이든 어떤 한 사람을, 그것도 같은 잘못에 대하여 거듭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용서에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시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가 탕감 받고서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만든 한 종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 속에서 왕 혹은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인간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우리를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었습니다. 달란트는 로마제국 내에서 알려진 최고액의 화폐단위였습니다. 그리고 만이라는 숫자는 헬라어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숫자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숫자단위만큼의 가장 큰 화폐단위인 만 달란트는 그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의 무한대의 금액을 표현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 속에서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속죄할 수 없이 큰 죄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종의 간청을 듣고는 아무 조건도 주저함도 없이 용서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용서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면 그 종은 자기 동료 한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은전으로서 한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견해의 차가 대단히 큽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 육십 데나리온에서 최대 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율은 최소 육천 배에서 최대 백만 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육십억 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백만 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일조 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백만 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만든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5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단지 용서의 양적 한도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의 깊은 의미와 그 근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이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의 무제한성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 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용서의 당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토록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배은망덕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용서의 빚을 사람들을 향하여 일생을 통해 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용서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생활과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 또한 언제나 용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어떤 선결행위가 없어도 먼저 행할 때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할 때 더 아름답습니다.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하고 끝까지 할 때 참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심으로써 그 온전한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라면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에는 참회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용서하는 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참으로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일 것입니다. 참회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일이 진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서 요구하기 전에 먼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용서해야 함을 주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자신을 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용서는 우리가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용서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이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함께 온 세계를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 18:21-35 / 김삼환목사
하나님의 자녀는 여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삽니다. 우리는 어디에 살든지 예외 없이 속상한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답답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중에서도 감사하고, 그중에서도 기쁨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여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상징적인 새는 독수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징적인 선민의 동물은 사자입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 가면 어디든지 사자를 만납니다. 모든 건물에는 사자 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사자와 독수리는 의젓합니다.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항상 의젓하게, 넉넉하게, 여유 있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시험이 굉장히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제일 좋다는 가정에 좋은 것보다는 나쁜 일이 백배나 더 많습니다. 힘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별 문제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까짓 것 아무 일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제가 누누이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 집 사람이 다 잘하는데 밥할 때 돌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평생 그 사람은 그것이 안 됩니다. 하여튼 10년 동안을 쉬지 않고 돌을 넣습니다. 그래서 제가 딱 깨물면 집사람이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뱉으라고. 그러나 10년 동안 제가 뱉은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뱉습니까?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입에서 천천히 제가 골라서 하나 꺼내서 버리고 그대로 먹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마. 당신! 나 잘 해 주려고 그랬지 그냥 넣었겠어?”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한 일은 한 번도 없고, 몇 번을 깨물어도 항상 찾아내서 버리고, 밥은 그대로 먹지 그것을 가서 밖에 버려서 같이 먹는 분에게 기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큰 은혜 주셨는데, 주님의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는데 그게 문제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 문제는 적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큰 은혜 받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늘부터 내려주신 값없는 은혜를 어떻게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찬송가 410장)
시골에서 화투를 저도 많이 쳐보고, 화투치는 데 구경도 많이 해 봤습니다. 그런데 화투를 구경하는 분들은 화투판에서 화투가 끝날 때까지 대체로 가지 않습니다. 아침에 치면 저녁 먹을 때까지, 저녁 10시에 치면 그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한 10명이 있으면 뒤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마지막 끝나는 것 보고 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냐하면 마지막 끝에 그 돈이 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판 돈 올려놓고 당겨가지고 맞는 자에게 돈이 다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순간은 이긴 자에게 모두 박수를 보내고, 돈 딴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잃은 사람도 모두 기분 좋게 일어납니다. 그 판은 끝난 겁니다. 그날은 거기서 끝난 겁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 딴 사람, 예를 들어 그 판에 1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다 딴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혼자 집어넣지 않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거기 있는 사람에게 만 원짜리 하나씩 다 줍니다. 그것을 개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만원 받는 기쁨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 노름판, 인생의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노름꾼들도 한판을 다 차지해서 돈을 벌면 전부 개평을 줍니다. 팁을 줍니다. 만약에 자기 혼자 욕심을 내서 집어넣으면 노름판에 그놈은 다시 못 나옵니다. 너는 노름꾼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는 자격이 없다라는 겁니다. 노름꾼들이 모여서 돈을 땄지만 다 쓸어가지고 가는 것은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내놔야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두 좋은 마음으로 잃은 사람,딴 사람 할 것 없이, 구경한 사람 다 축하한다고 그러고, 오늘 기분 좋다고 그러고 다 끝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우리가 한판 정도 돈을 버는 겁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 가지고 잘사는 정도의 복이냐 말입니까? 영원한 은혜를 우리가 받았고, 영원한 축복, 아니 세상이 다 있어도 예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있어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아무리 잘 살아도 천국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토록 크고 크신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판을 다 차지하고 이만한 깨알, 콩알 다 따지고 그러면 그것은 꾼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감사하며 살고, 용서하며 살고, 이해하며 살고, 덮어주며 살고, 불쌍히 여기며 살고, 나누어 주며 살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나햐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누구나 부족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모든 장애인이 모인 곳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각장애인 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인 장애,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장애,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어눌합니다. 몸에 장애가 있습니다. 질병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인간은 타락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것보다는 불의를 더 좋아합니다. 나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의 성격은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음란을 좋아합니다. 악한 것을 좋아합니다. 남을 헐뜯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제는 서로 장애를 알고, 서로 서로 도와줍니다. 위로해 주고,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없습니다. 에디슨같이 유명한 과학자, 세계 최고의 천재인 그 사람도 머리가 꽉 막힌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큰 고양이, 작은 고양이를 먹이는데 밖으로 나가는 고양이 구멍을 만드는데 큰 고양이 나가는 구멍도 만들고, 작은 고양이 나가는 구멍도 따로 만듭니다. 큰 구멍 하나면 만들면 큰 놈, 작은 놈 다나가는데 그렇게 과학자도 답답해서 그 부인은 ‘저런 돌대가리가 어떻게 저런 과학자인가’ 이렇게 생각을 했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보면 한 없이 답답한 것이 인생입니다. 어떻게 저것도 모를까? 그러니까 같이 삽니다. 도와주라는 겁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으면 다 답답 합니다. 답답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이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오늘 분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겁니다. 하늘나라의 왕이 이 땅에 오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 겁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20만년을 벌 수 있는 돈이 1만 달란트입니다. 그렇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돈을 내놔라” 합니다. “돈이 없다”고 그러니까 “너, 아들, 딸, 부인 다 팔아가지고 돈을 내놔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빚을 지면 우리 식구들이 다 팔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감옥에도 가게 되어 있고, 팔려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좀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니까 이분이 용서해 주십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그냥 그대로 용서를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은혜는 1만 달란트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20만년 살아도 갚을 수 있는 은혜를 주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이 놀라운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큰 긍휼과 사랑과 용서함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가다가 1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보고는 “잘 만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났다. 내 놔.”, “용서해 주세요. 갚을 길이 없습니다. 다음에 드릴게요. 용서를 해 주세요.”, “안 돼.” 이것을 소송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저놈 원금까지 다 가져오고, 저 사람을 감옥에 대신 집어넣어라.”고 했습니다.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긍휼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하고 어두운 곳을 내어 쫓더라는 말씀이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덮어주는 것은 내 큰 죄를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의 생명을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넓은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마음으로, 덮어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셰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관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허물, 그런 허물이 내게도 다 있는 거니까 우리는 늘 관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족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에 대해서 관대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이것이 계명이듯이 10계명이 바로 이것이듯이 신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정체성이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세계를 묶는 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예수님과 같은 이 족보에 올라가게 됩니다. 명문가의 가정이 되고, 자손만대에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다윗왕을 보십시오.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그러니까 복을 하나님께서 만대에 주시지 않습니까? 유다자손, 유다가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혈통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10계명을 거역할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예를 들면 앉은뱅이를 고치실 때, 혈우병 든 사람을 고치실 때, 언제입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인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저렇게 범죄하고, 안식일에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 주신 거다.” 계명보다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라는 겁니다. 짐승이 함정에 빠졌을 때 건져주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저 귀신에게 붙잡혀 18년 동안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건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까지라도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유익되는 길이라면 우리는 주일도 그런 일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사랑,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나누어 줄 때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빛이 나는 겁니다. 남에게 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남에게 가는 것이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가는 것은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 내게 한 것이 내게 돌아오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모두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망하는 겁니다. 다 망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남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니고, 나를 위해 산 사람들은 다 멸망입니다. 여러분! 모든 불행한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누구 때문에 망했느냐고. 너 욕심대로 살다가, 너 정욕대로 살다가, 너 이기적으로 너를 위해 살다가 망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에 우리는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곡식을 심어보면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물 많이 주면 안 됩니다. 무슨 곡식이든지 물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무슨 열매든, 곡식이든 거름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적당히 줘야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병은 무엇입니까? 자연도 그런데 하물며 자기를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자기 욕심으로 살다가 다 병이 듭니다. 우리교회 앞에 지금 전나무가 하나 있는데 위가 말랐습니다. 우리교회에 식물전문 교수가 있어서 진단을 했는데 위가 말라 내려옵니다. 원 순이 말라서 내려옵니다. 밑에 뿌리가 썩었다는 겁니다. 뿌리가 썩으면 위에서부터 말라 내려옵니다. 왜 썩었느냐? 누가 너무 과잉충성을 해서 물을 많이 줘서 그렇다는 겁니다. 물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썩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남에게 주는 것은 전부 살아서 돌아오는데, 자기에게로 향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남 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 그것을 내 노후에 거두고, 일생동안 거두고, 자손만대에 거두고, 그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 가서도 거둡니다. 하늘나라 가서도 거두는 겁니다. 영원히 거두는 축복이 남에게 가는 것은 전부 기적이 되어 돌아오는데, 내게로 오는 것은 전부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라는 겁니다. 이 비밀을, 이 진리를 누가 알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이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웃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이웃을 내 몸같이 하고, 나는 이웃같이 해야 됩니다. 내 먹는 것은 이웃 먹이듯이 먹어야 됩니다.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고, 나는 이웃같이 대하고 이웃은 나같이 대하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은혜 안 받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면 다 잘못 됩니다. 남을 괴롭히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것이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면 좋은 것이 돌아오는데, 남을 불행하게 하고 어렵게 하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을 나쁘게 하며 엔조이를 하면 이것은 내게 저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남을 사랑하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고, 도와주고, 불쌍히 여겨주고,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름밤에 가장 우리에게 기대되는 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름밤에 늘 보여주는 전설의 고향입니다. 전설의 고향은 다 백발백중 귀신이 나타납니다. 며칠 전에도 집사람하고 11시에 보니까 무섭습니다. 초저녁에 보면 괜찮은데 12시 되어 가지고, 밤이 더 깊으면 무섭습니다. 전설의 고향에 그 여자들은 다 누구입니까? 간단합니다. 한 맺힌 겁니다. 한이 맺혀 보복합니다. 원수 갚으러 오는 겁니다. 달려들어 보복하는 겁니다. 무섭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나타나는 집을 폐가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 집을 흉가라고 그럽니다. 흉가면 망하는 겁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축복하고 돌아가시는 겁니다. 운명할 때까지도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강도에도 용서해 주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1만 달란트 탕감함을 받은 성도들이여! 우리가 얼마나 남을 사랑해야 합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 490번까지라도 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자기 사랑은 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끝까지 자기만 사랑하게 합니다. 이웃사랑의 배후에는 누가 계십니까?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이웃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웃을 위해서 긍휼을 베풀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야보고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긍휼을 베풀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니 우리가 다 용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여러분도 긍휼 없는 잔인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통과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큽니까? 이 나라가 공연히 이렇게 됐습니까? 경부고속도로 가면 고속도로를 닦은 분에 대해서 저는 감사드립니다. 중앙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KTX, 얼마나 감사하고,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비행장이 있어서 감사하고, 지하철, 저도 이스라엘에서 이번에 손님이 오셔가지고 지하철 한번 타게 해 보라고,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요새는 남자들도 화장하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받은 축복이 많은지. 여자들도 화장 얼마나 잘합니까? 가지가지 화장품 종류가, 집사람도 화장하는 것 보면 여기 이렇게 올리는 것도 있고, 다 바르고, 눈썹도 건들고, 또 다 건들고는 텁니다.
축복을 받으니 얼마나 우리가 입는 의복도 많고, 종류도 많고, 감사한 것이 너무 많은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복은 받아놓고, 우리의 삶은 증오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으면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지옥같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이렇게 태산같이 쌓아놓고도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에 눈을 돌리십시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십시다. 사랑해 주십시다. 도와주십시다. 그들과 함께 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한 눈먼 소녀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아름다운 달밤의 풍경을 작곡을 한 겁니다. 눈먼 소녀가 이 아름다운 달밤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모르고 저것을 못 보니 그것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작곡을 한 겁니다. 여러분! 돈을 버셨습니까?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이것을 나눠줘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까, 음악가이십니까? 듣지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하면 이것을 전달할까, 권력을 가지셨습니까? 이것 혼자 다 때 만났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많은 분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이런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많이 만나봅니다. 지난날에 그 권력을 가졌을 때 좋은 일을 못한 사람은 후회합니다. 어느 나라 대통령 만나고, 무엇하고,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얼마나 긍휼을 베풀며 사랑을 베풀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용서해 주며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기 있을 때 여러분이 남에게 긍휼 베풀기를 바랍니다. 다 지나 가는 겁니다. 얼마 안 있으면 힘도 없어지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금방 다가오는데 좋은 일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십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푼 사람이 세계 도처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고 만나게 됩니다. 원수를 맺으면 세계 도처에서 원수를 만나게 됩니다. 한사람 원수진 것 같아도 원수 그 한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원수를 맺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긍휼 베푼 것, 한번 베푼 것 같은데 하필 내가 가장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계는 좁습니다. 알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계는 좁습니다.” 그래서 원수 맺은 사람도 좁은 데서 만나고, 긍휼 베푼 사람도 그 좁은 공간에서 만나는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에게도 원수를 맺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한사람의 마음도 상함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남에게 가면 약이 된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로 사랑을 돌이키면 이것은 독이 됩니다. 모두 이기적인, 지나친 자기 사랑 때문에 가정도 망가지고, 모두가 망가지는 겁니다. 손길도 남에게로 가면 봉사가 되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화가 됩니다. 남을 향해서 가야 이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을 미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 끝나는데 미루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은 항상 빨리빨리 오늘 하고, 욕심 되고 나를 위한 일은 다음으로 미루는 겁니다. 병원에 갈 일이 있습니까? 몸이 아프십니까? 진단하고 싶습니까? 다음으로 미루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는 한 6년 정도, 아파야 병원에 가지 좀처럼 안갑니다. 어지간히 해서는 진단해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안합니다. 몇 달을 아파도 안갑니다. 그러나 남의 아픈 일은 제가 빨리 갑니다. 간다고 낫겠습니까?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낫는 거지,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낫는 거지 간다고 낫는 겁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단계 늦춥니다. 속도를 늦춥니다. 다음으로 미룹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모두 빠른 손길로 움직입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밀이 이 안에 있습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백배, 천배로 크게 돌아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왜 탕감해 줍니까? 내가 탕감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긍휼을 베풉니까? 내가 긍휼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용서를 해 주십니까? 내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젓한 것입니다.
양반 이야기 하나 해도 됩니까? 이것은 좀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양반하면 어디입니까? 안동입니다. 전주도 양반이고, 진주도 양반이고, 강릉도 양반이고, 물론 양반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양반이라고 하면 안동입니다. 양반문화에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가 공경, 어른을 공경하는 겁니다. 예의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체면입니다. 늘 예를 갖추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예를 갖추는 겁니다. 인사도 정중히 하고. 세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접대하는 겁니다. 우리 먹을 것이 없어도 같이 먹자고, 오시라고 그러고, 주무시고 가라고 그러고, 인간관계에서 손님을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없지만 최선을 다 해서 대접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영향을 받았다 아닙니까? 우리교회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는 어떤 분에게든지 개척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늘 도와 줬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음식대접 했습니다. 이게 다 돌아오는 겁니다. 서로가 다 좋은 겁니다. 이해해주고 예를 갖추는 겁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성공이 자기 혼자의 성공은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행복, 자기 혼자 잘해서 행복, 그런 일이 없습니다. 행복도 무수히 도움을 받아야 되고, 성공도 무수한 사람이 도와줘야 됩니다. 푸른 나무는 전부 땅이 영양분을 흡수해 주고, 뿌리가 역할을 해 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햇빛을 다 비추어야 잎이 살아갑니다. 우리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고,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나오는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해 주니까 이 교회가 활짝 피어나는 것이지, 혼자 하라고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나 혼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모든 분들이, 수만 명이 이렇게 해 주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오는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도와주신 행복입니다.
제가 1970년부터 80년까지 미사리에서 목회를 했지 않습니까? 한강 가에서. 여름이 되면 시간만 있으면 애들이 한강에 가서 목욕을 합니다. 6살 난 하나 목사가 한강에 가서 목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애가 거기서 물에 빠진 겁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세 번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군에서 휴가 온 청년이, 지금 구산이라는 느티나무가 아직도 있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옛날 애인 생각을 하고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무엇이 하나가 물에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겁니다. 보니까 애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옷 입은 그대로 들어 가서 애를 건져서 우리 집에 데리고 온 겁니다. 우리 마을에 있는 청년입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하나를 건졌습니까? 누군가 도와줘서, 다 이런 긍휼과 누군가 사랑을 베풀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인데, 오늘 우리사회는 나 혼자 성공하겠다라는 겁니다. 나 혼자 행복하겠다라는 겁니다. 모두 남을 향하여 증오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고, 그러니 이 세상이 너도 안 되고, 다 안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친구를 만들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서로 서로 모든 사람을, 이웃을 가장 가까운 식구같이 만들어서 도와주고, 체면문화를 살려서 예를 갖추고, 서로 대접하는 문화를 만들어서 “오늘 저녁에 국 끓이니까 너무 맛있습니다. 저녁하지 말고 같이 먹읍시다.” 부르기는 부를 지언정 오늘 저녁같이 먹자고 가지는 말고, 이렇게 모두 체면문화, 대접문화를 살려서 함께 더불어 살고, 찌개 하나도 끓이면, 된장 하나도 끓이면 한번 먹어보라고 나눠주고, 이렇게 모두 사랑해야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고, 좋은 교회가 되고, 이 민족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서로 용서하라
마 18:21-35, 엡4:32 / 김명혁 목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 동시에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마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을 세밀하게 분석하면 가장 독특하고 가장 진한 색깔은 용서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의 색깔은 용서가 아닙니다. 연인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들간의 사랑의 색깔도 용서는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의 색깔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해 타산적이며 조건적이고 감정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은 자기 중심적이지도 않고 이해 타산적이지도 않고 조건적이지도 않고 감정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은 죄인들을 그저 받아주시고 그저 품어주시는 용서의 색깔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본래 ‘용서’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인 이후 우리 인간들에게는 용서 대신 ‘원수 갚음’ 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원수 갚음’의 역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 안에도 ‘용서’ 보다는 ‘원수 갚음’이 더 만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의와 자유를 빙자한 '원수 갚음'이 만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소리보다는 분노와 정죄의 소리가 더 요란한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정서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용서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구약 시대에도 나타났지만,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도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용서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의 준비와 예표에 불과했습니다. 각종 잡다한 살인죄와 각종 잡다한 간음죄를 무조건 용서하시기 시작한 것은 그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7) 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세상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왔노라”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온 중풍병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그리고 이 말씀에 항의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0,17).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사랑은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고, 수가성 여인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으며, 베드로에게 베푸신 사랑의 색깔도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사랑의 색깔들처럼 로맨틱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고 황홀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고 행복한 사랑의 색깔도 아니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 배반하고 저주하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에, 무슨 로맨스가 있었으며 무슨 황홀함이 있었으며 무슨 행복감이 있었겠습니까? 용서의 사랑뿐이었습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신 용서의 사랑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도 용서의 사랑을 베푸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못 박는 로마 군인들과 자기 옆에서 죽어가는 행악자들을 바라보시면서 저들을 위해서 하늘을 향해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24). 그의 입에서는 저들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이나 정죄의 말은 한 마디도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용서, 용서 뿐이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흉악범 한 사람을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흉악범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까지 부여하셨습니다.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에는 용서뿐이었습니다. 로맨스도 황홀함도 행복감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용서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하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가장 악독한 죄인이 누구였을까요? 베드로였을까요? 저는 주님께서 용서하시기가 가장 힘들었던 가장 악독한 죄인은 사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예수님을 핍박한 반역의 죄에다가 추가해서 자기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주장한 교만과 위선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자기를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주장하던 교만한 위선자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악독한 죄는 자기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의 교만과 위선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라는 무서운 저주의 말씀을 했습니다. 사울이 바로 그런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가장 악독한 죄인이었던 사울의 죄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을 예수님께서 붙잡으셨고 만나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름을 불러주셨고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받게 하시므로 그의 모든 악독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세상의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일입니다.
물론 한 가지 조건은 있었습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죄인들이 가슴에 지녔던 조그만 뉘우침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뉘우침을 보시고 주님께서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수가성 여인에게도, 베드로에게도, 간음현장에서 집힌 여자에게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도, 하나님을 훼방하던 사울에게도, 별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들의 가슴에 조그만 뉘우침들을 지녔었습니다. 베드로는 울면서 통곡까지 했지요. 예수님은 그것들을 보시고 저들의 모든 죄악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 그라이더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회개입니다.” 놀만 스나이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언제나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지만 언제나 진정한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추악한 죄를 무조건 용서하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게 나타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용서를 받을 줄 알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교만한 바리새인이 되면 용서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뉘우침이 있는 죄인이 되면 용서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뉘우침과 회개를 가슴에 품고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나타내 보이므로 모두 죄 사함의 사랑과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죄인들 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추악한 죄들을 용서하시고 나서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서로 용서할 수는 없느냐? 너희들도 나를 좀 닮을 수는 없느냐?”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용서의 마음을 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죄인들 안에 나타납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들 안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뻣뻣하던 사람이 부드러워지며 무정하던 사람이 따뜻해집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연약하고 허물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과 건방짐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꼭 같이 연약함을 지닌 허물진 사람들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비판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대신 불쌍히 여기는 동정심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품으시는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됩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용서를 베푸는 사람으로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용서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던 사울이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바뀌어졌고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자기 마음에 부은바 되었을 때 자기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교만하고 자만하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정하고 냉정하던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용서의 마음으로 바뀌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 사함을 받은 성도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라는 말과 용서하라는 말을 자주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서로 용서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2-14).
신약시대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죄를 범한 형제들에게는 물론 자기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던 원수들을 향해서도 원망이나 불평이나 분노를 품은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용서하되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마18:22). 저들은 자기들을 핍박하고 박해하고 죽이는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그래서 우리는 저들의 신앙전통을 기리며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성도의 신앙 본 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일곱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손양원 목사님도 자기를 총살한 인민군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린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강변교회 초기의 신자였던 조춘국 집사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후 죽이고 싶어하던 원수 같은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이와 같이 용서 받은 죄인들의 가슴 속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서로 용서할 수는 없느냐? 너희들도 나를 좀 닮을 수는 없느냐?” 사도 바울은 지금도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
셋째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용서는 또 용서를 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하나님은 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이 중요한 진리를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분부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아야 할 존재들인데 만약 하나님께서 나중에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강조해서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마6:12).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때 우리들의 기도는 보다 담대해집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용서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용서가 무슨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일종의 공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 같은 용서는 주님 앞에 설 때에 그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사랑의 원자탄 같은 용서도 주님 앞에 섰을 때 그의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종의 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살 때 우리는 용서를 많이 하여야 할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용서의 예금 통장에 얼마나 용서가 저축이 되어 있습니까? 빈 통장입니까?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누구를 용서했다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누구를 용서했다 라는 용서의 저축이 많이 되어 있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용서의 예금 통장에 용서를 많이 저축하도록 하십시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사랑을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용서의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은 그의 인격이 용서의 인격으로 바뀌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온유와 겸손과 불쌍히 여김과 동정과 용서와 사랑의 인격으로 바뀌어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용서를 많이 베푸는 사람은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게 될 것이고 많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여러분들이 모두 용서를 받을 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줄 아는 더욱 더 축복 받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용서를 받을 줄도 알아야 하고 용서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용서를 받으며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 하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합니다.
하늘을 보라
마 18:21-35 / 채규현목사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물론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천국이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 천국을 이런저런 사정으로 빼앗기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빼앗기게 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의 한 집사님은 참 품성이 좋은 분인데, 그 인간관계에서의 배신감 때문에 나날이 괴로움 가운데서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토바이 상점을 크게 하신 분이셨습니다. 상당히 가게도 컸고 힘있게 장사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서 그 가게를 운영하던 운영자금을 몽땅 날렸습니다. 그 분은 아주 호방한 성격이어서 믿으면 확실하게 믿는 성격이라 그 친구를 믿고 몽땅 빌려줬는데, 얼마 후에 갚겠다고 하더니 그 친구도 폭삭 망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떼어 먹고 도망간 겁니다. 다시는 친구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데, 그 친구에 대한 미움 때문에 모든 일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앉아서 좀 깊은 얘기가 나오다 보면 항상 그 얘기로 돌아가서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보통 밉다고 얘기하기에는 좀 약한데, 같이 있기에는 좀 껄끄러운 사람들이 있죠? 그게 사실은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이거든요.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그 자체가 미움의 관계입니다. 바로 그 때에 여러분은 그 관계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형제를 어떻게 용서하오리까? 일곱 번 용서하오리까?”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몇 번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그걸 또 곱해서 490번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용서안해도 되겠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죠?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에 관한 교훈으로 이 동관의 비유를 하십니다(동관이란 일종의 국가의 공무원, 직원을 이야기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잘 아시죠? 어떤 왕이 계산을 해 보니까 아주 큰 돈을 빚진 사람이 있어서, 와서 갚으라 하니까 넙죽 엎드려서 제발 갚을테니 나 좀 살려달라하는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다 탕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가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을 기어이 두들겨 패고 옥에 가두는 것을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으니까, “네 이놈, 용서해 줬더니 그 공도 모르고 너는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느냐? 다 갚으라.” 이런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뒤집어서 생각해 봅시다. 제일 먼저, 임금이 회계를 하고 보니까 그 동관이 얼마를 빚졌다고 했습니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만 달란트이면 얼마인 것 같습니까? 사실 여기서 액수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하면,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6천일을 일해야 1달란트를 법니다. 하루에 품삯이 보통 얼마입니까? 여러 가지이겠지만 제일 싸게 쳐서 일당 5만원이라고 해 봅시다. 일당 5만원으로 계산해보면,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 이니까 거의 20년 품삯입니다. 일만 달란트는요? 20만년의 품삯입니다. 계산을 해 보니까 하루에 일당 5만원이라고 치면, 3조가 넘는 거의 4조 가까운 돈이 됩니다. 우리 한국에서 제일 부자인 사람의 재산 그 이상입니다. 그것을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뭐했길래 그 정도로 빚을 졌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여하튼 여기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결국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큰 빚을 지고 있고, 그 빚은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다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엄청난 빚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다.” 이것을 다른데서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3장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 진주장사의 비유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천국이 얼마나 비싼 것이냐면, 누구든지 자기 재산을 다 팔아도 그 값을 다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죄라는 측면을 들어서 이야기하면 빚을 졌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빚이 하나님 앞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아무리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고 사는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살려고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러한 정도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 동관이 “참으소서. 다 갚겠나이다.” 자기가 다 갚을 수 있는 것을 갚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그 이야기가 아니죠? 갚을 수 없는 것인데도 그저 왕 앞에서 싹싹 비는 것입니다. 제발 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너무 불쌍해서, 측은해서 늦게 갚게 한다는 것뿐만 아니고 그 모든 일만 달란트-3조원이 넘는 돈을 전부 탕감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도저히 우리 자신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는데 그 하나님 앞에 죗값을 치룰 길이 없습니다. 도저히 치룰 길이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 제발 나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하게 납작 엎드려서 비는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보통 “회개”라고 합니다. “하나님,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저를 좀 구해주십시오.” 라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그 회개에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죄 없다 하신다, 죄를 용서하신다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만 달란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면 절대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내 삶에서 얼마나 깊이 있게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얼마나 깊이 있게 내가 인지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고 천국 간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가 일종의 어떤 사실의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얼마나 죄인이었던가, 그 죄인이었던 데서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끝이라면 이미 여러분은 천국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구원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을 바로 천국에 보내지 않으시고, “교회” 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이게 하십니다. 그래서 여기서 각자의 모든 부족함과 그 죄적인 면이 서로 드러나게 하셔서, 오히려 그 면이 더욱 없어지고 성숙해지고 그러려고 모으신 것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경험 하냐면,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에 실제 용서받은 이 동관이 길에 나갔다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오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면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동관이 그 용서받은 동관에게 빚을 얼마 졌다고 했습니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보통 백 원으로 생각합니다. 얼마 안 되는 돈, 별 것 아닌 것을 빚을 졌는데 그것을 용서 못하는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번 따져봅시다. 아까 한 데나리온이 얼마라고 했습니까? 우리 돈으로 싸게 이야기해서 5만원입니다. 백 데나리온은요? 5백만 원입니다. 그가 진 빚도 큰 돈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면을 더 부각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백 데나리온이 작다고요? 쉽게 용서할 수 있고, 쉽게 탕감할 수 있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용서가 쉽다고 하는 사람들은 한 번 다른 사람에게 5백만 원을 줘 보십시오. 저의 아버지 말씀을 빌면 “땅을 파 봐라, 만원이 나오는가.”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꼭 그 얘기를 하셨습니다. 꼭 제게 이 괴로운 순간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항상 돈을 주시면서 “조심해서 아껴 써라. 땅을 파 봐라, 만원이 나오는가.” 꼭 그 말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제가 그 말을 써먹고 싶어요. 땅을 파 보십시오, 만원이 나오는가. 그런데 5백만 원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그냥 준다는 말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실제 우리 삶에서 용서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보면서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백 데나리온 자체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큰 돈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가 5백만 원을 그냥 줍니까? 그냥 줄 수 없습니다. 그냥 주게 되면 그 사람은 신문에 납니다. 그만큼 희귀하니까 신문에 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보통은 안 그렇다는 말입니다. 실제 우리의 삶에서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면 거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용서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자기의 호방함을 보이기 위해서 술 먹고 두드리면서 “아, 걱정마라.” 하는 걸로 끝나는 것 같지만, 마음에는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죠. 또 우리끼리도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술 먹고 다 털어버리는데 우리는 술을 안 먹어서 그런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은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적으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봐서 용서가 안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 자체를 인정하자는 거죠.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못하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마치 내가 5백만 원을 거저 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라는 말입니다. 용서가 안 됩니다. 이것이 용서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유일한 길을 찾냐면, 용서하지 않고서는 내 심령 속에 천국이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고서는 계속 그것이 맺혀서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좋은 인간관계를 제대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 배신당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믿는 것이 쉽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못 믿습니다. 용서를 해야 마음속에 천국이 있는데, 용서할 수 있는 길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백 데나리온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의미입니다.
유일한 길은, 내가 용서받은 일만 달란트와 비교하는 길입니다.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주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백 데나리온만 쳐다봅니다. 그것만 중점적으로 보니까 “어이구, 내가 5백만 원을 어떻게 그냥 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러나 내가 용서받은 액수가 얼마입니까? 3조, 이것은 상상도 안 되는 돈입니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5백만 원과 비교해보라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진정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내가 그 사람과의 관계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꾸 용서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안 됩니다. 유일한 길은 우리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그것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용서의 능력이 거기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100이면 100, 그 속에 복음이 희박합니다. 그 속에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의 관계가 계속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 그 관계가 껄끄러운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을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정말 용서가 안 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제일용서가 안 될 때는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이 때가 제일용서가 안 됩니다. 목사인 저는 사랑했던 성도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때 정말 용서가 힘듭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정말 내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은 만큼 그 이상으로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 돼요. 어렵고 힘듭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언제나 조여드는 것이 있습니다. 계속 하루 이틀 지나면서 예배를 인도해야 될 때가 가까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면서 마음에 누구를 미워하고 거리낌이 있다면 이 자리에 못 섭니다. 설 수가 없습니다. 서서도 능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가 되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기에 주님 앞에 계속 나서서 용서하게 해 달라고 아무리 해도 잘 안 됩니다. 어느 날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밤을 새워도 잘 안 됐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요. 새벽녘 쯤 되어서 갑자기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내게 이렇게 상처를 주었고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게 했는데 어떻게 저 사람을 용서합니까?’ 이 마음이 계속 들어서 용서가 안 됐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너는 내게 누구냐?’ 이 마음이 확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요?’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니까 ‘나는 얼마나 하나님을 배신했던가. 이게 막 가슴을 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 이것은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가 막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그저 하나님 앞에 회개만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던가 하는 것이 비로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한 가지 사건을 가지고 나를 아프게 해서 내가 이런데,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했던가, 얼마나 하나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하는 것이 계속해서 느껴지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컷 회개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이 사람이 내게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를 느끼게 되니까 그렇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는 백성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죄의 깊이를 못 느끼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었던가 하는 사실을 내가 중심에서, 심령 깊이에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저히 용서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지 그것을 모르니까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내게 죄를 지은 것은 5백만 원 어치요,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3조 원어치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 5백만 원 이상 안 가는 것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진정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냐 이겁니다. 복음은 “예수님 믿으시오, 천당갑니다.” 가 아닙니다. 진정 복음의 출발점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가 이것을 경험하고 이것을 고백하고 이것을 시인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느껴질 때 비로소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는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죄인인 나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구나.’ 이것을 느끼니까 그 다음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죠. 그 죄에서 벗어나는 생활이 바로 그 천국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죄의 깊이를 알지 못할 때 용서를 못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만한 일입니까?
이 동관에게 빚진 자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이 말은 그대로 자기가 왕에게 한 말이 아닙니까? “참으소서, 갚으리이다.” 똑같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에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있고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인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내가 진정 깨닫고 지금 내가 지금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도 안 될 때 ‘과연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일 마지막 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무슨 말입니까?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죠? 왜냐하면 참다운 구원의 복음, 참다운 용서의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믿는 자가 아닙니다. 바로 이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마지막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라도 용서하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용서의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려고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해서 사는 면도 있지만, 마지막 가장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얼마나 크심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두려워함, 이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라고 잠언서에서 이야기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여호와를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점, 출발점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용서가 안 될 때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가 나를 두려워하느냐, 아니면 나를 만홀히 여기고 있느냐?”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서는 일단 개인적인 관계에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대개는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명령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관계, 전 교회적이나 전 국가적인 면에서는 전혀 다른 명령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 우리에게 얼마나 큰 계명입니까?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그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죽이라.” 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서로 지킴의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는 것은 서로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진멸하라” 는 것은 국가적인 관계, 또는 전체 공동체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이 살인하지 말아야겠기에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국가적인 차원으로 적용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또 하나의 예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이것은 개인적인 관계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교회적인 면에서, 국가적인 면에서 여러 지도자들이 있는데 지도자들이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온전히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적재적소에 사람들을 세울 수가 있겠습니까?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판단해야 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러한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바로 그러한 면이 나옵니다. 자, 왕에게 용서받은 동관이 자기에게 빚진 자를 군박할 때 옆에서 다른 동관들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민망하여서 왕에게 고하였다고 이야기하죠? 이 문제를 잘 생각해야 됩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목사인 제게 말하는 것을 대단히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고자질하는 것처럼 느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그게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지혜로운 지도자, 지혜로운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상태를 제가 제대로 객관적으로 알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지혜로운 지도자가 되겠습니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말들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모든 언로(communication channel)를 열어놓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말을 안 해주고 덮으면 제가 어떻게 교회의 목자 역할을 하겠습니까? 그것을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의 고자질하는 문제와 연결시키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 관계에서 성경에서 명령하는 것과 공적인 문제에서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차원의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것들이 제대로 구별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구경하고 있던 동관들이 왕에게 가서 이야기합니다. 계속 신약성경에서도 그런 말씀이 있죠? 형제 중에 죄를 범한 일이 있거든 그에게 권면하고 심지어는 교회에 이야기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 전체의 모든 악을 제하여버리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면까지 나옵니다. 그런데 용서는 뭐냐면, 서로 개인적인 관계에서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미움을 가지고 내 속에 그 미움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미움이 있으면 여러분에게도 천국이 아니고,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평안을 끼칠 수도 없고 천국을 줄 수도 없는 그러한 괴로운 지옥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면 때문에 이렇게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구별해 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용서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리고 용서의 길도 여기서 주셨죠? “비교해 보라”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의 모든 일들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을 찾아야만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자꾸 따지면 안 됩니다. 그런 모든 면이 시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용서하기 힘든 순간순간, 시편을 읽으십시오.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 순간, 시편을 읽으십시오. 그 안에서 그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그 장면들이 바로 여러분의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 이후에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찬양이며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다시 주님이 여러분에게 예비하신 그 천국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용서를 통해서, 모든 인간관계의 부활을 통해서 참된 천국을 충분히 누리며 사시는 복된 백성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에관한 베드로의질문
마 18:21-3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는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과 설명이 들어있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사백아흔 번이 됩니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백아흔 번이든 일흔일곱 번이든 어떤 한 사람을, 그것도 같은 잘못에 대하여 거듭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용서에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시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가 탕감 받고서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만든 한 종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 속에서 왕 혹은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인간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우리를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 속의 종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었습니다. 달란트는 로마제국 내에서 알려진 최고액의 화폐단위였습니다. 그리고 만이라는 숫자는 헬라어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숫자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숫자단위만큼의 가장 큰 화폐단위인 만 달란트는 그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의 무한대의 금액을 표현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 속에서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속죄할 수 없이 큰 죄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종의 간청을 듣고는 아무 조건도 주저함도 없이 용서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용서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면 그 종은 자기 동료 한 사람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려주었습니다.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은전으로서 한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견해의 차가 대단히 큽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 육십 데나리온에서 최대 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율은 최소 육천 배에서 최대 백만 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육십억 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백만 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일조 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백만 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만든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5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단지 용서의 양적 한도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의 깊은 의미와 그 근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이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의 무제한성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 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용서의 당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토록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배은망덕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용서의 빚을 사람들을 향하여 일생을 통해 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용서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생활과 인간관계의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 또한 언제나 용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어떤 선결행위가 없어도 먼저 행할 때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할 때 더 아름답습니다. 용서는 마음으로부터 하고 끝까지 할 때 참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간구하심으로써 그 온전한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라면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에는 참회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용서하는 이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참으로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일 것입니다. 참회하고 사죄하며 용서를 비는 일이 진실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서 요구하기 전에 먼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용서해야 함을 주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자신을 내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용서는 우리가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용서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이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함께 온 세계를 아름답고 희망이 있는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90번의 용서
마 18:21-35 / 김삼환 목사
하나님의 자녀는 여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삽니다. 우리는 어디에 살든지 예외 없이 속상한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답답한 일이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중에서도 감사하고, 그중에서도 기쁨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여유가 있습니다. 미국의 상징적인 새는 독수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징적인 선민의 동물은 사자입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에 가면 어디든지 사자를 만납니다. 모든 건물에는 사자 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사자와 독수리는 의젓합니다. 항상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항상 의젓하게, 넉넉하게, 여유 있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원수를 맺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시험이 굉장히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제일 좋다는 가정에 좋은 것보다는 나쁜 일이 백배나 더 많습니다. 힘든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잘 사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별 문제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늘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까짓 것 아무 일도 아닌데, 별것 아닌 것 가지고, 제가 누누이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희 집 사람이 다 잘하는데 밥할 때 돌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평생 그 사람은 그것이 안 됩니다. 하여튼 10년 동안을 쉬지 않고 돌을 넣습니다. 그래서 제가 딱 깨물면 집사람이 미안해합니다. 그래서 뱉으라고. 그러나 10년 동안 제가 뱉은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음식을 어떻게 뱉습니까?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입에서 천천히 제가 골라서 하나 꺼내서 버리고 그대로 먹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마. 당신! 나 잘 해 주려고 그랬지 그냥 넣었겠어?” 그것 때문에 기분 나빠한 일은 한 번도 없고, 몇 번을 깨물어도 항상 찾아내서 버리고, 밥은 그대로 먹지 그것을 가서 밖에 버려서 같이 먹는 분에게 기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큰 은혜 주셨는데, 주님의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는데 그게 문제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 문제는 적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큰 은혜 받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늘부터 내려주신 값없는 은혜를 어떻게 다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찬송가 410장)
시골에서 화투를 저도 많이 쳐보고, 화투치는 데 구경도 많이 해 봤습니다. 그런데 화투를 구경하는 분들은 화투판에서 화투가 끝날 때까지 대체로 가지 않습니다. 아침에 치면 저녁 먹을 때까지, 저녁 10시에 치면 그 다음 날 새벽 6시까지 한 10명이 있으면 뒤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마지막 끝나는 것 보고 갑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냐하면 마지막 끝에 그 돈이 한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판 돈 올려놓고 당겨가지고 맞는 자에게 돈이 다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순간은 이긴 자에게 모두 박수를 보내고, 돈 딴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잃은 사람도 모두 기분 좋게 일어납니다. 그 판은 끝난 겁니다. 그날은 거기서 끝난 겁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 딴 사람, 예를 들어 그 판에 10만원이든, 100만원이든 다 딴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혼자 집어넣지 않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거기 있는 사람에게 만 원짜리 하나씩 다 줍니다. 그것을 개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만원 받는 기쁨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 노름판, 인생의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노름꾼들도 한판을 다 차지해서 돈을 벌면 전부 개평을 줍니다. 팁을 줍니다. 만약에 자기 혼자 욕심을 내서 집어넣으면 노름판에 그놈은 다시 못 나옵니다. 너는 노름꾼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는 자격이 없다라는 겁니다. 노름꾼들이 모여서 돈을 땄지만 다 쓸어가지고 가는 것은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내놔야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두 좋은 마음으로 잃은 사람,딴 사람 할 것 없이, 구경한 사람 다 축하한다고 그러고, 오늘 기분 좋다고 그러고 다 끝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우리가 한판 정도 돈을 버는 겁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 가지고 잘사는 정도의 복이냐 말입니까? 영원한 은혜를 우리가 받았고, 영원한 축복, 아니 세상이 다 있어도 예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있어도 우리가 죄 사함을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아무리 잘 살아도 천국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이토록 크고 크신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판을 다 차지하고 이만한 깨알, 콩알 다 따지고 그러면 그것은 꾼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움이 많은 세상에서 감사하며 살고, 용서하며 살고, 이해하며 살고, 덮어주며 살고, 불쌍히 여기며 살고, 나누어 주며 살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나햐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누구나 부족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모든 장애인이 모인 곳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각장애인 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체적인 장애, 어떤 사람은 정신적인 장애, 어떤 사람은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어눌합니다. 몸에 장애가 있습니다. 질병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인간은 타락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것보다는 불의를 더 좋아합니다. 나쁜 것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의 성격은 원망과 불평과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음란을 좋아합니다. 악한 것을 좋아합니다. 남을 헐뜯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새 사람 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제는 서로 장애를 알고, 서로 서로 도와줍니다. 위로해 주고,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단한 사람은 없습니다. 에디슨같이 유명한 과학자, 세계 최고의 천재인 그 사람도 머리가 꽉 막힌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큰 고양이, 작은 고양이를 먹이는데 밖으로 나가는 고양이 구멍을 만드는데 큰 고양이 나가는 구멍도 만들고, 작은 고양이 나가는 구멍도 따로 만듭니다. 큰 구멍 하나면 만들면 큰 놈, 작은 놈 다나가는데 그렇게 과학자도 답답해서 그 부인은 ‘저런 돌대가리가 어떻게 저런 과학자인가’ 이렇게 생각을 했다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살아보면 한 없이 답답한 것이 인생입니다. 어떻게 저것도 모를까? 그러니까 같이 삽니다. 도와주라는 겁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으면 다 답답 합니다. 답답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 이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입니다.
오늘 분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겁니다. 하늘나라의 왕이 이 땅에 오시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 겁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함을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오늘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1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20만년을 벌 수 있는 돈이 1만 달란트입니다. 그렇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돈을 내놔라” 합니다. “돈이 없다”고 그러니까 “너, 아들, 딸, 부인 다 팔아가지고 돈을 내놔라”는 겁니다. 옛날에는 노예로 팔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도 그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빚을 지면 우리 식구들이 다 팔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감옥에도 가게 되어 있고, 팔려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 앞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좀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니까 이분이 용서해 주십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그냥 그대로 용서를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은혜는 1만 달란트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20만년 살아도 갚을 수 있는 은혜를 주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이 놀라운 축복을 저와 여러분이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큰 긍휼과 사랑과 용서함을 받았는데도 자기가 가다가 1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보고는 “잘 만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잘 만났다. 내 놔.”, “용서해 주세요. 갚을 길이 없습니다. 다음에 드릴게요. 용서를 해 주세요.”, “안 돼.” 이것을 소송해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저놈 원금까지 다 가져오고, 저 사람을 감옥에 대신 집어넣어라.”고 했습니다. “너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다. 긍휼 받을 자격이 없다.”라고 하고 어두운 곳을 내어 쫓더라는 말씀이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웃에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긍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의 죄를 덮어주는 것은 내 큰 죄를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의 생명을 건져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구원받기를 바라고, 함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성도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넓은 마음으로,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마음으로, 덮어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나라의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셰익스피어는 남의 잘못에 관대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허물, 그런 허물이 내게도 다 있는 거니까 우리는 늘 관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족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웃에 대해서 관대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이것이 계명이듯이 10계명이 바로 이것이듯이 신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정체성이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은 세계를 묶는 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때 예수님과 같은 이 족보에 올라가게 됩니다. 명문가의 가정이 되고, 자손만대에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조상 가운데 다윗왕을 보십시오.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그러니까 복을 하나님께서 만대에 주시지 않습니까? 유다자손, 유다가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긍휼이 많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혈통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10계명을 거역할 때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예를 들면 앉은뱅이를 고치실 때, 혈우병 든 사람을 고치실 때, 언제입니까?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인 물고 늘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저렇게 범죄하고, 안식일에 어떻게 저런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럴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안식일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 주신 거다.” 계명보다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라는 겁니다. 짐승이 함정에 빠졌을 때 건져주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저 귀신에게 붙잡혀 18년 동안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건지시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까지라도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유익되는 길이라면 우리는 주일도 그런 일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사랑,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를 나누어 줄 때 힘이 되고, 능력이 되고, 빛이 나는 겁니다. 남에게 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남에게 가는 것이 그냥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가는 것은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 내게 한 것이 내게 돌아오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모두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해서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망하는 겁니다. 다 망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남을 위해 산 사람이 아니고, 나를 위해 산 사람들은 다 멸망입니다. 여러분! 모든 불행한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누구 때문에 망했느냐고. 너 욕심대로 살다가, 너 정욕대로 살다가, 너 이기적으로 너를 위해 살다가 망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에 우리는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곡식을 심어보면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물 많이 주면 안 됩니다. 무슨 곡식이든지 물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무슨 열매든, 곡식이든 거름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적당히 줘야 됩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병은 무엇입니까? 자연도 그런데 하물며 자기를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자기 욕심으로 살다가 다 병이 듭니다. 우리교회 앞에 지금 전나무가 하나 있는데 위가 말랐습니다. 우리교회에 식물전문 교수가 있어서 진단을 했는데 위가 말라 내려옵니다. 원 순이 말라서 내려옵니다. 밑에 뿌리가 썩었다는 겁니다. 뿌리가 썩으면 위에서부터 말라 내려옵니다. 왜 썩었느냐? 누가 너무 과잉충성을 해서 물을 많이 줘서 그렇다는 겁니다. 물을 많이 주면 안 됩니다. 썩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남에게 주는 것은 전부 살아서 돌아오는데, 자기에게로 향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남 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다 그것을 내 노후에 거두고, 일생동안 거두고, 자손만대에 거두고, 그 정도가 아닙니다. 천국 가서도 거둡니다. 하늘나라 가서도 거두는 겁니다. 영원히 거두는 축복이 남에게 가는 것은 전부 기적이 되어 돌아오는데, 내게로 오는 것은 전부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라는 겁니다. 이 비밀을, 이 진리를 누가 알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이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웃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이웃을 내 몸같이 하고, 나는 이웃같이 해야 됩니다. 내 먹는 것은 이웃 먹이듯이 먹어야 됩니다.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고, 나는 이웃같이 대하고 이웃은 나같이 대하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은혜 안 받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악한 일을 하면 다 잘못 됩니다. 남을 괴롭히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것이 다 내게로 돌아옵니다. 남에게 유익을 주면 좋은 것이 돌아오는데, 남을 불행하게 하고 어렵게 하며,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을 나쁘게 하며 엔조이를 하면 이것은 내게 저주로 돌아옵니다. 여러분! 남을 사랑하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고, 도와주고, 불쌍히 여겨주고,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름밤에 가장 우리에게 기대되는 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름밤에 늘 보여주는 전설의 고향입니다. 전설의 고향은 다 백발백중 귀신이 나타납니다. 며칠 전에도 집사람하고 11시에 보니까 무섭습니다. 초저녁에 보면 괜찮은데 12시 되어 가지고, 밤이 더 깊으면 무섭습니다. 전설의 고향에 그 여자들은 다 누구입니까? 간단합니다. 한 맺힌 겁니다. 한이 맺혀 보복합니다. 원수 갚으러 오는 겁니다. 달려들어 보복하는 겁니다. 무섭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나타나는 집을 폐가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 집을 흉가라고 그럽니다. 흉가면 망하는 겁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축복하고 돌아가시는 겁니다. 운명할 때까지도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강도에도 용서해 주고,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이런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1만 달란트 탕감함을 받은 성도들이여! 우리가 얼마나 남을 사랑해야 합니까? 일흔 번에 일곱 번, 490번까지라도 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자기 사랑은 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끝까지 자기만 사랑하게 합니다. 이웃사랑의 배후에는 누가 계십니까?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끝까지 이웃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웃을 위해서 긍휼을 베풀게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야보고서 2장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긍휼을 베풀고 하나님이 심판을 하니 우리가 다 용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여러분도 긍휼 없는 잔인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통과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큽니까? 이 나라가 공연히 이렇게 됐습니까? 경부고속도로 가면 고속도로를 닦은 분에 대해서 저는 감사드립니다. 중앙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KTX, 얼마나 감사하고, 우리나라도 세계적인 비행장이 있어서 감사하고, 지하철, 저도 이스라엘에서 이번에 손님이 오셔가지고 지하철 한번 타게 해 보라고,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요새는 남자들도 화장하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받은 축복이 많은지. 여자들도 화장 얼마나 잘합니까? 가지가지 화장품 종류가, 집사람도 화장하는 것 보면 여기 이렇게 올리는 것도 있고, 다 바르고, 눈썹도 건들고, 또 다 건들고는 텁니다.
축복을 받으니 얼마나 우리가 입는 의복도 많고, 종류도 많고, 감사한 것이 너무 많은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시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복은 받아놓고, 우리의 삶은 증오와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으면 환경과 관계없이 우리는 지옥같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이렇게 태산같이 쌓아놓고도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살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에 눈을 돌리십시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십시다. 사랑해 주십시다. 도와주십시다. 그들과 함께 하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는 한 눈먼 소녀에게 사랑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아름다운 달밤의 풍경을 작곡을 한 겁니다. 눈먼 소녀가 이 아름다운 달밤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모르고 저것을 못 보니 그것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작곡을 한 겁니다. 여러분! 돈을 버셨습니까?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이것을 나눠줘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까, 음악가이십니까? 듣지 못하는 분에게 어떻게 하면 이것을 전달할까, 권력을 가지셨습니까? 이것 혼자 다 때 만났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많은 분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이런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늘 권력을 가진 사람들 많이 만나봅니다. 지난날에 그 권력을 가졌을 때 좋은 일을 못한 사람은 후회합니다. 어느 나라 대통령 만나고, 무엇하고,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얼마나 긍휼을 베풀며 사랑을 베풀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용서해 주며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기 있을 때 여러분이 남에게 긍휼 베풀기를 바랍니다. 다 지나 가는 겁니다. 얼마 안 있으면 힘도 없어지고, 병들어 쓰러질 날이 금방 다가오는데 좋은 일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해 주십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푼 사람이 세계 도처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고 만나게 됩니다. 원수를 맺으면 세계 도처에서 원수를 만나게 됩니다. 한사람 원수진 것 같아도 원수 그 한사람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납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원수를 맺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겁니다. 긍휼 베푼 것, 한번 베푼 것 같은데 하필 내가 가장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계는 좁습니다. 알리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계는 좁습니다.” 그래서 원수 맺은 사람도 좁은 데서 만나고, 긍휼 베푼 사람도 그 좁은 공간에서 만나는 날이 옵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에게도 원수를 맺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한사람의 마음도 상함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펴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남에게 가면 약이 된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로 사랑을 돌이키면 이것은 독이 됩니다. 모두 이기적인, 지나친 자기 사랑 때문에 가정도 망가지고, 모두가 망가지는 겁니다. 손길도 남에게로 가면 봉사가 되고,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화가 됩니다. 남을 향해서 가야 이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을 미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얼마 안 있으면 다 끝나는데 미루면 안 됩니다. 선한 일은 항상 빨리빨리 오늘 하고, 욕심 되고 나를 위한 일은 다음으로 미루는 겁니다. 병원에 갈 일이 있습니까? 몸이 아프십니까? 진단하고 싶습니까? 다음으로 미루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는 한 6년 정도, 아파야 병원에 가지 좀처럼 안갑니다. 어지간히 해서는 진단해 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안합니다. 몇 달을 아파도 안갑니다. 그러나 남의 아픈 일은 제가 빨리 갑니다. 간다고 낫겠습니까?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낫는 거지,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낫는 거지 간다고 낫는 겁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한 단계 늦춥니다. 속도를 늦춥니다. 다음으로 미룹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모두 빠른 손길로 움직입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밀이 이 안에 있습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백배, 천배로 크게 돌아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왜 탕감해 줍니까? 내가 탕감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긍휼을 베풉니까? 내가 긍휼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용서를 해 주십니까? 내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의젓한 것입니다.
양반 이야기 하나 해도 됩니까? 이것은 좀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양반하면 어디입니까? 안동입니다. 전주도 양반이고, 진주도 양반이고, 강릉도 양반이고, 물론 양반이 많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양반이라고 하면 안동입니다. 양반문화에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가 공경, 어른을 공경하는 겁니다. 예의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체면입니다. 늘 예를 갖추는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예를 갖추는 겁니다. 인사도 정중히 하고. 세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접대하는 겁니다. 우리 먹을 것이 없어도 같이 먹자고, 오시라고 그러고, 주무시고 가라고 그러고, 인간관계에서 손님을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없지만 최선을 다 해서 대접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영향을 받았다 아닙니까? 우리교회 오시는 모든 분들에게는 어떤 분에게든지 개척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늘 도와 줬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음식대접 했습니다. 이게 다 돌아오는 겁니다. 서로가 다 좋은 겁니다. 이해해주고 예를 갖추는 겁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겁니다. 할렐루야!
사람의 성공이 자기 혼자의 성공은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행복, 자기 혼자 잘해서 행복, 그런 일이 없습니다. 행복도 무수히 도움을 받아야 되고, 성공도 무수한 사람이 도와줘야 됩니다. 푸른 나무는 전부 땅이 영양분을 흡수해 주고, 뿌리가 역할을 해 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햇빛을 다 비추어야 잎이 살아갑니다. 우리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은혜를 받고,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나오는 동안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해 주니까 이 교회가 활짝 피어나는 것이지, 혼자 하라고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나 혼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모든 분들이, 수만 명이 이렇게 해 주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오는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도와주신 행복입니다.
제가 1970년부터 80년까지 미사리에서 목회를 했지 않습니까? 한강 가에서. 여름이 되면 시간만 있으면 애들이 한강에 가서 목욕을 합니다. 6살 난 하나 목사가 한강에 가서 목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애가 거기서 물에 빠진 겁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세 번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군에서 휴가 온 청년이, 지금 구산이라는 느티나무가 아직도 있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옛날 애인 생각을 하고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무엇이 하나가 물에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하는 겁니다. 보니까 애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옷 입은 그대로 들어 가서 애를 건져서 우리 집에 데리고 온 겁니다. 우리 마을에 있는 청년입니다. 여러분! 내 힘으로 하나를 건졌습니까? 누군가 도와줘서, 다 이런 긍휼과 누군가 사랑을 베풀어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인데, 오늘 우리사회는 나 혼자 성공하겠다라는 겁니다. 나 혼자 행복하겠다라는 겁니다. 모두 남을 향하여 증오하고, 미워하고, 원수 맺고, 그러니 이 세상이 너도 안 되고, 다 안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친구를 만들어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서로 서로 모든 사람을, 이웃을 가장 가까운 식구같이 만들어서 도와주고, 체면문화를 살려서 예를 갖추고, 서로 대접하는 문화를 만들어서 “오늘 저녁에 국 끓이니까 너무 맛있습니다. 저녁하지 말고 같이 먹읍시다.” 부르기는 부를 지언정 오늘 저녁같이 먹자고 가지는 말고, 이렇게 모두 체면문화, 대접문화를 살려서 함께 더불어 살고, 찌개 하나도 끓이면, 된장 하나도 끓이면 한번 먹어보라고 나눠주고, 이렇게 모두 사랑해야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고, 좋은 교회가 되고, 이 민족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의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마 18:21-3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본문의 첫 절인 21절에는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물음이 나오고, 22-35절까지 전체 속에는 예수님의 답변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을 다시 보면 22절은 21절에서의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일차적 답변이고, 23-34절은 그 답변의 의미를 설명하시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며, 마지막 35절은 오늘 본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적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먼저 여쭈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가 모범답안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그냥 어쩌다 나온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잘못에 대해서 세 번까지는 용서할 필요가 있다는 랍비들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앞서서 용서의 중요성을 배운 베드로는 자기 깐에는 랍비들의 생각보다 두 배를 생각했고 거기다 조금 더 보태서 완전수인 일곱 번을 채워가지고 이 정도면 최대한으로 용서하는 것이겠지 여기며 예수님으로부터 그 확인을 받고자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베드로의 기대와는 너무나 큰 격차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할지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490번이 됩니다. 번역자에 따라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한 사람을 그것도 같은 잘못에 대하여 490번이든 일흔일곱 번이든 거듭 용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용서의 한계를 정확한 횟수로 정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에는 한계가 없음을 말씀하시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끝까지 용서해야 함을 가르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변이 베드로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뿐 아니라 그와 나머지 제자들을 당혹케 할 것을 아시고는 당신이 답변하신 말씀의 뜻을 그들에게 이해시키시기 위하여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유를 요약하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가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갇히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왕 혹은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이라 하는 자들은 모두 우리 인간들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는 자들을 말하는 것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달란트와 데나리온이란 화폐단위에 관해서 알아두어야 합니다.
달란트는 로마제국 내에서 알려진 최고액의 화폐단위였습니다. 그리고 만이라는 숫자는 헬라어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숫자단위였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큰 숫자단위만큼의 가장 큰 화폐단위인 만 달란트는 오늘날 화폐가치로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입니다. 아마도 만 달란트라는 것은 그 당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액수를 가리키는 것이고 거의 무한대의 금액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속에서 만 달란트가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보아야 합니다.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크나큰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그의 종의 간청을 듣고는 아무 조건도 주저함도 없이 용서했습니다. 27절에 보면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순수한 용서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인인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반면 데나리온이란 로마의 은전으로서 한 보통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달란트와 데나리온 사이의 비율에 관해서는 정확한 환산기준을 알 수 없고 이에 관한 견해의 차가 대단히 큽니다. 한 달란트는 최소 60데나리온에서 최대 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만 달란트와 100데나리온의 비율은 최소 6000배에서 최대 100만 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비유 속에서의 악한 종은 최소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6000만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겨우 만원 빚진 사람을 옥에 갇히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대한의 비율로 말하자면 자기는 100억원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단돈 만원 빚진 동료를 옥에 갇히게 만든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악한 종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시려고 의도하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에 비해 우리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용서하는 것은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작은 용서 하나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32-35절에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라고 가르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도의 가르침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맞지 않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하시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을 먼저 앞세우고 그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라 가르치신 데에는 보다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말씀이 그 뜻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즉 나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 죄를 용서 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내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사람은 자신도 이미 남의 죄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함을 예수님께서는 앞서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단지 용서의 양적 한도에 관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용서의 깊은 의미와 그 근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이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의 무제한성을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 받은 자에게 있어서의 용서의 당위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토록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우리에게 잘못하는 형제자매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할 터인데 배은망덕하여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종이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렇게 용서하지 못하는 자가 받을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 심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에서 배제된 자라는 심판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악한 종"이라는 질책을 들을 일들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불쌍히 여기심과 모든 죄의 용서를 받고도 우리의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험하게 다루며 정죄하고 심판하기를 즐기지는 않는지? 우리는 간음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야기(요8:3-11)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5)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자 슬며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뿐 아니라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돌팔매질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까?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질러댔고,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봐 여론에 밀려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막15:15)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군상들의 행태가 오늘날 우리 자신의 모습은 아닌지?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 자신을 통렬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며 삶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를 입고 사는 우리들이라면 하나님을 향해서는 아무리 해도 갚을 수 없는 그 용서의 빚을 사람들을 향하여는 일생을 통해 갚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용서의 삶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은 언제나 용서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도 크나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상담전문가들이 종종 발견하는 것은 모든 종류의 개인적 문제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 용서하려고 하지 않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미국의 의학계의 견해에 따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건강에 제일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병원마다 그 안에 "용서"센터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합니다. 잘 알려진 미국의 주간지 "Time" 최근호에 따르면 어느 교수가 25년간 두 종류의 사람들을 비교 연구했는데, 늘 고민을 안고 살고 항상 불평을 일삼으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보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고 매사를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평균 7년 반 수명이 더 길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의 건강에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물론 용서를 악용하거나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용서를 앞세우며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려 하지는 않고 끊임없이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일을 자행합니다. 그래 놓고는 공동체가 도저히 그냥 놔둘 수 없어서 어떤 조치를 취하면 그들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남이 해야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고함칠 말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건덕과 질서유지를 위해서 어떤 잘못은 무조건 덮어두지 않고 제재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가공동체의 안보를 위해 당연한 법적 조치나 교회의 건덕상 필요한 치리의 문제를 개인적 용서의 문제와 마구 뒤섞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말에 현혹되고 휘둘리는 어리석은 군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어떤 선결행위가 없어도 먼저 행할 때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할 때 더 아름답습니다. 용서는 마음으로 하고 끝까지 할 때 참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나님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간구하심으로써 그 온전한 용서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라면 마땅히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고 우리의 완악해진 심령들을 쪼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다면 그 사실에 대해 통회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합시다. 용서할 줄 아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